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시인들
by 송화은율
시조시인들
맥 잇는 시조 시인들
"장마 중 잠깐 비치는 햇살처럼 내겐 많은 시간이 허락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어둠을 긋고 지나는 섬광이 더욱 강렬하게 느껴지듯이 영혼을 닦아 생명이 허락하는 한 좋은 시로 내 삶을 불 밝히고 싶다."
박권숙씨(34)가 최근 두번째 시조집 "객토"를 펴내며 한 말이다. 91년 중앙일보 시조지상백일장을 통해 등단한 박씨는 93년 첫 시조집 "겨울 묵시록"으로 중앙일보 시조대상 신인상을 수상하며 다음 세기의 시조를 짊어질 신예로 떠오르고 있다.
그러나 박씨는 20대 꽃다운 처녀시절부터 신부전증과 힘겹겨 투병해오고 있다. "객토(客土)"란 논밭의 지력(地力)를 북돋기 위해 딴 곳의 기름진 흙을 옮겨넣는 것을 이른다.
박씨의 시조짓기는 꺼져가는 생명에 불을 밝히는 객토 행위에 다름 아니다. 영혼을 닦아 삼라만상의 본체, 생명의 섬광을 잡아내 시를 쓰는 행위자체가 그녀의 존재이유요 또 구원이기에. 넓게 보면 우리 시조시인 모두가 꺼져가는 우리 고유의 정형시 시조의 현대화를 위해 객토작업을 힘들게 벌이고 있다.
금세기 초 서구문학이 유입되면서 우리 전통문학 양식들은 급속히 붕괴되고 서구문학 일변도로 치달았다. 때문에 우리의 근, 현대 문학사를 서구문학 이식사(移植史)로 간단없이 설명하려드는 경향도 없지 않다.
그러나 시조만큼은 우리 전통의 율격과 정서의 텃밭에 서구문학의 유용한 기법을 끊임없이 "객토", 현대화시켜 오늘 현대시와 어깨를 나란히 발전해나가고 있다.
1926년 최남선(崔南善)의 시조집 "백팔번뇌"가 나오면서 시조는 본격적으로 현대화의 길을 걷게 된다.이 시조집으로 해서 시조는 시조창에 종속된 가사에서 벗어나 자체로 읽히는 시로서 독립하게 된다.
이와함께 일제 치하에서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시조부흥, 혁신운동이 일며 이병기(李秉岐), 이은상(李殷相)등 빼어난 이론과 창작에 뛰어난 시조시인들에 의해 시조는 확고하게 현대시가로서 자리잡게 된다.
"사람이 몇 생(生)이나 닦아야 물이 되며 몇 겁(劫)이나 전화(轉化)해야 금강(金剛)에 물이 되나! 금강에 물이 되나! /
샘도 강도 바다도 말고 옥류(玉流) 수렴진주담(水簾眞珠潭)과 만폭동(萬瀑洞) 다 그만두고 구름 비 눈과 서리 비로봉 새벽 안개풀끝에 이슬되어 구슬구슬 맺혔다가 연주팔담(連珠八潭)함께 흘러 / 구룡연(九龍淵) 천척절애(千尺絶涯)한번 흘러 보느냐" //
이병기 등과 초창기 시조현대화 운동에 앞장섰던 조운(曺雲)의 시조 "구룡폭포"전문이다. 금강산 절경인 구룡폭포를 서늘하게 그리고 있으면서도 사설조 가락에 실어 유한한 우리네 삶의 한을 호탕하게 천길 절벽으로 떨어뜨리며 무한한 시공(時空)을 향해 다시 솟구치게 하고 있다
고시조의 단순한 경치 묘사나 심정풀이, 혹은 관념의 표출에서 벗어나 시적 대상과 시인과의 냉철한 거리 유지가 현대시를 압도하는 긴장된 감동을 부르며 시적 깊이를 지니게 하고 있다.
이병기 등의 추천으로 39년 "문장"지를 통해 조남령(趙南嶺), 김상옥(金相沃)씨가, 40년 장하보, 이호우(李鎬雨)가 시조단에 나와 일제말 암흑기를 거쳐 해방 이후의 시조단을 이끈다.
이밖에 일제하에서 활발히 창작 활동을 펼친 시조시인으로는 고두동(高斗東), 조종현(趙宗玄), 정훈(丁薰)등을 들 수 있다.
"다스려도 다스려도 못 여밀 가슴 속을
알알이 익은 고독 기어이 터지는 추청(秋晴)
한가닥 가던 구름도 추녀 끝에 머문다" <석류> (이영도)
물레소리와 타작마당의 도리깨질에서 시조의 가락을 익히고 오빠 이호우의 영향을 받은 이영도(李永道)가 45년 12월 "죽순"지를 통해 나옴으로써 해방 이후 최초 등단 시조시인으로 기록된 위 시 "석류"에서도 드러나듯 여성 특유의 기다림에 의한 단아한 서정과 미모로 李씨는 황진이의 맥을 이은 현대 시조시인으로 여류 시조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영도 이후 이렇다할 신인을 못내다 6·25 전란기를 거친 시조단은 이태극(李泰極), 정소파(鄭韶坡), 장순하(張諄河), 정완영(鄭梡永), 박재삼(朴在森), 박경용(朴敬用), 최성연(崔聖淵), 송선영(宋船影), 최승범(崔勝範), 허연(許演), 박일송(朴一松), 박병순(朴炳淳)씨 등을 내놓으며 60년대 들어 시조의 중흥기를 맞게 한다.
60년 6월 이태극, 조종현 주도로 시조전문지 "시조문학"이 창간되면서 작품 발표와 독자적 신인배출의 토대를 마련한 시조단은 60년대 비약적 발전을 보게된다.
60년대에 배출된 주요 시조시인으로는 이근배(李根培), 이우출(李禹出), 이우종(李祐鍾), 김제현(金濟鉉), 박항식(朴沆植), 유성규(柳聖圭), 이상범(李相範), 김월준(金月埈), 서벌(徐伐), 박재두(朴在斗), 김종윤(金鍾潤), 윤금초(尹今初), 김시종(金市宗), 김춘랑(金春朗), 진복희(晉福姬), 조오현(曺五鉉), 이은방(李殷邦), 유제하(柳齊夏), 장지성(張芝城)씨 등을 들 수 있다.
70년대 들어서는 유재영(柳在榮), 김남환(金南煥), 이우걸(李愚傑), 박시교(朴始敎), 김상묵(金相黙), 김영재(金永在), 김원각(金圓覺), 백이운(白利雲), 정해송(鄭海松), 박영교(朴永敎), 이기라(李起羅)씨 등이 시조단에 나와 60년대 시인들과 함께 중진, 중견으로서 활발히 활동하며 현 시조단을 이끌고 있다.
80년대 등단한 주요 시조시인으로는 박기섭, 지성찬, 이정환, 문무학, 이지엽, 정수자, 김복근, 오종문, 전병희, 김연동, 최도선, 오승철, 홍성란씨 등을 꼽을 수 있다.
90년대 들어서는 박권숙, 김수엽, 나순옥, 강현덕, 원은희, 이달균, 최준씨 등이 나와 기성 시조단의 주목을 끌고 있다.
현재 시조시단 인구는 6백여명에 이른다. 이들은 "시조문학", "현대시조", "시조생활", "시조시학", "한국시조" 등 시조전문 문예지 및 종합문예지 등을 통해 창작활동을 펼치고 있다.
중앙일보는 81년부터 시조짓기 운동을 펼치며 "중앙시조대상"을 제정, 기성시단의 시조창작 의욕을 고취시키고 있으며 "중앙시조지상 백일장"을 매달 열어 시조의 저변확대에 힘쓰고 있다.
또 시조단은 96문학의 해를 맞아 "온겨레시조짓기 추진회"(회장 정완영)를 결성, 시조의 중흥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러나 시조단 자체에 문제가 없는 것도 아니다. 계파별, 지역별로 갈려 나름대로 신인을 배출해 시조의 질을 떨어뜨리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이에 광주, 대구, 제주, 마산, 서울, 인천 등 전국에 흩어져 활동하고 있는 중견, 신예 시조시인들이 지난 7월 중순 만나 지역과 계파를 타파, 열린시조를 지향하며 질을 끌어올리자는 취지의 모임을 결성하기로 해 시조의 앞날을 밝게 하고 있다.
묵은 밭 일구는 고투(苦鬪)
시조시인들은 밭을 새로 일군다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채찍하며 외로운 작업에 임하고 있다. 아니 황무지를 개간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작업이 시조짓기인지도 모른다. 전통의 묵은 밭에서 현대의 복잡다단한 삶과 정서의 결실을 맺어 현대시와 질적인 수준에서 맞서야 하기 때문이다.
그 묵은 밭에서 쭉정이가 아닌 알곡을 맺기 위해 6백여 시인들이 묵묵히 땀을 흘리고 있는게 현 시조단 풍경이다. 현대시에 비해 돈도 명예도 안되는 시조에 사재까지 털어넣은 선·후배 시인들도 다른 어느 문학 분야보다 많다. '한국시조'를 편집하면서 줄곧 느끼는 것은 의식있고 깨어 있는 시인들이 전국에 산재해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들 각각의 혼신을 다한 내밀한 움직임이 작품을 통해 포착된다.
시조 전문지 편집자로서 그런 작품들을 어찌 소홀히 다룰 수 있겠는가. 그런 작품들은 접수 즉시 평론가의 손에 넘긴다. 객관적인 평가를 위해서다. 시조가 외로운 것도 사실은 현대시에 비해 정당하고 객관적인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 아닌가. 작품이 훌륭해 모두 다 싣고 싶고, 또 제대로 평가도 받게 해주고 싶지만 능력이 달리는 것을 어찌하랴. 언젠가 어느 신인에게 말한 바 있다. 적어도 이 시대에 살고 있는 한 시대와 숨결을 같이해야 하고 역사적인 안목도 지녀야 한다고. 결국 시조도 <새로운 의식과 새로운 서정의 싸움>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전통과 당대를 한 축위에 놓고 아우를 수 있을 때만 시조는 진정 현대시로서 기능할 수 있지 않겠는가. 말처럼 쉽지 않은 그 작업을 위해 오늘도 시조시인들은 붓을 벼르고 있다. 현대시로서의 찬란한 중흥을 그리면서.
블로그의 정보
국어문학창고
송화은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