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솜틀거리에서 나온 소식 / 전문 / 송영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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솜틀거리에서 나온 소식 / 송영

 



1

선생님!

그 동안에도 역시 몸이나 건강하시었습니까?

가뜩이나 몸이 약하신 선생님께서 어떻게나 그 추운 겨울을 지내 가시었습니까.

더욱이 지난 겨울에는 근년에는 보기 드문 추위였습니다.

집의 할아버지께옵서는 '그런 추위는 처음 보았다'고 하시면서 아침이면 구레나룻에 달린 고드름을 쓰다듬고 계시었답니다.

따뜻한 아랫목에 가 화로를 쪼이고 지낸 저희들도 한 번도 몸을 펴지를 못하고 옹송그리고 지내었답니다.

선생님!

선생님 계신 방에는 화롯불도 없다고 하시었지요.

천장에 달린 거미줄이 흔들린다고 하시었지요.

앞벽에 달린 캘린더와 뒷벽에 걸린 수도 흔들린다고 하시었지요.

통풍장치로 뚫어 놓은 벽에 뚫린 구멍에서는 칼날 같은 바람이 쏟아져 들어온다고 하시었지요.

코끝과 귀끝과 무르팍과 발가락들은 떼어 나가는 듯이 시리다고 하시었지요.

아리고 매웁다 못해서 아프다고 하시었지요.

선생님!

그러나 이 몹쓸놈의 겨울, 인정 없는 겨울, 눈도 없고 코도 없는 겨울은 그만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마음대로 선생님을 시달리고 회초리질하던 겨울!

선생님의 몸을 알알샅샅이 괴롭게 굴던 겨울! 선생님의 마음을 울리고 웃기고 조롱하고 모욕하던 겨울.

요놈의 겨울도 가버리는 때가 있기는 합니다그려.

겨울이 갔다고 천하는 좋아합니다.

푸른 하늘은 아지랑이 수건을 나붓거리면서 종달새를 부르고 있습니다.

높은 산은 기쁨에 못 이겨서 겨울 동안에 얼어붙었던 눈물을 골짜기 골짜기로 감격하게 흘리고 있습니다.

성미 급한 개나리는 벌거벗은 몸으로 노란 웃음을 웃고 있습니다.

파리는 주춧돌 아래에서 앵앵거리고 강아지는 아무나 보고도 깡총 깡총 뛰어오릅니다.

천하는 웃습니다, 노래합니다.

지긋지긋하던 겨울을 쫓아 버린 나머지에 눈물까지 냅니다.

인제는 선생님도 춥지만은 않으실 터이지요.

하여간 봄이라 봄기운에 싸여만은 계시겠지요.

무엇보다도 건강입니다, 승리입니다. 겨울에게 지지 않으신 거룩한 선생님의 마음은 종달새와 꾀꼬리와 온 봄을 노래하는 만물의 마음과 같이 어우러져서 계시겠지요. 그보다도 더더 확실하게 기뻐하시고 더 명랑한 자신을 가지고 계시겠지요.

2

선생님!

그런데 벌써 선생님이 가신 지가 일년이 넘었습니다그려.

그 동안 선생님의 지내시는 모양은 선생님 주신 편지에서 역력히 알고 지냈습니다.

그보다도 저희들이 미리 짐작으로 더 똑똑히 눈앞에 그리고 지내가고 있답니다.

그 동안에 저희들도 퍽 많이 변해 버렸답니다.

서로들 뿔뿔이 헤어져서 가지각색의 모양들로 변했답니다.

흰 저고리를 입고 검정 치마를 입고 지내었던 저희들의 모양은 하얀 에이프런으로도 변하고 녹의홍상으로도 변하고 기다란 남치맛자락으로도 변해 버렸답니다.

쭈렁쭈렁 따서 늘인 검은 긴 머리는 똥그란 쪽찐머리, 길쭉한 트레머리, 별의별 머리로 다 변해 버렸답니다.

눈썹을 외쪽달같이 그리고 분홍 입술을 만들고 머릿기름으로 범벅을 하고 있는 아이도 생겼답니다.

선생님이 항상 말씀하시던 저희들 동리는 아주 더 '솜틀' 같은 집이 그보다도 더 작은 집이 자꾸만 늘어 가고 있답니다.

그 동안에라도 벌써부터 몇 번이나 이 저희들의 '솜틀거리' 속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더욱이 선생님께서 가르쳐 주시던 저희들 야학생들의 이야기를 자세히 전해 보내 드리려고 했습니다마는 도리어 선생님의 마음을 휘청거려 드릴까 봐 겁이 나서 주저를 하고 주저를 하고 하였답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 저번 편지에,

"소식이면 아무것도 좋다. 슬픈 것이나 기쁜 것이나 정말 이야기면 좋다. 이곳에서는 무엇보다도 눈으로 보는 듯한 정말 이야기와 참된 소식이 더 듣고 싶다. 사바가 그립다."

하시기 때문에 이 기다란 소식을 전해 드리려고 하는 것이랍니다.

그러나 역시 길게는 쓰지를 않습니다. 백가지 천가지 중에서도 그 중의 큰 이야기만을, 그리고 별별 곡절 중에서도 그중 기막힌 구절만을 몇 가지만을 추려 놓으려고 합니다.

 


3

첫째로 선생님이 떠나가신 뒤로는 저희들의 야학이 그대로 흐지부지 헤어져 버리고 말았답니다.

처음에는 선생님 대신으로 교장선생님께서 며칠 동안은 가르쳐 주시었답니다. 교장선생님께서는,

"선생님께서 잠깐 볼일이 계셔서 시골로 내려가셨다"고.

"그리고 무슨 장사를 하시러 가시었는데 한해 두해 안으로 그리 쉽사리 돌아오시지 않으시리라"고.

"이 야학은 그 선생이 힘을 쓰던 것인데 인제는 앞으로 다른 더 좋은 선생님이 오시리라"고.

저희들은 눈물들이 났답니다.

"왜 가실 때 단 한마디 말씀이나마 아니 하시고 가셨을까?"

"대관절 왜 우리들을 버리시고 가셨을까."

"무슨 장사를 그렇게 별안간 가셨을까."

야속도 하고 궁금도 하고 섭섭도 하고 원망도 스러웠답니다.

그 중에서도 영애는 울면서도 엄살을 피웠답니다.

"어쩌면 인사 한마디도 아니 하시고 가시니 어쩌면 글쎄."

이 '어쩌면 글쎄' 소리가 저희들의 입에서 오르내렸답니다.

그래도 울기들은 모두 했습니다. 맨 앞에 앉았던 혜숙이까지 울었으니 말할 게 있어야지요. 트레머리한 두리와 존숙이도 우리들 앞에서는 아무런 기색을 아니 보이지만 자기들끼리는 언짢아하던 모양이더군요.

단 사흘이 못 되어서 아이들은 반이나 줄었습니다.

아명이, 옥순이, 소담이, 영숙이 들 같은 커다란 처녀들은 아주 나가 버렸습니다.

그리고 돈, 더 받는 맛에 밤에 자고 있는 진고갯집들 오마니들이 되었답니다.

숙엽이, 복이 들은 과자공장으로 난영이, 복술이, 무던이는 비누공장으로!

모두들 하루 십오 전, 이십 전짜리 일공녀로 들어들 가버렸습니다.

전매국 다니는 순녀와 채순이도 안 다닙니다.

그럭저럭 다 나가고 단 열 명도 안 남았지요.

그래서 교장선생님께서,

"미안하지만 너희들을 가르쳐 줄 수가 없다. 너희들도 알다시피 우리 야학의 경비는 너희들의 월사금으로 조금씩 유지해 나가는데, 너희들이 이렇게 적으니 전깃불값도 못 되지 않니. 선생님 월급은 물론이다. 다만 너희들 직업 가지고 공부 못 하는 너희들을 위하여 일종 사업으로 하는 노릇이니까 선생님의 월급은 없다. 그러나 아무리 선생님 보수가 없더라도 전깃불값이라도 되어야 하지 않니."

이것이 마지막 야학을 파하던 날에 하시던 교장선생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가 '전깃불값'도 못 된다는 말씀뿐이었습니다.

선생님!

저희는 그때에 저희들은 선생님 생각이 더한층 났습니다.

저희들의 눈치만 보시면서 가난한 학생들의 월사금 봉투에다 슬그머니 도장을 찍어 주시던 선생님의 얼굴이 확확 하고 눈앞에 지쳤답니다.

이렇게 저희들은 모두들 헤어져 버리고 말았지요.

저희들은 이것이 아주 마지막 공부입니다.

집에서들은 계집애년들이 그만큼 배웠으면 넉넉하지…… 하시고들 다른 데에는 다시 보내 주시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 배우러 오라는 학교도 없답니다. 있다고 하더라도 갈 수도 없습니다.

인제는 저희들도 이십이 가까운 계집애들이니 어떻게 부끄러워서 조그만 아이들만 모인 곳으로 가겠습니까?

왜? 서울 안에는 저희들 같은 나이 찬 처녀들, 무식한 처녀들, 공장 다니는 처녀들, 오마니 노릇 하는 처녀들을 위하여 따로 있는 야학이 그리 적습니까.

저는 요전부터는 집에만 들어앉아 있습니다.

"너도 벌써 이십이 넘었으니 집에 가 들어앉어서 침선이나 배워라."

하시는 말씀과 같이 갇혀서 있답니다.

그러나 저보다도 더 나이 먹은 순이, 영숙이, 복남이 들은 여전히 고무공장에를 다니고들 있답니다.

 



4

지난 봄날의 이야깁니다.

그때는 벌써 야학이 파한 지 반년이 넘었을 때입니다.

저는 집에서 그야말로 침선이나 배우고 하도 화가 나면 배우던 교과서를 복습도 하고 지내 갑니다.

그래도 선생님이 계실 때에는 재미있는 책을 얻어서 읽었습니다마는 어디 지금에야 그런 책이나마 있어야지요.

또 돈도 없지마는 혹시 사보고 싶은 생각이 나도 어떻게 어디 가서 어떠한 책을 사서 보아야 좋은 줄을 알아야지요.

그때 선생님이 빌려 주시었다가 그냥 가버리신 뒤에 남은 책 두 권, 그것만 되풀이만 하기도 했지요.

무슨 책인 줄 아십니까? 뮤렌 선생의 동화책과 또 무엇이던가…… 옳아, 잔다르크 이야기하고 두 권 말입니다.

참 그런데 말입니다.

그때는 가끔 난이와 영숙이와 경란이와 저와 넷이만은 가끔 편지들도 하고 찾아다니기도 하였답니다.

그때 영숙이는 진고갯집 오마니로 그대로 있었고 경란이는 고무공장에를 다녔고 난이는 제사공장에를 다니고 있었답니다.

참, 난이 말입니다. 선생님 계실 때에는 비누공장에를 다녔지만 그때는 두리가 소개를 해서 제사공장의 견습직공으로 끌려 들어갔었답니다.

그때도 영숙이에게서 편지가 왔습니다.

"하도 오래간만이니 공일날 놀러 오너라. 나하고 난이하고 경란이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터이니 오정 안으로는 꼭 오기를 바란다.

인제는 아주 날이 따뜻해졌다.

경복재 약물터 앞에는 진달래가 만발하였다.

학교 뒤 산언덕 위 푸른 마당에는 잔디가 새파랗게 뒤덮이었다.

하루 동안 우리들이 가끔 달이 뜨면 선생님과 같이 올라가서 놀던 푸른 언덕에서 우리들이 글 배우던 학교나마 내려다보면서 하루 동안 소창이나 하자.

우리 동리에는 선생님이 말씀하시던 솜틀 같은 집들이 더 많이 늘었다. 그리고 별 이야기가 더 많이 생기었단다."

하는 뜻의 편지가 왔었답니다.

저는 하도 반가워서 억지로 어머님에게 승낙을 받아 가지고 약속한 그 다음 공일날 오정 안으로 '솜틀거리' 속에서도 제일 허술한 경란이의 '솜틀 같은 집'으로 찾아갔었답니다.

동리 어귀로 들어서니까 문득 학교 생각이 끼쳤습니다.

울창한 뒷남산의 푸른 송백은 아련한 아지랑이 속에 잠겨 있었습니다.

푸른 이층집 붉은 이층집 들은 이곳저곳에 우뚝우뚝 더 늘어 있습니다.

어느 집에서는 풍금 소리도 흘러나왔습니다.

이곳에는 그전에는 은행 사택들만이 있었더니만 지금에는 다른 회사와 학교 선생 같은 부자 내지인들도 퍽 많이 와서 사는 모양이었습니다.

그 대신에 솜틀 같은 집은 산골짜기와 큰길 아래 개천 속으로 모두들 쫓겨 들어갔습니다.

선생님!

새문 밖 현저동 산꼭대기와 또 공덕리 산언덕에도 솜틀 같은 집이 꽉차서 있지요.

그러나 이 뒷남산 기슭 동리의 솜틀집들은 개천 속 골짜기 속으로 기어서 떨어져 가기만 합니다.

이 골짜기 동리에서도 그중 허술한 동리가 이 경란이 집이 있는 '활터구멍'이었습니다.

작년 여름 장마통에 물이 많이 쏟아져 내려오기 때문에 무너진 집들도 있었습니다.

산골짜기 양편 벽에다 조그만 터전을 호비작거려 놓고 양철 지붕과 널빤지 조각으로 앙상하게 지어 놓은 솜틀집들이야말로 바람만 불어도 날아갈 듯이 앙상들 합니다.

벽, 아래턱이 쓸려 내려가는 물 때문에 허물어지는 바람에 그 위에 지어 놓았던 솜틀들은 삼분의 일이나 밑땅이 없어지고 삼분의 이만 겨우 걸려서 떨어지지를 않고 있습니다.

아주 무너질까 봐서 기다란 서까래로 바닥땅 없는 솜틀집의 한옆을 엉버텨 놓았습니다.

보기만 하여도 아슬아슬한 광경입니다.

그래도 이런 무서운 떨어질 듯한 집에서도 아이들의 울음 소리도 흘러나오고 다듬이 소리도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굴뚝에서 연기도 나오고 있고 야단치는 어머니의 쨋쨋한 목소리도 잠겨서 있습니다.

선생님!

이 무시무시한 동리로 들어가는 모퉁이에는 새로 조그마한 장작가게가 생겼습니다.

이 가게는 전매국 다니던 순녀 집이었습니다.

왜, 순녀, 모르십니까.

항상 폐병으로 얼굴이 창백해서 골골하고 기침만 하던 애 말입니다. 키가 늘씬 크고는 게슴츠레하던 계집애 말입니다.

그 애는 벌써 스물두 살이나 되었지요. 저보다 한 살을 더 먹었으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참, 전매국 다니던 여자들은 그런 병들이 많은 모양이더군요.

왜, 채순이도 그렇지 않았습니까. 왜, 시집갔다가 다시 와서 머리를 다시 땋아서 늘이고 다니던 여자 말입니다.

순녀도 우연히 얻은 병이 시름시름 깊어져서 그때는 아주 고질이 되어 버리다시피 되었답니다.

저는 이 순녀네 가게를 지나갈 때에 처음에는 퍽 이상스럽게 생각을 하였습니다.

순녀 아버지는 아무것도 하시는 것이 없고 더군다나 집안이 가난해서 억지로 지내 가고 있지 않습니까.

겨우 폐병 든 순녀가 벌어 오는 돈으로 연명만 하고 지내 가지를 않습니까.

이렇게 가난한 순녀 집에서 별안간 어디서 돈이 생기어서 가게까지 내었나 하고 속으로 생각을 하였습니다.

혹시 순녀 집이 떠나고 딴사람이 와서 들었나 하고 지나가는 길에 가게 속을 들여다보니까 얼굴이 걀쭉한 순녀 아버지가 조그만 곰방담뱃대를 물고서 앉아 있었습니다.

경란이의 집으로 찾아 들어가니까 벌써 약속한 세 동무들은 와서 있었습니다.

"얘 퍽 오래간만이구나."

"어서 오우. 언니 인제는 아주 아씨가 되셨구려."

모두들 반가워서 웃고서들 손들을 맞잡았습니다.

"그래 영숙아 너― 지금도 기무라 집에 그저 있니."

"아니 다른 데로 옮겨 갔다. 인제는 아주 게서 먹고 있단다. 쥔이 당초에 꼼짝을 하게 해야지. 집에도 잘 해야 한 달에 한두 번밖에 오지를 못한단다. 식구가 단출해서 일은 비교적 없으나 똑 갑갑한 게 걱정이란다."

영숙이는 새로 머리를 틀어 얹었습니다.

키는 더 크지 않았지만 매우 뚱뚱하여지고 목 뒤가 굵어졌습니다.

하얀 두 손길을 보니까 비교적 하는 일은 세차지 않은 것같이 짐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일본 내지 말투같이 조선말을 하고 웃고 몸 갖는 것이 어딘지 오마니의 냄새가 젖어 있는 것같이 보였습니다.

"난아, 너는 요새 월급이 좀 올랐니."

"오르기는 경치게 올라, 겨우 지금 이십오 전씩이란다. 비누공장보다도 더 고되더라. 그리고 감독이니 지배인이니 하는 것들이 보기가 싫어서 병이 될 것 같더라. 엥히 빌어먹을 것……."

얼굴 넓적하고 성미 괄괄한 난이는 당장 눈앞에 감독이 있는 것같이 욕을 퍼부었습니다.

"그런데 참 경란이 언니는 지금은 아주 월급이 많겠구려."

경란이는 저보다 두 살이나 더 먹었는데도 도리어 저보다는 더 애티가 나타나 있었습니다.

얼굴이 하얗고 두 손길은 양촛가락 같았습니다.

"나, 뭘 많어. 그것도 일이나 많으면 하루 돈 원씩 넘어 받지만 요새는 어디 세월이 있어야지. 한 달에도 보름씩은 노는데……."

하면서 빙긋이 웃었습니다. 그러나 퍽, 쓸쓸스러워 보였습니다.

한참 동안이나 저희들은 그 동안 지낸 이야기를 했습니다.

신문에서 선생님의 사진을 본 것도 이야기하고 선생님께서 고생하실 것도 생각들을 하면서 퍽들 쓸쓸스럽게 지냈습니다.

"모두들 다른 아이들은 잘 있니!"

하고 제가 물어 보니까,

다들 그전 집이 내지인 집으로! 공장으로! 다니면서 벌이를 하나 그 중에 권번으로 소리를 배우러 다니는 아이들도 사오 명이나 늘었다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참, 선생님.

독창 잘하던 순이는 카페걸이 되었다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점분이, 복순이는 아주 노래를 다 배우고 그때에는 벌써 기생 영업을 시작하고 있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저희들은 모든 동무들의 변한 이야기를 해가면서 쓸쓸스럽게 웃었습니다.

가슴이 갑갑해서 못 견디었습니다.

공연히 분해도 지고 겁도 슬그머니 났습니다.

 


5

선생님!

그보다도 더 분하고 더 무서운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순녀가 만주로 오백 원에 팔려 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선생님!

순녀가, 폐병으로 골골하던 순녀가 만주 창기로 팔려 갔답니다.

그래서 그의 아버지가 그 돈으로 장작가게를 시작했더란 것이랍니다.

선생님!

어쩌면 제 딸을 팔아먹는 아버지가 있습니까.

아무리 어렵더라도 어쩌면 자기가 친히 난 딸을 더군다나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 병든 처녀들을 팔아먹을 생각이 납니까.

동리 사람들은 모두 욕을 한답니다.

"사람이 아니라 개돼지야."

"어쩌면 딸을 호인놈에게 팔아먹을까."

"그렇게 하는 가게가 잘될 일이 있나."

"장작을 파는 것이 아니라 제 딸을 토막 쳐서 파는 셈과 마찬가지야."

이러한 욕들은 이 솜틀거리에 가득 차 있답니다.

한 사람도 그 가게에 가서 장작을 사는 사람이 없답니다. 그래서 벌써 밑천을 들어먹고 인제는 남은 것이 '망'하는 것밖에는 없답니다.

난이는 그 투덜거리는 목소리로 순녀 아버지를 욕을 했습니다.

저희들은 오래간만에 만나서 논다는 것이 이런 이야기 타령이었습니다.

날씨는 매우 청명한 봄날이었으나 저희들의 마음은 대단히 흐려 있었습니다.

겨우 저녁때나 되어서 경복재 앞 푸른 언덕으로 올라갔습니다.

즐비한 양옥집들은 봄빛에 번뜩이었습니다.

이 골짜기 저 골짜기에 처박힌 솜틀거리는 쓰레기통 폭밖에 안 되었습니다.

선생님!

저희들은 이 쓰레기통 속에서 조금 큰 양철집인 저희들의 야학집을 내려다보고 섰었습니다.

마침 중학생들의 창가 소리가 스며 올라왔습니다.

선생님!

저희들은 창가 소리를 듣고 눈물이 날 듯했습니다. 선생님 생각이 나서요.

창가 곡조는 보통학교에서만 들을 수 있는 국어 창가이었습니다.

선생님이 계실 때에는 조선말 동요만 가르쳐 주시었지요.

그러나 요새 와서는 국어 창가만 한답니다.

그리고 선생님들이나 학생들도 국어만 사용한다나요.

"뒷간에 소제를 잘해라. 월사금을 얼른 가져오너라."

만을 전문으로 조회시간에 훈화로 삼고 지내시는 교장선생님도 국어로 훈화를 하신답니다.

저희들은 이 국어 창가 소리를 듣고서 한참이나 서로 말이 없이 우두커니 섰기만 하였습니다.

조금 만에 경숙이는 가만히 노래를 불렀습니다.

"지하촌서 모여 오는 헐벗은 동무들 모여모여 한데 모여 힘써 배우자."

하는 야학 교가이었습니다.

저희들은 저절로 따라서 불렀습니다. 경복재 앞에서 빨랫방망이 소리가 났습니다.

영숙이는,

"얘들아, 저것 봐라."

하면서 언덕 아래 좁은 길 위를 가리키었습니다.

저희들은 모두 내려다보았습니다.

거기에는 노랑 저고리에 남 치마를 입은 점분이와 분순이가 둘이 나란히 서서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벌써 걸음걸이에 기생티가 박혀서 있었습니다.

건너편 연화봉 산봉우리에는 붉은 저녁해가 반쯤 걸려서 있었습니다.

영숙이, 경란이, 난이 들의 얼굴들은 붉은 놀빛에 잠겨서 있었습니다.

6

선생님!

벌써 이 이야기도 일년 전 옛 일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또다시 봄이나 역시 솜틀거리는 쓸쓸하기만 하답니다.

저희들은 아주 드문드문히밖에는 못 만나 봅니다.

경란이의 편지가 온 지도 두 달이 넘었습니다.

순녀의 소식은 아주 묘연해졌습니다.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로 벌이들을 다니고 있습니다.

학교 안에서도 여전히 창가 소리가 흘러나옵니다.

저도 역시 집 안에만 들어앉았습니다. 그런데 참, 이것은 며칠 전에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너무 장황해서 잊어버렸습니다그려. 동리 안에서 딱정떼 여편네라고 별명 듣던 복동 어머니가 경찰서에 붙들려 갔다가 나왔답니다.

왜, 순녀와 같이 전매국에 다니는 키 큰 여자 말입니다.

점심시간에 감독하고 싸움을 하고 며칠 동안 말썽을 일으키더니 기어이 경찰서까지 다녀 나왔다나요.

동리 사람들은 욕들을 한답니다.

"젊은 계집년이 사내 감독하고 싸우다가 경찰서 신세까지 끼쳤다구요."

물론 전매국에서도 쫓겨 나왔지요. 그래도 복동 어머니는 더 기승을 피우면서 동리를 뒤엎고 다닌답니다.

언제인가 저희 집에도 한번 놀러 왔다가 갔지요.

그 큰 목소리로 별별 이야기를 다 하고 갔습니다.

머리 쪽찐 복동 어머니의 말하는 소리가 어딘지 선생님의 하시는 말씀과 비슷한 게 많아요.

선생님!

인제는 아무리 분한 일이 있더라도 공장에서 시끄럽게 굴 것이 아니더군요.

공연히 복동 어머니 모양으로 경찰서 구경이나 하고 밥줄이나 끊어지게요.

7

선생님!

그러면 이 소식도 그치려고 합니다.

선생님께서 인제 석 달만 계시면 돌아오시게 된다지요.

다시 오시면 다시 선생님은 선생님 되시고 저희들도 다시 학생들이 되어 보게 될는지요.

어떻든지 몸이나 건강히 지키고 계시다가 나와 주십시오.

그때까지 저희들도 아주 퍽 좋은 얼굴로써 선생님을 맞이하도록 하지요.

그러면 안녕히 계십시오.



김백순

출전:삼천리72(19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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