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수선화- 金東鳴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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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화 - 金東鳴


 

<감상의 길잡이>

세상의 쓰라림과 사랑의 감동이 엇갈리는 일생을 살아온 김동명의 심사가 이 수선화에 사진처럼 찍혀 있다.

 

김동명의 일생은 사실 서러운 일생이었다. 구박둥이에 천덕꾸러기 사주팔자를 타고났다 해서 자탄도 많이 했지만 또 서러움을 상쇄할 만한 도움의 손길도 있어서 뒤뚱뒤뚱 한세상을 살았다.

 

어릴 때는 외출복이 없어서 어머니가 외갓집 나들이를 할 때 데려가지도 않았다. 자존심 강한 어머니가 거지꼴 같은 아들을 친정에 보이기 싫었기 때문이다. 김동명이 7세때 처음 옷 한 벌을 얻어 입고 외가에를 갔는데, 그때는 생활이 너무 어려워서 어머니가 친정살이를 하러 간 길이었다.

 

남들이 14세에 들어가는 중학교를 17세에 입학하고 두 학년을 건너뛰어 3년만에 영생(永生)중학교를 졸업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도 취직을 못해서 1년간 놀다가 간신히 근처에 있는 東進小學校 선생이 되었지만 기구한 사주팔자는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취직한 지 겨우 한 학기만에 학교를 쫓겨났다. 3·1독립운동 두 해 후인 21년이면 아직 살벌한 분위기인데 모친을 닮아서 입이 촉바른 그가 그만 3·1운동 찬양 발언을 학생들 앞에서 해 버렸다. 모가지가 열 개 있어도 모자랄 일을 해 놓고 그는 추방의 비운을 맞이한다.

 

 

두 번째 추방은 서해안 남포 근처의 소학교에서 당했다. 평양 숭실대학에 다니는 선배 한 사람이 교장에게 애걸복걸해서 취직이 된 것인데 이 학교 또한 가을 학기 겨우 끝내고 나자 나가 달라했다. 조선인을 일본 사람 만드는 교육 내용을 불평했기 때문이다. 속이 뭣같이 상했지만 그래도 대동 강변을 걸으며 시를 생각하는 재미 하나로 버티어 오던 학교 생활을 별 수 없이 청산하고 시고(詩稿) 보따리 하나만 달랑 들고 돌아섰다.

 

그후 안주에 있는 U소학교에 세번째로 취업, 여기서는 입조심을 대단히 해서 데뷔작 당신이 만약 내게 문을 열어 주면을 썼고 쫓겨나는 것도 한 학기만이 아니고 1년만에 파직 당하는 행운’(?)도 있었다.

 

입 잘못 놀려 세번씩이나 해고를 당한 김동명은 세상 살 맛이 안 났다. 고향 생각이 비로소 났다. 가난에 쫓겨 도망하듯 떠나온 고향이지만 워낙 세파에 시달리고 서러우니 몸서리나는 고향도 생각키웠다. 그는 고향 강릉으로 가 보기로 작정하고 봄비 내리는 4월 어느 날 길을 나섰다가 잠시 원산을 다녀갈 생각을 했다. 거기엔 조카 하나가 공무원을 하는데 거기 대고 하소연도 실컷 하고 여행 편의도 부탁할 생각이었다.

 

일제시대의 관리란 역시 끗발이 좋아서 조카의 말 한마디에 냉큼 사람을 보내어 정중히 초빙해 가는 소학교가 있었다. 김동명은 고향 길을 포기하고 그 학교에 눌러앉아 한 학기를 대과 없이 보내고 C여학교로 자의에 의해서옮겨앉았다. 고약한 운명이 끝나나 했더니 그게 아니었다. 학교에 무슨 소송 사건이 생겼는데 김동명이 중뿔나게 거기 말려든 것이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지고 물러나겠소.” 모친을 닮아서 큰 소리 잘 치고 객기도 있는 그가 자의에 의해서퇴임을 했다. 그것이 C여학교로 옮긴지 두 달 만이었다. 그러니 취직 최장기간은 1년이고 최단기간은 2개월이었다.

 

이렇게 4 차례 실직의 비운을 겪은 다음부터는 대체로 일이 잘 풀린 셈이다. 몇 개월 조캇집에서 식객 노릇을 착실히 하다가 유림회(儒林會) 강습소의 일을 한 일년 보았다. 29세 되던 해에 그는 동경 유학을 떠나게 된다. 우연찮게 기독교 계층의 장학금을 받고 또 처가에서 생활비를 보조해 주었다. 기독교 자금이므로 일본 청산 학원(靑山學園) 신학과를 다닐 수밖에 없었지만 김동명은 아무래도 종교적 인간은 못되었다. 낮에는 청산 학원에 나가고 밤에는 일본 대학 철학과를 다녔다. 그 시절의 학제는 돈과 시간과 체력만 허락되면 둘이 아니라 세 군데 학교를 다녀도 상관없었다.

 

그는 두 번 아내를 잃는 쓰라림을 겪고 세 번씩 장가를 가는 처복(?)을 누렸다. ‘김동명이 처복 없는 사람인가? 있는 사람인가?’라는 주제를 놓고 친구들이 술자리에서 자주 토론회를 가졌다 한다.

 

첫 아내는 그의 첫직장인 동진(東進)소학교 시절의 하숙집 딸이었다. 총각 선생이 용모는 볼 것 없었으나 재능과 인품은 출중하다 해서 장모가 중매쟁이 역할을 했다 한다. 첫 부인 지정덕(池貞德)은 영생고녀 출신의 전형적인 동양 여성이며 12녀를 낳고 금슬 좋게 살다가 40도 못되어 타계했다.

 

42세에 김동명은 다시 장가를 가는데 상대는 이대(梨大) 음악과 출신의 석사 이복순(李福順)였다. 그녀는 영생고녀 음악 교사로 있었는데 성악가 김자경 선생의 모친 강신앙 여사가 중매를 섰다. 이 결혼이 얼마나 어려웠던지 김동명은 그 굴욕, 그 모멸감, 그 참담한 고전 그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치가 떨린다.”라는 무용담을 쓰기도 했다.

 

그렇게 고심 참담한 난관의 시간을 극복하고 나니 그렇게 쌀쌀맞던 이복순(李福順)양이 태도를 완전히 바꾸어서 천하에 다시없는 현모양처로 변하더라고 그는 수필 천환 180에 써 놓았다. 그는 부인의 몸에서 난 첫딸 월정(月汀)을 가장 사랑해서 그림자처럼 데리고 다녔다. 그는 어떤 글에서 월정(月汀)의 이름 풀이를 아름답고 깨끗함, 아름답고 영원한 것의 참된 모습, 노래의 시작, 탄식의 종말이라 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부인과의 사이에서 얻은 첫 결실이라 더 귀중, 소중했다. 그러나 귀신의 시기인지 부인도 둘째딸 월령을 낳고 59년 심장마비로 남편 곁을 영영 떠났다. 김동명은 그 충격에서 오래 벗어나지 못하다가 잘 다니던 다방 마담과 세 번째 결혼을 함으로써 간신히 위안을 얻는다. 가난과 실의와 병고 속을 살아간 말년에도 그는 세 번째 부인의 극진한 보살핌 때문에 서럽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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