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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이 자자진 골에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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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이 자자진 골에

 

 

백설이 잦아진 골짜기에 구름이 험하게 일고 있구나

(나를) 반겨 줄 매화는 어느 곳에 피어 있는가?

석양에 홀로 서서 갈 곳을 몰라 하노라.

요점 정리

지은이 : 이색

연대 : 고려말

종류 : 평시조

표현 : 비유적, 풍자적

성격 : 우의적

제재 : 매화(우국지사), 고려의 쇠잔

주제 : 우국 충정(憂國衷情)과 고려 멸망의 한탄 / 혼탁한 정치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

내용 연구

 

백설[흰 눈, 이 시에서는 고려 유신을 비유]이 자자진[잦아진, 녹아 없어진, 거친 기운이 잠잠해지거나 가라앉다] 골[골짜기에]에 구름[구름이, '구름'은 '무상', '허황' 등의 속성. 여기에서는 조선의 신흥 세력 / 신흥 사대부]이 머흐레라[험하구나]

 

반가온[반가운] 매화[ '지조, 충성, 정렬'등의 속성. 여기서는 우국지사 또는 청절을 비유]는 어느 곳에 피었는고

석양[ 해질 무렵. 기울어진 고려의 국운 비유 / 쓸쓸한 정서를 부각시킴]에 홀로 서 있어 갈 곳을 몰라 하노라.[한다. '생각한다'의 뜻]

이해와 감상

 

고려의 유신(遺臣)으로 기울어 가는 나라를 바라보며 안타까워하는 모습이 우의적으로 잘 나타나 있다. '석양(夕陽)에 홀로 서 이셔 갈 곳 몰라 하노라' 하는 탄식 소리는 그래도 어디선가 나타나 주기를 바라는 '매화(憂國之士)와 연결되고 있고, '백설 → 고려 유신, 구름 → 신흥 세력인 이성계 일파, 매화 →우국지사, 석양 →기울어져 가는 고려' 등을 상징하고 있으며, 우국의 정이 간접적으로 나타나 한폭의 그림을 보는 듯하다.

심화 자료

이색(李穡)

 

1328(충숙왕 15)∼1396(태조 5). 고려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영숙(穎叔), 호는 목은(牧隱).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찬성사 곡(穀)의 아들로 이제현(李齊賢)의 문인이다. 1341년(충혜왕 복위 2)에 진사가 되고, 1348년(충목왕 4) 원나라에 가서 국자감의 생원이 되어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1351년(충정왕 3) 아버지 상을 당해 귀국해 1352년(공민왕 1) 전제(田制)의 개혁, 국방계획, 교육의 진흥, 불교의 억제 등 당면한 여러 정책의 시정개혁에 관한 건의문을 올렸다.

 

이듬해 향시(鄕試)와 정동행성(征東行省)의 향시에 1등으로 합격해 서장관이 되어 원나라에 가서 1354년 제과(制科)의 회시(會試)에 1등, 전시(殿試)에 2등으로 합격해 원나라에서 응봉 한림문자 승사랑 동지제고 겸국사원편수관(應奉翰林文字承事郎同知制誥兼國史院編修官)을 지냈다.

 

귀국해 전리정랑 겸 사관편수관 지제교 겸예문응교(典理正郎兼史館編修官知製敎兼藝文應敎)·중서사인(中書舍人)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 해 원나라에 가서 한림원에 등용되었으며 다음 해 귀국해 이부시랑 한림직학사 겸사관편수관 지제교 겸병부낭중(吏部侍郎翰林直學士兼史館編修官知製敎兼兵部郎中)이 되어 인사행정을 주관하고 개혁을 건의해 정방(政房)을 폐지하게 하였다.

 

1357년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가 되어 유학에 의거한 삼년상제도를 건의, 시행하였다. 이어 추밀원우부승선(樞密院右副承宣)·지공부사(知工部事)·지예부사(知禮部事) 등을 지내고 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왕이 남행할 때 호종해 1등공신이 되었다.

 

그뒤 좌승선·지병부사(知兵部事)·우대언·지군부사사(知軍簿司事)·동지춘추관사·보문각과 예관의 대제학 및 판개성부사 등을 지냈다.

 

1367년 대사성이 되어 국학의 중영(重營)과 더불어 성균관의 학칙을 새로 제정하고 김구용(金九容)·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 등을 학관으로 채용해 신유학의 보급과 성리학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1373년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지고, 이듬해 예문관대제학·지춘추관사 겸 성균관대사성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하였다. 1375년(우왕 1) 왕의 요청으로 다시 벼슬에 나아가 정당문학(政堂文學)·판삼사사(判三司事)를 역임했고 1377년에 추충보절동덕찬화공신(推忠保節同德贊化功臣)의 호를 받고 우왕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1388년 철령위문제(鐵嶺衛問題)가 일어나자 화평을 주장하였다. 1389년(공양왕 1) 위화도 회군으로 우왕이 강화로 쫓겨나자 조민수(曺敏修)와 함께 창왕을 옹립, 즉위하게 하였다.

 

판문하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창왕의 입조와 명나라의 고려에 대한 감국(監國)을 주청해 이성계(李成桂) 일파의 세력을 억제하려 하였다.

 

이 해에 이성계 일파가 세력을 잡자 오사충(吳思忠)의 상소로 장단(長湍)에 유배, 이듬해 함창(咸昌)으로 이배되었다가 이초(彛初)의 옥(獄)에 연루되어 청주의 옥에 갇혔으나 수재(水災)로 함창에 안치되었다.

 

1391년에 석방되어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에 봉해졌으나 1392년 정몽주가 피살되자 이에 관련해 금주(衿州)로 추방되었다가 여흥·장흥 등지로 유배된 뒤 석방되었다.

 

1395년(태조 4)에 한산백(韓山伯)에 봉해지고 이성계의 출사(出仕) 종용이 있었으나 끝내 고사하고 이듬해 여강(驪江)으로 가던 도중에 별세하였다.

 

 

그는 원·명 교체기 때 천명(天命)이 명나라로 돌아갔다고 보고 친명정책을 지지하였다. 또 고려 말 신유학(성리학)의 수용과 척불론이 대두되는 상황에서 유교의 입장으로 불교를 이해하고자 하였다.

 

즉 불교를 하나의 역사적 소산으로 보고 유·불의 융합을 통한 태조 왕건 때의 중흥을 주장했으며, 불교의 폐단을 시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척불론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도첩제(度牒制)를 실시해 승려의 수를 제한하는 등 억불정책에 의한 점진적 개혁으로 불교의 폐단을 방지하고자 하였다. 한편 세상이 다스려지는 것과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성인(聖人)의 출현 여부로 판단하는 인간 중심, 즉 성인·호걸 중심의 존왕주의적(尊王主義的)인 유교역사관을 가지고 역사서술에 임하였다.

 

아울러 그의 문하에서 권근(權近)·김종직(金宗直)·변계량(卞季良) 등을 배출해 조선성리학의 주류를 이루게 하였다. 장단의 임강서원(臨江書院), 청주의 신항서원(莘巷書院), 한산의 문헌서원(文獻書院), 영해(寧海)의 단산서원(丹山書院) 등에서 제향되며, 저서에 ≪목은문고 牧隱文藁≫와 ≪목은시고 牧隱詩藁≫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太祖實錄, 東文選, 朝鮮金石總覽, 李朝建國의 硏究(李相佰, 乙酉文化社, 1949), 李穡硏究(李銀順, 梨大史苑 4, 1962), 牧隱硏究(孫洛範, 國際大學人文科學硏究所論文集 3, 1975), 李穡의 佛敎觀(安啓賢, 趙明基博士華甲記念佛敎史學論叢, 1965), 李穡(李相殷, 高麗·朝鮮初期의 學者 9人, 1974), 牧隱 李穡과 그의 政治思想에 관한 硏究(朴珠, 曉星女子大學論文集 25, 1982).(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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