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 오디세이 / 본문 일부 및 해설 / 신범순
by 송화은율사이버 오디세이 / 신범순
정보의 새로운 환상 세계
컴퓨터가 발달하면서 우리는 정보의 수집과 처리 그리고 그것의 저장과 전달이라는 차원에서 가히 혁명적인 변화를 겪었다. 이제 수십 권의 책들을 몇 년에 걸쳐서 베끼고, 거기 쓰인 어떤 문구들에 매달려 감동하고 신음하며 질투하고 경쟁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소중하게 자신만이 독점하고 있던 문서와 책들, 비밀스러운 쪽지들의 신비스러운 분위기들이 개인의 서재와 한 가문(家門)의 문서 보관소 그리고 절과 학교, 국가의 은밀한 도서관들 주위에서 사라져 버렸다. 한마디로 말해서 정보의 눈부신 속도는 빛처럼 그 모든 어두운 창고들을 비추고, 마치 태양 아래서 모든 것을 드러내는 풍경처럼 숨겨진 것들을 드러냈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단순히 빛처럼 빠른 정보의 속도에만 전가하는 것은 진실의 일면만을 보는 것이리라. 아마도 우리 모두에게 닥친 이 시대의 노출적 욕망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러한 현상의 껍데기만을 보고 있을 뿐인 것이다. 안에 있던 것들을 몽땅 밖으로 드러내려는 이 시대의 보편적인 욕망은 패션뿐 아니라 주위의 집기들, 도구들, 사무실과 카페, 그리고 저질스러운 텔레비전, 잡지의 사생활 폭로 프로와 음란물 사이에서 전염병처럼 번졌다. 숨겨져 있던 것들을 보고 싶어하는 욕망의 거대한 폭발이 오늘날 이루어졌다. 그러한 욕망은 우리 내면의 가장 깊은 비밀을 들여다보고 싶다는 데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 심오하고 신비스러운 깊이는 점차 사라져 갔다. 신성한 분위기로 감쌀 만한 내면이라는 것이 오늘날 우리에게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정보의 눈부신 발달은 신문, 잡지 ,텔레비전을 거쳐 인터넷에 이르면서 새로운 차원을 획득한다. 근대적 형태의 정보, 예를 들어 신문이나 잡지 같은 것에 나타나는 정보들은 '이야기'에서 단절되었다. 그것은 단편적인 정보들을 그것이 이루어진 삶의 총체적인 문맥으로부터 거칠게 떼어 냈던 것이다. 삶의 역동적인 힘이자 설계도이고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창조력이기도 한 상상력과 삶의 총체성과 관련되는 집단적인 놀이나 축제 그리고 제의적인 상징들이 별로 주목받지 못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사이버 매체를 통해 이루어지는 정보의 무한히 빠른 교환들 속에서 이러한 근대적인 실증주의는 어이없게도 그 자신의 세계 속에서 녹아 사라져가고 있다. 이제 정보들은 순식간에 한곳에 모이고 전 세계의 파편들을 순식간에 이어 놓는다. 그 세계를 항해하는 사이버 오디세이는 자신을 부르며 홀리는 사이렌들의 표정과 소리를 즐기면서 이익과 쾌락 그리고 깨우침의 여러 경계선을 넘나든다. 여기서 그는 매혹 속에 숨어 있는 권력의 이해 관계들 그리고 그러한 것들 사이에 벌어지는 엄청난 투쟁들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하략>
지은이 : 신범순
갈래 : 수필
성격 : 논리적, 예시적, 비평적
주제 : 사이버 시대에 문학의 새로운 가능성과 문제점
특징 : 컴퓨터의 발달과 인터넷의 광범위한 확산으로 일어난 정보 혁명 시대에 인간의 삶은 가히 혁명적인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이 글은 그러한 변화 속에서 문학의 존재 양식이 과연 어떠한 것이며,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 모색하고 있다.
개관 : 이 글은 인터넷을 통해 떠오르고 있는 현대적 가상 공간이 우리들의 상상력과 현실을 어떻게 변모시키고 있는가 하는 것을 주제로 한 에세이이다. 정보의 발달이 가져온 가상 세계를 전형적으로 극화하고 있는 영화 매트릭스를 통해서 환상과 현실이 점차 구분되기 어려운 시대가 도래하고 있음을 주목하면서 문학의 정체성은 무엇이고, 앞으로 문학의 역할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이 글은 대중 매체의 거대한 성장 속에서 문학의 과제와 임무는 무엇인가 라는 고민이 절박한 것임을 인식시키고 있다.
출처 : 신범순 글 / 깨어진 거울의 눈 - 문학이란 무엇인가(2000)
정보의 새로운 환상 세계
컴퓨터가 발달하면서 우리는 정보의 수집과 처리 그리고 그것의 저장과 전달이라는 차원에서 가히 혁명적인 변화를 겪었다[인터넷이 일반화된 세상의 도래를 의미하고 있음 ]. 이제 수십 권의 책들을 몇 년에 걸쳐서 베끼고, 거기 쓰인 어떤 문구들에 매달려 감동하고 신음하며 질투하고 경쟁하던 시대는 지나갔다[컴퓨터와 같은 전자화된 상황에 의해 구시대의 창작 방법이 도전을 받고 있다는 것]. 소중하게 자신만이 독점하고 있던 문서와 책들, 비밀스러운 쪽지들의 신비스러운 분위기들이 개인의 서재와 한 가문(家門)의 문서 보관소 그리고 절과 학교, 국가의 은밀한 도서관들 주위에서 사라져 버렸다[컴퓨터와 인터넷의 눈부신 발전으로 인해서.]. 한마디로 말해서 정보의 눈부신 속도는 빛처럼 그 모든 어두운 창고[폐쇄적인 창작 방법]들을 비추고, 마치 태양 아래서 모든 것을 드러내는 풍경[열린 창작 방법]처럼 숨겨진 것들을 드러냈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단순히 빛처럼 빠른 정보의 속도에만 전가하는[남에게 덮어 씌우는] 것은 진실의 일면만을 보는 것이리라. 아마도 우리 모두에게 닥친 이 시대의 노출적 욕망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러한 현상의 껍데기만을 보고 있을 뿐인 것이다[심층적인 문제 분석을 해야함을 의미]. 안에 있던 것들을 몽땅 밖으로 드러내려는 이 시대의 보편적인 욕망은 패션뿐 아니라 주위의 집기들, 도구들, 사무실과 카페, 그리고 저질스러운 텔레비전, 잡지의 사생활 폭로 프로와 음란물 사이에서 전염병처럼 번졌다[인터넷의 역기능]. 숨겨져 있던 것들을 보고 싶어하는 욕망의 거대한 폭발이 오늘날 이루어졌다. 그러한 욕망은 우리 내면의 가장 깊은 비밀을 들여다보고 싶다는 데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 심오하고 신비스러운 깊이는 점차 사라져 갔다. 신성한 분위기로 감쌀 만한 내면이라는 것이 오늘날 우리에게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정보의 눈부신 발달은 신문, 잡지 ,텔레비전을 거쳐 인터넷에 이르면서 새로운 차원을 획득한다. 근대적 형태의 정보, 예를 들어 신문이나 잡지 같은 것에 나타나는 정보들은 '이야기'에서 단절되었다. 그것은 단편적인 정보들을 그것이 이루어진 삶의 총체적인 문맥으로부터 거칠게 떼어 냈던 것이다. 삶의 역동적인 힘이자 설계도이고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창조력이기도 한 상상력과 삶의 총체성과 관련되는 집단적인 놀이나 축제 그리고 제의적인[제사나 의식적인] 상징들이 별로 주목받지 못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사이버 매체를 통해 이루어지는 정보의 무한히 빠른 교환들 속에서 이러한 근대적인 실증주의[모든 초월적인 사변(思辨)을 배격하고 관찰이나 실험으로써 검증할 수 있는 지식만을 인정하려는 태도. 밀, 마흐 등이 대표자이다.]는 어이없게도 그 자신의 세계 속에서 녹아 사라져가고 있다. 이제 정보들은 순식간에 한곳에 모이고 전 세계의 파편들을 순식간에 이어 놓는다. 그 세계를 항해하는 사이버 오디세이[인터넷에서 정보를 찾아 서핑하는 이를 말함/ 모험자, 방랑자 등의 의미]는 자신을 부르며 홀리는 사이렌[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바다 괴물로 상반신은 여자, 하반신은 새의 모습을 하고 있고, 복수형은 Seirenes이다. 처음에 페르세포네의 시녀였는데, 페르세포네가 하이네스의 꾐에 넘어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벌을 받았기 때문에, 또는 페르세포네의 탐색용으로 신에게서 날개를 얻어 날개 달린 괴물이 되었다고 한다. 아름다운 노랫소리로 뱃사람을 유혹하여 죽게 한다고 하는데 오르페우스는 리라를 연주하며 대항하여 선원들을 구하였다. 또 호메로스에 의하면 이들은 스킬라와 카리브디스(소용돌이) 근처에 살면서 뱃사람들을 괴롭혔는데, 그리스 영웅 오디세우스는 마녀 키르케의 조언에 따라 선원들의 귓구멍을 밀랍으로 막아 세이렌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게 함으로써 위험을 벗어났으나, 그 자신은 유혹에 빠져 배를 엉뚱하게 몰지 못하도록 자기의 몸을 돛대에 묶게 하고서 노랫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세이렌과 관련된 또다른 이야기로는 아르고선(船)이 그곳을 지나갈 때 오르페우스가 너무도 멋지게 노래를 불러 아무도 세이렌들의 노랫소리를 듣지 못했다는 경우도 있다. 훗날의 전설에 따르면 세이렌들은 이러한 실패가 한두 번 있게 되자 자살했다고 한다. 예술작품에서는 처음에는 머리가 여자인 새로, 나중에는 때때로 새의 날개와 다리를 가진 여자로 표현되었다. 세이렌의 전설은 2가지 요소, 곧 조녀(鳥女)라는 동방적 이미지와 초기 항해의 위험에 관한 원시적인 이야기가 결합되어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인류학자들은 이러한 동방적 이미지를 영혼새(soul-bird), 즉 살아 있는 생명을 훔쳐 그 운명을 함께 하는 날개 달린 유령으로 설명한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세이렌은 하르피이아와 비슷하다. 경보(警報) 등의 뜻으로 쓰이는 사이렌은 여기에서 비롯된 말이다.]들의 표정과 소리를 즐기면서 이익과 쾌락 그리고 깨우침의 여러 경계선을 넘나든다. 여기서 그는 매혹 속에 숨어 있는 권력의 이해 관계들 그리고 그러한 것들 사이에 벌어지는 엄청난 투쟁들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미 사이버 매체의 환상 공간이 차지하는 그 깊이와 넓이를 우리 시대의 문학은 거절할 수 없게 되었다[시대의 변화에 대처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진지한 문인들이 탐색하고 논의하며 이야기하고 싶었던 세계의 일반적인 주제들이나 모티프들이 좀 더 현대적으로 변모된 모습을 하고 이 사이버 매체 속에서 자신들의 영토를 늘려가고 있다. 문학이라는 범주도 이 속에서 자신의 영토를 확보하고 있으며, 사이버 문인들은 동호인 그룹을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환상 장르라는 독자적인 장르마저 탄생하였다. 사이버 공간 속에서 소설은 중세적인 신화와 미래적인 가상 그리고 컴퓨터 시뮬레이션[(simulation) : 여러 가지 현상의 복잡한 과정에 대해 이와 유사하면서도 간단한 수치적·물리적 모델을 사용하여 실험하고 그 결과를 계산적으로 처리하는 기법의 총칭으로 '모의실험'이라고도 한다. 즉, 시간·비용·환경 등 여러 가지 요인을 모델화한 다음, 이들 요인을 동적으로 변화시켜 가며 모델에 대해 평가·이해함으로써 보다 효율적으로 시스템설계를 할 수 있도록 하는 문제해결기법] 전략게임들을 뒤섞으면서 기묘한 환상 소설로 나아갔다. 시는 비록 여기서 발걸음이 늦기는 했지만 최근의 시도처럼 백 명 이상의 시인들이 참여해서 만들어 가는 하이퍼텍스트[(hypertext) : 하이퍼텍스트는 사용자의 선택에 따라 관련있는 쪽으로 옮겨갈 수 있도록 조직화된 정보를 말한다. 이러한 관련정보의 실체를 링크, 또는 하이퍼링크라고 부른다. 하이퍼텍스트는 월드와이드웹의 발명을 이끈 주요개념이 되었는데, 웹이란 결국은 많은 수의 하이퍼텍스트 링크에 의해 거대한 량의 정보내용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하이퍼텍스트라는 용어는 테드 넬슨이 자신의 Xanadu 시스템을 설명하기 위해 처음 사용] 시를 선보였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쌍방향의 시', '국민시' 라는 명칭도 새롭게 만들어졌다. 이러한 현상들은 아마도 근대 문학이 탄생된 이후 문학이 겪게되는 가장 혁명적인 변화의 하나가 될 것이다. 다소간은 비전문적인 문학 집단처럼 보이는 이 사이버 문학은 그 미래의 가능성을 점쳐 볼 때 결코 무시될만한 것이 아니다. 문학 자신이 이미 정보 매체의 발달과 운명을 함께 해 왔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이제 우리 문인들은 이러한 현상을 기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제 새로운 문학의 지평이 열리고 있으며 그 현상은 알 수 없는 지대[자연적, 또는 인위적으로 한정된 일정 구역]를 향해 엄청난 잠재력을 열어제치면서 전개되고 있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해야 할 것이다.
매트릭스 [The Matrix : matrix는 모체, 자궁, 세포 간질, 합금의 바탕 등의 뜻으로 쓰이는 말]세계
인터넷은 외부 세계를 가상 공간 속에 펼쳐 놓으면서 외부 현실을 무력화시키는 힘을 진전시켜 왔다. 인터넷 서점 아마존[on line]은 복잡하게 우편을 통해 주문하고 배달하던 것들을 단숨에 그 안에서 처리할 수 있도록 하여 외부의 서점[off line]들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인터넷 백화점들이 우후죽순[(雨後竹筍) : 비가 온 뒤에 여기저기 솟는 죽순이라는 뜻으로, 어떤 일이 한때에 많이 생겨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처럼 생겨나고 인터넷 자동차 판매 사이트에 벌써 거리에 있는 기존의 자동차 판매망들이 위험을 느껴 시비를 걸고 있다. 거대한 빌딩과 복잡한 사무실 그리고 수많은 인력들을 한꺼번에 무력화시키는 이 가상 공간의 세계는 영화 '매트릭스[1999년 제작된 SF영화로 인공 두뇌의 컴퓨터가 지배하는 2199년을 배경으로 한 영화로 레리 위쇼스키 감독, 키아누 리브스 주연으로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던 영화 작품]'에서 멋진 상상력으로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거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분명 이러한 가상 공간이 가지고 있는 악마적 마력에 인간들이 모두 사로잡혀 스스로 몰락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정보의 교환과 구축 시스템은 나중에는 인간의 손에서 독립하여 오히려 자신을 만들어 놓은 인간을 지배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서양에서는 이제 고전전적인 주제가 된 이 테마를 새롭게 만든 것 이상으로 주목할 만한 면모가 있다. 그것은 이 사이버 공간 속에서 벌어지는 사이버 존재들의 삶이 바로 현실적인 존재들의 삶과 더 이상 구분되지 않도록 긴밀하게 접합시킨 데 있다[장주지몽(莊周之夢) : 나와 외물(外物)은 본디 하나이던 것이 현실에서 갈라진 것에 불과하다는 이치를 비유적으로 설명하는 말.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었다가 깬 뒤에 자기가 꿈속에서 나비가 되었는지 원래 나비였던 자기가 꿈속에서 장주가 되었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로, 장자 사상의 으뜸을 이룬다.]. 주인공들은 사이버 프로그램들 속에서 여러 가상적인 존재가 되고 가상적인 현실을 살아가지만 그것들은 그저 가상으로 그치지 않는다. 마치 전략 게임처럼 게이머가 조작하는 가상 공간의 한 인물은, 그것이 실제 인간을 닮을 정도로 정교해질수록 그것을 조작하는 실제 인물과 거의 동일하게 느껴지게 된다. 이 영화는 이 느낌을 더욱 증폭하여 마치 가상 현실을 생생한 현실과 거의 구별할 수 없게끔 만들어 놓았다. 가상 공간에서의 전쟁과 공포 그리고 광기와 사랑은 모두 생생하게 현실적인 것이 된다.
이 영화에서 또 한 가지 느낄 수 있는 것은 이렇게 현실과 가상이 복합되어 있는 세계에서 과연 한 인간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영화 '토탈리콜[기억의 정체성이라는 철학적 이슈를 다룬 공상과학 영화로 1995년 제작된 화성과 지구를 무대로 한 SF영화. 폴 베호펜 감독, 아놀드 슈왈제너거. 샤론 스톤 주연]'에서 더욱 선명하게 전면에 나섰던 주제이기도 하다.
사이버 세계의 확장은 현실의 삶 속에 파고들어 인간의 존재와 사유를 변모시키고 있음이 이러한 영화에서 실감나게 표현되고 잇다. 오래된 케케묵은 냄새가 나는 문자들은 컴퓨터의 키보드 판에서, 이 사이버 세계를 들락거리는 입구에서만 인간의 오랜 친구이자 영원한 동반자처럼 남아있다.
문학은 물론 문자 자체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절대 아니다. 문자는 우리의 상상력이나 사유, 그리고 경험의 기록들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고정시킬 수 있도록 해 준다. 그러한 것들을 자신의 영토 속에서 새롭게 조합할 수 있도록 해 줄 때만이 문학에서 문자의 역할은 의미가 있는 것이 된다. 사이버 시대에 문학은 단지 문자를 추월해 가는 영상 매체라거나 정보 매체와의 대결 의식이라는 자기 편향적인 시각으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다. 이미 환상 소설은 옛날의 문자들이 오늘날 사이버적인 세계 속에서 어떻게 새로운 모습으로 의미와 기능과 환상을 만들어 내는 지 보여준다. 서양 중세의 기이한 환상들이 미래적인 가상 세계와 맞물리면서 시공을 초월하는 이야기들을 창조하고 있다. 이러한 문학의 새로운 징후들 속에서 우리는 '위대한 개인'의 자리, 한 사회의 문화에서 전위를 차지하면서 영웅적으로 웅변을 토하던 그러한 개인이 사라지는 것을 보게 된다. 완벽하게 자신의 웅장한 체험들을 깊이 있는 성찰 속에서 쏟아내며 세상에 대한 거울 세계를 만들어 가던 예술가들이 이제는 여기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사이버 공간은 그 한 측면에서는 대중들의 놀이 공간이다. 이곳은 쾌락적이고 매혹적인 정보들이 흘러 들어와 출렁대는 바다가 된다. 이곳에서 모든 것은 재빠르게 스쳐가면서도 순식간에 그곳에 빨려들어 오도록 만들어야 하는 마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문학은 이 공간 속에서 이 마력의 법칙 속에 자신을 맡길 필요는 없다. 오히려 문학은 이 공간의 그러한 법칙에 대해 사유하고 성찰하는 것으로서 존재해야 한다. 그리고 사이버 공간 속에서 우리의 삶은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묻는 비판적인 사유자로서 자신을 정립해야 할 것이다. 문학은 여전히 책으로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러한 사이버 세계의 외부에 남아 있으면서 그 사이버 공간에 대해 감독하고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이버 세계의 밖에서 그 속에 뛰어들기 이전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풀어야 하기 때문이다. 영화 '매트릭스'의 주인공들은 사이버 프로그램 속에 뛰어들기 전에 자신의 인생에 대한 한없는 사랑과 고통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고 있었다. 그러한 굳건한 자각이야말로 그 환상 공간 속에서의 결투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나갈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우리의 문학이 처해 있는 상황도 이러한 것과 그리 멀리 떨어진 것은 아닌 것 같다. [사이버 시대에서의 문학의 역할을 의미함]
오디세우스(Odysseus) : 일명 율리시스(Ulysses) : '오디세이'의 주인공인 '오디세우스'의 라틴 어 이름.
호메로스에 따르면 라이르테스와 안티클레이아(파르나소스의 교활한 아우톨리코스의 딸)의 아들로 이타카의 왕이었으며 아내인 페넬로페와의 사이에 텔레마코스를 낳았다(뒤에 나온 전설에서는 시시포스의 아들로 키르케·칼립소를 비롯한 여자들과의 사이에서 아들들을 두었다고도 함). 호메로스는 오디세우스를 뛰어난 지혜·언변·기략·용기·인내를 지닌 인물로 그리고 있다. 〈일리아스 Iliad〉에서 오디세우스는 그리스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인간관계의 위기를 해결하는 데 가장 알맞는 인물으로 등장하며, 그의 용기와 재주가 계속해서 이야기된다.
오디세우스가 방황 끝에 마침내 가정과 왕국을 되찾는다는 것이 〈오디세이아Odyssey〉의 중심 주제이며, 전24권으로 된 이 서사시에는 그가 목마를 이용해 트로이를 점령하는 장면도 자세히 그려져 있다. 제6~13권은 트로이에서 이타카로 가는 도중에 벌어지는 모험을 그리고 있다. 처음에 그는 로토파고스땅에 가서 환각상태에 빠진 동료들을 아주 어렵게 구해낸다. 포세이돈의 아들인 키클롭스족의 폴리페모스와 대결해 그의 외눈마저 멀게 하고 양의 배에 매달려 그의 동굴에서 빠져나온다. 12척의 배 중에 11척을 사람을 잡아먹는 라이스트리고네스족에게 잃고, 마녀 키르케의 땅에 도착해 그녀가 돼지로 만들어버린 부하들을 구해낸다. 그 다음에는 죽은 영혼의 땅을 찾아가 테베의 뱃사람 티레시아스에게서 포세이돈의 분노를 가라앉힐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낸 다음, 세이렌과 스킬라, 카리브디스, 태양의 가축 등을 만나게 되는데 부하들은 그의 경고를 무시한 채 식량을 위해 가축을 약탈한다. 그다음 폭풍 속에서 오디세우스만 살아 남아 칼립소라는 목가적인 요정의 섬에 이르게 된다. 거의 9년 동안 칼립소에 머물던 그는 마침내 그곳을 떠나 이타카에 도착했으며 그가 방황하는 오랜 세월 동안 아내 페넬로페와 아들 텔레마코스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의 충실한 개와 유모 외에는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으나, 그가 옛날에 쓰던 활을 쏘아보라는 아내의 시험에 아테나 여신의 도움으로 성공하여 자신의 신분을 증명해보였다. 그리고는 텔레마코스의 도움을 받아 페넬로페의 구혼자들을 죽이고, 페넬로페의 남편과 이타카 왕으로서의 지위를 되찾는다.
〈오디세이아〉에서 오디세우스는 뛰어난 계략과 속임수를 쓰지만, 동시에 용기·충성심·관대함도 보인다. 그리스 고전 작가들은 그를 지조없는 정치인으로, 때로는 현명하고 명예로운 정치가로 표현하며, 철학자들은 그의 지성과 지혜에 경탄했다. 베르길리우스나 스타티우스 같은 로마의 작가들은 오디세우스를 로마의 모시(母市)인 트로이의 파괴자로 취급해 경멸했지만, 호라티우스나 오비디우스 같은 작가들은 그를 찬미했다. 초기 그리스도교 작가들은 그를 지혜로운 순례자로 높이 평가했고, 극작가들은 정치가로서 그가 지닌 잠재력을 탐구했으며, 낭만주의자들은 그를 바이런과 같은 모험가로 보았다. 사실 각 시대는 '많은 특성을 지닌 인물'인 그를 원형을 파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나름대로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매트릭스(The Matrix)
인간의 기억을 지배하는 가상현실, 매트릭스 2199년. 인공 두뇌를 가진 컴퓨터(AI: Artificial Intelligence)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인간을 가축처럼 인공 자궁(子宮: 인큐베이터)에서 재배해 에너지원으로 활용하는 끔찍한 시대다. AI에 의해 뇌세포에 '매트릭스'라는 프로그램(내용은 1999년의 가상 현실)을 입력당한 인간은, 매트릭스 프로그램에 따라 평생 1999년의 가상 현실을 살아간다. 프로그램 안에 있는 동안 인간의 뇌는 AI의 철저한 통제를 받는다. 인간이 보고 느끼는 것들은 항상 그들의 검색 엔진에 노출되어 있고, 인간의 기억 또한 그들에 의해 입력되고 삭제된다. 그러나, 이러한 가상 현실 속에서 진정한 현실을 인식할 수 있는 인간은 없다. 매트릭스 밖은 가상 현실의 꿈에서 깨어난 유일한 인간들이 생존해 있는 곳.
한편, AI의 인큐베이터에서 탈출해 인류의 구원자를 찾아나선 사람들이 있는데, 바로 모피스(Morpheus: 로렌스 피쉬번 분)를 리더로 한 일단의 해커들. 그들은 광케이블을 통해 매트릭스에 침투하고 매트릭스 프로그램을 응용해 자신들의 뇌 세포에 각종 데이터를 입력한다. 그들의 당면 목표는 인류를 구원할 영웅을 찾아내는 것. 그들은 AI 통제 요원들의 삼엄한 검색망을 뚫고 매트릭스 안에 들어가 드디어 오랜 동안 찾아헤매던 '그'를 발견한다. '그'는 유능한 컴퓨터 프로그래머, 토머스 앤더슨(Thomas Anderson: 키누 리브스 분). 낮에는 평범한 회사원으로 살아가지만, 밤마다 네오(Neo)라는 이름으로 컴퓨터 해킹에 나서는 그는 모피스와 그의 동료인 매혹적인 여인 트린(Trinity: 캐리-앤 모스 분)에게서 조심스레 매트릭스에 대한 단서를 얻는다.
알 수 없는 두려움 속에서 매트릭스의 실체를 추적해 나가는 네오는 마침내 또다른 숨겨진 세계, 매트릭스 밖의 우주를 만나 가상 현실의 꿈에서 깨어난다. 그리고 AI에게 양육되고 있는 인간의 비참한 현실을 확인하고 매트릭스를 탈출한 네오는 모피스의 도움으로 컴퓨터 프로그램 훈련을 통해 사이버 전사로 거듭난다. 한편, 모피스의 동료 중 사이퍼(Cypher: 죠 팬토리아노 분)는 끊임없는 기계들의 위협과 공격으로 인한 두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매트릭스 안의 가상 현실로 들어가기 위해 동료들을 배신한다. 네오와 모피스 일행이 매트릭스 안에 잠입한 사이, 사이퍼는 광케이블을 교란시켜 그들이 매트릭스에서 빠져나올 출구를 봉쇄해 버리자, 네오 일행은 엄청난 괴력을 지닌 해커 제거반과 사투를 벌인다.
매트릭스 2 - 리로디드 (The Matrix Reloaded)
1편의 엔딩 크레딧과 함께 인류를 구원해야 하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며 하늘로 날아오른 네오(키아누 리브스). 내일 이 전쟁이 끝난다면, 한번 싸워 볼만하지 않을까...? 목숨도 걸어 볼만 하지 않을까...? 모피어스(로렌스 피쉬번)와 트리니티(캐리-앤 모스)가 전에 자신에게 던졌던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는 네오는 마침내, 중대한 결정을 내린다.
시온이 컴퓨터 군단에게 장악될 위기에 처하면서, 네오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더 큰 통제력을 갖게 된다. 이제 몇시간 후면 지구상에 남은 인류 최후의 보루인 시온이 인간 말살을 목적으로 프로그래밍 된 센티넬 무리에 의해 짓밟히게 될 터... 그러나 시온의 시민들은 오라클의 예언이 이루어져 전쟁이 끝날 것이라는 모피어스의 신념에 용기를 얻고, 네오에게 모든 희망과 기대를 걸어보기로 한다.
서로에 대한 사랑의 힘으로, 스스로에 대한 믿음으로 용기를 얻은 네오와 트리니티는 모피어스와 함께 인간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시스템에 맞서기 위해 '매트릭스'로 돌아간다. 그리고, 수소문 끝에 매트릭스의 심장부로 그들을 안내할 '키메이커'의 행적을 찾아낸 트리니티와 모피어스. 하지만, '키메이커'는 신출귀몰한 악당 트윈스에게 철저하게 감시당하고 있다. 시스템에 대항하기 위해 '키메이커' 구출이라는 위험한 임무를 감행하는 세 사람.
한편, 에이전트 스미스(휴고 위빙)는 네오에 대한 불타는 복수심으로 시스템에 불복종하게 되고, 그 결과 삭제될 위기에 처한다. 이제 그는 도망자의 신세가 되어, 계속 네오를 추적한다. 한때 자신이 그토록 경멸했던 인간성을 어느새 자기 자신도 갖게된 스미스는 복수를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데...
'매트릭스'의 내부 구조로 깊이 들어갈수록, 그리고, 인류의 운명을 좌우할 자신의 역할에 눈 떠 갈수록, 네오는 더 큰 저항과 더 무서운 진실에 직면하게 된다. 그리고 상상할 수 없는 불가능에 가까운 선택을 강요 받는다. 사랑과 신념, 목적과 명분... 이 모든 것의 합류점에서 네오는 자신이 택한 길을 따라가야 한다. 그는 자문한다. '만약 내가 못해낸다면...?' '만약 실패한다면...?' 대답은 한가지 뿐이다. 시온이 멸망할 것이라는 것. 그리고 마침내... 인류의 운명을 건 필사의 전투가 시작된다!!
매트릭스 3 - 레볼루션 (The Matrix Revolutions)
2199년, 시스템이 인간을 지배하는 세상. 인간들은 태어나자마자 인공 자궁 안에 갇혀 기계들의 생명 연장을 위한 에너지로 사용되고 뇌세포에 매트릭스라는 프로그램을 입력 당해 평생 기계에 의해 설정된 가상 현실을 살아간다. 가상 현실의 꿈에서 깨어난 인간들은 '시온'이라는 세상을 건설하고 인류를 구원할 영웅 '그'를 찾아 나선다. 마침내 발견한 '그'는 낮에는 평범한 회사원으로 밤에는 '네오'라는 이름으로 컴퓨터 해킹을 하는 컴퓨터 프로그래머, 토마스 앤더슨(키아누 리브스). 앤더슨은 트리니티(캐리 앤 모스)라는 여인에게 이끌려 매트릭스 밖의 우주를 만나면서 모든 진실과 직면하게 된다. 숨겨진 진실을 알게 된 앤더슨은 이제 '네오'라는 이름으로 인류를 구원해야 하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게 된다.
'시온'은 센티넬이라는 기계군단에게 장악될 위기에 처하고, 자신의 능력에 대한 더 큰 통제력을 갖게 된 네오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트리니티, 모피어스(로렌스 피쉬번)와 함께 시스템에 맞서게 된다. '매트릭스'의 내부 구조로 깊이 들어갈수록, 인류의 운명을 좌우할 자신의 역할에 눈 떠가던 네오는 '설계자'를 만나 자신의 존재가 설계자에 의해 만들어진 통제 시스템에 불과하다는 충격적인 진실에 직면한다. 그리고 '사랑인가, 인류의 구원인가!'라는 불가능에 가까운 선택을 강요 받는 네오. 둘 중 하나는 포기해야 한다!
진실을 찾는 여정에 한걸음 더 접근하게 된 네오. 그러나 그 와중에 능력을 소진하고 매트릭스와 현실세계의 중간계를 떠돌게 된다. 한편, 기계들이 인간말살을 목적으로 인류 최후의 보루 '시온'으로 침공해오자 인간들은 인류의 미래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인 전투를 벌인다. 그러나 베인의 몸 속에 침투한 에이전트 스미스(휴고 위빙)가 본 모습을 드러내면서 네오에게는 예기치 못한 새로운 변수가 생긴다. 매순간 세력이 커져가면서 기계들의 통제권까지 벗어난 스미스는 현실 세계와 매트릭스는 물론 기계도시까지 말살할 야욕을 불태운다. 이에 네오에게 마지막 조언을 건네는 오라클(매리 앨리스). 네오는 오라클 역시 매트릭스라는 거대한 구조 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프로그램에 불과할 수 있음을 알면서도 그녀의 조언을 받아들인다. 니오베(제이다 핀켓 스미스)의 도움으로 네오와 트리니티는 일찍이 그 어느 인간도 가본적이 없는 세계, 기계 도시의 심장부로 잠입한다. 그곳에서 기계 세상의 절대 권력자(DEUS EX MACHINA)를 만나 파멸 직전의 인류를 구원키 위한 최후의 카드를 던지는데... 이제 드디어 인류 최후의 거대한 진실이 그 베일을 벗는다! (출처 : http://movie.naver.com)
토탈 리콜(Total Recall )
기억의 정체성이라는 철학적 이슈를 다룬 공상과학 영화로 서기 2084년. 어느 신도시에서 광산일을 하고 사는 퀘이드는 로리라는 미모의 아내와 행복하게 살아가지만 밤마다 이상한 꿈을 꾸게 된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화성에서 이름도 알 수 없는 갈색머리의 아내와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것이 자꾸 꿈으로 나타나자 퀘이드는 리콜이라는 여행사를 찾아간다. 이곳은 싼값으로 우주 여행을 다녀온 것처럼 뇌 속에 기억을 이식시켜줌으로써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복해서 이식을 받을 경우 인체에 악영향을 주는데, 퀘이드 역시 이런 이유로 커다란 충격에서 깨어나 놀라운 사실들을 알게 된다. 지구의 식민지인 화성의 행정책임을 맡고 있는 코하겐은 지구의 혼란을 이용해서 화성을 자신의 왕국으로 삼고 독재를 마음껏 휘두른다. 오랫동안 코하겐의 오른팔로 일해오던 하우저는 어느 날 자신이 그동안 불의의 편에 서서 일해왔음을 깨닫고 코하겐에게 정면으로 맞선다. 코하겐은 하우저의 뇌에 퀘이드라는 인간의 기억을 이식시켜서 지구에서 살게 했는데, 아내 로리와 직장의 사장 해리, 그리고 동료들 모두가 코하겐의 부하들로, 자신을 감시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코하겐은 이들의 추격을 받으며 간신히 화성으로 달려가 꿈에서 만나곤 하던 갈색머리의 여자가 진짜 아내 멜리나라는 사실을 알아낸다. 화성은 코하겐이 인간이 숨쉬는 대기를 제한시켜 반군과 정부군과의 전투가 한창인 혼란한 상황이었다. 또한 코하겐은 자신의 독재 통치를 유지하기 위해 외계인이 만든 자연 대기 제조장치를 숨기고 공기를 무기로 화성인들을 통제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태양광선으로부터의 해로운 물질을 차단하는 대기가 없어 많은 화성인들이 끔찍한 모습의 돌연변이로 태어나고 있었다. 퀘이드와 멜로나는 택시 기사에게 속아 코하겐에게 사로잡히고, 다시 정신 이식을 받는 위기일발을 맞지만, 극적으로 탈출한다. 멜로나와 공기제조장치를 가동하고, 이를 막으려던 코하겐은 도움밖으로 떨어져 처참하게 죽는다. 공기제조장치에서 내뿜는 엄청난 공기는 곧 지구와 같은 아름다운 대기가 조성되고, 퀘이드와 멜로나는 화성인들과 함께 아름다운 풍경에 흠뻑 취한다.
(출처 : http://movie.naver.com/search/movie_detail.php?code=A0800#hong)
전위예술 / 아방가르드 ( 前衛藝術 : Avant-garde Art ) :
20세기 초 프랑스와 독일을 중심으로 자연주의와 고전주의에 대항하여 등장한 예술운동이다. 전위(아방 가르드:avant-garde)란 본시 군대용어로, 전투할 때 선두에 서서 적진을 향해 돌진하는 부대의 뜻이다. 이것이 변하여 러시아혁명 전야 계급투쟁의 선봉에 서서 목적의식적으로 일관된 집단으로서의 정당과 그 당원을 지칭하게 되었다. 그것이 이윽고 예술에 전용되어 끊임없이 미지의 문제와 대결하여 이제까지의 예술개념을 일변시킬 수 있는 혁명적인 예술경향 또는 그 운동을 뜻하기에 이르렀다. 러시아의 화가 칸딘스키는 그의 저서 《예술에 있어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1912) 속에서 ‘정신의 3각형’이라는 비유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전위미술의 선구적인 정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에 의하면 시대의 정신생활이 형성하는 3각형 속의 저변에는 광범위한 대중이 있고, 정점에는 고독하고 이해받지 못하는 예술가가 있다. 그런데 이 3각형 전체가 눈에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앞으로, 위로 조금씩 움직이고 있으며, 오늘 고독한 정점에 있는 예술가의 예감에 지나지 않던 것이 내일은 지식인의 관심사가 되고 모레는 대중의 취미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예술가는 시대의 통념과 절연하여 ‘정신의 내적 필연성’에 따름으로써 다음 시대를 창조해내는 것이다. 그런데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일어난 다다이즘은 여러 의미에서 예술의 한계를 타파하고 단순한 물체도 행동도 하나의 관념으로 일관할 때 예술작품이 된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여기에서 칸딘스키의 ‘정신의 3각형’은 역전하여 예술가는 기성의 통념을 파괴하고, 흔히 있는 물체나 우연한 행위와 구별할 수 없는 지점까지 개아(個我)를 추구하였을 때 비로소 미지의 영역을 개척할 수 있는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러시아·헝가리·독일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났고 그 후 각국에서 프롤레타리아 예술운동이 전개되는 가운데 정치혁명과 예술혁명의 관계가 끊임없이 논의되고 전위예술의 개념은 널리 퍼졌다. 다다·미래파·구성주의운동이 그 초점이 되면서 이윽고 추상예술과 초현실주의가 전위예술의 2대 조류를 이루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기성예술에의 반항이나 혁명정신 그 자체가 대중사회의 다양한 풍속 속에 확산하여 전위예술은 특정 유파나 운동에 그치지 않고 첨단적인 경향의 총칭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의 유럽 미술에서 변혁적이며 급진적인 의욕과 운동으로 주도적·전위적 역할을 한 쉬르리얼리즘과 추상미술은 주로 전위미술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프랑스의 쉬르리얼리즘 운동은 그들의 기관지의 제명을 《초현실주의 혁명》, 《혁명에 봉사하는 쉬르레알리슴》등으로 붙여 좌경한 일도 있었다. 전위미술은 이와 같이 기성의 예술개념이나 전통적인 모든 가치와 결정적으로 대결하려는 자세를 가지고 있으며, 다다이즘적인 백지적 환원작용(白紙的還元作用)을 내포하고 항상 전진적·유동적인 것으로서 특정한 단일양식이 아닌 추상적·절대적·순수성·전체성·초현실적·기록적·경이성· 의외성·도발성 등 갖가지 특징과 성격을 전개하면서 특히 기성 예술 장르의 구별을 초월하여 확대되어왔다.
전위라는 말의 기원과 그 사용은 포찌올리 (R.Poggioli)의 [ 전위의 이론] 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 말은 스페인 문화와 스페인-미국(Spanish-American)문화에서 아주 빈번히 사용되고 있다. 그래서 토레 (Guillermo de Torre) 가 이 말을 문학에서 일어난 전위적인 여러 운동들과 그 현상을 연구하는 책의 표제로서 이용하고 있는 것은 상당한 통찰력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가제트 (Ortegavy Gasset) 즉 전위 일반의 문제에 직면하여 그것을 논의하려 했던 아마도 최초의 사람인 가제트는 비록 특수한 관점에서 이기는 하지만 그 말을 피하고 대신 '비인간화 예술'. '추상예술'. 혹은 '젊은 또는 참신한 예술' 이라는 말을 더 즐겨 쓰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그가 한편으로는 이 운동의 극단적 주지주의를 강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운동이 새로운 세대의 출현과 일치되고 있는 현상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랬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이 말이 보다 깊이 착근을 하게 되고, 보다 잘 적용되었던 풍토는 다른 어느 나라에서보다도 불란서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그것은 불란서인의 경우에 있어서처럼 예술과 문화를 특히 그 사회적 관점으로부터 바라보려는 경향의 문화적 전통 속에서 보다 생기를 얻을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독일에서의 경우는 이 말의 라틴어적 성격 때문에 '신낭만 (Neu-Romantik) 이라는 말을 더 즐겨 사용하고 있었는데서도 그러한 사정이었음을 짐작할 수가 있는 일이다. 구라파 낭만주의의 극우로서 이 독일적인 대안이 최소한 잠재적으로는 전위의 역활을 떠맡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 말의 사용이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영국과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그 명칭이 고정되어 있지 않은 채, 때로는 불어 그대로 ' avant-garde' 로, 때로는 'vanguard' 나 'advanced guard' 라는 영어로 쓰여지고 있다. 실제로 영-미 비평에서 이 말이 사용될 때라면 그것은 주로 불란서의 문학과 미술 자체에 국한되어 있거나 혹은 그로부터 영향을 받은 어떤 국제적인 예술 현상에 대해서이다. 그런 중에 이 말은 불란서의 지성 곧 정신적인 갤리시즘 (Gallicism) 의 한 표본인 것처럼 간주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그들 영-미의 예술 속에서 전위적이라 할 것들이 발전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현재의 뉴욕은 그러한 예술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하고 있는 중임을 상기하면 좋을 일이다.
순전히 문자적이라든가, 언어적 입장에서 말할 때 '전위예술' 이라는 용어를 갤리시즘의 한 경우인 것처럼 다룬 이 말의 현대적 어법과 의미는 -비록 그 기원이 확인되기 쉬운 성질의 것이 아니기는 하지만-분명 불란서 인들의 소산이요 실제로는 파리쟝들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이 우리 시대의 예술을 특징적으로 규정하는 데 적용되기 훨씬 전에 그것이 다른 것으로 사용되고 있었음은 지극히 흥미로운 일이 될 것 같다. 왜냐하면 애초 이 말은 예술적이기 보다 정치적인 관심을 가지고 색다른 운동을 전개하고자 했던 사람들에 의해 사용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예술은 곧 사회의 표현이며, 가장 진전된 사회의 경향을 드러내준다. 그러므로 예술이 시동자로서 그의 고유한 임무를 가치 있게 성취하고 있는지, 또한 예술가가 진정으로 '전위'의 예술가인지 아닌지를 알기 위하여 우리는 인간성이 어디로 진행되고 있는 중인지, 또 인류의 운명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행복의 찬미와 함께 음울하고 절망적인 송가를 불러라… 우리 사회의 바닥에 깔려 있는 잔인함과 부패함을 폭로하자."
이 문맥 속에서 그는 이 '전위'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위의 인용문 중 마지막 두 구절은 라베르당의 글이 예언적이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심지어 예술계에 있어서 마저 전위의 상이 애초에는 예술적이 아닌 정치적인 급진주의 (Radicalism) 의 이상에 종속되고 있었던 것" 임을 보여 주는 '최초의 가장 중요한' 인용구절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전위'는 애초 예술적이 아닌 정치적 급진주의 이상에 종속되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 말이 무정부적이고 극단적인 자유주의 사도들에 얼마만큼이나 친밀했었는가 하는 사실은 후에 [L'avant-garde] (1878)라는 표제의 정치적 선전을 위한 한 간행물이 출판되었다는 사실에 의해서도 입증되고 있다.
1870년대에 있어서 이 말이 정치적인 문학 밖에서 사용되는 경우를 찾기란 심히 힘드는 일이 되고 있으며, 아마도 그 전 1860년대에 있어서 라면 거의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한 사실을 밝혀줄 수 있는 한 사례로서 보들레르 (Baudelaire)의 기록을 예시해 볼 수가 있다. [Mon coeur mis a' nu] (1862~1864) 라는 사적인 기록 속에서 그는 이 말을 염두에 두고 조롱조로 '전위적인 문학인들' 이라고 쓰고 있음을 주목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군대식의 비유를 즐겨 쓰는 불란서 인들의 취향을 증명해 보일 목적으로 기술된 일련의 긴 사례들을 열거하는 과정의 마지막 대목에서 나오는 말이다. 그 같은 말을 조롱하고 있다는 바로 이 같은 사실은 그것이 이미 기존의 용어로서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냉소적이었던 보들레르를 통해 보더라도 '전위적인 문학인들' 이란 말은 예술적이라기보다 정치적인 작가, 다시 말하면 급진주의적인 작가들을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보들레르와 같은 시인이나 그 밖의 예술가들에게 있어서 이 말은 그 자체가 잘못된 비유였다는 점에서 뿐 아니라 그에 함축된 의미 때문에 조롱적인 질책을 면할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프러시아 전쟁과 콤뮨 (Commune)의 대두와 그 진압으로 대변되는 국가적 위기와 사회적 동요를 극복한 듯한 1870년 이후의 몇 년간을 통해서 이 말은 서서히 예술적인 별도의 의미로서도 사용되고 있는 변화된 면모를 찾을 수 있게 된다. 여전히 사회적-정치적 전위를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되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따라서 두 전위의 병행이라 할 현상이 나타났으며, 이 같은 병행이 가능했던 것은 잠시나마 두 전위들이 우연히 기존의 낭만주의적 사고와 1830년과 1848년 사이의 세대에 의해 확립된 전통을 새롭게 하는 입장에서 연합전선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후자의 세대는 문학적이었을 뿐 아니라 정치적이었다. 따라서 전세대의 보수주의 대신 이세대의 교리는 민주적 이상이 되어왔고, 심지어는 극좌의 이상이 되어 오기까지 했다.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이른바 세기 말의 문학-예술의 여러 운동들이 정치적인 태도를 취해야 하는 운명에 놓이게 되면서 -'소름 끼치는 해' 를 경험하고 , '해빙' 에 가담했던 세대에 게는 - 정치적 좌파와 문학적 좌파 간의 제휴는 아주 분명한 것이었고 중요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정치적 급진주의와 예술적 급진주의 간의 이 같은 제휴, 두 전위들간의 이 같은 연합은 한동안 지속되었다. 그것은 [La revue indepe'ndent] 이라는 표제의 조그마한 현대 문학지의 첫 권에 이르기까지 계속되는 것이었다. 1880년경에 창간을 보았을 이 잡지는 정치와 예술의 두 방면에서 이른바 두 전위적인 대변자들을 동류의 관계로 결합시켜 놓고 있는 아마도 최후의 기관지이다.
그 이후 급작스레 두 전위들의 결별이라고 할 현상이 눈에 띄게 진행되었다. 그것은 불란서 인들이 그렇게 부르기를 좋아하는 '황금시기'의 출발과 더불어 결별은 더욱 촉진되어 갔다. 오랫동안 찾아온 평화와 번영과 예술적인 갈등 속에서 새로운 예술의 탄생으로 인도되는 이 황금의 시기란 1885년부터 비롯되는 약 30년간에 걸친 시기임을 말한다. 그리고 바로 그 해 5월 , 낭만주의 거성이었던 위고 (V. Hugo)의 성대한 장례식이 있었다는 사실은 어떤 점에서 예술에 있어서의 새로운 진행이 곧 전개될 것임을 암시해 주는 것이기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이후 그처럼 짧은 시일 내에 그처럼 많은 주의(ism)와 유파와 그룹들의 대두와 몰락을 체험한 시기는 아마 다른 어느 역사적 시기를 통해서도 찾아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한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듯, 1885년을 전후로 해서 예술가들은 각기 한 시대의 종언과 새로운 시대의 출발을 감지하면서 마치도 신호등을 기다렸던 사람들처럼 방향을 바꾸기에 급급했던 것이다.
1886년엔 인상주의자들의 마지막 그룹 전시가 있었고, 고갱과 반 고호는 아를르에서 함께 작업을 하는 가운데 인상주의를 떠난 새로운 회화의 길을 개척하고 있었다. 음악의 방면에서 바그너의 인기는 최소한 1900년대까지 상승세를 보이긴 했으나, 1883년에 있은 그의 죽음은 불란서의 음악을 독일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키는 데 커다란 전기를 마련해주게 되었고, 샤브리에 (Chabrier)와 포레 (Faure')의 작품들이 곧 뒤를 잇기 시작했다. 또한 문학에서는 베르레느, 랭보, 특히 말라르메의 실험적인 작업이 마침내 상징주의라는 이름으로 귀결된 것 역시 그때쯤 이였다. 예술활동의 이와 같은 전개와 더불어 그 당시까지 예술현상에 단지 비우적으로 사용되어 왔던 '전위'라는 말이 당시의 예술적 활동 바로 그것을 지시해 주는 말로서 전의케 된 것이다. 비로소 '전위'라는 말이 정치적으로 이용되어 왔던 이제까지의 제일의 의미가 그로부터 완전히 탈거 되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전위의 예술과 문학'이라는 표현이 그로부터 광범하게 유행되게 되었다. 이처럼 불란서 언어와 문화의 배경 속에서 잉태되어 물려진 이 말은 불란서 국경을 넘어, 서서히 사상의 국제시장에로 유입되면서 오늘날 보는 것 같은 현대 예술의 어떤 특징을 말하는 일반 용어가 되기에 이른 것이다.
전위와 비슷한 내용과 의의가 있을 용어나 개념들이 사상의 역사 속에서 또 다시 발견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지극히 힘든 일인 것 같다. 형식적인 입장에서 비슷한 사례를 찾고자 해도 기껏 낭만주의나 혹은 고전주의적 전통이 와해를 겪게 되는 전 낭만주의적 시기 이상으로까지 소급되기는 힘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전위예술에 있어서의 '전위'라는 말은 형식적으로나 실질적으로 참신함을 지니고 있는 말이며, 그러므로 예술사의 진행 속에서 진정으로 예외적인 현상을 가리켜 주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현대예술은 곧 '전위예술'이요, 전위적인 성격의 예술이라는 것이다.
루카치, 아도르노, 뷔르거의 견해
아방가르드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가진 학자는 루카치(Georg Lukacs), 아도르노(Theo-dor W. Adorno), 뷔르거(Peter Burger)를 꼽을 수 있다. 가장 극단적인 입장으로 루카치와 아도르노는 예술비평에서 크게 상반되는 두 흐름 즉,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이라는 축을 통하여 아방가르드를 조명하고 있으며, 또한 뷔르거는 이 양자를 지양하면서 나름대로는 객관적으로 가치 중립적으로 아방가르드 이론을 펼치고 있다.
루카치는 아방가르드 예술형태를 가장 타락한 것으로 가치 평가한다. 반면에 시민사회예술의 가장 진보한 형태로서 아방가르드를 이해하는 사람이 아도르노이다. 뷔르거는 아방가르드 이론을 오늘날 다루어야 할 필수적 요소로 꼽고 있으나 긍정적으로나 부정적으로 고정시켜 판단하는데 반대한다.
아방가르드를 보는 시각이 그와 같이 다른 이유는 그들의 학문 체계내에서 아방가르드가 차지하는 위치와 상관된다. 루카치는 리얼리즘 미학 이론의 체계에 서있으며, 아도르노는 사회학적 미학의 입장에, 뷔르거는 비판적 문예학을 창조하려는 노력에서 각각 아방가르드를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다.
루카치(Georg Lukacs)
아방가르드 문학형태를 현대 문학의 본질적인 국면으로 보는 것은 편견이라는 것이 루카치의 생각이다. 그에게 있어서 아방가르드는 시민사회의 몰락을 명시적으로 드러내 주는 것이며 이는 1848년 이후 문학이 사실주의에서 멀어졌을 때 이미 예시된 것이었다. 그는 아방가르드 이념 비판을 통하여 아방가르드가 현대 예술의 핵심적 내용을 이루는 것은 저지하고자 한다. 그로써 그가 인간 의식의 실천 형식으로 규범화한 리얼리즘의 가능성이 드러나게 하려는 것이다.
루카치가 가장 불만스럽게 생각한 것은, 아방가르드가 인간의 존재를 무엇으로 보느냐 하는 문제였다. 이를 아방가르드의 '존재론'이라 한다. 아방가르드의 존재론은 고독과 그로 인한 실존적 불안의식을 인간 본성으로 본다. 리얼리즘에서는 고독을, 인간이 그 성격이나 생활환경 때문에 처하게 되는 특정한 상황으로 설명하므로 개인의 고독은 하나의 특수한 사회적 운명일 뿐이다. 그러나 아방가르드에게 있어서 고독은 보편적인 인간 조건으로 작용하므로 인간 존재의 피할 수 없는 사실로 고정되어 버린다. 고독이 모든 인간의 중심에 놓이게 됨에 따라 상호간의 의미있는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될 터이고, 이로 인한 인간의 고립은 자신의 탄생 배경과 자신의 존재를 분리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이와 같이 탈사회적, 탈역사적 존재가 되는 인간에게서는 역사의 부정이 일어나게 되며 그 원인이 아방가르드의 존재론에 있다고 루카치는 생각한다.
리얼리즘은 '세계의 일관성'을 반영하며 '보편성과 특수성을 결합'하는 것을 그 본질로 한다. 나아가 루카치에게 이러한 리얼리즘 예술의 본질은 곧 예술의 본질로 간주된다. 따라서 아방가르드가 리얼리즘의 해체로 파악되는 한 그것은 곧 예술의 해체라는 뜻이 된다. 루카치는 문학에 관하여 아방가르드가 "전통적 문학 형식을 파괴할 뿐 아니라 문학 자체를 파괴하는 것"이라 단언한다.
루카치에게 "예술을 풍요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을 부정하는 것"으로 비친 아방가르드 예술의 실재는 근원적으로 아방가르드의 이념에서 기인한 것이다. 따라서 루카치의 아방가르드 비판은 아방가르드 이념 비판을 통하여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아도르노(Theodor W. Adorno)
아방가르드의 이념이 인간을 본래 고독한 것이라 본다는 지점에 동의하면서도 루카치와는 달리 아방가르드를 옹호한 학자가 아도르노이다.
아도르노는 아방가르드 예술이 가장 진보된 예술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루카치가 아방가르드를 리얼리즘의 해체로 본것과 정반대로 아도르노는 아방가르드가 '리얼리즘의 자진계를 그려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방가르드를 역사적으로 이미 전개되었고 또 지금도 전개되고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지만, 그의 아방가르드 이론은 급진적 아방가르드로서의 쉔베르크를 가장 중심적인 위치로 부각시겼다.
"아무것에도 의지할 데가 없는 음렬 작곡가의 노고"라는 아도르노의 비유에는 고독한 자의 페이토스에 대한 칭찬이 들어있다. 루카치의 말처럼 그는 고독이 서로를 알지 못하는 도회인들의 공통적이며 보편적인 속성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아도르노는 불안과 고독을 주관적인 의식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매개된 것, 즉 객관적인 성격을 띤 것이며 역사적으로는 형성된 것일 뿐 아니라 인간의 '원초적 현상'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고독을 극단적인 데 까지 추구'한 사람이 쉔베르크라고 아도르노는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먼저 쉔베르크가 고독을 잉태하여 분만한 12음기법에 그 가치가 있다. 12음기법은 그가 전통·조성음악의 가상에 도전하여 얻은 승리라 한다. 12음기법이란 재료를 조성의 가상에서 벗어나게하여 작곡가의 자유의사대로 움직일 수 있는 순수한 음들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가치를 두는 쉔베르크의 면모는 기법의 탄생이 전통음악의 상업적인 타락을 전적으로 거부한 결과였다는 점이다.
아도르노의 체계에서 아방가르드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현대사회의 물화된 현상의 소외에 극명하게 항거하는 고독의 양식일뿐더러, 그 형식의 내재적 힘으로 인하여 인간의 역사 서술의 역할을 부담하고, 수용자에게 극도의 자유, 극도의 긴장을 요구함으로써 퇴행된 귀를 회생시켜줄 가능성까지 내포한다.
뷔르거(Peter Burger)
뷔르거는 아방가르드 이론을 오늘날 예술이론에서 다루어야 할 필수적 요소로 꼽는다. 아방가르드 이론은 뷔르거에게 시민사회 예술의 발전을 파악할 수 있는 논리적 처소가 되고 있다. "후기 시민사회가 문화적 가치영역으로서의 예술을 말살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고 판단하는 그의 현대적 관심은 후기 시민사회가 처한 위기를 '인식'하고자 하는데에 있었다. 그는 이러한 인식생산을 사회적 실천의 일부라고 보았다. 그가 사회적 실천에 대해 갖고 있는 이러한 태도는 학적 실천과 정치적 실천을 예리하게 구분하고 학적 실천을 '인식'에 환원시키고 있는 자세에 해당한다 할 수 있다.
그는 인식을 주도해나가는 힘이 "이성적 형태에 대한 관심, 착취나 불필요한 억압이 없는 세계에 대한 관심"에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러한 관심에 추구되는 학문을 일컬어 그는 '비판적 과학'이라 칭하였다.
그에게 인식적 실천의 장인 '비판적 과학'은 '전통적 과학'이 내포하고 있는 문제점들을 극복하기 위하여 제안된 것이다. "비판적 과학은 그것이 자신의 활동이 갖는 사회적 의미를 반성한다는 점에 있어서 전통적 과학으로부터 구별된다"는 뷔르거의 입장은 학문의 연구대상에 대하여 학문하는 주체가 그 대상을 선택한 개인적인 동기를 이유로 사회적 의미를 부여해서는 곤란하다는 점을 지적하는데에 있다. 왜냐하면 사회적으로 어떠한 것이 중요한지를 규정해내는 일은 해석자의 정치적 입장과 깊은 관계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학자들에게 대상과 문제를 선택할 때에 그 근거를 밝히는 일이 자명한 일로 되도록 하기 위하여 비판적 과학이 요청된다고 할 것이다.
뷔르거는 학문의 카테고리들과 대상의 전개 사이의 연관관계를 통찰하는 것을 '이론의 역사화'라고 하였는데, 학문의 카테고리들과 대상의 실제 발전은 한 연관관계 속에 놓여 있으며 그들 사이의 연관관계를 파악할 때만이 옳은 인식을 얻게 된다고 했다.
그는 루카치에 대하여 그의 아방가르드 비판이 헤겔미학의 낭만예술 비판과 닮아 있음을 지적한다. 루카치가 아방가르드를 리얼리즘의 해체로 파악하는 모델은 헤겔이 낭만예술을 고전주의의 해체로 파악하는 데 있었다. 헤겔은 고전주의적 예술을 정신과 감각성의 완전한 관철로 규정하며 루카치는 리얼리즘 예술을 인간과 외부세계 사건들 사이의 상관관계로 성격 지운다. 두 시기의 예술의 공통점은 주체와 객체의 통일이라는 데에서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뷔르거는 아도르노에 대하여는 루카치에게 보다 훨씬 더 호감을 갖고 있으며 자신의 이론중 많은 부분을 암시받기도 하였음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아도르노 이론에 대해서도 그는 역시 아방가르드 이론으로 부적절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뷔르거는 아방가르드의 의의를 '제도예술'에 대한 인식을 주었다는 점에서 찾고 있으며 이러한 인식이 시민사회 예술의 발전을 파악할 수 있는 논리적인 지점이 되고 있음을 비판적 과학의 방법론을 통해서 통찰해냄으로써 "미학이론은 다만 이것의 대상의 역사적 발전과정을 반성하는 정도에 따라서만 그 가치가 정해진다." 는 대전제를 만족시키고 있다.
[출처 : http://myhome.shinbiro.com/~jmjh/art-data-avantgarde.html ]
지도 방법
전자 매체의 발달이 가져온 문학적인 변화는 어떤 것인지 생각하며 읽는다.
컴퓨터의 발달과 인터넷의 광범위한 확산으로 인간의 삶은 혁명적인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그 중에서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어떠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를 학생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사이버 시대에 문학의 새로운 가능성과 문제점은 무엇인지 생각하며 읽는다.
사이버 매체는 문학 작품을 언제 어디서든 누구나 자유롭게 접촉할 수 있도록 한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또한 기존 문학에서 전적으로 수동적인 입장을 취하던 독자는 사이버 매체를 통해 문학의 창작에 기여하게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문학의 대중화가 문학의 질적인 향상을 보장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문학은 사이버 매체를 통해 기법의 측면에서 다양화를 꾀할 수는 있었지만, 문학 속에서 현실과 인간에 대한 진지한 탐색은 사라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이버 매체 속에서의 문학의 변화 양상을 이해하고, 하이퍼텍스트를 통한 글쓰기 작업을 직접 시도할 수 있도록 지도한다.
1. 컴퓨터를 통한 정보의 눈부신 발달이 문학에 가져온 가장 중대한 변화는 무엇일지 생각해 보자.
이끌어주기 :
컴퓨터와 인터넷이 엄청난 속도로 발전되고 확산됨에 따라, 문학 역시 중대한 변화를 겪고 있다. 그것은 문학의 양적 확산과 문학의 대중화라는 장점뿐만 아니라, 문학의 단순한 놀이화와 인간적 성찰의 부족이라는 부정적 측면의 양상까지 포함하고 있다. 학생들이 그러한 변화의 양상에 대해 스스로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하고, 문학의 부정적 변화 양상을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까지 생각해 볼 수 있도록 지도한다.
예시답안 :
컴퓨터의 발달은 종이책을 전자책으로 바꾸어 놓았다. 작품은 이 새로운 정보의 공간 속에서 마치 히드라처럼 자유자재로 변신하면서 독자적으로 존재하기보다는 자유롭게 변형되고 다른 것들과 자유자재로 결합되는 이상한 존재양식을 지향하게 된다. 문학은 이제 옛날처럼 한 작가의 실존을 다룬다거나 현실의 어떤 부분을 진지하게 드러낸다는 등, 문학과 관련된 전통적인 생각들을 수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다른 한편 가상 공간의 출현으로 인해 문학은 환상과 현실의 뒤섞임이라는 주제에 주목하게 된다. 수없이 출판되는 환상 소설들은 모두 환상에의 탐닉에 함몰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러한 현상 속에서 그들은 이 현실이 그러한 환상들을 먹고 마시며 호흡하는 현실임을 일깨워 준다. 즉 그러한 환상은 현실생활의 일부인 것이다.
2. 다음은 김영하의 소설 '호출'의 일부이다. 이 소설은 사이버 공간에서 벌어지는 삼국지 게임을 소재로 하고 잇다. 인용된 부분을 읽고, 아래 제시된 활동을 해 보자.
(1) 이 소설의 특징을 영화 매트릭스와 연관시켜 말해 보자
이끌어주기 :
이 소설과 영화 매트릭스가 현실과 가상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고, 묘사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도록 한다.
예시답안 :
영화 매트릭스는 전자적인 가상 공간 속에서 사람들의 사랑과 고뇌, 전쟁과 약탈, 정신적인 초월 등이 실험되고 동시에 실현되는 세계를 보여준다. 김영화의 위 소설에서는 컴퓨터 게임 속에 가상 공간을 들락거리면서 그 가상 세계의 삶을 자신의 현실 속으로 가져오는 주인공 이야기를 다룬다. 현실과 가상의 뒤섞임이라는 동일한 주제를 가지고 있지만, 김영하의 소설은 매트릭스의 치열한 주제를 따라잡지는 못한다. 가상 세계에 대한 이해가 너무 평면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2) 이러한 문학의 새로운 현상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 각자 느낀 바를 가지고 함께 토론해 보자.
이끌어주기 :
이 활동은 현실의 세계와 사이버 공간의 세계가 서로 넘나들고 있는 양상을 소설 속에서도 확인하고자 하는 활동이다. 영화 매트릭스는 사이버 시대에서 현실과 가상이 교묘하게 접합됨으로써, 사이버 존재들이 삶이 현실적 존재들이 삶과 더 이상 구분되지 않도록 긴밀하게 연결되고 있는 양상을 보여 준다. 이처럼 현실과 가상의 구분이 모호한 상태에서 인간의 정체성은 무엇인가를 생각하도록 하는 것이 이 영화에서 중요한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김영하의 소설 '호출' 역시 주인공은 지루한 일상의 세계와 사이버 공간의 삼국지 게임의 세계를 자유자재로 접합시키고 있다. 학생들이 소설 호출의 전문을 읽어 봄으로써, 소설 속의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소설의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영화 매트릭스와 관련하여 말해 볼 수 있도록 지도한다.
예시답안 :
사이버 문학은 수용자들로 하여금 가상 세계를 경험하게 한다. 현실을 기반으로 하여 쓰여진 문학에서 작가는 완벽하게 자신의 웅장한 체험들을 깊이 있는 성찰 속에 쏟아 내며 세상에 대한 거울 세계를 만들어 내었다. 그러나 사이버 문학에서는 작가보다는 다루고 있는 가상 세계 자체의 힘이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 대중들의 놀이 공간이 될 수도 있는 사이버 문학이 창출한 가상 세계는 대중들을 쾌락적이며 매혹적인 정보들로 끌어들인다. 그러나 사이버 문학이 만들어 낸 가상 세계의 논리는 현실 세계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성찰이나 교훈을 주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 더욱이 가상 세계의 논리는 현실 세계의 논리보다 단순하고 명쾌하여 수용자들을 강하게 흡입하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수용자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끼칠 경우, 수용자들은 가상 세계의 논리를 현실에 적용함으로써 큰 사회적 물의를 일으킬 수도 있다.
사이버 문학의 특징 :
이 글은 컴퓨터의 발달과 인터넷의 대중화로 인한 정보 혁명 시대 속에서의 인간 존재의 변화 양상과 문학의 존재 양식에 대해 논하고 있다. 사이버상의 환상 공간 속에서 존재하고 유통되는 다소 비전문적인 사이버 문학은, 그 이전까지 문학을 지배해 왔던 상상력과 삶의 총체성과 관련되는 집단적인 놀이나 축제, 제의적 상징의 중요성을 감소시켜 가고 있다.
문학의 역할 :
현실과 가상의 접합은 인간의 정체성을 흔들리게 하고 있다 사이버 소설, 하이퍼텍스트 시 등에서 위대한 개인은 사라지고 놀이를 즐기는 대중이 주인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저자는 문학은 여전히 책으로 존재하면서, 사이버 세계의 감독자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이 글은 정보 통신의 눈부신 발달이 가져온 인간 존재의 변화에 대해 주목하고 있다. 컴퓨터의 발달은 정보의 무한한 속도를 통해 인간이 활동하는 모든 영역을 연결하고 드러내며 하나의 공동체로 엮어나가고 있다. 그러나 이 글의 작자는 단지 이 모든 변화가 단지 속도의 문제만은 아니라고 말한다. 숨겨진 것들을 보고자 하는 은밀한 욕망의 거대한 폭발에 주목하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본래 어떠한 사실을 확인하고자 출발했던, 정보에 대한 실증주의적 관심은 새로운 가상 공간 속에서 녹아 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문화 혁명의 물결에 마주 서 있는 문학은 과연 어떠한 변화를 보이고 있는가 하는 것이 이 글의 주제이다. 사이버 소설, 하이퍼텍스트 시 등에서 위대한 '개인'이 사라지고 놀이를 즐기는 대중이 주인으로 떠오르고 있다. 그러나 이 마력적인 사이버 공간 앞에서 문학은 여전히 삶에 근본적인 성찰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사이버 공간 속에 뛰어 들어 적응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 속에서도 우리의 존재와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 여전히 문학에 남겨진 과제라는 것이다.(출처 : 한계전 외 4인 공저 '문학교과서')
전자 매체를 활용한 문학의 성과와 결합
사이버 매체는 문학 작품을 자유롭게 어디서든 누구나 접촉할 수 있게끔 광범위하게 열린 공간 속에 펼쳐 놓았다. 사이버 매체 속에서 새롭게 만들어지는 문학 작품들은 현실과 환상의 교묘한 복합으로 독자들을 이끌어 갔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새로워진 것은 하이퍼텍스트의 출현이다. 전자 매체이기 때문에 가능해진 이 입체적인 문학 공간은 다층적이며 다원적이다. 그리고 어떠한 완결 구조도 없고 일관된 이야기도 없이 분산되어 뻗어 나간다. 이것이 이룩한 문학적인 성과는 기존 문학에서 작가-독자의 일방적인 경로, 즉 독자의 일방적이고 수동적인 수용 체계가 무너진 데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문학이 언제나 그 정신적인 측면이나 미학적인 측면에서 성공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다원적인 기법과 교묘한 게임식 놀이에 치중하면서 현실과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탐색이 사라진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를 낳고 있는 것이다.(출처 : 한계전 외 4인 공저 '문학교과서')
문학 교실로서의 사이버 문학 공간
1) 문학은 기호론적 실천이다. 그 실천의 광장으로서 사이버 문학의 공간이 주목된다.
이 광장에 기꺼이 나와서 사이버리즘의 실현을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문학을 경험하고 문학 현상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참여해서 들어 간 바로 그 사이버 공간이 문학 교실이 될 수 있다. 이렇듯 문학적 실천을 하기에 좋은 입지를 사이버 문학은 지니고 있다. 동시에 사이버 공간은 독자와 작가의 상호 역할을 잘 보장해 주는 면이 있다. 누구에게든 나의 독자라는 개념이 구체적으로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특정의 작가에게 독자로서의 개인적 육성을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처럼 사이버 공간은 전통적 출판의 공간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보통 사람들에게 열려 있다. 그리고 읽고 쓰는 행위의 공시성(publicity)은 전통적 출판보다 더 강할 수 있다. 다만 지속적 보존성에 있어서는 모자란다.
2) 사이버 공간의 잘 갖추어진 피드 백 체제를 최대한 활용하는 문학 교육을 기획한다.
사이버 공간에 등장하는 모든 담론은 어떤 양태로든 다양한 피드 백 체제에 편입된다. 이 말은 사이버 문학은 매우 두터운 상호 주관성(inter-subjectivity)의 토양을 잘 갖추고 있다는 말로 받아들여도 좋다. 문학 텍스트 자체이든 그것에 대한 담론이든 일단 사이버 공간 속에서 공간(公刊)되면, 수용자들의 즉각적이고 다양한 반응과 조우한다. 작가와 독자의 상호작용을 구체적으로 확인하면서 그 위에 다시 계속 덧씌우는 여러 양태의 피드 백 작용을 계속해 나가도록 하는 것이 사이버 문학의 구조이다.
이러한 즉각적이고 다분히 대중적인 피드 백은 이전 문학에서 보아 왔던 작가와 비평가 사이의 상당히 제도화된 피드 백 양상과는 많이 다르다고 보아야 한다. 피드 백의 내용이 정당한지 오류인지를 밝히려는 처리 자세보다는, 피드 백의 내용이 어떤 양적 분포를 보이는지를 판독하고, 그 결과를 다시 문학적으로 의미화하는 작업이 바람직하다 할 수 있다. 이는 문학 교육의 과정을 구성주의적으로 승인하는 입장이다. 사이버리즘의 문학 교육적 접근은 구성주의와 호응한다.
3) 사이버 문학을 위한 비평 / 사이버 문학을 통한 비평의 체제를 구축하자.
사이버 문학 자체의 성공, 또는 사이버 문학을 문학 교육의 교실로 만들어 나가는 일이 성공하자면, 사이버 문학을 위한 비평이 제자리를 잡아야 한다. 일종의 체제로서의 비평이 있어야 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이버 문학을 위한 비평은 사이버 문학을 통한 비평의 발달을 필연적으로 요청한다. 여기서 말하는 체제로서의 비평은 단순히 평론 텍스트의 산출을 넘어서는 차원의 것이다. 사이버 문학이라는 현상. 또는 사이버리즘의 이념태를 하나의 공인된 문학체제의 수준으로 이끌어 올리는 일종의 패러다임 유지 작업이다. 예컨대 비평의 사회학을 상정해 보자. 사회 전체가 일종의 비평 체제로 되어 있는 사회가 문화적으로 성숙한 사회, 정치적으로 민주 사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가 소통의 질을 확보한 사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이버 문학의 공간이 활성화되면 각 개인에게 맞는 문학적 글쓰기 활동의 장을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요즘의 용어 식으로 하면 소위 수준별 활동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사이버문학 공간이 다양하고 개성 있게 분화되어 있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이러한 분화는 사이버 문학에 대한 호응을 통해서 오랜 기간에 걸쳐 만들어지는 것이다. 사이버공간 내에서의 문학적 글쓰기는 그것이 매우 의도적인 의사 소통 행위가 된다는 점에서 행위의 능동성과 진정성을 기약할 수 있다. 창작 활동 결과를 공간(公刊)하는 것은 창작 교육의 경우는 매우 중요하다. 창작 행위를 발전적으로 지속하게 하는 힘이 자기의 작품을 책으로 만들어 공공의 공간에 드러내고 보상받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사이버 문학은 비평적 숙성이 절실히 필요하다. 사이버 공간 자체가 속성의 기질 보다는 즉시성(on demand)의 기질에 가깝기 때문에 비평적 숙성의 과제는 사이버 문학의 성패를 결정짓는 요인이 될 것이다. 따라서 사이버 문학은 어떤 비평의 체제를 가질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이는 문학을 향하여 다양한 주관성들을 자유롭게 펼쳐 보일 수 있다는 사이버의 이점과는 별개의 노력 항목이다. 비평은 독자 반응과는 다른 차원의 기능과 문화적 견인력을 가지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경우 비평은 문화적 체제에 해당한다. 사이버 문학이 비평의 체제를 잘 구축해야 하는 이유가 사이버 문학의 문화적 견인력을 기르는 것과 높은 상관이 있기 때문이다. 사이버 문학이 문학 교육의 마당으로 활용되는 데도, 즉 사이버 문학 현상을 문학 교육의 내용으로 우리 사회가 승인하는 데도, 사이버 문학을 위한(통한)비평적 체제 구축은 매우 중요한 관건이 될 것이다.(출처 : 박인기, 사이버 문학과 문학 교육)
매트릭스(matrix)
감히 상상도 못할 결말, 시작이 있는 곳에 끝이 있다!
1999년 5월 the Matrix
2199년, 시스템이 인간을 지배하는 세상. 인간들은 태어나자마자 인공 자궁 안에 갇혀 기계들의 생명 연장을 위한 에너지로 사용되고 뇌세포에 매트릭스라는 프로그램을 입력 당해 평생 기계에 의해 설정된 가상 현실을 살아간다. 가상 현실의 꿈에서 깨어난 인간들은 ‘시온’이라는 세상을 건설하고 인류를 구원할 영웅 ‘그’를 찾아 나선다. 마침내 발견한 ‘그’는 낮에는 평범한 회사원으로 밤에는 ‘네오’라는 이름으로 컴퓨터 해킹을 하는 컴퓨터 프로그래머, 토마스 앤더슨(키아누 리브스). 앤더슨은 트리니티(캐리 앤 모스)라는 여인에게 이끌려 매트릭스 밖의 우주를 만나면서 모든 진실과 직면하게 된다. 숨겨진 진실을 알게 된 앤더슨은 이제 ‘네오’라는 이름으로 인류를 구원해야 하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게 된다.
2003년 5월 the Matrix Reloaded
‘시온’은 센티넬이라는 기계군단에게 장악될 위기에 처하고, 자신의 능력에 대한 더 큰 통제력을 갖게 된 네오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트리니티, 모피어스(로렌스 피쉬번)와 함께 시스템에 맞서게 된다. ‘매트릭스’의 내부 구조로 깊이 들어갈수록, 인류의 운명을 좌우할 자신의 역할에 눈 떠가던 네오는 \'설계자\'를 만나 자신의 존재가 설계자에 의해 만들어진 통제 시스템에 불과하다는 충격적인 진실에 직면한다. 그리고 ‘사랑인가, 인류의 구원인가!’라는 불가능에 가까운 선택을 강요 받는 네오. 둘 중 하나는 포기해야 한다!
2003년 11월 5일 밤 11시 the Matrix Revolutions
대단원의 막이 오르다!
진실을 찾는 여정에 한걸음 더 접근하게 된 네오. 그러나 그 와중에 능력을 소진하고 매트릭스와 현실세계의 중간계를 떠돌게 된다. 한편, 기계들이 인간말살을 목적으로 인류 최후의 보루 ‘시온’으로 침공해오자 인간들은 인류의 미래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인 전투를 벌인다. 그러나 베인의 몸 속에 침투한 에이전트 스미스(휴고 위빙)가 본 모습을 드러내면서 네오에게는 예기치 못한 새로운 변수가 생긴다. 매순간 세력이 커져가면서 기계들의 통제권까지 벗어난 스미스는 현실 세계와 매트릭스는 물론 기계도시까지 말살할 야욕을 불태운다. 이에 네오에게 마지막 조언을 건네는 오라클(매리 앨리스). 네오는 오라클 역시 매트릭스라는 거대한 구조 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프로그램에 불과할 수 있음을 알면서도 그녀의 조언을 받아들인다. 니오베(제이다 핀켓 스미스)의 도움으로 네오와 트리니티는 일찍이 그 어느 인간도 가본 적이 없는 세계, 기계 도시의 심장부로 잠입한다. 그곳에서 기계 세상의 절대 권력자(DEUS EX MACHINA)를 만나 파멸 직전의 인류를 구원키 위한 최후의 카드를 던지는데...
이제 드디어 인류 최후의 거대한 진실이 그 베일을 벗는다!
(출처 : http://www.cine21.co.kr/Db-104/sbject_search03.c21?id=7426)
메트릭스 논쟁
'매트릭스' 의 시스템 - 도종일 교수
영화 ‘매트릭스 리로디드’가 나오면서 그 전편인 ‘매트릭스’(Matrix)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다시 뜨고 있다. 벌써 여러 해 전, ‘매트릭스’가 한국에 들어왔을 때 나는 문화연구를 한다는 젊은이들과 어울려 그 영화를 보러 갔었는데, 지금 기억에 남는 것은 영화 그 자체보다는 영화를 보고 난 다음 우리들 사이에 있었던 몇몇 대화 장면이다.
-이질적 요소들의 ‘얼치기 조합’-
<장면 1> 동행자들이 저녁을 먹으러 간 자리. 젊은 관람자들은 방금 보고 나온 ‘매트릭스’에 대해 대체로 호의적인 반응들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선명하게 생각나는 것은 A군이 발표했던 열렬한 예찬이다. 그의 찬사-“놀랍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부터 노자까지 다 들어있네. 저들은 동양철학을 저렇게 써먹을 줄 아는데 정작 동양 감독들은 뭐 하는 거야?” 이 예찬에 대한 B군의 반응-“오, 포스트모더니즘에다 노자까지 있었어?” 이 대목에서부터 그날 저녁 자리는 A군이 말한 그 “다 들어있네”에서 정말로 뭐가 다 들어있는 것인지를 따지는 일로 후끈 달아오른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매트릭스’는 아닌 게 아니라 그 무렵 한참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던 장 보드리야르의 포스트모더니즘 관련 저술 ‘시뮬라시옹’의 한 장(章)을 펴 보이는 것으로 시작한다.
<장면 2> 그날, 내가 입 다물고 있었더라면 결코 연출되지 않았을 후회스런 대목 하나. 젊은 사람들은 “교수님 생각은?” 하고 묻는 버릇이 있다. 그날도 누군가 나를 향해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물어온 것이다. 그냥 의례적인 질문이었을 수도 있고, 정말 ‘교수’의 의견이 궁금해서 나온 질문이었을 수도 있다. 자기들 견해에 ‘선생’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교수는 누구의 어떤 관점을 더 지지하는지 궁금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날의 내 답변은 그지없이 무례하고 뒤퉁맞은 것이어서 지금도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내 생각? 난 말야, 이런 영화가 바로 ‘할리우드의 똥’이라고 생각하네”
‘할리우드의 똥’이라는 말은 내가 가르친 학생들 사이에서는 전혀 낯설지 않은 표현이다. 그것은 미국 영화들에 대한 나의 가장 부정적인 평가를 요약하는 말이라는 것을 그들은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두 열나게 ‘매트릭스’론을 펼치고 있는 자리에서 교수라는 사람이 유독 그런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는 것은 ‘김새는’ 일이었으리라. 내가 아직도 미안하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그 점이다. 그러나 나는 ‘매트릭스’를 할리우드의 똥이라고 말한 그 날 나의 그 원초적 판단 자체를 지금 회수할 생각이 전혀 없다.
이 지면은 영화평을 하는 자리가 아니므로 내가 왜 ‘매트릭스’를 그렇게 메다꽂는지 자세히 논할 겨를이 없다. ‘매트릭스’는 미국 오락영화의 제작공식과 문법에 아주 충실하다. 가장 눈부신 부분은 기술과 오락의 탁월한 결합이다. ‘기술’은 새롭고 충격적인 특수촬영 기법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질요소들의 조합과 혼합도 기술이라면 기술이다. 디즈니 영화의 ‘괴물’처럼, 그 영화는 세계의 여러 다른 문화와 종교, 장르들로부터 따온 상징들을 갈등 없이 혼합하는 전형적인 얼치기기법을 자랑한다. ‘트리니티’ ‘시온’ ‘네브갓네살’ ‘오라클’ 같은 명칭들은 기독교, 이스라엘, 중동(이슬람)을 섞어놓고, 선택과 재탄생과 복제의 모티프들은 자유의지, 에덴, 정신분석, 포스트모더니즘, 사이버네틱스의 얼치기 조합을 달성한다. 현대 생물학의 이미지와 상징, 동양의학(침구), 고대 이집트 신화(죽은 네오를 키스로 살려내는 트리니티는 이시스의 이미지 그대로다), 불교적 기호, 인도 신비주의의 상징물들도 등장한다. 가장 보수적이고 반동적인 것은 한 사람의 남성 구세주(The One)가 시스템(매트릭스)을 격파하고 ‘틀린 세계’로부터 인간을 구원한다는 마르고 닳도록 낡아빠진 서사 얼개이다.
-할리우드 자본이 바로 ‘시스템’-
나는 왜 이 문화칼럼에 이런 이야기를 쓰고 있는가? 내 생각을 세상에 말하고 싶어서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할리우드의 똥들이 심오성을 가장하면서 사람들의 감성을 마비시키고, 자유무역의 논리로 세계 문화시장을 지배하는 사태에 대한 비판적 개입의 필요성이다. ‘매트릭스’ 같은 영화로 세계 약소 문화권들을 초토화시키는 영화자본이 바로 우리가 비판하고 거부해야 할 ‘시스템’이다. 이는 스크린 쿼터가 다시 문제되고 있는 이 시점에 우리가 생각해볼 문제가 아닌가?〈도정일/문학평론가·경희대 영문학 교수〉
(출처 : http://www.khan.co.kr/news/view.khn?artid=200306172231351&code=990000 )
'매트릭스 광' 현각스님 ‘‥2 리로디드’ 관람기
위험한 질문‥종교도 매트릭스?
<매트릭스 2 리로디드>는 전편 <매트릭스>가 제기한 존재, 또는 주체에 대한 질문을 더 확장시킨다. 그 방향을 놓고 여러가지 해석과 함께 논란도 나오고 있다.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의 저자인 현각 스님은 <매트릭스>를 10번이나 본 이 영화의 열혈 팬이다. 현각 스님의 <매트릭스 2 리로디드> 관람기를 싣는다. 편집자
1편‥'더 원'이 세계를 구할 것이다
종교는 때때로 위험하다. 진실한 믿음은 마음을 해방시키는 혁명이다. 하지만 종교지도자들에게 이러한 혁명은 종파에 상관없이 매우, 매우 위험한 것이다. 혁명을 두려워하는 종교적 도그마 자체가 매트릭스이고, 우리는 그 매트릭스로부터 자유로와져야 한다.
지난 주, 이집트 정부는 <매트릭스 2 리로디드>(이하 <리로디드>)의 상영을 전면 금지했다. 금지된 이유는 폭력이나 선정성 때문이 아니라, 인류창조에 대한 전통적 종교관을 침해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과연 이것이 중동지역 특정종교 하나의 편견에만 국한된 문제일까 아니다. 이집트 문화검열국장이 밝혔듯, “이 영화가 금지된 이유는 인간의 실존과 창조같은 주제를 다루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는 우리가 존중하고 신봉하는 3대 유일신 종교 (이슬람, 유대교, 기독교) 모두와 관련된다.”
2003년 현재의 “현실세계”에서조차 이처럼 곤란한 질문은 위험하다. 실존의 본질 자체에 대한 질문은 기존 종교체제를 전복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떻게 또 왜 창조되었는지 묻는 것은 위험하다. 종교의 권위자들은 말한다. “시스템이 만들어졌고, 우리는 단지 거기 놓였을 뿐이다. 시스템에서 자유로운 선택의 자유는 우리에게 없다. 당신은 매트릭스를 믿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진실한 믿음을 위해 매트릭스에 도전해야만 한다.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내가 여기까지 왔는가” “맹목적 신앙은 진실한 길인가 아니면 거짓인가” “이 방대한 시스템의 설계자 내지 프로그래머는 선한가, 악한가”
<리로디드>는 매우 변혁적인 영화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안주해온 맹목적인 종교적 믿음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서 놓지 못하는 믿음을 뿌리부터 뒤흔든다. 내가 접한 대중문화 가운데 이만큼 멋진 통찰을 보여준 영화는 드물다. 인간 밖의 유일한 권력을 믿는 제도화된 종교들은 또다른 형태의 통제와 지배, 즉 인간의식을 지배하는 매트릭스에 불과하다. 우리가 조심하지 않으면 종교 자체가 일종의 매트릭스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2편‥구원자 '더 원'은 없다
<매트릭스> 1편은 스스로 깨달은 니오가 인간의식을 지배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인 매트릭스에 승리하는 것으로 끝난다. 초영웅적 존재인 니오가 인류를 구원하러 옴으로써 선지자의 예언이 실현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다. 사실 겉으로 보면 감독들이 이런 생각을 은근히 유도하면서 관객이 모피어스처럼 맹목적으로 생각하도록 유혹한다 - 우리가 예언을 따르기만 하면 초인적인 ‘더 원’(The One)이 세계를 구원할 것이다. 이야기 끝.
그러나 <리로디드>는 이런 생각을 완전히 전복시켜 버린다. 모피어스가 절대적 신념을 가지고 떠받드는 예언자 오러클은 매트릭스의 권력에 봉사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일 뿐이다. 오러클은 매트릭스의 “어머니”이고 시스템의 완전통제를 돕는다. 니오가 모피어스에게 말하듯 “예언은 거짓이었다. ‘더 원’의 목적은 그 어떤 것도 끝내는 게 아니야. 그건 또 다른 통제 시스템에 불과했어.” 바로 이런 전복성이 이 영화의 뛰어난 면이다.
어떤 사람들은 종교적 용어와 상징만 보고 이 영화가 자신들의 종파적 종교관을 입증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사실 1편에선 세계를 구원하는 ‘더 원’이 단순한 정답인 듯도 하다. 그러나 2편은 “정답” 대신 모든 위대한 종교들이 가르쳐온 일, 즉 질문을 제시한다. 사람들이 안주해온 신앙체계를 전복하고 무너뜨린 다음, 우리 실존의 본질 자체에 대한 큰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맹목적 신앙은 정답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니오는 오러클로부터 모피어스에게 전해진 맹목적 신앙을 이제 버려야 한다고 깨닫는다.
따라서 <리로디드>는 종교적 확실성에 관한 영화가 아니다. 어떤 도그마나 예언을 반드시 믿어야 한다는 쉬운 신앙을 주창하는 영화도 아니다. 쉬운 정답 대신 위험하고 심오한 질문을 제시하는 영화이기 때문에 이집트에서 상영 금지된 것이다. 정치적이건 민족적이건 종교적이건 아무리 확실해 보이는 것일지라도, 우리는 맹목적으로 따르는 대신 질문해야 한다.
니오와 설계자의 만남 역시 많은 것을 시사한다. 니오는 두개의 문 가운데 선택해야 한다 - 한쪽으로 가면 시온을 구하지만 연인은 죽는다. 다른 한쪽으로 가면 연인을 구하지만 시온주민 모두가 멸망한다. ‘더 원’의 사명은 인류의 구원이다. 예언에 따르면 그것이 니오의 목적인 것이다. 시온을 구하지 않으면 니오는 ‘더 원’이 될 수 없다.
당신 자신이 당신을 구한 겁니다
그러나 니오는 예언으로부터 자유롭게 행동하기를 선택하고 트리니티를 구함으로써 설계자에 맞선다. 예언의 계획 대신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을 따름으로써, 궁극적인 힘은 설계자가 아닌 바로 인간 자신에게 있음을 보여준다. 인과법칙을 넘어서고 매트릭스 시스템의 설계자와도 대결한 니오는 홀로 서있다. 인간의 도덕적 조건에 대한 책임은 오직 인간 자신에게 있을 뿐, 개인의 자유의지보다 더 큰 절대적인 가치가 있는 것은 없다. 니오의 말처럼 “선택, 문제는 선택이다.”
만일 신앙에 대한 전통적 지지를 철회했다면, <리로디드>에서 종교적 믿음이란 문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1999년 인터넷 채팅 인터뷰 중 “이 영화에서 신앙의 역할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 감독 워쇼스키 형제 스스로 답한 바 있다. “(우리가 관심 있는 문제는)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다.” 니오가 시온에 돌아왔을 때 한 청년이 “당신이 나를 구했어요”라고 외친다. 그러나 니오는 퉁명스럽게 답하기를 “아니요, 당신 자신이 스스로를 구한 겁니다.” 그는 예수와 마찬가지로 “너를 구한 것은 네 믿음”이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처럼 사람들은 누군가 “다른” 이가 “나를” 구해주기를 바란다. 그것이 ‘더 원’이 필요한 이유이다. 허나 니오도 인간 밖의 수퍼맨이 구원자라고는 믿지 않는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우리 스스로를 구할 수 있을까 한국에서 이뤄진 <리로디드> 비평 가운데 이 영화가 얼마나 많은 불교적 영향을 받았는지 언급한 것은 드물다. 1999년 인터뷰에서 시나리오를 쓴 워쇼스키 형제는 불교가 그들의 사상과 시나리오에 큰 영향을 끼쳤느냐는 질문을 받고 “예스!”라 대답했다. “불교와 수학, 특히 양자물리학에는 독특한 매력이 있고 그 둘이 접합하는 지점은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 둘 다 오래 전부터 불교에 매혹되었습니다.”
한국에서 많은 관객이 이 점을 놓치는 것이 안타깝다. 우리는 무지와 미몽에 빠져 잠들어 있으며, 자신의 노력을 통해서만 스스로 깨닫고 또 다른 사람들이 깨닫도록 도울 수 있다. 한편 니오가 오러클을 만나러 가는 장면에선 종교물품 벼룩시장이 등장한다. 힌두교 신, 성모 마리아, 예수상 등이 보인 후 마지막으로 카메라는 불상을 비춘다. 화면 속의 부처는 명상자세로 앉아 자기 마음의 본질을 관조하고 있다. 니오가 오러클을 만나기 직전 마지막으로 비춰진 종교의 이미지가 바로 이것이라는 사실이 의미심장하다.
1편의 마지막 부분에서 니오는 마치 최후의 초영웅 ‘더 원’처럼 보인다. 하지만 2편에서 밝혀지는 놀라운 사실에 따르면 니오는 “수학적 완성”의 여섯 번째 예외, 여섯 번째 구원자이다. 흔히 상징 기법을 사용하는 영화에서 과연 이 여섯 번째라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불교에 매료된 감독들의 답은 명료하다 - 불교에서 2500년 전 나타난 석가모니 부처는 고해의 매트릭스인 이 우주에 나타난 여섯 번째 부처로 간주된다. 고전불경에 따르면, 새로운 우주가 나타날 때마다 새로운 부처가 나타나 미몽에 빠진 중생을 제도한다. 만물이 유전하므로 우주 또한 끊임없이 변하고 이윽고 쇠하여 적멸한다. 그러면 새로운 세계가 나타나고 따라서 새로운 부처가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태어나고 다시 또 태어나고 - 나는 중생들 가운데 다시 태어날 것이다.”
<리로디드>가 던지는 화두는 바로 믿음이다. 이 영화를 감상하기에 따라서는 대중문화가 성서나 불경처럼 올바로 종교적 믿음에 관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출처 : http://www.hani.co.kr/section-009100000/2003/06/00910000020030616221411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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