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텍쥐베리의 '어린 왕자'에 대하여
by 송화은율
생텍쥐베리의 '어린 왕자'에 대하여 / 전성자
「관계 만듦,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의미와 무의미」
왜 수많은 사람들이 《어린 왕자》와의 만남을 잊지 못해 하는 것일까? 왜 수많은 사람들이 《어린 왕자》와의 만남에서 그토록 커다란 감동을 가지는 것일까?
전래 동화 속의 주인공이 흔히 왕자이듯 쎙 떽쥐뻬리의 이 상징적 동화의 주인공도 왕자다. 서양 전래 동화 속의 왕자는 흔히 의(義)를 행하고 악(惡)을 쫓고, 죽음의 잠에서 공주를 깨어나게 하는 신비한 힘을 지닌다. 어린 왕자 역시 선(善)의 상징이며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신기한 힘을 지니고 있다. 그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줄 아는 동심을 지닌 「어린」 왕자인 것이다.
이 왕자가 상징하는 선(善)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의 고독을 극복할 수 있게 해 주고, 무의미한 삶과 이 세계에 의미를 부여해 주는, 닳아빠진 말이긴 하지만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 인간 사이의 참다운 관계이다.
「외로움」과 「관계 만듦,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의미와 무의미」 이 테마들은 《어린 왕자》의 단순하고도 은밀한 메시지를 해독할 수 있는 열쇠인 듯하다.
어린 왕자는 아주 조그만 별에서 혼자서 산다. 그는 해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슬픔」을 달랜다. 풀 몇 포기 돋아 있는 동그란 별 위, 의자에 홀로 앉아 지는 해를 바라보는 어린 왕자의 쓸쓸한 뒷모습, 우주 공간에 홀로 존재하는 듯한 그의 삶의 조건은 애초부터 은은한 애수(哀愁)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이 우주적 이미지에 우리는 쉽게 작가의 비행사로서의 체험을 연관시키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이 영위하는 모든 삶을 한낱 무의미한 것으로 보이게 하고, 인간의 고독을 깊이 드러내주는 무한한 공간, 황량한 사막, 그 앞에서 느꼈을 인간의 유대에 대한 절실한 욕구, 그런 것들을 우리는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어린 왕자의 작은 별, 그것은 고독의 세계다. 그래서 그는 어느 날 홀연히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의 별에 나타난 장미를 지극히 사랑한다. 장미의 묘사는 여인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장미에 대한 왕자의 성실성은 이기적인 남녀의 사랑의 차원을 넘어서고 있다.
그러나 그는 장미를 이해하는 데 서툴렀으므로, 괴로움 끝에 다른 별들로의 긴 여행을 떠난다. 여행, 떠남, 그것은 구도(求道)의 의미를 지닌다.
그가 만나는 여러 소혹성의 사람들, 그들도 모두 각자 자신의 별에서 혼자 존재한다. 그들은 그들의 고독에서 벗어날 진정한 방식을 외면한 채, 지배, 소유, 추상적 지식, 현실 도피, 혹은 타인(他人)에 의한 자기 확인, 그 모든 헛된 욕구에 집착함으로써 자신의 존재의 공터를 은폐하려 애쓰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왕은 신하를, 허영심 많은 사람은 찬양자를, 지리학자는 탐험가를, 사업가는 소유의 대상을 끊임없이 필요로 한다. 그들은 왜곡된 형태로 타자(他者)를 필요로 한다.
여행의 종착지 지구에서 그는 우정을 설법(說法)하는 여우를 만난다. 여우는 남과 친구가 되는 법을, 「길들이는」법을 가르쳐 준다.
「참을성이 있어야 해. 우선 내게서 좀 떨어져서 이렇게 풀숲에 앉아 있어. 난 너를 곁눈질해 볼 거야. 넌 아무 말도 하지 말아. 말은 오해의 근원이지. 날마다 너 조금씩 더 가까이 다가앉을 수 있게 될 거야……」
남을 이해하고 사랑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참을성 있는 노력, 긴 시간이 필요한 것인가를 이보다 더 단순한 표현으로, 이보다 더 감동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래서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친구가 되어 줄 것을 호소하는 장면은 이 작품 중 가장 아름다운 대목을 이룬다.
「내 생활은 단조롭단다. 나는 병아리를 쫓고 사람들은 나를 쫓지. 병아리들은 모두 똑같고 사람들도 모두 똑같아. 그래서 난 좀 심심해, 하지만 네가 날 길들인다면 내 생활은 밝아질거야. 다른 모든 발자국 소리와 구별되는 발자국 소리를 나는 알게 되겠지……그리고 저길 봐! 저기 밀밭이 보이지? 난 빵을 먹지 않아. 밀은 내겐 아무 소용도 없는 거야. 밀밭은 나에겐 아무것도 생각나게 하지 않아. 그건 서글픈 일이지. 그런데 넌 금빛 머리칼을 가졌어. 그러니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정말 근사할 거야. 밀은 금빛이니까 나에게 너를 생각나게 할 거거든, 그럼 난 밀밭 사이를 지나가는 바람소리를 사랑하게 될 거야……」
사랑은 생활을 「환하게 밝혀 주고」「심심함」을 사라지게 해주고, 아무 의미도 없던 밀밭까지를 사랑하게 해준다.
여우는 삶을 즐겁게 하는, 오늘을 어제와 다르게, 어느 한 시간을 다른 시간과 구별되게 해 주는 의식(儀式)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준다.
이 장면에서의 여우의 가르침에는 실로 이 작품이 전하려고 하는 메시지 거의 모두가 담겨 있다. 그는 또한 「오로지 마음으로만 보아야 잘 보인다」고 말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못된 씨앗을 골라 내고 화산을 정기적으로 청소하며 자신의 별을 가꾸고, 장미를 정성껏 돌보는 어린 왕자의 성실성에서 그가 이미 그러한 지혜를 행해 왔음을 안다. 다른 별들에 사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의 「이상야릇함」과 알약을 먹어 갈증을 없애 버리는 어리석음, 목적 없이 달려가는 사람들의 허망함을 느낄 줄 알고 있다. 일상(日常)에의 안주(安住), 기계적 삶을 그는 용납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는 「상자 속의 양」을 볼 줄 아는 것이다.
밀밭이 여우에게 의미 있는 것, 아름다운 것이 될 수 있듯이, 어린 왕자가 그 중 어느 하나에 살고 있는 까닭에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은 나레이터에게 아름다운 것이 될 수 있다. 온 우주가 의미를 띠게 되는 것이다. 아름다움은 의미 있음과 동의어(同義語)가 되고 있다. 「가로등 켜는 사람」의 행위를 어린 왕자는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 어린이에게 있어서 낡아빠진 헌 인형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친구가 있다고 말하면, 나이는 몇이고 형제는 몇이고, 아버지 수입은 얼마인가밖에 물을 줄 모르는 어른들, 굳어 버린 상상력, 보이는 것에 집착하는 어른들은 그러한 아름다움을 알지 못한다.
보이는 것, 보이지 않는 것과의 대비(對比)로 바꿔 놓을 수 있는 어린이, 어른의 대비는 이 책의 가장 중요한 테마인 것이다.
어른들이 모자라고 하는 그림에서 코끼리를 소화시키고 있는 보아 구렁이를 볼 줄 아는 어린아이의 신성한 상상력, 순수함이야말로 생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에 도달할 수 있는 기본조건이다. 그리하여 순수함을 잃은 어른들은 사물을 직시(直視)하지 못하고 항상 설명을 필요로 하는 어리석은 존재들이다. 우리는 여기서 다분히 동양적인, 유심론적(唯心論的)인 이 작품의 면모를 발견한다.
어린 시절, 어른의 몰이해를 괴로워했으나 이미 거의 어른이 다 되어 있는 나레이터는 어린 왕자를 만남으로써 잊고 있던 어린 시절의 순수함을, 생의 비밀을 다시 감지(感知)한다. 그는 어린 왕자와 함께 사막에 감추어진 샘을 발견하고 함께 그 물을 마시는 것이다.
어린 왕자는 여우의 가르침을 받은 뒤, 장미와 자신의 관계가 어떠한 것이었나를 확인하고 장미에게로 돌아가려 한다. 그래서 뱀에게 물려 형체 없이 사라진다. 사막, 물, 뱀, 죽음, 그것들은 지극히 상징적이다. 사막에 있는, 정신적 갈증에 시달리던 그는 그 갈증을 적셔 줄 수 있는 지혜의 샘을 다시 발견한 것이다.
메마름, 황량함의 광물적 이미지와 물의 이미지의 대조는 이 작품에서 매우 두드러진다. 어린 왕자가 고독을 느끼는, 「메마르고 뾰족뾰족하고 험한 이 지구, 비축한 물이 바닥에 드러나고 있을 때의 사막」과 「영혼에 좋은 물」, 「신비한 눈물의 나라」와 같은 이미지들의 조화가 없다면, 상징이 되고 있는 그 이미지들이 우리의 상상력의 작용을 촉발하는 커다란 힘을 지니지 못했다면, 남을 사랑하는 법을, 「생을 풍요롭게 할,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줄 알라」는 이 책의 전언(傳言)은 공허한 교훈밖에 되지 못했을 것이며, 《어린 왕자》가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아름다움의 많은 부분은 가볍고 부드럽고 일견 유머러스한 톤에 교묘하게 스며 있는, 강요되지 않은 비애감(悲哀感)에서 연유하고 있는 듯하다. 어린 왕자는 자신의 별로 돌아가기 위해 결국 뱀에게 물려 죽는 게 아닌가. 지평선 너머 저쪽으로 소리없이 사라져 버리는 게 아닌가. 그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기에 앞서 우리는 비장하고도 부드러운 감동에 젖게 된다.
그는 영원히 「보이지 않는」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어린 왕자는 왜 죽고 나레이터는 왜 그와 헤어져 슬퍼하는 것일까? 순수성의 상징, 어린 왕자의 죽음, 그것은 순수성이 이 현실 세계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일까. 나레이터가 어린 왕자를 애타게 그리워하는 것은 그가 다시 현실의 메마름에 괴로워한다는 뜻일까.
그런데 기이한 것은 그런 모든 단언을 《어린 왕자》는 거부하고 있는 듯이 느껴진다는 점이다. 「말은 오해의 근원」이라고 여우는 이미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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