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산중 일기 / 본문 일부 및 해설 / 유치환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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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중 일기 / 유치환

 

 

 인간이란 이룰 수 없는 간곡한 희원(希願) 앞에서 바람 같은 것은 빛을 잃고 시들하여져서 죄다 내버려 돌아 보지 않게 마련인 것이다. 그러한 심정의 자학 같은 마음에서 그만 이곳으로 말았다. 여기는 동해가 영동(嶺東)의 산골짝, 험준한 산악 지대는 아니나 청청한 계류와 첩첩한 산곡 새에 자리잡은 신라조 진덕왕 5년에 의상 조사(祖師)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유서 있는 조그만 고찰, 허나 내가 무슨 불가의 법덕을 찾아서 예까지 온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동해안을 외줄로 치달은 국도서 버스를 버리고 최근에는 도중에 도둑이 나타난다 하여 행인마저 드문 70리 길을 막상 홀로 타박타박 걸어와 놓고 보니, 나와 인생의 연분을 가진 불과 기백 리 바깥과는 한량 없이 외딴 세상만 같아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려 한다.

 생각하면 우리가 느끼는 거리감이란, 그것을 표시하는 숫자보다, 오늘날처럼 속도로써 공간을 얼마라도 주름잡을 수 있는 시대에는 우리가 사는 환경의 차이, 즉 얼마나 문명의 혜택을 누리느냐에 따라 차이가 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여기에는 우체부도 신문도 오지 않는다. 그런 것을 보고 받으려면 70리를 걸어나가야 한다. 뒷산 주봉에 오르면 동해가 바라보인다 하니 인정이 그리우면 망부석처럼 봉우리에나 올라가 볼까?

 

<하략>

 

 


 

 지은이 : 유치환

 성격 : 사색적, 상징적

 주제 : 문명과의 단절에서 느끼는 인생의 의미

 구성 : 문명과의 단절감 - 문명에 대한 사유 - 우주의 무량 광대함 앞에서 문명의 한계를 느낌 - 인생의 의미를 깨달음

 특징 : 한자어를 비유적으로 사용하여 뜻이 함축적인 문장이 있고, 사색적이고 상징적인 성격의 글이다.

 


 유치환

 

1908∼1967. 시인. 본관은 진주(晉州). 호는 청마(靑馬). 경상남도 통영 출신. 준수(焌秀)의 8남매 중 둘째 아들이며, 극작가 치진(致眞)의 동생이다. 11세까지 외가에서 한문을 배웠다. 1922년 통영보통학교 4년을 마치고, 일본 도요야마중학교(豊山中學校)에 입학하였다. 이 무렵 형 치진이 중심이 된 동인지 ≪토성 土聲≫에 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가세가 기울어 4학년 때 귀국, 1926년 동래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하여 졸업하고, 이듬해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였으나 퇴폐적인 분위기에 불만을 품고 1년 만에 중퇴하였다. 당시 시단을 풍미하던 일본의 무정부주의자들과 정지용(鄭芝溶)의 시에 감동하여, 형 치진과 함께 회람잡지 ≪소제부 掃除夫≫를 만들어 시를 발표하였다. 1931년 ≪문예월간 文藝月刊≫에 시 〈정적 靜寂〉을 발표하여 문단에 등단하였다.

 

그 뒤 잡다한 직업을 전전하다가 1937년 부산에서 문예동인지 ≪생리 生理≫를 주재하여 5집까지 간행하고, 1939년 첫 시집 ≪청마시초 靑馬詩抄≫를 발간하였다. 여기에 초기의 대표작인 〈깃발〉·〈그리움〉·〈일월〉 등 55편이 수록되었다. 1940년 가족을 거느리고 만주 연수현(煙首縣)으로 이주하여, 농장 관리인 등에 종사하면서 5년여에 걸쳐 온갖 고생을 맛보고, 광복 직전에 귀국하였다.

 

이때 만주의 황량한 광야를 배경으로 한 허무 의식과 가열한 생의 의지를 쓴 시 〈절도 絶島〉·〈수 首〉·〈절명지 絶命地〉 등이 제2시집 ≪생명의 서≫에 수록되었다. 광복 후에는 청년문학가협회 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민족문학 운동을 전개하였고, 6·25중에는 문총구국대(文總救國隊)의 일원으로 보병 3사단에 종군하기도 하였다.

 

≪보병과 더불어≫는 이 무렵의 시집이다. 1953년부터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이 후에는 줄곧 교직으로 일관하였다. 안의중학교(安義中學校) 교장을 시작으로 하여 경주고등학교 등 여러 학교를 거쳐 부산남여자상업고등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 교통사고로 작고하였다.

 

40여 년에 걸친 그의 시작은 한결같이 남성적 어조로 일관하여 생활과 자연, 애련과 의지 등을 노래하고 있다. 그의 시세계를 ‘생명에의 의지’, ‘허무의 의지’, ‘비정의 철학’, ‘신채호적(申采浩的)인 선비기질의 시인’으로 평가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생명의 긍정에서 서정주(徐廷柱)와 함께 이른바 ‘생명파 시인’으로 출발한 그의 시는 범신론적 자연애로 통하는 열애가 그 바탕을 이룬다.

 

그리고 그 바탕 위에서 한편으로는 동양적인 허정(虛靜)·무위(無爲)의 세계를 추구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허무를 강인한 원시적 의지로 초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시에 허무 의지의 극치인 ‘바위’와 고고함의 상징인 ‘나무’가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묘지는 부산광역시 서구 하단동에 있으며, 그의 시비는 경주 불국사, 부산 에덴공원, 통영 남망공원(南望公園) 등에 세워졌다.

 

시집으로는 ≪울릉도≫·≪청령일기 璹烙日記≫·≪청마시집≫·≪제9시집≫·≪유치환선집≫·≪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미루나무와 남풍≫·≪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등이 있다. 수상록으로는 ≪예루살렘의 닭≫과 2권의 수필집, 자작시 해설집 ≪구름에 그린다≫ 등이 있다.

 

≪참고문헌≫ 眞實과 言語(金宗吉, 一志社, 1974), 現代詩文學大系 15(김현 편, 지식산업사, 1981), 靑馬論(金春洙, 文藝, 1953. 初夏號.), 生命과 虛無의 意志(文德守, 現代文學 35∼41), 柳致環論(金允植, 現代詩學, 1970), 靑馬柳致環論(吳鐸藩, 高麗大學校語文論集 21, 1980), 柳致環과 生命意志(權寧旼, 韓國現代詩史硏究, 一志社, 1983).(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존재의 초극 /유치환의 시 세계 / 오세영 (서울대 교수)

 

                            1

  사회나 자연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은 아니나 유치환이 그의 문학적 생애를 통털어 초지 일관하게 탐구하였던 주제가 인생론적 문제였다는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것은 그의 처녀작이라 할 <정적>이나 초기의 대표작이라 할 <깃발>(1936), <생명의 서>(1938)에서 부터 그의 만년의 작이라 할 <서열>(1961)이나 <조장>(鳥葬 1962)에 이르까지 보편적으로 드러나는 특징이다. 그 자신도 인정했던 것처럼 제 연구가들이 유치환을 '의지'의 시인이라 일컬었다든지 혹은 '인간의 실존 방식을 끈질기게 탐구한 시인'이라고 규정했던 것은 그 단적인 예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조금 더 진지하게 살펴보면 유치환이 몰두했던 인생론적인 테마란 삶이나 생활과 같은 현실적인 문제들이 아니었다. 그것은 보다 형이상학적인 차원에 서의 삶의 근원적인 문제들 예컨대 존재라든가 죽음이라든가 신이라든가 하는 것들이었다.  김종길은 이와 관련하여 청마의 시는 그의 주된 관심사인 철학적 내지 형이상학적 문제들 즉 '신' 과 자기의 '존재'와 같은 것들을 '바람'의 상징을 통해 제시한다고 말한 바 있다. 굳이 김종길의 지적을 빌지 않더라도 가령 우리는 그의 대표작이라할 <깃발>이나 <생명의 서>에서 무한과 유한, 혹은 존재의 근원적인 한계성과 영원성 같은 문제들을 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치환이 시종 일관하게 삶의 근원적인 문제들을 탐구하였다는 것은 그의 내면화된 시세계를 살펴본 데서 얻어진 결론만은 아니다.  중요한 그의 산문과 독특한 유형으로 쓴 시 즉 <단장>에서 직접적으로 그 자신 토로한 바 있기 때문이다. 두개의 산문집, <<구름에 그리다>>(서울: 신흥출판사, 1959)와 8편의 시들을 어색하게 수록한 <<나는 고독하지 않다>>(서울: 평화사 1963)에서 신변잡기에 해당하는 글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배적인 주제는 '존재'의 초극에 관한의 문제들이었다. 문학적 형상화를 염두에 두었다기 보다는 깊은 사유를 잠언형식으로 진술한 <<제9시집>과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의 수록 <단장> 시편  역시 같은 주제를 심각히 반복해서 다루고 있다.

 

    저 허허로운 궁창(穹蒼)을 보라. 영원히 있음이이란 영원히 없음과 무엇이 다르랴!/나는 한 떨기 흔들리는 오랑캐꽃과 같이 영원하지 못하다./그러므로 아아  눈물 나는 이 실재   <단장(短章) 70>

 

  150여편이 넘는 '단장' 형식의 시 가운데서 임으로 인용해 본 것이다. 완결된 한편의 시라기 보다는 사유 그 자체의 직접적인 토로로 쓰여졌다. 이 시에서 시인은 문학적 형상화라든가 참신한 상상력의 모색이라든가 감각적인 언어미의 창출과 같은 것에는 거의 관심이 없어 보인다. 다만 자신의 내면적 성찰을 기록하고 언어화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을 뿐이다. 인용시 역시 존재 유한성과 그 초극에 관한 문제를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다는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단장>은 특히 이와같은 특징을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는 연작시들이지만 정도의 차이가 있으나 유치환의 다른 시들도 대부분 이 원칙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유치환은 이와같은 그의 시창작의 태도를 한 산문을 통해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나의 시란 것은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시라는 허울을 허가 없이 빌려 뒤집어 쓴 것에 불외하다 함이 마땅할 것이다.---중략---내가 나의 인생에 대해서 너무나도 다변하였음을 새삼스리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다변벽(多辯癖)이 결국은 커다란 허무의 협박 앞에선 비소자(卑小者)의 자신의 비력(非力)을 망실(忘失)하기 위한 조갈한 편집(偏執)의 소치인 동시 장차의 커다란 침묵을 위한 배설임을를 스스로 믿는 바이다. 더구나 나의 이 글들이 언제나 나의 인생에 있어서 가차(假錯) 없고 가식 없는 진실을 오직 밑바닥하고 우러나온 것이었고 보니 이제야 그 진실을 내 자신 마지막 증거할 때가 이르고 있음을 나는 지금 곰곰히 깨쳐 느끼는 것이다.

 

  여기서 '허무의 협박 앞에 선 비소자의 자신의 비력을 망실하기 위함'이 허무 앞에 내 던져 있는 존재의 자기 초극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한 관점에서 유치환이 시라는 형식을 빌어 하고 싶었던 것은 하나의 예술작품----미학적 등가물을 창조하는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존재 초극에 대한 탐색이 아니었던가 한다. 다시 말하여 유치환의 담론은 일반시인이 통념적으로 지향하는 바 문학적 가치 창조에 있었다기 보다  존재의 근원에 대한 사색을 언어화하는 일에 있었다.  그 결과 유치환은 적어도 이와같은 시를 독특한 자기만의 시이며 그것은 미학적 등가물로 쓰이는 일반 시와 달리 '진실한 시'가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는 시인이라기 보다는 철학가였으며, 몽상가라기 보다는 사색가였으며, 장인이라기 보다는 사변가였다. 유치환이 스스로 시인이라 불려지기를 거부하고 그가 쓰는 시가 일반적인 '시'와 다른 '진실한 시' 혹은 '시가 아니어도 좋은 시'라 주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결국 그가 '진실한 시'라고 불렀던 것은 문학의식과 관계 없이 존재의 근원 탐색과 그 초극의 내면적 몸부림을 언어화한 형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가령 까뮈나 싸르트르 등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그들 철학의 개진 방식으로 문학이라는 형식을 빌렸던 것과 같은 태도이기도 하다.

 

                           2

  유치환에게 있어서 삶이란 근본적으로 허망하며 인간 역시 무의미하고 유한한 존재이다.    

 

    드디어 크낙한 공허이었음을 알리라/나의 삶은 한떨기 이름 없이 살고 죽는 들꽃----정처 없이 지난 일진(一陣)의 바람<드디어 알리라>

 

    모든 것은 필멸의 날이 있다. 그러므로 나는 바다처럼 무료하게 출렁대며 살고 싶다.<허무의 전설>

    인생은 허무----한 오라기 갈대, 인정의 한 모금 생수도 나누지 말 일이요 애틋한 사랑의 실마리도 인연 맺지 말라<나도 모르노라>

    허무의 이 눈물 나는 실재여<새>

 

    있음은 치욕, 허백(虛白)의 시간에 매달리는 형벌<제 구시집 단장 18>

 

    아아 진실로 이 고독의 고독! 허무의 허무<지밀>

 

    그리하여 유치환은 '필유(必有)한 것을 끝내는 무(無)로 밖에 인지 못하는 인간의 육신의 둘레란 얼마나 보잘 것 없고 비소한 것인가. 이 비소하고 보잘 것 없는 둘레의 한계를 밀어 뜨리고 무한이란 얼마나 엄청나게 확대되어 있는 것인가'<봄풀>하고 독백한다. 여기서 '육신의 둘레'란 본문에서 지시되어 있듯 무한과 대면한 존재의 한계 상황이라 이를 수 있는데 그것은  <단장>(<나의 살갗>)에서 노래된 '나의 살갗---/저 허무의 그 광막한 시공의 아득한 해안선!'의 '살갗' 이미지와 동일하다. '살갗' 즉 피부는 육신과 그것이 접하는 세계의 경계에 자리 잡은 까닭에 비유하자면 육지(육신)와 바다(세계)를 구분짓는 해안선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해안선에서 바라보는 수평선 건너의 바다는 얼마나 무한하고 광대한가, 이에 비해서 인간은 해안선의 그것처럼 '육신의 둘레'---- 더 감각적으로 말하자면 세계와 대면하는 피부(살갗)--- 안에 갖혀 있는 자이다. 앞서 지적했듯 유치환이 자신을 바닷가에 구르는 한개의 돌맹나 한마리의 게, 혹은 푸른 하늘 아래 갈 곳 잃은 겨울 가마귀로 비유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이렇듯 인간이란 그를 둘러싼 이 광대 무변한 세계에 비할 때 한계상황안에 갇힌 존재인 것이다.      존재는 또한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자이다.

 

     아아 파리한 인생의 행렬은/ 무엇을 보이려 함이런고/무엇을 알리려 함이런고  <악대>

 

    그들 또한 모다 뚜쟁이처럼 진실을 사랑하지 않고/내 또한 그 거리에 살어/오욕을 팔어 인색의 돈을 버리려 하거늘/ 아아 내 어디메 이 비루한 인생을 육시하료 <가마귀의 노래>

 

    목숨이란 본시 /한갖 죄욕일진대 ,<오동꽃>  

 

    인류는 얼마나 헛되고도 부질 없는 욕망에 자신을 낭비하여 왔는가 돌아가 이 길로, 아무 말 않고 이대로 나는 가자. <시골길에서> 

 

 

  인용시행에서 보듯 인간의 일상적 삶이란 근본적으로 허무하며 헛된 것이기에 그것은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것이기도 하다. 시인은 축제의 팡파르를 울리는 악대의 행렬 속에서 어떤 보람과 희열을 느끼기 보다 오히려 '인생의 파리한' 본질을 대면케 된다(<악대>). 진실이 부재한 삶, 오직 세속적 쾌락에 탐익하는 삶도 본다.(<가마귀의 노래>) 따라서 그것은 부질 없는 욕망에 매어 있는 삶이기도 하다.(<시골길에서>) 그리하여 시인은 드디어 '목숨이란 한갖 죄욕에 지나지 않는다'(<오동꽃>)는 깨달음에 이르르게 된다. 삶이 하나의 형벌이며 죄라는 것은 어떤 가치나 의미로서가 아니라  마치 징역을 살듯 그저 겪어내야 할 어떤 것으로 아므렇게나 사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능동적인 의지로, 혹은 가치창조로 사는 삶이 아니다. 이 세상에 놓여 있기에 이 세계에 내던져져 있기에 그저 있어야 하는 길가의 돌멩이 같은 것의 '있음'이다. 말하자면 인간이란 내 던져져 있는 것으로서의 존재이다.  

  인간이란 또한 고독한 자이다.

 

     곁에 잠든 안해마저/겨우 한 개 물체로 화석(化石)하였나니/아아 이 허탈한 시공(時空)에서 너는 무엇을 믿겠느뇨.<허탈>

 

    짐짓 너와 나와는 본시 무슨 상관이 있더냐<파르테논의 하늘>

 

    그예 너는 내게 무슨 상관이니? <술집에서>

 

    나는 젖는대로 비에 젖는 어느 한 마리 외로운 갈매기로다.---오오 나의 골육이여 너는 어느때 /개인 너의 하늘을 깨다르려느뇨<어느 갈매기>

 

    나는 영락한 고독의 가마귀/  창랑한 설한(雪寒)의 거리를 가도/심사는 머언 고향의/ 푸른 하늘 새빨간 동백에 지치었어라---오오 저녁 산새처럼 찾아갈 고향길은 어디메뇨 <향수>

 

  시인은 인간이 근원적으로 고독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자신의 생은 오직 자신 만이 책임을 질 수 있는 것,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까닭이다. 그리하여  일상성 속에서는 가장 가까운 사람 ----흔히 일심동체라고까지 불려지는 안해까지도 존재의 근원적인 문제에 부딪힐 때에는 완전한 타인이 될 수 밖에 없어(<허탈>) '너는 내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반문한다. (<파르테논의 하늘>, <술집에서>) 인간이란 '바다가 아니라 도회지의 밤거리를 배회하는 한마리의 비에 젖은 갈매기'나(<어느 갈매기>), '갈곳을 잃고 방랑하는 겨울의 영락한 가마귀'(<향수>) 같은 존재 이상이 아니다. 이제 시인은 신(神)까지도 보질적으로는 외로운 존재라는 인식에 도달한다.

 

    신이여, 당신이 우시는 것입니까/ 전능하고 부족함이 없는 당신도/있다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나같이 이렇게 외로운 것입니까  <밤>  

 

인간의 일상적 삶은 한낱 허위이다.

  시인은 일상적 삶이 하나의 연극이라고 생각한다. 연극이라는 사실 그 자체를 모르는 자가 꾸며내는 연극이다. 그러므로 일상성에는 그 어떤 차원에서도 진실이 있을 수 없다. 하나의 연기, 위선만이 있을  따름이다. 이러한 시인의 인식은 <월광>에서 다음과 같이 피력된다.

 

    돌이는 돌이라는 탈을 쓰고 돌이 아배는, 돌이 아배라는, 순이는 순이라는  쉰네는 쉰네라는 큰 탈, 적은 탈들을 쓰고서 으늑한 푸르름 속에서는 제 각기 지꺼리고 웃고 꾸짖고 울고 떠들어도 돌이는 돌이같은 순이는 순이같은 돌이 아배는 아배같은 쉰네는 어매같은 허울만을 가졌을 뿐 아까 해 떨어지기 전까지도 꾸겨지고 찌그러지고 비뚜러졌던 쪼들림 따위는 가신 듯이 잊혀지고 오직 즐겁고 흥그럼만이 이들 안에 깃들였는 것이다.

 

    어쩌면 그날 돌이도 돌이 아배도 순이도 쉰네도 저 으늑한 박암(薄暗)의 푸름 속 '나'라는 목숨을 제 가끔 엄숙히 타고서 채 생겨나기 전 혼령으로 지내던 그  때가 차라리 이랬는지 모른다. <월광>

 

  시인은 인용시에서 낮 동안 가난과 노역에 시달리던 한 가족이 밤이 되자 달빛 아래서 단란한 저녁 한 때를 보내는 풍경을 그려보여준다. 그리고 그와같은 밤의 그 단란한 모습이 마치 가면극의 한 장면같다는 착각에 빠진다. 왜냐하면 본질(궁핍한 낮동안의 삶)이  현상 즉 탈(밤의 단란한 모습)로 은폐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 시인이 그려보여준 것은 단순한 삶의 풍경이 아니라 밤의 삶과 낮의 삶의 대조를 통해 드러나는 존재의 일상성과 본래성에 관한 것이다. 즉 밤과 낮이 다른 한 가족의 모습처럼 삶의 일상성이라는 것 이면에는 존재의 본래성 즉-

 

---이 작품에서 궁핍과 가난으로 상징된----무와 절망에 이르는 근원적인 고독의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일상이 한낱 허위이며 위선이라는 유치환의 인식은 까뮈가 <이방인>에서 보여준  주인공 뫼르쏘의 행위와 매우 유사한 것이다.  뫼르쏘는 모친의 사망 통보를 받고도 해수욕을 즐기고 여자와 정사를 나누는데 이 역시 일상성과 본래성의 거리에 놓인 모순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상적 삶은 진정한 존재가 되지 못한다. 그것은 있어도 있지 않은 것이며 있지 않으면서도 있는 것과 같다. 유치환이 '가도 가도 아무도 없는데/누구인가/이 엄엄한 부재(不在)의 재(在)'라 탄식하고 (<부재(不在)의 재(在)>), 혹은 오오 나는 어디메로 가려는고/-----이 가공한 백주의 허적(虛寂) 가운데선/나의 행위하려는 것/그는 오직 의지 없는 한 슬픈 영회(影繪)일 뿐(<하일애상(夏日哀傷)>)이라고 탄식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유치환은 이처럼 인간이란 근원적으로 유한하고 무의미하며 고독하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허위와 위선의 일상성 속에 함몰해 있는 자라고도 생각한다.  그리하여 그가 자신을 스스로 '에트란제'('나도 오늘 나의 사념 속에/홀로 턱 고이고 있는/에트란제' <동일 독좌(冬日獨坐)>)로 규정하고 '땅에 떨어진 한개의 장갑'(<그리움>), 혹은 바닷가 변두리의 '한 개 외로운 바위'(<풍일(風日)>) 로 비유했던 것은 자연스럽다. 가이 없는 바닷가의 변두리에 내던져 있는 한개의 돌멩이, 무한의 창공아래 버려져 있는 한 짝의 장갑이야 말로 바로 유한성과 고독과 무의미와 가식의 존재를 표상해주는 사물들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찌기 실존주의 철학자 키엘케고르가 자신을 가리켜 책장의 홀로 거꾸로 박힌 활자로 비유했던 것과 너무나도 유사하다.

 

                         3

   유치환에게 있어 유한한 존재가 그 유한성을 극복하는 방법은 오직 '인간에의 길' 즉 '휴우머니즘'의 길 밖에 없다. 그것은 그가 실재로서의 신을 부정하고 우주를 영원한 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서 신이란 우주가 어떤 절대자의 간섭 없이 그 자신 구현해가는 어떤 영원의 의지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인간을 섭리하거나 심판하는 존재가 아니다.

 

.    무시 무종 한가지 현상 한가지 과정을 반복지속하고 있는 우주와 자연의 구성! 무한한 질서 속에 이 대우주와 자연을 존재 지탱하여 있게 하고 있는 어떤 절대의 의사! 의사! 능력! 이 절대한 뜻과 힘 없고서는 어찌 이 무량대한 만유와 그 구성을 무시 무종 일사 불란한 대 질서 속에 지탱할 수 있다고 인정하겠는가? 이 절대한 의시와 능력을 인정만 한다면 그것을 무어라 이름 불러도 좋은 것이다. 나는 그것을 신이라 부른다.

 

    그러나 나는 당신[신]이 당신의 의사로써 우리 인간에게 한하여서만 정연한 만유의 질서 속에 존재하게 하는 그 이상의 어떤 은총을 베풀어 주며 베풀어 줄 수 있는 존재라고 믿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인간이 영생한다든지 천국으로 들어가 당신과 함께 행복하게 산다든지 하는 유의 과분한 은총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해결의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간단히 말해 인간이 신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유치환은 자신의 어떤 작품에서 이렇게 노래한 적이 있다.   

                          

    아아 나는 / 하늘 자락 끝 간 질편한 대로ㅅ길!/ 그 길을 즐거이 활개치고 가면 신(神)과 더불어 나도 신(神)이 될 수 있어----<도주에의 길>  

 

  나도 신이 될 수 있다는 이 놀라운 발상 그것이야 말로 그에겐 존재가 그  유한성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존재는 어떻게 함으로서 신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이 논의에서 우리가 미리 다시금 확인해 둘 것은 유치환의 '신'이 유일신이나 창조주로서의 실재자가 아니라 '만유를 포괄하고 지탱하는 능력과 의사' 혹은 '우주나 세계를 구현하는 의지'라는 사실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신은 유일하게 홀로 존재하는 자가 아니라 만유에 내재하는 자, 만유의 그 하나하나가 참여함으로써 되는 신임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신은 선(善)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악(惡)을 위해서도 존재한다. 인간이 선이라 하는 것은 인간의 측면에서의 정의이다.'라든지

 

    광대무변한 전 우주에 혼돈하여 있는 신, 이러한 신의 존재를 구상화하는 것부터가 잘못인 것이다. 신의 형상은 오직 의사로서 만유에 표묘편재(  遍在)하여 있는 것이다. 십자가에 걸린 예수에게도 강도 '발리바'에게도 옮아 있고 사탄에게도 깃들어 있는 것이다. 사탄인들 어찌 기독교의 신이 그 소생의 족보도 모르고 다스리지도 못하듯이 신의 의사 밖에 있는 것이겠는가.'

 

    라는 진술이 가능한 것이다.

 

  한편 유치환은  '우주의 무량대를 무엇으로 긍정할 수 있는가?/ 오직 인간의 인식만이 그것을 인식할 뿐/ 그러므로 인간의 인식은 우주만큼 무량광대하다'고 하여   인간 의식의 무한성에 대하여 언급한 바 있다. 그런데 '무한성(무한한 것)'이란 오직 신만의 소유인 까닭에 유치환의 이와같은 인식은 앞서 지적한 바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한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자신도 될 수 있다는 유치환의 '신'이란 이 범우주적 만유의 의지를 최고도로 구현하는데 기여하는 '자아', 즉 일상적 차원을 초극하여 우주적 영위에 참여하는 '자아'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와같은 자아는 신과 같은 자아임으로 범속한 삶이나 순간의 소멸 속에는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은 무한한 존재로서의 자아 혹은 영원한 존재로서의 자아이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신이 될 수 있는 이 영원한 자아 혹은 초극하는 자아란 무엇일까. 우리는 여기서 유치환이 의미하는 '영원', 혹은 '무한'의 문제를 살펴볼 필요를 느낀다. 그에 의하면 영원이란 실재하는 신이나 이 세상을 초월해 있는 천국과 같은 개념이 아니다. 그에게 있어서 영원이란 그 자체가 '허무'인 것이다. 상식적인 논리에서 '허무'(즉 무 혹은 없음)란 '유'(있음)의 모순 개념이지만 그러나 유치환에게 있어서 이 '영원으로서의 허무'는 '유'(有) 즉 있음의 모순 개념으로서 '무'(無)가 아니라 '무'가 유되는 차원, 죽음이 삶이 되는 차원이다. 그러므로 그 '허무'는 우리가 현실세계에서 일컫는 그런 상식적 차원의 '무'가 아닌 '영원'이기도 하다. 유치환은 그것을 신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치환이 말하는 '허무'는 어찌해서 '무'인 동시에 '유'가 될 수 있는가. 그것은 유치환의 세계관 속에서 그 해답을 구할 수 있다. 그가 이 세계를 '무'로 보았던 것은 첫째 이 우주를 창조하고 주관하는 신---종교신은 이제 죽었고 따라서 이 세계는 의미도 목적도 사라져 버렸다. 의미나 목적이 없는 것들은 없는 것(무)와 마찬가지이다. 둘째 이 세상의 모든 개개의 존재는 언제인가 소멸한다. 인간과 같은 생명체는 죽게 마련이요, 생명이 없는 유기물들도 그 형체가 스러지는 것이다. 유치환이  '모든 것은 필멸의 날이 있다. 그러므로 나는 바다처럼 무료하게 출렁대며 살고 싶다'.(<허무의 전설>)고 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이처럼 이 세계는 '무' 그 자체이지만 다른 한편에서 '유'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개개 사물의 입장에서 만유는 사라지거나 죽지만 우주적인 입장에서 결코 소멸하지 않고 생장과 소멸을 영원히 되풀이하고 있는 까닭이다. 그것은 마치 현대 물리학에서 말하는 '질량불변의 원칙'과 유사한 것이다.

 

    대우주 자연 속에는 이르는 바 진보 변화라는 것은 없는 것이다. 시종여일한 한가지 현상을 반복 지속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로는 이것이 창설될 때부터 완전무결한 때문인지도 모른다. ----중략---무시무종 한가지 현상 한가지 과정을 반복 지속하고 있는 우주와 자연의 구성! 무한한 질서 속에 이 대우주와 자연을 존재 지탱하여 있게 하고 있는 어떠 절대한 의사! 능력! 이 절대한 뜻과 힘 없고서는 어찌 이 무량대한 만유와 그 구성을 무시무종 일사불란한 대질서 속에 지탱할 수 있다고 인정하겠는가?

 

    우주의 오의(奧義)인 영원한 생성을 결코 '나'라는 개체위에서 풀어야 할 것이 아니라 나는 인간의 전나무에 피어 달렸다 낙엽하기 마려인 한 이파리일 뿐 인간의 전나무는 결단코 죽은 것이 아니요 영원한 생성을 향하여 쉼 없이 전진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되겠으니 말이다.

 

  이와같은 관점에서 이 우주, 존재는 또한 영원히 있음, 즉 '유'의 세계이다. 유치환이 <죽음에서> 죽음을 진정한 소멸이 아니라 '의미 없는 지속으로서의 무한'으로 돌아가는 것이라 하여 무한 또한 '무의 무'로 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결국 이와같은 관점에서 유치환의 '허무'는 우주적인 '무'이며 그것은 단순한 '무'가 아니라 '유'를 포괄한 '무'라 할 수 있다. 즉 유치환에게 있어서 '허무'란 우주적인 개념으로서---- 그를 창조한 신의 사멸과 더불어---- 우주 만유가 제스스로의 의지로 영원히 그 있음을 되풀이함을 의미한다. 그것은 목적도 의미도 없는 생성 변화 소멸의 끝 없는 되풀이 그 영원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유치환의 '허무'는 '무한', '영원한 무', 혹은 '영원'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유치환의 논의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서 '허무'는  곧 신이라는 개념으로 발전하기 때문이다. 그는 앞서 논의했던 바 과거의 신 즉 종교신을 추방한 자리에서 현재의 신으로 이 '허무의 의지'를 올려 놓는다.

 

    이같이 만유를 있게하여 포괄하고 지탱하고 있는 이 능력, 이 의지, 이 불가견의 실재를 과연 우리는 무엇이라 일컬어 좋겠습니가? 이를 나는 신이라 부르며 신의 표상이요 신의 총체라 믿는 것입니다.

 

  앞서 논의했던 바 '만유를 포괄하고 지탱하고 있는 이 능력' 즉 우주적인 무가 '허무'라 한다면 그에 의할 때 이 '허무'야 말로 그의 새로운 신---현재의 신이 아니겠는가. 그러한 관점에서 이 완전한 무는 필자가 앞장에서 지적한 바 '만유를 포괄하고 지탱하는 능력과 의사' 혹은 '우주나 세계를 구현하는 의지'로서의 신과 일치한다. 유치환의 다음과 같은 진술이 가능한 것도 이 때문이다.

 

    (밤이 낮의 그림자이둣)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것도 현생과는 따로인 달리 있는 것이 아니라 실상은 총체자요 유일자인 저 절대 의사의 그리매 속으로 인간의 목숨이 도로 덮혀 묻혀지고 마는 것임에 틀림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그가 '영원'이라고 말했던 것, 혹은 무한이나 허무라고 말했던 것은 신의 개념으로 종합된다고 하겠다. (앞으로 일상적 의미의 무 즉 유의 모순개념으로서의 무와 구별하기 위하여 이와같은 무 즉 유이며서 무인 것을 '허무' 혹은 '영원한 무', '완전한 무'라고 부르고자 한다. 필자 주)

 

                             4

  여기서 우리는 다시 논의를 처음으로 되돌이자. 필자는 앞에서 존재가 유한성을 극복하는 방법은 스스로 신이 되는 길 밖에 없다는 유치환의 견해를 지적한 바 있는데 이는 다른 말로 존재가 '허무'즉 '영원한 무'에 이르러야 된다는 뜻이다. 그렇다.  존재가 유한성을 초극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허무를 체현하는 것 밖에 없다. 지금 살펴본 바와같이 유치환에게 있어서 신은 허무 그 자체인 까닭이다. 다만 어떻게 그 허무의 세계에 도달하느냐 하는 문제가 남을 뿐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하나의 전제가 붙는다. 그 영원한 무 즉 허무란 육신의 죽음 혹은 만유의 파멸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와같은 의미의 무는 허무가 아니고 유의 상대적 개념으로서의 일상적인 무에 지나지 않는 까닭이다. 그 에게서 허무는 부정적인 무가 아니라 부정을 통해서 긍정으로 나아가는 무이다.

 

         어떤 가열한 '니힐리즘'일지라도 마침내는 마지막 긍정위에 발붙이고 있기가 마련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떠한 '니힐리즘'도 인간인 존재 위에서만 비로소  있을 수 있는 것이며 인간이란 존재 그것이 이미 커다란 긍정이기 때문입니다.

 

      니힐리즘이란 어쩌면 보다 크고 넓은 모랄을 요구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이 '허무' 즉 '영원한 무'에는 어떻게 도달할 수 있는가.  

 

  그것은 무엇보다 '일상적인 무'에 대한 깨달음으로부터 시작된다. 일상성에 함몰하는 자는 그 영원 절대한 무를 보지 못하고 그와 더불어 소멸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시간은 시시 각각으로 존재를 파멸로 이끌어간다. 그것은 흡사 사형 집행관의 번뜩이는 칼날과도 같다. 시인이  <낮 석점>에서 존재에게 어떤 결단을 강요하고 <초려>(焦慮)에서 존재를 사멸시키는 시간을 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낮 석점>에서 시간이 강요하는 결단이 일상적 행위가 아니라 존재의 근원적인 문제에 관련되고 있다는 것은 사막의 한 복판에서 시간이 '어디로 가느냐는 게냐/나더러 거 누구냐는 게냐'라고 반문하면서 마치 형리가 형을 집행하듯 화자를 압박하고 있는 것에서잘 드러난다. 화자는 일상적 시간 즉 존재를 파멸로 이끌어가는 시간은 오직 영원성을 증거하기 위한 과정적인 의미를 지닌 것에 지나지 않음으로 한시 바삐 이로부터 탈출해야 할 것을 역설하고 있다. 그리하여 시인은  일상적 시간으로부터 벗어나 영원 한 무의 시간 즉 절대의 허무에 도달해야 함을 다음과 같이 깨우치고 있다.

 

    모름이로다. 모름이로다./일체 목숨 집 빌린 자는 궁창에 걸린 저 혁혁한 해로부터 그지 없이 울어 새는 풀잎 새의 한마리 미물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그 집에 물러야 할 필멸(必滅)의 날이 있음이어니/깨닫지 못한 자여/너 저 어디메 먼 성좌와 성좌 새의 메울 수 없는 인과(因果)의 심연에서 삽삽(颯颯)히 형상 없이 일어 와 애닲게도 너의 들[內] 의미와 형상을 구걸하여 방황하고 탄식하고 저주하고----바람되어/ 차라리 생겼음의 회오(悔悟)를 적막한 밤일수록 헌 문짝같이 흔들어 날 문초하나니// 그러나 오늘은 조춘(早春)의 이 황막한 들녘 끝 등성이에 내 호올로 거닐며 노닒은/ 마음 이끌려 먼 먼 바다로! 그 외론 섬들의 변두리에 근심스리 설레이는 풍랑되어 보내고/아아 나는 차라리 이대로 이대로 무료한 신(神)이어라.  <허무(虛無)의 전설(傳說)>

 

  이 시에서 시인은 존재란 그 일상성에 있어서 어떤 것이든 필멸의 날이 있음을 지적하고 따라서 그 세속적 삶의 쾌락에서 깨어나 이 모두를 초월하라고 웨친다. 그리고 그 초월의 행위가 모든 일상성을 '풍랑'으로 실려 보내고 '먼 바다(무한)로 나아가는 일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리하여 이 시는 존재(화자)가 드디어 신이 되는 것으로 결론지어진다.('아아 나는 차라리 이대로 이대로 무료한 신(神)이어라.') 일상적 무를 버리고 완전한 무를 껴 안을때 앞에서 지적했듯이 존재는 바로 신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와같은 깨달음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그것은 첫째 모든 일상성으로부터 초연해야 한다. 절대의 무를 대면함에 있어서 방해가 되는 일체의 비 본래적 관심을 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희, 노, 애, 락과 같은 본능적 감정은 투명한 이성을 흐리게 하고 생의 의지를 나약하게 하는 까닭에 적극적으로 타기해야 될 대상이다. 유치환이 틈나는대로 '비정(非情)'의 가치를 강조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유치환의 그 유명한 <생명의 서>1장은 '내 또한 삶의 애증을 다 짐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에 부대낄 때/저 머나먼 사막으로 나는 가자'로 시작되고 있지만 다음의 시는 이와같은 시인의 자세를 확고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내 죽으면 한개 바위가 되리라/아예 애련에 물들지 않고/희노에 움직이지 않고/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억년 비정의 함묵(緘默)에 /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흐르는 구름/머언 원뢰(遠雷)/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쪽으로 께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바위>

 

   둘째 고독과 타협하지 않고 끝내 맞서 싸워 이겨내야 한다. 즉 그는 고독을 감내하는 절대 고독의 차원에 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고독을 포기하고 일상성에 탐익하는 자는 절대한 무, 영원한 허무의 세계에 들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같은 고독을 체득할 수 있는 자는 물론 통렬하게 사유하는 자이다.

 

    오직 사유하는 자만이 능히/이 절대한 고독을 견디나니/ 영원이란/전부를 느  껴 알고 전부를 준거(峻拒)하는 자---//아아 종시 우럴은/다못 한장 짙푸른 나  종의 나종!/삽시 조화(造化)의 처참한 포효(咆哮)에도 다시 견디어/ 우주의 가장   여명(黎明)과 모색(暮色)에 섰는자---//엘리! 엘리! 엘리!를 부르짖던 너도/  드디어 이끌 수 없던 인류일랑 버리고/여기에 나와 더불어/ 영원한 고독에 얼어 서자!  <히말라야 이르기를>

 

  인용시에서 히말라야는 세속적 세계를 버리고 무한(하늘)을 향해 가장 높이 가장 처연하게 고독을 감내하는 자이다. 그리고 그의 고독은 아버지인 여호와신에게서조차도 버림을 받고 홀로 십자가에 못박히는 예수의 그 절대 고독에 비견된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다. 시인이 요구하는 그 절대 고독은 이와같은 차원까지도 뛰어넘는 그 어떤 것이어야하기 때문이다. 예수는 ---비록 그들로부터 배신을 받기는 하였으나 인류를 구원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시인이 요구하는 것은 세속적 세계와 맺는 이 마지막 끈조차 버리는 고독이어야 한다는 것이다.('인류일랑 버리고/여기 나와 더불어/영원한 고독에 얼어 서자') 절대 고독에 대한 시인의 이러한 태도는 그의 많은 다른 시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세째 절망을 회피하지 않은 자세이다. 존재는 절망을 경험해야 한다. 절망이란 모든 것이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다는 인식, 나아가 집착을 버리고 세계를 포기하는 행위이다. 그런데 보편적으로 존재가 몸을 두고 있는 세계는 세속적, 일상적 공간이므로 절망을 경험한 자는 그 넘어에 있는 본래적인 것-----저 영원한 절대 무의 세계를 보게 된다. 절망 없이 존재는 일상성의 초월을 이룰 수 없는 것이다. 키엘케고르가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절망을 이겨내지 못할 경우)이며 병이 아니다(이겨낼 경우 삶을 초월시킨다)'라고 한 것, 야스퍼스가 비극(절망)이란 진실을 깨우쳐 주는 기호라고 한 것도 아마 이를 가리킨 말이 아닐까 한다. 대상에(세계와) 부딪혀 절망하고 이로서 깨우침을 얻지 못한 진실, 단순히 사유를 통해 아는 진실이 살아 있는 진실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유치환의 경우에도 절망은 절대의 무에 들어가는 통로 즉 문이 된다. <나무>에서 죽음을 '영원의 무(無)의 옥좌로 오를 경건한 긍정이어늘'이라고 찬탄했던 유치환은 다시 <단장>49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공간---허공의 실재를 우리는 인지한다. 그러나 그것이 인지되는 실재임에는 필연의 숙명인 한계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저 허공의 막다라지 한계를 우리의 추리로서는  안타깝게도 찾아낼 바이 없다. 추궁하면 할수록 그는 증대하여 가서 마침내 구할 길 없는 절망으로 우리를 떨어뜨리고 만다. 신은 이같이 실재한다.   

 

  앞서 살펴 보았듯 유치환의 '신'이 실재하는 보편적 종교신이 아니라 영원 완전한 무 혹은 만유의 영위를 지탱하고 포괄하는 의지라 할 때 이 시는 절망이 바로 이와같은 세계로 들 수 있는 문이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렇듯 유치환에게 존재가 완전 영원한 무--신에 이르는 길은 일상성으로부터의 단절, 절대의 고독과 절망 등 세가지이다.

 

 

abstract 2

Yu Chi Hwan made an attempt to speak to his readers about life through literature. His ways were very similar to Sartre and Camus who also used literature to explain their philosophy.

To Yu Chi Hwan, life was fundamentally vain and men also were limited and meaningless.

An existence is meaningless as well as worthless.  

Men is lonely.

The daily life of a human being is illusionary.

Likewise, Yu Chi Hwan considers human beings to be limited, meaningless and solitary. Furthermore, he considers men to be trapped in the daily routine of hypocrisy and illusion.

In order to solve such problems he displays a never ending contemplation about god.

However, according to him, god is not a real existing being. God is internalized will or power who makes the existence of this world possible through strict order.

Therefore, naturally, he reached the way of  humanism. Since the god who is able to save men no longer exist, only men are able to solve his own problem. Fundamental problems of human beings can only be overcome through the self and not through the help of god.

To Yu Chi Hwan, for a limited human being to overcome his limit is through the self only. Then what would be the solution? Simply said, the only way is for a man to become a god himself. It means that man came to obtain Ego which helps to embody the highest pantheistic will of all things. That is to say, men must obtain the Ego, transformed as the Atman which can overcome the daily routine of life and participate in the cosmetic order.

Since for Yu Chi Hwan, nihil is the eternal itself, his nihil is the nihil of the cosmos and not a mere nothingness but rather, envelops existence. Nihil according to Yu Chi Hwan is a cosmetic concept which means that all things in the universe repeatedly embody their existence with their will since the end of the divine will of the creator. The repetition is  eternal without a goal or a meaning, without a beginning, change nor an end.

However, Yu Chi Hwan's argument does not end here. The Nihil is a god to him. He outcasts the religious god and promots the will of nihil as the god of the present.

 Therefore, his arguement which maintains that man must become a god in order to overcome his limit, can be interpreted like this : the existence must reach the nihil, the eternal nih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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