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수요(拾穗謠)
by 송화은율습수요(拾穗謠)
田間拾穗村童語 전간습수촌동어
盡日東西不滿筐 진일동서불만광
今歲刈禾人亦巧 금세예화인역교
盡收遺穗上官倉 진수유수상관창
밭고랑에서 이삭 줍는 시골 아이의 말이
하루 종일 동서로 다녀도 바구니가 안 찬다네
올해에는 벼 베는 사람들도 교묘해져서
이삭 하나 남기지 않고 관가 창고에 바쳤다네
요점 정리
지은이 : 이달
연대 : 조선 선조
갈래 : 칠언 절구 한시
성격 : 현실 비판적, 인용적, 사실적, 고발적
표현 : 인용법, 직설법
주제 : 탐관오리들의 농촌의 수탈상을 고발, 관가의 수탈과 농민들의 피폐한 삶
의의 : 사회 고발시
내용 연구
밭고랑에서 이삭 줍는 시골 아이의 말이(인용법)
하루 종일 동서로 다녀도 바구니가 안 찬다네(비극적인 농촌 현실)
올해에는 벼 베는 사람들도 교묘해져서(농민과 관리의 중간자 입장에서 말하고 있음)
이삭 하나 남기지 않고 관가 창고에 바쳤다네(관가의 수탈을 의미하는 말로 담담한 표현 속에 담긴 농민의 뼈아픈 아픔이 담겨 있다. 가렴주구)
이해와 감상
지은이는 백광훈·최경창과 함께 삼당 시인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정서적인 면을 중시하여 낭만적이고 풍류적인 시를 많이 남겼다.
이 노래는 당시 농촌의 수탈당하는 생활을 그렸다. 현실을 적나라하게 고발하는 이 시는 밭고랑에서 이삭 줍는 시골 아이들의 말을 빌려 당시의 상황을 사실적이고 객관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삭줍기도 어려워 바구니가 차지 않고 관가의 수탈 또한 혹심하여 농민들의 마음까지도 빼앗아가고 있음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심화 자료
삼당시인(三唐詩人)
조선 중종과 선조 대에 걸쳐 시명(詩名)을 떨친 세 사람의 시인. 백광훈, 최경창, 이달을 이른다. 이들은 송시풍(사변적이고 주리적인 성격)을 배격하고, 당시(인정주의적)을 주로 하려는 경향을 띠었다. 이들은 정서면을 중시하며 좀더 낭만적인이고 풍류적인 시를 쓰려고 했으며, 성조(聲調) 감각을 중시했다.
이달(李達)
1539(중종 34)∼1612(광해군 4). 조선 중기의 시인. 본관은 신평(新平). 자는 익지(益之), 호는 손곡(蓀谷)·서담(西潭)·동리(東里). 제자 허균(許筠)이 그의 전기 〈손곡산인전 蓀谷山人傳〉을 지으면서 “손곡산인 이달의 자는 익지이니, 쌍매당 이첨(李詹)의 후손이다.”라고 밝혀 신평이씨(新平李氏)인 것이 확인되었지만, 서얼이어서 더 이상의 가계는 확실하지 않다. 원주 손곡에 묻혀 살았기에 호를 손곡이라고 하였다.
이달은 당시의 유행에 따라 송시(宋詩)를 배우고 정사룡(鄭士龍)으로부터 두보(杜甫)의 시를 배웠다. 박순(朴淳)이 그에게 시를 가르치면서 “시도(詩道)는 마땅히 당시(唐詩)로써 으뜸을 삼아야 한다. 소식(蘇軾)이 비록 호방하기는 하지만, 벌써 이류로 떨어진 것이다.”라고 충고하면서, 이백(李白)의 악부(樂府)·가(歌)·음(吟)과 왕유(王維)·맹호연(孟浩然)의 근체시(近體詩)를 보여주었다.
그는 시도(詩道)가 여기에 있음을 깨닫고, 손곡의 집으로 돌아와 당시를 익혔다. ≪이태백집≫과 성당십이가(盛唐十二家)의 글, 유우석(劉禹錫)과 위응물(韋應物)의 시, 양백겸(楊伯謙)의 ≪당음 唐音≫ 등을 외웠다. 이렇게 5년 동안 계속 당시를 배운 뒤에는 그의 시가 예전과 달라졌다.
한편, 시풍이 비슷한 최경창(崔慶昌)·백광훈(白光勳)과 어울려 시사(詩社)를 맺어, 문단에서는 이들을 삼당시인(三唐詩人)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봉은사를 중심으로 하여 여러 지방을 찾아다니며 시를 지었는데, 주로 전라도 지방에서 많이 모였다. 임제(林悌)·허봉(許愼·양대박(梁大樸)·고경명(高敬命) 등과도 자주 어울려 시를 지었다.
이달은 서자였기 때문에 일찍부터 문과에 응시할 생각을 포기하였지만, 다른 서얼들처럼 잡과(雜科)에 응시하여 기술직으로 나가지도 않았다. 특별한 직업을 가지지도 않았고, 온 나라 안을 떠돌아다니면서 시를 지었다. 그러나 성격이 자유분방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소외당하였다. 한때 한리학관(漢吏學官)이 되었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생겨서 벼슬을 버리고 떠났다. 중국 사신을 맞는 접빈사의 종사관으로 일하기도 하였다.
그의 시는 신분제한에서 생기는 한(恨)과 애상(哀傷)을 기본정조로 하면서도, 따뜻하게 무르녹았다. 근체시 가운데서도 절구(絶句)에 뛰어났다. 김만중(金萬重)은 ≪서포만필≫에서 조선시대의 오언절구 가운데에 그가 지은 〈별이예장 別李禮長〉을 대표작으로 꼽았다.
허균은 〈손곡산인전〉에서, “그의 시는 맑고도 새로웠고, 아담하고도 고왔다(淸新雅麗). 그 가운데에 높이 이른 시는 왕유·맹호연·고적(高適)·잠삼(岑參) 등의 경지에 드나들면서, 유우석·전기(錢起)의 풍운을 잃지 않았다. 신라·고려 때부터 당나라의 시를 배운 이들이 모두 그를 따르지 못하였다.”고 평하였다.
그는 일흔이 넘도록 자식도 없이 평양 여관에 얹혀 살다가 죽었다. 무덤은 전해오지 않고,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군청 앞과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손곡리 손곡초등학교 입구에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다.
시집으로 제자 허균이 엮은 ≪손곡집≫(6권 1책)이 있다. 이 밖에 최경창의 외당질 유형(柳珩)이 엮은 ≪서담집 西潭集≫이 있었으나 현재 확인되지 않고, 1623년 이수광(李邈光)이 지어준 서문만이 전한다.
≪참고문헌≫ 惺所覆螺藁, 鶴山樵談, 霽湖詩話, 蓀谷集, 蓀谷李達詩選(허경진, 평민사, 1991 증보판).(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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