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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청도의성(夜聽도衣聲)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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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청도의성(夜聽도衣聲)

 

가을 하늘에 달빛 비쳐 은하수 밝은 밤

나그네는 돌아갈 생각에 감회가 새로워라

긴 밤을 앉았노라니 수심에 애가 타는데

홀연 들려오는 이웃집 아낙네의 다듬이 소리

끊어질 듯 이어지며 바람결에 실려와

별이 기울도록 잠시도 쉬지 않는군

고국 떠난 뒤 듣지를 못했더니

타향에서 듣는 이 소리, 고향의 소리

그 방망이 무거운지 가벼운지

그 다듬잇돌 평평한지 아니한지

멀리서 가녀린 몸에 땀 흘리고 있겠지

밤 늦도록 고운 팔을 지치도록 두드리리

길 떠난 내 홑옷 걱정되어 옷 다듬겠지만

당신 방 안 차지 않을까 나 먼저 근심되오

당신 모습 가물거려 생각 잘 나지 않는구려

멀리서 무단히 원망이나 않을런지

이국 땅에 붙어 사니 새로 사귄 친구 없고

한 마음 부인 생각에 탄식만 나와라

지금 홀로 방안에서 다듬이 소리 들으니

이 밤 눈가에 눈물 고임을 그 누가 알리

그립고 그리워서 마음이 매달린 듯한데

저 소리 또 들려 갑갑한 마음 뚫을 길 없어라

꿈속에서 다듬이 소리 따라가려 하지만

수심 많아 잠조차 이루지 못 하오

서리 내린 하늘에 달이 비치고 은하수가 밝아

나그네는 돌아갈 생각으로 마음이 간절하구나.

긴 밤을 앉아 있는 것이 지루해 근심도 사라지고 하는데

어디선가 홀연히 이웃 여인의 다듬이 소리가 들려오네.

소리는 끊어질 듯 이어지고 바람 따라 이르러서

밤이 깊어 별이 낮아지도록 잠시도 멈추지 않네.

고국을 떠난 후로 들어보지 못했는데

지금 타향에서도 들려오는 저 소리는 비슷하구나.

그대 든 방망이는 무거운가 가벼운가

푸른 다듬이돌 고른가 거친가

약한 몸이 온통 구슬땀에 젖었으리

옥 같은 두 팔도 힘이 부쳐 지쳤으리

홀옷으로 떠난 임을 구하고자 함인가

규방에 외로이 있는 시름 잊자 함인가

그대 모습 그려 보나 물어 볼 도리 없고

부질없는 먼 원망만 끝없이 깊어 가네

먼 이국 땅 낯선 고장에서

그대 생각하노라 긴 탄식만 하네

이런 때 들려 오는 규방의 다듬이 소리

그 누가 알랴, 시름 깊은 저 설움을

그리운 생각에 마음 높이 달렸건만

듣고 또 들어도 뚫어 알 길이 없네

꿈 속에서라도 저 소리 찾아보려 하지만

나그네 수심 많아 잠도 이루지 못한다네.

요점 정리

작자 : 양태사(楊泰師)

갈래 : 한시(칠언배율)

연대 : 발해국 문왕 23년(759)

성격 : 서정적, 애상적

구성 : 24행의 칠언배율

1~2행 - 가을밤 나그네의 쓸쓸함

3~8행 - 다듬이 소리를 듣고 고국을 생각함

9~16행 - 다듬이질을 하는 여인의 모습과 심정을 상상함

17~24행 - 다듬이 소리를 듣고 수심에 잠기는 나그네

표현 : 직서법

제재 : 타국에서 듣는 다듬이 소리

주제 : 향수. 타국에서 가을 달밤에 고국을 그리워함

의의

(1) 발해의 시인이 남긴 작품 중에서 가장 장편이고 정감이 특히 풍부함

(2) 발해 시대의 문학 이해의 자료

(3) 당시 시대 상황(외교 활동의 빈번함)의 추리 근거

출전 : 경국집[일본왕(809~823) 시대에 만들어진 한시집, 발해국 시인들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내용 연구

상천월조 : 서리 내리는 가을밤 달빛이 밝게 비치다.[시간적 배경]

야하명 : 밤 하늘에 은하수가 밝다. '야하'는 은하수

객자 : 나그네 '자'는 접미사 / 시적 화자는 자신을 나그네로 표현했고 작품 전체의 핵심적인 정서는 객수, 향수임

사귀 :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

별유정 : 남다른 느낌이 있다.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특히 더하다.

염좌장소 : 긴 밤을 앉아 있기 싫증나다. 장소는 긴 밤.

수욕사 : 시름이 사라지다, 근심하는 마음도 없어지다.

흘문 : 문득 어떤 소리가 흘연히 들리다

인녀 : 이웃 여인

도의성 : 다듬이 소리(원형적 이미지로는 그리움) /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심화시키는 매개체, 청각적 이미지

성래 단속 : 소리가 끊어졌다 이어져 들려 오다

인풍지 : 바람[다듬이 소리를 전해주는 매개체]에 따라 이르다

야구성저 : 밤이 오래되어 별이 낮다

무잠지 : 잠시도 멈추지 않다

자종 : ~ 로부터

자종별국 : 고국을 떠난 이후로

불상문 : 들어보지 못하다[일본에서는 다듬이질을 하는 풍속이 없기 때문에]

금재 타향 : 이제 타향에서 있다. '재'는 여기서는 들리다의 뜻, 여기서는 일본을 이름.

청상사 : (고국에서 듣던 소리와) 서로 비슷한 소리가 들리다.

그대 방망이는 ~ 지쳤으리 : 다듬이질을 하는 여인의 모습을 상상함

홑옷으로 떠난 ~ 시름 잊고자 함인가 : 여인의 마음을 추측함

그대 모습 ~ 깊어 가네 : 다듬이질을 하는 여인을 상상하지만 그 여인이 어떠한 상황인지를 알 수도 없고 알더라도 위로해 줄 방법이 없어 상심하고 있다.

먼 이국 땅 ~ 긴 탄식만 하네 : 이국땅에서 쓸쓸히 살아가는 자신의 상황에 대한 원망감. 먼 이국땅은 시적 화자가 있는 공간

시름 깊은 저 설움을 : 여인이 품고 있을 설움 곧 화자의 설움과 동일시함. 동병상련의 처지

꿈 속에서라도 ~ 잠도 이루지 못한다네 : 시름을 잊고 꿈 속에서라도 여인을 만나 서로를 위로하고,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잠이 들지 않는 화자의 괴로운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이해와 감상

 

발해의 시인 양태사(楊泰師)가 지은 한시. 양태사는 발해 문왕 때 귀덕장군(歸德將軍)으로 시에 능하였다. 759년(문왕 23)에 일본에 부사(副使)로 갔다가 송별연에서 〈밤에 다듬이 소리를 듣는다 夜聽棘衣聲〉는 시를 지어 읊었다 한다. 일본에서 편찬한 한시집 ≪경국집 經國集≫에 전한다.

모두 24행으로 된 칠언배율인데, 기록이 부실해서 뒷 부분은 표기가 혼란되어 있다. 어느 가을밤에 고국으로 돌아올 생각을 하고 있는데, 홀연 이웃에서 여인네가 다듬이질하는 소리가 들렸다는 것으로 서두를 삼았다.

다듬이질 소리에 실려 온갖 상념이 떠오른다고 하면서, 그 여인은 누구이며 왜 밤늦도록 다듬이질을 하는가 생각해보았다. 다듬잇방망이가 무거운가, 다듬잇돌이 평평한가 궁금하게 여기다가, 연약한 몸으로 향그러운 땀을 흘리며 일하는 여인의 모습을 상상해보기도 하였다.

다듬이질은 일본에는 없는 풍속이다. 그 여인은 반드시 발해 사람은 아니라도 동족 이주민일 터이므로, 다듬이질하는 소리를 듣고 친근감을 느끼고 고국을 생각하였다. 발해 시인이 남긴 시 중에서 가장 장편이고, 정감이 특히 풍부하다. [출처 : 한국문학통사 2(조동일, 지식산업사, 1983).]

이해와 감상1

양태사는 발해 제 3 대 문왕 때(737~793)의 귀덕 장군. 무인이면서도 시를 잘 지었다. 작가가 발해국의 부사로 일본에 건너갔다가 임무를 마치고 귀국할 즈음에 다듬이 소리를 듣고 고국을 그리워하며 지은 시 두 편중의 하나인데, 양태사는 발해국 3대 문왕 때 귀덕 장군으로 무인이었는데도 시를 잘 지었다. 759년 부사(정사)를 보좌하여 수행하는 사신 자격으로 일본에 갔다가 송별연에서 일본 문인들의 시에 화창했다는 시 두 편을 남겼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야청도의성'이다.

이 시의 시간적 배경은 시인이 사신의 임무를 마치고 귀국할 시기가 가까운 어느 날 밤으로 설정되어 있다. 시인을 창 밖을 보며 고국 생각을 곁들인 시름에 잠겼다가 시름마저 되씹기 지루해졌을 때 홀연 어디선가 들려오는 다듬이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다듬이질은 일본에서 없는 풍속이어서 시인은 그 소리가 듣자 고국 생각이 간절해지고 온갖 상념에 빠지게 된다. 다듬이 소리가 끊어질 듯 이어지면서 바람을 따라 들려 오고, 타국에 가서 밤을 지새우는 시인에게 더욱 깊은 상념을 전해주고 있다.

이해와 감상2

양태사(楊泰師)가 발해국의 부사로 일본에 건너갔다가 임무를 마치고 귀국할 즈음에 다듬이 소리를 듣고 고국을 그리워하며 지은 시 두 편 중의 하나이다. 양태사의 이 작품은 스물넉 줄로 된 칠언고시(七言古詩)인데, 의례적인 수사법을 버리고 내면의 세계를 표현하여 감동을 자아내게 한다. 이 시는 특히 청각적 심상이 주제로 승화되는 고도의 표현 기법을 구사했다. 서리 내리고 은하수도 밝은, 가을이 깊은 이국(異國)의 밤에 홀연 어디선가 다듬이 소리가 들린다. 다듬이질은 일본에는 없는 풍속으로, 이는 분명히 고국의 여인이 향수를 달래려고 내는 애련한 소리일 것이다. 그 소리는 끊어질 듯 새벽까지 이어져 여인의 모습까지 상상하도록 유도한다. 이 시에서의 다듬이 소리는 아름다운 선율의 소리로서 여인과 청자의 거리를 좁혀 주고 작자의 격렬한 시름과 탄식을 교차하게 한다. 동시에, 그만큼 조국 발해에 대한 그리움의 정도 깊어진다.

이해와 감상3

발해는 당나라에서 '해동 성국'이라 일컬을 정도로 번영을 누리면서 당나라와 교류하는 한편, 일본과도 접촉이 잦았다. 당시 부사(副使) 자젹으로 일본에 갔던 양태사는 송별연(送別宴)을 맞게 된다. 일본 문인들의 시에 화답(和答)하는 자리에서 문득 그 어느 날 밤 잠 못 이루던 때에 느꼈던 향수를 한 편의 시로 내놓는다.

심화 자료

발해의 시인

양태사 : 발해국 제 3대 문왕 때 귀덕 장군이었다. 무인이면서도 시에 능했다. 문왕 23년에 부사의 자격으로 일본에 갔다 오기도 했다. 그리고 그의 대표적인 작품은 '야청도의성'은 일본에서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원유 : 9세기 전반에 당나라에서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라 말년에는 이부상서를 지냈다. '전당시'에 칠언시가 두 줄만 실려 있다.

왕효렴 : 제 8대 희왕 때 벼슬이 태수였으며, 814년(희왕2년) 9월에 정사로 일본에 상륙, 12월에 국서를 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왕효렴의 시는 일본 자료에 5편이 남아 있다.

인정 : 승려의 신분으로 왕효렴이 일본에 갈 때 녹사의 임무를 맡았다. 시 한 편이 남아 있다.

정소 : 승려로, 당나라에 있을 때, 일본 승려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 한 편을 남겼다.

배정 : 일본에서 지은 시 한 구절이 전한다.

배구 : 작품은 남아 있지 않지만 그에게 일본인들의 시와 글은 여러 편 전한다. 일본인들은 그의 시가 놀랍고 예의 준엄하여 생각이 깊다고 했다.

발해(渤海)

 

698년부터 926년까지 존속했던 왕조국가. 남쪽의 신라와 함께 남북국시대를 이루었다.

 

건국과 성쇠

〔건 국〕

고구려가 멸망한 지 30년 가까이 지난 696년에 요서 지방(遼西地方)에서 거란족 이진충(李盡忠)의 난이 일어났다. 이 난은 발해의 건국에 절호의 기회로 작용했는데, 이는 당제국 내에서 당시 요서의 영주(營州 : 지금의 朝陽)가 지니고 있었던 군사·외교상의 지정학적 가치가 높았던 데 기인한다 하겠다.

요서는 일찍이 중국 전국시대 연(燕)나라 장수 진개(秦開)가 개척한 이후, 동북과 서북에서 남하하는 비한족(非漢族) 세력을 막는 군사적·외교적 요충지였다.

그리고 고구려의 팽창정책에 밀려, 송화강 유역에 거주하던 속말말갈(粟末靺鞨)의 추장 돌지계(突地稽)가 무리를 이끌고 들어와 수에서 당에 이르는 시기 동안 보호를 받았던 곳도 바로 요서군 내의 영주였다.

당나라는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그 지배집단을 강제로 분산시켜 세력을 거세하는, 이른바 사민정책(徙民政策)을 강행하였다. 그 과정에서 이 영주에도 고구려 유민의 일부를 강제로 이주시켰다. 이것은 역대 한족 국가에서의 전례나 지리적인 위치로 보아 당연한 일이었다.

이 무렵 투르크(Turk)족의 돌궐(突厥)은 고비(Gobi)사막 남쪽에서 세력을 떨치고 동남으로 세력을 뻗치려 하고 있었다. 한편 거란족은 동쪽의 고구려 세력에 시달리며 시라무렌(Sira muren) 유역을 방황하던 중 고종 이후 영주 부근에서 당나라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거란족 추장 이진충은 당나라로부터 송막도호(松漠都護)로, 손만영(孫萬榮)은 귀성주자사(歸誠州刺史)의 직함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영주도독(營州都督) 조홰(趙窯)의 잔인함과 거란족에 대한 지나친 우월감에 반발해, 696년 5월 그를 죽인 뒤 무리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 해 10월 이진충이 죽자, 손만영은 무리를 이끌고 이듬 해 3월 하북(河北)의 영평(永平) 부근에서 왕효걸(王孝傑)이 지휘하는 당군을 무찔렀다. 그리고 그 기세를 몰아 유주(幽州 : 지금의 北京)까지 공격하였다.

이 반란은 당나라가 돌궐의 힘을 빌려서야 발발 1년 만에 겨우 수습할 수 있었다. 당시 영주 부근에서 당나라의 보호와 감시를 받고 있던 이민족에게 이 난이 끼친 영향은 매우 컸다. 약소부족의 주체의식을 깨우쳐 주었던 것이다.

고구려 출신인 걸걸중상(乞乞仲象)이 말갈족의 지도자 걸사비우(乞四比羽)와 더불어 무리를 이끌고 당나라에 반기를 들게 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들은 일시적으로 거란족의 반란에 동조까지 하던 세력으로, 영주를 탈출한 뒤 요하(遼河)를 건너 요동 지방에서 세력을 키우기 시작하였다.

반란 초기에 측천무후는 걸걸중상을 진국공(震國公), 걸사비우를 허국공(許國公)에 봉하고 그 죄를 용서하는 등의 회유책을 썼다. 그러나 회유책이 실패하자, 거란족 출신인 이해고(李楷固)를 당군의 지휘관으로 삼아 그들을 공격하게 하였다.

이해고의 당군은 먼저 걸사비우를 참살하였다. 그리고 걸걸중상이 죽자 그 뒤를 이은 대조영(大祚榮)을 공격하였다. 이 때 대조영은 통솔자를 잃은 걸사비우의 말갈병까지도 흡수한 뒤 천문령(天門嶺)을 넘어 피신하였다.

천문령은 휘발하(輝發河)와 혼하(渾河)의 분수령을 이루는 장령자(長嶺子) 부근이었다. 대조영은 이 곳을 넘어 추격해 오는 당나라 군대에 반격을 가해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그리고 지금의 길림성(吉林省) 돈화시(敦化市)에 있는 성산자산성(城山子山城)으로 옮겨와 산성을 쌓았다. 이 곳이 바로 문헌에 나오는 동모산(東牟山)이다.

대조영은 여기서 698년 나라를 세워 스스로 진국왕(振國王)을 자처하였다. 마침 거란과 해족(奚族)이 당나라의 요서에까지 진출함으로써 당나라와의 통로가 막힌 것도 건국에 아주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하였다.

당나라는 이를 무력으로 저지할 여유가 없었으므로, 이미 기정사실화된 대조영의 건국을 무턱대고 적대시할 수만은 없었다. 이에 중종(中宗)이 복위한 705년 시어사(侍御史) 장행급(張行肱)을 보내어 화친을 요청하였다.

결국 양국간에 화해가 성립되면서 대조영의 둘째 아들 대문예(大門藝)가 당나라의 수도로 들어갔다. 당나라에서는 대조영을 곧 왕으로 책봉하려 하였다. 그러나 마침 거란과 돌궐의 침략이 잦아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713년 예종(睿宗) 때 뒷날 발해의 조공도(朝貢道)가 된 해로를 통해 홍려경(鴻豈卿) 최흔(崔誤)을 보내 대조영을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봉하였다. 이로부터 진국(振國) 대신 발해국이라 국명이 쓰이게 되었다.

이 때 대조영의 아들 대무예(大武藝)를 계루군왕(桂婁郡王)으로 봉하였다. 뒷날 대문예의 아들 대도리행(大都利行)에게도 계루군왕의 봉호를 이어받게 하였다. 이는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하고 있음을 당나라도 인정하고 있었다는 표시로 보인다. 계루란 말은 고구려 계루부의 명칭에서 유래한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발 전〕

대조영의 치적에 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그가 진국을 세우자 신라가 제5품 대아찬(大阿餐)의 벼슬을 주었다 한다. 또한 내몽고에서는 당나라의 요서군에까지 세력을 미치고 있던 돌궐의 추장 묵철(默輸)과 서로 통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대조영은 신라 및 돌궐과 가까이하면서 당나라와는 긴장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711년 묵철이 당과 화친을 맺고 그 뒤에 점차 세력이 와해되어 나가자, 당나라와 평화적 관계를 수립하는 방향으로 선회하였다.

이 무렵 발해의 영역은 동모산을 중심으로 한 돈화 일대에 불과하였다. 이를 훗날 구국(舊國)이라 불렀다. 719년(개원 7) 대조영(고왕)이 승하하고 맏아들 대무예(大武藝), 즉 무왕(武王)이 즉위하였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인안(仁安)이란 연호를 사용하고 국내외에 독립국가로서의 자세를 분명히 하였다. 또한, 영토를 확장하는 데에도 전력을 기울였다. 그의 시호가 무왕인 것도 생전에 무력정벌에 커다란 업적을 남겼음을 의미한다.

≪신당서≫ 발해전에 따르면, “무예가 즉위해 크게 영토를 개척하자, 동북의 여러 오랑캐가 두려워서 신하로 복속하였다.”고 전한다. 또한 727년에는 처음으로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무왕은 일본에 보내는 국서(國書)에 “욕되게 열국(列國) 사이에 끼여들고 외람되게 여러 번국(藩國)들을 결속시켜,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 부여의 풍속을 계승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이 무렵 발해가 고구려와 부여의 영역을 상당히 회복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한편 발해는 동북쪽의 흑수말갈(黑水靺鞨) 문제를 둘러싸고 당나라와 대립하였다. 이는 발해가 당의 종속국이 아니고 당당한 독립왕국으로서 자리를 굳히고 있음을 보여준다. 문제의 발단은 흑룡강 유역에 있던 흑수말갈이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면서 비롯되었다.

당 현종은 이들 지역을 당나라의 영토로 간주해 흑수주로 삼고 통치관인 장사(長史)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발해에서는 당나라의 이러한 조치가 강국의 감시를 받는 결과를 가져올 것으로 판단하였다.

이에 무왕은 726년에 아우 대문예 등을 시켜 흑수주를 무력으로 정벌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볼모로 당나라에 갔다가 개원(開元) 초기에 돌아온 대문예(大門藝)는, 무모한 흑수 토벌이 국세로 보아 자칫하면 자멸을 초래할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하였다.

그러나 무왕이 뜻을 꺾지 않자 대문예는 할 수 없이 흑수부로 진격을 개시하였다. 국경선에 이르러 그는 다시 한 번 토벌의 철회를 간하였다. 이에 노한 무왕은 종형인 대일하(大壹夏)를 보내어 군의 통솔을 대행시키고 대문예를 소환해 살해하려 하였다.

이에 대문예는 당나라로 망명해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의 벼슬까지 받았다. 그의 송환교섭을 둘러싸고 당나라와 발해 간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732년 무왕은 장군 장문휴(張文休)에게 산동반도의 등주(登州)를 공격하도록 명하였다. 그 결과 자사(刺史) 위준(韋俊)을 살해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이에 당나라는 대문예를 유주로 보내 군대를 징집해 발해를 치게 하였다. 그런 한편으로 대복원외경(大僕員外卿) 김사란(金思蘭)을 신라로 보내 733년(성덕왕 32)에 발해의 남쪽 국경지대를 공격하게 하였다.

그러나 신라 원병은 큰 추위와 눈을 만나 병사들이 반 이상이나 동사하면서 아무런 소득 없이 군대를 되돌렸다. 그 뒤로도 무왕은 자객을 보내 대문예를 죽이려 하는 등 간접적인 항쟁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사태가 더 확대되지는 않았다.

무왕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인 계루군왕 대흠무(大欽茂), 즉 문왕(文王)이 즉위하였다. 그는 왕이 되자마자 대흥(大興)으로 연호를 바꾸고, 774년에 보력(寶曆)으로 개원하였다. 무왕의 무력에 의존한 것과는 달리 문왕은 내치에 힘을 기울였다.

따라서 대외관계에서는 평화외교정책을 취하였다. 그는 당나라에 빈번히 사신을 파견해 화평과 함께 관무역의 이득을 꾀하였다. 이와 함께 동해의 해로를 통해 일본에도 자주 사신을 보냈다. 그리고 신라와도 본격적으로 교류를 하기 시작하였다. 신라와의 상설 교통로인 신라도(新羅道)는 대체로 그의 통치 전반기에 설치되었던 듯하다.

특히 문왕대에 특기할 사실은 잦은 천도이다. 대조영 이래로 발해의 수도였던 이른바 ‘구국’에서 현주(縣州)로 천도하였다. 그리고 756년 무렵에는 상경(上京)으로 천도한 뒤 다시 780년대 후반에 동경(東京)으로 천도하였다.

‘구국’에서 처음 천도한 중경(현주)은 두만강 하류로 흘러들어 가는 해란하(海蘭河) 강변에 위치한, 현재의 길림성 화룡현(和龍縣) 서고성(西古城)에 있었다. 발해시대에 이 지역은 ‘위성(位城)의 철(鐵)’, ‘노성(盧城)의 벼〔稻〕’ 등의 산출로 이름난 산업지대였다.

문왕이 중경에서 다시 천도해 온 상경은 목단강(牡丹江) 유역에 자리잡은, 지금의 흑룡강성 영안현 동경성 발해진(寧安縣東京城渤海鎭)이다. 이것은 국력신장 결과 흑수말갈의 위압에 대해 자신을 가지고 실시한 북방 천도라 보아도 무방할 듯싶다.

한편, 그 다음에 천도한 동경은 두만강 연안에 있는 길림성 훈춘시 팔련성(琿春市八連城)인 것이 판명되었다. 이 곳은 발해 사신이 일본으로 가는 출발지이기도 하였다. 이처럼 잦은 천도를 통해 문왕이 대내외적인 국가통치에 내실을 기하고자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문왕은 내부적으로 문치(文治)를 시행해 당나라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유학과 불교를 진작시켰다. 그리고 국력의 신장과 왕권강화에 힘을 기울였다. 이를 바탕으로 고려국(高麗國)을 표방하였다. 그리고 유신(維新)을 단행하는 한편, 불교의 전륜성왕(轉輪聖王) 이념을 채택하였다.

또한, 일본에 대해서도 스스로 천손(天孫)임을 표방하였다. 그래서 내부적으로 황상(皇上)이나 조(詔)와 같이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용어들을 쓰기도 하였다. 당나라가 762년 문왕을 발해군왕(渤海郡王)에서 발해국왕(渤海國王)으로 올려 책봉한 것은 비록 형식적인 것이나 발해의 충실한 국력신장을 반영한 것이다.

〔내 분〕

독립국가로서의 기틀을 완전히 굳힌 문왕이 승하하자, 왕위는 친척인 대원의(大元義)에게 이어졌다. 문왕의 장남 대굉림(大宏臨)이 아버지보다 먼저 죽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원의는 성격이 포악해 귀족들에게 시해되었다.

그 뒤 제5대 왕위를 계승한 것은 대굉림의 아들 대화여(大華璵), 즉 성왕(成王)이다. 성왕은 수도를 동경에서 상경으로 옮긴 뒤 곧 승하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793년에서 794년에 걸쳐 1년 간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성왕의 뒤를 계승해 제6대 왕으로 대흠무(大欽茂)의 어린 아들 대숭린(大嵩璘), 즉 강왕(康王)이 즉위하였다. 그는 정력(正曆)으로 건원하였다. 당에서는 795년 2월 대숭린을 발해군왕으로 낮추어 책봉하더니 다시 3년 뒤에 발해국왕으로 높여 책봉하였다.

이는 문왕 대흠무가 죽은 뒤 발해의 국세가 약해진 것을 당나라에서 감지한 결과로 보인다. 재위는 809년까지 15년 간이었다. 강왕의 뒤를 이어 왕위를 이어받은 것은 그의 아들 정왕(定王) 대원유(大元瑜)였다. 그는 영덕(永德)이란 연호를 사용하였다.

812년에는 다시 그의 아우 대언의(大言義)가 제8대 왕 희왕(僖王)이 되었다. 그는 817년 무렵까지 재위하였다. 제9대 왕으로 즉위한 희왕의 아우 대명충(大明忠), 즉 간왕(簡王)은 태시(太始)로 개원하였다. 그러나 즉위 직후인 818년에 승하하였다.

제10대 왕을 계승한 것이 대인수(大仁秀), 즉 선왕(宣王)이다. 이상과 같이 문왕이 사망한 뒤로부터 선왕이 즉위하기 전까지 25년 간 6명의 왕이 즉위했던 사실은 이 때가 내분이 잦았던 시기임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특히, 강왕이 즉위한 뒤에 스스로 “구차히 연명하다가 왕위에 오르니 신하들이 의로움에 감복해 뜻을 바꾸고 감정을 억제하였다.”고 한 것은 이러한 사정을 잘 보여 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융 성〕

818년 선왕이 즉위하자 내분이 진정되면서 발해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 들었다. 연호를 건흥(建興)으로 고쳤으며, 침체기를 벗어나 중흥을 이룩하였다. 선왕은 고왕 대조영의 아우인 대야발(大野勃)의 4세손으로, 이로부터 왕의 계보가 바뀌었다.

≪신당서≫ 발해전에는 선왕의 치적에 관해 “인수는 자못 해북(海北)의 여러 부족을 토벌해 크게 영토를 개척하였다.”고 찬양하였다. 이 때 발해는 흑룡강(黑龍江) 유역까지 경략한 것으로 보인다.

흑수말갈이 당나라 목종(穆宗) 이후 당에 대한 조공을 끊은 것은 선왕의 영토개척에 따라 그 통로가 끊겼거나, 아니면 발해국의 국력에 크게 위협받은 결과로 보인다. 또한 발해는 요동 지방과 신라 방면으로도 정복활동을 벌여 영토를 확장하였다.

그리고 ‘5경 15부(府) 62주(州)’의 지방 행정제도도 선왕대에 비로소 완비되었다. 처음에 ‘사방 2천리’였다는 영토가 이 무렵에 ‘사방 5천리’라고 한 것은 바로 선왕이 영토를 크게 개척한 전성기의 상황을 이르는 말이다.

830년 선왕이 승하하자, 아들 대신덕(大新德)이 일찍 죽은 탓에 손자 대이진(大彛震)이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그는 연호를 함화(咸和)로 바꾸었다. 그는 857년에 승하했으나 시호는 알 수 없다.

대이진을 이어 제12대왕으로는 그의 아우 대건황(大虔晃)이, 그리고 제13대왕으로는 대건황의 손자 대현석(大玄錫)이 즉위하였다. 선왕에서 비롯해 이 무렵에 이르는 시기가 발해의 최대 전성기였다.

이 때 당나라로부터 해동성국(海東盛國)이란 명예로운 칭호를 얻었다. 그러나 이 시기는 중국이 혼란기에 속해 있던 때라, 안타깝게도 발해의 융성했던 모습을 보여 주는 사료가 그 쪽에서도 제대로 전해지지 않는 현실이다.

심지어, 제11대 왕부터 마지막 왕까지의 시호도 전혀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리고 제13대 왕과 제14대 왕의 사망 연도조차 알 수 없다.

다만 897년 당나라 조정에서 신라와 쟁장사건(爭長事件)이 일어났을 때에, 국력의 우위를 들어 발해 사신이 신라보다 윗자리에 앉기를 요구했던 일이 있었다. 이것으로 미루어보아, 발해의 국력이 절정기에 달했음을 알 수 있다.

대현석왕에 이어 제14대 왕으로 그의 아들 대위해(大瑋易)가 즉위하였다. 이 왕의 재위사실은 김육불(金毓慮)이 ≪당회요 唐會要≫에서 찾아내 비로소 밝혀졌다. 대위해에 이어 마지막 왕인 대인선(大孚侖)에게 왕위가 이어졌다.

〔멸 망〕

10세기 전반 중국과 한반도가 혼란에 빠지면서 이를 틈타 성장을 거듭하고 있었던 것은 열하(熱河) 북쪽의 거란족이었다. 발해는 건국 초기부터 거란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발해가 건국된 것도 이진충의 난이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난이 평정되고 난 뒤에도 거란의 향배에 따라 관계가 수시로 바뀌었다. 거란은 당나라와 돌궐의 대결 틈바구니에서 그때그때 입장을 달리하였다.

720년 9월 당나라가 장월(張越)을 파견해 공동으로 해족과 거란을 치자고 제의한 바 있다. 그런 한편 732년에는 반대로 거란 가돌간(可突干)과 공모해 당나라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3년쯤 뒤에는 돌궐이 사신을 보내와 해족과 거란을 치자고 했지만, 오히려 돌궐 사신을 억류하고 이 사실을 당나라에 알렸다.

이후 거란과의 교섭 내용은 구체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신당서≫ 발해전에는 서쪽으로 거란과 접했고, 부여부(扶餘府)는 거란으로 가는 길목이면서 거란을 막기 위해 군대를 주둔시켜 두던 곳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이로 보아서 거란은 발해의 교섭대상국이면서도 대결관계에 있었다.

그러다가 10세기 초에 이르러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거란족의 숙원이었던 부족의 통합을 이루었다. 그리고 중국 본토 진출에 앞서 먼저 발해 경략에 나섰다.

925년 12월 야율아보기가 이끄는 거란군이 발해를 공격하였다. 이듬 해 정월에는 거란 방비의 최전선에 있던 부여성(扶餘城 : 현재의 農安)을 뚫고 수도인 상경용천부를 포위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정월 14일 대인선의 항복을 받아내었다. 이로써 고왕 대조영으로부터 15대 230년 간 이어져 오던 발해가 하루아침에 망국의 쓰라림을 겪게 되었다.

〔유민 활동〕

거란은 발해를 멸망시키고 그 자리에 ‘동쪽 거란국’이란 의미의 동단국(東丹國)을 세웠다. 그리고 거란 태조의 맏아들에게 통치를 맡겼다. 928년 동단국을 동평(東平 : 현재의 遼陽)으로 옮기면서 발해 유민들도 요동 지방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발해가 멸망한 후 발해 유민들은 각지에서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주요한 것으로 멸망 직후 서경압록부(西京鴨濫府)에서 일어난 대씨(大氏)의 후발해국(後渤海國, 926∼?)과 뒤를 이어 등장한 열씨(烈氏)와 오씨(烏氏)의 정안국(定安國, ?∼980년대?)을 들 수 있다.

그리고 부여부(扶餘府)와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에서 일어난 오사국(烏舍國), 거란의 동경도(東京道)에서 일어난 대연림(大延琳)의 흥료국(興遼國, 1029∼1030)과 고영창(高永昌)의 대발해국(大渤海國, 1116), 거란 상경(上京) 부근에서 활약한 고욕(古欲)의 저항(1115) 등이 있다.

이렇게 유민의 저항은 멸망 후 200여 년이 지난 뒤에까지 지속되었다. 유민 중에는 이처럼 항거한 부류뿐 아니라 지배계층에 참여한 부류도 있었다. 그리고 거란과는 반독립적인 세력을 유지하면서 점차 여진족(女眞族)으로 변화해 간 부류가 있었다.

그런가 하면 고려로 망명했던 부류들도 있었다. 특히, 멸망 전후부터 시작해 1117년에 이르기까지 30여 차례에 걸쳐 수만 명의 사람들이 고려로 망명해 옴으로써, 한국사의 흐름에 동참하게 되었다. 지금의 태(太)씨들은 바로 이 때 망명해 온 발해 왕실인 대씨(大)씨의 후예들이다. 글 李龍範 (출처 : 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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