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안에 혓는 촉불
by 송화은율방안에 혓는 촉불
방 안에 켜 있는 촛불은 누구와 이별을 하였기에
겉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속이 타 들어가는 줄을 모르는가?
저 촛불도 나와 같아서 (슬퍼 눈물만 흘릴 뿐) 속이 타는 줄을 모르는구나.
요점 정리
지은이 : 이개
연대 : 세조
제재 : 촉불(촛불)
성격 : 상징적, 감상적, 여성적, 은유적
표현 : 의인법, 감정이입
주제 : 연군의 정, 또는 이별의 고통
출전 : 청구영언 외
내용 연구
방 안에 켜 있는 촛불[감정이입으로 화자는 임과 이별한 자신의 슬픈 마음을 촛농을 흘리고 심지가 타들어 가는 촛불에 이입하여 표현]은 누구와 이별[화자의 현재 처지 암시 / 의인법]을 하였기에 - 단종과의 이별
겉으로 눈물[원관념 - 촛농]을 흘리면서 속[심지]이 타 들어가는 줄을 모르는가? - 별한(別恨)
저 촛불도 나와 같아서[촛불을 화자와 동일시함] (슬퍼 눈물만 흘릴 뿐) 속이 타는 줄을 모르는구나[노심초사]. - 속이 타는 듯한 이별의 한
혓는 : 켜 있는, ㅎ혀다>혀다>켜다
눌과 :누구와(단종을 말함)
것츠로 : 겉으로
디고 : 지고
속타는 줄 : (단종고의 이별의 슬픔으로) 속이 타는 줄을
저 촛불도 나와 같아서 (슬퍼 눈물만 흘릴 뿐) 속이 타는 줄을 모르는구나. : 종장은 촛불이나 지은이나 속이 타들어간다는 점에서 같다는 의미로 단종과의 이별을 내색하지는 않지만 그 안타까움으로 인해 속으로만 태우고 있을 뿐으로 지은이가 얼마나 마음 아파하는 것을 잘 보여주는 구절로 감정이입에 해당한다.
뎌 : 저
갓하야 : 같아서(갓트여 : 같아서)
여기서 감정이입은 대상(곧, 자연계)과 인간에 대하여 가지는 자신의 감정을 저도 모르게 다시 그 대상과 인간에게 옮겨 놓고 마치 자신과 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듯이 느끼는 것을 감정이입이라 한다. 예를 들어, 흐르는 시냇물은 늘 소리를 내어 흘러가지만, 감정을 느끼는 주체가 슬플 때에는 냇물 소리가 슬프게 느껴져 처량한 소리를 낸다고 하고, 주체가 기쁠 때는 명랑한 소리를 내며 흘러 간다고 느끼는 것을 말한다.
천만 리(千萬里) 머 먼 길에 고흔 님 여희압고
내 마음 둘 듸 업셔 냇가에 안쟛시니
져 물도 내 안과 갓틔여 우러 밤길 예놋다. - 왕방연
공산에 우는 접동, 너난 어이 우짖난다
너도 날과 같이 무음 이별하였나냐
아모리 피나게 운들 대답이나 하더냐 - 박효관
풀 이슬은 맺혀 있고 저녁 구름이 지나갈 때
대 수풀 우거진 푸른 곳에 새소리가 더욱 서럽다 - 허난설헌, 규원가 -
이해와 감상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된 이개의 작품으로 계유정난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한 세조로 인해 단종을 영월로 유배보내고 나서, 단종과 이별을 하고 나서 남몰래 애태우는 심정을 촛불에 감정이입을 하여 촛불을 의인화하고 그 초가 타는 형상을 이별의 슬픔 눈물을 흘리는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초중종장은 자문자답의 형식으로 단종과의 이별의 아픔을 형상화한 수준 높은 작품이다.
심화 자료
이개 (李塏)
1417(태종 17)∼1456(세조2).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청보(淸甫)·사고(士高), 호는 백옥헌(白玉軒). 제6대왕 단종을 위해 사절(死節)한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이다. 색(穡)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중추원사 종선(種善)이고, 아버지는 계주(季疇)이며, 어머니는 진명례(陳明禮)의 딸이다.
〔관직 활동〕
태어나면서 글을 잘 지어 할아버지의 유풍(遺風)이 있었다. 1436년(세종 18) 친시 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고, 1441년에 집현전저작랑으로서 당나라 명황(明皇)의 사적을 적은 ≪명황계감 明皇誡鑑≫의 편찬과 훈민정음의 제정에도 참여하였다.
1444년 집현전부수찬으로서 의사청(議事廳)에 나가 언문(諺文:國文)으로 ≪운회 韻會≫를 번역하는 일에 참여해 세종으로부터 후한 상을 받았다. 1447년 중시 문과에 을과 1등으로 급제하고, 이 해에 ≪동국정운≫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448년 지대구군사(知大丘郡事) 이보흠(李甫欽)이 조정에 사창(社倉)의 설치를 주장했을 때 백성들에게 부담을 준다는 점을 들어 반대하였다. 1450년(문종 즉위년) 문종이 어린 왕세자를 위해 서연(書筵)을 열어 사(師)·빈(賓)의 상견례를 행할 때에 좌문학(左文學)의 직책으로서 ≪소학≫을 진강(進講)했는데, 문종으로부터 세자를 잘 지도해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받았다.
1453년(단종 1) 10월에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을 보좌하던 대신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을 살해하고 정권을 쥔 이른바 계유정난을 일으켜 이 거사에 참여한 공신을 책정할 때, 환관 엄자치(嚴自治)와 전균(田畇)이 공로가 있다는 이유로 공신에 기록하고 봉군(封君)까지 하려고 하였다.
집의로서 좌사간인 성삼문(成三問)과 함께 환관의 폐해가 망국패가에 이르게 한 옛날의 예를 들어서 이들에게는 재백(財帛)으로 상만 내리고 공신과 봉군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힘써 아뢰었다. 이 해 12월에는 글을 올려 근일에 시정(時政)의 몇 가지 일로써 여러 번 임금에게 아뢰었으나 한가지도 윤허를 받지 못하므로 사직하기를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단종 복위 운동〕
1456년(세조 2) 2월 집현전부제학에 임명되었다. 이 해 6월에 성균관사예 김질(金銷)의 고변으로 성삼문 등 육신(六臣)이 주동이 된 상왕의 복위 계획이 발각되었는데, 박팽년(朴彭年)·하위지(河緯地)·유응부(兪應孚)·유성원(柳誠源)과 함께 국문을 당하였다. 이 때 그는 작형(灼刑)을 당하면서도 태연했다고 한다.
성삼문 등과 함께 같은 날 거열형(車裂刑)을 당했는데, 수레에 실려 형장으로 갈 때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우정(禹鼎 : 夏나라 우왕이 9주의 쇠를 거두어 9주를 상징해 만든 아홉 개의 솥)처럼 중하게 여길 때에는 사는 것도 또한 소중하지만·홍모(鴻毛 : 기러기의 털, 즉 아주 가벼운 물건의 비유)처럼 가벼이 여겨지는 곳에는 죽는 것도 오히려 영광이네·새벽녘까지 잠자지 못하다가 중문 밖을 나서니·현릉(顯陵 : 문종의 능)의 송백이 꿈속에 푸르고나!” 이 때 이개의 매부인 전 집현전부수찬인 허조(許璽)도 단종 복위의 모의에 참여해 자결하였다.
〔사후 명예 회복과 작품〕
사후에 남효온(南孝溫)이 당시 공론(公論)에 의거해 단종 복위 사건의 주도 인물인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 등 6인을 선정, 〈육신전 六臣傳〉을 지었다. 이 〈육신전〉이 세상에 공포된 뒤 육신의 절의를 국가에서도 공인, 1691년(숙종 17)에 사육신의 관작을 추복(追復)시켰다.
그의 작품으로는 몇 편의 시가 전하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까마귀 눈비맞아 희난 듯 검노매라. 야광명월이 밤인들 어두우랴.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이 있으랴.”라는 단가(短歌)가 있다.
1758년(영조 24)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노량진의 민절서원(愍節書院), 홍주의 노운서원(魯雲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참고문헌≫ 世宗實錄, 文宗實錄, 端宗實錄, 國朝榜目, 秋江集, 燃藜室記述, 大東奇聞, 海東雜錄. 李載浩 (출처 : 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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