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련님(坊っちゃん) / 나쓰메 오소세키(夏目漱石-하목수석)
by 송화은율도련님(坊っちゃん) / 나쓰메 오소세키(夏目漱石-하목수석)/ 김용숙 옮김
(전략)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는 아버지와 형과 함께 셋이서 살고 있었다. 아버지는 자기는 아무 일도 안 하면서, 내 얼굴만 보면 너는 틀렸다, 틀렸다 하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무엇이 틀렸는지 아직껏 알 수가 없다. 별난 아버지도 다 보겠다. 형은 실업가가 된다든가 하면서 열심히 영어 공부를 하고 있었다. 원래 여자 같은 성질로, 교활하기 때문에 사이가 좋지 않았다. 우리는 열흘에 한 번꼴로 싸움을 했다. 어느 때 장기를 두었는데, 비겁하게 말을 써서 남이 난처하게 되자, 좋아서 놀려 대었다. 하도 화가 치밀어서 쥐로 있던 차(車)를 형의 양미간에 내던졌다. 미간이 터져서 피가 약간 흘렀다. 형이 아버지에게 일러바쳤다. 아버지는 나를 내쫓겠다고 야단을 쳤다.
그 때는 나도 할 수 없다고 단념하고 아버지 쪽에서 말하는 대로 쫓겨날 각오를 하였더니, 십 년 동안이나 살림을 맡아 온 기요[淸]라는 하녀가 울면서 아버지한테 빌어서, 겨우 아버지의 화가 풀렸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별로 아버지가 무섭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도리어 이 기요라는 하녀에게 미안하였다. 이 하녀는 본래 지체 있는 집 사람이었다는데, 구제도(舊制度)의 붕괴 때 몰락해서 마침내 남의 집살이를 하게까지 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늙은 할멈이다. 이 할멈이 무슨 인연인지 나를 끔찍이 귀여워해 주었다. 알 수 없는 일이다. 어머니도 돌아가시기 사흘 전에 나에게서 정이 떨어지셨다. 아버지도 항상 두통거리로 생각하고 동네에서도 불량한 개망나니라고 손가락질하는 나를 덮어놓고 애지중지해 주었다. 나는 도저히 남의 호감을 살 성질이 아니라고 단념하고 있었으므로, 남에게 나무토막같은 취급을 받는 것쯤은 아무렇게도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이 기요와 같이 떠받들어 주는 것을 이상스럽게 생각하였다. 기요는 이따금 부엌에서 사람이 없을 때,
"도련님은 대쪽 같이 곧은 성품이세유."
하고 칭찬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러나 나는 기요가 말하는 의미를 알 수 없었다. 좋은 성품이라면 기요 이외의 사람들도 좀더 잘 대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기요가 이런 소리를 할 때마다 나는 언제나 치켜 주는 것이 싫다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할멈은, 그러니까 좋은 성품이지요, 하고 대견한 듯이 내 얼굴을 바라본다. 제멋대로 나를 만들어 가지고 칭찬하는 것처럼 보인다. 약간 꺼림칙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부터 기요는 점점 더 나를 사랑하였다. 때로는 어린 마음에 왜 그렇게도 귀여워해 주는 것인지 이상스럽게 생각하였다. 쓸데없는 짓을 그만두어 주었으면 좋을텐데, 하고 생각하였다. 딱하기도 했다. 그래도 기요는 귀여워한다. 이따금 자기 용돈으로 '찹쌀 부꾸미'와 과자를 사 준다. 추운 밤 같은 때는 몰래 메밀가루를 사 두었다가, 어느 틈에 자고 있는 머리맡에 메밀 미음을 갖다 준다. 때로는 냄비 우동까지 사다 주었다. 단지 먹는 것뿐만이 아니다. 양말도 받았다. 연필도 받았다. 공책도 받았다. 이것은 훨씬 뒤의 일이지만, 돈을 삼 엔쯤 빌려 주었던 일까지 있다. 누가 뭐, 빌려 달라고 한 것도 아니다. 자기편에서 방으로 가지고 와서, 용돈이 없어서 궁하시겠죠. 이걸 쓰세유, 하고 주었던 것이다. 나는 물론 필요 없다고 말했지만 굳이 쓰라고 하길래 빌려 두었다. 사실은 여간 기쁘지 않았다. 그 삼 원을 지갑에 넣고 허리춤에 낀 채 변소에 갔다가 그만 똥통 속에 빠뜨리고 말았다. 할 수 없이 어슬렁어슬렁 나와서, 사실이 이러이러하다고 기요에게 말했더니, 기요는 재빨리 댓가지 장대를 찾아 가지고 와서, 꺼내 주겠다고 말했다. 얼마 있으니까 우물가에서 좍좍 소리가 나기에 나가 보았더니, 댓가지 끝에 걸려 나온 지갑을 물로 씻어 내고 있었다. 그런 다음, 지갑을 열고 일 엔짜리 지폐를 살펴본 즉, 흙빛으로 변해 무늬가 거의 지워져 있다. 기요는 화롯불에 말려 가지고 '이만하면 됐죠' 하면서 내놓았다. 잠깐 냄새를 맡아 보고, '아이 냄새' 했더니 '그럼 이리 내놓으세요, 바꿔다 드릴 테니' 하고, 어디서 어떻게 속임수를 썼는지 지폐 대신에 은전으로 삼 원을 들고 왔다. 이 삼 원은 무엇에 썼던지 잊어버렸다. 곧 갚을 거라고 해 놓고, 아직 갚지 않고 있다. 이제 와서는 열 곱으로 갚아 주고 싶어도 갚을 길이 없다.
(중략)
마침내 얘기가 결정이 되어서 떠나기 사흘 전에 기요를 찾아 갔더니 북향 단칸 방에 감기로 누워 있었다. 내가 온 것을 보자마자 일어나서, '도련님 언제 집을 사세요?' 하고 물었다. 졸업만 하면 돈이 저절로 주머니 속에서 솟아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 훌륭한 사람을 붙잡고, 아직껏 '도련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더욱 우스꽝스럽다. 나는 간단하게 당분간 집은 안 산다, 시골로 내려가는 거다 했더니, 몹시 실망한 모양으로 희뜩희뜩한 귀밑머리를 자꾸 쓰다듬었다. 너무 딱해서
"가기는 가지만 곧 돌아와요. 내년 여름 방학에 곧 돌아올께."
하고 위로해 주었다. 그래도 서먹한 표정이기에
"무얼 선물로 사다 줄까? 무엇이 좋아?" 하고 물었더니,
"에치고[越後]의 갈잎에 싼 엿이 먹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에치고의 갈잎엿이란 들어본 적도 없다. 우선 방향이 틀린다.
"내가 가는 시골에는 갈잎엿은 없을 것 같은데."라고 말해 주었더니,
"그러면 어느 방향이예유?" 하고 되물었다.
"서쪽이야."
하고 말하니,
"하코네[箱根] 저쪽입니까, 이쪽입니까?"
하고 묻는다. 여간 난처한 게 아니었다.
(후략) (출처 : 남미영 외 4인저 동아서적 문학교과서)
요점 정리
작자 : 나쓰메 오소세키(夏目漱石-하목수석)/ 김용숙 옮김
연대 : 1906년
갈래 : 단편 소설, 성장 소설
성격 : 사실적, 애수적
제재 : 나의 성장 과정과 가정부의 사랑
주제 : 성장기에 경험한 따뜻한 사랑의 소중함, 현실에 눈 떠가는 한 인간상
줄거리 :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와 형, 심지어는 동네 사람들까지 나를 싫어하였으나, 가정부 기요만은 나를 정성껏 돌봐 주고 사랑해 주었다. 대학을 마치고 나는 시골 중학교 교사가 되어, 섭섭해하는 기요와 이별하고 시골로 내려간다. 그러나 처음 부임한 중학교 교무실의 분위기를 통하여 불의로 가득 찬 사회의 한 단면을 보게 된다. 그 곳에서 나를 포함한 정의파와 불의파의 갈등을 체험한 후, 사표를 내고 동경으로 돌아와 취직을 한다. 기요와 소원대로 집도 사고 독립을 하였으나, 기요가 죽음으로서 모친을 잃은 것과 같은 슬픔을 느낀다.
내용 연구
구제도의 붕괴 : 소위 명치 유신으로 봉건 사회의 신분 제도가 무너졌음을 의미함.
이해와 감상
1906년에 발표된 작품으로 일본의 대표적인 단편 소설이다. 세상 물정 모르는 고집 불통인 주인공이 세상을 알기까지의 생활을 그린 일종의 성장 소설(成長小說)이다.
현란하지 않고 애수가 감도는 담백함을 특징으로 하는 일본 문화의 대표적인 단편 소설이다. 고집 불통에다가 가족들에게마저 외면당한 주인공이 가정부 기요의 따뜻한 보살핌으로 성장해 가면서 세상을 알게 된다는 내용인데, 여기에 실린 부분은 직선적이고 외골수인 소년 시절의 '나'와 가정부 '기요'의 모성(母性)을 그린 대목이다.
심화 자료
나쓰메 오소세키(夏目漱石/Natsume Sseki)
1867. 1. 5 에도[江戶]~1916. 12. 9 도쿄[東京].
일본의 소설가.
본명은 긴노스케[金之助]. 근대 일본의 소외된 지식인들이 처한 곤경에 초점을 맞추어 이를 명료하고 설득력있는 문장으로 그려낸 최초의 소설가였다.
어린시절
토지를 소유·관리하는 묘슈[名主]인 나쓰메 고효에 나오카쓰[夏目小兵衛直克]의 5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으며 집은 비교적 유복했다. 그러나 생후 1년 만에 시오바라 마사노스케[鹽原昌之助]의 양자로 보내졌는데 양부모는 그를 무척 귀여워했으나, 어린시절은 보통 아이들에 비하면 매우 고독했다.
10세 때 양부모가 이혼하자 소세키는 시오바라 가의 호적을 지닌 채 생가로 돌아왔다. 생가에 대한 귀속감을 느끼지 못했던 소세키는 학교성적은 매우 우수하여 1878년 이치가야[市谷] 학교 상급반 재학중에 쓴 작문 〈정성론 正成論〉을 보더라도 한문(漢文) 소양이 보통이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후년에 쓴 〈문학론 文學論〉(1907)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그는 우선 한문학을 통해서 문학에 대한 취미를 가지게 된 듯하며 한문학 소양은 사립 한학교인 니쇼가쿠샤[二松學舍] 입학으로 더욱 깊어졌다. 그러나 문명개화의 시대에 영어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1883년 영어학교 세이리쓰 가쿠샤[成立學舍]로 옮겼으며 이듬해 9월에 대학 예비문(豫備門)에 입학했다.
청년시절
1886년 제도개혁에 의해 제1고등중학교로 개칭된 예비문에 재학중이었던 그는 복막염으로 유급을 반복했으나, 졸업할 때까지 수석자리를 지켰다. 1888년 9월 소세키는 제1고등중학교 본과에 진학하여 영문학을 전공하기 시작했으며 동급생 마사오카 시키[正岡子規]와 가깝게 지냈다. 소세키는 시키의 영향을 받아 1889년 여름의 보소[房總] 지방 여행의 체험을 담은 한시문집 〈보쿠세쓰로쿠 木屑錄〉를 썼으며이때 처음으로 소세키라고 서명했다. 이 작품은 시키를 감탄시켰으며 그후 두 사람은 영문학과 하이쿠[俳句]라는 다른 길을 걸으면서 계속 긴밀한 관계를 갖는다. 1890년 9월 도쿄제국대학 영문과에 입학했으며 탁월한 성적으로 수업료를 면제받았다. 재학중 일본의 고전 〈호조키 方丈記〉를 영역하여 격찬을 받기도 했으나 내면적으로는 '영문학에 기만당한 듯한 불안감'과 함께 동서양 문화의 갈등이 점차 깊어갔다.
결혼과 유학
1893년 7월 소세키는 대학 졸업 후 대학원에 적을 둔 채 도쿄 고등사범학교 영어교사가 되었다. 이때부터 극심한 신경쇠약 증세에 폐결핵이 겹쳐 내면적 불안에 시달리게 되었으며 이듬해 4월 돌연 도쿄 고등사범학교를 그만두고 시코쿠[四國]의 마쓰야마[松山] 중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마쓰야마에서 보낸 1년간의 단조로운 생활로 소세키는 심신의 건강을 회복하게 되었으며, 여기서의 생활은 뒤에 〈도련님 坊っちゃん〉(1906)의 소재가 되었다.
1896년 4월에는 구마모토[熊本]의 제5고등학교에 부임했으며 6월 나카네 교코[中根鏡子]와 결혼했다. 제5고등학교의 교수(구고등학교 교직의 최고직)를 지내면서 교직자와 학자로서 충실한 면모를 인정받았으나, 결혼생활은 무척 불행했다. 1897년 유산을 계기로 아내는 가끔 히스테리를 일으켰으며 소세키 자신의 신경증과 합세하여 그후 2남 3녀의 자녀를 낳으면서도 결혼생활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1900년 4월 문부성으로부터 영어 연구를 위한 영국 유학을 명령받고 런던으로 건너갔다. 소세키는 런던에서 극도의 신경증과 자아의 심각한 위기감에 직면하게 된다. 한문학과 영문학의 이질성을 자각하는 동시에'동서문화의 융합에 의한 신 문명의 창조'라는 국가목표의 모순성에 직면하여 목표상실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마침내 1902년 12월 5일 귀국했으나 후에 도쿄제국대학 영문과 강사가 된 뒤에도 신경증은 나아지지 않았다.
작품
1904년 12월초 소세키는 시키의 후계자 다카하마 교시[高濱虛子]의 권유를 받고 음울한 기분을 달래기 위해 〈고양이전 猫傳〉이라는 유머러스한 작품을 썼다. 이 작품은 교시에 의해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吾輩は猫である〉라는 제목이 붙여져 〈호토토기스 ホトトギス〉 1905년 1월호에 발표되었다. 소세키의 처녀작이 문학적 야심에서가 아니라 신경증의 자기 치유를 목적으로 씌어졌다는 것은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가 큰 호평을 얻자 그 연재를 계속 썼으며 이때 〈도련님〉· 〈풀베개 草枕〉(1906)가 나왔다. 또한 고미야 도요다카[小宮豊隆], 데라다 도라히코[寺田寅彦]등 이른바 '소세키 산맥'의 최초의 봉우리라 할 만한 문하생이 모이면서 소세키는 '문학과 학문'이라는 두 갈림길에서 갈등하게 되었다. 그때 도쿄대학으로부터 영문학 담임교수 추대의사를 비쳐왔으나 거절하고 아사히신문사[朝日新聞社]에 입사했는데, 〈개양귀비 虞美人草〉(1907) 이후의 작품은 모두 여기에 실렸다. 〈산시로 三四郞〉(1908)는 명작으로 인정받았는데, 주인공 산시로가 도쿄의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규슈[九州] 시골에서 상경하여 격변하는 도회지에서 겪는 좌절과 방황은 오늘날까지 많은 독자들의 공감을 얻고 있다.
〈그리고나서 それから〉(1909) 이후의 소세키는 초기의 문명비판적 작품에서 탈피하여 차츰 실존적 문제에 관심을 갖고 인간의 에고이즘을 다루게 되면서 문체도 더욱 중후해졌다. 그는 자기 본위를 주창하면서도 '아집'의 추함은 계속 규탄하여 '자아'의 주장을 기치로 하는 자연주의와 대립했다. 그리하여 소세키가 주재하는 아사히 신문 문예란은 반자연주의 아성으로 주목받았다. 1910년 만성 위장병이 악화되어 이즈[伊豆]의 슈젠 사[修善寺] 온천에서 토혈을 심하게 하여 인사불성이 된 적이 있다. 〈문 門〉(1910)·〈피안을 지나서 彼岸過〉(1912) 후 1912년 연말 〈행인 行人〉 집필중 심한 고독감으로 인해 신경증이 재발하여 〈행인〉의 연재를 일시 중단하고 그림과 서예로 정신적인 수양을 했다. 이후 위장병에 시달리면서도 고독한 메이지 시대[明治時代] 지식인의 내면을 그린 〈마음 心〉(1914)과 자전적 소설 〈미치구사 道草〉(1915)를 썼으며 최후의 대작 〈명암 明暗〉 집필중이던 1916년 위궤양의 악화로 세상을 떠났다.
소세키는 창작 연한이 12년간에 지나지 않았지만 많은 대작을 남겼으며, 작품에서 다룬 자아의 문제는 당시 일본이 겪은 사회적 갈등임과 동시에 영원한 테마로서 오늘날까지 널리 공감을 얻고 있다.(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성장 소설(Inititation novel)
자아와 세계의 관계에 대하여 미성숙하고 아직 어린 주인공이 그 시대의 문화적 ·인간적 환경 속에서 유년시절부터 청년시절에 일련의 경험과 시련을 통해 어른들의 세계로 편입되어 가는 과정과 자기를 발견하고 정신적으로 성장해 나가는, 이를테면 자신을 내면적으로 형성해 나가는 과정을 묘사한 소설로 형성 소설, 혹은 입사식 소설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입사식이란 유년이나 사춘기에서 성인 사회에 들어가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의식으로 통과제의(通過祭儀)적인 성격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주인공에게는 시련과 신체적인 고통, 집단적인 신념에 대한 가르침이 따른다. 대부분의 소설가들은 자신의 성장 체험을 소재로 삼아 육체적 정신적 시련과 성숙 과정을 한편의 자전적 성장 소설로 남기고 있다. 황순원의 '별', 이청준의'침몰선', '하근찬의 '흰종이 수염' 등이 이러한 성장 소설의 범주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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