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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덕이 / 본문 및 해설 / 김남천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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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덕이 / 김남천

 

 

내가 어려서 아직 보통학교에 다닐 적에, 우리 집에서는 부덕이라는 개 한 마리를 기르고 있었습니다. 개라고 해도, 이즈음 신식 가정에서 흔히 기르는 세파드나, 불독이나, 뭐 그런 양견이거나, 매사냥꾼이나 총사냥꾼이 길들인 사냥개거나, 그런 훌륭한 개는 아니었습니다. 그저 시골집에서들 항용 볼 수 있는 아무렇게나 마구 생긴 그런 개입니다. 도적이나 지키고, 남은 밥찌꺼기나 치우고 심하면 아이들 시중까지 보아주는 그런 개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 개를 퍽 좋아했습니다. 내가 까치 둥지를 내리러 커다란 황철나무 있는 데로 가면, 부덕이는 내가 나무 위에 올라가는 동안을, 나무 밑에서 내 가죽신을 지키며 꿇어앉았다가, 까치를 나무에서 떨구어도 물어 메치거나 그런 일 없이, 어디로 뛰지 못하게 지키고 있습니다. 개구리 새끼를 잡으러 갈 때에도 쫓아가고, 더 풀창을 놓으려 겨울 아침 눈이 세네 자씩 쌓인 데를 갈 때에도 곧잘 앞장을 서서 따라다녔습니다. 어디 저녁을 먹고 심부름을 갔다 밤이 지근하여도 돌아오지 않으면, 어떻게 알았는지 내가 간 집을 찾아서 대문밖에 꿇어앉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른들 중에 누가 나를 데려다 주려고 쫓아 나오다가도, 부덕이가 꼬리를 설레설레 저으며, 내 발부리에 엉켜 도는 것을 보면,

 

"부덕이가 있으니 동무가 될 게다. 그럼 잘 가거라." 하고 안심시켜 나를 돌려보내 주었습니다.

 

부덕이는 이렇게 항상 나와 같이 다녔습니다. 그가 나와 떨어져 있는 때는, 내가 학교에 가 있는 동안 뿐입니다. 아침 책보를 들고나서면, 뿌르르 앞서거니 뒤서거니 따라 나오다가도, 학교 가는 골목 어귀까지만 오면, 내가 가는 걸 뻔히 바라보다가, 이윽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버렸습니다. 집을 너무 떠나 다니면 집안 어른들께 꾸중을 들었으므로, 내가 학교에 간 동안은 대개 집안에 있어서 제가 맡은 일 ― 말하자면 낯선 사람을 지키거나, 찌꺼기를 치우거나, 곡식 멍석을 지키고 앉았거나, 방앗간이나 연자간에서 새를 쫓던가 하고 날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는 비가 오다 개인 날, 붉은 물이 흐르는 개울을 건너서 참외막에 가느라 개울에 걸려서 하마터면 흙탕물에 휩쓸릴 뻔한 것을 부덕이 때문에 살아난 적조차 있었습니다.

 

평시에는 퍽이나 얕은 개울이라, 나는 안심하고 건너던 터인데, 밀 돌에 발을 곱짚고 물살이 센 데서 내가 그만 엎어져버렸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물살이 거세고 물이 예상외로 부쩍 불은 데 겁이 났던 나는, 이렇게 되고 보니 정신을 차릴 수 없어, 엎치락뒤치락 허우적거리면서 저 만큼이나 급류에 휩쓸려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뒤로 오던 부덕이는 곧 앞지름을 해서, 아래턱으로 흐르더니 나를 잡아 세우려고, 제 몸을 디딤 발로 삼을 수 있도록 가로 던집니다. 내가 미처 일어나지 못하니, 부덕이는 내 몸의 괴침(고의침)을 물고 얕은 데로 끌어내리려 듭니다. 겨우 나는 큰돌을 하나 붙들고 얕은 데로 나와서 건등에 올랐는데, 머리가 띵하고 앞뒤를 가눌 수 없어 한참이나 길 위에 누웠었습니다. 부덕이는 내 옆에 쭈그리고 앉아서 내가 일어나기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집에 돌아와서도, 나는 물에 빠졌다가 부덕이 덕에 살았단 말은, 아예 할 생각을 않았습니다. 장마물에 나가지 말라던 걸 나갔던 터이라, 어른들께 꾸중들을 것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집에서는 부덕이가 나를 몹시 따르는 줄만 알았지, 그가 내 생명의 은인이라는 건 알 턱이 없었습니다.

 

부덕이도 내 나이 자라는 대로 늙어갔습니다. 그리하여 다섯 살이 넘게 되었습니다. 언젠가 학교에 갔다가 오는 길에 부덕이를 만나 집으로 돌아오는데,

 

"개는 아예 나이 먹도록 기를 건 아니야. 저 부덕이도 인제 흉한 짓 할 나이로군."

 

하는 동네 늙은이의 말을 듣고, 나는 대단히 놀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우리 집 막간 사람이 어느 개가 팠는지 통수간 앞에 구덩이를 팠다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나는 그래서 어머니랑 아버지랑 듣는 데서,

 

"아까 뒷집 장손네 개가, 입으로다 흙을 파구 있든."

 

하고 헛소리를 하여 부덕이를 변명했습니다.

 

"원, 그런 망할 놈의 개가 어디 있담."

 

어머니는 개가 구덩이를 파는 건 누가 죽어서 그 속에 묻히라는 것이나 같다고, 몹쓸 놈의 개라고 욕하였습니다.

그런데 며칠을 지나서, 내가 학교에 가서 한 시간을 공부하고 마당에 나와 땅재먹기를 하며 노는데, 뜻밖에 부덕이가 찾아왔습니다.

 

부덕이가 학교에 나를 찾아온 적은 여태까지 없는 일이므로, 나는 이상히 생각했으나 미처 다른 걸 생각지는 못 하고,

"뭐 하러 와 가, 어서 가서 집에 가, 일을 봐."

 

하고 쫓아 보냈습니다. 손으로 쫓고 발로 밀고 하니, 서너 발자국씩 물러가기는 했으나, 가기 싫은 걸음처럼 몇 걸음 가서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길 위에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상학종이 울어서 나는 교실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하학하고 집에 돌아오니, 여느 때 같으면 마중 나오던 부덕이가 중문턱을 넘도록 아무 소식도 없습니다. 나는 부덕이가 늘상 들어가 자는 마루 밑을 거꾸로 서서 봅니다. 그러나 그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뒤 뜰 안을 보아도, 통수 뒤를 보아도, 연자간을 보아도, 토끌 뒤를 찾아도, 그리고 마지막에는,

 

"부덕아!"

 

하고 불러보아도, 아무 기척이 없었습니다. 나는 정녕 무슨 일이 생긴 불 알았습니다. 나는 낟가리를 얽고 있는 막간 늙은이에게 물어 봤습니다. 그랬더니 영감은 태연하니 제 일만 하면서,

 

"기둥 흙을 석자나 팠다고 도수장으로 가져갔다."

 

하고 대답합니다. 나는 억해서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아까 학교로 찾아왔던 건 아마 기둥흙을 파고 어른에게 욕을 먹거나 매를 맞고 왔었던 걸, 알 수 있었습니다.

 

그는 나더러 변명해 달라고 찾아 왔던 것일까요, 아니 왜 그는 두 번 세 번씩 땅을 파고 기둥흙을 파고 하였던가요 ― 나는 부덕이의 행동도 알 수 없었고, 그것을 흉행이라고 몰아대는 어른들의 일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마른 호박 넝쿨 밑으로 가서, 부덕이 생각을 하고 하루 종일 눈물을 흘렸습니다.

 


 작자 : 김남천(金南天)
 형식 : 수필
 성격 : 회고적, 감상적, 비판적, 서사적
 제재 : 개
 주제 : 작자와 개에 얽힌 에피소드(인간의 자의적인 판단에 대한 비판)

 

 밀돌 : 납작하고 반들반들한 작은 돌.
 막간 : 여기서는 문간방(대문간 바로 옆에 있는 방)을 말하는 듯하다.
 토끌 : 토방(마루를 놓게 되어있는 처마 밑의 땅)이나 토광(널빤지를 깔지 않고 흙바닥 그대로 둔 광)을 말하는 듯하다.
 연자간 : 연자맷-간(硏子-間), 연자매로 곡식을 찧는 방앗간
 도수-장(屠獸場) : 도살장.
 흉행(凶行/兇行) : ① 매우 거칠고 사나운 행동을 함. 또는 그런 행동. ② 사람을 해치는 따위의 흉악한 짓을 함. 또는 그런 짓.

 

 개에 관련된 글이 많이 있지만, 이 글은 작자와 개에 얽힌 이야기를 하면서 인간의 자의적인 판단에 대한 말없는 비판을 가하고 있다. 매사를 인간의 관점에서 보는 사람들의 생각을 어린 눈으로 보면서 동물들에 대한 생각을 확대시켜 인간의 주관적인 판단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는 수필이다.

 

 

 김남천(金南天)  

 1911 ∼ 1953. 소설가 · 문학비평가. 평안남도 성천(成川) 출생, 본명은 효식(孝植)이다. 1929년 3월 평양고등보통학교(平壤高等普通學校)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 동경의 호세이대학(法政大學) 예과에 입학하였다.

 

1926년 평양고등보통학교 재학시 잡지 ≪ 월역 月域 ≫ 의 발간에 참여하였고, 1929년 호세이대학 재학중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KAPF) 동경지회(支會)에 가입하였다.

 

≪ 전기 戰旗 ≫ · ≪ 제2무산자신문 ≫ · ≪ 무산청년 ≫ 등의 독자망을 확대하기 위해 전기사, 무산자신문반, 독서회, 적색스포츠반에 가입하였다. 카프 동경지부가 발행한 동인지 ≪ 무산자 ≫ 에 임화 ( 林和 ) · 안막(安漠) · 한재덕(韓載德) · 이북만(李北滿) · 김두용(金斗鎔) 등과 함께 동인으로 가담하였다.

 

1931년을 전후한 카프 제2차 방향전환기에 임화 등과 귀국, 김기진(金基鎭)이 주장한 프로문학의 대중화론(大衆化論)에 대하여 개량주의라고 비판하고 나섬으로써 극좌적(極左的) 태도를 취하였다.

 

1931년 10월 카프 제1차 검거 때 카프 문인 중 유일하게 기소되어 2년의 실형을 언도받았다. 1935년 임화 · 김기진과 협의하여 카프가 경기도 경찰국에 해산계(解散屆)를 낼 때까지 조직에 충실하면서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을 추구하였다.

1930년 평양고무공장 노동자 총파업에 참여하여 선전 선동활동을 수행한 경험을 바탕으로 희곡 〈 파업조정안 罷業調整案 〉 (1931)과 소설 〈 공장신문 工場新聞 〉 (1931) · 〈 공우회 工友會 〉 (1932)를 발표하고, 이후 〈 물 〉 (1933) · 〈 생의 고민(苦憫) 〉 (1933) · 〈 문예구락부 文藝俱樂部 〉 (1934) 등의 단편을 발표하였다.

 

작가의 창작을 좌우하는 방법문제에 있어서 조선프롤레타리아트의 당면한 과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그 과제를 작가 자신의 체험 속에 소화시키려는 작가의 결단적인 실천이 문제된다고 하였으나, 실제 그의 작품은 계급적 인간을 그리려는 과도한 시도로 현실 속의 산 인간을 그리지 못한 것으로 지적되었다.

 

그는 이후 고발문학론(告發文學論)으로 기울어졌는데, 〈 남매 〉 (1937) · 〈 처를 때리고 〉 (1937) · 〈 소년행 少年行 〉 (1938) · 〈 춤추는 남편 〉 (1937) · 〈 제퇴선 祭退膳 〉 (1937) · 〈 요지경 瑤池鏡 〉 (1928) · 〈 가애자 加愛者 〉 (1938) · 〈 누나의 사건 〉 (1938) · 〈 미담 美談 〉 (1938) · 〈 경영 經營 〉 (1940) · 〈 맥 脈 〉 (1941) 등이 이 계열의 작품에 속한다.

1937년 이후부터는 당대 상황에 대한 새로운 창작방법론으로 헤겔(Hegel,G,W.F.)과 루카치(Luk�Dcs, G.)의 이론을 수용한 로만개조론을 제시하여, 묘사하는 대상의 총체성과 풍속이 드러나야 한다는 이론을 폈다.

 

이러한 결과로 전작 장편소설 〈 대하 大河 〉 (1939)를 발표하였다. 이 작품은 성천의 박성권 일가가 겪는 개화기의 시대상과 의식의 변화과정을 연대기적 가족사의 형식으로 그린 소설로 그의 대표적 장편이다.

 

1945년 8월 16일 임화와 함께 ‘ 조선문학건설본부 ’ 를 설립한 후, 1946년 ‘ 조선문학건설본부 ’ 와 ‘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 ’ 이 발전적으로 통합된 ‘ 조선문학가동맹 ’ 이 결성되자 이 단체의 중앙집행위원회 서기국 서기장이 되고, 8월 문학대중화운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월북하여 1948년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1949년 6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상무위원으로 선출되었고, 그 후 문화전선사 책임자,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서기장까지 올랐으나 1953년 휴전 직후 남로당계(南勞黨系) 박헌영 ( 朴憲永 ) 세력을 제거하는 사건과 관련, ‘ 종파분자 ’ 로 지목되어 숙청되었다.

장편소설 〈 대하 大河 〉 외에 창작집 ≪ 소년행 ≫ · ≪ 삼일운동 ≫ (1947) · ≪ 맥 ≫ (1947) 등이 있다. 그의 비평으로는 〈 영화운동의 출발점 재음미 〉 (1930) · 〈 임화에 관하여 〉 (1933) · 〈 창작방법에 있어서의 전환(轉換)의 문제 〉 (1934) · 〈 지식계급 전형의 창조와 ‘ 고향 ’ 주인공에 대한 감상 〉 (1935) · 〈 고발(告發)의 정신과 작가 〉 (1937) · 〈 도덕의 문학적 파악(把握) 〉 (1938) · 〈 세태와 풍속 〉 (1938) · 〈 시대와 문학의 정신 〉 (1939) · 〈 소설의 운명 〉 (1940) · 〈 소설의 장래와 인간성 문제 〉 (1941) · 〈 민족문학 건설의 기본임무 〉 (1946) · 〈 조선문학의 재건 〉 (1946) 등을 들 수 있다.

일제 말기인 1943년에는 조선문인보국회 ( 朝鮮文人報國會 )의 평의원이 되어 ≪ 국민문학 ≫ · ≪ 조광 ≫ 등 황도문학을 선양하는 작품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 참고문헌 ≫ 朝鮮新文學思潮史(白鐵, 白楊堂, 1949), 韓國近代文藝批評史硏究(金允植, 一志社, 1976), 親日文學論(林鍾國, 平和出版社, 1988), 韓國現代小說史論(徐宗澤, 高麗大 出版部, 1999), 韓國文壇側面史(金八峰, 思想界, 1956. 8 ∼ 12), 林和와 金南天 - ‘ 물論爭 ’ 에서 文學家同盟 組織까지(金允植, 文學思想, 1988.10).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개  



 개과에 속하는 포유동물. 야생동물 가운데 가장 먼저 가축화되었다. 한자어로는 견(犬) 이외에 구(狗) · 술(戌) 등으로 표기된다. 기( 郊 ) · 교(狡) 등은 작은 개를 뜻한다.

 

우리의 옛 선조들은 주둥이가 뾰족하여 사냥을 잘하는 사냥개를 전견(田犬), 주둥이가 짧고 잘 짖어서 집을 지키는 개를 폐견(吠犬), 살이 많아 잡아먹기에 알맞은 개를 식견(食犬) 등으로 불렀다. 개는 용도에 따라서 사냥용 · 경주용 · 투견용 · 군견용 · 경찰견용 · 목양용 · 애완용 등으로 나눌 수 있으며 많은 품종들이 우리 나라에 도입되어 있다.

 

〔유 래〕

개는 야생동물 가운데 가장 먼저 가축화된 동물로, 조상은 이리 · 자칼 등이라고 하며, 또한 오스트레일리아의 딩고(dingo : 늑대보다 약간 작은 야생동물)나 서남아시아에 반야생 상태로 서식하다가 멸종된 야생종 중에서 생긴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이러한 야생종이 세계의 몇 개 지역에서 가축화되어 그들 사이의 선택 · 교배에 의하여 현재와 같이 약 2백여 품종이 생긴 것으로 생각된다.

 

인간에 의해 순화, 사육되었다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페르시아 베르트동굴의 것으로 기원전 9500년경으로 추산된다. 기원전 9000년경으로 추산되는 독일 서부의 셍켄베르크 개는 크기와 두개골의 형태가 딩고와 대단히 비슷하다. 일본에서는 신석기시대의 유물로서 개의 이빨이 발견된 바 있으나 우리 나라에서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중국 당나라 문헌에 우리 나라 제주도에서 개를 사육하여 그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는 기록이 있고, 또 신라 지증왕이 개로 인해서 왕비를 구했다는 이야기 등이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옛날부터 사육되고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품종 및 특징〕

개는 오랜 세월을 통해서 가축으로 순화되었기 때문에 형태의 변화가 심하고 그 분포도 세계적이다.

품종에 따라서 크기는 매우 다양하여 어깨높이는 8 ∼ 90 ㎝ , 몸무게 0.4 ∼ 120 ㎏ , 털은 긴 것과 짧은 것이 있고, 빛깔이나 무늬도 다양하다. 꼬리 끝에 흰 무늬, 눈 위에 원형의 담색 무늬, 어깨에 십자형의 짙은 색깔의 무늬 등이 나있는 것들도 있다.

 

일반적으로 꼬리는 비교적 짧고 몸통길이의 반 이하이며, 여우류와는 달리 굵은 총상(總狀)을 하고 있지 않다. 귓바퀴는 크고 거의 삼각형으로 늘어진 것, 선 것 등이 있으며 앞으로 늘어뜨리면 너구리류와는 달리 눈까지 내려온다. 눈동자는 여우 · 너구리류와는 달리 원형이다.

 

입술이 두툼하고 끝이 뾰족하지 않으며 비근부(鼻根部)에서 안간부(眼間部)에 걸쳐 뚜렷한 단(段)이 있다. 이러한 형태는 이리와 형태적으로 대단히 흡사하여 양자의 외부형태에 의한 구별이 어려운 경우도 있다.

 

앞발에 다섯 개의 발가락과 뒷발에는 네 개의 발가락이 있어서 지행성(趾行性)이다. 몸통의 피부에는 땀샘이 없기 때문에 호흡으로 체온조절을 한다. 맹장은 있으나 정관선(精管腺)이 없고, 음경의 하면에 구(溝)가 있으며 음경골이 있다.

본래 육식성이었으나 가축화되면서 잡식성으로 변했기 때문에 이빨은 식육동물처럼 날카롭고 강하나 위 · 장 등의 소화기관은 초식동물에 가깝다. 이빨은 거의 나이와 함께 정기적으로 발생, 변화하기 때문에 나이 감정에 이용할 수 있다. 개는 태어나면서부터 어미의 젖을 냄새로써 찾을 수 있을 정도로 후각이 예민하다.

 

이와 같이 발달된 후각으로 성별이나 개체 등을 구별할 수 있기 때문에 범인 추적을 목적으로 하는 경찰견이나 수색견으로도 이용된다. 또한, 청각도 발달되어 있다.

 

실험에 의하면 사람은 2만의 진동수를 겨우 들을 수 있으나, 개는 10 ∼ 70만의 진동수를 들을 수 있고, 소리의 가락도 식별할 수 있기 때문에 사람의 말을 알아듣고서 훈련을 받을 수 있다.

 

어두운 곳에서 사물을 잘 볼 수 있고, 움직이는 물체에 예민하게 반응하므로 야행성의 특징을 가지며 경계심이 강하다. 수색견의 경우 흰 손수건은 잘 찾아내지만 다갈색은 쉽게 찾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색깔의 구별능력은 약하다고 할 수 있다. 야생의 개는 짖지 않으나, 가축화된 개는 기쁘거나 슬프거나 경계할 때에 짖는다.

 

보통 길거리에서는 짖지 않으나 사람이나 다른 동물이 문 안에 들어서면 짖게 되고, 또 자기 세력범위 안에서는 대단한 용맹성을 보인다. 개는 멀리 떨어진 곳으로부터 주인이나 자기 집을 찾아오는 귀가능력이 있다.

 

우리 나라 재래종인 진돗개는 그 귀가성이 대단하여 휴전선 부근에서 군용으로 쓰이던 것이 진도까지 되돌아간 경우도 있다고 한다. 개의 귀가능력은 후각 · 시각 이상의 특수한 직감에 의한 방향감각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개는 자기를 길러준 주인을 어디든지 따라가서 잘 적응하며 살 수 있는 성질이 있다. 특히, 주인에게는 충성심을 가지며, 그 밖의 낯선 사람에게는 적대심 · 경계심을 갖는다.

 

야생하는 경우에는 암 · 수컷이 여러 마리로 집단을 이루기도 하는데, 순위가 정해져 있으며 정해져 있지 않을 때에는 싸워서 우열을 정한다.

 

임신기간은 62 ∼ 68일, 생후 약 1년 후에 번식이 가능하며, 한배에 보통 4 ∼ 6마리를 낳는다. 새끼는 6 ∼ 7주간 젖을 먹으나 4주 정도부터 부드러운 먹이나 어미가 토해 낸 반 소화상태의 먹이를 먹기 시작한다.

 

수명은 보통 12 ∼ 16년이나 최고 34년까지 산 기록도 있다. 투견 · 엽견 · 경기견 등은 비교적 단명하나 집에서 기르는 개는 20년까지도 산다.

 

〔이 용〕

개는 수렵 · 목양 · 경주 · 수색 · 애완 등을 목적으로 하는 이외에, 에스키모인 · 아메리카 인디언 · 아시아의 동북 및 시베리아의 북부지방 등에서는 썰매를 끄는 데 개가 이용되고, 티베트에서는 짐을 실어 나르는 데 이용한다.

 

우리 나라에서는 예로부터 개가죽으로 장구를 만들었고 꼬리로는 비를, 털가죽으로는 방한용 외투와 모자 등을 만들었다. 조선시대 중종 때의 전라감사 정엄(鄭淹)은 통신업무에 토종개를 이용하여 막대한 통신비를 절약했다고 한다.

 

중국 · 우리 나라 등 동양의 일부에서는 식용으로도 이용하였다. 우리 나라의 ≪ 동국세시기 東國歲時記 ≫ 삼복조에는 마늘을 넣고 삶은 개고기를 구장(狗醬)이라 하여 이것을 먹고 땀을 빼면 더위가 가시고 보신하는 데 효과가 있다고 하였다.

 

또한, 병후 회복에 삶은 개를 먹는 것이 좋다고 알려져 있다. 식용으로는 노란개 〔 黃狗 〕 를 제일로 쳤고 그것도 수컷일수록 보신에 좋다고 여겼다.

 

황구로 빚은 술을 무술주 ( 戊戌酒 )라 하여 공복에 마시면 기력이 좋아진다고 하였다. ≪ 동의보감 ≫ 에서도 수캐고기는 오로칠상(五勞七傷)을 보하고 피는 난산, 음경은 상중절양(傷中絶陽)과 음위불기(陰萎不起)를 다스린다고 하였다.

 

〔민속 및 설화〕

개는 사람에게 충실하고 의리가 있는 가축으로서 우리 나라에는 충견설화가 많다. 경상북도 선산군 도개면 신림동의 의구총 ( 義狗塚 )과 의구비, 평안남도 용강군 귀성면 토성리와 평양 선교리의 의구총, 충청남도 부여군 홍산면 북촌리의 개탑 등은 화재로부터 주인을 구하고 죽은 개의 충직과 의리를 전하고 있다.

 

고려 충렬왕 8년(1282)에는 개성의 진고개에서 개가 사고무친의 눈먼 아이를 데리고 다니면서 밥을 얻어 먹이고 물을 먹여 키웠으므로 이에 관청에서는 개에게 벼슬을 내리고 그 충직함을 기렸다고 한다.

 

또, 전생에 사람이었던 자가 개로 환생하여 대우를 받으며 산다는 환생설화가 있다. 즉, 옛날 경주고을에 아들 딸 두 자식을 키워 시집 · 장가 보내느라 먹을 것도 못 먹고 세상구경 한번 못하고 죽은 최씨댁 과부가 개로 환생하여 자식들의 집을 지키며 살았다.

 

어느날 한 중이 와서 그 개는 바로 당신의 어머니가 환생한 것이니 잘 먹이고 유람을 시켜주라고 하였다. 팔도유람을 마치고 경주집에 돌아오는 도중에 어느 장소에 도달하자 그 개는 발로 땅을 헤치면서 그 자리에서 죽었다.

 

최씨는 그곳에 개를 묻었는데, 그 무덤의 발복(發福)으로 최씨집이 거부가 되고 자자손손 부귀와 영화를 누렸다 하여, 지금도 경주의 최씨들은 그 무덤에 성묘를 하고 있다고 한다.

 

이상과 같은 우리 나라의 개에 관한 설화들을 보면 개를 인간과 상통하는 영감적인 동물로 보았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개를 영감 있는 동물로 생각하였기 때문인지, 우리 나라에서는 개가 10년을 넘도록 살면 둔갑을 하는 영물이 된다 하여 늙은 개를 흉물시하고 기피하는 경향도 있었다.

 

그래서 우리의 옛 선조들은 개도 상(相)을 보아 선택하였다고 한다. 노란개가 꼬리 · 귀 · 네 다리 또는 두 앞발 등이 희면 길상으로, 검은 개로 얼굴 · 두 앞발 · 두 귀 등이 희거나 몸 전체가 흑색인 개는 불행을 가져오는 악령을 잘 쫓는 것으로 생각했다.

 

노란개의 네 다리가 희거나 입 주둥이가 검거나, 또 흰개의 꼬리가 검거나 두 귀가 노랗거나 한 것은 흉상으로 여겼다.

개가 담 위에 올라가 입을 벌리고 있으면 그쪽 방향에 있는 집에 큰 흉사가 있을 것으로 알았다. 또, 지붕이나 담 위에 올라가 짖으면 그 집의 주인이 죽는 것으로 알기도 하였다. 개가 앞마당에서 이유없이 짖으면 경사의 조짐으로, 개꼬리에 지푸라기가 묻어 있으면 손님이 오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또한, 개가 풀을 뜯어 먹으면 큰 비가 오고, 떼지어 다니며 뒹굴고 기뻐하면 큰 바람이 불어올 징조라고 여겼다 한다.

개와 관련된 우리 나라의 속담은 여러 가지가 있다. 본래의 제 천성은 고치기 어렵다는 뜻으로 ‘ 개 꼬리 삼년 묻어 두어도 황모 못된다. ’ 고 하며, 평소에 좋아하는 것을 싫다고 할 때에 ‘ 개가 똥을 마다 한다. ’ 고 한다.

 

돈을 벌 때는 귀천을 가리지 않고 벌어서 값지게 산다는 뜻으로 ‘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산다. ’ 고 하며, 보통 때에는 흔하던 물건도 필요할 때에 찾으면 드물고 귀하다는 뜻으로 ‘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 ’ 고 한다.

 

‘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 ’ 는 것은 아무리 구차하게 살더라도 죽는 것보다는 사는 것이 낫다는 말이다. 좋지 못한 사람과 사귀면 결국은 좋지 못한 영향을 받게 된다는 뜻에서 ‘ 개를 따라가면 칙간으로 간다. ’ 고 한다.

 

‘ 개발에 편자 ’ 라는 말은 격에 어울리지 않을 때를 일컬으며, ‘ 개밥에 도토리 ’ 는 여러 사람과 함께 어울리지 않고 혼자 외톨이로 돌 때에 하는 말이다.

 

못난 양반을 빗대어 ‘ 개 팔자 두냥반 ’ 이라 하며, 그 밖에도 ‘ 개도 나갈 구멍을 보고 쫓아라 ’ , ‘ 개눈에는 똥만 보인다. ’ , ‘ 개고기는 언제나 제맛이다. ’ , ‘ 개구멍에 망건치기 ’ , ‘ 개 보름 쇠듯 한다. ’ , ‘ 개 팔자가 상팔자 ’ , ‘ 개 싸움에 물을 끼얹는다. ’ , ‘ 개 잡아먹고 동네 인심 잃고, 닭 잡아먹고 이웃 인심 잃는다. ’ 등의 속담이 있다.

 

우리 나라의 재래종 개로서 진돗개와 풍산개 · 삽사리 등이 있는데, 사냥용 · 호신용 등으로 개량의 여지가 있는 우수한 품종들이다. 이들은 문화사적으로 귀중한 가축이므로 육성 · 보호에 힘써야 할 것이다.

 

≪ 참고문헌 ≫ 東國歲時記(李錫浩 譯, 乙酉文庫, 1977), 韓國家畜文化史(李圭泰, 축산진흥, 1980), 實用畜産全書(五星出版社,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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