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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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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홍경호 옮김/이기석 옮김/송영택 옮김

 

1. 데미안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내 이야기를 하자면, 훨씬 앞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할 수만 있다면, 훨씬 더 이전으로 내 유년의 맨 처음까지, 또 아득한 나의 근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리라.

작가들은 소설을 쓸 때 자기들이 하느님이라도 되듯 누군가의 인생사를 훤히 내려다보고 파악하여, 하느님이 몸소 이야기하듯 아무 거리낌 없이 자신이 어디서나 핵심을 집어내어 써낼 수 있는 양 굴곤 한다. 나는 그럴 수 없다, 작가들도 그래서는 안 되듯이. 그리고 내게는 내 이야기가, 어떤 작가에게든 그의 이야기가 중요한 것 이상으로 중요하다. 내 자신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한 인간의 이야기, 즉 그 어떤 가공의 인물, 있을 수 있는 인물, 이상적인 인물, 어떻든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일회적인, 살아 있는 인간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현실적으로 살아 있는 인간이란 것이 무엇인지,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혼미해져 버렸다. 그 하나하나가 자연의 단 한번의 소중한 시도인 사람을 무더기로 쏘아 죽이기도 한다. 만약 우리가 이제 더 이상 단 한번뿐인 소중한 목숨이 아니라면, 우리들 하나하나를 총알 하나로 정말로 완전히 세상에서 없애버릴 수도 있다면, 이런 저런 이야기를 쓴다는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으리라. 그러나 한 사람 한 사람은 그저 그 자신일 뿐만 아니라 일회적이고, 아주 특별하고, 어떤 경우 중요하며 주목할 만한 존재이다. 세계의 여러 현상이 그곳에서 오직 한번 서로 교차되며, 다시 반복되는 일은 없는 하나의 점인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중요하고, 영원하고, 신성한 것이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은, 어떻든 살아가면서 자연의 뜻을 실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경이로우며 충분히 주목할 만한 존재이다. 누구 속에서든 정신은 형상이 되고, 누구 속에서든 피조물이 괴로워하고 있으며, 누구 속에서든 한 구세주가 십자가에 매달리고 있다.

사람이란 존재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이제 별로 없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느끼기는 한다. 그리고 느끼는 만큼 수월하게 죽어간다. 나도 이 이야기를 다 쓰고 나면 좀더 수월하게 죽게 될 것이다.

내 자신을 학식이 풍부한 사람이라고는 감히 부를 수 없다. 나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찾는 구도자 였으며, 아직도 그렇다. 그러나 이제 별을 쳐다보거나 책을 들여다보며 찾지는 않는다. 내 피가 몸 속에서 흐르고 있는 그 가르침을 듣기 시작하고 있다. 내 이야기는 유쾌하지 않다. 꾸며낸 이야기들처럼 달콤하거나 조화롭지 않다. 무의미와 혼란, 착란과 꿈의 맛이 난다. 이제 더는 자신을 기만하지 않겠다는 모든 사람들의 삶처럼.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길의 추구, 오솔길의 암시다. 일찍이 그 어떤 사람도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본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노력한다. 어떤 사람은 모호하게 어떤 사람은 보다 투명하게, 누구나 그 나름대로 힘껏 노력한다. 누구든 출생의 잔재, 기원의 점액과 알 껍질을 임종까지 지니고 간다. 더러는 결코 사람이 되지 못한 채, 개구리에 그치고 말며, 도마뱀에, 개미에 그치고 만다. 그리고 더러는 위는 사람이고 아래는 물고기인 채로 남은 경우도 있다. 그러나 모두가 인간이 되라고 기원하며 자연이 던진 돌인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모두 유래가 같다. 어머니들이 같다. 우리 모두는 같은 협곡에서 나온다. 똑같이 심연으로부터 비롯된 시도이며 투척이지만 각자가 자기 나름의 목표를 향하여 노력한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건 누구나 자기 자신뿐이다.

2. 두 세계

내가 열 살이고 작은 도시의 라틴어 학교에 다니던 시절의 체험 하나로 내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그 시절로부터 짙은 향기가 밀려와, 속에서부터 아픔과 기분 좋은 전율로 마음을 뒤흔든다. 어두운 골목들과 한한 집들, 탑들, 시계 치는 소리와 사람들 얼굴, 편안함과 따뜻한 쾌적함으로 가득 찬 방들, 비밀과 무시무시한 유령의 공포로 가득 찬 방들. 따뜻하고 비좁은 방의 냄새, 토끼와 하녀들의 냄새, 가정 처방약 냄새와 마른 과일 향기가 난다. 그곳에서는 두 세계가 뒤섞여있다.

밤과 낮이 두 극으로부터 나왔다.

한 세계는 아버지의 집이었다. 그 세계는 협소해서 사실 그 안에는 내 부모님밖에 없었다. 그 세계는 나도 대부분 잘 알고 있었다. 그 세계의 이름은 어머니와 아버지였다. 그 세계의 이름은 사랑과 엄격함, 모범과 학교였다. 그 세계에 속하는 것은 온화한 광채, 맑음과 깨끗함이었다. 그 곳에는 부드럽고 다정한 이야기들, 깨끗이 닦은 손, 청결한 옷, 좋은 관습이 깃들여 있었다. 그곳에서는 아침에 찬송가가 불려졌다. 그곳에는 성탄절 잔치가 있었다. 곧바로 미래로 이어지는 곧은 선과 길이 그 세계 속에 있었다. 의무와 책임, 양심의 가책과 고해, 용서와 선한 원칙들, 사랑과 존경, 성경 말씀과 지혜가 있었다. 인생이 말고 깨끗하고, 아름답고 정돈되어 있으려면 그 세계를 향해 있어야만 했다.

반면 또 하나의 세계가 이미 우리 집 한가운데에서 시작되고 있었는데 그것은 완전히 다른 세 상이었다. 냄새도 달랐고, 말도 달랐고, 약속하고 요구하는 것도 달랐다. 그 두번째 세계 속에는 하녀들과 직공들이 있고 유령 이야기들과 스캔들이 있었다. 무시무시하고, 유혹하는, 무섭고 수수께끼 같은 물건들, 도살장과 감옥, 술 취한 사람들과 악쓰는 여자들, 새끼 낳는 암소와 쓰러진 말들, 강도의 침입, 살인, 자살 같은 일들이 있었다. 아름답고도 무시무시한, 거칠고도 잔인 한 그 모든 일들이 사방에, 바로 옆 골목, 바로 옆집에서 있었고 경찰 끄나풀들과 부랑자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주정뱅이들은 아내를 패고, 저녁때면 젊은 여자들의 무리가 뒤엉켜 공장에서 꾸역꾸역 나왔다. 늙은 여자들은 누군가에게 요술을 걸거나 병이 나도록 할 수 있었다. 숲에는 도둑 떼가 살고 있었다. 방화자들은 뒤쫓는 경관에게 잡혔다. 어디서나, 어머니 아버지가 계시던 우리 집안에서만 빼고는 어디서나 이 격렬한 두 번째 세계가 솟아 나오고 향기를 뿜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좋았다. 여기 우리 집에 평화와 질서, 안식이 존재한다는 것, 의무와 거리낌없는 양심, 용서와 사랑이 존재한다는 것은 경이로웠다. 그리고 그 모든 다른 것들, 소란하고 요란한 것, 음침하고 폭력적인 것이 존재하며 그래도 그런 것들로부터 한 걸음이면 어머니한테로 피신할 수 있다는 것도 경이로웠다.

그리고 가장 기이했던 것은, 그 경계가 서로 닿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두 세계는 얼마나 가까이 함께 있었는지! 예를 들면 우리 집 하녀 리나는, 저녁 기도 때 거실 출입문 옆에 앉아, 씻은 두 손을 매끈하게 펴진 앞치마 위에 올려놓고, 밝은 목소리로 함께 노래 부르는데, 그럴 때 그녀는 아버지와 어머니, 우리들, 밝음과 올바름에 속했다. 그 후 곧바로 부엌에서 혹은 장작을 쌓아둔 광에서 내게 머리 없는 난쟁이들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푸줏간의 작은 가게에서 이웃 아낙네들과 싸움을 벌일 때 그녀는 딴 사람이었다. 다른 세계에 속했다. 비밀에 에워싸여 있었다. 그런데 모 든 것이 그랬다. 나 자신이 가장 심하게 그랬다. 물론, 나는 밝고 올바른 세계에 속했다. 나는 내 부모님의 자식이었다. 그러나 내가 눈과 귀를 향하는 곳 어디에나 다른 것이 있었다. 나는 다른 것들 속에서도 살고 있었다. 비록 그것이 내게는 자주 낯설고 무시무시했고, 그곳에서는 규칙적으로 야심의 가책과 불안을 얻을지라도. 심지어 한동안 내가 가장 살고 싶어한 곳은 금지된 세 계 안이었다. 그리고 밝음 속으로의 귀환은 그것이 제아무리 필연적이고 제아무리 선하더라도 덜 아름다운 거쇼, 보다 지루한 것, 보다 황량한 것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인생에서의 내 목표가, 우리 아버지 어머니처럼 되는 것, 그렇게 밝고 맑게, 그렇게 뛰어나고 단정하게 되는 것임을 나도 때로는 알았다. 그러나 거기까지 이르는 길은 멀었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학교에서 배겨내야 하고 대학 공부를 해야 하고 온갖 시험들을 치러야 했다. 그 길은 자꾸자꾸 또 하나 의 어두운 세계 옆을 지나거나 그 세계를 꿰뚫으며 이어져서 그 세계에 머무르고 그 안으로 가라앉아 버리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된 탕아들의 이야기가 있었다. 그런 이야기들을 나는 열정을 가지고 읽었다. 그런 이야기들에서는 아버지에게로 그리고 선함에로의 귀환은 언제나 구원이며 위대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어디까지나, 그것만이 올바른 것, 선하고 소망할 만한 것이라고 나는 느꼈다. 그럼에도 악당들과 탕아들이 나오는 대목이 훨씬 더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런 고백을 해도 된다면, 탕아가 참회를 하고 다시 받아들인다는 것이 어떤 때는 그야말로 유감이었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다.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것은 한 가닥 예감이자 가능성으로, 감정이 밑바닥에 막연히 자리잡고 있었다. 악마를 상상하면, 저 아래 길거리에 있는 모습으로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변장을 했거나, 공공연하게 모습을 드러냈거나 가설시장 혹은 술집에 있는 모습으로. 그러나 결코 우리집에 있는 모습으로 떠올릴 수는 없었다.

내 누이들도 똑같이 밝은 세계에 속했다. 그들은 내 눈에 본질적으로 아버지 어머니와 더 가까운 듯 보였다. 그들은 나보다 선했고, 도덕적이었고, 결함이 없었다. 그들에게도 부족한 점과 나쁜 습관이 있었지만 그런 점들은 내 보기에는 그리 심각하지 않았다. 나와는 달랐다. 악과의 접촉이 자주 그토록 힘들고, 고통스럽던, 어두운 세계에 훨씬 더 가까이 있던 나와는 같지 않았다. 누이들은 부모님처럼 아낌받고 존중받아 마땅했다. 누이들과 다투었어도, 나중에 자신의 양 심 앞에서 보면 늘 내 자신이 나쁜 사람, 용서를 빌어야 할 원흉이었다. 누이들을 모욕하는 것, 그것은 부모님을, 선함과 계율을 모욕하는 일이었다. 누이들보다는 오히려 가장 타락한 부랑 아 쪽과 나눌 수 있는 비밀들이 있었다. 세상은 밝고, 양심은 거리낌 없는 기분 좋은 날이면, 그 때는 누이들과 노는 것, 선하고 얌전하게 그들과 함께 하며 착하고 고귀한 겉모습의 자신을 보는 일이 유쾌했다. 천사라면, 분명 그래야 했으리라! 천시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알았던 최고의 것이었다. 천사라는 것을 우리는 감미롭고 경이롭게 생각했다. 크리스마스나 행복처럼 밝은 음향과 향기에 에워싸인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 시간들과 나날들은 오, 얼마나 드문가? 놀이를 하며 우리에게 허용된 악의 없는 좋은 놀이를 하며 나는 자주 열정과 격함에 사로잡혔고 그것이 누이들에게는 너무 심하게 느껴져, 다툼과 불행으로 이어졌다. 그 다음에 화가 치밀면 나는 끔찍해져서 닥 치는 대로 이런 저런 말과 행동을 했는데 그것이 타락임을 그런 일들을 행하고 말하는 동안에 이 미 스스로 뜨겁게 느꼈다. 그 다음에는 어둡고 격앙된 후회와 회한의 시간이 왔다. 그 다음에는 용서를 비는 고통스러운 순간이 오고, 그 다음에야 몇 시간 혹은 몇 순간동안 다시 한 줄기 광명의 빛 줄기, 분열 없는 한 가닥 고요하고 고마운 행복이 되돌아오는 것이었다.

나는 라틴어 학교에 다녔다. 시장의 아들과 수석 삼림관의 아들이 우리 반에 있어 이따금 씩 우리 집에 왔다. 난폭한 사내아이들이었어도 허용된 선한 세계에 속한 애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느 때 우리가 경멸하던 이웃 아이들, 공립학교 학생들과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들 중 하나로 나는 내 이야기를 시작해야겠다.

어느 수업 없는 오후 열 번째 생일이 갓 지났을 때였다. 나는 두 친구와 함께 집 근처를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때 커다란 아이가 왔다. 열세 살쯤 된 억센 사내아이, 공립학교 학생으로, 재단사의 아들이었다. 그 애 아버지는 술꾼이었으며 온 가족이 악명이 나 있었다. 프란츠 크로머는 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시키는 대로 우리는 다리 옆에서 강가로 내려갔고, 첫 교각 밑에서 세상으로부터 몸을 숨 겼다. 아치형의 교각과 천천히 흐르는 강물 사이 좁은 강변은 온통 쓰레기, 사금파리, 잡동사니 천지로, 녹슨 철사 줄이며 다른 쓰레기 뭉치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거기서 이따금씩 쓸 만한 것들이 발견되기도 했다. 프란츠크로머의 지휘에 따라 그 구간을 샅샅이 뒤져 우리가 찾아낸 것을 그 애에게 보여야 했다. 그러면 그 애는 그것을 자기 호주머니에 집어넣든지, 물에 던져버렸다. 그 애는 우리들에게, 그 가운데 혹시 납, 구리 혹은 주석으로 된 것이 있는지 잘 살피도록 시키고는 그런 건 모두 자기 호주머니에 넣었다. 뿔로 된 낡은 빗도 호주머니에 넣었다. 그 애와 어울려 있자니 몹시 마음이 조였다. 아버지께서 아시기라도 하 면, 이런 만남을 금하시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만이 아니라, 프란츠에 대한 무서움 때문이기도 했다. 그 애가 나를 받아들여 나를 다른 애들과 똑같이 취급한다는 것은 기뻤다. 그 애는 명령했고, 우리는 복종했다. 그러는 것이, 처음 그 애와 함께 있었건만, 마치 오래 해오던 일처럼 여겨졌다.

마침내 우리는 땅바닥에 앉았고, 프란츠는 강물에다 침을 뱉었다. 그 애는 어른처럼 보였다. 앳 새로 침을 탁 뱉는데 어디든 원하는 곳을 맞췄다. 그가 얘기를 시작했다. 그러자 소년들은 학 생이 저지를 수 있는 온갖 종류의 영웅적 행동과 나쁜 짓거리들을 자랑삼아 떠벌렸다. 나는 아 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바로 나의 말없음이 시선을 끌어 크로머의 노여움을 사게 도지 않을까 두려웠다. 두 친구는 처음부터 나와는 거리를 두었고 크로머편이라고 공언한 터라 나는 그들 속의 이방인이어서, 내 옷차림이며 태도가 그 애들에게 거슬리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라틴어 학교 학생이며 좋은 집안 자식인 나를 크로머가 좋아할 리 없었다. 그리고 다른 두 아이는, 여차하면 내가 골탕을 먹어도 모르는 척 내버려둘 것임을 나는 잘 알고

두려운 나머지 마침내 나도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황당무계한 도둑 이야기를 꾸며 냈는데, 나를 그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모퉁이 물방앗간집 과수원에서, 하고 나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느 날 밤에 친구 하나와 커다란 자루 하나 가득 사과를 훔쳤는데, 그냥 보통 사과가 아니라 전부 라이네테와 골트파르메네, 즉 최고의 품종이었다고 했다. 순간의 위험을 피하여 나는 이 이야기로 도피해 들어간 것이었다. 이야기를 꾸며내 들려주는 것은 나에게는 흔히 있는 일 이었던 것이다. 금방 말이 막혀 더 고약한 일에 말려드는 사태만은 벌어지지 않도록, 나는 온갖 기교를 동원하여 이야기를 불려나갔다. 둘 중 하나가 나무에 올라가서 사과를 밑으로 던지는 동 안 다른 하나는 계속 망을 보아야 했다고 나는 이야기하였다. 그런데 자루가 어찌나 무거웠는지 반시간 뒤에 다시 가서 그것도 마저 가져왔다고.

이야기를 다 했을 때, 나는 조금 박수를 기대했다. 마지막에는 열이 올랐다. 이야기를 꾸며내는 데에 스스로 도취되었던 것이다. 작은 두 아이는 심드렁하니 말이 없었다. 그러나 크로머는 반쯤 뜬 실눈으로 나를 쏘아보며 위협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애기 진짜야? 」 「그럼」 내가 말했다. 「그러니까 진짜로 있었던 일이라 이거지?」 「그래, 진짜로 있었던 일이야」 속으로는 겁이 나 숨이 막히는 것 같은데도 나는 고집스럽게 단언했다. 「맹세할 수 있어?」 나는 몹시 놀랐지만, 즉시 그렇다고 했다. 「그럼 말해, 하느님을 걸고 목숨을 걸고 맹세한다고!」 나는 말했다. 「하느님을 걸고 목숨을 걸고 맹세해」 「그러셔」 하더니만 그 애는 몸을 돌려버렸다. 그걸로 잘 끝났다고 나는 생각했고, 그 애가 곧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로 접어들자 기뻤다. 우리가 다리 위에 왔을 때, 나는 수줍게 이제 집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집에 가는 게 뭐 그리 급하냐」 프란츠가 웃었다. 「우린 가는 길이 같잖아」 어슬렁어슬렁 그 애는 계속 걸어갔고, 나는 감히 딴 데로 가지 못했다. 그런데 그 애는 정말로 우리 집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우리가 다 왔을 때, 우리 집 현관문과 묵직한 구리 문손잡이, 어머니 방의 커튼이 보였을 때 나는 깊이 숨을 내쉬었다. 오 집으로 돌아왔구나! 오 축복 받은, 선한 귀환, 집으로, 밝음 속으로, 평화 속으로 귀환!

내가 얼른 문을 열고 살짝 빠져 들어가 등뒤로 문을 닫으려는 참에 프란츠 크로머가 함께 밀고 들어서는 것이었다. 마당 쪽에서만 빛이 들어오는 서늘하고 침침한, 타일 깔린 복도에서 그 애가 내 곁에 서서 내 팔을 붙들고 나직이 말했다. 「그렇게 바쁘게 굴지 말아, 너!」 놀라서 나는 그 애를 응시했다. 내 팔을 움켜쥔 그 애의 손은 무쇠처럼 단단했다. 나는 생각해 보았다. 그 애가 대체 무슨 속셈을 가졌는지, 혹시 나를 괴롭히겠다는 것인지. 지금 내가 소리를 지른다면, 하고 나는 생각했다. 요란하게 소리를 지른다면, 누군가가 위에서 제때 나를 구하러 내려 올 것인가? 그러나 나는 포기했다. 내가 물었다. 「뭐야? 어쩌겠다는 거야?」 「별 거 아니야, 너한테 그냥 뭘 좀 물어봐야겠어. 다른 사람들은 들을 필요 없고」 「그래? 좋아. 날더러 무얼 더 이야기하라는 거야? 나는 올라가야 해, 알잖아」 「너도 알겠지」 프란츠가 나직이 말했다. 「모퉁이 물방아곁 과수원이 누구네 것인지?」 「아니, 난 몰라, 물방앗간 주인 거겠지 뭐」 프란츠는 내 어깨에 팔을 두르더니 나를 자기한테로 바싹 끌어당겼다. 이제 나는 바로 코앞에서 그 애의 얼굴을 보아야만 했다. 그 애의 두 눈은 사악했다. 그 애는 음흉한 미소를 띠고 있었고, 그 얼굴에는 잔인함과 기운이 넘쳤다. 「그렇다면, 애야, 그 과수원이 누구네 것인지는 내가 말해 주지. 난 그 집 사과가 도둑 맞았다 는 걸 벌써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어. 주인이 누가 과일을 훔쳐갔는지 말해 주는 사람한테는 이 마르크를 주겠다고 말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지」 「맙소사!」 나는 소리쳤다. 「그래도 네가 그 사람한테 무슨 말을 하진 않겠지?」 그 애의 명예심에 호소한다는 것이 소용없는 일임을 나는 느꼈다. 그 애는 다른 세계에서 왔다. 배신 따위는 그 애에게는 범죄가 아니었다. 이런 일에 있어서는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들은 우리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나는 정확하게 느꼈다. 「무슨 말을 하진 알겠지?」 크로머가 웃었다. 「이봐 친구, 내가 직접 이 마르크 동전을 만들어낼 수 있는 화폐 위조범이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난 가난한 놈이야. 너처럼 부자 아버지가 없단 말이야. 그러니 이 마르크를 벌 수 있다면 벌어야지. 어쩌면 주인은 더 줄지도 모르지」 그러더니 갑자기 나를 다시 놓았다. 우리 집 현관마루에는 이제 더 이상 평화와 안전의 냄새가 나지 않았다. 세계가 내 주위에서 무너졌다. 그 애가 떠들고 다니겠지, 내가 죄를 지었다고. 그 말을 아버지한테도 하겠지, 어쩌면 경찰까지 오겠지. 모든 혼돈의 공포가 나를 위협하고 있었다. 모든 흉측하고 위험한 것이 일제히 나에게 맞서고 있었다. 내가 훔치지 않았다는 것은 이제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는 맹세까지 하지 않았던가. 세상에, 하느님 맙소사! 눈물이 핑 돌았다. 매 수를 해서 나를 구해야겠다고 느꼈다. 절망하여 모든 호주머니를 뒤졌다. 사과도, 주머니칼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 내 시계 생각이 났다. 그것은 낡은 은시계였는데 가지는 않았다. <그냥 그렇게> 차고 다니는 것이었다. 할머니가 물려주신 시계였다. 얼른 그걸 꺼냈다. 나는 말했다. 「크로머, 들어봐. 내 이름을 말해서는 안 돼. 그건 너한테도 안 좋을 거야. 내 시계를 줄게, 자 봐. 미안하지만 다른 건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 너 가져도 돼. 이거 은이야, 내부장치도 좋아, 조금 고장나기는 했지만, 고치면 돼」 그 애는 미소를 띠고 그 시계를 자기의 커다란 손안에 넣었다. 그 손을 보며 나는 그것이 얼마나 우악스러우며 나에 대 한 깊은 적개심으로 차 있는가를 느꼈다. 그것이 내 삶과 평화를 움켜잡으려 뻗쳐오고 있음을 느꼈다. 「그거 은이야」 나는 수줍게 말했다. 「네 고물 은시계 따위는 관심 없어!」 그는 깊은 경멸을 띠고 말했다. 「너나 고쳐 써」 「하 지만 프란츠」 나는 그가 휙 가버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떨며 외쳤다. 「잠깐만 기다려! 이 시계 가져! 정말 은이야, 진짜란 말이야. 그리고 난 다른 건 아무것도 없어」 그 애는 싸늘한 경멸을 띠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알긴 아는구나. 내가 누구한테 갈 건지. 그 말을 경찰한테 할 수도 있어. 순경 아저씰 내가 잘 아니까 말이야」 그 애는 가려고 몸을 돌렸다. 나는 그 애 옷소매를 붙잡았다.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되었다. 그 애 가 그렇게 떠나면 일어나게 될 그 모든 것을 겪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훨씬 나을 것 같았다. 흥분으로 목이 쉬어 내가 애걸했다. 「프란츠, 멍청한 짓 하지 마! 분명 그냥 재미로 그래보는 거지?」 「그렇고 말고, 재미로 그래보는 거지. 하지만 네가 치를 값은 비쌀 수도 있지」 「말 좀 해줘, 프란츠,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뭐든 하겠어!」 그는 반쯤 내리깐 눈으로 나를 지그시 바라보더니 다시 웃었다. 「그렇게 멍청하게 굴지 마!」 그는 선심이라도 쓰듯 말했다. 「너도 나처럼 훤히 알잖아. 난 이 마르크를 벌 수 있어. 그리고 난 그런 돈을 내던져버릴 수 있는 부자가 아니고 말이야. 그건 너 도 알지. 그런데 넌 부자야. 시계도 있잖아. 넌 나한테 이 마르크를 주기만 하면 돼. 그럼 끝이지 」

나는 그 논리를 이해했다. 그러나 이 마르크라니! 이 마르크란 나한테는 심 마르크, 백 마르크, 천 마르크나 마찬가지로 도달할 수 없는 큰돈이었다. 나는 돈이 없었다. 어머니 곁에 놓아둔 저금통이 있었다. 거기에는 아저씨가 오신다든지 그럴 때 받은 몇 개의 십 페니히 혹은 오 페니히 짜리 동전이 들어 있었다. 그밖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 나이에는 아직 용돈은 받지 않았던 것이다. 「난 아무 것도 없어」 내가 슬프게 말했다. 「난 돈이 없어. 그러나 그밖에는 네게 뭐든 다 주겠어. 내게는 인디언 책이 있고, 병정들이 잇고, 나침반도 하나 있어. 그걸 가져다 주겠어」 크로머는 다만 뻔뻔하고 심술궂게 입을 움칫 하며 바닥에 침을 탁 뱉었을 뿐이었다. 「헛소리 집어치워!」 그가 명령하듯 말했다. 「네 고물 잡동사니들은 너나 가지고 있어. 나침반이라고! 날 더 이상 화나게 하지 말아. 잘 들어. 돈을 가져와!」 「하지만 난 돈이 없는 걸, 나는 돈을 받아본 적이 없어. 어떻게 할 길이 없어!」 「내일 나한테 이 마르크를 가져오는 거 야. 학교가 끝난 뒤 저 아래 시장에서 기다릴게. 그럼 끝이야. 만약 네가 돈을 안 가져오면, 알지!」 「알겠어, 하지만 대체 어디서 돈을 가져오란 말이야? 하느님 맙소사, 난 돈이 없는데」 「너네 집에는 돈이 충분히 있잖아. 가져오고 안 가져오고는 네 일이지. 그럼 내일 학교 끝나 고다. 말해 두지만, 만약 안 가져오면……」 그 애는 무서운 눈길로 내 눈을 쏘아보고, 또다시 침을 뱉고는 그림자처럼 사라졌다. 나는 계단을 올라갈 수가 없었다. 나의 이생이 산산이 부수어져 있었다. 달아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거나 물에 빠져 죽을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그러면 어떨지는 똑똑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어둠 속 계단 맨 아래 칸에 앉았다. 한껏 웅크리고 앉아 불행에 몸을 내맡겼다. 장작을 가지러 광주리를 들고 내려오던 리나가 내가 울고 잇는 모습을 보았다.

나는 리나에게, 위에 가서는 아무 말도 말라고 부탁하고 올라갔다. 유리문 곁의 옷걸이에는 아버지의 모자가 걸려 있었다. 어머니의 양산도 걸려 있었다. 이 모든 물건으로부터 왈칵 고향과 애정이 나에게로 밀려왔다. 나의 마음은 뭉클하게 그것들을 반겼다. 애원하며 감사하며, 탕아가 옛 고향의 방을 보고 냄새 맡으며 그러듯이.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이제 내 것이 아니었다. 그 모 든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밝은 세계였으며 나는 깊이 죄 지은 채 낯선 홍수에 잠겨 있었다. 모험과 죄악에 얽혀들어, 적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위험, 불안, 치욕이 기다리고 있었다. 모자와 양산, 오래된 질 좋은 사암 바닥, 마루 장식장 윙 걸린 커다란 그림, 그리고 그 안쪽 거 실에서부터 들려오는 누나의 목소리, 그 모든 것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사랑스럽고 다정하고 귀한 것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 위로가 아니었으며 확실한 자산도 아니었다. 온통 비난이었다. 그 모든 것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었고 나는 그러한 명랑함과 고요함에 끼어들 수가 없었다. 나 는 내 구두에다 더러움을 묻혀왔다. 발깔개에 문질러 닦아낼 수 없는 더러움이었다. 고향의 세계는 알지 못하는 그림자를 나는 끌고 왔던 것이다. 이제까지 얼마나 많은 비밀과 두려움을 가졌던가.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내가 오늘 이 공간으로 끌고 온 것에 비하면 놀이이고 장난이었다. 운명이 뒤쫓아오고 있었다. 어머니가 알아서는 안 되는 손들이, 그 앞에서는 어머니도 나를 보호할 수 없는 손들이 나에게로 뻗쳐오고 있었다. 이제 내 범행이 절도였든 거짓말이었든(나는 하느님과 목숨을 걸고 거짓 맹세를 하지 않았던가?)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나의 죄악은 이것이냐 저것이냐가 아니었다. 나의 죄악은 내가 악마에게 손을 내밀었다는 사실 자체였다. 왜 나는 함께 갔던가? 왜 나는 일찍이 아버지 말에 귀기울인 것보다 더 크로머의 말에 귀를 기울였던가? 왜 나는 저 도둑질 이야기를 지어내고 영웅적 행위라도 되는 양 범행을 뽐냈을까? 이제 악마가 내 손을 잡았다. 이제 적이 나를 뒤쫓고 있었다.

한순간 나는 더 이상 내일의 공포를 느낀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나의 길이 이제 점점 더 비탈로, 암흑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다는 무서운 확신을 느꼈다. 나는 똑똑하게 감지하고 있었다. 나의 잘못에 이제 새로운 잘못들이 뒤이어 질게 틀림없다는 것, 누이들 곁에 내가 나타나고, 부모님께 인사하고 키스하는 것이 거짓이라는 것, 나만이 아는 운명과 비밀 하나를 지니게 되리라는 것을.

아버지의 모자를 보자 한 순간 신뢰와 희망이 내 마음속에서 번쩍 떠올랐다. 아버지께 모든 이야기를 하리라. 아버지의 판결과 아버지의 처벌을 받아들이고 아버지를 내 비밀의 공유자이자 구원자로 만들리라. 그것은 내가 자주 감내해 냈던 참회 하나에 불과하리라. 힘들고, 가혹한 시간, 힘들고 후회에 찬 용서를 구함에 불과하리라.

이런 생각은 얼마나 달콤하게 들렸던가? 얼마나 아름답게 유혹했던가! 그러나 일이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내가 그러지 못하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지금 하나의 비밀을, 하나의 죄를 지니고 있으며, 그것은 나 혼자 스스로 삼켜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쩌면 나는 바로 지금 갈림길에 서 있는지도 몰랐다. 어쩌면 나는 이 시각부터는 영원히 나쁜 것에 소속되고, 나쁜 사람들과 비밀을 공유하고, 그들에게 종속되고, 그들에게 복종하고, 분명 그들 같은 사람이 되리라. 잠시 어른 행세를, 영웅의 연기를 했었다. 이제 나는 그 결과를 감당해야 했다.

내가 방으로 들어섰을 때, 아버지께서 내 젖은 구두만 보신 것이 나에게는 다행이었다. 그것이 관심을 돌려, 아버지는 더 나쁜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셨다. 그 정도 비난은 견딜 만했다. 그 비난을 나는 남 몰래 다른 것과 연관시켰다. 그 비난을 나는 남 몰래 다른 것과 연관시켰다. 그때 마음속에서 이상하게도 새로운 느낌 하나가 불꽃처럼 번득였다. 뽑히지 않는 미늘들이 가득 박힌 듯한 날카롭고 불길한 느낌이었다. 나는 내가 아버지보다 우월하다고 느꼈던 것이다! 한 순간, 아버지의 무지에 대해 약간의 경멸을 느꼈던 것이다. 젖은 장화에 대한 비난은 내게는 소소해 보였다. <아버지가 아신다면!> 하고 나는 생각했는데, 살인죄를 고백해야 되는 판에, 조그만 빵 하나를 훔친 죄로 심문을 받는 범죄자처럼 내 자신이 느껴졌던 것이다. 그것은 추악하고도 꺼림 직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강렬했으며 깊은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 느낌은 그 어떤 다른 생각보다도 더 단단하게 내 비밀과 죄에 나를 결박하였다. 어쩌면 지금쯤 그 크로머 녀석은 벌써 경찰한테로 가서 내 이름을 댔겠지. 천둥 번개가 이제 내 머리 위로 몰려오지.

여기까지 이야기한 이 모든 체험에서는 이 순간이 중요한 순간이다. 그것은 아버지의 신성 함에 그어진 첫 칼자국이었다. 내 유년 생활엘 떠받치고 있는, 그리고 누구든 자신이 도기 전에 깨뜨려야 하는 큰 기둥에 그어진 첫 칼자국이었다. 우리들 운명의 내면적이고 본질적인 선은 아 무도 보지 못한 이런 체험들로 이루어진다. 그런 칼자국과 균열은 다시 늘어난다. 그것들은 치료되고 잊혀지지만 가장 비밀스러운 방안에서 살아 있으며 계속 피흘린다.

그 새로운 느낌에 곧 나 자신이 무서워졌다. 나는 곧바로 엎드려 아버지의 발에 키스라도 하 여 사죄하고 싶었다. 그러나 본질적인 것은 아무것도 사죄할 수 없는 법. 어린 아이도 그쯤은 어떤 현자 못지 않게 느끼고 안다.

내 일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고 내일 일에 대해 이리저리 궁리해 볼 필요성을 느꼈다. 그러나 나는 거기에 이르지 못했다. 저녁 내내 나는 오로지 우리 거실의 달라진 공기에 익숙해지느라 여념이 없었다. 벽시계와 테이블, 성경과 거울, 벽에 붙은 책 선반과 그림들이, 말하자면 나에게 이별을 고하고 있었다. 나의 세계가, 행복하고 아름다운 나의 삶이 과거가 되며 나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을 나는 얼어붙는 가슴으로 바라보고 있어야 했다. 그리고 내가 빨아들이는 새 뿌리가 되어 바깥에, 어둠과 낯선 것에 닻을 내리고 붙박혀 있는 것을 감지해야만 했다. 처음으로 나는 죽음을 맛보았다. 죽음은 쓴맛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탄생이니까, 두려운 새 삶 에 대한 불안과 걱정이니까.

마침내 침대에 눕게 되었을 때 나는 기뻤다! 조금 전에 마지막 연옥의 불로서 저녁 기도가 내 몸을 휘감고 지나갔던 것이다. 거기다 노래까지 하나 불렀는데, 내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의 하 나였다. 아, 나는 함께 노래하지 못했다. 음 하나 하나가 나에게는 쓸개즙이자 독약이었던 것이다. 나는 함께 기도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축복을 내리며 「저희 모두와 함께 하소서!」 하고 끝내실 때, 그때 내 몸을 스쳐간 경련이 나를 단번에 이 테두리에서 몰아냈다. 하느님의 은총이 식구들 모두와 함께 있었다. 그러나 이제 나와 함께 있지는 않았다. 몹시 지쳐 떨며 나는 떠났다.

한동안 내가 누워 있었던 침대 속에서, 따뜻함과 안정감이 다정하게 나를 감쌌을 때, 나의 마음은 다시 불안 속을 헤매었고, 지나간 일 주위를 불안하게 퍼덕였다. 어머니는 내게 늘 그렇듯이 잘 자라는 말을 했다. 어머니 발소리의 여운이 아직 방안에 남아 있었다. 어머니가 들고 계 신 촛불 빛이 아직 문틈에서 빛나고 있었다. 지금, 지금 어머니가 다시 한 번 되돌아오시면 어머니는 느끼신 것이다. 나에게 입맞춤을 하시며, 물으시겠지. 너그럽게 희망을 주시며 물으시겠지. 그러면 나는 울겠지. 그러면 내 목에 걸린 돌덩이가 녹겠지. 그러면 나는 어머니를 껴안고 어머니께 말하겠지. 그러면 만사는 해결인데, 그러면 구원인데! 문틈이 다시 어두워지고 나서도 또 한동안 나는 귀기울이며 생각했다.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 꼭 일어나리라고.

그 다음 나는 당면 문제로 되돌아와 나의 적의 눈을 응시했다. 그의 모습이 또렷하게 보였다. 그는 실눈을 하고 있었고 입가에는 야비한 웃음이 감돌았다.

그리고 내가 그를 바라보며 피할 수 없는 일을 속으로 삼킴에 따라 그는 더 커지고 더 추해졌다. 그의 사악한 눈은 악마처럼 번득였다. 그는 내가 잠들 때까지 바짝 내 곁에 있었다. 그러나 잠든 다음 그의 꿈을 꾸지는 않았다. 오늘에 대해서도 꿈꾸지 않았다. 꿈에 보인 것은, 우리가, 부모님과 누이들과 내가 한 배를 타고 가는데 온통 휴일의 평화와 광채가 우리를 에워싸는 것이었다. 한밤중에 깨었는데, 그때까지도 그 행복의 뒷맛이 느껴졌고, 누이들의 흰 여름옷이 햇빛 속에서 빛나는 모습이 보이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모든 낙원으로부터 다시 현실 속으로 떨어 져 들어갔고, 다시 나는 사악한 눈을 가진 적과 마주 서 있었다.

아침에, 어머니가 급히 오셔서, 벌써 늦었다고 왜 아직도 잠자리에 누워 있느냐고 소리치셨을 때, 나는 안색이 좋지 않았다. 어머니가 어디 아프냐고 물으시자 토하고 말았다. 토하고 나니까 좀 나았다. 나는 몸이 약간 아플 때 아침 내내 카밀레 찻잔을 곁에 놓고 누워, 옆방에서 어머니가 방을 치우는 소리, 리나가 바깥 복도에서 고기 팔러 온 사람과 주고받는 말 을 듣는 것을 몹시 좋아했다. 학교에 가지 않는 오전은 무언가 마력적이고 동화적인 것이었다. 그럴 때 햇살은 방안으로 어른어른 장난치듯 비쳐들었는데 학교에서 초록 커튼을 따라 떨어졌던 그 햇살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것까지도 오늘은 맛나지 않았으며 다른 음조를 띠고 있었다.

그래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그러나 나는 이미 자주 그랬던 만큼 단지 조금 몸이 아플 뿐이었고, 그 정도로는 아무것도 되지 않았다. 그 정도는 학교 가는 일로부터 나를 보호해 주기는 했 지만, 결코, 열 한 시에 시장에서 나를 기다릴 크로머로부터 나를 보호해 주지는 못했다. 어머니의 다정함도 이번에는 위로가 되지 못했다. 귀찮고 미안한 마음만 들었다. 나는 곧 다시 잠든 척하며 곰곰이 생각했다. 아무것도 소용없었다. 열 한 시에는 시장에 가 있어야만 했다. 그래서 나는 열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나아졌다고 말했다. 그런 경우에는 대개, 다시 잠자리로 가거나 아니면 오후에 학교로 가야 했다. 나는 학교에 가고 싶다고 했다. 계획을 하나 짜놓았던 것이다.

돈을 안 가지고 크로머한테로 갈 수는 없었다. 내 작은 저금통을 가져와야 했다. 충분한 돈이 들어 있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어림도 없었다. 그러나 그래도 얼마는 되었다. 빈손보다는 조금이라도 들고 가는 것이 나으며 적어도 크로머를 달래기는 할 게 틀림없다고 직감으로 느꼈다. 양말바람으로 살금살금 어머니 방으로 들어가 어머니 책상에서 내 저금통을 집어 들었을 때는 기분이 나빴다. 그러나 어제 일처럼 나쁘지는 않았다. 가슴이 뛰어 숨이 막혔다. 계단 아래에 와 서야 비로소 저금통이 잠겨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도 여전히 가슴은 뛰고 있었다. 저금통을 깨뜨려 여는 것은 아주 쉬웠다. 얇은 양은 막대 하나만 두 동강 내면 되었다. 그러나 부서진 자리를 보니 마음이 아팠다. 그것으로 나는 비로소 도둑질을 한 것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다만 사탕이나 과일 같은 주전부리에 입을 댔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비록 내 자신의 돈이지만 훔친 것이었다. 나는 크로머와 그의 세계에 다시 한 발자국 더 다가갔으며 이제부터는 일이 그렇게 시시각각 보기 좋게 내리막으로 가리라는 것을 느꼈고, 거기에 저항했다. 그러나 악마가 데려간다 하더라도 이제 되돌아갈 길은 없었다. 나는 걱정스레 돈을 헤아렸다. 저금통 안에서는 그렇게 가득한 소리를 냈는데 손안에 쥐고 보니 비참하게도 얼마 안 되는 액수였다. 육십 오 페니히였다. 나는 저금통을 아래층 마루 밑에 감추고 돈은 손에 꼭 쥐고 집을 나섰다. 내가 이 문을 지나던 그 어느 때와도 다르게. 위에서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부르는 것만 같았다. 얼른 그 자리를 떠났다.

아직 시간은 많았다. 달라진 도시의 골목들을 지나, 본적 없는 구름 아래로, 나를 유심히 바라보는 집들을 지나 나에게 혐의를 두는 사람들을 지나쳐, 살짝 돌아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도중에 학교 급우 하나가 가축시장에서 일 달러를 주웠던 생각이 떠올랐다. 하나님이 기적을 행하셔서 나에게도 그런 일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이제 기도할 권리가 없었다. 설령 그럴 권리가 있었다 하더라도 저금통이 다시 온전해지지는 않았으리라.

프란츠 크로머는 멀리서 나를 알아보았다. 그렇지만 아주 천천히 나에게 다가왔고, 나를 눈여겨보지 않는 듯 굴었다. 가까이 왔을 때 그 애는 자기를 따라오라고 명령하는 눈짓을 하고는, 단 한번 돌아보지도 않고, 유유히 계속 갔다. 슈트로 가세(Gasse, 골목)를 따라 내려가 좁은 판자 다리를 지나, 마침내 집들이 끝나는 곳에서 공사중인 어느 건물 앞에 멈추었다. 그곳에서는 작업을 하지 않았다. 벽들이 문도 창문도 없이 앙상하게 서 있었다. 크로머는 나를 돌아다보더니 안으로 들어갔고, 나도 뒤따라 들어갔다. 그 애는 벽 뒤로 가더니 자기한테로 오라는 눈짓을 하고는 손을 내밀었다. 「그거 갖고 왔지?」 그 애가 싸늘하게 물었다. 나는 주먹을 꼭 쥔 손을 주머니에서 빼서 그 애의 펼친 손바닥에 돈을 쏟아 놓았다. 그 애가 헤 아렸다. 마지막 오 페이히짜리의 챙그랑 소리가 잦기도 전에 「육십 오 페니히로군」하며 그 애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 나는 수줍게 말했다. 「이게 내가 가진 전부야, 너무 적지, 잘 알고 있어. 하지만 이 게 전부야. 더는 없어」 「네가 좀더 똑똑한 앤줄 알았는데」 그 애는 거의 온화한 어조로 비난했다. 「명예를 아는 남자들 사이에는 질서가 있어야지. 난 정당하지 않은 건 아무것도 가지지 않겠어, 그건 너도 알겠지. 네 쇠붙이들은 도로 가져가, 자! 딴데 가면 에누리 없이 몽땅 받을 수 있어 」 「하지만 난 없어, 더는 없다구! 이건 내 저금을 통째로 가지고 온 거야」 「그거야 네 사정이지. 널 불행하게 만들 생각은 없어. 넌 나한테 아직 일 마르크 삼십 오 페니히 빚이 있어. 언제 내가 그걸 받지?」 「오, 반드시 줄게, 크로머! 지금은 모르지만 어쩌면 곧 더 생길 거야, 내일 아니면 모레. 내가 이 일을 우리 아버지한테 말할 수 없다는 건 이해하겠지」 「그건 나하고 아 무 상관없는 일이야. 너한테 손해 끼칠 생각 없다고 했잖아. 난 내 몫의 돈을 오늘 오전 중에 가질 수도 있어, 너도 알겠지, 난 가난하거든. 넌 멋진 옷을 입고 있고, 나보다는 점심으로 뭔가 더 좋은 걸 먹겠지. 하지만 난 아무 말 않겠어. 조금 기다려주겠다는 거야. 모레 휘파람을 불지, 오후에. 그땐 제대로 가져와야 해. 내 휘파람 소리 알지?」 그는 내 앞에서 휘파람을 불어 보였다. 여러 번 들었던 소리였다. 나는 말했다. 「응, 알고 있어」 나를 남겨두고 그 애는 갔다. 내가 자기와는 상관없는 사람이라는 듯이. 그것은 우리들 사이의 거래였을 뿐, 더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크로머의 휘파람 소리가 갑자기 다시 들린다면, 오늘일지라도 나는 놀라리라고 생각한다. 그 때부터 자주 그 소리를 들었으며 지금도 그 소리가 자꾸 들리는 것 같다. 나를 예속시킨, 이제 나의 운명이 되어버린 이 휘파람 소리가 뚫고 들어가지 않는 장소도, 놀이도, 일도, 생각도 없었다. 단풍이 곱던 어느 온화한 가을날 나는 내가 아주 좋아한 우리 집 작은 화단에 있곤 했다. 특별한 충동이 나로 하여금, 어린 시절의 소년들의 놀이를 다시 해보게 했다. 나는 얼마만큼은 나보다 어린, 아직 선하고 자유롭고 죄 없고 안정감 있는 소년의 역을 했다. 그러나 그 한가운데로, 늘 예상하고 있음에도 늘 놀라게 하는 크로머의 휘파람 소리가 그 어딘가로부터 울려와, 줄을 탁 끊었고, 상상들을 짓부수었다. 그러면 나는 가야 했다. 나쁘고 추한 곳들로 나의 고문자를 따라 가야 했다. 그에게 자초지종을 털어놓아야 했고, 돈 때문에 경고를 받아야 했다. 그 모든 것이 불 과 몇 주일 지속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것이 여러 해처럼, 하나의 영원처럼 느껴졌다. 내게 돈이 있는 적은 드물었다. 기껏해야 오 페니히짜리 하나 혹은 십 페니히 하나가 있었다. 리나가 장바구니를 놔두면 부엌 식탁에서 훔친 것이었다. 번번히 나는 크로머로부터 욕을 먹었다. 내게로 경멸이 퍼부어졌다. 그를 기만하고 그의 당당한 권리를 유보하려 한 것이 나였고, 그의 몫을 가로챈 것이 나였고, 그를 불행하게 만든 것이 나였다. 괴로움이 그렇게 심장 가까이로 치솟은 적은 살면서 거의 없었다. 더 큰 절망, 더 큰 예속을 느껴본 적은 없었다.

저금통은 장난감 돈으로 채워 다시 제자리에 놓아두었는데 아무도 그것에 대하여 묻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날이든 발각될 수 있는 일이었다. 나는 자주 크로머의 거친 휘파람 소리 이상으로 어머니를 무서워했다. 어머니께서 나직이 내게로 다가서실 때면, 저금통에 대해서 물어보시기 위하여 오신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내가 여러 번 돈을 못 구한 채 내 악마에게 갔기 때문에, 그는 나를 다른 식으로 괴롭히고 이용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를 위해 일해야만 했다. 그 애는 자기 아버지 심부름을 해야 했는데 그 심부름을 그 애를 대신하여 내가 해야했다. 혹은 그 애는 나에게 무언가 힘든 것을 하도록 시 켰다. 십 분 동안 외발뛰기를 하게 한다든지 지나가는 사람 저고리에 종이 쪽지를 붙이게 한다든지. 여러 날 밤 꿈속에서도 이 괴로움은 계속되어 나는 악몽의 땀에 흠뻑 젖어 누워 있곤 했다.

한동안 아팠다. 자주 토했고, 쉽게 오한이 났으며, 밤에는 땀과 열에 젖어 누워 있었다. 어머니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느끼셨는지 많은 관심을 보이셨는데 그것이 나를 괴롭혔다. 어머니의 관심에 신뢰로 부응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번은 저녁에. 내가 이미 잠자리에 들었을 때, 어머니가 초콜릿 하나를 가져오셨다. 저녁에, 그 날 하루를 착하게 보냈으면 잘 자라고 상으로 그런 위로의 주전부리를 받곤 하던 어린 시절을 상기시키는 일이었다. 이제 어머니가 거기 서서 나에게 초콜릿 조각을 내밀고 계셨다. 나는 어찌 나 괴로운지, 다만 고개를 가로 저었을 뿐이었다. 어머니는, 뭐가 잘못되었느냐고 물으시며 내 머리를 쓰다듬으셨다. 나는 간신히 「아니오! 아니오! 아무것도 먹지 않겠어요!」라고 할 수 있었을 뿐이다. 어머니는 초콜릿을 침대머리 탁자에 놓고 가셨다. 다음날 어머니께서 그 일을 두고 캐물으려 하셨을 때 나는 거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척했다. 한번은 의사를 데려오셨다. 의사는 나를 진찰하고 아침에 차가운 물로 몸을 씻도록 처방을 내렸다.

그 시절 내 상태는 일종의 착란이었다. 우리 집안의 정돈된 평화의 한가운데서 나는 소심하게, 그리고 고통받으며 유령처럼 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생활에 관여하지 않았다. 잠깐이라도 자신을 잊는 일은 드물었다. 자주 흥분하여 해명을 요구하시는 아버지에게는 마음을 닫고 냉정했다.

(중략)

내가 그린 꿈 속의 새는 여행을 떠나서 내 친구를 찾아냈다. 아주 희한한 경로를 통해서 나는 답장을 받았다.

우리 학급의 내 자리에서 수업시간 사이의 쉬는 시간이 끝났을 때, 나는 내 책 속에 꽂혀 있는 종이쪽지를 발견했다. 그것은 가끔 학생들이 수업 중에 몰래 쪽지를 전할 때에 하는 식 그대로 접혀 있었다. 누가 이런 종이쪽지를 내게 보냈을까 하고 나는 의아하게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그 때까지 어떤 동급생과도 그런 교제를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이 학교에서 흔히 하는, 무슨 장난에 끼라는 내용이려니 생각했다. 나는 결코 그런 일에는 관여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종이쪽지를 읽지도 않고 책 앞쪽에다 꽂아두었다. 비로소 수업 중에야 우연히 다시 그것을 손에 들게 되었다.

나는 그 종이를 만지작거리다가 무심코 펼쳐 보고 그 속에 몇 마디 말이 적혀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것을 훑어보고 나는 어떤 말에 주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깜짝 놀라 그것을 읽어 보았다. 읽는 동안에 내 심장은 무서운 한기를 만난 듯 운명 앞에서 오싹하고 움츠러들었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나는 여러 번 그 글을 읽은 다음에 깊은 명상에 잠겼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것은 데미안의 회답이었다. 나와 그를 빼고는 아무도 그 새에 관해서 아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그는 내 그림을 받았던 것이다. 그는 그 뜻을 이해하고 나에게 해석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 것일까? 그리고―무엇보다도 그것이 나를 괴롭혔지만―아프락사스라는 것의 정체는 무엇일까? 나는 한 번도 그런 말을 들어본 적도 없고 읽은 적도 없었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수업에는 조금도 귀를 기울이지 못하고 시간이 끝났다. 그날 오전 중의 마지막 시간인 다음 시간이 시작되었다. 그 시간은 젊은 보조 교사의 수업이었다. 그는 갓 대학을 나왔고 매우 젊어서 우리들 앞에서 쓸데없이 체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미 우리들의 호감을 사고 있었다.

우리는 폴렌스 박사의 지도로 헤로도토스를 읽고 있었다. 이 강독은 내가 흥미를 가질 수 있는 몇 개 안 되는 학과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그 때는 내 마음이 그 곳에 있질 않았다. 나는 기계적으로 책을 펼쳐 놓았을 뿐이었다. 선생님이 해석하는 것을 따라가지도 않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런데 나는 데미안이 그 옛날 종교 시간에 내게 말했던 것이 얼마나 옳았던 논지인가를 여러 번의 경험에 의해 알고 있었다. 사람이 아주 강렬한 희망을 가지면 그것은 이루어진다고 했던 것이다. 만일 수업 중에 내가 매우 강하게 나 자신의 생각에 몰두하면 선생은 나를 가만둘 것으로 안심해도 좋았다. 그런데 머릿속이 산란하거나 혹은 졸음이 올 때면 갑자기 선생은 내 옆에 와서 있곤 했다. 그것은 나도 이미 당해본 일이었다. 그러나 진실로 생각에 몰두하고 있으면 안전했다. 그리고 나는 이미 지긋이 눈을 들여다보는 실험도 해보았고 또 그것이 믿을 만하다는 것도 알았다. 그것은 옛날 데미안과 사귀던 시절에는 성공을 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눈초리와 생각만으로도 아주 숱한 일을 해낼 수 있다는 것을 종종 느낄 수가 있었다.

지금도 나는 역시 그렇게 하고 앉아 있었고, 학교와 헤로도토스는 멀리 떨어져 있었다. 한데 그 순간 뜻밖에도 선생님의 말소리가 내 의식을 번갯불처럼 내리치는 바람에 나는 깜짝 놀라 정신을 가다듬었다. 나는 그의 말소리를 들었다. 그는 바로 내 곁에 바싹 붙어 서 있었다. 나는 그가 내 이름을 불렀거니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나는 후유하고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나는 다시 그의 말소리를 들었다. 큰 소리로 아프락사스라고 했던 것이다. 그 첫머리를 듣지 못했지만 폴렌스 박사는 설명을 계속하고 있었다.

"우리는 고대의 그 교파의 신비적인 단체의 논법을 합리주의적인 관찰의 입장에서 생각하듯이 그렇게 소박하게 상상해서는 안 된다. 우리들이 가진 과학과 같은 것은 고대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 대신 대단히 고도로 발전한 철학적 신비적인 진리에 대한 연구가 성행했다. 거기서부터 부분적으로는 분명히 사기와 범죄 행위로 나가기까지 한 마술과 유희가 발생했다. 그러나 그 마술 역시 고귀한 내력과 깊은 사상을 지니고 있었다. 내가 앞에서 예를 든 아프락사스의 설도 그렇다. 이 이름은 희랍의 주문과 관계가 있다고 말해지고 있는데, 오늘날에도 대개는 야만 민족이 가지고 있는 어떤 악마의 이름이라고 왕왕 생각되고 있다. 그러나 아프락사스는 훨씬 더 많은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우리는 이 이름을 대략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을 결합시키는 상징적 관계를 지닌 일종의 신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몸집이 작은 학자는 자세하고도 열성적으로 얘기를 계속했다.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이고 있는 학생은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그 이름이 그 이상 나오지 않게 되자 내 주의력도 다시 나 자신의 내부로 되돌아가 버렸다.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을 결합시킨다고 한 말의 여운이 아직도 내게서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여기서 나는 생각을 연관시킬 수가 있었다. 그것은 우리들의 우정의 마지막 시절에 데미안과 대화를 한 후로는 내게 더없이 친해진 것이었다. 우리는 틀림없이 우리가 받드는 한 신을 소유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 신은 제멋대로, 갈라진 세계의 절반만을 나타내고 있을 뿐이다(그것이 공식적이고 허용되어 있는 '밝은 세계'였다.), 그러나 우리는 세계를 전체로서 받들어야만 할 것이므로, 따라서 악마까지도 겸한 신을 갖거나 신에게 예배하는 동시에 악마에게도 예배를 드려야 할 것이다. 대강 이런 얘기를 데미안은 했었다. 그런데 아프락사스가 바로 그런 신인 동시에 악마적인 존재였던 것이다.

(중략)

8.

끝의 시작

나는 여름 학기에도 계속해서 H에 머물러 있을 수 있었다. 우리들은 집안에 있지 않고 거의 언제나 강가의 정원에 있었다. 권투 시합에서 보기 좋게 진 일본인은 가고 없었으며, 톨스토이 숭배자도 가버렸다. 데미안은 말을 구해 매일 끈기있게 승마를 했다. 나는 자주 그의 어머니와 단 둘이 있었다. 가끔 내 생활의 평화스러움에 대해서 의아한 느낌을 가졌다.

나는 혼자 있는 것, 체념을 연습하는 것, 고뇌와 씨름하는 것이 그처럼 오랫동안 습관이 되어 있었으므로 H에서 보낸 몇 달 동안, 나에게는 마치 안락하게, 매혹되어 아름답고 유쾌한 감정 속에서만 살 수 있었던 새롭고 높은 공나라같이 생각된다. 나는 그것이 우리가 생각하고 있었던 새롭고 높은 공동체의 전주(前奏)라는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행복 위에는 자꾸만 깊은 비애가 내리덮였다. 왜냐하면 나는 이 상태가 오래 계속되지 못할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충족된 쾌감 속에서 살도록 나는 태어나 있지 않았다. 나에게는 고통과 추구가 필요했다. 언젠가 이 아름다운 사랑의 환상으로부터 깨어나서 다시 혼자 - 다른 사람들의 차가운 세계 속에 완전히 혼자 서게 된다는 것을 느꼈다. 그곳에는 고독과 투쟁만이 있을 뿐 평화도 공동생활도 없을 것이다.

(중략)

드디어 종말이다. 사태는 급박하게 진전되었다. 곧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은회색 외투를 입은 군복차림의 이상스럽게 낯선 데미안도 떠나갔다. 나는 그의 어머니를 집에 바래다 주었다. 얼마 안 있어서 나도 그 여자와 작별했다. 그 여자는 내 입술에 키스를 하고, 나를 잠시 동안 껴안아 주었다. 그 여자의 커다란 두 눈은 나의 눈 가까이에서 불타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형제가 된 것 같았다. 그들은 조국과 명예를 생각했으나 그것은 사실 우리들 모두가 잡시 동안 드러나 '운명'의 모습을 본 것에 지나지 않았다. 젊은이들이 병사에서 나와 기차를 탔다. 많은 사람들의 얼굴에서 나는 표적을 우리의 표적이 아니라 사랑과 죽음을 뜻하는 아름답고 권위있는 표적을 보았다.

나도 전에 본 일이 없는 사람들로부터 포옹을 받았다. 나는 그것을 이해했고 기꺼이 응했다. 그들이 그런 행위를 하는 것은 운명의 의지가 아니라 도취에서였다. 그러나 그 도취는 성스러웠다. 그들 모두가 이 짧고 절박한 눈길을 운명의 눈 속에 보내고 있었기 때문에 그 도취는 우리를 감동시킨 것이다.

내가 전쟁터에 갔을 때에는 그럭저럭 겨울이었다. 나는 처음에 끊임없는 사격 때문에 흥분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에 환멸을 느꼈다. 전에는 왜인간이 어떤 이상을 위해서 살지 못하는가를 많이 생각해 보았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많은 사람들, 아니 모든 사람들이 이상을 위해서 죽을 수 있음을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이고, 자유스럽고, 스스로 선택한 이상이어서는 안되고, 공동적으로 받아들여질 이상이어야 했다.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서 나는 내가 인간을 과소 평가했음을 알았다. 임무와 공동의 위험이 그처럼 그들을 단일화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살아 있는 사람과 죽어 가는 사람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운명의 의지에 가까이 가는 것을 보았다. 많은 사람들,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공격 때뿐이 아니라 어느 때에도 약간 광기를 띤 굳고도 먼 시선을 갖고 있었다. 그 시선은 목적을 모른 채 끔직한 것에의 완전한 헌신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들이 무엇을 믿고 무엇을 생각하든지 간에 그들은 각오가 되어 있었고 유용했으며, 그들로부터 미래가 형성되고 있었다. 세계가 전쟁과 영웅주의와 명예와 기타 낡아빠진 이상을 향해 응결되어 있으면 있을수록, 또 가상적인 인류와도 같은 무엇이었다. 나는 많은 사람을 볼 수 있었고, 그 중 많은 사람들이 내 옆에서 죽어갔다. 그들은 증오와 분노와 살해와 파괴가 그들 자신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감각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대상도 목적과 마찬가지로 완전히 우연한 것이었다. 가장 사나운 본래의 감정조차도 적에게로 돌려지지 않았다. 그 피비린내나는 작업은 새로운 탄생을 위해서 광분하고 죽이고 파괴하는 분열된 영혼과 내부의 발로에 불과했다. 거대한 새가 알에서 뛰쳐나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알은 세계였다. 세계는 파괴되어야만 했다.

우리가 점령했던 어는 농가 앞에서 나는 이른 봄바람에 보초를 섰다. 맥빠진 바람이 불규칙하게 멋대로 불었으며, 놀란 플랑드르의 하늘에 뭉게구름이 흐르고 있었다. 구름 뒤의 어딘가에는 달이 숨어 있었다. 나는 하루종일 불안했었다. 무엇인지 모를 어떤 근심이 나를 방해했었다. 지금 나의 어두운 초소에서 나는 여태까지의 나의 생활과 에바 부인, 그리고 데미안을 절실히 생각했다. 나는 포플라나무에 기대서서 움직이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살며시 꿈틀거리는 밝은 하늘이 곧 커다랗게 솟아나는 일련의 그림으로 되었다. 나는 맥박이 이상하게 가늘어지고 비바람에 대해서 무감각해진 나의 피부와 번뜩이는 내면의 말게 깬 의식에서 지도자가 내 근처에 있다는 것을 느꼈다. 구름 속에서는 커다란 도시가 보였다. 그 도시에서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 넓은 지역으로 흩어져 갔다. 그들의 한복판에 거대한 신의 모습이 반짝거리는 별을 머리에 달고 산처럼 크게 에바 부인의 표정을 담고 걸어왔다. 사람들은 그 여자와 모습 속으로, 마치 동국 속으로 사라지듯 들어가서 없어져 버렸다. 여신은 땅에 몸을 구부렸다. 그 여자의 이마 위의 점이 밝은 빛을 발했다. 어떤 꿈이 그 여자를 억누르는 것 같았다. 그 여자는 눈을 감았다. 커다란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갑자기 그 여자는 소리를 질렀다. 그 여자의 이마로부터는 수천 개의 빛나는 별이 쏟아져 나와 아름다운 곡선과 반원을 그리면서 검은 하늘을 날았다.

별 중에서 한 개가 밝은 음향을 가지고 바로 나에게로 날아왔다. 나를 찾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소리를 내면서 수천 개의 불꽃으로 갈라져 나를 끌어당기더니 다시 땅바닥에 내던져졌다. 내 위에서 세계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무너졌다.

나는 포플라나무 옆에서 흙에 파묻힌 채 많은 상처를 입고 발견되었다.

나는 지하실에 누워 있었다. 총탄이 내 위를 날았다. 나는 차에 실려 텅 빈 들판 위를 덜그럭거리면서 갔다. 거의 언제나 자고 있지 않으면 의식을 잃고 있었다. 그러나 깊이 자면 잘수록 나는 무엇이 나를 끌어당기고 있다는 것, 나를 지배하고 있는 어떤 힘을 따라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마구간의 밀짚 위에 누워 있었다. 마구간 속에 어두웠다. 누군가가 내 손을 밟았다. 나의 내부는 더 멀리 갈 것을 원했다. 그것은 나를 보다 강하게 끌고 갔다. 나는 다시 차에 실렸다가 나중에는 들것인지 들것 대용품인지 사다리에 실려서 갔다. 나는 점점 강하게 어디로인지 갈 것을 명령받은 것같이 느꼈고, 마침내 그곳에 가 닿을 욕망 이외에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았다.

드디어 목적지에 와 닿았다. 밤이었다. 나는 완전히 의식이 깨어 있었고, 나의 내부에서 인력과 충만을 강하게 느꼈다. 나는 어떤 방의 바닥에 뉘어져 있었다. 내가 불려온 것이 바로 여기라는 것을 느꼈다. 주위를 돌아보았다. 침대 바로 옆에는 또 한 개의 침대가 놓여 있었는데 그 침대 위에 누가 있었다. 그는 고개를 앞으로 내밀고 나를 보았다. 그는 이마에 표적을 갖고 있었다. 막스 데미안이었다.

나는 말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그도 말을 못했다. 또는 안했을는 지도 모른다. 그는 다만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 벽에 걸린 등불의 빛이 비쳐 흘렸다. 그는 나에게 미소를 보냈다.

무한히 긴 시간 동안 그는 계속해서 내 눈속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천천히 나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다. 마침내 우리의 얼굴은 거의 부딪칠 만큼 가까워졌다.

"싱클레어 !"라고 그는 속삭였다.

나는 그에게 그의 말을 알아듣는다는 표시로 눈짓을 했다. "꼬마!"라고 그는 미소지으면서 말했다. 그의 입은 내 입 바로 옆에 있었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을 계속했다. "아직도 프란츠 클로머가 생각나니?"

나는 눈짓으로 그에게 대답을 했으며 미소지을 만한 여유도 있었다.

"알겠니, 싱클레어! 내 말을 잘 들어! 나는 가야만 한다. 너도 언젠가 다시 내가 필요하게 될 거야. 클로머에 대해서, 또는 다른 일로. 그때는 이미 네가 나를 불러도 이제까지처럼 말을 타거나 기차를 타고 그렇게 와줄 수는 없어. 그때엔 너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해 ! 그러면 네 마음속에 내가 있다는 걸 알게 될 거야. 알겠니? 그리고 또 한 가지! 에바 부인의 부탁인데, 나한테 키스해 주면서, 언제든지 싱클레어가 불행하게 되거든 그녀가 해주는 거라면서 이 키스를 해주라고 했어.... 눈을 감아, 싱클레어!"

나는 시키는 대로 눈을 감고, 데미안이 내 입술- 전혀 멎을 것 같지 않은 피가 줄곧 흐르는 내 입술-에 가볍게 키스하는 것을 느끼며 곧 잠들어 버렸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났다, 나는 붕대를 갈아야 했다. 가까스로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얼른 옆자리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낮선 사람이 누워 있었다.

붕대를 감는다는 것은 고통스러웠다. 이후 나에게 일어난 일들도 모두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때때로 나는 열쇠를 발견하고 나 자신의 어두운 거울 속에 운명의 모습이 어른거리는 것을 들여다본다. 그러면 그 검은 거울 위에 나 자신의 모습이, 그-이제까지 내 친구이며 길잡이였던 데미안-를 닮은 나 자신의 모습이 보이는 것이다.(출처 : 한국도서출판 중앙회, 박석일 옮김)


요점 정리

작자 :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홍경호 옮김/이기석 옮김/송영택 옮김

갈래 : 장편 소설. 성장 소설. 교양 소설

성격 : 자전적, 심리주의적, 종교적, 상징적, 신비주의적, 내면 탐구적

경향 : 헤세의 작품 경향은 전후기로 구분할 수 있는데, 전기에서는 '페터카 멘찐트','사랑의 3중주', 등 서정이 넘치는 작품을 썼다. 그러나 1차 세계 대전을 겪은 후 그는 자아 탐구와 더불어 현대 문명의 준엄한 비판자가 되었다. 이 두 작품의 분기점을 이루는 문제작이 '데미안'이다.

문체 : 간결체

배경 : 시간(제1차 세계 대전 전후). 공간(독일)

시점 : 1인칭 주인공 시점

제재 : 나의 성장 과정

주제 : 자기 발전을 통하여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하는 과정

구성 : 서장과 8장으로 되어 있다. 1-2장에서는 소년 시절의 이야기를 소박하고 감상적으로 그려 먼 훗날의 인생의 흐름을 함축성 있게 암시하고 있고, 3장에서부터 독심술의 꿈의 해석이 수시로 인용되고 신비로운 환상적 여운이 전편에 흐른다.

표현 : 작자의 젊은 시절의 초상이라 할만큼 영혼의 성숙 과정을 자전적으로 그려냈다. 신비주의적 동양 정신이 담겨 있다.

줄거리 : 싱클레어는 신앙이 깊고 청결하며 예의 바른 부모의 세계와 하녀·장인(匠人)들의 입을 통해 듣는 부랑자·주정뱅이·강도 등의 더러운 악의 세계가 자기의 내면에서 대립되고 있는 것을 느낀다. 바로 이때, 데미안이 건너 준 메시지를 받고 자기 의식의 눈을 뜨게 된다. 싱클레어는 자기 운명을 개척하고 자신을 찾기 위해 유럽 문화를 철저하게 비판한다.

전체 줄거리 : 싱클레어는 신앙과 지성이 조화된 분위기 속에서 부모님아래에서 성장했다. 그의 가정은 말 그대로 밝은 세계이며 선의 세계이다. 또한 그 주위에 있는 아주 어두운 악의 세계를 발견하게 된다. 싱클레어의 어린 시절 그는 동네 놀이 집단에 끼기 위해 도둑질을 했다는 허풍을 프란츠 크로머에게 떨게된다. 어두운 세계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어두운 생활을 하던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만나게 된다. 데미안을 통해서 카인과 아벨이라는 새로운 해석으로 선과 악을 생각하게 되고, 데미안은 크로머를 만나 싱클레어를 옭아맨 올가미를 풀어준다.

싱클레어는 자기 자신 속의 두 세계의 갈등으로 즉, 금지된 것과 허락된 것의 사이에서 심한 갈등을 겪고 있다. 베크는 그런 싱클레어를 술집으로 유혹한다. 뒷골목의 어두운 모습, 시궁창의 풍경은 금지된 구역에 들어서게 되고 자기 소외와 자기 부정에 빠져 사회와 이사에 대해 아예 부정해 버린다. 그는 베크와 함께 카인과 아벨 신화의 이중성, 성의 금욕주의, 연애감정에 대해 생각한다. 다시 데미안을 만나고 데미안은 싱클레어의 타락한 모습에 우려를 나타낸다. 싱클레어는 정신이 성을 갈망하는 육체를 통제하지 못하여 괴로워한다.

싱클레어는 베아트리체를 만나면서 자기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 소용돌이치는 마음에 따라 그런 곳에서 벗어나게 된다. 싱클레어가 그녀의 초상화를 그린다. 그가 그린 초상화는 데미안을 닮아가고 있었다. 베아트리체가 아닌 남성적이면서 여성적인 모습으로 변하여 마침내 데미안의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 안에서 어느새 데미안을 그리워하고 있다.

싱클레어는 지구에서 날아오르려고 하는 새를 그려 데미안에게 보낸다. 그리고 데미안으로부터 편지 한 통이 도착한다. 더 나은 세계를 향해 날아가는 새, 먼저의 세계를 파괴하고 나온 새, 그리고 신 아프락사스에 관한 이야기이다. 아프락사스는 빛과 어두움의 공존, 선신이면서 동시에 악신이라는 것을 싱클레어는 알게 된다. 그는 데미안의 편지를 통해서 자기 내부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오르간 소리에 이끌려 싱클레어가 어느 교회로 들어간다. 그 곳에서 그는 연주자 피스토리우스를 만나서 아프락사스에 대한 공감을 느끼고, 그에게 아프락사스에 대한 가르침도 받게 된다. 싱클레어는 정신을 이끌어 줄 지도자와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 데미안을 길에서 다시 만난다. 데미안은 그의 어머니와 함께 있다. 싱클레어와 데미안의 재회. 싱클레어는 데미안의 어머니 에바 부인이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고 있는 여인상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녀는 꿈, 운명, 탄생의 괴로움을 알려 준다. 싱클레어는 그녀에게 정신적인 사랑과 육체적인 사랑을 같이 느끼게 되고 정신적인 사랑으로 생각한다.

그 때 전쟁이 터지고 데미안과 싱클레어는 함께 참전한다. 싱클레어는 부상을 당하고 야전병원으로 옮겨지게 된다. 데미안과 싱클레어가 나란히 누워 있다. 데미안은 만약 언젠가 자신이 필요하게 되면 싱클레어 스스로의 내면에 귀를 기울이라고 말하고 어머니의 키스를 그에게 전한다.

다음날 아침 데미안은 옆에 없다. 싱클레어는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 친구이며 지도자인 데미안과 꼭 같은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본다.

등장 인물

싱클레어 : 독심술(讀心術)에 빠져 인간의 영혼에 대해 회의를 품고 방황하는 소년

막스 데미안 : 에바 부인의 아들로 개성이 강하고 성숙하여 싱클레어에게 큰 영향을 주는 인물.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는 순수 명령을 따라야 한다는 철학을 가진다.

프란츠 크로마 : 양복점 아들로 성격이 거칠고 악의 상징 같은 존재

크라우어 : 싱클레어의 동급생으로 섹스와 금욕에 고민하다가 자살 미수까지 저지르는 인물

내용 연구

내가 그린 꿈 속의 새는 ∼ 친구를 찾아 냈다. : 꿈 속에서 준 새의 그림을 데미안에게 전해 주는 과정을 새가 여행을 떠난 것으로 표현하였다. 신비주의적인 경향을 나타내는 구절이다.

읽는 동안에 내 심장은 ∼ 오싹하게 움츠러들었다. : 읽은 내용이 자신의 운명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표현이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 새는 새로운 세계를 의미하고, 알은 갇혀 있던 기존의 세계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 않으면 안 된다. :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려는 자는 자기가 전에 속했던 세계를 비판하고 넘어서야 한다는 의미다.

나는 한 번도 그런 말을 들어본 적도 없고 읽은 적도 없었다. : 전대미문(前代未聞)

아프락사스 : 보다가 진보가 이루어진 세계로 이상 세계를 의미

헤로도투스를 읽고 있었다. : 헤로도투스(Herodotus)는 B.C. 484∼425년에 살았던 그리스의 사학자(史學者). 이 구절의 뜻은 헤로도투스의 저작을 읽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수사법은 대유법이다.

눈초리와 생각만으로도 - 느낄 수가 있었다. : 자신의 생각에 몰두하는 일을 의미

선생님의 말소리가 - 내리치는 바람에 : 스스로의 생각에 몰두하던 상황에서 선생님의 말씀이 갑자기 들려 왔다. 이것은 몰두하고 있던 대상 - 아프락사스 - 에 대한 일치 때문이다.

내 주의력도 다시 나 자신의 내부로 되돌아가 버렸다. : 주인공 싱클레어가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나타낸 구절이다. 헤세 작품의 주인공들의 이와 같은 내면으로의 침잠은 무의식의 세계를 말한다. 이런 무의식의 세계는 심리학의 한 분야인 정신 분석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아프락사스가 바로 그런 신인 동시에 악마적인 존재였던 것이다. :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을 포괄하는 이 신은 끊임 없는 변화와 자연의 반항 속에서 창조적이고 지속적인 세계의 원칙으로서 군림하는 전우주적 존재로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을 결합하는 상징적인 신을 의미하고 있다.

이해와 감상

주인공 에밀 싱클레어는 내부에 두 개의 상반되는 세계를 가지고 그 대립 때문에 괴로워한다. 그것은 선과 악의 세계이다. 신앙심이 깊고 청결하며 예의 바른 부모로부터 영향받은 선의 세계와 하녀·장인들의 입을 통해 듣는 부랑자·주정뱅이·강도 등의 악의 세계가 자기의 내면에서 대립되고 있는 것을 느낀다.

내면에 상반되는 두 개의 혼을 가지고 있는 싱클레어는 위태로운 방황을 계속하지만, 데미안으로부터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메시지를 받고 자기 인식의 눈을 뜨게 된다. 내면에서 울려 퍼지는 운명의 목소리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싱클레어는 자기 운명을 개척하고 자기 발견의 길을 걷기 위해 기성의 모든 것, 혼을 잃은 유럽의 문화를 철저하게 비판해야만 했다.

이 소설은 세계 제1차 대전이 끝난 후에 정신적인 폐허 속에서 헤매던 젊은이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특히 싱클레어의 인식의 과정을 통해 물질 문명만을 추구하다가 정신의 공허화를 초래한 유럽의 현실을 비판하고 있으며, 인간 자신의 내면에 귀를 기울일 것을 강조하고 있다.(출처 : 김태준 외 3인저 민문고 문학교과서)

감상2

이 작품은 '데미안, 어느 소년 시절의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발표된 장편 소설이다. 초기에 서정적 애수가 넘치는 작품을 쓰던 헤세는 후기로 들어서면서 점차 자아의 내면을 탐구하고 현대 문명을 바판하는 작품들을 많이 쓰게 된다.

'데미안'은 이 경향들의 과도기에 속하는 작품으로서 내면에 상반되는 두 세계를 지닌 주인공 싱클레어가 그것들의 대립으로 번민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것은 빛과 어둠의 대립이며 선과 악의 대립이었던 것이다. 하나의 세계는 종교적이며 절제심이 있는 부모로부터 생성되는 세계이며, 또 하나는 하녀나 장인과 같은 사람들로부터 전해 듣는 불량배, 주정뱅이, 강도 등이 형성하는 세계이다.

 

싱클레어는 이 두 세계가 외부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 속에서도 대립하는 것 때문에 위태로운 방황을 계속하게 된다. 하지만 급우인 데미안의 도움으로 자기 발견의 길을 찾아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게 된다. 좋은 집안의 출신인 싱클레어는 불량배인 클레머의 유혹으로 어둠의 세계를 방황한다. 그는 신앙심이 깊고 절도가 있으며 예절이 바른 부모가 상징하는 빛의 세계와 클레머 같은 불량배, 주정뱅이, 강도 등이 상징하는 어둠의 세계가 자기의 내면에서 갈등하고 있는 것을 느끼고 그 일로 정신적인 방황을 한다.

이 때, 같은 반의 친구인 데미안이라는 신비한 소년이 메시지를 건네 준다. 싱클레어는 데미안이 준 쪽지를 보고 내면의 눈을 뜨며 자기를 발견하게 된다. 전쟁이 터지고 데미안은 전쟁터에 나가 전사한다. 싱클레어는 데미안의 전사 통지서를 받은 이후 자기의 과거 세계를 비판하고 새로운 세계를 구축해 나간다.1차 세계 대전 이후의 정신적 황폐 속에서 방황하던 젊은이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고, 유럽 문화의 공허성을 비판하고 인간의 내면에 관심을 쏟을 수 있게 해 준 작품이다.

감상3

작품 속의 화자로 등장하는 '나', 싱클레어는 양가 출신의 소년으로 불량배 클레머의 유혹에 빠져 방황을 한다. 즉, 싱클레어는 부모가 상징하는 빛의 세계와 불량배가 상징하는 어둠의 세계 속에서 헤맨다. 이 때 같은 반 친구인 데미안이라는 성숙하고 신비한 소년이 나타나 싱클레어를 구한다. 그 후 싱클레어는 데미안에 의하여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유럽 문화와 기독교 사상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된다. 세계 대전의 터지자 데미안은 전쟁터에 나가 전사하고, 데미안의 전사 통지서를 받은 싱클레어는 자신의 내부에서 데미안의 모습을 발견하면서 어른이 된다.

주인공 싱클레어의 회상의 형식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두 가지 세계의 대립을 견디지 못하고 괴로워하던 한 소년이 데미안이라는 한 안내자의 도움으로 비로소 자기 인식에 도달한다는 일종의 성장 소설이다. 두 가지 세계란 선과 악의 세계를 말하는 것으로 신앙심이 깊고 청결하며 예의 바른 부모로부터 영향 받은 신의 세계와 하녀, 장인들의 입을 통해 듣는 부랑자, 주정뱅이, 강도 등의 악의 세계가 자기의 내면에서 대립되고 있는 것을 느낀다. 내면에 상반되는 두 개의 혼을 가지고 있는 싱클레어는 위태로운 방황을 계속하지만, 데미안으로부터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메시지를 받고 자기 인식의 눈을 뜨게 된다. 싱클레어는 자기 운명을 개척하고 자기 발견의 길을 걷기 위해 기성의 모든 것, 혼을 잃은 유럽의 문화를 철저하게 비판한다. 이 소설은 세계 제1차 대전의 끝난 후에 정신적인 폐허 속에서 헤매던 젊은이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특히 싱클레어의 인식의 과정을 통해 물질 문명만을 추구하다가 정신의 공허화를 초래한 유럽의 현실을 비판하고 있으며, 인간의 자신의 내면에 귀를 기울일 것을 강조하고 있다.

성장 소설

교양 소설, 발전 소설이라고도 한다. 젊은 주인공이 인간적, 문화적 환경의 영향을 받고 또 그 환경과 싸우면서 자기를 완성시켜 나가는 성장 과정을 그린 소설을 말한다. 주인공은 노력과 방황을 통하여 작자 혹은 그 시대의 이상상(理想像)에 적합한 어떤 과정에 도달한다. 이런 류의 작품은 가장 먼저 독일에서 발달했다.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 시대'는 가장 전형적인 성장 소설이다. 또 켈러의 '푸른 옷의 하인리히', 토마스 만의 '마의 산', 플로베르의 '감성 교육' 등이 유명하다.

성장 소설은 주인공이 자기와 외계와의 관계를 서서히 깨달아 자기를 확립해 온 과정을 그린 것이지만 특히 주인공이 예술가인 경우에는 예술가 소설이라고도 한다. 로망 롤랑의 '장 크리스토프',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등이 대표적이다.

아프락사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마술을 부리는 악마의 이름. 이는 그노스틱파(영지주의파)의 종교관에서 유래한 말이며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을 포괄하는 이 신은 끊임없는 변화와 자연의 반항 속에서 창조적이고 지속적인 세계 원칙으로서 군림하는 전우주적(全宇宙的)존재로 설명된다. 이 소설에서의 아프락사스는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을 결합하는 상징적인 신을 의미한다.

영지주의(靈智主義/Gnosticism)

2세기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두드러졌던 철학적·종교적 운동으로 '영지주의'라는 명칭은 그리스어 '그노스티코스'('그노시스', 즉 '비밀스런 지식'을 소유한 사람)에서 유래했다. 학자들은 영지주의 세계관의 기원을 이란의 종교적 이원론, 중기 플라톤 철학자들의 알레고리적 이원론, 특정 유대교 신비주의자들의 묵시적 사상에서 찾는다. 최초의 영지주의자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시몬 마구스이다. 그는 악이 신성의 내적 분열에서 생겼다는 영지주의의 근본 개념을 소개한 1세기 유대교 이단자였다.

영지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사람의 무의식적 자아는 신성과 동일한 본질을 가지고 있지만, 불행히도 타락했기 때문에 진정한 본질과 완전히 동떨어진 세상에 던져졌다. 사람은 위로부터 오는 계시를 통해서 자신의 기원·본질·초월적인 운명을 알게 된다. 영지주의적 계시는 이성의 힘을 가지고서는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철학적 계몽과 구별되어야 한다. 또한 그리스도교 계시와도 구분되어야 한다. 영지주의적 계시는 역사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으며, 성서에 의해서 전승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자아의 신비에 대한 직관이다. 영지주의자들에 따르면 하느님은 이름이나 설명을 초월하는 심연과 침묵이고, 절대자이며, '플레로마', 즉 빛의 영역을 형성하는 선한 영들의 원천이다. 2세기 영지주의 분파들은 히브리와 그리스도교 종교 저서들을 사용하면서도, 영지주의의 의미들을 그것들과 구분하기 위해 알레고리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영지주의 집단은 학파를 구성하여 권위 있는 가르침들을 전수하고, 해석하며 비밀을 보존한 듯하다. 의식도 분파에 따라 달랐다.

이니시에이션 소설(initiation story)

다른 말로는 성장소설(成長小說), 통과제의 소설이라고 하고 주인공의 육체적, 정신적 성장 과정을 형상화한 소설을 말한다. 소설의 발단은 대체로 주인공의 지적(의식적) 미성숙, 사회적 지위의 미천함, 애정의 결핍 등으로 인한 증세가 갈등의 양상을 보이며 전개되다가 주인공이 이에 좌절하지 않고 새로운 차원의 단계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자아의 세계에 대해 무지하거나 미성숙기의 주인공이 일련의 경험과 시련을 통해 성숙한 인간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그린 소설을 부르는 말로, 브룩스와 워런이 '소설의 이해'에서 '살인자들', '나는 이유를 알고 싶다'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initiation'이란 말을 사용하면서 소설의 한 유형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으나, 원래 이 말은 인류학적인 용어로서 '통과 제의'의 문턱에 들어선다는 뜻이다. 이니시에이션 소설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 하나는 젊은이가 외부 세계에 대한 무지로부터 생생한 지식을 획득하기까지의 통과 과정을 다룬 작품이며, 다른 하나는 자아발견과 관련된 삶과 사회에의 적응을 다룬 작품이다. 두 가지는 모두 새로운 사실이나 악의 발견을 통해 주인공을 성인 사회로 유도해 간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헤밍웨이의 '살인자들', 윤홍길의 '장마', 이청준의 '침몰선', 황순원의 '소나기' 박완서의 '배반의 여름' 강신재의 '젊은 느티나무' 등은 좋은 예가 된다.

여기서 '데미안'의 싱클레어처럼 젊은 주인공이 성숙한 세계에 도달하도록 상반된 세계가 흔히 전제된다. 신화적 낙원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 순진과 성숙, 어둠과 밝음의 세계가 대립되며 선 - 악, 미 - 추, 삶 - 죽음 등이 중심된다.

'데미안'에 대하여

독일 문학이라고 하면, 곧 괴테나 헤르만 헤세를 연상할 만큼 그들은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진 작가들이다. 더욱이 현대 문학을 말할 때면 헤세를 두고서는 달리 얘기할 수가 없다. 그것은 그의 작가적 생리가 깊이 동양철학에 바탕을 두고 그 심층에 인간의 생명을 구도하려는 데서 우리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때문이기도 하고 또는 그의 문학적 생애가 나찌 독일의 비판자로서 감수해야 했던 추방·망명 그리고 반전논자로서 현대 문명의 몰락을 직시한 예언자로서 어쩔 수 없이 고독과 방황을 감수한 시대의 유랑인이기 때문이며 그의 작품이 풍겨주는 서정성의 향수 때문이기도 하다. 소년시절의 동경, 청춘시절의 꿈과 방황, 넘실거리는 구름을 바라보며 도시에의 환멸, 문명사회를 달래어 자연으로 돌아가는 방랑아 페터(《페터 카멘친트》의 주인공)의 낭만 같은 것 -그런 것이 난해하고 재미나는 줄거리가 없는 독일 작품이라 하여 비교적 소외당하고 있는 이 땅에서 헤세만이 예외로 널리 번역, 소개되고 읽혀지는 까닭이기도 하다.

헤세의 문학은, 그러나 반드시 구름과 꿈이 단김 작품으로 일관한 것은 아니다. 그의 작품계보를 전·후기로 구별하면 전기의 작품이 앞에서 말한 서정적 애상이 넘치는 작품들이다. 대체로 그 대표작을 들어보면 《페터 카멘친트》(1904), 《차륜 밑에서》(1906), 《게르트루트》(1910), 그리고 《크놀프》(1915)로서 극치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후기의 작품은 너무나 대조적이다. 벌써 1차 대전을 겪은 유럽은 그를 꿈의 작가로서 마냥 안락의자에 앉혀 두지 않았다. 그는 자아 탐구와 더불어 현대 문명의 준엄한 비판자가 되었다. 즉 자아성찰을 통한 《싯다르타》(1922) 현대 문명을 비판하고 유럽을 탄핵한 《황야의 이리》(1927), 그리고 두 영혼의 벗이 정신과 감각의 세계를 방황하다가 결국 어머니인 고향으로 돌아오는, 비교적 승화된 세계를 그린 《나르치스와 골드문트》(1930), 만년의 대작 《유리알 유희》(1943)가 서구적 정신과 도양적 정신을 승화시켜 새로운 정신문화를 구상한 이상소설이라 하겠다. 이 작품은 한결같이 문명 비판과 정신의 실향, 영혼의 방황, 문명의 몰락이 그 바탕이 되어 있다.

《데미안》은 이 두 작품 세계의 분기점을 이루는 문제작이다. 헤세는 이른바 초기의 작풍에서 후기로 전환하는데 《데미안》의 다리를 건너간 것이다. 누구도 《데미안》을 읽고 얼핏 그것이 헤세의 작품이라고 말하지 못한다. (그의 초기 작품만을 읽은 독자에게 있어서). 그만큼 《데미안》은 헤세의 인간과 문학에 획점을 던진 것이다. 그 까닭인지 발표 당시 1년간은 에밀 징클라르 작 《데미안, 어느 소년 시절의 이야기》라고 익명을 썼다. 그 후 이것이 헤세의 작품임이 알려지자 구판부터 개제하여 《데미안, 에밀 징클라르의 소년시절의 이야기》라고 했다.

《데미안》은 이른바 과도기적 작품으로서 그 구성이 뚜렷하다. 1∼2장에서는 그의 초기 작품과 같이 소년시절의 이야기를 소박하고 감상적인 수법으로 그려 놓아 먼 훗날의 인생의 흐름을 함축성 있게 암시한 것이 퍽 인상적이라 하겠다.

헤세는 이 무렵 아들의 병으로 인하여 정신분석에 정통한 의사와 친하게 지냈다. 그 인연으로 헤세는 정신분석에 흥미를 얻어 그것이 《데미안》에 도입되었다. 3장에서 비롯하여 독심술의 꿈의 해석이 수시로 인용되고 신비로운 환상적 여운이 전편에 흐르고 있었다.

소년 징클라르는 밝은 세계에서 성장했다. 양친의 신앙과 지성이 조화된 분위기 속에 살면서 점차 또 하나의 세계, 어두운 세계에 눈을 뜬다. 뒷골목의 어두움, 시궁창의 살풍경-그는 금지된 구역에 눈을 주는 본능을 의식한다. 그리하여 강자 본능적이고 환락적인 인간에게 얼결에 동화되고 엉뚱한 거짓말을 하여 수난하고, 두 세계의 갈등으로 뒷골목에서 술을 마신다. 그럴 때마다 그는 데미안을 생각한다. 데미안은 두 세계, 즉 카인의 세계와 아벨의 세계를 똑같이 알면서도 그 어느 세계에도 속하지 않는 자아의 세계를 혼자 걸어가고 있다. 데미안은 그를 교도하려 한다. 그러나 언제나 깊은 자아성찰을 요구할 따름이다. (송영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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