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세 가지 교제(交際) / 해설 / 몽테뉴

by 송화은율
반응형

세 가지 교제(交際) - 몽테뉴

 

 

작가 : 몽테뉴(Michel Eyquem de Montaigne, 1533.2.28 ~ 1592.9.13).

 

프랑스의 사상가모랄리스트. 프랑스 남부 페리고르 지방의 몽테뉴성(Montaigne:현재의 생 미세르 드 몽테뉴 마을) 출생. 프랑스의 르네상스기()를 대표하는 철학자문학자이며 수상록Les Essais의 저자이다. 대대로 보르도에서 살았던 부유한 상인 가문으로 에이F을 성으로 삼았다가 증조부 라몽 에이F 때 몽트라베르 남작령(男爵領)에 속하는 몽테뉴성과 그 영지를 매수하여 귀족이 되었다. 아버지 피에르는 프랑스와 1세의 이탈리아 원정에 종군한 군인으로 문예 애호가이기도 하며, 만년에 보르도 시장에 선출되었다. 어머니의 가계는 포르투갈계() 유대인의 피를 받았다고 한다. 몽테뉴는 어려서 라틴어 교육을 받았고, 1554년 페리그 재판소에 근무하여 57년 보르도 고등법원 참사관이 되었다.

 

그는 때때로 궁정에 찾아가 프랑스와 2, 샤를 9세의 신임을 얻었다. 65년 프랑수아즈 드 라 샤세뉴와 결혼, 68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몽테뉴 영주가 되었다. 아버지의 명으로 번역한 15세기 에스파냐 신학자 레이몽 스봉의 자연신학(自然神學)69년에 간행하였다. 7137세로 법관생활에서 물러나 독서와 저작 생활로 들어갈 결심을 하였으나, 구파의 종교전쟁에 휩쓸려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77년 나바르왕 앙리(뒤의 앙리 4)의 시종이 되었다. 80년 써 모은 수필을 간추려 수상록(2)을 보르도에서 간행하였다. 이 해 신장결석(腎臟結石) 치료를 겸하여 독일스위스이탈리아 관광길에 올라 1년 반을 외국에서 보냈다.

 

이 여행에서 여행기Journal de voyage(1774)가 나왔다. 여행 중에 보르도 시장에 선출된 것을 알고 81년 말 귀국하였다. 83년 보르도 시장에 재선되었으나 종교적 내란과 페스트의 유행 등 많은 난국을 맞았다. 86년에 몽테뉴성으로 돌아가 수상록에 증보와 수정을 가하고, 다시 제3권의 수필을 새로 집필하여 88년 파리에서 수상록(3)을 출판하였다. 그가 󰡐결연(結緣)의 딸󰡑이라고 부르기까지 한 구르네와 알게 된 것도 이 해이다. 만년에는 앙리 4세로부터 궁정 출사(出仕)를 간청받았으나 굳이 사양하고 수상록가필(加筆)에 착수하여 죽을 때까지 계속하였다. 그는 처음에 금욕적(禁慾的) 인생관에 호의를 가진 듯이 보였으나, 중도에는 온건한 회의론에 기울어 󰡐나는 무엇을 아는가?(Que Sais Je?)󰡑를 좌우명으로 삼았다. 그와 동시에 루크레티우스를 통하여 에피쿠로스의 자연주의에도 공명하였다.

 

그러나 후기에는 자기의 체험과 독서생활을 근거로, 있는 그대로의 인간, 변천하는 대로의 인간을 그려, 자연에 대하여 단순히 몸을 맡기는 데에 인생의 지혜를 추구하였다. 그가 죽은 뒤에 그르네는 그가 마지막 손질한 것을 기초로 하여 수상록의 신판을 펴냈다. 그는 이 수상록(3)으로 프랑스에 모랄리스트의 전통을 구축하였을 뿐만 아니라, 17세기 이래의 프랑스 문학, 유럽 각국의 문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B.파스칼은 몽테뉴의 인생관을 비판하면서도 인간을 관찰하는 점에서 그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반응형

블로그의 정보

국어문학창고

송화은율

활동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