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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조 / 말라르메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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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조 / 말라르메

 

순결하고 생기 있어라, 더욱 아름다운 오늘이여,

사나운 날개짓으로 단번에 깨뜨려 버릴 것인가.

쌀쌀하기 그지 없는 호수의 두꺼운 얼음.

날지 못하는 날개 비치는 그 두꺼운 얼음을.

백조는 가만히 지나간 날을 생각한다.

그토록 영화롭던 지난 날의 추억이여!

지금 여기를 헤어나지 못함은 생명이 넘치는

하늘 나라의 노래를 부르지 않는 벌이런가.

이 추운 겨울날에 근심만 짙어진다.

하늘 나라의 영광을 잊은 죄로 해서

길이 지워진 고민의 멍에로부터 백조의

목을 놓아라, 땅은 그 날개를 놓지 않으리라.

그 맑은 빛을 이 곳에 맡긴 그림자의 몸이여

세상을 멸시하던 싸늘한 꿈 속에 날며,

오, 구더기! 눈도 귀도 없는 어둠의 빛이여,

너 위해 부패의 아들, 방탕의 철학자

기뻐할 불향배의 사자는 오도다.

내 송장에 주저 말고 파고들어

죽음 속에 죽은, 넋없는 썩을 살 속에서

구더기여, 내게 물어라, 여태 괴로움이 남아 있는가고……


요점 정리

작자 : 말라르메

이해와 감상

흔히 '백조의 소네트'로 널리 애송되고 있는 걸작, 그러나 백조를 노래한 것이 아니라 시를 쓰지 못하는 고뇌로 괴로워 하는 시인의 내부의 혼을 백조에 의탁하여 노래한 것이다.

심화 자료

상징주의운동(象徵主義運動 - Symbolist movement)

19세기말 일군의 프랑스 시인들이 시작한 문학 및 예술 운동으로 회화와 연극으로 확대되었고, 20세기 유럽과 미국 문학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쳤다. 상징주의 예술가들은 지극히 상징적인 언어를 암시적으로 사용해 개인의 정서적 체험을 표현하고자 했다.

상징주의 문학

주요 상징파 시인으로는 프랑스의 스테판 말라르메, 폴 베를렌, 아르튀르 랭보, 쥘 라포르그, 앙리 드 레니에, 르네 길, 귀스타브 칸, 벨기에의 에밀 베르하렌과 조르주 로덴바흐, 그리스 태생인 장 모레아스, 미국 태생인 프랜시스 비엘레 그리팽과 스튜어트 메릴 등이 있다. 가장 중요한 상징주의 비평가는 레미 드 구르몽이었지만, 상징주의의 원칙을 소설에 가장 성공적으로 적용한 사람은 조리스카를 위스망스였고, 희곡에 가장 성공적으로 적용한 사람은 벨기에 태생의 모리스 메테를링크였다. 20세기 프랑스의 시인인 폴 발레리와 폴 클로델은 상징파 시인들의 직계 후손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전통적인 프랑스 시의 기법과 주제는 고답파 시의 정확하고 세밀한 묘사에 뚜렷이 드러나 있듯이 완고한 관습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상징주의는 이런 관습에 대항하여 일부 프랑스 시인들이 일으킨 반란에서 시작되었다. 상징파 시인들은 인간의 내면생활과 경험의 덧없고 순간적인 감각을 묘사하기 위해 시를 설명적인 기능과 형식적인 미사여구에서 해방하기를 원했다. 그들은 인간의 내면 생활에 대한 감각적 인상과 형언할 수 없는 직관을 환기하고자 했으며, 정확한 의미를 갖고 있지는 않지만 시인의 정신 상태를 전하고 표현할 수 없는 현실이라는 '난해하고 혼란된 통일체'를 암시할 수 있는 지극히 개인적인 은유와 상징을 사용하여 존재의 근본적인 신비를 전달하려 했다.

 

베를렌이나 랭보 같은 상징주의의 선구자들은 샤를 보들레르의 시와 사상, 특히 〈악의 꽃 Les Fleurs du mal〉(1857)에 수록된 시들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그들은 감각들간의 '조응'(照應 correspondances)이라는 보들레르의 개념을 받아들였고, 이것을 바그너가 이상으로 삼은 여러 예술의 종합이라는 개념과 결합하여 시의 음악성이라는 독창적인 개념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상징주의자들은 조심스럽게 선택한 낱말들의 고유한 화성과 음조 및 색채를 섬세하게 다루어서 시의 주제를 전개하고 조정할 수 있었다. 시의 표현 수단의 본질적이고 고유한 특성을 강조하려는 상징주의자들의 노력은 예술이 다른 어떤 표현 수단이나 지식보다 우월하다는 확신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이러한 확신은 또한 물질 세계의 유형성과 개별성 밑에는 또 하나의 현실이 놓여 있다는 유심론적인 확신에 일부 바탕을 두고 있었다. 그들은 이 또 하나의 현실의 본질은 예술 작품을 낳는 데 이바지하는 주관적 감정의 반응과 예술 작품이 불러일으키는 주관적 감정의 반응을 통해 가장 잘 엿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베를렌의 〈무언가 Romances sans paroles〉(1874)와 말라르메의 〈목신의 오후 L'Apres-midi d'un faune〉(1876) 같은 걸작들은 출발한 지 얼마 안 되는 프랑스의 진보적 시문학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장 모아레스는 1886년 9월 18일자 〈피가로 Le Figaro〉지에 상징주의 선언문을 발표했다. 여기서 그는 사실주의 연극과 자연주의 소설 및 고답파 시의 묘사적인 경향을 비난하고, 보들레르를 비롯한 여러 시인들을 지칭하는 데 사용된 '퇴폐'(decadent)라는 용어를 '상징파'와 '상징주의'라는 용어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1880년대말에는 상징주의를 지지하는 평론지와 잡지가 수없이 생겨나, 상징파 작가들은 이 운동에 적대적인 비평가들의 공격에서 비롯된 논쟁에 자유롭게 참여했다. 말라르메는 상징파 시인들의 지도자가 되었고, 〈여담 Divagations〉(1897)은 지금도 이 운동의 미학에 대한 가장 중요한 해설서이다. 고정된 운율에서 벗어나 좀더 자유로운 시의 운율을 얻기 위해, 많은 상징파 시인들은 산문시를 쓰고 자유시(vers libre)를 사용했다. 자유시는 이제 현대시의 기본 형식이 되었다.

시 분야에서 극단적인 상징주의 운동은 1890년경 절정에 이르렀다가 1900년 무렵부터 갑자기 인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뚜렷한 초점도 없이 분위기만 느껴지는 상징파 시의 수사적 표현은 결국 지나치게 기교적이고 가식적인 것으로 간주되기에 이르렀고, 상징파 시인들이 한때 자랑스럽게 내세웠던 '퇴폐'라는 용어는 단순히 세기말의 퇴폐적인 풍조와 부자연스러운 겉치레를 비웃는 용어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상징주의 작품들은 20세기에 대부분의 영국 문학과 미국 문학에 강하고 지속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들의 실험적 기법은 현대시의 기법을 풍부하게 해주었으며, 상징주의 이론은 W.B. 예이츠와 T.S. 엘리엇의 시, 그리고 제임스 조이스와 버지니아 울프가 대표하는 현대소설로 열매를 맺었다. 이들의 작품에서는 낱말의 음악적 조화와 이미지 유형이 줄거리보다 우위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다. 상징주의 소설로 성공한 몇몇 작품 가운데 하나는 J.K. 위스망스의 〈역행 A rebours〉(1884)이다. 이 책은 권태에 빠진 한 귀족이 퇴폐적인 미학을 추구하여 놀라운 임기응변의 재주로 다양한 실험을 한다는 이야기이다. 20세기 미국의 비평가 에드먼드 윌슨이 상징주의 운동을 개관한 책 〈악셀의 성 Axel's Castle〉(1931)은 현대 문학 분석의 고전이며 상징주의 운동에 대한 권위있는 연구서로 평가받고 있다. (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에로디아드

프랑스의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의 미완성 시편으로 고심 끝에 쓴 상징주의 순수시의 대표적 작품이다. 1864년에 착수하여 1867년에 그 중심부분(무대)의 장(章)이 완성되어 《제2차 현대 고답시집》(1871)에 발표하였다. 살로메의 모친 에로디아드에게 가탁(假託)한 미(美)의 화신과 그 유모와의 대화형식에 의하여 갈고 닦은 문장으로써 시의 아름다움의 극한적 상태를 추구하였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상징주의 象徵主義 (symbolisme)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상징파(象徵派)의 예술운동과 그 경향.

일반적으로 상징파는 고답파의 객관주의에 대한 반동(反動)으로 일어났고, 분석에 의하여 포착할 수 없는 주관적 정서(主觀的情緖)의 시적 정착(詩的定着)을 목표로 했다고 한다.

그러나 A.티보데는 고답파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롱사르로부터 위고에 이르기까지 프랑스시 전반에 대해서 상징파는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고 풀이하였다. 티보데가 말하는 상징파의 새로운 바람이란 다음의 세 가지 점이다.

① 자유시: 그 시작은 민중적인 노래의 형태를 필요에 따라 채용한 랭보의 《지옥의 계절》이다. 이에 대해 의식적 ·계통적으로 자유시를 발전시킨 것은 G.캉이었다. 이후 프랑스의 시인은 정형(定型)을 채용하는 자와 자유시 형태를 쓰는 자의 두 갈래로 나누어졌다.

② 순수시(純粹詩): “음악에서 그 부(富)를 빼앗는다”라는 말라르메의 말로 요약되는 순수시의 개념은 상징파에서 비롯된다(이 경우의 음악은 주로 바그너의 음악이다). 시 속에서 산문적 요소를 배제하고 순수하게 시적인 것을 찾으려는 의식적 노력은 바그너의 영향 아래 말라르메에서 시작되어 발레리에서 완성되었다.

③ 문학적 혁신과 발전의 개념: 상징파는 처음으로 젊은 세대에게 전세대(前世代)의 문학개념을 부정하는 권리와 의무를 인정했다. 전위(前衛: 아방가르드)의 개념이 탄생한 이후 문학은 ‘전통적 문학’과 ‘전위문학’으로 나누어졌고 유파(流派)의 수도 늘었으며, 선언(宣言)이 유행하게 되었다.

이상이 티보데가 말하는 상징파의 특징인데 이 경우, 순수한 문학사적 의미에서 상징파는 1890년에 전성기에 달했고 1902년에 종지부를 찍은, 대략 15년간에 걸친 일군(一群)의 시인들의 활동을 지칭한다. 즉,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시인들이다. G.캉, J.라포르그, A.사맹, F.잠, E.뒤자르댕 등을 들 수 있다. 외국인으로서 여기에 호응한 사람은 벨기에의 조르지 로당바크, E.베르아렝 등이다. 앙리 드 레니에, 장 모레아스는 일시적인 상징파 동지였으며, 그런 의미에서의 상징파 비평가는 레미 드 구르몽이었다. 티보데는 말라르메, 베를렌, 랭보, 코르 비에르, 로트레아몽을 상징파의 선구자로 보았으며 발레리를 그 후계자로 보았다.

만일 이 해석이 옳다면 상징파는 선구자와 후계자에 필적할 만한 대시인(大詩人)이 없다는 결과가 된다. 그러므로 말라르메를 비롯하여 티보데가 말하는, 선구자를 포함한 상징주의적 시인들이 활약한 15년간이라는 운동기간을 떠나, 좀더 넓게 상징주의를 문제삼을 필요가 있다. 즉, 보들레르를 선구자로 말라르메, 베를렌, 랭보에 의하여 전개되었으며 발레리, 잠, 클로델에게 계승되어 마침내 완성된 시적(詩的) 세계와 그 이론을 생각하게 된다. 보들레르는 하나의 시적 혁명(詩的革命)을 일으켰다 하겠다.

첫째로 그 의식적 방법에서, 이윽고 이것은 말라르메를 탄생시켜야 했다.

둘째로 원죄의식(原罪意識)에서 베를렌을 탄생시켰다.

셋째로 그 감수성(感受性)과 대응(對應)의 이론에서, 이것은 마침내 랭보를 탄생시켰다. 또한 말라르메와 발레리, 베를렌과 잠, 랭보와 클로델의 밀접한 관계를 증명하기는 어렵지 않다.

이렇게 하여 결정되는 상징주의적 세계의 분석에 샤를 뒤보스, 자크리비엘, 에른스트 로베르트 쿠르티우스 등의 비평가가 따랐다. A.지드도 여기에 넣을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상징파 시인들의 세계와 밀접하게 교류한 M.프루스트도 이 세계에 속한다 할 수 있다.

프랑스 이외의 나라에서는 독일의 S.게오르게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으며, 또 M.릴케도 다소간 상징파의 영향을 받아들인 것은 분명하다. 영어(英語)를 사용하는 시인에게서는 독일의 시인처럼 확실한 영향은 찾아볼 수 없으나 A.시몬즈는 프랑스 상징주의의 뛰어난 이해자였다.

서양미술에서의 상징주의는 19세기 후반 인상주의의 실증적 표현에 대한 대립 및 저항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즉 형상화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세계, 내면(內面), 관념 등을 상징 ·우의(寓意) ·표징 등의 수법으로 이미지를 통해 전달하려 하였다. 1891년 비평가 A.오리에는 회화에 대해 처음 상징주의라는 말을 썼고 P.고갱 등을 상징파로 보았다. 나비파(派)의 M.드니도 상징파로 자처했으며 그들은 생(生) ·사(死) ·불안 ·사랑 ·성(性) ·꿈 ·환상 등을 주제로 삼았다. 그러나 고갱은 자신의 그림이 상징주의적인 것은 주제 때문이 아니며 화면의 형태와 색체의 음악적인 배치 때문이라고 하였다. 19세기 상징주의는 주제적 ·문학적 측면과 서로 대립된 순수조형적 구성이라는 관념에서 이해해야 하며, 이것이 ‘세기말(世紀末)’ ‘아르 누보’와 복합되면서 널리 파급되었다.

상징주의의 명작으로는 고갱의 《우리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1897), G.클림트의 《물뱀》, F.호들러의 《밤》, E.뭉크의 《절규》 등이 있다. 이 밖에 P.퓌비 드 샤반, O.르동, 벨기에의 장미십자그룹, 러시아의 파란장미그룹, 영국의 라파엘전파(前派)의 후기 작품들이 이에 속한다. 이런 경향은 1910년대까지 계속되다가 20세기 초 포비슴과 큐비즘의 출현으로 점차 자취를 감추었다.

 

한국에서의 상징주의 문학은 김억(金億) ·백대진(白大鎭)이 《태서문예신보(泰西文藝新報)》 제6호와 제7호에 베를렌의 《거리에 내리는 비》, 예이츠의 《꿈》 등 상징파 시인의 작품을 게재하면서 처음으로 이 이론이 소개되었으며 잇따라 베를렌의 《작시론》 등을 비롯하여 일본 작가들의 작품이 《창조》 《백조》 《폐허》를 통해 번역, 게재되었다. 김억 ·황석우(黃錫禹) ·박종화(朴鍾和) ·박영희(朴英熙) 등의 작품에서는 비록 내면적 깊이는 얕지만 상징주의적 작풍이 짙게 풍기고 있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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