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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두천(東豆川)․I- 김명인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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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두천(東豆川)I - 김명인


작가 : 김명인(1946- )

경북 울진 출생. 고려대 국문과동대학원 졸업. 1973중앙일보신춘문예에 출항제(出港祭)가 당선되어 등단. 반시동인. 경기대 국문과 교수. 김달진 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동서문학상 수상.

 

가족사와 민족사가 가져다 준 가난과 설움을 고단한 여행길에 접어든 순례자의 모습으로 형상화하면서 현실을 견디는 의지를 드러내 준다.

 

시집으로는 동두천(문학과지성사, 1979), 머나먼 곳 스와니(문학과지성사, 1988), 물 건너는 사람(세계사, 1992), 푸른 강아지와 놀다(문학과지성사, 1994) 등이 있다.

 

 

< 감상의 길잡이 1 >

김명인의 시 세계를 관류하는 시적 원리를 한 마디로 말하면 추억이다. 그러나 그의 추억은 아름다운 과거보다는 고통스러운 기억에 가깝고, 과거의 것이면서도 오늘 속에 선명하게 남아 그의 존재를 구속한다. 상처난 과거로서의 추억이라 하더라도 평생 동안 가슴에 묻어 두고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로서는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어 치유하려 한다. 그의 얼룩진 추억은 625와 아버지라는 두 가지 어둠으로 대별된다. 전쟁 속에서 유년기를 보낸 그로서는 전쟁으로 훼손된 유년의 체험을 형상화하는 한편, 전쟁이라는 극한 공간 속에서 보호받지 못한 과거의 기억은 아버지로 상징된 절대성에 대한 부정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두 가지 어둠은 그의 시를 공간적으로는 변두리 선호 경향을 드러내게 하며, 의식면에서는 서민 또는 하층 민중 지향적 경향을 띠게 하였다. 그의 초기시의 대표작인 <동두천>, <켄터키의 집>, <베트남>, <아우시비쯔>, <영동행각(嶺東行脚)> 등의 시편들이 모두 그 같은 특징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시는 그가 대학을 마친 직후 동두천의 어느 고등학교에서 잠시 교사 생활을 할 때 만났던 무수한 혼혈아들을 떠올리며 지은 작품으로, 동두천역 저탄더미에 내려 쌓이는 눈을 통해 혼혈아와 같은 소외된 인간의 설움을 형상화하고 있다. 유년의 전후 폐허 속에서 자연스럽게 배태된 허무 의식과 유신 체제라는 70년대의 암울한 정치적 상황에서 형성된 절망적 현실 의식이 작품에 투영됨으로써 이 시는 과거의 어두운 기억만이 아니라, 현재의 삶도 캄캄한 어둠으로 나타나 있다.

 

이 작품의 시적 배경인 동두천은 우리 민족에게 일종의 상처와도 같은 도시이다. 동족 간의 비극적인 전쟁에 개입했던 미국 군대가 아직까지 머무르고 있는 그 곳엔 그들을 상대로 몸을 팔아 살아가는 여자들이 있으며, 그들 사이에서는 약소 민족의 슬픔을 자신의 운명으로 안고 혼혈아라는 이름의 불행한 아이들이 태어난다. 시인은 그 도시에서, 그것도 떠나가는 사람과 남는 사람의 운명을 표상하는 기차역에서 저탄더미에 떨어져 내리는 눈을 바라다 본다. 신호등이 바뀌자 서둘러 떠나가는 기차를 보면서 인생도 저렇게 어디론가 / 가고 있는 중이라는 상념에 잠겨 있다가, 혹시나 군중에서 떨어져 남게 되더라도 / 저렇게 내리면서 녹는 춘삼월 눈처럼 파묻혀 흐려질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눈이 아무리 깨끗하다 할지라도 내리는 눈일 동안만깨끗할 뿐, 떨어져 녹는 순간 석탄과 구분되지 않는 진창의 검은 물이 되어 흐르는 것을 발견한 그는 결국 제 아버지들을 따라 바다를 건너가게 될 혼혈아들의 운명이 바로 그와 동일함을 깨닫게 된다. 낯선 나라 험한 세상에서 그들이 어린 날의 순수함을 그대로 간직하며 살아가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을 첩첩 수렁 너머의 세상으로 떠나 보내야 하는 이 땅이야말로 절망적인 진창길임을 알고 있는 시인은 마침내 그들과 하나가 되어 더러운 그리움이여 무엇이 / 우리가 녹은 눈물이 된 뒤에도 등을 밀어 / 캄캄한 어둠 속에서 흘러가게 하느냐라고 부르짖는다. 여기서 그리움이란 좀더 순수하고 인간적인 삶에 대한 희망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것이 더럽다는 것은 그 희망이 늘 우리를 배반했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처음엔 처럼 순수했던 우리였지만, 그리움에 현혹되어 진흙탕의 눈물이 되고, 그 다음에는 또 다른 욕망에 이끌려 현실을 신기루처럼 여기며 캄캄한 어둠 속에서어디론가 흘러가게 되는 막막한 존재의 설움을 노래한 것이다.

 

그런데 이 눈물은 중의적 의미로, 눈이 녹은 물인 동시에 시인이 흘리는 슬픔의 눈물이다. 그가 눈물을 흘리는 것은 그가 순수한 사람임을 알게 하는 행위이지만, 이 눈물도 역시 눈 녹은 물처럼 맨살로 끌려가는 진창길을 벗어날 수 없. 한편, 자신의 순수한 시가 맞이하게 될 운명도 결국 그와 같을 것임을 알고 있는 그는 마침내 혼자만의 외로운 시간을 지나현실의 진창까지도 다 건너야 비로소 순결한 새벽으로 돌아올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다시 말해, 순수한 눈이 녹아 떨어지는 이 진창과, 자신의 순수한 시가 미래를 두려워 하지 않고 끌어안아야 하는 그 어두움이야말로 새벽으로 상징된 순수한 인간적 삶에 다다를 수 있는 유일한 통과 의례임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 감상의 길잡이 2 >

이 시는 특별한 지명의 의미를 전면에 내세운다. 동두천이라는 도시가 갖는 현대사적 의미, 자세히 말하자면 1970년대적 의미를 모른다면 이 시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우리라. 19세기의 동두천은 이 시의 동두천을 이해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며, 21세기의 동두천은 이 시의 동두천과 확연히 다를 것이다. 그만큼 이 시는 당대적 현실과 밀접하다. 특히 1970년대에 쓰여진 김명인의 시는 대부분 이 무렵의 시대가 갖는 역사적인 대목을 가까이 의식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시는 독자를 압도하거나 끌고다니지 않고, 시인과 함께 그 시대를 또는 그 현장을 바라보게 하며, 함께 번민하고 함께 슬퍼하게 한다. 이는 서정시적 자질들을 소중히 다룸으로써 얻게 되는 흔치 않는 문학의 미덕인 것이다.

동두천은 미군의 도시. 그래서 서글프지만 자연스럽게 양공주의 도시, 혼혈아의 도시가 되었다. 이것은 하나의 1970년대적 공식이다. 동두천연작은 시인이 바로 이 도시에서 중학교 교사로 지냈음을 알려준다. 이 시는 이 연작의 서()에 해당하는데, 시의 풍경 속에는 어떤 곡절 많고 고통스런 경험을 한 사람이 어떤 일을 우울하고 처연한 태도로 되새기고 있다. 그는 눈 내리는 역에 서 있다. 순결한 눈은 검은 석탄 더미 위로 내려 쌓여 제 색을 잃는다. 그것은 곧 온전한 원형적 삶의 순수와 이를 더럽히는 현실의 파괴적 위력의 대조를 대신한다. 그는 표면적으로는 아무도 증오하거나 공격하지 않으면서, 사라져가고 더럽혀져 가는 정결하고 온전한 삶의 원형을 그리워한다.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은, 사실 사라지게 한 것들에 대한 증오의 다른 이름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이 시의 감동은 `첩첩 수렁 너머의 알 수 없는 세상', `맨살로 끌려가는 진창길 같은 삶'을 넘어서, `나 혼자만의 외로운 시간'으로 상징되는 뼈아픈 내면화에 능동적으로 가 닿으려는 몸짓에서 온다. 그것은 현실의 고통을 `떠나야 되돌아올 새벽'으로 보는, 그래서 그것을 `죄다 건너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인식에서 새롭게 힘을 얻는다.

 

나는 스무살 때 동두천연작을 읽고 큰 감동을 받았다. 사실 시에서 살갗에 소름이 돋고 목이 메는 감동을 받는 일은 흔치 않다. 그와 같은 질의 감동은 소설의 몫이기 쉽고, 시의 감동은 조용한 명상, 혹은 은은한 미소에 가깝지 않을런지. 어쨌거나 나는 그 특별한 감동을 여기에 특별하게 기록하고 싶다. [해설: 이희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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