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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툼누스와 포모나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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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툼누스와 포모나  


하마드리아스는 숲의 님프들이었다. 이들 님프 중의 하나였던 포모나는 정원을 사랑하고 과실을 가꾸는 데 있어서 따를 자가 없었다.

그녀는 숲이나 강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직 잘 경작된 토지와 감미로운 열매가 열리는 과수만을 좋아했다. 그녀의 오른손엔 언제나 투창 같은 무기가 아닌 가지치는 칼이 들려 있었다.

이 칼로 어떤 때는 너무 자라 보기 싫은 나무나 삐져 나온 가지를 잘랐다. 그리고 또 어떤 때는 가지를 쪼개서 그 사이에 다른 가지를 접붙이는 일로 늘 분주하게 지냈다. 또 애지중지하는 나무들이 가뭄을 타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나무뿌리 근처까지 물길을 터 주어 목마른 뿌리를 적셔주었다.

이러한 일들은 그녀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온 정열을 다 쏟았으며, 아프로디테가 부추기는 연애 따위엔 조금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또한 사람들을 경계하여 자기의 과수원 입구에 항상 자물쇠를 채워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많은 피우누스(들의 신)들이나 사티로스(숲의 신)들은 포모나를 차지할 수만 있다면 자기들이 가진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이에 비해 젊어 보이는 실바누스 노인도, 머리에 솔잎 관을 쓴 판 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중에서도 계절의 신 베르툼누스가 그녀를 가장 열렬히 사랑했다. 하지만 그 또한 다른 신과 마찬가지로 그녀의 마음을 얻는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추수하는 농부의 모습으로 변신한 그는 몇 번이나 포모나를 찾아가 바구니에 곡식을 가득 담아주곤 했다. 이마에 건초를 질끈 동여맨 그의 모습은 방금 까지 풀을 뽑다온 영락없는 농부의 모습 그대로였다. 때로는 소를 모는 막대기를 손에 쥐고 나타나기도 했는데 그때도 마찬가지로 방금 피곤한 소의 멍에를 벗긴 다음 달려온 목동 모습 그대로였다. 또한 전지 가위를 들고 다니며 과수원지기 흉내를 내는가 하면, 사다리를 어깨에 메고 사과 따러 가는 사람 흉내를 내기도 했다. 또한 갓 제대한 군인처럼 절도 있게 뚜벅뚜벅 걸어가는가 하면 마치 고기를 잡으러 가는 사람처럼 낚싯대를 손에 들고 있기도 했다. 그는 이와 같이 하여 여러 차례 포모나에게 자연스럽게 접근할 기회를 마련했고, 그녀를 봄으로써 그의 정열은 더욱더 타올랐다.

"참, 훌륭한 과일이군요, 아가씨."

그리고 그는 포모나에게 키스하였다. 그 입맞춤은 노파에게는 어울리진 않을 만큼 강렬했다.

노파는 과수원 둑에 앉아, 머리 위에 주렁주렁 열린 과일나무를 올려다보았다. 또 맞은편에는 느릅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터질 듯한 포도송이가 달린 포도덩굴이 엉켜 있었다. 노파는 느릅나무에도, 또 거기에 뒤 엉켜 있는 포도덩굴에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이처럼 포도덩굴이 엉켜있지 않고 느릅나무 혼자만 우뚝 서 있다면 그것은 아무 매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쓸데없는 잎사귀이외에는 우리가 거둘 것이 없을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포도덩굴 또한 느릅나무에 의지하지 못한다면 땅바닥에 엎드려 있게 될 것입니다. 아가씨, 이 느릅나무와 포도나무로부터 교훈을 얻는 것이 없으십니까? 그리고 배필을 찾을 생각은 없나요?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는데요. 헬레네도, 영리한 오디세우스의 아내 페넬로페도 당신처럼 많은 구혼자는 없었습니다. 아가씨가 아무리 그들을 냉담하게 대해도 여전히 아가씨를 사모한답니다. 전원의 신들이 그렇고, 이 산에 자주 나타나는 모든 신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아가씨가 신중을 기하여 좋은 배필을 구하고 싶다면 저의 말을 듣도록 하십시오. 제 말을 믿고 다른 자들은 다 물리치고 베르툼누스를 받아들이세요. 내가 그를 잘 아는 만큼 그도 나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신이 아니라 바로 저 산에 살고 있습니다. 또 그는 여자라면 보는 대로 반해버리고 마는 요즘 사람들하고는 다르답니다. 그는 오직 아가씨만을 사랑하고 있으니까요. 또한 그는 젊은 미남이에요. 그리고 어떤 자태든 원하는 대로 변할 수 있는 둔갑술을 지니고 있으므로, 아가씨가 명령하는 대로 모습을 바꿀 수 있을 거예요. 게다가 또 그는 아가씨와 같은 취미를 가지고 있어서 원예를 즐기고 놀랄 정도로 사과나무를 훌륭하게 가꿀 줄 안답니다. 그러나 지금은 과일이나 꽃 등 어떤 것도 염두에 두지 않고 오직 아가씨만을 생각하고 있답니다. 그를 불쌍히 여기십시오. 그리고 그가 지금 내 입을 빌려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상상하십시오. 신들은 잔인한 자를 벌주며, 아프로디테는 무정한 자를 미워하므로 아가씨가 만약 그를 쌀쌀 맞게 물리쳤다는 것을 아시면, 조만간 벌이 내릴지도 모릅니다. 그 증거로 키프로스 섬에서 실제로 일어난 유명한 이야기를 들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좀더 마음이 너그러워지기를 바랍니다.

이피그스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청년이었는데, 어느 날 유서 깊은 테우크로스 집안의 아낙사레테라는 처녀를 보고 그만 한눈에 반해 버렸습니다. 청년은 그 열정을 지우기 위해 오랜 시간 애썼으나 도저히 체념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애원이라도 해보자는 심정으로 처녀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를 조롱하며 비웃었을 뿐만 아니라 무정한 태도와 무정한 말로 대했습니다. 그녀는 그에게 일말의 희망조차 남기지 않았습니다. 희망 없는 사랑의 괴로움을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이피그스는 그녀의 집 대문 앞에 서서 마지막 말을 꺼냈습니다.

"아낙사레테여 , 당신이 이겼습니다. 이제부터는 내가 당신을 귀찮게 하는 일 따위는 없을 것입니다. 당신의 승리를 즐기십시오! 기쁨의 노래를 부르십시오. 그리고 이마에 월계관을 두르십시오. 당신이 이겼으니까요. 나는 죽을 것입니다. 돌과 같이 무정한 마음이여, 기뻐하십시오. 당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적어도 그것만은 할 수 있습니다. 죽음으로써 당신이 나를 칭찬하게 만들겠습니다. 내게 생명이 있는 한 당신을 사랑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하지만 나의 죽음을 당신에게 풍문으로만 들리게 하진 않겠습니다. 나는 당신의 눈앞에서 죽을 것이니까요. 그리하여 그 모습을 지켜보는 당신의 눈을 즐겁게 하렵니다. 그러나 인간의 비애를 내려다보시는 신들이여, 제 운명을 지켜봐 주십시오. 저의 단 한가지 소원은, 후대에 이르기까지 제 이름이 사람들의 기억에 남게 하는 것입니다. 운명대로 살지 못하고 죽는 몸이 오니 죽은 후에 이름이라도 길이 남게 해주세요.'

말을 마친 이피그스는 창백한 얼굴과 눈물어린 눈을 들어 처녀의 저택을 바라보곤 이제까지 여러 차례 화환을 걸었던 대문 기둥에다 끈을 묶고 목을 밀어 넣은 다음 중얼거렸습니다.

'적어도 이 화환만은 당신의 마음에 들것이오, 무정한 여인이여!'

그리고 발판에서 발을 떼니 목뼈가 부러지면서 청년은 죽었습니다. 그의 몸이 쓰러질 때 문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는데, 그것은 신음 소리와 비슷했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달려나온 하인들이 그가 죽은 것을 발견했습니다. 모두들 불쌍하다고 탄식을 하며 청년의 시체를 어머니에게로 운반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이미 오래 전에 죽고 없었습니다. 아들의 시체를 넘겨받은 어머니는 싸늘하게 식은 몸을 껴안고 아들을 잃은 이 세상 모든 어머니들이 그렇듯 비통해 했습니다. 슬픈 장례 행렬이 거리를 지났습니다. 창백한 유해는 관 위에 실려 화장터로 운반되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아낙사레테의 집은 장례 행렬이 지나가는 거리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장례식에 모인 사람들의 통곡소리가 이미 복수의 여신이 벌을 주려고 예정해놓은 그녀의 귀에 들렸습니다.

"우리도 장례 행렬을 구경하자.'

그녀는 이렇게 말하며 탑 위에 올라가, 열린 창문을 통해 장례 행렬을 내려다보았습니다. 그녀의 시선이 상여 위에 가로놓인 이피그스의 유체에 멈춘 순간 그녀의 눈은 굳어졌고, 몸 속에 흐르던 피는 차갑게 식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처녀의 온 몸도 그녀의 마음과 다름없이 단단하게 굳어 돌이 되었습니다.

만일 이 이야기가 믿어지지 않으시면, 실라미스에 있는 아프로디테 신전에 가보십시오. 아직도 그 처녀의 생전 모습 그대로 굳어버린 석상이 있을 테니까요. 아가씨도 이런 옛일을 생각하여 사랑을 비웃고 주저하는 마음을 버리십시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렇게 하면 봄 서리가 아가씨의 젊은 열매를 시들게 하는 일도 없을 것이고, 사나운 바람이 당신의 꽃잎을 떨어뜨리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긴 이야기를 마친 베르툼누스는 비로소 노파로 변장한 모습을 풀고 본래의 아름다운 청년의 모습으로 돌아가 포모나 앞에 섰다. 그 자태는 구름을 뚫고 빛나는 태양과 같았다. 그는 다시 한번 사랑을 애원하려고 했으나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의 이야기와 그 아름다운 모습이 이미 그녀를 제압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님프 포모나는 저항하지 않았다. 그녀의 가슴에도 뜨거운 사랑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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