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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춘순례서(尋春巡禮序) / 본문 및 해설 / 최남선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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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춘순례서(尋春巡禮序) - 최남선

 

작가 : 최남선(崔南善, 1890 ~ 1957). 사학자문인. 본관 동주(東州:鐵原). 자 공륙(公六). 호 육당(六堂). 아명 창흥(昌興). 세례명 베드로. 자습으로 한글을 깨쳐 1901(광무 5)부터 황성신문에 투고했고 이듬해 경성학당에 입학하여 일본어를 배웠다. 1904년 황실유학생으로 소년반장(少年班長)이 되어 도일(渡日), 도쿄[東京]부립중학에 입학했으나 3개월 만에 귀국했다가 1906년 다시 도일, 와세다[早稻田]대학 고등사범부 지리역사학과에 입학하여 유학생회보인 대한흥학회보(大韓興學會報)를 편집하여 새로운 형식의 시와 시조를 발표했다. 1907년 모의국회 사건으로 퇴학, 이듬해 귀국하여 자택에 신문관(新文館)을 설립하고 인쇄와 출판을 겸했으며 다음해 잡지 소년를 창간하여 논설문과 새로운 형식의 자유시 <()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하는 한편 이광수의 계몽적인 소설을 실어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1909년 안창호(安昌浩)와 함께 청년학우회 설립위원이 되고, 이듬해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를 창설하여 고전을 간행하고 20여 종의 육전소설(六錢小說)을 발간했다. 13년 다시 아이들 보이를 창간했으나 이듬해 폐간되자 다시 청춘(靑春)을 발간하여 초창기 문학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191931운동 때는 독립선언문을 기초하고 민족대표 48인 중의 한 사람으로 체포되어 26개월형을 선고받았으나 다음해 가출옥했다. 22년 동명사(東明社)를 설립, 주간지 동명(東明)을 발행하면서 국사 연구에 전념했다. 24시대일보(時代日報)를 창간, 사장에 취임했으나 곧 사임, 이듬해 동아일보(東亞日報)의 객원이 되어 사설을 썼다. 27년 총독부의 조선사편찬위원회 촉탁을 거쳐 위원이 되고, 32년 중앙불교전문학교 강사가 되었다. 38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만몽일보(滿蒙日報)고문으로 있다가 39년 일본 관동군이 세운 건국대학(建國大學) 교수가 되었고, 귀국 후 43년 재일조선인 유학생의 학병지원을 권고하는 강연을 하기 위하여 도쿄로 건너갔다. 광복 후 우이동(牛耳洞)에 은거, 역사논문 집필에 전념하다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기소되어 49년 수감되었으나 병보석되었다.

 

625전쟁 때 해군전사편찬위원회 촉탁이 되었다가 서울시사(市史) 편찬위원회 고문으로 추대되었고, 그 후 국사관계 저술을 하다가 뇌일혈로 작고했다. 신문화 수입기에서 언문일치(言文一致)의 신문학운동과 국학(國學) 관계의 개척에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다. 이원(利原)의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를 발견하였다. 저서에 창작 시조집 백팔번뇌(百八煩惱), 시조집 시조유취(時調類聚), 역사서 단군론(檀君論)》 《조선역사》 《삼국유사해제》 《조선독립운동사(朝鮮獨立運動史)등 다수가 있다.

 


 본문

우리의 국토는 그대로 우리의 역사이며, 철학이며, 시이며, 정신입니다. 문학 아닌 채 가장 명료하고 정확하고, 또 재미있는 기록입니다. 우리 마음의 그림자와 생활의 자취는 고스란히 똑똑히 이 국토 위에 박혀서 어떠한 풍우(風雨)라도 마멸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나는 믿습니다.

 

나는 우리 역사의 한 작은 학도(學徒)요, 우리 정신의 한 어설픈 탐구자(探究者)로서, 진실로 남다른 애모(哀慕)와 탄미(歎美)와 함께 무한한 궁금스러움을 이 산하대지(山河大地)에 가지는 것입니다. 자갯돌 하나와 마른나무 한 밑동도 말할 수 없는 감격과 흥미(興味)와 또 연상(聯想)을 자아냅니다. 이것을 조금씩 색독(色讀)이나마 하게 된 뒤부터 우리 나라가 위대한 시의 나라, 철학의 나라임을 알게 되고 또 완전, 상세한 실물적(實物的) 오랜 역사의 소유자임을 깨닫게 되고, 그리하여 쳐다볼수록 거룩한 우리 정신의 불기둥에 약한 시막(視膜)이 퍽 많이 아득해졌습니다.

 

곰팡내나는 서적(書籍)만이 이미 내 지견(知見)의 웅덩이가 아니며 한 조각 책상만이 내 마음의 밭일 수는 없게 되었습니다. 도리어 서적과 책상에서 불구(不具)가 된 내 소견(所見)을 진여(眞女)한 상태로 있는 활문자(活文字), 대궤안(大軌案)에서 교정(矯正)받고 보양(補養)을 얻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통절히 느꼈습니다.

 

<중략>

 

우리 국토에 대한 나의 신앙은 일종의 애니미즘일지도 모릅니다. 나의 보는 그것은 분명히 감정이 있으며 웃음으로 나를 대합니다. 이르는 곳마다 꿀 같은 속삭임과 은근한 이야기와 느꺼운 하소연을 듣습니다. 그럴 때마다 나의 심장은 최고조(最高潮)의 출렁거림을 일으키고 실신(失神)할 지경까지 들어가기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때의 나는 분명한 한 예지자(叡智者)의 몸이요, 일대 시인(一大詩人)의 마음을 가지지만, 입으로 그대로 옮기지 못하고 운율(韻律) 있는 문자로 그대로 재현치 못할 때, 나는 의연(依然)한 일범부(一凡夫)며, 일복눌한(一撲訥漢)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섭섭히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나의 작은 재주는 저 큰 운의(韻意)를 뒤슬러 놓기에는 너무도 현격(懸隔)스러운 것이니까, 워낙 애닯고 서운해 할 염치(廉恥)가 없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혹은 유적(遺蹟), 혹은 전설(傳說)에 내일을 기다리기 어려운 것도 있고, 혹은 자연의 신광(神光), 혹은 역사의 밀의(密意)에 모르는 체할수 없어서, 변변치 않은 대로, 간 곳마다 견문고검(見聞考檢)의 일반(一斑)을 기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는 진실로 문장으로 보거나 논고(論考)로 볼 것이 아니요, 또 천 년의 숨은 자취를 헤쳤거나 만인의 심금(心琴)을 울릴 무엇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런대로 우리 국토에 대한 뜨거운 마음이 넘쳐 나온 것이니, 내게는 휴지(休紙)로 버리기 어려운 점도 없지 아니합니다.

 

이러므로, 다만 한 가지 또 어슴푸레하게라도, 우리 정신(精神)의 숨었던 일면이 나타난다면 물론 분외(分外)의 다행입니다. 그렇진 못할지라도, 우리 청전구물(靑氈舊物)에 대한 나의 애처롭고 안타까운 정리(情理)를 담은 것이 혹시나 강호(江湖)의 동정을 산다면, 이 또한 큰 소득입니다. 아무튼 우리 국토의 큰 정신을 노래해 내는 이의 어릿광대로 작은 끄적거림을 차차 책을 모아 갈까 합니다.

 

이제 그 첫 권으로 내는 《심춘 순례(尋春巡禮)》는, 작년 삼월 하순부터 수미(首尾) 50여 일간, 지리산(智異山)을 중심으로 한 순례기(巡禮記)의 전반을 이루는 것이니, 마한(馬韓) 내지 백제인(百濟人)의 정신적 지주였던 신악(神岳)의 여훈(餘薰)을 더듬은 것이요, 장차 해변(海邊)을 끼고 내려가는 부분을 합하여 서한(書翰)의 기록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진인(震人)의 고신앙(古信仰)은 천(天)의 표상(表象)이라하여 산악(山岳)으로써 그 대상을 삼았으며, 또 그들의 영장(靈場)은 뒤에 대개 불교에 전승되니, 이 글이 산악 예찬(山岳禮讚), 불도량 역참(佛道場歷參)의 관(觀)을 주는 것은 이 까닭입니다.

 

적을 것도 많고 적을 방법도 있겠지만, 매일 적잖은 산정(山程)을 발섭(跋涉)하고 가쁜 몸이 침침한 촛불과 대하여 적는데는 이것도 큰 노력이었습니다. 선재(選材)와 행문(行文)이 다 거침을 극(極)한 것은 부재(不材) 이외에도 까닭이 없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고치자니 새로 짓는 편이 도리어 손쉽고, 새로 짓자니 그만 여가가 없으므로 숙소에서 주필(走筆)하여 날마다 신문사로 우송(郵送)하였던 원고를 그대로 배열하게 되었습니다. 후안(厚顔)의 꾸지람은 얼마든지 받겠습니다.

 

행중(行中)에 여러 가지 편의를 주신 연로(沿路)의 여러 대방가(大方家), 특히 각 산(各山)의 법승(法僧)들에게 이 기회에 심대(甚大)한 사의를 드립니다. 또, 남순 소편(南巡小篇)에 다소라도 보람 있는 구절이 있다면, 이는 시종 일관(始終一貫)하게 구책 유액(驅策誘掖)의 노(勞)를 취해 주신 여러분의 현교(顯敎)와 암시에서 나온 것임을 아울러 표백(表白)해 둡니다.

 요점 정리

 작자 : 최남선

 형식 : 수필(기행문)

 성격 : 답사적, 예찬적, 감격적

 특징 : 어려운 한문투의 문장이 많이 쓰였음.

 주제 : 조선 국토에 대한 감격적인 사랑, 우리 국토의 아름다움과 순례의 감동

 내용 연구

 조선(朝鮮) : 조선을 '우리'로 바꿈

 색독(色讀) : 글을 읽을 때 문자 그대로만 해석하며, 그 글의 참뜻은 헤아리지 않고 읽음. 애니미(animism) : 자연계의 모든 사물에 영혼이 존재한다는 생각이나 신앙.

 시막 : 눈꺼풀

 견문고검(見聞考檢) : 보고 듣고 살피어서 안 사실.

 여훈(餘薰) : 남아 있는 향기.

 여훈(餘薰) : 남아 있는 향기.

 시종일관(始終一貫) :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 같음

 유액 : 이끌어 도와줌

 현교(顯敎) : 석가모니가 때와 장소에 따라 알기 쉽게 설명한 설법

 표백(表白) : 생각이나 태도 따위를 드러내어 밝힘

 이해와 감상

최남선이 조선의 국토를 순례하며 느낀 국토에 대한 예찬적 사랑을 적어 놓은 수필이다. 그 첫권으로 낸 '심춘 순례(尋春巡禮)'는, 50여 일간, 지리산(智異山)을 중심으로 한 순례기(巡禮記)의 전반부로서 책상에서 얻는 지식을 떠나 산지식을 얻는 소중한 경험을 담아 놓고 있다. 국토 순례가 이루어졌던 시기가 일제 식민지하임을 고려할 때, 그 감동은 더 크다. 또한 작자는 조선의 국토는 조선의 역사며 철학이며 시며 정신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한 점이 다소 심정주의적 한계가 없는 것은 아니나, 글쓴이는 단순하게 국토를 삶의 터전 정도로 파악하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을 간파할 수 있다. 생활의 자취가 곳곳에 배어 있고, 민족의 철학과 미의식이 배어 있는 그런 다소 신령스러운 존재인 것이다.

 

 그렇다면 글쓴이에게 국토 순례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겠는가? 그것은 작자에게 생활에서 벗어나 국토를 여행하는 일은 작자에게 자유로운 심신을 되찾아 주고, 살아 있는 문자인 대자연에서 움추려든 생각에 일종의 보양을 얻을 수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자는 식민지시절에 훼절함으로 인해 그의 글을 가치를 반감시키고 있는 것이 아쉽다. 글은 항상 글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글에 대한 책임까지 동반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심화 자료

 최남선

1890(고종 27) ∼ 1957. 문화운동가 · 작가 · 사학자. 본관은 동주(東州 : 지금의 鐵原). 아명은 창흥(昌興). 자는 공륙(公六). 호는 육당(六堂) · 한샘 · 남악주인(南嶽主人) · 곡교인(曲橋人) · 육당학인(六堂學人) · 축한생(逐閑生) · 대몽(大夢) · 백운향도(白雲香徒). 서울 출신. 아버지는 전형적인 중인계층 출신인 헌규(獻圭)이며, 어머니는 강씨(姜氏)이다.

 

1895년(고종 32)부터 글방에 다니기 시작하였으며, 1902년 경성학당(京城學堂)에 입학하였고, 1904년 10월 황실 유학생으로 뽑혀 일본에 건너가 동경부립제일중학교(東京府立第一中學校)에 입학하였으나 석 달 만에 자퇴하고 귀국하였다.

1906년 3월 사비생(私費生)으로 다시 일본에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고등사범부 지리역사과에 입학하였으나, 같은 해 6월 이 학교에서 개최된 모의국회에서 경술국치문제를 의제로 내걸자 격분한 일군의 한국인 유학생들과 함께 이 학교를 자퇴하고 귀국하였다.

 

1907년 18세의 나이로 출판기관인 신문관 ( 新文館 )을 창설하고 민중을 계몽, 교도하는 내용의 책을 출판하기 시작하였다. 1908년 근대화의 역군인 소년을 개화, 계몽하여 민족사에 새 국면을 타개하려는 의도로 종합잡지 ≪ 소년 少年 ≫ 을 창간하고, 창간호에 〈 해에게서 소년에게 〉 를 실어 한국 근대시사에서 최초로 신체시를 선보였다.

 

이후 1919년 3 · 1만세운동 때는 독립선언문을 작성하였다. 문학과 문화 · 언론 등 다방면에 걸친 활동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신문관의 설립 · 운영과 ≪ 소년 ≫ · ≪ 붉은 저고리 ≫ · ≪ 아이들 보기 ≫ · ≪ 청춘 靑春 ≫ 등의 잡지 발간을 통하여 대중의 계몽 · 교도를 꾀하는 한편, 창가 · 신체시 등 새로운 형태의 시가들을 발표하여 한국 근대문학사에 새로운 시가 양식이 발붙일 터전을 닦았다. 당시까지 창가 · 신체시를 제작, 발표한 사람은 이광수 ( 李光洙 )가 있었는데 양과 질에서 그를 앞질렀던 것이다.

 

둘째, 그때까지 쓰여온 문장들이 대개 문주언종(文主言從)의 한문투가 중심이었는데 이것을 새 시대에 맞도록 구어체로 고치고 그와 동시에 우리말 위주가 되게 하여 여러 간행물과 잡지 매체를 통해서 그것을 선전, 보급하였다.

이로 인하여 그 이전까지 우리 주변의 지배적 경향인 문어체 문장이 지양, 극복되고, 아울러 낡고 고루한 말투가 없어지는 등 문장개혁이 이루어졌다.

 

 

셋째, 민족문화가 형성, 전개된 모습을 한국사 · 민속 · 지리연구와 문헌의 수집 · 정리 · 발간을 통해 밝히기도 하였다. 이것은 민족사의 테두리를 파악하려는 의도와 함께 그 바닥에는 한국민족의 정신적 지주를 탐구하고 현양하려는 속셈이 깔려 있었다. 나아가 민족주의 사상을 집약시킨 ‘ 조선정신(朝鮮精神) ’ 을 제창하기까지 하였다.

 

한편, 여러 분야에서 방대한 양의 업적을 발표하였는데 이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다섯 분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① 한국사에 대한 연구로, 이는 ≪ 청춘 ≫ 1918년 6월호에 발표한 〈 계고차존 稽古箚存 〉 에서 비롯된다. 이 글은 당시로 보아서는 상당 수준의 논문으로 그 내용이 단군시대에서부터 부여 · 옥저 · 예맥 등에 걸치는 것이었다.

 

1920년대에는 〈 조선역사통속강화 朝鮮歷史通俗講話 〉 · 〈 삼국유사해제 三國遺事解題 〉 · 〈 불함문화론 不咸文化論 〉 · 〈 단군신전(檀君神典)의 고의(古義) 〉 등을 발표하였고, 1930년대 이후에 ≪ 역사일감 歷史日鑑 ≫ · ≪ 고사통 故事通 ≫ 등 방대한 규모의 작업을 이룩하였다.

 

② 문화유산의 발굴 · 정리 및 그 평가 시도로 이는 다시 조선광문회 ( 朝鮮光文會 ) · 동명사 ( 東明社 ) · 계명구락부 ( 啓明俱樂部 ) 등의 단계로 나누어볼 수 있다. 조선광문회 단계에서는 우리 고전소설인 〈 춘향전 〉 · 〈 옥루몽 〉 · 〈 사씨남정기 〉 · 〈 흥부놀부전 〉 · 〈 심청전 〉 · 〈 장화홍련전 〉 · 〈 조웅전 〉 등을 정리, 발간하였고, 동시에 ≪ 동국통감 東國通鑑 ≫ · ≪ 열하일기 熱河日記 ≫ 등 한문 고전들도 복각, 보급하였다.

 

동명사 때에는 ≪ 조선어사전 ≫ 편찬을 기도하였으며, 이는 계명구락부 때로 이어졌다. 이때 한글 연구가의 한 사람인 박승빈 ( 朴勝彬 )과 제휴하여 사전편찬사업을 구체화시켜나갔다. 또한, ≪ 삼국유사 ≫ 의 주석정리 해제를 하고 ≪ 금오신화 ≫ 의 보급판도 간행하였다.

 

③ 국토 산하 순례예찬과 그 현양 노력은 ≪ 심춘순례 尋春巡禮 ≫ · ≪ 백두산근참기 白頭山勤參記 ≫ · ≪ 송막연운록 松漠燕雲錄 ≫ 등으로 대표된다. 이 글들을 통하여 한반도 전역뿐만 아니라 만주와 몽고에 이르기까지 여러 명소 · 고적들을 더듬고 거기서 우리 민족의 옛날을 되새겼다.

 

④ 시조부흥운동을 중심으로 한 민족문학운동은 시조의 창작 활동과 그 이론을 다진 일들로 대표된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민족적 시가 양식으로서 시조가 재정리, 창작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가지고 카프의 계급지상주의에 맞서 다수의 작품을 제작, 발표하였다.

 

이것의 집대성이 창작시조집 ≪ 백팔번뇌 百八煩惱 ≫ 이다. 또한, 〈 조선국민문학으로서의 시조 〉 · 〈 시조 태반으로서의 조선민성(朝鮮民性)과 민속 〉 등을 발표하여 시조부흥운동의 논리적 근거를 세웠다.

 

⑤ 민속학에 대한 연구는 ≪ 동국세시기 ≫ 등 당시까지 사본으로 전해오던 것을 수집, 간행한 것을 비롯하여, 〈 단군론 檀君論 〉 · 〈 신라 경문왕과 희랍의 미다스왕 〉 등의 발표로 나타났으며, 〈 불함문화론 〉 등은 민속학적으로 주목되는 논문이다.

 

그는 단군을 건국의 시조인 개인이 아니라 원시사회의 신앙에 근거를 둔 종교적 제사장으로 이해하였다. 그가 불함문화권으로 주장한 동북아시아계의 여러 민족의 공통된 신앙, 즉 샤머니즘을 배경으로 단군신화를 이해하려고 한 것은 우리 신화와 문화에 대한 최초의 민속학적 연구 시도로 인정되고 있다.

 

이와 같이 다양한 활동으로 인하여 우리 민족문화운동사에 높은 봉우리의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3 · 1운동으로 구금 투옥되고 나서 석방된 뒤 계속 일제의 감시 · 규제를 받아 친일의 길을 걸었다.

 

그리하여 식민지정책 수행 과정에서 생긴 한국사 연구기구인 조선사편수회에 관계를 가졌고, 이어 만주 건국대학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뿐만 아니라 일제 말기에는 침략전쟁을 미화, 선전하는 언론 활동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광복 후에는 민족정기를 강조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비난과 공격의 과녁이 되었다.

 

총체적으로 보면 유능한 계몽운동자였고, 우리 민족의 근대화 과정에 중요한 임무를 담당한 문화운동가의 한 사람이다. 죽은 뒤 1958년 말년에 기거한 서울 우이동 소원(素園)에 기념비가 세워졌고, 1975년 15권에 달하는 방대한 양의 ≪ 육당최남선전집 ≫ 이 간행되었다.

 

≪ 참고문헌 ≫ 六堂崔南善(趙容萬, 三中堂, 1964), 六堂崔南善全集(高麗大學校亞細亞問題硏究所, 玄岩社, 1975), 韓國의 民俗學硏究(李杜鉉, 韓國學入門, 學術院, 1983), 韓國近代詩史(金容稷, 학연사, 1986).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애니미즘<animism>

 무생물계에도 영혼이 있다고 믿는 세계관. 물신숭배(物神崇拜)·영혼신앙(靈魂信仰) 또는 만유정령설(萬有精靈說)이라고도 번역되는 애니미즘이라는 말은 라틴어의 아니마(영혼)에서 나온 말이다. 영국의 인류학자 E.B.타일러가 《원시문화》(1871)에서 이 말을 처음 사용하였는데, 애니미즘적 사고방식은 ‘야만인의 철학’으로써 종교의 기원을 설명하는 동시에, 나아가서는 종교의 근본원리가 되었다고 주장한 데서 비롯된다. 타일러에 의하면 애니미즘적 사고방식은 꿈과 죽음의 경험에서 추리되어 성립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가령 잠자고 있는 동안 몸은 원래의 자리에 그대로 있는데도 멀리 떠나 있는 꿈을 꾼다거나, 또는 죽음 직후에는 외관상 아무 변화는 없으나 살아 있을 때의 상태와는 다른 것을 느낀다. 그래서 육체와 유리되어 활동하는 원리, 즉 영혼을 상정(想定)하게 되었다. 수면과 가사(假死)는 영혼의 일시적 부재(不在)상태이며, 죽음은 그 영원한 부재상태이다.

 그러나 사람이 죽고 난 뒤에도 영혼은 독립하여 활동하기 때문에 그것을 숭배하는 데서 종교가 비롯되었으며, 동물이나 나아가서는 자연물에까지 영혼을 인정함으로써 신의 관념이 생겨났다고 한다. 이같은 타일러의 학설은 주지주의적(主知主義的) 종교관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비판을 받기도 하고, 또한 원시인에게서 꿈이 그처럼 중대한 경험인가 아닌가의 문제를 두고 논란도 있었으나, 이원론(二元論)의 사고양식을 설명하는 양식으로서 아직도 그 가치를 잃지 않고 있다. 보통 사람이 넋을 잃으면 질병에 걸리거나 죽는다고 믿는데, 무당이 행하는 병치료법은 그같이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내어 환자의 육체에 되돌려주는 일이다. 라틴아메리카의 인디오 사회에서는, 인간과 특정의 동물이 넋을 공유하고 있다고 믿는 신앙을 흔히 보게 되는데, 그 상대 동물이 죽으면 사람도 죽는다고 믿고 있다.

 

 金剛禮讚(抄)

 

(1) 靈源洞

골은 깊어지는데 속은 도리어 시원하여 靈邃(영수)한 기운이 얼굴에 쭉쭉 끼 얹힙니다.

사나이다운 전나무, 젊은이 같은 잣나무, 눕기 좋아하는 側柏나무, 감기 좋아는 칡덩굴, 다래덩굴들이 尋常한 듯 尋常치 않은 여러 가지 韻致를 서려놓은 속으로 俗人의 발이 神仙의 걸음을 걷게 합니다.

 

다시 갈림길이 되어서 百塔洞을 左로 두고 右로만가는 것이 靈源洞입니다. 실 같은 길 하나라도 내어주기 아까와하는 密林과 繁葉은 봄에는 꽃의 무더기 될 것, 가을에는 단풍바다가 될 것, 嫩綠繁陰(눈록번음)에는 그대로 기꺼움의 시위가 되어 푸른 물결을 출렁거리는 것, 그 위에는 이름 모를 고운 새와 그 아래에는 숨어흐르는 자지러진 시내가 다투어 歡喜의 心曲을 아룁니다. 소리로 빛으로 기꺼움의 한 世界를 배포하여 가진 靈源洞은 金剛山에서도 특별한 情趣를 길러낼 곳입니다.

 

業鏡臺에서 十里쯤 올라가면 寂靜같은 靈源魔이 地藏峰 밑에 나섭니다. 靈源洞은 金剛山 中에서 가장 깊숙한 곳, 靈源魔은 靈源洞 中에서 가장 깊숙한 곳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이 땅이 太古부터 特殊한 宗敎的사명을 띠워서 깊이 國仙巡禮의 一名蹟이 되고 最近까지도 神敎的·仙道的 祈禱와 修鍊의 靈地로 씌였으며 佛敎에서는 古來로 修禪의 勝地라 하여 禪和子의 結跏가 끊이지 아니합니다.

 

(2) 內八潭

金剛山 가운데 金剛山의 美를 具足하게 體現하고 極度로 發揮한 곳이 어디냐 하면, 異口同聲으로 萬爆洞이라고 대답할 것 입니다. 金剛山은 얼른 말하면 山岳美입니다. 山岳을 만든 岩石의 美, 岩石으로 생긴 峽谷의 美, 峽谷으로 나오는 泉潭溪瀑의 美, 泉潭溪爆에서 映發하는 老樹鬱林의 美, 老樹鬱林에서 陰現點綴한 古寺精監의 美, 이 모든 것이 설키고 덩기고 어울리고 반죽된 大自然의 充足美, 이 모든 것에 얽히고 심박히고 선돌린 神秘玄妙한 傳說美, 이 모든 것 總和가 金剛의 山岳美란 것입니다. 그런데 最大限度로 이 要素를 구비해 가진 것이 첫째 萬瀑洞 溪谷입니다. 金剛山 구경이란 것은 어찌 말하면 萬瀑洞 溪谷 하나를 뚫고 나가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長安寺에서 더듬더듬 들어와서 안무재를 넘고 曉雲洞을 지나 개재로 나가는 核心이 어디냐 하면 자반 가운데 토막 같은 萬瀑洞입니다. 이 首尾는 約 百餘理의 大幹線에 곁가지로 요리조리 돋힌 것이 무엇 무엇하는 洞府泉石들이요, 맨끝 몇 가지가 따로 멀찌감치 뻗어나간 것이 九龍淵 萬草의 六面입니다. 그러므로 金剛山의 다른 구경은 모두 萬瀑洞 구경의 갈개발 附錄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萬瀑洞 中에서 가장 대표적인 淵瀑을 뽑아 무려 여덟 개를 얻으니 그 形相대로 이름을 지어 黑龍, 琵琶(靑龍), 碧波, 眞珠, 龜, 船, 火龍이 그것입니다. 外金剛 玉流洞의 八瀑과 구별하기 위하여 이것을 內金剛 八瀑 약하여 內八瀑이라고 부릅니다. 萬瀑洞에는 이밖에도 有名無名한 여러 淵瀑과 또 淵瀑이 아닌 다른 勝景이 많음은 勿論입니다.

 

(3) 影娥池

깊어가는 골은 한발자국이 새롭게 어울림이 더욱 톡톡하여 들어갑니다. 五賢, 香爐 兩峰이 外界를 隔絶 할 무렵에는 萬瀑洞이 이미 아름다움으로나 그윽함으로써 天地에 나밖에 누가 있느냐를 소리칩니다. 맨 먼저 나서는 盤石의 一泓渟은 映花潭이라고 부르니, 무섭게 하얀 돌이 야멸치게 맑은 물을 담은 것이 우선 精神이 灑落해지며, 이내 臥瀑 하나를 지내면 돌 위에 절구같이 파인 구멍이 있고, 거기에 물이 가득히 고였는데 이것을 玉女洗頭盆이라고 합니다.

 

印峰이란 것을 쳐다보고 訪仙橋라는 외나무다리를 건너면 푹 빠진 바위 홈의 거센 물살이 지나는 이의 下焦試驗을 받습니다. 언젠지 바위에 발붙일 자국을 냈던 것이 오래 물에 갈려서 말발굽 같은 자국이 됐기 때문에 말발굽 같은 자국이 됐기 때문에 말발굽다리라 하는데 물 많을 때에는 萬瀑洞의 一危地로 치는 곳입니다.

 

石崖로 올라가면 얼마 아니하여 金梅月堂의 [樂山樂水 人之常情 而我則登山而笑 臨水而哭云云]의 崖刻을 보고, 그를 조상하는 同時에, 다시 그 눈물로써 저를 조상하게 됩니다. 아름다운의 덤불이요, 기쁨의 더덕인 金剛山에서 오직 한 눈물로 對할 곳은 이곳입니다. 崖刻의 밑은 靑龍(一作 白龍)潭이니 구태여 이 近處에서는 돌이 약간 붉은 기운을 띠어 마치 님을 여의고 울던 당시 梅月堂의 피섞인 눈물에 물든 듯하매 구경보다도 느꺼운 생각이 앞섭니다. 조금 올라가다가 絶崖가 물을 떨어뜨리면 削壁이 그것을 받아서 얌전하게 한 소(沿)를 이룬 것이 있으니 이름조차 반드러운 [影娥池]입니다.

쏟아지는 몫에 큰 바위가 있어 물을 두 갈래로 나누는데 거기에 四仙臺란 刻名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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