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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큐정전(阿Q正傳) / 전문 및 해설 / 루쉰(노신)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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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큐정전(阿Q正傳) / 루쉰(노신)


 

 

제1장 서(序)

내가 아큐(阿Q)의 전기를 써야겠다고 작정한 것은 한두 해 전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줄곧 망설였던 것은, 나 자신이 후세에 길이 전해 줄 만한 글을 쓸 위인이 못 되는 까닭도 있지만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가 문장의 제목이다. 열전(列傳), 자전(自傳), 별전(別傳), 가전(家傳), 본전(本傳) 등 전기에는 수많은 종류가 있지만, 애석하게도 여기에 적합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아큐가 역사에 기록될 만한 위인은 아니었으니 열전이라 할 수는 없다. 또 내가 아큐 자신이 아니니 자전이랄 수도 없다. 또 내가 아큐하고 종씨인지 아닌지도 모를 뿐더러 그의 자손에게서 부탁받은 일도 없으니 가전도 아니었다. 결국 이 문장은 '본전'으로밖에는 분류할 수 없겠지만, 내 문장을 생각해 보면 ‘손수레꾼이나 장돌뱅이 따위’가 쓰는 비천한 말씨여서 감히 ‘본전입네’ 하고 내세울 수도 없다. 그렇다면 소설가들이 흔히 쓰는‘잡담은 그만두고 정전(正傳)으로 돌아가서(본론으로 들어가서)’라는 말에서‘정전’두 자를 빌려다가 제목으로 삼는 것이 어떨까?

둘째는 전기를 쓰자면 대체로 첫머리에 ‘이름은 무엇이며 어느 지방 사람이다.’라고 써야 하는데, 나는 아큐의 성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셋째로, 나는 아큐의 이름을 어떻게 써야 할지를 모른다. 그가 살아 있을 적에는 사람들이 그를 아큐라고 불렀지만, 죽은 다음에는 두 번 다시 입에 올리지 않았다. 이전에 나는 자오 영감의 아들인 수재(秀才, 원래는 과거 시험 과목 중의 하나인 과학의 명칭이지만, 여기서는 과거에 급제한 사람을 일컬음) 선생에게 여쭈어 본 적도 있었지만, 그렇게 박학 다식한 사람조차 그의 이름을 제대로 알지는 못했다. 그래서 나는 아큐의 이름을 쓰기 위해 ‘서양 글자’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영국에서 유행하는 철자법을 따라 아Quei라 하고, 쓸 때는 줄여서 아Q로 하려는 것이다.

넷째로, 아큐의 본적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가 비록 웨이좡에서 오래 살았다고는 하지만, 이따금 다른 곳에서도 살았으니 반드시 웨이좡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다.

제2장 승리의 기록

아큐는 이름이나 본적만 모호한 게 아니라, 웨이좡에 오기 전까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았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마을 사람들은 일손이 필요할 때나 곯려 줄 때만 아큐를 생각할 뿐 다른 때는 관심도 없었다. 아큐는 집도 없이 마을에 있는 투구츠〔土谷祠, 지신과 곡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시골의 사당〕 안에서 살았다. 게다가 고정된 일거리도 없이, 남의 집에서 품팔이를 하며 하루하루를 살아 나갔다. 그래서 사람들은 바쁠 때면 아큐를 생각하지만, 한가해지면 까맣게 잊어버리곤 하였다.

그런데 아큐 또한 자존심이 매우 강해서 웨이좡 사람들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심지어 웨이좡에 딱 두 사람밖에 없는 문동(文童, 과거 공부를 하고 있지만 아직 수재에 급제하지 못한 사람)에게까지도 웃어 줄 가치조차 없다고 여기는 형편이었다. 아큐의 말대로 하면, 옛날에 그는 ‘잘 살았고 학식도 높았으며 못 하는 게 없는’ 거의 완벽한 인간이었다는 것이다.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어쨌든 지금 그에게는 체질상으로 약간의 흠이 있었다. 그의 머리 몇 군데가 부스럼 자국으로 꽤 크게 벗겨져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벗겨지다’라는 말을 몹시 싫어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이 점점 확대되어 나중에는 ‘빛나다’라는 말도, ‘밝다’라는 말도 싫어하게 되었다. 급기야는 ‘등불’이나 ‘촛불’ 같은 말까지도 금기(꺼리어서 싫어하거나 금함)로 했다. 그리하여 그 금기를 어기는 자가 있으면, 아큐는 그 부스럼 자국이 시뻘개지도록 화를 냈다. 상대에게 욕을 퍼부으며 때리려고 덤벼들었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아큐는 혼을 내주려고 덤벼들었다가 되레 당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그래서 아큐는 그에 대한 대응 방법을 바꾸기로 하였다.

동네 건달들은 아큐를 볼 때마다 “야아, 반짝반짝해졌는걸! 이제 보니 등잔이 여기 있었군.” 하고, 그의 머리를 쿵쿵 쥐어박곤 했다. 그들은 아큐가 단단히 혼쭐이 났으리라고 생각했지만, 아큐는 십 초도 안 되어서 승리감으로 의기 양양해졌다. 자신을 짐짓 벌레처럼 하찮은 존재로 생각해 버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건달들은 결국 벌레를 곯려 준 꼴이 되는 것이니까.

‘네놈 따위가 뭐야. 나는 버러지야, 버러지라구.’

아큐는 자신을 경멸할 수 있는 첫 번째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거기에서 자신을 경멸한다는 말을 빼 버린다면 남는 것은 ‘첫 번째 사람’이라는 것뿐이었다. 어디에서든 ‘첫 번째’는 좋은 것이었다. 이렇게 묘한 방법으로 승리를 하고 나면 아큐는 금방 기분이 좋아졌다.

 

제 2 장 우승(優勝)의 기록(記錄)

아큐(阿Q)는 성명과 본적이 분명치 않을 뿐만 아니라, 이전의 행적(行跡) 또한 분명치 않다. 왜냐 하면 미장 사람들의 아큐에 대한 관심은 다만 그에게 일을 부탁할 때나, 그를 두고 농담할 때에만 국한되어 있었으므로 지금까지 그의 '행적'엔 유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큐 자신도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남과 말다툼할 때 이따금 눈을 부릅뜨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 집도 그전에는……네까짓 놈보다는 훨씬 더 잘 살았어! 네 따위가 무어야!"

아큐는 집도 없이 미장(未莊)의 사당(祠堂) 안에 살고 있었으며 일정한 직업도 없었다. 다만 날품팔이를 하면서, 보리를 베라면 보리를 베고, 쌀을 찧으라면 쌀을 찧고, 배를 저으라면 배를 젓기도 했다. 일이 좀 오래 걸릴 때는 임시로 주인집에서 묵기도 했으나 끝나면 곧 돌아갔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바쁠 때에는 아큐를 생각해 내나, 그것도 시킬 일이 있을 때뿐이지 그의 '행적'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한가해지면 아큐라는 존재조차도 잊어버리는 판국이니 '행적'은 더더욱 말할 나위도 없다. 꼭 한 번 어느 노인이, "아큐는 정말 일꾼이야!"하며 칭찬한 적이 있었다. 이 때 아큐는 온통 옷을 벗은 채로 멋적은 듯이 말라빠진 풍채로 그 노인 앞에 서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이 이 말이 진심인지 빈정거림인지 잘 짐작이 가지 않았으나, 아큐는 대단히 기뻐했다.

아큐는 또한 자존심이 강했다. 미장 주민들은 하나같이 눈에 차지 않았고 심지어 두 분의 '글방 도련님'에 대해서까지도 일소(一笑)의 가치조차 없다고 여기는 표정을 지었다. 무릇 '글방 도련님'이란 장래 수재로 변할 수도 있는 것이다. 조(趙) 나으리와 전(錢) 나으리가 주민들로부터 크게 존경을 받고 있는 이유도, 돈이 많다는 것 이외에 두 사람 모두 '글방 도련님'의 아버지라는 것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독 아큐는 마음 속으로 특별히 존경한다는 표시를 하지 않았다. '내 아들이었다면 더 훌륭했을 거야!'하고 그는 생각했다. 게다가 몇 번 성 안으로 들락거렸던 일은 자연 그의 자부심을 더욱 강하게 했다.

그러나 한편 그는 성 안 사람들까지도 퍽 경멸하였다. 예컨대, 길이 석 자, 폭 세 치의 널빤지로 만든 걸상을 미장에서는 '장등(長 )'이라고 부르며, 그도 '장등'이라고 불렀는데 성 안의 사람들은 '조등(條 )'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이것은 틀린 것이며 가소로운 일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도미를 튀길 때 미장에서는 모두 반 치 길이의 파를 얹는데 성 안에서는 잘게 썬 파를 얹는다. 이것도 틀린 것이며 가소롭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미장 사람들이야말로 세상을 모르는 가소로운 시골뜨기들로 그들은 성 안의 생선 튀김은 본 적도 없다는 것이다.

아큐가 '옛날에는 잘 살았고', 견식도 높고, 게다가 '정말 일꾼'이니 본래 '완벽한 인간'이라고 할 만하지만, 가련하게도 그에겐 약간의 체질상의 결점이 있었다.

사람들에게 가장 놀림을 받는 것은, 그의 머리에 언제 생겼는지도 모르는 부스럼 자국이 몇 군데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큐의 생각에도 비록 그의 몸에 있는 것이기는 하나 자랑스럽게 여겨지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곧 '부스럼'이라는 말뿐 아니라, '부스럼 자국'과 비슷한 발음의 말조차 꺼려했으며, 그것이 점점 더 확대되어 '빛나다[光]'라는 말도, '밝다[亮]'라는 말도 금기로 삼았고 더 나아가서 '등불'이라던가 '촛불'이라는 말까지 금기시하는 것이었다. 그 금기를 범하는 자가 있으면 고의든 아니든 아큐는 부스럼 자국까지 벌겋게 하며 화를 내었다. 상대를 어림쳐 봐서 말솜씨가 좋지 않은 놈이면 매도(罵倒)하고, 기운이 약한 놈이면 두들겨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대체로 아큐가 당할 때가 많았다. 그래서 그는 차츰 방침을 바꾸어 대개는 화난 눈으로 노려보기로 했다.

아큐가 '노려보기주의(主義)'를 채택한 뒤로 미장의 건달들은 더욱더 그를 놀려대는 것이었다. 만나기만 하면 짐짓 깜짝 놀란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어이구, 밝아졌다!"

아큐는 틀림없이 성을 내고 노려본다.

"여기 원래 보안등이 있었군 그래."

그들은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다.

아큐는 할 수 없이, 따로 보복할 말을 생각해 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네깐 놈들과는 상대도 안 돼……."

이 때 그는 마치 자신의 머리에 있는 것은 고상하고 영광스러운 부스럼 자국이지, 평범한 부스럼 자국이 아닌 것처럼 굴었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아큐는 견식이 높은 사람이므로 '금기(禁忌)'에 조금 저촉된다는 걸 알고서 그만 말을 잇지 않는 것이었다.

건달들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를 계속 놀려대어 마침내 치고 받는 싸움이 된다. 그러나 아큐는 형식상으로는 패배한다. 놈들에게 노란 변발을 나꿔채이고, 벽에 퍽퍽 너댓 번 머리를 처박힌다. 건달들은 그러고 나서야 만족하여 의기양양해 돌아간다. 아큐는 잠시 동안 우두커니 서서 '내가 자식놈에게 얻어맞은 걸로 치지. 요즘 세상은 돼먹지 않았어…….' 하고 속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나서는 그도 만족해서 의기양양해 가버린다.

아큐는 마음 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을 나중에 하나하나 말해 버린다. 그래서 아큐를 곯려 주는 모든 사람들은 그가 이러한 일종의 정신적 승리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후로는 놈들이 그의 노란 변발을 나꿔챌 때는 먼저 그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큐! 이것은 자식이 애비를 때리는 게 아니라 사람이 짐승을 때리는 거야. 네 입으로 말해 봐! 사람이 짐승을 때리는 거라고."

아큐는 양손으로 변발한 머리채를 잡고, 머리를 꼬며 말하는 것이었다.

"벌레를 치는 거야! 됐어? 나는 벌레야. ― 이래도 놓지 않겠어?"

벌레라고 했건만 건달들은 결코 놓아주지 않는다. 늘 하던 대로 가까운 데를 골라 퍽퍽 대여섯 번 머리를 처박고 나서야 만족하여 의기양양해 돌아가는 것이었다. 놈들은 이번에야말로 아큐도 혼이 났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10초도 지나지 않아 아큐도 역시 만족하여 의기양양해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는 그야말로 자신을 경멸할 수 있는 제1인자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자신을 경멸할 수 있다.'는 말을 생략하면 남는 것은 '제1인자'라는 말이다. 장원(壯元)이라면 '제1인자'가 아닌가?

"네 까짓 것들이 다 뭐냐?"

아큐는 이러한 갖가지 묘수로 원수들을 굴복시킨 다음 유쾌하게 술집으로 달려가서 술을 몇 잔 마시는 것이었다. 거기에서 또 다른 사람에게 한바탕 놀림을 당하거나, 입씨름을 하다가, 또 이기고 나서, 유쾌하게 사당으로 돌아가면 머리를 쑤셔박고 자 버리는 것이었다.

만약 돈이 있으면 그는 도박을 하러 간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땅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데, 아큐도 얼굴에 땀을 뻘뻘 흘리며 그 가운데 끼어드는 것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내기를 거는 소리 중에서도 가장 컸다.

"청룡(靑龍)에 사백!"

"자…… 엽니다. ……엇차!"

물주가 상자 뚜껑을 연다. 그도 땀을 뻘뻘 흘리며 읊어대는 것이었다.

"천문(天門)이로다……. 각(角)은 비기고, 인(人)과 천당(穿堂)은 졌다. ……아큐의 돈은 내가 먹었어……."

"천당에 백……백 오십!"

아큐의 돈은 이런 노랫가락을 타고 땀을 뻘뻘 흘리는 다른 사람의 허리춤으로 점점 흘러들어가는 것이었다. 마침내 그는 사람들에게서 밀려나고 만다. 그러나 뒷전에 서서 남들의 승부에 마음을 졸이며 끝까지 노름판을 지켜본다. 그리고 판이 끝나면 아쉬운 듯 사당으로 돌아간다. 다음날은 눈이 퉁퉁 부어 일하러 나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참으로 '인간 만사(人間萬事)는 새옹지마(塞翁之馬)'다. 아큐는 불행히도 딱 한 번 이기고는, 계속해서 실패했던 것이다.

그 날은 미장에서 마을 축제를 지내던 날 밤이었다. 이 날만은 관례대로 무대를 차리고, 무대 주위엔 으레 많은 도박판이 벌어졌다. 연극 무대의 꽹과리 소리와 북 소리도 아큐의 귀에는 십 리 밖 먼 데서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레겐 물주의 노랫가락 소리만이 들렸다. 그는 따고 또 땄다. 동전이 은전이 되고 작은 은전이 큰 은전이 되었다. 큰 은전이 쌓이고 쌓였다. 그는 매우 신바람이 났다.

"천문(天門)에 두 냥!"

누가 누구와 무엇 때문에 싸우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욕하는 소리 때리는 소리, 발자국 소리, 정신을 차릴 수 없는 혼란이 한바탕 벌어졌다. 그가 간신히 기어 나왔을 땐 노름판도 보이지 않았고 사람들도 보이지 않았다. 몸의 몇 군데가 아픈 것 같았다. 아무래도 얻어맞기도 하고 발길질을 당한 것 같기도 했다. 몇 사람이 그를 이상스럽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넋 잃은 사람처럼 사당으로 돌아와 마음을 가라앉히고서야 그의 은화 무더기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축제날에 벌어지는 노름판의 대부분 사람들은 이 마을 사람들이 아니다. 그러니 어디 가서 그것을 찾겠는가?

새하얗게 번쩍번쩍 빛나는 은화 더미! 더구나 그의 것이었는데…… 지금은 없어진 것이다. 자식놈이 가져간 셈 쳐 보아도 역시 마음이 편치 않다. 그도 이번만은 실패의 고통을 조금 느꼈다.

그러나 그는 곧 패배를 승리로 전환시켰다. 그는 오른손을 들어 힘껏 자기 뺨을 두세 차례 연거푸 때렸다. 얼얼하게 아팠다. 때린 후에 그는 마음이 평안해지기 시작했는데, 마치 때린 것은 자신이고, 얻어맞은 것은 또 다른 자신 같았기 때문이다. 잠시 후 그는 자기가 남을 때린 것 같이…… 비록 아직도 얼얼하지만…… 몹시 만족하여 의기 양양해 드러누웠다.

그는 푹 잠들었다. <김시준 옮김>

 

제3장 속(續) 승리의 기록

어느 해 봄날, 아큐는 술에 취해 건들거리며 길을 가고 있었다. 이 때 담장 밑에서 왕털보가 벌거벗은 채 이를 잡고 있는 것이 보였다. 왕털보는 부스럼 자국으로 머리가 벗겨진 데다 털북숭이여서 모두 왕대머리 털보라고 불렀다. 왕털보는 이를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계속 잡아서 입에다 넣고 툭툭 소리를 내며 깨물었다.

아큐는 왕털보가 이 잡는 것을 보자, 갑자기 온 몸이 근질거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 옆으로 가서 앉았다. 그리고 자신의 다 떨어진 겹저고리를 벗어들고 들춰보았다. 새로 빤 옷이라 그런지, 아니면 재주가 없어서 그런지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서너 마리 잡을 수 있었다. 아큐는 처음에는 실망했지만 나중에는 부아가 치밀었다. 자기가 깔보는 왕털보는 저렇게 많이 잡고 있는데 나는 이렇게 적게 잡다니, 이것은 얼마나 체통을 잃는 일인가. 아큐는 잡은 이를 입에 넣어 용을 쓰며 깨물었다. 그러자 픽 하고 소리가 났다. 깨무는 소리조차 왕털보 소리에 미치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자 아큐의 부스럼 자국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옷을 땅바닥에 냅다 팽개치면서 침을 바닥에다 탁 뱉었다.

“이 털버러지 같은 놈.”

“문둥이 개 같은 놈, 누구한테 욕이야!”

왕털보가 눈을 치뜨고 말했다. 이런 털북숭이가 감히 함부로 지껄여? 아큐는 상대가 항상 얻어맞는 건달패들이라면 겁을 집어먹었겠지만, 왕털보쯤이야 못 당할까 싶어 용감하게 덤벼들었다.

“누구긴 누구야! 바로 네놈한테지.”

“너, 몸뚱이가 근질거리나 보구나?”

왕털보가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주워 입으면서 말했다. 아큐는 그가 꽁무니를 빼려는 줄 알고 잽싸게 달려들어 한 대 치려 했다. 그런데 아큐의 주먹이 미처 왕털보에게 닿기도 전에 그에게 잡혀 버리고 말았다. 아큐는 곧 왕털보에게 변발(만주인의 풍습으로, 남자가 12∼13세가 되면 머리 뒷부분만 남겨 놓고 나머지 부분을 깎아 뒤로 길게 땋아 늘인 머리)을 낚아채인 채 담장 앞으로 끌려가 머리를 처박히고 말았다.

아큐의 기억으론 아마도 이것이 평생에 있어 가장 큰 굴욕 같았다. 왕털보는 털북숭이라 자신이 늘 비웃어 주었는데, 도리어 그에게 손찌검을 당했으니 말이다. 아큐는 어찌할 바를 몰라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 때 멀리서 아큐가 제일 미워하는 첸 영감의 큰아들이 걸어왔다. 그는 도시에 있는 서양 학교에 들어갔다가 반 년 뒤에 돌아왔는데, 어찌 된 일인지 걸음걸이도 변하고 변발도 없어져 버렸다. 그 때문에 그의 어머니는 열 번도 더 통곡을 했고, 여편네는 세 차례나 우물에 뛰어들었다. 그를 볼 때마다 아큐는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변발이 없으니 사람 노릇할 자격도 없으며, 그의 여편네도 네 번째로 우물에 뛰어들지 않았으니 정숙한 여자라 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중대가리, 나귀…….”

아큐는 그 동안 속으로만 이렇게 욕을 했지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화가 끓어 누구라도 붙들고 앙갚음을 해야 하던 참이라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지껄이고 말았다. 그러자 이 중대가리가 노랗게 칠한 지팡이를 손에 쥔 채 아큐에게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리고 잠시 후에 아큐는 딱 하는 소리가 자기 머리에서 나는 것을 들었다.

“나는 저 애한테 말했는데!”

아큐는 곁에 있던 한 아이를 가리키며 변명했다. 아큐의 생애에 있어 두 번째로 큰 굴욕이었다. 아큐는 천천히 걸었다. 선술집 문턱에 당도하니 망각이라는 보물이 효력을 발휘하여 제법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데 앞쪽에서 정수암에 있는 젊은 여승이 걸어왔다. 평소에도 아큐는 여승을 보면 욕을 해댔는데, 하물며 굴욕을 당한 지금이야! 그는 굴욕의 기억이 되살아나자 마음속에서 적개심이 일었다.

‘오늘은 왜 이리 재수가 없나 했더니 너를 보려고 그랬구나!’

하고 생각했다. 아큐는 앞으로 나서며 큰 소리가 나게 침을 뱉었다. 젊은 여승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고개를 숙인 채 걷기만 했다. 아큐는 여승 옆으로 다가가서 새로 깎은 여승의 머리를 손으로 더듬으며 헤벌쭉 웃었다.

“아이고머니나, 이런 무례가…….”

여승은 얼굴이 새빨개져서 종종걸음을 쳤다. 선술집 안에서 사람들이 와 하고 웃어 댔다. 아큐는 더욱더 신이 났다. 그래서 그 구경꾼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이번에는 힘을 주어 꼬집어 버렸다. 이 한 판의 승리로 아큐는 왕털보 일도, 가짜 양놈 일도 깨끗이 잊어버렸다. 오늘 생겼던 재수 없는 일이 모두 앙갚음된 것 같았다.

“이 씨도 못 받을 아큐 놈아!”

멀리서 젊은 여승이 울먹이며 욕하는 소리가 들렸다.

제4장 사랑의 비극

아큐는 하늘이라도 날 것 같은 기분으로 하루 종일 돌아다니다가 투구츠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 날 밤, 밤새도록 눈도 붙이지 못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그는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이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보통 때보다 매끄러운 것 같았다. 젊은 여승의 얼굴의 매끄러움이 그의 손가락에 달라붙었는지도 몰랐다.

“씨도 못 받을 아큐 놈!”

하던 젊은 여승의 목소리가 아큐의 귓속에서 다시 울렸다. 그는 생각했다.

‘그래, 여자가 있어야 한다. 자식이 없으면 밥 한 그릇도 공양받지 못할 테니까. 이것은 사람으로 태어난 자의 가장 큰 비애다. 여자, 여자, 여자!’

그는 젊은 여승의 모습을 떠올리자 마음이 적잖이 달떴다. 누가 알았으랴! 바야흐로 이립(30세)의 나이에 젊은 여승 때문에 마음이 달떠 버릴 줄이야. 그는 ‘남자를 유혹하려는’ 여자, 즉 자신에게 말을 거는 여자는 항상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승은 자기를 보고 웃지도 않았고, 수상한 말을 걸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아큐는 여승에게 유혹당하고 말았다. 아, 이것은 여자가 나쁘다는 증거 중 하나가 분명했다.

다음날 아큐는 자오 영감 댁에서 하루 종일 방아를 찧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부엌에 앉아 담배를 한 대 피웠다. 그 때, 설거지를 끝낸 자오 댁의 하녀 우 씨 아줌마가 아큐에게 말을 걸었다.

“마님이 이틀째 아무것도 드시지 않아. 영감님이 첩을 사 오신 뒤로…….”

‘여자……, 우 씨 아줌마……, 청상 과부……, 여자…….’

아큐는 담뱃대를 팽개치고 벌떡 일어섰다.

“나하고 자자! 나하고 자자!”

하고 아큐는 별안간 우씨 아줌마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우씨 아줌마는 ‘어머나!’ 하고 질겁을 하더니, 비명을 지르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러나 아큐는 한동안 그 자리에 멍하니 꿇어앉아 있었다. 바로 그 때, 딱 소리가 나더니 머리가 어찔해져 왔다. 뒤를 돌아보니, 수재가 굵은 대나무 막대기를 들고 서 있었다.

“이 못된 놈! 감히…….”

수재는 굵은 대막대기로 아큐의 머리를 사정 없이 내리쳤다. 아큐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쥔 채 문 밖으로 달아났다.

“염치 없는 놈!”

하고, 수재가 뒤에서 욕을 했다. 아큐는 방앗간으로 들어갔다. 머리가 몹시 욱신거렸다. ‘염치 없는 놈’이라고 하던 수재의 말이 귀에 쟁쟁했다. 아큐는 마음이 꺼림칙했지만 곧 쌀방아를 찧기 시작했다. 그런데 밖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 왔다. 그는 그 소리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그 소리는 안뜰에서 나는 것이었다. 그 곳에는 자오 씨 댁 집안 식구들이 모여 있었는데, 이틀 동안 식사도 안 했다는 마님까지 끼어 있었다. 게다가 이웃의 쩌우치 댁과 자오바이옌, 자오쓰천도 있었다. 마침 작은 마님이 우 씨 아줌마를 끌고 나오면서 말했다.

“밖으로 나와. 네가 정숙하다는 걸 누가 몰라. 절대로 소견 좁은 짓을 하면 안 돼.”

우씨 아줌마는 손을 잡힌 채 끌려 나와서는 울기만 했다.

‘흥, 재미있는걸. 이 청상 과부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몰라도…….’

아큐는 이런 생각을 하며 그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수재가 아까처럼 대막대기를 든 채 그에게로 달려왔다. 아무래도 자기와 관계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몸을 휙 돌려 재빨리 도망쳐 버렸다.

뒷문으로 빠져 나와 단숨에 투구츠로 돌아왔다. 잠시 앉아 있으려니 온 몸에 오싹오싹 한기가 들었다. 봄이라 해도 밤에는 아직 꽤 쌀쌀했다. 그제서야 저고리를 자오 씨 댁에 두고 온 것이 생각났다. 그렇지만 가지러 가자니 수재의 대막대기가 너무 무서웠다.

“아큐, 개 같은 자식! 자오 씨 댁 하녀까지 희롱하다니! 나까지 잠도 못 자게 됐잖아.”

하며, 그 때 자오씨 댁 하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하인은 한바탕 설교를 늘어놓았으나 아큐는 대꾸할 말이 없었다. 결국은 밤에 폐를 끼쳤다는 이유로 하인에게 술값을 물어야 했다. 아큐에게는 현금이 없었으므로 털모자를 전당포에 잡혔다. 그러고도 다섯 가지 조항에 서약까지 했다.

1. 내일 붉은 초 한 쌍, 향 한 봉을 가지고 자오 씨 댁에 가서 사죄해야 한다.

2. 자오 씨 댁에서 무당을 불러, 목을 매어 죽게 하는 귀신을 쫓는 굿을 하는데 그 비용은 아큐가 전담한다.

3. 이후로 아큐는 자오 씨 댁 문턱도 밟을 수 없다.

4. 이후에 우 씨 아줌마에게 다른 일이 생기면 책임을 아큐에게 묻는다.

5. 아큐는 품삯과 저고리를 찾아갈 수 없다.

 

제5장 생계 문제

아큐는 사죄 절차를 끝낸 뒤, 예전처럼 거리를 쏘다녔다. 이 날부터 마을 여자들은 아큐를 보기만 하면 문 안으로 숨어 버렸다. 심지어는 쉰 살에 가까운 쩌우치 댁까지도 남들을 따라서 숨어 버렸다. 게다가 열한 살밖에 안 된 계집애까지 불러들이는 게 아닌가. 아큐는 기이하게 생각되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선술집에서는 외상 술을 주려 하지 않았다. 또 며칠 동안 품을 팔아 달라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외상 술을 주지 않는 것은 참으면 그만이지만, 품을 팔아 달라는 사람이 없게 되면 아큐는 배를 곯아야 했다. 이것은 확실히 ‘개 같은 놈’의 일이었다.

자오 씨 댁에서는 샤오디를 데려다가 일을 시키고 있었다. 이 샤오디란 놈은 말라 빠져서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런 놈이 자기 밥줄을 끊으려 한다고 생각하니, 아큐는 분통이 터질 노릇이었다.

며칠 후, 아큐는 첸 영감 댁 담장 앞에서 우연히 샤오디를 만났다. 아큐는 다짜고짜 달려들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짐승 같은 놈!”

아큐는 눈을 부릅뜨고 으르렁거렸다. 입에서 침이 튀어나왔다.

“나는 버러지야. 이러면 됐지.”

샤오디가 말했다. 아큐는 샤오디의 이러한 겸손이 도리어 비위가 상했다. 당장에 덤벼들어 샤오디의 변발을 잡아채었다. 샤오디는 한 손으로는 자기 머리채 밑을 감아 쥐고, 또 한 손으로는 아큐의 변발을 잡아채었다. 옛날에는 샤오디 같은 것은 어림도 없는 상대였다. 그런데 요즈음 잔뜩 굶주린 아큐는 샤오디 못지않게 말라 있었다. 그래서 힘도 엇비슷해져 버렸다.

한 삼십 분쯤 흘렀을까. 그들의 머리에서 김이 올랐다. 이마에서도 땀이 흘렀다. 아큐의 손이 늦추어지자 샤오디의 손도 늦추어졌다.

“두고 보자, 개새끼…….”

이 싸움은 이렇게 무승부로 끝났지만, 아큐에게는 여전히 삯일을 해 달라는 사람이 없었다.

꽤 따스해진 어느 날이었다. 그렇지만 아큐에게는 산들바람까지도 써늘하게 느껴졌다. 그것은 그나마 견딜 만했는데, 배가 고픈 것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아큐는 어쩔 도리가 없이 밖에 나가 먹을 것을 구해 보기로 했다.

새로 모를 낸 연푸른 논들이 눈에 들어왔다. 간간이 밭을 가는 농부들의 모습도 보였다. 아큐는 ‘먹을 것을 구하려고’ 무작정 걷다 보니, 어느덧 정수암까지 와 버렸다. 나지막한 담 안에 드넓은 무밭이 펼쳐져 있었다. 아큐는 잠깐 주저주저하다가 사방을 돌아보았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아큐는 담을 기어 올라갔다. 그러자 흙덩이가 우르르르 떨어져 내렸다. 아큐는 다리가 덜덜 떨렸다. 가까스로 뽕나무 가지를 붙잡고 뒤뜰 쪽으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쪼그리고 앉아 무를 뽑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둥그런 머리가 고개를 내밀었다. 늙은 여승이었다. 아큐는 재빨리 무 네 뿌리를 뽑아 품 속에 싸 안았다.

“나무 아미타불. 아큐, 왜 남의 채소밭에 뛰어들어 무를 훔치는 거냐?”

“내가 언제 채소밭에 뛰어들어 무를 훔쳤다는 거냐?”

아큐는 도망을 치다가 뒤를 흘낏거리며 말했다.

“그렇다면 그건 뭐지?”

“이게 당신 거야? 그럼 무더러 당신 거라고 말을 시킬 수 있어, 있어?”

이렇게 말하면서 아큐는 곧 뛰기 시작했다. 뒤에서 커다란 검정개 한 마리가 쫓아와 아큐의 다리를 물어뜯으려 하였다. 이 때 다행히 옷섶에서 무 하나가 떨어지는 바람에 그 검정개가 놀라 멈칫하였다. 그 틈에 아큐는 담장 위로 기어 올라가 밖으로 뛰어내렸다.

 

제6장 중흥에서 말로까지

그 후 한동안 보이지 않던 아큐가 웨이좡에 다시 나타난 것은 그 해 추석이 막 지난 무렵이었다. 날이 어둑어둑해질 무렵, 아큐는 게슴츠레한 눈을 하고 주막에 나타났다. 계산대로 다가가더니 허리춤에서 은전과 동전을 한 움큼 꺼내어 계산대 위에 뿌렸다.

“현금이다, 술 가져와!”

입고 있는 옷은 새로 맞춘 겹옷이었다. 보아하니, 허리춤에 큰 전대(돈이나 물건을 넣고 허리에 차거나 어깨에 메도록 만든, 폭이 좁고 긴 자루)를 찼는데, 묵직하게 늘어져서 허리띠를 바짝 졸라 매고 있었다. 그러자 심부름꾼, 주인, 술 손님, 행인 할 것 없이 모두가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마음속에서 존경심이 일어나는 사람도 있었다.

“호, 아큐! 돌아왔군! 돈을 많이 벌었나 본데!”

“응, 돌아왔어. 문 안에 들어갔다 왔지!”

아큐에 대한 소문은 당장 온 마을에 퍼졌다. 사람들은 새옷을 입고 나타난 아큐가 어떻게 돈을 모았는지 알고 싶어했다. 주막에서, 찻집에서, 사당 처마 밑에서 사람들은 아큐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고, 어느 틈에 아큐는 그들에게 존경받는 인물이 되어 있었다.

아큐의 말로는 문 안 거인(擧人, 과거에 급제한 선비) 영감 댁에서 일을 거들었다고 했다. 이 한 마디만으로도 듣는 사람들은 모두 숙연해졌다. 거인은 사방 일백 리를 통틀어서 그 사람 하나뿐이었다. 그 댁에서 일을 거들었다는 것은 당연히 존경을 받아 마땅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아큐는 거인 영감이 실제로는 ‘개 같은 놈’이기 때문에 다시는 일을 거들고 싶지 않다고 했다. 사람들은 아큐의 말을 들으며 통쾌해 하기도 하고 탄식을 하기도 했다. 아큐가 거인 영감 댁에서 일을 거든다는 것은 애초부터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거들러 가지 않는다고 하니 아깝기도 했던 것이다.

“자네들, 사람 목 자르는 본 적이 있나? 허, 볼 만해. 혁명당을 죽이는데, 굉장했다구!”

아큐의 말을 듣고 있던 사람들이 몸을 흠칫했다. 그러자 아큐는 느닷없이 왕털보의 뒷덜미를 내려치며 “싹둑!” 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 왕털보는 깜짝 놀라 재빨리 목을 움츠렸다.

하여간 얼마 안 가서 아큐의 명성은 안방에 있는 여자들한테까지 좍 퍼졌다.

“쩌우치 댁은 아큐에게 남색 비단 치마를 샀대.”

“자오바이옌 어머니도 애들에게 주려고 빨간 모슬린 저고리를 샀다는군. 단돈 30전에 말이야.”

여자들은 마주 앉아 이런 말을 주고받으며, 아큐가 나타나길 눈 빠지게 기다렸다. 아큐에게 비단 치마를 산 쩌우치 댁은 너무 기쁜 나머지, 자오 마님에게 들고 가 자랑을 하였다. 자오 마님은 싸고 좋은 털배자를 사고 싶다며, 쩌우치 댁에게 즉시 아큐를 찾아 데려오라고 하였다. 자오 씨 댁 식구들은 초조하게 아큐를 기다렸다. 한참 만에야 아큐가 쩌우치 댁을 따라 들어왔다.

“아큐, 문 안에 가서 돈을 벌었다지? 다름 아니라 내가 좀 필요한 것이 있어 그러는데…….”

“다 팔고 남은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 팔았어? 그럼, 이 다음에라도 물건이 생기면 먼저 우리 집으로 가져오게나.”

아큐는 내키지 않다는 듯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밖으로 나갔다. 자오 영감과 수재는 아큐의 불손한 태도에 몹시 화가 났다. 그래서 이 염치 없는 놈을 마을에서 아예 쫓아내 버릴까 하고 생각했지만, 그건 너무 심한 것 같아 그만두었다.

한편 건달패들은 아큐에게 돈을 벌게 된 내막을 꼬치꼬치 캐물었다. 아큐는 숨기려는 기색도 없이 오히려 우쭐거리며 자기 경험을 털어놓았다. 사실은 거인 영감 댁에서 일을 한 게 아니라 도둑질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아큐가 직접 담을 넘은 것은 아니고, 자기는 단지 밖에서 물건만 받아 냈다고 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아큐가 좀도둑에 불과하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이로 해서 마을 사람들은 ‘역시 아큐는 두려워할 만한 존재’가 못 된다고 생각하였다.

 

제7장 혁명

아큐가 전대를 자오바이옌에게 팔아 넘긴 그 날, 커다란 배 한 척이 자오 씨 댁 나루터에 닿았다. 그것은 바로 거인 영감의 배였다. 그 배는 웨이좡에 굉장한 불안을 실어다 주었다. 정오도 못 되어 온 마을이 술렁거렸다. 혁명당 때문에 거인 영감이 우리 마을로 피난 왔다는 소문이 순식간에 퍼져 나갔기 때문이다.

아큐는 문 안에 갔을 때 혁명당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또 자기 눈으로 혁명 당원이 참수(목을 벰)당하는 것을 실제로 보기도 했다. 그러나 어디선가 혁명당은 반역이며, 반역은 그에게 고난을 가져온다는 말을 주워 들은 적이 있어서, 그들을 막연히 증오해 오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들이 백 리 사방으로 이름을 떨치는 거인 영감까지 두렵게 하다니, 아큐로서는 신명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혁명이란 것도 괜찮은데……. 개 같은 놈의 세상을 뒤집어 엎어라. 빌어먹을……, 나도 혁명당이 돼야지. 혁명이다, 혁명! 좋았어! 내가 갖고 싶은 건 모두 내 것이다. 어떤 계집이든 모두!’

자오 씨 댁 두 나리와 자오바이옌도 대문간에 나와 혁명 이야기를 주 고받고 있었다. 아큐는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노래를 부르며 그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자오 영감이 아큐를 불러 세웠다.

“아큐 군! 아큐 군, 저어…… 요새 돈 잘 벌리나?”

“돈? 물론, 갖고 싶은 건 모두…….”

“아……큐 형, 우리네처럼 가난뱅이야 괜찮겠지?”

자오바이옌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짐짓 혁명당의 속셈을 떠보려는 듯이.

“가난뱅이라고? 너야 나보다 부자잖아.”

아큐는 그렇게 말하고는 계속해서 길을 걸어갔다. 그는 마음이 들떠서 이리저리 휘젓고 다니다가 밤이 이슥해서야 투구츠로 돌아왔다.

‘혁명? 재미있는데……. 웨이좡의 촌놈들은 아마 볼 만할 거야. 무릎을 꿇고 애걸하겠지. 아큐, 목숨만 살려 줘. 누가 들어 준대? 첫 번째로 죽어야 할 놈은 자오 영감, 수재, 또 가짜 양놈……. 그러고 나서 수재 여편네의 침대를 우선 투구츠로 옮겨 놓고, 그리고 첸 가(哥)네 탁자와 의자를 늘어놓고……. 그 다음엔 여자를 데려와야지. 쩌우치네 딸년은 아직 애송이고, 그리고 가짜 양놈 여편네는 변발도 없는 녀석과 잤으니, 흥 좋은 물건은 못 되지.”

아큐는 이런저런 공상을 하다가 잠이 들었다. 이튿날 아침, 느지막이 일어나 거리로 나가 보니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여전히 배도 고팠다. 아큐는 천천히 걸어 어느덧 정수암에 이르렀다.

암자는 지난 번처럼 조용했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문을 두드려 댔다. 검은색 대문에 흠집이 났을 때에야 누군가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늙은 여승이 고개를 내밀었다.

“뭐하러 또 왔지?”

“혁명이다. 알고 있지?”

“혁명, 혁명이라고? 혁명은 벌써 했어. 도대체 네놈들이 혁명한다고 우리더러 어쩌란 말이냐?”

늙은 여승은 핏대를 올리며 말했다.

“뭐?”

“몰랐어? 그놈들이 벌써 혁명했어.”

“누가?”

“수재하고 양놈하고!”

아큐는 너무나 뜻밖이었으므로 얼떨떨해졌다. 늙은 여승은 아큐가 풀이 꺾이는 것을 보고 재빨리 문을 잠가 버렸다.

한편 자오 씨 댁의 수재는 혁명당이 밤 사이에 입성했다는 것을 알자, 잽싸게 변발을 머리 꼭대기에 틀어 얹었다. 그리고 여태껏 상대도 하지 않던 가짜 양놈 첸 가를 아침 일찍 방문했다. 그들은 곧 동지가 되어서 혁명에 나서기로 약속했다. 그들은 머리를 짜낸 끝에 정수암에 ‘황제 만세 만만세’라고 적힌 용패가 있다는 걸 생각해 냈다. 그래서 즉시 암자로 달려가서 혁명을 한 것이다. 늙은 여승이 막아서서 잔소리를 했으나, 그들은 여승을 만주 정부와 한 패로 몰아 몽둥이 세례를 주었다. 그들이 가 버린 뒤에 여승이 정신을 차려 보니, 용패는 벌써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아큐는 이러한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된 것이었다. 그는 오늘 아침에 늦잠을 잤던 것이 무척 후회스러웠다. 그런데 괘씸한 일은 그들이 자기를 부르러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제8장 혁명 금지

웨이좡의 인심은 조금씩 진정되어 갔다. 다만 변발을 머리 꼭대기에 틀어 얹은 사람이 점차 늘어 갔다. 여름이라면 변발을 머리 꼭대기에 틀어 얹거나 잡아 매는 일이 조금도 신기할 것이 없겠지만, 지금은 늦가을이었다. 그렇게 뒤통수를 훵하게 비운 채로 거리를 나다니면, 사람들은 “와, 혁명당이 온다.” 하고 소리 쳤다. 아큐는 그 소리가 그지없이 부러웠다. 게다가 아큐는 수재가 머리를 그렇게 틀어 얹었다는 말을 듣자, 자신도 흉내를 내고 싶었다. 그는 대젓가락으로 변발을 머리 꼭대기에 틀어 얹었다. 그리고 한참 동안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어 거리로 나섰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큐는 기분이 나빠 아무에게나 짜증을 부렸다.

수재는 가짜 양놈에게 부탁하여 자유당에 가입하고 복숭아 은배지를 달게 되었다. 자오 영감은 이것 때문에 갑자기 더 훌륭해져서는 아들이 처음 수재가 되었을 때보다도 더 오만해졌다. 아큐를 봐도 본 체도 하지 않았다. 아큐는 매우 못마땅하였다. 혁명을 하려면 그저 변발만 틀어 얹는 것만으로는 안 되며, 일단 혁명당과 연줄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가짜 양놈을 찾아가 의논을 해 보기로 했다.

가짜 양놈네 집 대문은 열려 있었다. 가짜 양놈은 뜰 한가운데 서 있었는데, 새까만 서양 옷에다 복숭아 은배지를 달고 있었다. 바로 옆에는 자오바이옌과 건달패 세 놈이 공손한 자세로 그의 연설을 듣고 있었다. 아큐는 슬그머니 걸어가 자오바이옌 뒤에 섰다. 가짜 양놈은 그를 보지 못했다. 그는 눈이 뒤집힐 정도로 연설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아큐는 그가 잠시 멈추기를 기다렸다가 마침내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에…… 저…….”

“뭐야?”

“저도…….”

“나가!”

“저도 혁명을…….”

“썩 꺼져!”

가짜 양놈은 지팡이를 높이 쳐들었다. 자오바이옌과 건달패들도 덩달아 소리 쳤다.

“선생께서 나가라시잖아. 말이 안 들려!”

아큐는 할 수 없이 물러나올 수밖에 없었다. 거리로 나오자 속에서 서글픔이 끓어 올랐다. 아큐는 여태까지 이렇듯 진한 쓸쓸함을 맛본 적이 없었다. 모든 것이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모욕감까지 생겼다. 앙갚음을 하기 위해 당장 변발을 풀고 싶었지만 그러지도 못했다. 그는 언제나처럼 한밤중까지 쏘다니다가 선술집이 문을 닫을 때쯤 해서야 터벅터벅 투구츠로 돌아왔다.

딱, 펑!

그 때, 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왔다. 아큐는 쓸데없이 참견하기를 좋아했다. 곧 어둠 속을 내달았다. 그러자 맞은편에서도 사람 하나가 이리로 달려오는 게 아닌가. 아큐는 덩달아서 급히 몸을 돌려 그 사람을 뒤따라 도망쳤다. 그 사람이 골목을 돌면 자기도 돌고, 그 사람이 서면 자기도 섰다.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샤오디였다.

“자…… 자오 씨 댁이 약탈당했어!”

샤오디는 씩씩거리며 말했다. 그리고는 어디론가 달려가 버렸다. 아큐는 살금살금 길 모퉁이를 돌아가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왁자지껄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자세히 보니, 흰 투구에 흰 갑옷을 입은 사람들이 연달아 궤짝과 가구를 메고 나왔다. 아큐는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는 싫증이 나도록 지켜 본 후에야 투구츠로 돌아왔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몹시 불쾌했다. 웨이좡에 드디어 흰 투구에 흰 갑옷을 입은 사람들이 왔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기를 부르러 오지 않았다. 좋은 물건을 무수히 들어냈는데도 내 몫은 없었다. 이건 전부 그 빌어먹을 가짜 양놈 때문이다. 내가 혁명하는 것을 그놈이 금지시켰다. 그렇지 않았으면 이번에 내 몫이 없을 리가 없지. 아큐는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었다.

“내가 혁명하는 것을 막다니, 네놈만 혁명하냐? 좋아, 혁명해라. 혁명은 목이 잘리는 죄목이니까. 내가 고발해야지. 네놈이 문 안에 끌려가 목이 잘리는 꼴을 보아야겠다. 싹둑, 싹둑!”

 

제9장 대단원

자오 씨 댁이 약탈당하자 웨이좡 사람들은 매우 통쾌해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서워했다. 아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나흘 뒤, 아큐는 한밤중에 느닷없이 들이닥친 사람들에게 붙잡혀 문 안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아큐는 목책(말뚝 같은 것을 죽 늘여 박은 울타리)이 둘러쳐진 어느 집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넓은 대청 앞에는 머리를 빡빡 민 늙은이가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병정들이 늘어서 있었다. 양옆에는 또 두루마기를 걸친 사람들이 십여 명 서 있었다. 그들도 늙은이처럼 머리를 빡빡 깎고 있었는데, 등에는 가짜 양놈처럼 한 자쯤 자란 머리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모두가 험악한 얼굴로 아큐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큐는 무릎에서 힘이 빠져 나가 바닥에 털썩 꿇어앉고 말았다.

“서서 말해! 꿇어앉지 마!”

두루마기를 입은 사람이 소리 쳤다. 하지만 아큐는 몸이 저절로 쭈그러 들어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노예 근성!”

두루마기를 입은 사람이 경멸하듯 말했다.

“사실대로 말해 봐. 나는 다 알고 있으니까. 바른 대로 말한다면 놓아 줄 수도 있어.”

“저는 원래…… 혁명을 하려고…….”

아큐는 멍하게 앉아 있다가 겨우 떠듬떠듬 말했다.

“그럼 어째서 여기에 오지 않았지?”

“가짜 양놈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거짓말! 이제 와서 그렇게 말해도 늦었어. 지금 너의 패거리는 어디 있지?”

“네, 뭐라고요?”

“그 날 밤, 자오 씨네 집을 턴 패거리 말이야.”

“그놈들은 저를 부르러 오지 않았습니다. 자기들끼리만 들고 가 버렸습니다요.”

“어디로 갔지? 말하면 놓아 주지.”

“저는 모릅니다. 그놈들은 저를 부르러 오지 않았습니다.”

“달리 할 말은 없나?”

늙은이가 부드럽게 물어 왔다. 아큐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할 말이 없었다.

“없습니다.”

그러자 두루마기 입은 사람 하나가 종이 한 장과 붓 한 자루를 아큐 눈앞에 가져오더니 붓을 쥐어 주려고 하였다. 아큐는 깜짝 놀랐다. 그는 한 번도 붓을 쥐어 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큐가 어쩔 줄을 몰라 머뭇거리자, 그는 손가락으로 한 군데를 가리키며 서명하라고 하였다.

“저……, 저는…… 글자를 모릅니다.”

아큐는 붓을 움켜잡은 채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그럼, 너 좋을 대로 동그라미나 하나 그려 넣어!”

아큐는 동그라미를 그리려고 했지만 손만 부들부들 떨릴 뿐이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아큐를 위해 종이를 땅바닥에 펴 주었다. 아큐는 엎드려서 젖 먹던 힘까지 내어 동그라미를 그렸다. 그런데 빌어먹을, 붓이 말을 듣지 않았다. 부들부들 떨면서 간신히 마무리하려고 하는데 붓이 자꾸만 삐져나갔다. 그려 놓고 보니 수박씨 모양이었다. 이윽고 사람들은 그를 집 모퉁이에 있는 자그마한 방에 가두었다.

아큐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살다 보면 어떤 때는 끌려 나가기도 하고 끌려 나오기도 하는 것이며, 동그라미를 그려야 할 때도 있는 것이려니 생각했다. 다만 동그라미가 제대로 안 그려진 것이 하나의 오점으로 마음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

다음날 아큐는 다시 대청 앞으로 끌려 나왔다. 늙은이는 아주 부드럽게 말했다.

“할 말 없나?”

“없습니다.”

두루마기를 입은 사람과 짧은 웃옷을 입은 사람들이 갑자기 달려들어 그에게 까만 글씨가 씌어 있는 흰 무명 등거리(조끼처럼 등에 걸쳐 입는 홑옷)를 입혔다. 아큐는 매우 기분이 나빴다. 이건 상복 같은데, 상복을 입으면 재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동시에 두 손이 등뒤로 묶이어 목책 밖으로 끌려 나갔다.

아큐는 포장이 없는 수레에 올려졌다. 수레는 곧 움직였다. 앞에는 총을 멘 병정과 자위 대원이 있었고, 양 옆에는 구경꾼들이 쑤군거리고 있었다. 그제서야 아큐는 깨달았다. 이거 목 잘리러 가는 게 아닌가. 그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귀에서 윙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정신을 잃지는 않았다. 살다 보면 목이 잘리는 수도 있으려니 생각했다.

그런데 왜 형장 쪽으로 가지 않는 것일까? 그는 죄인을 이렇게 조리돌린다는 것을 몰랐다. 그러나 알았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살다 보면, 어느 때는 조리돌리는 일도 있으려니 하고 생각했을 테니까. 아큐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들이 개미떼처럼 따라오고 있었다. 뜻밖에도 길 옆 구경꾼 속에 우 씨 아줌마가 있었다. 정말 오래간만이었다. 아큐는 자신이 배짱도 없이 노래도 한 마디 부르지 못하는 것이 부끄러워졌다. 머릿속에서 그가 아는 노래 제목이 바람개비처럼 휘돌았다. 그래, ‘쇠채찍을 손에 잡고 네놈을 칠 테다’를 부르자. 그는 손을 들어 올리려고 하다가, 자신의 두 손이 묶여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노래 부르기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 속에서 승냥이가 울부짖는 듯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수레는 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아큐는 넋이 나간 듯한 표정으로 구경꾼들을 바라보았다. 그 때, 그의 머릿속에 4년 전에 산기슭에서 만났던 굶주린 이리 한 마리가 떠올랐다. 그는 어찌나 무서웠던지 거의 죽어 나자빠질 지경이었다. 다행히 손에 도끼 한 자루를 들고 있었기에, 마음을 다져 먹고 무사히 웨이좡까지 올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이리의 눈은 잊혀지지 않았다. 불길하고도 무서웠다. 그 두 눈은 도깨비불처럼 번쩍거렸다. 멀리서 쫓아와 자기 살을 꿰뚫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지금 그는 또다시 여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무서운 눈알을 보았다. 그 눈은 이미 자기 살을 씹어 삼켜 버렸으며, 이제는 자기 살 외에 다른 것까지 씹어 삼키려 하고 있었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를 유지한 채 따라오면서, 이 눈알들은 하나로 합쳐져 벌써 그의 영혼을 물어뜯고 있었다.

“사람 살려!”

그러나 아큐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미 눈앞이 캄캄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귀에서 윙하는 소리가 났다. 온 몸이 먼지처럼 풀썩 흩어지는 것 같았다.

여론을 들어 보면, 웨이좡에서는 별로 이의가 없었다. 사람들은 모두 아큐가 나쁘다고 말했다. 그가 총살당한 것은 그가 나쁘다는 증거라는 것이었다. 나쁘지 않았다면 왜 총살당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문 안에서는 대부분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총살은 목 자르는 것만큼 볼 만한 것이 못 되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건 얼마나 시시한 사형수인가. 그토록 오래 조리를 돌렸는데도 노래 한 마디 듣지 못하다니! 그들은 헛걸음만 쳤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허세욱 옮김)

 

제 2 장  우승의 기록

아큐는 성명이나 본적만 애매한 게 아니라 그의 이전 행장(行狀 : 평생 동안 지내 온 일) 역시 모호하다. 왜냐 하면, 웨이좡 사람들이 아큐에 대해 관심을 가질 때라고는 그들에게 일손이 딸릴 때나 아큐를 곯려 줄 때뿐이므로, 여태 그의 행장 같은 것에는 유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큐 자신도 또한 말하려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과 말다툼할 때나 가끔 눈을 부릅뜨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도 예전엔…… 네놈보다도 훨씬 잘 살았어. 네까짓게 뭐야!"

아큐는 집도 없이 웨이좡에 있는 토곡사(土谷祠 : 지신에게 제사지내는 사람)에서 살았다. 또 고정된 직업이 없이 여러 사람들 집에서 품팔이를 하였다. 보리를 베라면 보리를 베고, 방아를 찧으라면 방아를 찧고, 배를 저으라면 배를 저었다. 오래 걸릴 일이 있을 때는 임시로 주인 집에 머무르기도 했지만, 일이 끝나면 가 버리곤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바쁠 때나 아큐를 생각했다. 그것도 날품팔이로서 기억하지, 행장 따위로 기억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가할 때는 아큐 자체마저 모두 잊어 버리는 판국이니 행장 같은 것은 더 말할 나위 없었다. 한번은 어떤 늙은이가 "아큐는 일을 정말 잘 하는데!" 하고 칭찬한 적이 있었다. 그 때 아큐는 웃옷을 벗어 붙인 채, 비쩍 말라서 볼품없는 꼴로 그 늙은이 앞에 버티고 서 있던 참이었다. 다른 사람은 이 말이 진심인지 비꼬는 건지 분간할 수가 없었는데, 아큐만은 매우 좋아했다.

아큐는 또 자존심이 강해서 웨이좡에 살고 있는 사람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심지어 문동(文童 : 서당에서 함께 글공부하는 아이) 두 분에 대해서도 일말의 가치조차 없다고 여기는 터였다. 문동이라고 하면, 장래에 수지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자오 나리와 첸[錢]나리가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것은 그들이 돈이 많다는 것 외에도, 바로 문동의 아버지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큐는 정신적으로 특별히 숭배한다는 것을 표시하지 않았다. 그는 "내 아들이라면 더 훌륭했을 거야." 하고 생각했다. 더욱이 그는 성(城)에 몇 번씩이나 들어갔던 적이 있었다. 아큐는 이것만으로도 상당한 큰 자부심을 가졌다. 그러나 그는 성 안 사람들도 얕보았다. 예를 들어, 길이가 석 자에 넓이가 세 치 되는 나무 판자로 만든 걸상을 웨이좡에서는 '장등(長 )'이라고 부르며 그도 또한 그렇게 부르는데, 성 안 사람들은 '조등(條 )'이라고 불렀다. 그는 그건 틀린 것이며 웃기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기름에 지진 도미에 웨이좡 사람들은 파를 반 치 길이로 썰어 넣는데, 문 안에서는 가늘게 채 쳐서 넣는다. 그의 생각에는 이것도 틀려 먹고, 웃기는 일이었다. 그러나 웨이좡 사람들은 그야말로 세상 구경도 못 해 본 촌뜨기들이라, 성 안의 생선 튀김마저도 본 적이 없는 것이다.

아큐는 '예전에 잘 살았고' 견식(見識 : 견문과 학식)도 높을 뿐만 아니라, '못하는 게 없고' 거의 '완벽한 인간'이었지만 아깝게도 신체상 결점이 있는 게 흠이었다. 가장 사람을 골치 아프게 하는 것은, 그의 머리에 언제 생겼는지도 모르는 라이창빠(부스럼으로 생긴 대머리)였다. 이것도 비록 그의 몸에 있는 것이지만, 아큐의 생각에도 이것만은 별반 자랑스러운 것이 못 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라이란 말을 꺼렸다. 라이에 가까운 발음도 일체 하려 하지 않았다. 나중에는 점점 범위를 넓혀, '빛나다[光]'나 '밝다[亮]'도 꺼려했다. 그러다가 '등불[燈]'이나 '촛불[燭]'이란 말까지도 하려 하지 않았다. 만약 꺼려하는 짓을 범했다 하면, 그것이 고의로 한 짓이거나 무심코 한 짓이거나 간에 아큐는 곧 대머리 흉터가 온통 시뻘겋게 변해 가지고 상대방을 어림쳐 본다. 상대가 말을 더듬으면 욕을 해대고, 힘이 약하면 때리려고 덤벼들었다. 그렇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당하는 쪽은 항상 아큐였다. 그래서 그는 점점 방침을 바꾸어 대개 흘겨보기로만 했다.

누가 미처 생각이나 했을까? 아큐가 눈흘겨보기주의를 채택한 후에 웨이좡의 한량패들은 더욱 재미있어 하며 그를 놀려 댈 줄이야! 그들은 아큐를 만나기만 하면 일부러 놀란 척하며 말했다.

"하, 밝아졌다."

아큐는 으레 화를 내며 눈을 흘긴다.

"이제 보니 등잔이 여기 있었군!"

그들은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아큐는 달리 보복할 말을 생각해 내려고 하였다.

"네 놈들은 상대도 안 돼……."

이런 때 그는 자기 머리에 있는 대머리 흉터는 고상하고 영광스러운 흔적이지 결코 평범한 흔적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아큐는 식견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곧 금기(禁忌)에 저촉된다는 것을 알고 더 이상 말하려 하지 않았다.

한량패들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는지 그를 약올리다가 드디어는 때리기까지 했다. 아큐는 형식상으로는 패했다. 한량패들은 그의 누런 변발을 쳐들어 벽에 너댓 번을 쿵쿵 박아 주고는 그제서야 만족해서 승리를 자랑하며 가 버렸다. 아큐는 한참 동안 서서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이 놈들에게 맞은 거로 치자. 요즈음 세상은 정말 돼먹지 않았거든…….' 그러는 그도 만족하게 승리를 얻은 양 가 버렸다. (허세욱 옮김)

(중략)

 

제 9장 대단원  

조씨 댁이 약탈을 당한 뒤 미장 사람들은 되게 통쾌해 하면서도 또 두려워했다. 아큐 역시 그것은 마찬가지였었다. 그러나 나흘 뒤 아큐는 밤중에 갑자기 체포되어 현성으로 연행되었다. 그 때는 마침 캄캄한 밤이었다. 일대의 병사, 일대의 자경단원, 일대의 경찰, 그리고 다섯 사람의 탐정이 몰래 미장에 들어와 야음을 이용하여 사당을 포위하고 문 정면에 기관총을 걸어놓았다. 그러나 아큐는 튀어나오지 않았다. 한참 동안 아무런 동정도 없었다.  

대장이 조급해져 이십 냥의 상금을 걸었더니 자경단원 두 사람이 위험을 무릅쓰고 담을 넘어 들어갔다. 내외 호응하여 일거에 쳐들어가 아큐를 잡아 냈다. 사당밖에 걸어 놓은 기관총 곁으로 잡혀 나왔을 때에야 그는 겨우 정신이 좀 들었다.  

성내에 도착했을 때는 벌써 오정 때였다. 아큐는 자기가 어느 허름한 관청으로 끌려 들어가 대여섯 번 모퉁이를 돌고 나서 조그만 방에 처박혀졌음을 알았다. 그가 비틀비틀 하는 찰나에 통나무로 만든 목책의 문이 그의 발꿈치를 따라오듯 닫혔다. 목책 이외의 삼면은 모두 벽인데 자세히 보니 방 귀퉁이에도 또 두 사람이 있었다.  

아큐는 좀 불안했으나 결코 그렇게 괴롭히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의 사당 침실이라야 이 방보다 더 편안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 두 사람도 시골뜨기인 모양인데, 차차 그들과 사귀게 되었다. 한 사람은 그의 조부 대에 체납한 묵은 소작료를 지불하라고 거인 나으리에게 고소당했다는 것이며, 또 한 사람은 무슨 일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들은 아큐에게도 물었다.  

"나는 모반하려 했기 때문이오."  

하고 아큐는 분명하게 대답하였다.  

그는 오후에 또 목책문 밖으로 끌려 나갔다. 대청에 가 보니 상좌에는 머리를 빡빡 깎은 노인이 한 사람 앉아 있었다. 아큐는 그가 중인가 의심했다. 아래쪽을 보니 한 소대의 병사들이 서 있고 책상 옆에도 긴 두루마기를 입은 사람이 10여 명 서 있는데 노인처럼 머리를 빡빡 깎은 사람도 있고, 한 자 남짓한 긴 머리를 가짜 양놈처럼 뒤로 늘어뜨린            사람도 있었다. 모두 무서운 얼굴에 성난 눈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다. 그는 이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무슨 내력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자 별안간 무릎의 힘이 저절로 빠져 곧 끓어앉고 말았다.  

"서서 말씀 드려라! 꿇어 앉으면 안돼!"  

긴 두루마기를 입은 사람들이 모두 꾸짖었다.  

아큐는 그 말뜻을 알아듣기는 했으나 암만해도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몸이 저절로 움츠러들어 그만 꿇어 엎드리고 말았다.  

"노예 근성 ……!"  

긴 두루마기를 입은 사람이 경멸하듯 말했으나, 또 일어서라고는 하지 않았다.  

"너 사실대로 불어라, 경치지 않게. 내 다 알고 있으니까. 불면 널 석방해 줄 테니!"  

까까머리 노인이 아큐의 얼굴을 뚫어지게 보며 침착하게 똑똑히 말했다.  

"불어라!"  

긴 두루마기를 입은 사람도 큰 소리로 말했다.  

"사실, 전 여기 와서 가담하려고 ………"  

아큐는 멍하니 생각하다가 겨우 떠듬거리며 말했다.  

"그러면 왜 오지 않았는가!"  

하고 노인은 부드럽게 물었다.  

"가짜 양놈이 허락하질 않았습죠!"  

"허튼 소리마! 이제 와서 말해도 늦었어. 지금 너희패는 어디 있는가?"  

"무슨 말씀인지?  

"그날 밤 조씨 댁을 약탈했던 놈들 말야."  

"그 놈들은 저를 부르러 오지 않았었습죠. 제 놈들끼리 멋대로 운반했습죠."  

아큐는 이렇게 말하고는 툴툴댔다.  

"어디로 달아났지? 말하면 너는 석방해 준다. "  

노인은 더욱 부드럽게 물었다.  

"너 무슨 더 할 말은 없는가?"  

아큐는 생각해 보았으나 별로 할 말도 없으므로,  

"없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긴 두루마기를 입은 한 사람이 종이 한 장과 붓 한 자루를 가지고와 아큐 앞에 놓고 붓을 그의 손에 쥐어 주려고 했다. 아큐는 이 때 거의 흔비 백산하도록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그의 손이 붓과 상관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어떻게 쥐는 것인지 정말 몰랐다. 그랬더니 그 사람은 또 한군데를 가리키며 그에게 서명하라고 했다.  

"저는 ……글을 쓸 줄 모르는뎁쇼."  

아큐는 붓을 덥석 움켜잡고는 황송하고 부끄러운 듯이 말했다.   

"그러면 너 좋은 대로 동그라밀 하나 그려라!"  

아큐는 동그라미를 그리려고 했으나 붓을 잡고 있는 손이 떨리기만 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그를 위해 종이를 위해 땅 위에 펴 주었다. 아큐는 엎드려 평생의 힘을 다 들여 동그라미를 그렸다. 그는 남들에게 웃음거리가 될까 두려워 동그랗게 그리려고 마음먹었으나 이 밉살스러운 붓이 지나치게 무거운 데다 또 말을 듣지 않아 떨면서 간신히 그려 거의 마무리하려 할 때 붓이 위로 솟구쳐 수박씨 모양이 되고 말았다.   

아큐는 자기가 동그랗게 그리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으나 그 사람은 문제삼지도 않고 재빨리 종이와 붓을 가지고 가 버렸다. 여러 사람이 또 그를 재차 목책문 안에 처넣었다.   그는 다시 목책문 안에 들어갔어도 그리 고민하지도 않았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난 이 상 때로는 감옥에 들어가는 일도 있을 게고, 또 때로는 종이 위에 동그라미를 그려야 할 때도 있으려니 생각했다. 다만 동그라미가 동그랗게 그려지지 않은 것만은 그의 행장상의 하나의 오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곧 석연해졌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이라야만 동그란 동그라미를 그릴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잠들고 말았다.   

그러나 이날 밤 거인 나으린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는 대장과 시비를 했다. 거인 나으리는 장물의 반환이 급선무라고 주장했고, 대장은 요사이 거인 나으리를 그다지 안중에 두지 않게 되었으므로 책상을 두드리고 걸상을 치면서 말했다.   

“일벌백계입니다. 보십쇼! 내가 혁명당이 된 지 20일도 안 되는데 약탈 사건은 10여 건인데다 범인은 모두 미궁에 빠졌으니, 내 체면은 무엇이 된단 말이오? 기껏 잡아 놓으면 당신은 또 엉뚱한 소릴하고, 안돼요! 이건 내 권한이닌까!”   

거인 나으린 난처했으나 그래도 자기 주장을 견지하고 만약 장물을 돌려 주지 않으면 자기는 즉각 민정 협조의 직무를 사임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장은   

“마음대로 하슈!”   

하고 말했다. 그래서 거인 나으리는 그날 밤 한잠도 못 잔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그는 다음날도 사임하지는 않았다.   

아큐가 세 번째로 목책문에서 끌려 나온 것은 거인 나으리가 한잠도 못 잔 그 밤의 다음날 오전이었다. 그가 대청에 와 보니까 상좌에는 역시 예의 그 까까머리 노인이 와 앉아 있었다. 아큐도 역시 전처럼 꿇어 앉았다.   

노인은 부드럽게 물었다.   

“너, 무슨 할 말이 없는가?”   

아큐는 생각해 보았으나 별로 할 말도 없었으므로 곧, “없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긴 두루마기를 입은 여러 사람과 짧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별안간 그에게 무명으로 된 흰 둥거리를 입혔다. 거기에는 무슨 검은 글자가 씌어 있었다. 아큐는 대단히 기분이 나빴다. 왜냐하면 그것은 마치 상복을 입은 것 같았으며, 상복을 입는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와 동시에 그는 양손을 뒤로 묶인 채 곧장 관청 밖으로 끌려 나왔다.   

아큐는 포장 없는 차에 매어 올려졌다. 짧은 옷을 입은 사람이 몇 사람 그와 함께 같은 자리에 탔다. 이 차는 곧 움직이기 시작했다. 앞엔 총을 멘 병대와 자경단원이 있고, 양쪽엔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는 많은 구경꾼이 있었다. 뒤는 어떤가? 아큐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완전히 정신을 잃지는 않았다. 때로는 조급해지기는 했으나 때로는 도리어 태연해졌다. 그의 심중으로는 사람이 천지간에 태어난 바에야 때에 따라서는 목을 잘리는 일도 없으란 법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직도 길만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좀 이상했다. 어째서 형장쪽으로 가지 않는 것일까? 그는 이것이 조리돌림임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알았다 해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천지간에 태어난 이상 때로는 조리돌림을 당할 수도 있다고 그는 생각했을 것이니까.   

그는 깨달았다. 이것은 멀리 돌아서 형장으로 가는 길이다. 필연코 댕강 목을 잘리우는 것이다. 그가 경황없이 좌우를 둘러보았다. 인파가 개미떼처럼 따르고 있었다. 뜻밖에도 길가의 구경꾼들 속에서 오마의 모습을 발견했다. 정말 오래간 만이었다. 그녀는 성내에서 일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큐는 갑자기 자기가 배짱이 없어 결국 창 한 수도 못하는 것이 퍽 부끄러워졌다. 그의 생각은 마치 선풍처럼 뇌리를 선회했다. ‘청상과부의 성묘’는 당당치가 못하고, ‘용호상쟁’ 중의 ‘후회해도 소용없다 …’도 힘차지 않다. 역시 ‘손에 잡은 고들개 철편, 네 놈을 치리’로 하자. 그는 동시에 손을 쳐들려고 했으나 비로소 손이 묶이어 있음을 상기했다. 그래서 ‘손에 잡은 고들개 철편’도 부르지 않았다.   

“20년만 지나면 다시 태어나……”   

아큐는 이것 저것 생각하던 중 이제까지 한 번도 입에 담아 본 적이 없는 틀에 박힌 사형수의 문구가 절로 입에서 튀어나왔다.   

“잘한다!”   

군중 속에서 이리의 울부짖음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차는 쉬지 않고 전진했다. 아큐는 갈채 소리 가운데서 눈알을 굴려 오마를 보았으나, 그녀는 조금도 그에게는 신경을 쓰지 않는 것같이 그저 병정들이 메고 있는 총만을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아큐는 그래서 재차 갈채하는 사람들을 주욱 휘둘러 보았다.   

이 찰나 그의 사념은 또 선풍처럼 뇌리를 선회했다. 4년 전, 그는 산기슭에서 주린 이리 한 마리를 만났었다. 이리는 가까이 오지도 않 멀리 떨어지지도 않은 채 어디까지고 그의 뒤를 따라와 그의 고기를 먹으려 했다.   

그는 그때 무서워서 거의 죽을 것 같았다. 다행히 손에 도끼 한 자루를 들고 있었으므로 그것을 믿고 담이 세어져 간신히 미장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이리의 눈알은 영원히 기억에 남았다. 그것은 불길하고도 무서웠으며, 빤짝빤짝 도깨비불처럼 빛나는 두 눈이 멀리서 그의 육체를 꿰뚫 것 같았다. 그런데 이번에 또 그는 여태껏 보지 못했던 더욱 두려운 눈을 본 것이다. 그것은 둔하고 또 날카로워 벌써 그의 말을 씹어 먹으려는 듯 언제까지도 멀지도 않게 그의 뒤를 따라오는 것이었다. 이런 눈알들이 하나로 합해졌다 싶더니 벌써 그곳에서 그의 영혼을 물어뜯고 있었다.   

‘사람 살류…“   

그러나 아큐는 입밖에 내서 말하지는 않았다. 그는 벌써부터 두 눈이 깜깜해지고 귓속은 멍해져 마치 전신이 작은 티끌같이 날아서 흩어지는 듯함을 느꼈다.   

당시의 영향으로 말하면 가장 큰 영향을 입은 사람은 오히려 거인 나으리였다. 끝내 장물이 반환되지 않았으므로 그의 온 집안은 울음 바다가 되었다.   

그 다음이 조씨 댁이었다. 수재가 성내로 고소하러 갔다가 악질혁명당에게 머리채를 잘렸을 뿐 아니라 또 20냥의 포상금을 뜯겼기 때문이었다.   

이날부터 그들은 점점 전조의 유신다운 냄새를 풍겼다.   

여론으로 말하면 미장에서는 별로 이의도 없었고, 자연 모두를 아큐를 나쁘다고 말했다. ‘총살당한 것은 곧 그가 나쁜 증거야! 나쁘지 않았다면 무엇 때문에 총살을 당한단 말인가?’   

그러나 성내의 여론은 반대로 좋지 않았다. 그들의 대부분은 불만이었다. 총살은 참수만큼 볼 만하지도 못하군. 더구나 그렇게 변변찮은 사형수가 어딨겠는가! 그렇게 오래도록 거리를 끌려 돌아다니면서 그예 창 한 수 안 부르다니! 그들은 한 바퀴 헛걸음만 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요점 정리

지은이 : 루쉰(魯迅)

문학 갈래 : 장편 소설. 백화 소설. 풍자 소설

문학 성격 : 비판적. 풍자적

문학 배경 : 시간(청조 말기 신해 혁명 당시). 공간(중국의 미장이라는 조그만 마을)

구성 : 아큐라는 인물의 일대기적인 성격을 지닌 소설이기 때문에 전기적인 구성을 보이고 있다.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제재 : 아큐의 비극적 일생, 혁명기의 중국 사회

주제 : 권력과 술수에 희생되는 아큐의 비극적 일생. 변화 무쌍한 인정 세태에 따른 아큐의 비극적 죽음, 현실을 바로 인식하지 않고 자기 기만을 하는 인물과 사회의 운명, 열강 침략기 중국 민족의 노예 근성을 비판함(아큐라는 인물에 대한 탐색을 통해 이 작품의 주제 의식을 엿볼 수 있다. 그것은 과거의 미몽(迷夢)에서 깨어나지 못한 중국 사회의 몰락 과정을 고발하는 정신이라고 볼 수 있다. 아큐는 과거 중국의 병의 근원을 총체적으로 안고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특징 : 서술의 특성은 반어적인데, 아큐라는 하찮은 인물의 이야기에 거룩한 위인에게나 어울릴 '정전'이라는 제목을 썼다는 것부터가 그 예이다. 또한 평가나 판단을 자제하고 엄격하고 객관적인 태도로 냉정하게 서술하고 있어 더욱 주제를 부각시키고 있다. 이런 방식을 통하여 자가는 구시대의 모순 속에서 싹트고 있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의 조짐을 보여주고 있다. 아울러 전환기 중국 사회의 모습을 풍자함으로써, 중국 사실주의 문학의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의의 : 한문학의 전통적인 전(傳)의 형식으로 쓰여진 중국의 대표적인 근대 소설로 혁명기의 중국 사회를 풍자하였다.

줄거리 : 중국 작가 루쉰〔魯迅〕의 소설. 1921년 12월 4일부터 22년 2월 12일까지 《신보부간(晨報副刊)》에 매주 또는 격주로 게재되었다. 발표할 때의 서명은 파인(巴人)이었다. 뒤에 작자의 첫번째 창작집 《눌함》에 수록되었다. 정확한 이름도 모르는 고용농민 아큐〔阿Q〕를 주인공으로 하여 그 무렵 중국 민족의 약점인 <정신승리법>, 즉 노예근성에 날카로운 비판을 가함과 동시에 신해혁명(辛亥革命)에 끌리면서 오히려 억울한 죄를 뒤집어쓰고 처형되는 아큐의 운명을 그려 신해혁명의 본질을 비판하고, 중국혁명에서 참으로 구제되어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 그것을 가로막는 것은 무엇인가 등을 그려냈다. 중국 근대문학의 대표작이다.



1장은 작가가 아큐의 전기를 쓰기 어려운 점 등에 대해서 서술된다. 아큐의 이름 등 정체가 불확실한 점이 이야기된다. - 서 - 액자 외부

2장은 미장 마을에서 날품팔이를 하는 아큐의 사는 모습과 주위 사람들의 그에 대한 평판이나 대우,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등이 이야기된다. 아큐가 허드렛일을 하고 건달들에게 맞으면서도 정신 승리법으로 사태에 진지하게 대처하지 못하는 양태를 묘사한다. - 승리의 기록

3장은 아큐가 대갓집과 관계 있는 듯이 이야기하여  쫓겨나고 비구니를 희롱하는 등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 속 승리의 기록

4장은 대갓집 하녀에게 동침을 요구했다가 얻어맞고 벌금을 무는 이야기이다. - 사랑의 비극

5장은 하녀와의 사건 이후 일거리를 잃은 아큐가 일으킨 소란과 성 안으로 돌아온 아큐가 돈을 벌었다고 떠벌리지만 점차 그것이 도둑질한 것임이 드러나는 이야기이다. - 생계 문제

6장 중흥에서 말로까지

7장은 신해 혁명이 일어나 혁명당이 입성하자 공연히 으시대는 아큐의 모습이 묘사된다. - 혁명

8장은 혁명 이후에도 큰 변화가 없는 속에서 대갓집이 폭도에게 약탈되는 이야기이다. - 혁명 금지

9장은 아큐가  폭도의 한 사람으로 오인되어 사형당하는 이야기이다. - 대단원

아큐는 날품팔이꾼으로 지극히 무능하고 우매하지만 자존심은 강한 성격이다. 그는 자신에게 가해지는 모욕을 소위 정신적 승리법이라는 것으로 이겨 나간다. 근대화 과정의 혼란 속에서 제법 약삭빠르게 처신하려 하지만, 그의 무지와 급한 성격으로 인해 파멸에 이를 뿐이다. 웨이좡에까지 밀어닥친 신해 혁명의 물결을 보고, 그 혁명의 이념이며 구체적인 전개 과정에는 전혀 무지한 채 단지 힘을 쓸 수 있다는 것만으로 부화뇌동(附和雷同)하지만 결국 총살당하고 만다.


 

내용 연구

제 2 장 우승(優勝)의 기록(記錄)

아큐(阿Q)는 성명과 본적이 분명치 않을 뿐만 아니라, 이전의 행적(行跡 : 지내온 내력, 그것을 적은 글) 또한 분명치 않다. 왜냐 하면 미장 사람들의 아큐에 대한 관심은 다만 그에게 일을 부탁할 때나, 그를 두고 농담할 때에만 국한되어 있었으므로(아큐가 별로 내세울 것 없는 사람임을 말해 주고 있다. 이런 사람이 혁명의 와중에서 주요 반동으로 몰려 처형된다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통해 당시의 사회상을 비판하는 것이 이 소설의 의도이다.) 지금까지 그의 '행적'엔 유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를 부리는 데는 관심이 있지만 그의 삶 자체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말). 게다가 아큐 자신도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남과 말다툼할 때 이따금 눈을 부릅뜨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 집도 그전에는……네까짓 놈보다는 훨씬 더 잘 살았어! 네 따위가 무어야!"

아큐는 집도 없이 미장(未莊)의 사당(祠堂) 안에 살고 있었으며 일정한 직업도 없었다. 다만 날품팔이를 하면서, 보리를 베라면 보리를 베고, 쌀을 찧으라면 쌀을 찧고, 배를 저으라면 배를 젓기도 했다. 일이 좀 오래 걸릴 때는 임시로 주인집에서 묵기도 했으나 끝나면 곧 돌아갔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바쁠 때에는 아큐를 생각해 내나, 그것도 시킬 일이 있을 때뿐이지 그의 '행적'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한가해지면 아큐라는 존재조차도 잊어버리는 판국이니 '행적'은 더더욱 말할 나위도 없다. 꼭 한 번 어느 노인이, "아큐는 정말 일꾼이야!"하며 칭찬한 적이 있었다. 이 때 아큐는 온통 옷을 벗은 채로 멋적은 듯이 말라빠진 풍채로 그 노인 앞에 서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이 이 말이 진심인지 빈정거림인지 잘 짐작이 가지 않았으나, 아큐는 대단히 기뻐했다.

아큐는 또한 자존심이 강했다. 미장 주민들은 하나같이 눈에 차지 않았고(주민들은 아큐의 존경이나 부러움의 대상이 되지 않고 미흡하게 느껴지고) 심지어 두 분의 '글방 도련님'에 대해서까지도 일소(一笑 : 업신여기거나 깔보아 웃음)의 가치조차 없다고 여기는 표정을 지었다. 무릇 '글방 도련님'이란 장래 수재로 변할 수도 있는 사람이다. 조(趙 : 짜오) 나으리와 전(錢 : 치엔) 나으리가 주민들로부터 크게 존경을 받고 있는 이유도, 돈이 많다는 것 이외에 두 사람 모두 '글방 도련님'의 아버지라는 것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독 아큐는 마음 속으로 특별히 존경한다는 표시를 하지 않았다. '내 아들이었다면 더 훌륭했을 거야!'하고 그는 생각했다. 게다가 몇 번 성 안으로 들락거렸던 일은 자연 그의 자부심을 더욱 강하게 했다.(당시에 성내에 들어간다는 것은 자랑거리가 되지만, 아큐가 성내에 들어간 것은 허드렛일을 하기 위한 것이므로 자랑거리가 될 수 없는데도 자만심을 느낀다는 점에서 그의 인간 됨됨이가 허세적이고 형편없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다.)

그러나 한편 그는 성 안 사람들까지도 퍽 경멸하였다(앞에서는 성 안을 들락거렸던 일에 자부심을 가진다고 해 놓고 여기서는 다시 성 안 사람들을 경멸한다고 했다. 모든 사람을 아무런 이유 없이 경멸한다는 것을 풍자한 표현이다.). 예컨대, 길이 석 자, 폭 세 치의 널빤지로 만든 걸상을 미장에서는 '긴 걸상'[장등(長 )]'이라고 부르며, 그도 '긴 걸상'[장등]'이라고 불렀는데 성 안의 사람들은 '긴 의자[조등(條 )]'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이것은 틀린 일이며 가소로운 일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도미를 튀길 때 미장에서는 모두 반 치 길이의 파를 얹는데 성 안에서는 잘게 썬 파를 얹는다. 이것도 틀린 것이며 가소롭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미장 사람들이야말로 세상을 모르는 가소로운 시골뜨기들로 그들은 성 안의 생선 튀김은 본 적도 없다는 것이다.(아큐의 편벽한 사고를 나타내는 것으로 그 당시 중국인들을 풍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아큐가 '옛날에는 잘 살았고', 견식도 높고, 게다가 '정말 일꾼'이니 본래 '완벽한 인간'이라고 할 만하지만, 가련하게도 그에겐 약간의 신체상(체질상)의 결점이 있었다.

사람들에게 가장 놀림을 받는 것은, 그의 머리에 언제 생겼는지도 모르는 부스럼 자국이 몇 군데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큐의 생각에도 비록 그의 몸에 있는 것이기는 하나 자랑스럽게 여겨지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곧 '부스럼'이라는 말뿐 아니라, '부스럼 자국'과 비슷한 발음의 말조차 꺼려했으며, 그것이 점점 더 확대되어 '빛나다[光]'라는 말도, '밝다[亮]'라는 말도 금기로 삼았고 더 나아가서 '등불'이라던가 '촛불'이라는 말까지 금기시하는 것이었다. 그 금기를 범하는 자가 있으면 고의든 아니든 아큐는 부스럼 자국까지 벌겋게 하며 화를 내었다. 상대를 어림쳐 봐서(상대가 어떤 존재인지 대강 살펴보고 짐작해서) 말솜씨가 좋지 않은 놈이면 매도(罵倒)하고, 기운이 약한 놈이면 두들겨 주는 것이었다(인간 됨됨이의 비열함이 보임).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대체로 아큐가 당할 때가 많았다. 그래서 그는 차츰 방침을 바꾸어 대개는 화난 눈으로 노려보기로 했다.

아큐가 '노려보기주의(主義)( 다른 사람들에게 당하는 일이 많아서)'를 채택한 뒤로 미장의 건달들은 더욱더 그를 놀려대는 것이었다. 만나기만 하면 짐짓 깜짝 놀란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어이구, 밝아졌다!"

아큐는 틀림없이 성을 내고 노려본다.

"여기 원래 보안등이 있었군 그래."

그들은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다.(아큐를 무시하고, 업신 여겼다)

아큐는 할 수 없이, 따로 보복할 말을 생각해 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네깐 놈들과는 상대도 안 돼……."

이 때 그는 마치 자신의 머리에 있는 것은 고상하고 영광스러운 부스럼 자국이지, 평범한 부스럼 자국이 아닌 것처럼 굴었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아큐는 견식이 높은 사람이므로 '금기(禁忌)'에 조금 저촉된다는 걸 알고서 그만 말을 잇지 않는 것이었다.

건달들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를 계속 놀려대어 마침내 치고 받는 싸움이 된다. 그러나 아큐는 형식상으로는 패배한다. 놈들에게 노란 변발을 나꿔채이고, 벽에 퍽퍽 그의 머리를 너댓 번 짓찧는다. 건달들은 그러고 나서야 만족하여 의기양양해 돌아간다. 아큐는 잠시 동안 우두커니 서서 '내가 자식놈에게 얻어맞은 걸로 치지. 요즘 세상은 돼먹지 않았어…….' 하고 속으로 생각한다(아큐는 물리적인 힘으로 대응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기 합리화를 통해 자신만의 승리를 구가한다. 그러나 이런 행위는 본격적으로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라 오히려 이런 자아 도취는 현실에 대한 대응 의지를 꺾기에 충분한 것이다.). 그리고 나서는 그도 만족해서 의기양양[意氣揚揚으로 비슷한 말로 의기충천(意氣衝天), 득의양양(得意揚揚), 득의만만(得意滿滿)이 있고, 반대말로 의기소침(意氣銷沈)이 있다]해 가버린다.

아큐는 마음 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을 나중에 하나하나 말해 버린다. 그래서 아큐를 곯려 주는 모든 사람들은 그가 이러한 일종의 정신적 승리법(문제점은 세상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을 직시하지 못하도록 하고, 해결 방안을 찾는데 어렵게 하고, 문제의 본질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아큐가 현실에서 패배하였으면서도 이를 인정하지 않고 생각 속에는 승리한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방식을 정신적 승리법이라고 했다. 이 작품의 중요한 모티브로서 중국인들의 정신주의를 풍자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모욕과 폭력을 당해도 그냥 무시해 버리고 자신이 승리했노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하면 그만이라는 태도를 가지게 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당시 중국 정부와 국민들의 자세를 풍자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 후로는 놈들이 그의 노란 변발을 나꿔챌 때는 먼저 그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큐! 이것은 자식이 애비를 때리는 게 아니라 사람이 짐승을 때리는 거야. 네 입으로 말해 봐! 사람이 짐승을 때리는 거라고."

아큐는 양손으로 변발한 머리채를 잡고, 머리를 꼬며 말하는 것이었다.

"벌레를 치는 거야! 됐어? 나는 벌레야. ― 이래도 놓지 않겠어?"

벌레라고 했건만 건달들은 결코 놓아주지 않는다. 늘 하던 대로 가까운 데를 골라 퍽퍽 대여섯 번 머리를 처박고 나서야 만족하여 의기양양해 돌아가는 것이었다. 놈들은 이번에야말로 아큐도 혼이 났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10초도 지나지 않아 아큐도 역시 만족하여 의기양양해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는 그야말로 자신을 경멸할 수 있는 제1인자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자신을 경멸할 수 있다.'는 말을 생략하면 남는 것은 '제1인자'라는 말이다.(아큐는 참을 수 없는 치욕을 당하면서도, 전혀 현실적이지 않은 자기 합리화를 통해 만족해하고 있다.) 장원(壯元) 급제한 사람도 '제1인자'가 아닌가?

"네 까짓 것들이 다 뭐냐?"

아큐는 이러한 갖가지 묘수로 원수들을 굴복시킨 다음 유쾌하게 술집으로 달려가서 술을 몇 잔 마시는 것이었다. 거기에서 또 다른 사람에게 한바탕 놀림을 당하거나, 입씨름을 하다가, 또 이기고 나서, 유쾌하게 사당으로 돌아가면 머리를 쑤셔박고 자 버리면 그만이다.

만약 돈이 있으면 그는 도박을 하러 간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땅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데, 아큐도 얼굴에 땀을 뻘뻘 흘리며 그 가운데 끼어드는 것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내기를 거는 소리 중에서도 가장 컸다.

"청룡(靑龍 : 도박판에서 돈을 거는 곳.)에 사백!"

"자…… 엽니다. ……엇차!"

물주가 상자 뚜껑을 연다. 그도 땀을 뻘뻘 흘리며 읊어대는 것이었다.

"천문(天門)이로다……. 각(角)은 비기고, 인(人)과 천당(穿堂)은 졌다. ……아큐의 돈은 내가 먹었어……."

"천당에 백……백 오십!"

아큐의 돈은 이런 노랫가락을 타고 땀을 뻘뻘 흘리는 다른 사람의 허리춤으로 점점 흘러들어가는 것이었다. 마침내 그는 사람들에게서 밀려나고 만다. 그러나 뒷전에 서서 남들의 승부에 마음을 졸이며 끝까지 노름판을 지켜본다. 그리고 판이 끝나면 아쉬운 듯 사당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다음날은 눈이 퉁퉁 부어 일하러 나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참으로 '인간 만사(人間萬事)는 새옹지마(塞翁之馬 : 인생의 길흉화복은 변화가 많아서 예측하기가 어렵다는 말. 옛날에 새옹이 기르던 말이 오랑캐 땅으로 달아나서 노인이 낙심하였는데, 그 후에 달아났던 말이 준마를 한 필 끌고 와서 그 덕분에 훌륭한 말을 얻게 되었으나 아들이 그 준마를 타다가 떨어져서 다리가 부러졌으므로 노인이 다시 낙심하였는데, 그로 인하여 아들이 전쟁에 끌려 나가지 아니하고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한다. 중국 '회남자'의 '인간훈(人間訓)'에 나오는 말이다). 여기서 그 의미가 유사한 것은 '전화위복(轉禍爲福)이다.'다. 아큐는 불행히도 딱 한 번 이기고는, 도리어 낭패를 보게 되었다.

그 날은 미장에서 마을 축제를 지내던 날 밤이었다. 이 날만은 관례대로 무대를 차리고, 무대 주위엔 으레 많은 도박판이 벌어졌다. 연극 무대의 꽹과리 소리와 북 소리도 아큐의 귀에는 십 리 밖 먼 데서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에겐 물주의 노랫가락 소리만이 들렸다. 그는 따고 또 땄다. 동전이 은전이 되고 작은 은전이 큰 은전이 되었다. 큰 은전이 쌓이고 쌓였다. 그는 매우 신바람이 났다.

"천문(天門)에 두 냥!"

누가 누구와 무엇 때문에 싸우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욕하는 소리 때리는 소리, 발자국 소리, 정신을 차릴 수 없는 혼란이 한바탕 벌어졌다. 그가 간신히 기어 나왔을 땐 노름판도 보이지 않았고 사람들도 보이지 않았다. 몸의 몇 군데가 아픈 것 같았다. 아무래도 얻어맞기도 하고 발길질을 당한 것 같기도 했다. 몇 사람이 그를 이상스럽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넋 잃은 사람처럼 사당으로 돌아와 마음을 가라앉히고서야 그의 은화 무더기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축제날에 벌어지는 노름판의 대부분 사람들은 이 마을 사람들이 아니다. 그러니 어디 가서 그것을 찾겠는가?

새하얗게 번쩍번쩍 빛나는 은화 더미! 더구나 그의 것이었는데…… 지금은 없어진 것이다. 자식놈이 가져간 셈 쳐 보아도 역시 마음이 편치 않다. 그도 이번만은 실패의 고통을 조금 느꼈다.

그러나 그는 곧 패배를 승리로 전환시켰다. 그는 오른손을 들어 힘껏 자기 뺨을 두세 차례 연거푸 때렸다. 얼얼하게 아팠다. 때린 후에 그는 마음이 평안해지기 시작했는데, 마치 때린 것은 자신이고, 얻어맞은 것은 또 다른 자신 같았기 때문이다. 잠시 후 그는 자기가 남을 때린 것 같이…… 비록 아직도 얼얼하지만…… 몹시 만족하여 의기 양양해 드러누웠다.

그는 푹 잠들었다.(김학주 옮김)


이해와 감상

 이 작품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아큐'라는 인물의 형상이다. 작가는 사회적 기반도 없는 날품팔이인 인물을 내세워 공허한 영웅주의와 그것의 표리를 이루는 패배주의를 집약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자기 자신의 현실적인 위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자기 만족에 취해 있는 주인공의 모습은, 신해 혁명 직후 민족의 위기 속에서도 대국 의식에만 사로잡혀 있던 낡은 중국인들의 모습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다. (출처 : 권영민 저 지학사 문학)

이해와 감상2

 이 작품은 신해 혁명 전후의 무기력한 중국인을 희화화한 작품으로 루쉰의 작가적 지위를 문학사에 자리잡게 해 준 대표작이다. 줄거리만 놓고 보면 매우 싱거운 이야기에 불과하나, 이 작품이 그려 내는 이른바 '정신 승리법' 이라는 독특한 인간 심성과 작품의 바탕이 된 시대성 때문이다. 신해 혁명의 쓰디 쓴 좌절을 맛본 중국인들은 아무리 모욕을 당해도 저항할 줄 모르고 오히려 머릿속에서 자신의 정신적 승리로 소화해 버리는(소화할 수밖에 없는) 주인공 아큐를 보고, 모두 자기 자신을 모델로 한 얘기가 아닌가 하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청조말기의 침체된 봉건사회를 아큐라는 날품팔이 노무자를 주인공으로 하여 그려내고 있는 이 소설은 아큐가 살고 있는 지방의 권력가와 그 가족. 연고자들의 권세를 둘러싸고 있는 이면에 대한 문제까지 희극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여기서 루쉰은 등장 인물들의 혁명에 대한 불안한 모습과 혁명의 소용돌이에서 희생되는 아큐의 허무한 인생을 그리고 있다. 작가는 여기에서 아큐에게서 볼 수 있는 공허한 영웅주의와, 그것과 표리를 이루는 불쌍한 패배주의의 민족적인 현실을 비판하고 있다. 즉, 자신의 현실적인 모습을 직시하지 못한 채 항상 자기 기만으로 현실을 호도하면서 살아가는 아큐의 이른바 '정신 승리법'을, 민족적인 위기에 처해 있으면서도 대국의식을 버리지 못하는 낡은 지식인과 중국민들에게서 발견하고 이를 형상화한 작품인 것이다. 신해혁명에 관한 희망과 혁명의 기회에 편승하는 건달들의 모습을 조명하면서 자신의 심경을 기탄 없이 드러내 보이는 작가는 아큐의 죽음을 구경거리로밖에 보지 않는 군중들에 대한 노여움을 아큐에 대한 동정으로써 질책하고 있다. 이러한 풍자적이고 야유적인 비판 속에는 중국민들의 국가와 민족에 대한 의식이 결여된 슬픔을 담고 있으며, 이러한 실패를 교훈 삼아 다시 민족 결의를 촉구하는 주제가 강하게 흐르고 있다.

 "아큐정전"은 작가의 이러한 구국혼이 가장 깊이 농축된 작품이 다. 따라서 어리석고 불쌍한 아큐, 그를 통해 근대화 과정에 소용돌이치는 중국 민중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그려 보였다. 그런 아큐의 모습이 그때도 그랬지만 중국 민중들에게는 '각성'보다 '위안'을 더 많이 주고 있어 또 하나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가 없다. 루쉰이 입버릇처럼 내뱉던 푸념이 아직도 메아리치는 여운으로 남아 있다.

 "중국인은 누군가가 나서서 말해 주지 않으면 안 된다."

 

이해와 감상3

 아큐라는 인물은 타성에 젖은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명감도 목적 의식도 없이 무기력하고 비겁한 인간상을 상징하고 있다. 다혈질적이고 자존심이 강할 뿐만 아니라 무지 몽매한 아큐는 아무리 경멸을 당하고 희롱을 당해도 적극적으로 대항하지 못하지만, 마음 속에는 자신이 이겼다고 합리화하는 일명 '정신 승리법'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아큐의 성격은 심각한 현실적 의의와 역사적 의의를 내포하고 있다. 즉, 공허한 영웅주의와 무력한 패배주의에 젖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자기 만족에 살아가고 있는 청나라 정부와 한(漢)민족에 대한 조소와 비난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고도의 상징과 날카로운 통찰력, 문학의 힘을 통해 대중의 의식을 각성시키고자 한 작품이다.

 소설적인 기교도 주목할 만하다. 이 작품의 서술 특성은 반어적 태도에 있다. '아큐 정전'이라는 제목부터가 그러하다. 이 작품의 머리말은 아큐가 그 이름조차 분명치 않은 인물임을 열심히 밝힌다. '아큐'라는 괴상한 이름이 그래서 생겨난 것이다. 이처럼 하찮은 인물의 이야기를 거룩한 위인에게나 어울릴 '정전(正傳)'으로 썼다는 것부터가 희화적(戱畵的)이다. 그러면서도 작가는 평가나 판단을 자제한 채로 엄격하게 객관적인 때로는 냉정하기조차 한 태도를 유지하려고 한다. 예를 들어,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서 아큐의 억울한 죽음을 보면서도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서술한다. "총살은 목을 자르는 것만큼 볼 만하지 못하다." - 냉정의 극치다.

 이 작품이 발표되자 중국의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바로 아큐가 아닌가 생각했다고 한다. 그만한 공감의 원천은 이 작품의 함축적인 형상과 반어적 문체의 효과가 어우러져 이루어 낸 것이다. (출처 : 김대행·김동환 저 교학사 문학)

 

이해와 감상4

 노신이 1921년에 발표한 이 작품은 중국 한문학의 전통적 장르인 전(傳) 형식을 변형시켜 신해 혁명이 일어나던 무렵의 중국 사회를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아큐는 서구 열강의 침략 앞에 속수무책으로 남아 있던 중국인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아큐는 30여 년의 생애를 통해 온갖 세상 풍파를 겪었으면서도 마지막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때까지 자신의 현실을 현실로 인정하지 않고 근거 없는 우월감이나 자기 비하로 일관함으로써 생애를 비참하게 마감한다.

 그가 건달들의 행패에 대해서 노려보기주의나 정신승리법을 사용하는 것은 상황에 대한 인식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가 책임지지 못하고 남의 손아귀에 맡기거나 혼돈된 상태로 방치하는 존재가 곧 아큐인 것이다. 이것은 당시 반식민지가 되어 있던 중국의 사회적 상태에 대한 준렬한 비판이다. 민족적 위기 속에서도 근거 없는 우월 의식을 갖거나 단순히 패배감에 빠져 아무런 대비책도 마련하지 못하는 중국 민족의 상황이 아큐라는 인물의 형상 속에 적나라하게 제시되어 있다.

 노신은 의사가 되려고 일본 유학을 갔다가 동족의 처형 장면을 보고도 희희낙낙하는 중국인의 사진을 보고 소설가가 되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이 작품의 마지막에서 자신의 처형에 대해 무감각한 아큐와 처형 장면을 구경거리로만 인식하는 군중들은 노신이 유학 시절에 가졌던  중국인에 대한 인상을 형상으로 만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작자는 아큐에 대해서 분개할 뿐만 아니라 아무런 비판 의식도 가지지 않은 군중에 대해서도 날카롭게 풍자하고 있는 것이다.

 

이해와 감상5

혁명 후 아큐가 재물을 약탈한 누명을 쓰고 죽음을 당하는 '결말' 부분으로 이 작품은 한문학 전통적인 장르인 전 형식의 변형을 통해, 봉건 사회 해체기인 청조 말기에 조그만 마을을 배경으로 주인공을 둘러싼 지방 권력자와 그 가족, 마을 사람들의 변화무쌍한 인정 세태와, 혁명의 그림자가 드리운 충격의 소용돌이 속에서 허무하게 처형된 아큐의 생애를 그리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점은 아큐라는 인물의 전형성이다. 그는 30여 년의 짧은 생애 동안 세상사의 쓴맛 단맛을 다 보면서 여러 차례에 걸친 굴욕과 실패를 겪지만 정신적으로는 오히려 승리감에 젖어 득의 양양한다. 현실에 근거하지 않은 맹목적인 망상이나 턱없는 자기 비하, 치욕과 실패에 대한 필요 이상의 건망증과 합리화, 욕을 먹거나 낭패를 당한 후 자기보다 약한 자에게 행하는 분풀이 등이 아큐의 생활방식이다. 작가 루쉰은 당시 반식민지 상태의 민족적 위기 속에서도 패배감에 젖어 현실에 안주하려는 중국인들의 자화상으로 아큐라는 희극적 전형을 그린 것이다. 아큐는 총살당하는 마지막 장면의 극한 상황에서조차 놀랄 만큼 무감각한 '마비력'을 보여준다. 이러한 주인공과, 그저 구경거리로만 처형장면만을 바라보는 군중에 대한 작가의 노여움이 날카로운 풍자 속에 번득인다.

 

이해와 감상6

 청조 말기의 침체된 봉건 사회를 아큐라는 날품팔이 노무자를 주인공으로 하여 그려내고 있는 이 소설은 아큐가 살고 있는 지방의 권력가와 그 가족, 연고자들의 권세를 둘러싸고 있는 이면에 대한 문제까지 희극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여기서 루쉰은 등장인물들의 혁명에 대한 불안한 모습과 혁명의 소용돌이에서 희생되는 아큐의 허무한 인생을 그리고 있다. 작가는 여기에서 아큐에게서 볼 수 있는 공허한 영웅주의와, 그것과 표리를 이루는 불쌍한 패배주의의 민족적인 현실을 비판하고 있다. 즉, 자신의 현실적인 모습을 직시하지 못한 채 항상 자기 기만으로 현실을 호도하면서 살아가는 아큐의 이른바 '정신 승리법'을, 민족적인 위기에 처해 있으면서도 대국 의식을 버리지 못하는 낡은 지식인과 중국인들에게서 발견하고 이를 형상화 한 작품인 것이다. 신해혁명에 관한 희망과 혁명의 기회에 편승하는 건달들의 모습을 조명하면서 자신의 심경을 기탄 없이 드러내 보이는 작가는 아큐의 죽음을 구경거리로밖에 보지 않는 군중들에 대한 노여움을 아큐에 대한 동정으로써 질책하고 있다. 이러한 풍자적이고 야유적인 비판 속에는 중국인들의 국가와 민족에 대한 의식이 결여된 슬픔을 담고 있으며, 이러한 실패를 교훈 삼아 다시 민족 결의를 촉구하는 주제가 강하게 흐르고 있다. '아쿠 정전'은 작가의 이러한 구국혼이 가장 깊이 농축된 작품이다. 따라서 어리석고 불쌍한 아큐, 그를 통해 근대화 과정에 소용돌이치는 중국 민중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확인할 수 있다.(출처 : 김병국 외 4인 공저 한국교육미디어 문학)



인물의 성격

 이 작품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아큐'라는 인물의 형상이다. 작가는 사회적 기반도 없는 날품팔이인 인물을 내세워 공허한 영웅(英雄)주의와 그것의 표리를 이루는 패배주의를 집약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자기 자신의 현실적인 위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자기 만족에 취해 있는 주인공의 모습은, 신해 혁명 직후 민족의 위기 속에서도 대국 의식에만 사로잡혀 있던 낡은 중국인들의 모습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다.

 '아큐형' 인물의 특징 : 부정확한 현실 인식, 자기 기만의 태도, 강자에게 굴종하고 약자에게 으스대고 고통을 떠 넘기는 노예 정신, 자신만을 염려하여 이기적인 행동을 일삼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아큐의 전형성 : 당시 반식민지 상태의 민족적 위기 속에서도 패배감에 젖어 현재에 안주하려는 중국인들의 자화상을 희극적으로 전형화함

 (1) 수차례 실패와 굴욕을 겪지만 정신적으로 오히려 승리감에 젖어 득의양양함

 (2) 현실에 근거하니 않는 맹목적인 망상이나 턱없는 자기 비하에 젖음

 (3) 치욕과 실패에 대해서 필요 이상으로 자기를 합리화함

 (4) 욕을 먹거나 낭패를 당한 후 자기보다 약한 자에게 분풀이를 행함



아큐 정신과 시대적 배경

 아큐에게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부정확한 현실 인식, 자기 기만의 태도, 강자에게 굴종하고 약자에게 으시대고 고통을 전가하는 노예 근성 등을 묶어 아큐 정신이라고 한다. 루쉰은 '신해 혁명(1911년)' 이 전 국민적 혁명으로 발전되지 못한 이유를 중국 국민의 이 아큐 정신에서 찾고자 했다.(출처 : 김윤식 김종철 저 한샘 문학)



노신의 문학 정신

 노신(루쉰)의 위대성은 혁명을 위한 문학일지라도 안이한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삼지 않고자 한 점에 있다. 루쉰은 '현재의 우리들의 문학 운동에 대하여'란 기록에서 "작가란 그 어떤 인물을 그리든, 그 어떤 소재를 사용하든 자유로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모든 작품에 '민족혁명 전쟁'이란 꼬리를 달고 그것을 기치로 삼아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필요로 하는 있는 것은, 작품 뒤에 붙인 슬로건이 아니라, 그 작품 속에 깃들여 있는 진실한 생활, 눈부신 투쟁, 약동하는 맥박, 사상과 정열이기 때문이다."라고 술회했다. 인간이 바뀌지 않고는 사회도 바뀌지 않는다는 이 작가 의식이 중국 국민의 전형으로서 '아큐정전'을 쓰게 하고 '고독자'를 쓰게 한 것이다.



노신의 작품 세계

 노신의 문학 세계는 어두운 느낌을 준다. 작가를 둘러싼 현실이 모두 생명력을 잃어버린 절망의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절망 속에 갇히지 않고, 오히려 어두운 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자기 확인을 통해 발전적인 의지로 승화시키고 있다. '고향'이라는 작품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말은 작가의 생각을 잘 보여 주고 있다.

"희망이라는 것은 원래 있는 것이라 할 수도 없다. 실상 땅 위에 본래부터 길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니는 사람이 많아지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희망은 이처럼 묵묵히 다져진 좌절감 위에서 비로소 싹틀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희망은 자각을 필요로 한다. 이 자각을 통해서만 중국 민족이 회생할 수 있다고 믿는 작가의 의식은, 중국 민족에 대한 진정한 애정에서 우러나오는 것이기도 하다. (출처 : 김대행·김동환 저 교학사 문학)



루쉰의 문학 세계

 루쉰은 몸소 체험한 실생활을 바탕으로 우매하고 불행한 사람들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그것을 확대하여 국민 이익에 상반되는 일제를 부정의 빛으로 묘사함으로써 미래의 긍정과 이상의 동경을 배출해 내려고 노력하였다.

 루쉰이 주로 다룬 세계는 어두운 과거, 즉 신해혁명 전후의 중국 사회로서 특이 낙후된 농촌의 실정을 풍자적 수법을 통해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그 상상력이 인간 현실과 사회 현실을 넘어서고 있다. 즉 그의 작품은 상상력의 재현과 비밀스러운 것을 표현해 내는 언어 감각이 뛰어나고, 문제 의식이 뚜렷한 데다가 이를 더욱 예리한 필치로 심각하고 신랄하게 묘사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그는 중국 민족의 병근(病根)을 노출시켜 치유함으로써 더 나은 미래를 지향하고자 했던 것이다.(출처 : 김병국 외 4인 공저 한국교육미디어 문학)

전기 시대(단편시대)

후기 시대(잡감문 시대)

계몽적, 사실적 인생 문학

사회 비판, 문학 비평을 전제로 한 정치 문학

전통적 애수, 낭만, 풍자

정공적인 표현


 

 '아큐정전'의 사회적 의미

 이 작품은 노신의 작가적 지위를 문학사에 자리잡게 하여 준 대표작이다. 청조 말기의 침체된 봉건 사회를 아큐라는 날품팔이 노무자를 주인공으로 하여 그가 사는 한 지방을 중심으로 그 지방의 권력가와 그 가족, 연고자들의 권세를 둘러싸고 있는 이면에 대한 문제까지 희극적으로 그려 내고 있는 작품이다. 또한, 인물들의 혁명에 대한 불안한 모습과 혁명의 소용돌이에서 희생되는 아큐의 허무한 인생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여기에서 아큐에게서 볼 수 있는 공허한 영웅주의와, 그것과 표리를 이루는 불쌍한 패배주의의 민족적인 현실을 비판하고 있다. 즉, 자신의 현실적인 모습을 보지 못하고 항상 자기 만족으로 속이면서 살아가는 아큐의 이른바 '정신 승리법'을, 민족적인 위기에 처해 있으면서도 대국 의식을 버리지 못하는 낡은 지식인과 중국민들에게서 발견하고, 이를 형상화한 작품인 것이다.

 신해 혁명에 관한 희망과 혁명의 기회에 편승하는 건달들의 모습을 조명하면서 작가의 심경을 기탄없이 서술하고 있다. 또한, 작가는 아큐의 죽음을 구경거리로밖에 보지 않는 군중들에 대한 노여움을 아큐에 대한 동정으로 질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풍자적이고 야유적인 비판 속에는 중국민들의 국가와 민족에 대한 의식이 결여된 슬픔을 담고 있으며, 심한 힐책이 담겨져 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출처 : 권영민 저 지학사 문학)


 

루쉰과 유교 비판

 5·4운동 이후 중국에서는 천두슈, 후스, 루쉰 등에 의하여 전통적인 중국 유교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이 일기 시작했다.

 천두슈는 민주주의와 과학의 개념으로 삼강오륜(三綱五倫)이라는 봉건 윤리를 타도하려했고, 후스는 입센의 '인형의 집'에 감명을 받아 남녀 관계의 대등성을 주장했다.

 루쉰은 소설을 통하여 유교 윤리를 풍자 비판한 작가로, 1918년 '신청년'에 발표한 백화소설 '광인 일기' 이후 많은 작품을 통하여 유교를 비판했다. 그는 "중국의 문화는 모두 주인을 받드는 문화이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희생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중국인이고 외국인이고 중국 문화를 칭찬하는 사람들은 모두 자신을 주인으로 자처하는 사람들에 불과하다."

 따라서 루쉰은 "중국의 공자는 처음부터 권세 있는, 또는 권세를 갖고자 하는, 즉 관리로 출세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학문이지 일반 민중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말하자면 공자는 가난하고 사회적으로 낮은 민중을 위한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민중을 우민화시키기 고탄압의 수단이 되는 적이다." 이것이 루쉰의 유교 비판의 논리였다.

 루쉰의 이러한 유교비판 사상을 담은 소설이 '광인 일기'와 '아큐정전'이다. (출처 : 남미영 외 4인 공저 동아서적 문학)



아큐 정신과 그 시대적 배경

 아큐에게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부정확한 현실 인식, 자기 기만의 태도, 강자에게 굴종하고 약자에게 으시대고 고통을 전가하는 노예 근성 등을 묶어 아큐정신이라 한다. 노신은 당시 중국인들이 타기되어야 할 부정적 모습을 아큐를 통해 그린 것이다. 노신은 신해 혁명(1911)이 전국민적 혁명으로 발전되지 못한 이유를 중국 국민들 속에 있는 바로 이 아큐 정신에서 찾고자 했다.



신해 혁명(辛亥革命) :

 1911년에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중화민국을 세운 혁명. 10월에 무창(武昌)에서 봉기하여, 그 이듬해 1월에 쑨원(孫文)을 임시 대총통으로 하는 임시 정부를 수립하였으나, 혁명 세력이 약한 탓에 위안스카이(袁世凱)가 대총통에 취임하여 군벌 정치를 펴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백화소설(白話小說)

 중국에서 구어체(口語體)로 쓰인 소설을 이르는 호칭. 문언문(文言文), 즉 고문(古文)으로 쓰인 문언(文言) 소설의 대칭이다. 당(唐)나라 이전의 소설이란 지식인들이 문어로 써서 수록한 것을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당나라 말기부터 송나라에 걸쳐서 귀족계급의 몰락과 서민계층의 세력 증대로 민간에 구전되는 이야기의 필사본이나 그 대본에서 발달하여 점차 읽기 쉬운 구어체의 소설을 만들게 되었다. 그러나 근대 이전의 중국에서는 국가 통치의 수단이었고 지식인의 무기이기도 했던 문어체가 중시되어, 구어문장에 의한 작품이 문학의 주류로 등장한 것은 1917년의 천두슈[陳獨秀]·후스[胡適] 등의 문학혁명 제창 이후이며, 18년에는 루쉰[魯迅]의 백화소설 《광인일기(狂人日記)》가 발표되었다. (출처 : 동아대백과사전)


 

노신이 소설을 쓰게 된 계기

"가령 철로 밀폐된 방이 있다고 치세. 전연 창문도 없고, 절대로 부술 수도 없는 방일세. 그리고 그 속에는 많은 사람들이 곤히 잠들고 있으니 오래 지나지 않아 모두가 다 질식해 죽을 것일세. 그러나 그들은 혼수 상태에서 막바로 사멸 속에 드는 것이라 전연 죽음의 비애를 느끼지 못하네. 그런데 자네가 지금 큰 소리를 쳐 아직도 약간 의식이 맑은 몇 사람들을 놀라 깨게 함으로써 그들 불행한 사람들에게 도저히 구원의 길이 없는 임종의 고통을 맛보게 한다면 도리어 자네는 그들에게 못할 짓을 저지른 꼴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미 눈뜬 사람이 몇이라도 있다면 그 철로 된 방을 때려 부술 희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닐세."

그렇다. 내 비록 내 나름대로의 주견을 굳게 가졌다 해도 희망을 드러냈을 때 그것을 말살할 도리는 없었다. 희망은 미래에 속해 있는 것이니까, 절대로 오늘의 나의 부정을 가지고 그가 있을 수 있다는 희망을 꺾어 넘길 수도 없었다. 나는 마침내 글을 쓰겠다고 승낙했다. (출처 : '납함' 서문에서)




이해하기

1. 이 작품에서 '정신적 승리법'의 예가 제시되어 있는 부분을 찾아보고, '아큐'의 '정신적 승리법'이 무엇인지 설명해 보자.

교수·학습 방법 :

 아큐의 정신적 승리법이란 이는 형식상의 패배에 대비되는 아큐의 자기 정당화하는 합리화로 이것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부분을 찾도록 지도한다.

예시 학생 활동 :

 아큐가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는 부분(교과서 228쪽 11행~229쪽 1행)

 이 작품에서는 아큐의 정신적 승리법을 두고 벌어지는 아큐와 마을 사람들 사이의 갈등이 희화적으로 그려져 있다. 아큐는 마을 사람들의 놀림을 정신적 승리법으로 물리치는데 이는 비굴한 자신의 태도를 두고 자신을 경멸할 수 있는 제 1인자의 행동으로 합리화하는 그의 기만적인 처세술을 말한다.

2. 이 작품에서 등장인물의 성격이 잘 드러나는 행동이나 대사를 찾아보고, '아큐'의 성격이 어떠한지 이야기해 보자.

교수·학습 방법 :

 아큐는 당시 중국인의 모습, 중국 정부의 모습을 희화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대국이라는 자존심이 강하지만 자기 기만적이고 강자에게 비굴하며, 상황에 쉽고 단순하게 적응해 버리고 마는 당시 중국과 중국인의 모습이 드러나는 행동과 대사를 찾아보도록 지도한다.

예시 학생 활동 :
 

·자존심이 강한 것 - "우리 집도 그 전에는······ 네까짓 놈보다 훨씬 더 잘살았어!"

·자기 기만성 - "내가 자식놈에게 얻어맞은 걸로 치지. 요즘 세상은 돼먹지 않았어·····."

·비굴함 - "벌레를 치는 거야! 됐어? 나는 벌레야. - 이래도 놓지 않겠어?

·단순함 - "네까짓 것들이 다 뭐냐?"하고는 술집으로 가서 술을 마시고 잊는 행위

3. 이 작품에서 '아큐'는 자기 이름도 정확히 모르는 최하층 날품팔이 농민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작가가 어떠한 의도로 이러한 인물을 주인공을 설정했는지 말해 보자.

교수·학습 방법 :

 작가가 아큐의 행위와 말을 통해 비판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음을 주지시키고 이러한 의도 속에서 아큐의 모습이 형상화되었음을 이해시킨다. 이러한 아큐의 모습이 풍자하고 있는 대상과 의도를 찾도록 지도한다.

예시 학생 활동 :

 날품팔이꾼이고 무지하지만 자존심은 강하고, 상황에 부화뇌동(附和雷同)하는 아큐를 통해 작가는 당시 일본과 서양 세력에 당하면서도 허세를 부리고 상황에 대처하려 하지 않는 중국인과 중국 정부를 비판하고 있다. 작가는 자존심은 강하지만 실제로 실속 없는 자인 아큐를 통해 허상뿐이며, 허세만 부리는 중국인과 정부를 풍자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4. 이 작품은 '아큐'라는 인물의 전기(傳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작품이 전기의 형식을 빌려 옴으로써 얻을 수 있는 표현 효과에 대하여 설명해 보자.

교수 학습 방법 :

 전기문 형식이 가지는 특징을 중심으로 아큐의 성격을 고찰하고 이러한 형식이 주제를 드러냄에 있어서 어떠한 효과를 지니는지를 논의하도록 지도한다.

예시 학생 활동 :

 한 인물을 중심으로 그의 일대기를 기리는 이 소설은 한문학의 전통적인 양식인 '전' 의 변형으로 볼 수 있다. '전' 양식은 한 개인의 일생을 통해 독자에게 교훈을 준다. 보통 '전'의 인물이 훌륭한 자질과 성품을 지니고 있어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는 데에 비해 아큐는 그렇지 못한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 이러한 반어적인 제목을 통해 작가는 인물과 사회에 대한 풍자 효과를 배가시키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확장하기

1. '아큐 정전'은 신해혁명을 전후한 중국의 농촌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중국 근대사에서 신해혁명이 어떠한 사건이었는지 조사해 보고,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당대의 중국인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정리해 보자.

교수 학습 방법 :

 신해혁명의 배경과 전개 과정, 그리고 결과에 대해서 학생들이 자료를 찾아 정리해 보도록 하고 이 소설에서 배경인 신해혁명이 어떻게 그려지는지를 찾아보고, 이를 통해 당대인들의 어떤 모습을 비판하려 했는지 이해하도록 지도한다.

2. 근대 초창기 현실 인식이라는 관점에서, '아큐 정전'의 '아큐'와 앞서 나온 채만식의 '치숙'의 '나'를 비교하여 말해 보자.

교수 학습 방법 :

  '나'와 '아큐'가 모두 무식하나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인물임을 중심으로 공통점을 찾게 하고, 이들이 현실에 대응하는 방법을 통해 그들의 현실 대응의 차이점을 판단하도록 지도한다.

예시 학생 활동 :

  '아큐 정전'의 '아큐'와 '치숙'의 '나'는 모두 무지한 인물이다. 근대라는 전환기에 대응하기에는 두 사람 다 무지하며 자부심이 강하고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그러나 근대 전환기에서 '아큐'가 기존의 가치 관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혁명이라는 상황에 부화뇌동(附和雷同)하다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는 것과 달리 '치숙'의 '나'는 시대 상황에 무지하고 가치관이 부재하지만 자신의 이익을 찾아 상황에 기민하게 대처하면서 시류를 타는 영악함을 보인다.


 

 확장하기1

1. 이 소설에서 아큐가 말하는 소위 ‘정신적 승리’에 해당하는 부분을 찾고 이것에 대한 각자의 생각을 말해보자.

 

이끌어주기 : 아큐라는 인물이 자신의 약점이나 부족한 점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을 합리화하면서 상대방을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는 대목을 찾아 읽고, 이 부분에 대한 생각이 어떠한지를 밝히도록 한다. 학생들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 경우에는 적절한 방법으로 교정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예시답안 : 아큐는 자기 중심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또한 예전에 잘 살았다는 점을 들어 현재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합리화한다. 또한 그는 자신의 신체적인 약점인 대머리를 감추려 한다. 이러한 아큐는 웨이좡의 한량패들에서 자주 괴롭힘을 당한다. 그러자 아큐는 눈을 흘겨보는 것으로 대응하지만, 한량패들은 그를 더욱 괴롭힌다. 이에 아큐는 요즘 세상은 돼먹지 않았다는 말을 하며 스스로 승리한 것인 양 만족해한다. 이러한 아큐의 태도는 소위 ‘정신적 승리’라는 말로 규정할 수 있는데, 자신의 약점과 약함을 인정하고, 남과 더불어 살아가려는 지혜를 갖기보다는 상대방을 무시함으로써 자신의 지혜 있음을 자랑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아큐의 ‘정신적 승리’는 그의 허위의식을 보여줄 뿐, 그것이 그의 삶에 긍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면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2. 작자가 이 소설을 통해 하는 바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이끌어주기 : 아큐라는 인물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이 작품의 주제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도록 이끈다. 아큐의 인물됨에서 이 작품의 주제 의식을 파악해 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시답안 : 작자는 아큐라는 비정상적인 인물을 형상화함으로써 당시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한 중국인들을 경계하기 위해 이 작품을 썼다고 할 수 있다. 제국주의 시대를 맞아 중국은 서구 열강의 지배하에 들어가고 있었지만 중국인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세계의 중심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과거 지향적, 자기중심적, 안하무인격의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중국인들의 왜곡된 삶의 태도를 비판하고 몽매에서 깨어나기를 바라는 것에 이 작품의 주제 의식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3. 토의 토론 아큐와 같은 인물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존재하는지에 대해 모둠별로 토론해보자.
 

이끌어주기 : 이 작품의 가장 뛰어난 점은 아큐라는 인물의 전형성이다. 작품을 읽으면서 아큐의 성격을 분석해 보고, 이러한 인간이 지금 우리 사회를 살아간다면 어떤 유형의 인간일지를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가능하다면 전편을 읽고 아큐의 모습을 오늘날의 현대인에 견주어 볼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 좋다. 토의 토론을 할 때에는 아큐에 대한 긍정적인 의견들을 적절하게 제어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언뜻 읽으면 아큐의 태도가 긍정적으로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작자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므로 방치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예시답안 : 아큐가 가지고 있는 성격의 특징을 오늘날의 사람들에게도 적용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아큐는 자기중심적인 사고가 매우 강하다. 직접 경험해 본 적도 없으면서 다 아는 척하며,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진리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태도는 오늘날 우리들에게서 자주 발견되는 모습이다. 자기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태도는 아큐의 성격과 유사한 것이다.

 또한 아큐는 과거 지향적 사고를 가지고 있다. 현재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과거엔 너희들보다 잘 살았다는 말로 극복하려 하는데, 이것은 또한 자신의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 독선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과거 지향적인 태도는 우리나라 어른들의 모습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어떤 문제에 부딪쳤을 때 그 문제에 대해 미래 지향적으로 생각하기보다는 과거의 향수에 젖어 바르게 대응하지 못하는 기성세대의 모습에서 아큐의 성격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아큐는 체면 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자신의 머리에 난 대머리 흉터를 감추기 위해 그와 관련된 말조차 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것은 지나친 체면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약점을 가지고 있다. 그 약점을 감추기보다는 이것을 인정하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태도가 더 아름답다고 할 수 있다. 남에게 어떻게 보일까를 생각해서 외모를 꾸미고, 자신의 약점을 감추는 모습을 우리나라 사람들은 잘 보여 주기 때문이다.


 

아큐의 비극

 주인공 아큐는 신해혁명 전후 시기 농촌 고용 노동자의 전형이다. 그렇지만 그 성격을 한 마디로 단순화시킬 수 있을 만큼 체계적인 인물은 아니다. 실제 인간이 그렇듯이 아큐는 여러 인물의 합성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성격을 나타낸다. 그러나 그런 중에도 작가는 성격의 변화 과정을 일정한 흐름에 따라 배열함으로써 민중이 각성하는 순간을 잘 포착해 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일반적인 민중이 가질 수 있는 온갖 열악한 근성을 두루 지닌 아큐는, 여러 가지 사건들을 거치면서 때로는 부분적이나마 스스로 반성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그 반성은 그리 길게 지속되지는 않는다. 자신의 잘못된 생활과 사회적 모순을 어느 정도 깨닫는 순간 그는 이미 최후를 맞이했으니, 이것이 아큐의 본질적인 비극이라고 할 수 있다. ‘아큐의 비극’ 은 사실 보통의 중국인, 혹은 더 크게는 근대 동아시아 민중의 비극일 수 있다. 한국이나 일본에서 이 작품이 많이 읽히고 연구되었으며 문학 작품에도 영향을 준 것은 어느 정도 그들 자신의 자화상을 이 작품에서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큐가 겪는 비극의 원인은 그래서 더 관심을 가질 만한데, 이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지배계급 인물들에 의한 직접적인 가해이다. 자오 어른, 가짜 양놈으로 대표되는 지배계급 인물들은 시대의 변화에 잘 적응하면서 언제나 아큐의 삶을 방해하는 존재가 된다. 둘째는 민중적 자해이다. 같은 사회적 위치에 있으면서도 아큐를 박해하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은 현실에 대한 가장 적절한 풍자이다. 물론 아큐 역시 다른 민중들을 박해하는 가해자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러한 박해 관계는 상호적이며 일종의 자해라고 할 수 있다. 생존 문제와 연관된 샤오디와의 싸움은 그래서 가장 극적인 박해 장면이 된다. 셋째 원인은 아큐 자신의 어리석음이다. 다소의 풍자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자기에게 어떤 고난이 닥쳐오는지를 감지하지 못하는 등의 어리석음은 마지막 장면의 비극을 가능하게 한 원인일 수 있다.(출처 : 김윤식,‘김윤식 교수의 동양 고전 특강’)


 

신해혁명(辛亥革命/ Chinese Revolution)

중국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동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인 중화민국을 건립한 혁명(1911~12).

혁명봉기가 일어난 해인 1911년이 간지(干支)로 신해년이어서 신해혁명이라 불리고 있지만, 내용상으로는 민국혁명(民國革命)이 더 타당하다. 1913년의 위안스카이[袁世凱] 토벌전쟁을 제2혁명, 1915~16년의 반제제(反帝制) 투쟁을 제3혁명으로 지칭하면서 신해혁명을 미완의 혁명인 제1혁명으로 부르기도 한다. 또한 우창[武昌]에서 최초로 신해혁명의 봉기가 일어난 10월 10일을 쌍십절(雙十節)이라 하여 타이완에서는 중요한 경축일로 지키고 있다 (→ 색인 : 중국사).

혁명운동의 전개

이민족 정권인 청조를 타도하고 한족(漢族)의 공화정을 수립하자는 혁명운동의 상징적인 지도자 쑨원[孫文]은 오늘날까지도 중국의 국부(國父)로 추앙받고 있다 (→ 색인 : 쑨원). 1894년 6월 쑨원이 당시 실력자였던 이홍장(李鴻章)에게 서구적 모델에 따른 개혁안을 제시하는 글을 올렸다가 무시당한 후, 하와이에 가서 조직한 하와이 흥중회(興中會)가 최초의 혁명단체로 알려져 있다 (→ 색인 : 이홍장). 이어 홍콩 흥중회를 조직하고 이를 통해 광저우[廣州] 봉기를 계획했다. 이 최초의 반청(反淸) 봉기가 실패한 뒤 망명길에 나선 쑨원은 런던에서 중국 공사관에 억류되는 사건을 통해 국제적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그는 억류에서 풀려난 후 대영박물관에 출입하면서 서구의 새로운 사회사조를 접하여 삼민주의(三民主義) 사상의 기초를 닦을 기회를 가졌다 (→ 색인 : 삼민주의). 다시 일본으로 간 그는 변법자강운동의 실패 후 망명한 캉유웨이[康有爲] 등의 개혁파와 연합을 모색하기도 하고, 의화단운동(義和團運動)을 전후해 양광총독(兩廣總督) 이홍장을 황제로 추대하여 양광(광둥[廣東]·광시[廣西]) 지방을 독립시키려 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쑨원은 다시 홍콩 흥중회의 조직을 통해 후이저우[惠州] 봉기를 조직했으나 실패했다.

한편 의화단운동에서의 충격적인 패배가 반청 혁명사조를 급속히 확산시켜가는 가운데 혁명운동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청 정부가 자구책으로 근대적 개혁을 추진하는 가운데 교육제도의 개혁을 지향함으로써 신식학교와 학생, 일본 유학생이 늘어났다. 일본 유학생들 중 일부 급진파가 제국주의의 침략과 그에 대한 청 정부의 무기력한 대응에 자극되어 반청혁명의 길로 나서게 되었다. 이들이 일본에서 펴낸 혁명을 고취하는 잡지나 번역서들은 중국 내로 유입되어 혁명사조의 흥기에 상당한 역할을 했다. 이와 같은 분위기에 1903년 황싱[黃興] 등의 유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후난 성[湖南省] 창사[長沙]에서 화흥회(華興會)라는 혁명조직이 설립되었다. 1904년에는 상하이[上海]에서 차이위안페이[蔡元培]·장빙린[章炳麟] 등의 광복회(光復會)가 조직되었다. 이들 각지의 혁명단체가 통합되어 1905년 8월 도쿄[東京]에서 전국적인 혁명조직인 중국동맹회가 성립되었다. 동맹회는 쑨원을 총리로 추대했고, "오랑캐를 몰아내고 중화(中華)를 회복하여 민국을 건립하며 지권(地權)을 고르게 한다"는 강령을 채택했다. 또한 기관지 〈민바오 民報〉를 창간하여 혁명선전을 본격화했다. 이어 1906년 쑨원·황싱·장빙린 등이 '중국동맹회혁명방략'을 제정했다. 이즈음에 쑨원의 삼민주의가 보다 명확한 체계를 갖춘 형태로 제시되어 혁명파의 지도이론으로 등장했다. 그 내용은 청나라 정권의 타도와 한(漢)민족국가의 회복을 지향하는 민족주의, 민주국가의 수립을 지향하는 민권주의, 사회경제조직을 개혁함으로써 미래의 사회혁명을 방지하고자 하는 민생주의로 구성되었다.

동맹회의 성립 후 혁명파는 조직의 확대와 선전활동 외에도 본격적인 반청무장봉기를 준비했다. 그러나 몇 차례에 걸친 서남 변경지역에서의 회당(會黨) 중심의 봉기와 광저우에서의 신군(新軍) 중심의 봉기는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원래 사상이나 조직 면에서 통일성이 결여되어 있던 동맹회가 거듭된 봉기의 실패와 더불어 조직상의 분열이 가속화되자, 광복회가 독자적인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고, 1911년 7월에는 상하이에서 동맹회 중부총회가 성립되어 '장강(長江)혁명'을 준비했다. 쑨원도 1910년 이후에는 독자적인 행동을 취했다. 이와 같은 동맹회 내부의 분열로 인하여 막상 신해혁명의 봉기가 시작될 즈음 혁명파는 국내에서 결집된 역량을 갖추지 못했고, 따라서 혁명 전개과정을 주도할 통일적인 역량이 없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혁명파 내부의 역량 분산과는 상반되게 국내에서의 혁명정세는 날로 발전해가고 있었다. 의화단운동 이후 청나라가 새 정책을 추진하면서 정치개혁의 핵심인 입헌제 실시를 위한 준비를 하지 않자, 제도적인 정치참여를 요구해오던 신사층은 헌법제정, 국회와 지방의회 개설 등을 요구하는 입헌운동을 추진했다. 이들 입헌파 신사층은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비결이 입헌정치에 있었다고 보고 러일전쟁 이후 한층 활발한 입헌운동을 벌였으며, 청나라도 이들의 요구를 억누를 수만은 없어서 형식적으로나마 입헌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각각 지방의회·국회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자의국(諮議局)·자정원(資政院)이 1909, 1910년에 개설되면서, 입헌파 신사층은 이들 기관을 거점으로 하여 국회의 신속한 개설을 청원하는 등 입헌운동을 가속화했다. 그러나 청나라는 이들의 청원운동을 엄격히 탄압했는데, 이러한 정부의 태도는 입헌파 중 급진적인 일부로 하여금 혁명으로 기울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각자의 성(省)을 중심으로 한 국민적 대중운동으로 활발해진 이권회수문제에서도 입헌파 신사층은 청나라와 첨예하게 대립했다. 대표적인 것이 철도부설권에 관한 문제였는데, 1911년 5월 청나라가 철도의 국유화를 선포하여 지방의 이권을 무시하자 이에 대한 반발이 일어났다. 쓰촨 성[四川省]에서의 보로운동(保路運動)은 무장봉기로까지 발전했고, 이것은 우창 봉기의 성공으로 이어졌다.

신해혁명의 전개

1911년 10월 10일의 우창 신군에 의한 우창 봉기는 심각한 통치의 위기에 처해 있던 청나라에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신군병사가 중심이 되어 봉기한 혁명군은 그날 밤 호광총독아문(湖廣總督衙門)을 점령하고, 이어 11, 12일에는 한커우[漢口]·한양[漢陽] 신군의 호응을 얻어 우한[武漢] 3진(鎭)을 완전히 통제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전국적인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들 봉기가 성공할 수 있었던 데에는 후베이[湖北]의 혁명파가 일반 지식인, 학생, 회당 외에 신군에 대한 혁명공작에 큰 비중을 두고 있었던 점이 크게 작용했다. 11일 혁명군은 후베이 자의국에서 도독(都督)의 선출과 군정부의 수립을 위한 회의를 가지고, 입헌파의 제의에 따라 신군장교 리위안훙[黎元洪]을 도독으로 추대하여 혁명군정부를 건립했다. 군정부 수립 후 즉시 국호를 중화민국으로 개칭하는 동시에 전국에 봉기의 정당성과 이에 대한 호응을 요청하는 전보를 냈으며, 대내외적인 방침을 발표했다. 이런 조치는 대개 동맹회의 '혁명방략'에 기초한 것이었으므로, 이 점에서는 동맹회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 인정된다. 이 정책들은 이후 혁명군에 호응하여 청나라로부터 독립한 각 성에서도 거의 그대로 답습되었다.

우창 봉기의 성공은 곧바로 전국을 급격한 혁명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다. 봉기 후 1개월 사이에 산시[陝西]·산시[山西]의 북방 2성과 후난·윈난[雲南]·장난[江南]·구이저우[貴州]·장쑤[江蘇]·저장[浙江]·광시[廣西]·푸젠[福建]·안후이[安徽]·광둥[廣東] 등 남방 대부분의 성과 상하이가 청나라로부터 독립을 선포하고 혁명군에 가담했다. 이들의 독립과정을 유형별로 보면, 신군병사가 봉기했으나 봉기 후 권력이 입헌파와 구(舊)세력에게 넘어간 경우와, 혁명파 지도하에 대중적 봉기로 권력을 장악했지만 입헌파와 구세력의 반격으로 정권을 탈취당한 경우가 있었다. 이외에도 대중적 봉기 이전에 입헌파가 청나라 관리에게 강요하여 독립을 선포함으로써 권력을 장악한 경우, 전쟁의 폭발에 의해 신군이 구세력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한 경우, 혁명파와 입헌파의 군정부가 병립·대치하다 구세력에게 정권이 돌아간 경우 등이 있었다. 결국 독립한 각 성의 정권은 대체로 혁명파보다는 입헌파나 구세력에 의해 장악되었다. 이는 동맹회를 중심으로 하는 혁명파가 우창봉기나 그 이후에 통일적인 지도능력을 상실하고 있었던 데다가 청조에 반대하고 공화혁명에 찬성하기만 하면 구세력이건 입헌파이건 모두 받아들여 합작을 한 반면, 입헌파는 국내에서 안정된 기반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들이 일단 혁명으로 전환하면 새로운 권력을 장악하기 쉬웠기 때문이었다. 독립한 각 성은 통일적인 임시중앙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준비작업으로 각성도독부대표연합회(各省都督府代表聯合會)·각성대표회의 등을 소집했다. 그러나 혁명군측은 11월 2, 27일에 한커우와 한양을 청나라측에 내주는 큰 패배를 당했고, 북벌(北伐)에 의한 청나라의 타도라는 전망이 어두워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혁명군측은 청나라측의 전권을 위임받고 있던 한인관료 위안스카이와 협상하는 방향을 택했다. 이로써 신해혁명은 무장투쟁으로부터 남북의화(南北議和)라는 정치적 협상의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혁명군이 정치적 타협을 택한 원인으로는 혁명군 자체의 단결력 결여, 위안스카이에 대한 열강의 지지 및 호의적인 여론과 그를 이용하여 청조를 타도하려는 전략적인 고려 등을 들 수 있다.

남북의화와 중화민국의 수립

우한 3진이 혁명파에 의해 장악되고 청조의 군대가 혁명군에 대한 초기의 진압에서 실패하자, 청조는 은퇴해 있던 한인관료 위안스카이에게 내정과 군정의 전권을 위임하여 그를 총리로 기용함으로써 혁명군을 진압하고자 했다. 위안스카이는 초기에 한커우·한양을 수복하기까지 무장진압정책을 써서 혁명군의 위력에 타격을 입혔으나 그후 타협을 모색했다. 이는 위안스카이가 청나라 타도 쪽으로 돌아선다면 그를 임시대총통으로 선출하겠다는 혁명군측의 결의가 이루어지고 있던 상황에서, 그로서는 굳이 승산이 불투명한 내전을 확대하여 청나라를 보위할 필요성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남북의 양군은 12월 3일 이후 계속 정전상태로 들어갔고, 18일부터 상하이에서 정식으로 남북의화가 개시되었다. 양측 대표의 담판과정에서 남방의 혁명군측이 29일 난징[南京]에서 쑨원을 임시대총통으로 하는 임시정부를 세우자 담판은 일시 중지되었다. 그러나 쑨원이 위안스카이에게 조건부로 총통직을 양보하겠다는 제안을 한 후 양자 간의 담판은 계속되었다. 위안스카이는 청나라의 퇴위를 실현시켰고, 1912년 2월 12일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宣統帝]는 퇴위조를 내림으로써 268년에 걸친 통치는 종말을 고했다. 다음날 쑨원은 사직했고 위안스카이가 임시대총통으로 선출되었다. 쑨원은 사직의 조건으로 난징에 임시정부를 설치할 것을 내세워 위안스카이를 견제하고자 했으나, 2월말에 베이징 등지에서 일어난 병변(兵變)을 구실로 위안스카이는 베이징에서 3월 10일 임시대총통에 취임했다. 4월 1일 쑨원은 정식으로 임시대총통직에서 해제되었고, 5일 참의원(參議院)이 베이징으로 이전을 결의했다. 이로써 혁명파의 위안스카이 견제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혁명파는 혁명의 궁극적인 목표의 하나인 정권장악에 실패하고, 구세력인 위안스카이가 정권을 장악했을 뿐 아니라, 신해혁명 이전의 낡은 사회적·경제적 질서나 지배계층, 반(半)식민지적인 중국의 국제적 위치에도 근본적인 변화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신해혁명은 '실패했다'는 평가가 일반적이었다. 이러한 실패의 궁극적인 원인으로는 당시 사회적 기반 자체가 미성숙한 단계에 있었던 점을 들 수 있다. 그래서 최근에는 신해혁명을 문제제기 단계로 보고 실질적인 내용은 그 이후의 단계에서 갖추어진다고 보아, 신해혁명을 '민국혁명'의 제1단계로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신해혁명 요점 정리

신해혁명은 제 1혁명이라고도 한다. 이 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함으로써 2000년간 계속된 전제 정치(專制政治)가 끝나고, 중화민국(中華民國)이 탄생하여 새로운 정치 체제인 공화 정치의 기초가 이루어졌다. 당시 재일본 유학생과 국내의 지식 청년층을 참가시킨 혁명파는 중국 동맹회를 결성하여 비밀 결사인 회당(會黨)과 손을 잡고 민주 공화제를 지향하는 반청(反淸)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 혁명파는 10월 10일 우창에서 봉기하여 중화민국 군정부를 설립함으로써 신해혁명의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이 혁명은 순식간에 전국에 파급되어 1개월 이내에 거의 모든 성에서 호응하기에 이르렀다. 1912년 1월 1일 쑨원을 임시 대총통으로 하고 난징 정부가 수립되어 쑨원의 삼민주의(三民主義)를 그 지도 이념으로 한 중화민국이 발족하였다. 그러나 위안스카이는 청나라의 황제를 퇴위시키는 조건으로 쑨원으로부터 대총통의 지위를 탈취, 3월에 정식으로 대총통에 취임하여 베이징 정부를 조직하였다. 이때부터 혁명은 급속하게 반혁명으로 전화(轉化)되었다. 정당이 난립하는 중에 혁명파는 혁명 동맹회를 개조하고 소당파(小黨派)를 합쳐서 국민당(國民黨)을 창립, 의회정치의 실현을 희구하였으나, 열강과 입헌파의 지지를 받은 위안스카이는 혁명파에게 무력 탄압을 가하여 제2혁명을 일으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혁명파는 제2(1913.7), 제3(1915.12)의 혁명을 일으켜 위안스카이 정권과 대결하였으나, 반제(反帝)·반봉건의 과제는 해결되지 않고 5·4운동 이후의 혁명으로 미루어졌다.

작가는 모욕을 받아도 저항할 줄을 모르고 오히려 머릿속에서 '정신적 승리'로 탈바꿈시켜 버리는 아큐의 정신 구조를 희화화(戱畵化)함으로써 중국 구(舊)사회의 병근(病根)을 적나라하게 제시하고 있다.


 

노신의 생애와 작품 세계

시대의 어둠을 사르던 불꽃

동양권에서 세계문단의 명성을 얻고 명작의 대열에 낀 작가는 그리 많지 않다. 우리에겐 《아Q정전(阿Q正傳)》으로 유명한 중국의 노신은 그 많지 않은 작가 중의 한 명으로, 뛰어난 문학가이자, 위대한 사상가, 교육자로서도 높은 명성을 지니고 있다. 노신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엽의 격동기를 온 몸으로 살다간 고뇌의 중국인 지성을 대표한다. 구질서가 붕괴하고 새로운 문화가 뿌리를 내리는 역사적인 과도기에 그는 문학혁명을 주도하며 조국의 근대화에 앞장섰던 시대의 선각자였다.

노신(魯迅)은 1881년 9월 25일(음력 8월 3일), 절강(浙江省) 소흥현(紹興縣) 성내(城內)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주수인(周樹人), 자(字)는 예재(豫才)로, '노신'은 <광인일기(狂人日記)>를 발표할 때 처음으로 사용했던 필명이다.

노신 집안의 조상들은 원래 호남성(湖南省) 도주인(道州人)인데 노신의 14대조 때에 농민으로 소흥에 이주했다고 한다. 이 때부터, 점차로 부를 축적했으나 노신이 태어난 당시에는 약간의 논밭과 점포를 소유하고, 조부가 한림편수(翰林編修)로서 북경(北京)에 나아가 관리 생활을 하는 전형적인 봉건 소지주의 가정이었다.

노신은  6세 때부터 가숙(家塾)에 들어가 초보적인 독서를 하며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11세 때는 삼매서옥(三昧書屋)에서 수경오(壽鏡吾)라는 선생에게 사사하였으며, 집에서는 증조부에게서 글을 배웠다. 유년시절의 노신의 성품은 근면한 편에 속했으며, 가숙이나 서당에서의 규정된 공부 외에도 중국의 고서와 야사 등을 즐겨 읽었고, 어린 시절부터 조부나 유모를 통해 듣던 민간전설과 설화 등은 노신의 관심을 끌었다. 이외에도 소년 노신의 생활에 영향을 미친 것은 안고촌(安稿村) 외가에서의 생활이었는데, <사희(社 )>(1922)에는 그 무렵 생활의 일단이 회고되어 있다. 여름철에 외가에 놀러 갔다가 마을 소년들과 천진난만하게 놀던 일이 선명하게 서술되어 있는데, 이 작품 속에서 노신은 "그곳은 내게 있어서는 천국이었다. 모두들 오냐, 오냐 해 주었고 질질사간(秩秩斯干), 유유남산(幽幽南山)(《시경》의 한 구절)을 외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라고 솔직하게 술회하고 있다. 이곳에서의 생활이 노신은 마을 어디를 가나 존경받고 사랑받는 명문댁 도련님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유복한 생활은 노신이 12세 되던 해에 조부가 투옥되고, 그로 인해 아버지 백의(伯宜)가 중병으로 앓아 눕게 되자 뒤바뀌고 만다. 주씨 집안은 이 투옥 사건을 계기로 하여 급속도로 몰락하게 되고, 노신은 아버지의 병을 고치기 위해 거의 매일을 전당포와 약방을 출입하게 된다. 전당포는 약값을 마련하기 위해 집안 물건을 저당 잡히기 위해서였고, 약국은 의원이 처방해 주는 약을 사기 위해서였다. 훗날(일본 유학에서 현대의학을 배운 이후) 노신은 그 고생이 속임수 같은 한의 때문이라고 술회하는데, 그 회고담은 그의 첫 작품집인 《납함( 喊)》(1923)의 자서(自序)에 잘 나타나 있으며, 그 창작집 속에 포함되어 있는 <명천(明天)>(1920)은 바로 그 기억을 비판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이런 고생에도 불구하고 3년 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게 되자, 집안은 완전히 몰락하였고 장남인 노신은 새로운 삶의 출로를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때의 타격, 특히 처음부터 곤궁했던 것이 아니고 갑작스레 그리 된 것이기 때문에 노신에겐 낙원의 상실이 굴욕감과 더불어 보다 강하게 의식되었고, 그것이 다시 응어리가 되어서 뒷날의 정신적 성장에 큰 영향을 준 것 같다. 노신의 작품 세계에서 보이는 깊숙한 비애와 어둠은 주로 그의 불행한 소년기에 키워진 비관적인 정서와 의심적인 기질에서 연유한다. 이러한 유년시절의 개인적 환경은 당시 중국의 시대적 상황과 함께 노신을 입신양명을 꿈꾸던 명문댁 도련님에서 열렬한 문학혁명의 전사(戰士)로 변모시키는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하게 된다.

1840년 아편전쟁 이후의 근 백년 간의 중국의 역사는 영국을 선두로 하는 서양 제국의 침략을 받아 반식민지로 떨어지는 역사인 동시에 중국민족이 그러한 열강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민족 해방사이고, 열강을 따라 잡으려는 근대사의 역사였다. 특히 노신의 전 생애와 맞물린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엽의 중국사회는 암흑의 구름으로 뒤덮인, 절망으로 충만된 시대였다. 아편전쟁 이후 계속 심화되어 온 정치, 사회적 혼돈과 경제적 궁핍으로 인해 중국 사회와 중국 민족은 단말마(斷末魔)의 병상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 고통을 가중시키고 있었던 것은 중국 봉건사회의 유교적인 폐습이었다. 중국의 유교적 전통사회 내의 폐단으로 인한 국민성의 후진성이야말로 근대화의 발전을 저해하고, 중국인들을 더 깊은 나락의 절망 속으로 떨어뜨리는 주요 원인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전근대적인 국민정신을 계몽하고, 개선하기 위한 문화운동이 진보적인 지식인들 사이에서 일어나게 되고, 1919년 5·4운동이라는 문화혁명(신문화운동)으로 심화, 확산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암흑의 시대에 노신은 다른 진보적인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신문화운동을 주도하며, '문학'이라는 활활 타오르는 불꽃으로 자기 민족의 낡은 사상과 의식을 불태우고, 시대의 어둠과 절망을 넘어서려고 애쓰던 '정신계의 전사'로서 일생을 일관하게 된다.



문학의 길을 향하여

근대 중국 사회가 서구 문명과의 접촉으로 근대화에 눈을 뜰 무렵, 집안의 몰락으로 정통적인 입신의 길이 막혀 버린 노신은 새로운 세계의 경험을 위해 무술변법(戊戌變法)이 나던 해인 1898년 그의 나이 17세 때 남경(南京)으로 가 강남육사학당(江南陸師學堂) 부설의 광로학당( 路學堂)으로 전학을 해 거기서 4년간 노신은 물리, 수학 등 근대 과학의 기초를 배우며 서양 과학의 우월성을 실감하게 된다. 또한 학교에서의 정규교육 외에 당시 중국의 식자들간에 널리 읽히고 있던 헉슬리의 《천연론(天演論)》(《진화와 논리》 번역)을 통해 진화론에 흥미를 느끼게 된다. 이 진화론에의 개안(開眼)은 노신의 정신적 성장에 큰 영향을 주었는데, 그것은 과거의 구습에 얽매여 있는 중국 민족의 낙후된 정신생활을 개선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다 주었기 때문이다. 또한 노신은 이 시기에 유신파(維新派)에 의해 간행되던 「시무보(時務報)」와 서구의 정치, 경제, 문화에 관한 것을 널리 소개했던 「역서강편(譯書江編)」 등을 통해 서구의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을 접하게 된다. 이 잡지는 1899년 일본에 유학중이던 학생들에 의해 편찬된 최초의 신잡지로, 주로 서구의 서적을 번역하여 실었다. 노신은 이 잡지를 통해 서구의 문학과 철학 서적을 처음으로 접하게 되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루소의 《민약론(民約論)》,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 뒤마의 《춘희》 등이었다고 한다.

노신은 1901년 말에 광로학당을 졸업하고 바로 다음 해인 21세 때, 일본으로 유학의 길을 떠나 동경의 홍문(弘文)학원 속성과에 입학한다. 그곳에 머무르는 2년 동안 노신은 일본어를 배우며 철학과 문학에 관한 책을 광범위하게 읽으며, 혁명집단인 '광복회(光復會)'에도 출입하게 된다. 이 때에 그는 '국민성'에 관한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면서 중국과 중국인을 구할 방법을 찾기 시작한다. 그 결과 일본의 유신(維新)이 서양의 의학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인식하고 1904년 가을 동경을 떠나 센다이[仙臺] 의학 전문학교에 입학한다. 재학 중 노신은 의학에 관한 전문적 지식의 습득 외에도 정치 모임에 자주 참가하면서 더한층 정치적 의식을 심화시켜 나가며, 서서히 문학의 길로 다가가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유명한 '환등(幻燈)사건'으로 인해 노신은 의학에서 문학으로 방향전환을 하게 된다. 이 환등사건에 관한 일화와 그 충격으로 인한 문학에의 결심은 노신의 첫 작품집인 《(납함)의 자서(自序))에서 그 일면을 잘 엿볼 수 있다. 노신은 환등 사건으로 인해 중국과 같은 낙후된 국민에게는 건강한 체격보다 강한 국민정신이 더 필요하다고 통감한다. 그래서 국민정신을 개조하는 데 문예를 통한 방법이 최선이라고 판단하고 문예운동에 매진할 것을 결심한다. 그리고 그 최초의 작업으로 노신은 동인 잡지 발간을 계획한다. 1907년 노신은 동경에 있던 몇 명의 동료들과 의기투합해 「신생(新生)」이라는 문예잡지의 출판을 계획한다. 그러나 이 20대의 젊은 중국 유학생들의 의욕과 패기는 인력과 재력의 부족이라는 현실의 벽에 부딪혀 무산되고 만다. 노신은 이 문학활동의 실패로 심한 좌절감을 느끼게 되지만 곧 극복하고 <마라시역설(摩羅詩力說)>, <문화편지론(文化偏至論)> 등의 논문과 몇 편의 러시아 문학 작품을 번역하여 자신의 문학생활의 첫장을 열게 된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08년 노신은 혁명적 논객인 장병린(章炳麟)의 《설문해자(說文解字)》의 강의를 듣게 된다. 손문, 황흥과 함께 신해혁명의 삼종(三宗)이라 일컬어지는 장병린은 국학자로서의 성망도 있고 해서 당시 혁명 운동에 대한 영향력은 지식인과 학생들 간에 손문 이상으로 컸다. 노신은 동생인 주작인(周作人), 허수상(許壽裳), 전현동(錢玄同)과 함께 학자로서의 장병린에게 접촉한 셈인데 '전투적인 문자이야말로 선생의 생애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영구적인 업적'이라고 <태염선생(太炎先生-장병린)에 대해서>에서 말할 정도로 그 감화는 지대했다. 노신은 장병린과 사귀면서 그들 조직인 '광복회'에도 자주 출입하게 되는데 그 가입 여부는 관해서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이처럼 8년여에 걸친 유학시절은 노신의 최초의 문학활동 시기였으며, 초기 사상의 중요한 형성시기였다.



중국 신(新)문학의 선구

1909년 노신은 귀국해서 항주(杭州)의 양급사범학교에서 화학과 생리학을 가르치다가, 이듬해인 1910년 여름에 고향인 소흥으로 돌아와서 소흥 중학교에서 근무하게 된다. 1911년 이른바 신해혁명이 폭발하고 노신은 소흥사범학교 교장에 취임하여 재직하던 중, 다음해인 1912년 남경에 중화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교육총장이 된 채원배(蔡元培)의 요청에 따라 교육부원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임시정부를 따라 북경으로 이주한다. 그러나 노신은 기대를 걸었던 신해혁명이 역사적 임무를 완성하지 못하고 원세개(遠世凱)의 제정부활운동, 장훈(張勳)의 복벽(複壁)사건 등을 통해 다시 복고주의적 경향으로 흐르자 크게 실망한다. 1912년에서 <광인일기>를 발표하게 되는 1918년까지는 노신의 생애를 통해 사상적으로 가장 고난에 빠진 시기로 새로운 출구를 찾기 위한 사고와 심사의 시기였다. 그는 중국사회와 사상에 관해 깊이 관찰하고, 중국의 역사와 전통문화에 관한 연구에 몰두하며 중국서적에 관한 고증과 수집, 금석비첩(金石碑帖)과 불경의 연구 등에 몰두하며 시간을 보내게 된다. 신해혁명의 붕괴로 심한 혼란에 빠진 노신은 새로운 중국 혁명상의 재건을 고대하며 절망과 침묵의 시기를 지나고 있었던 것이다.

노신에게 있어 청년기의 반항 없는 문학활동의 실패와 그 뒤를 이은 어두운 조국의 현실은 심한 정신적 방황과 고뇌를 가져 왔던 것이며, 따라서 이러한 내면의 혼란을 극복하고 나아가 다시금 자신이 속한 세계와의 사이에 일정한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단호한 윤리적, 의지적인 자아를 확립하기 위한 정신적 여유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방황과 고뇌를 뚫고 나온 작품이 바로 노신의 처녀작이자, 백화체(白話體-구어체) 문장으로 씌어진 중국 최초의 신소설인 <광인일기>였던 것이다.

중국문학이 비록 수천 년의 장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으나, 소설은 다른 장르에 비해 줄곧 경시되어 왔다. 명청시대(明淸時代)에 백화소설(구어체로 된 소설)이 많기는 하나 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하나같이 창조정신이 결여되었고 새로운 사상도 없이 묘사하는 신변잡기식 이야기였다. 따라서 진정한 신소설은 신문학운동 이후 20세기가 시작되면서 새로운 시대를 맞는다.

당시 중국인들에게 깊은 자극을 준 것은 번역을 통한 서양사상과 문학의 영향이었다. 청일전쟁 후 변법운동(變法運動)이 대두했던 때에 한편으로는 유럽의 사상과 문학이 중국에 소개되기 시작했다. 서양서적의 변역은 그  전부터도 있었지만 종래의 그것은 양무(洋務)운동이나 기독교의 전도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많았고 선택의 범위가 제한되었는데, 이 무렵에 와서는 사상과 문학의 분야까지 넓혀졌던 것이다. 양계초(梁啓超), 엄기도(嚴幾道-嚴復), 임서(林緖), 진독수(陳獨秀), 호적(胡適), 주작인 등은 문학, 사상의 개혁을 주장하며 서양의 문화를 소개하는데 앞장섰다. 당시 이들의 문학혁명과 문체개혁, 서구문학의 번역소개는 새 세대들에게 문학에 흥미를 갖게 했으며, 중국 신문학의 부흥에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중국인들로 하여금 서양문학의 특성을 새삼 인식케 하였다. 이로 인하여 중국 지식인들 머릿속에 수입된 합리주의 사상은 중국의 전통적인 봉건사상과 유교사상을 근본적으로 뒤엎어 놓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문학개혁에 관한 의기당당한 거센 물결은 곧 5·4운동의 고조를 맞이하면서 전국을 석권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작품을 통한 현대문학의 기원이 된 것은 노신의 소설들이었고 특히, 백화로 씌어진 소설로 1918년 「신청년」지에 발표되었던 <광인일기>였다.

노신은 이 백화체의 문장으로 씌어진 새로운 구성의 소설을 통하여 '사람이 사람을 잡아 먹어온' 중국의 봉건사회를 고발하였으며, 또한 중국의 장래를 위하여 '너희들, 지금 곧 개심하라. 진심으로 개심하라 알겠는가. 머지않아 인간을 먹는 인간은 이 세상에 있을 수 없게 된단 말이다.'라고 외쳤던 것이다. 이 뒤에 전국적으로 백화의 신문과 정기 간행물이 출현하였으며, 이에 중국의 오래 전통문학은 종말을 고하고 새로이 현대문학이 그 넓은 자리를 대신 차지하게 된 것이다.



'광인일기'와 문학혁명

노신의 <광인일기>는 당시 신문화운동을 주도하던 진영으로부터의 봉건사회에 대한 최초의 도전서였으며 사상혁명과 문학혁명의 이정표 역할을 했던 중요한 작품이다. 노신의 작품 중 가장 현실에 대한 고발성이 강하게 나타나 있으며, 내용과 형식의 과감한 파격성으로 인해 중국의 젊은 지식인 세대에 큰 충격을 주었던 작품이다. 작품은 13개 부분으로 이루어진 일기체 형식이다. 흘인(吃人-먹는 사람). 피흘인(먹히는 사람), 박해자, 피박해자가 선명하게 대조를 이루며 예교(禮敎)가 사람을 잡아 먹는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 이 작품의 특징이다. 피해망상자의 형상을 통해서 중국의 유교적 전통사회내의 가족제도와 예교의 폐단과 피해를 과감하게 폭로하고 있다.

<광인일기>는 어느 날 밤 달을 보고 '이제까지 30년 이상이나 전혀 제 정신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광인의 이상심리-광인은 각성하였으나 유교이념의 강력한 조직에 묶여 있는 정상인들과는 괴리감을 느낌-를 통하여 암흑 속에 있는 중국사회 전체를 고발한 작품이다. 광인의 눈에 비친 사회는 모든 인간들이 '자신은 남을 잡아먹으려고 하면서 남에게는 잡아먹히지 않으려 하므로 서로 의심을 품고 흘끗흘끗 상대방을 감시하고 있는' 세계이다. 광인은 4천년에 걸친 중국 봉건사회의 역사책 속에서 '식인(食人)'이라는 두 글자를 발견해 내고, '인간을 잡아먹은 일이 없는 아이가 아직 있는지 모르겠다. 아이들을 구하라'고 호소한다.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것은 물론 하나의 비유이지만, 노신이 광인의 눈을 통하여 본 중국사회는 그처럼 헤어날 길 없는 구조적 병폐에 갇혀진 암흑의 세계였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도 그 사회의 일원임을 실감한 나머지 '아이들을 구해라……'하고 부르짖기에 이르는 광인의 정신적 변화는 바로 작가인 노신 자신의 정신적 체험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즉, 일본 유학시절 진화론과 니체, 바이런 등을 통해서 접한 서구 근대정신사조의 영향으로 홀로 각성하여(이 때 중국의 현상에 대하여 '잡아먹힌다'는 공포를 자각한다) 개혁의 의지를 품고 스스로가 '팔을 힘차게 흔들며 한 번 외쳐서 이에 응답하는 사람이 구름처럼 몰려들게 할 수 있는' 정신계의 전사라는 임무를 떠맡아 문예활동을 시도하였으나 모두 헛되이 실패로 끝나고 만다. 더욱이 자신이 무한한 열의를 가지고 지지하였던 신해혁명조차도 무력하게 반동세력에 의해 좌절되는 것을 보고 깊은 절망 속에 빠져서, 탁본(拓本)의 수집, 연구 등에 파묻혀 스스로를 마비시켜 오던 작가 자신이, 광인이 '나도 누이동생의 고기를 먹었다'고 하는 죄의 자각에 도달하였던 것과 마찬가지의 체험을 통하여 '잡아먹힌다'는 피해의식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그리고 결국 자신이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로 속해 있는 중국사회의 도피할 길 없는 암흑의 구조를 파악하게 됨으로써 문학자로서의 자각을 얻어 '아이들을 구해라……'고 하는 절망의 부르짖음을 발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현실정치에서 소외되어 있던 이상적, 관념적인 반항과 행동의 정신계의 전사는 그처럼 자신을 시대의 저변에 편입시키는 근원적인 선택에 의해 다시금 실재하는 중국민족과 밀착된 정치적 인간으로서의 문학자로 탄생하게 된다. 이로부터 이어지는 노신의 창작행위는 중국사회의 엄연히 가로놓여 있는 절망의 소재에 대한 현장 검증에 바쳐지게 된다.

중국의 현상에 뿌리깊은 절망감을 느꼈던 노신은 '문학혁명' 에 대한 열정으로 다시 붓을 들게 되고, <광인일기>를 시작으로 계속해서 '인생을 위한', '인생을 개선하기 위한' 작품을 발표한다. 노신은 1918년 <광인일기>로부터 1925년의 <이혼>에 이르는 8년여 동안 많은 소설을 발표하는데, 이 일련의 작품들은, 비평적 선도에 의해 열려진 문학 혁명 이념을 작품상에 나타낸 최초의 작품군이었다. 이 작품들은 시기별로 각각 창작집인 《납함( 喊)》(1923)과 《방황(彷徨)》(1926)에 수록되는데 특히, 첫 창작 소설집인 《납함》(싸움터에서 양쪽 병사들이 지르는 소리, 함성)에 실린 작품들은 문학전사로서의 노신의 투철한 비판정신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다.

구지식인의 몰락과 나태한 근성을 지적하여 경향심을 불러일으켰던 <공을기(孔乙己)>(1919), 미신과 무지로 인한 중국인의 병폐를 일깨워 준 <약>(1919)과 <명천>, 농촌생활의 암담함과 피폐함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고향>(1921) 등의 시대 고발적인 일련의 작품들은 문학혁명가로서의 노신의 열정을 대중에게 알리며, 문학인으로서의 노신의 위치를 확고하게 해 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노신의 이름을 중국 근대문학의 선구자로서 후세에까지 길이 남을 수 있게 해 준 작품은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아Q정전(阿Q正傳)>일 것이다.



'아Q정전'과 정신승리법

<아Q정전>은1921년 12월에서 다음해 2월에 걸쳐 주간 「신보부간(晨報副刊)」에 파인(巴人)이라는 필명으로 발표된 중편소설이다. 이 소설은 각국어로 번역되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노신의 이름을 불후한 것으로 만든 대표작이다.

<아Q정전>은 신해혁명 시기의 농촌생활을 제재로 하여 이 시기의 중국 농촌 생활상을 심각하게 파헤쳐 아Q라는 품팔이꾼의 운명을 비극적으로 묘사함과 동시에 중국민족의 나쁜 근성을 지적하여 국민성을 각성시키려 하고 있다. 이 소설에서 노신은 중국과 중국민족을 절망적으로 그리고 있다. 민족이 나아가야 할 길을 예견하고, 희망이 있는 방향을 제시하기보다는, 오히려 궁지에 몰려 소외되고 탈락되고 짓눌린 자의 모습을 집요하게 그려낸 것이다.

아Q는 반식민지, 반봉건적인 사회, 더구나 신해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가지 못하는 타성의 사회에서 사명감도 목적의식도 없으면서 부질없이 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드디어는 무기력하고 비겁한 노예근성으로 돌아가 그 최후를 공허하게 끝마치는 하나의 사회적 산물이다. 아Q의 성격은 풍부하고 다양하며 다혈질이다. 그는 자손심이 매우 강할 뿐만 아니라 보수적이며 우매무지하다. 그러나 아Q의 성격을 관통하는 지배적인 관념의 흐름은 '정신승리법'이다. 노신이 아Q를 통하여 예술상의 '정신승리법'을 끌어 낸 것은 심각한 현실적 의의와 깊은 역사적 의의를 내포하고 있다. 즉, 공허한 영웅주의와 무력한 패배주의에 침식되어 자국의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며 자기만족에 젖어 있고, 타개치 못하는 민족적 위기에 살면서도 대국의식을 버리지 못하고, 물질생활의 군데군데마다 실패를 경험하면서도 정신적인 만족에 현실을 외면해 버리는 청나라 정부와 한(漢)민족에 대한 조소와 비난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아편전쟁 이후 중국의 문호를 개방한 청나라 정부는 그들의 실패를 변명하고 감추면서 조정의 위엄을 계속 유지, 봉건 통치를 완고히 함으로써 허영과 거만한 욕구를 채운다. 이러한 상류사회의 기풍이 반봉건성, 반식민지의 중국사회에 만연되어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즉, 실제는 모든 것에 패하였으면서도 정신적인 승리에 만족하는 기풍이 하나의 국민성으로 인정되었고 이러한 국민성에 대한 것을 노신은 철저하게 증오하게 된 나머지 아Q라는 인물을 내세워 심히 채찍질을 한 것이다.

아Q는 비겁하다. 상대를 비교해 보아 더듬거리는 놈에게는 욕을 하고 기운이 약한 놈은 때린다. 그러나 혼나는 때가 더 많다. 왕털보한테 혼이 나고 저항력이 없는 젊은 여승에게 취하는 행동, 힘이 없는 소D에게 우쭐되며 깔보는 것은 그의 비겁한 행동을 표현하고 있다. 이것을 노신은 중국 민족성의 병폐요, 비겁성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아Q는 정신승리법에 의해 희롱을 당하고 매를 맞아도 반항하려고 하지 않는다. 왜 놀림을 받고 있는지도 생각지 않고 도리어 마음속으로는 우월감에 차 있다. 아Q는 자존심이 강하다. 그가 비록 품팔이 일꾼에 지나지 않으나 미장(未莊)의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는 조대감을 비롯한 지주들에게도 정신적으로 존경의 빛을 나타내지 않는다. 이와 같은 아Q식의 정신승리법을 노신은 일찍 깨닫고 문예를 무기로 삼아 깨닫지 못한 대중을 치료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아Q주의'는 피압박 사회에서 하나의 교활한 대응 방법이다. 민족의 치욕을 건망하고 병을 앓으면서도 의사를 기피하고, 남의 뒤를 따라 공연히 뇌동하고 약자에겐 잔인, 강자에겐 아첨하며 스스로의 책임을 남에게 미루고 지난 날의 영광을 과장해 환상에 젖어 있는 자기 민족에 대한 맹혹한 질책인 것이다. 특히, 마지막 아Q의 처형 장면은 노신의 자기 민족에 대한 노여움, 분노, 쓸쓸한 동정 등의 우울한 물결의 파장을 전해준다. 이 〈아Q정전〉은 발표 당시 보수파로부터는 국민의 나쁜 면만을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그리고 급진적인 세력으로부터는 적극적인 생산 농민을 묘사하지 않고, 룸펜 농민을 주인공으로 삼았다는데서 각각 비난과 질시를 받았다. 하지만 〈아Q정전〉은 이러한 국수주의와 이데올로기의 논란을 넘어서 문학적 영역으로 승화된, 중국문학뿐만 아니라 세계문학의 걸작으로서도 손색이 없는 작품인 것이다.



암흑(暗黑) 속에서 광명(光明)의 미래를

노신은 1926년 두 번째 소설집인 《방황》을 출판한 이루로는 소설보다는 자신의 사상을 발표하는 수단으로 문예활동에서 가장 많이 사용한 잡문(雜文)을 주로 발표한다. 그리고 1927년 상해(上海)에 와서 1936년 세상을 떠나기 전, 상해에서의 10년 동안, 노신은 두 번 북경을 다녀온 외에는 줄곧 상해에서 보낸다. 상해에서 보낸 생애의 마지막 10년 동안 노신은 9권의 잡문집과 역사소설인 《고사신편(新古事編)》을 출간했고, 문예이론, 장편, 단편소설, 동화 등을 번역했으며, 소련과 독일의 신흥목각(新興木刻)을 소개했고, 신문학운동을 제창했으며 세계 언어의 보급에 힘썼다. 또한 행동적인 면에서는 '중국 자유운동 동맹'. '중국좌익작가연맹' 등에서 활동하며 정치적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노신의 문학세계는 이 1927년을 기점으로 크게 두 시대로 분수령을 이룬다. 노신의 전기시대가 단편시대라면 후기는 잡감문(雜感文)의 시대이고, 전기가 계몽적이고 사실적인 인생문학이라면, 후기는 사회비판과 문학비평을 전제로한 정치문학이다. 전기작품에는 전통적인 애수와 낭만 그리고 풍자가 특징이지만 후기작품은 맵고 신 정공적인 표현이 특징이다. 노신은 후기에 정치에 관심을 보이면서 좀더 적극적으로 인간혁명, 제도혁명에 전념하게 되고, 비판문학의 영역으로 사상적 변화를 일으켰던 것이다.

만년의 노신은 중국의 고리키라 일컬어질 정도로 많은 청년 작가들로부터 숭앙을 받았다. 지병으로 병상에 드러누우면서도 집필을 쉬지 않았던 노신은 1936년 10월, 55세의 일기로 삶을 마감했다. 당시 1만여 명의 군중들이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으며, 항일 통일전선 조직문제를 두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던 문인들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문단을 통일하기도 했다.

노신의 작품들은 대개 짤막짤막한 단편이지만 그 속에 깃든 사상성과 예술성으로 인해 그 생명력은 어느 작품보다도 길다. 노신의 문학은 혁명을 위한 문학이지만, 안이한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전락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향기롭고 위대한 문학이다. 노신이 작품 속에서 그리고자 했던 것은 단순한 슬로건이나 말뿐인 지식인 작가의 허위가 아닌, 진실한 생활, 눈부신 투쟁, 약동하는 맥박, 뜨거운 정열, 그리고 상승하는 인간의 희망이었다.

노신의 문학세계는 어둡다. 그것은 노신을 둘러싼 현실이 모두 생명력을 잃어버린 절망의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신은 그 절망 속에 갇히지 않고, 오히려 부정적인 현실에 대한 비극적인 자기확인을 통해 발전적인 의지로 승화시킨다. 노신의 작품 중 하나인 <고향>의 마지막 장면에 다음과 같은 나레이션이 있다.

'희망이라는 것은 원래 있는 것이라 할 수도 없거니와 없는 것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실상 땅 위에 본래부터 길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니는 사람이 많아지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노신에게 있어 희망은 이처럼 묵묵히 다져진 좌절감 위에 비로소 싹틀 수 있는 것이다. 그의 대표작인 <아Q정전>에서도 노신은 아Q의 혁명을 비참하게 좌절시킴으로써 아Q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을 해방할 수 있는 인간으로서의 자각을 얻도록 했던 것이다. 중국이 희생할 수 있는 진정한 혁명의 길은 바로 아Q의 절망서부터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노신이 암흑속에서 광명의 미래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자기 민족에 대한 열렬한 애정에서 기인한다. 노신의 가슴 밑바닥에서 뜨겁게 이글거리던 민족애야말로 그의 문학세계에 희망을 잉태시킬 수 있었던 주요 원인이었던 것이다.

가장 험난한 시대에 태어나 격동기를 살며 열렬한 민족애로 일관했던 노신. 그는 민족의 병근(病根)을 노출시킴으로써 과거의 어두운 체험으로부터 계몽하는 일을 피부로 느끼고, 앞날의 행복을 드러내 놓기보다는 과거의 고통을 쫓아 현재를 움직이며 미래를 예언하던 시대의 선각자요, 민족혼이었다. (출처 : 혜원출판사 부록)


 

루쉰


1881. 9. 25 중국 저장 성[浙江省] 사오싱[紹興]~1936. 10. 19 상하이. 20세기 중국문학의 거장. 본명은 저우수런[周樹人], 자는 예재(豫才).

초기생애

루쉰의 어린시절 이름은 장서우[樟壽]였고 수런이라는 이름은 1898년 난징[南京]의 학교에 입학할 때 가지게 되었다. 광서(光緖) 11년에 동생 저우쭤런[周作人:1885~1966]이 태어났다.

루쉰은 어렸을 때 서당 선생에게서 역사서나 유교 경전을 배우기 시작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림책을 보거나 베끼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나중에 그는 중국 고대의 목판화집 〈북평전보 北平箋譜〉·〈십죽재전보 十竹齋箋譜〉를 정전둬[鄭振鐸:1897~1958]와 공동으로 다시 새겨 출판하는가 하면 독일 메에펠트의 소설 〈시멘트〉의 그림, 소련의 판화집 〈인옥집 引玉集〉, 독일 콜비츠의 판화집 등 외국의 새로운 판화를 복사하여 출판함으로써 중국에서 새로운 판화를 육성하는 데 힘을 쏟았다. 이같은 그의 회화 지향은 이미 소년시대부터 싹튼 것이었다.

그가 13세 때 가정의 중심이자 경제적 지주였던 할아버지가 갑자기 체포·투옥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친지가 관리시험을 치를 때 평소 알고 지내던 시험관에게 뇌물을 건네주었다는 혐의 때문이었다. 현지사(縣知事)와 중앙정부 관리까지 지냈던 할아버지가 감옥에 갇히게 되자 그의 일가는 커다란 타격을 입었고 생활은 갑자기 곤궁해졌다. 그의 아버지는 본래 병약하여 당시 폐결핵으로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 있었다. 그는 거의 매일 어머니의 장신구 등을 전당포에 맡기고 받은 돈으로 약을 사왔지만 아버지는 결국 그가 16세 때 사망했다.

그의 첫번째 소설집 〈눌함 喊〉의 자서(自序)에는 당시의 일이 이렇게 씌어 있다. "누구라도 평온한 가정으로부터 곤궁의 나락으로 떨어진 사람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이러한 과정 속에서 세상사람들이 가진 대부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아버지가 죽은 2년 후 18세가 된 그는 8원의 학비를 어머니로부터 받아 난징으로 갔다. 학교에 입학하여 새로운 학문을 닦기 위해서였다.

학업과 성장기

그는 원래 학비를 면제받는 해군학교에 입학했지만 곧 육군학교 부설 노광학당(路鑛學堂)으로 전입했다. 여기서 그는 독일어를 공부했고 물리·지질·광물·지리·역사·그림·체조 등 전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서양식 과목에 접하게 되었다.

루쉰이 난징에 있는 동안 읽은 책 중 후일 특히 깊은 영향을 받은 것은 그즈음 출판되어 평판이 좋았던 옌푸[嚴復:1853~1921]의 〈천연론 天演論〉(토머스 헉슬리의 〈진화와 윤리〉를 발췌·번역하여 군데군데 역자 자신의 의견을 삽입한 것)으로서 여기에 담긴 진화론학설은 그에게 신선한 자극을 주는 동시에 마음 속 깊이 자리잡게 되었다. 이것은 '자연선택'이나 '적자생존'이라는 진화론의 법칙성이 국제사회 속의 중국에 적용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민족적·국가적 위기의식 때문이었다. 따라서 진화론의 적용을 피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중국을 혁명하여 '신생'(新生)화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강한 전진의 염원이 청년 루쉰을 다그쳤다. 바로 이 때문에 루쉰은 문필활동을 시작하여 죽는 날까지 중국의 쇠퇴를 상징하는 봉건적·전근대적 의식구조를 집요하게 파헤쳐 비판하고 공격했다.

1902년 22세 때 노광학당을 졸업하자 일본에 유학하여 8년에 걸쳐 도쿄[東京]와 센다이[仙台]에 체류했다. 그는 처음 2년간 중국유학생을 위하여 특별히 설치한 도쿄의 홍문학원(弘文學院)에서 일본어와 교양과정을 배웠고 24세 때 센다이 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지만 2년째 되던 해 그만두고 도쿄에 돌아와 문학활동을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의학교를 그만두게 된 사정에 관해서도 〈눌함〉의 자서에 자세히 나와 있다. "당시 학교에서는 세균학강의에 영화를 사용했는데 시간이 남을 때에는 풍경이나 시사에 관한 것도 보여주었다. 마침 러일전쟁 때였기 때문에 시사에 관한 것이 많았는데 때로는 그와 같은 영화 속에서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동포들과 만나게 되었다. 러시아를 위해 스파이 노릇을 했다는 이유로 일본군에 체포되어 참수당하는 동포와 그것을 에워싸고 구경하는 많은 동포들이었다. 모두 당당한 체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무덤덤한 얼굴로 구경만 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대체로 무지한 국민은 체격이 아무리 훌륭하고 건장해도 바보같은 구경꾼밖에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우선 가장 필요한 것은 그들의 정신을 변화시키는 것이며 그렇게 하는 데에는 문예가 가장 적당한 수단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의학교를 그만두고 도쿄로 돌아갔다."

루쉰은 센다이 의학전문학교에서 독일어를 배웠는데 도쿄로 돌아와서도 '독일협회학교'에 다니면서 독일어 공부를 계속했고 레크럼 문고의 세계문학을 읽었다. 특히 유럽이나 동유럽의 문학, 그 중에서도 폴란드·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그리스 등 당시의 약소·피정복 민족의 문학을 즐겨 읽었다고 한다. 그것은 자신의 조국인 중국과 마찬가지로 약소하고 압박받는 민족이 어떻게 살고 무엇을 추구하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즉 다른 약소민족의 문학을 통하여 중국민족은 어떻게 살아야 하고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가에 관하여 공감의 계시를 얻고자 한 것이다.

귀국과 공무원 생활

선통(宣統) 1년(1909) 그는 8년 간의 일본유학을 청산하고 귀국하여 항저우[杭州] 사범학교에서 화학과 생리학을 가르쳤으나 다음해에는 사오싱 중학교의 교감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 다음해인 1911년 가을 후베이 성[湖北省]의 우창[武昌]에서 혁명이 일어나 곧바로 전국에 파급되어 각지의 청조(淸朝) 지배기구는 속속 무너졌다. 사오싱도 물론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새로운 도독(都督:지방군권 장악자)에 의해서 교장에 임명되었지만 그의 학생 중 하나가 도독을 비판하는 신문을 냈기 때문에 기피인물로 지목되어 이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다. 그 신문에 루쉰은 하이네의 시를 번역하여 실었다. 또 이즈음 그의 첫 소설인 문어체의 단편 〈회구 懷舊〉(1913년 3월 〈소설월보 小說月報〉에 게재)를 저술했다.

1911년 혁명으로 청조가 쓰러지고 다음해인 1912년 1월 난징에서 중화민국임시정부가 탄생했는데, 그는 고향 선배이자 새 정부의 교육부를 관장하던 차이위안페이[蔡元培:1868~1940]의 초청으로 교육부 관리로 임용되었다. 이해 5월 정부가 베이징으로 옮기면서 그도 베이징으로 이사하여 그후 15년 간 교육부관리로 사회교육국에 근무했다. 1918년부터 집필활동을 시작했지만 그때까지의 베이징 생활 역시 '적막감'의 연속이었다.

베이징 시절 초기 그는 공적으로는 교육부 일을 보면서 틈이 나면 개인적으로 오래된 탁본을 모아 그것을 베껴쓰거나 오래된 소설집을 교정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행동들이 '적막감'에 사로잡힌 영혼의 고통을 마취시키는 방법이었다고 스스로 말하고 있다. 즉 혁명 후의 정치불안과 공포분위기를 잊기 위한 행동들이었다. 외형적으로야 어떻든 실질적으로는 중국이 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혼란과 불안만 가중된 현실이 그를 절망으로 몰아간 것이다. 혁명 후 실권자가 된 것은 청조를 배반한 위안스카이[袁世凱]였다. 그는 중화민국 대총통이 되고서도 이에 만족하지 않고 오히려 제정(帝政)을 부활시켜 자신이 황제가 되려 했고 심복을 부려 제정 부활 여론을 만들어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반대자의 입을 막기 위해 암살을 자행하기도 했다. 정부 관리가 잡담중에 반대의견을 흘리기라도 하면 어느 사이엔가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될 정도였다. 그때 루쉰이 탁본을 모으고 그것을 베껴쓰면서 세월을 보낸 것은 암살을 면하기 위해서였다고 동생인 저우쭤런은 쓰고 있다. 그의 작품 속에 때때로 어두운 그림자가 깃들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당시 그가 받았던 마음의 충격이 마치 후유증처럼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후로 계속된 그의 문필활동을 볼 때 그러한 사건들이 그의 인간적인 민족애를 한층 확고히 해주고 나아가 다음 단계의 싸움을 자극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는 〈자선집 自選集〉(1932)의 서문에서 "절망이 허망하기는 희망과 마찬가지이다"라는 헝가리 시인 베트피산더의 시구를 인용하고 있다.

문인으로서의 출발

1918년 친구 첸셴퉁[錢玄同]이 루쉰을 방문하여 잡지 〈신청년 新靑年〉에 기고할 것을 권했는데 이 잡지의 5월호에 루쉰은 단편소설 〈광인일기 狂人日記〉를 실었다. 이것이 루쉰이 작가로서 출발한 첫번째 작품이다.

〈신청년〉은 본래 〈청년잡지 靑年雜誌〉라는 이름으로 1915년 9월에 창간되었다가 1916년부터 〈신청년〉으로 이름을 바꾸어 베이징대학의 문과학장 천두슈[陳獨秀:1879~1942]가 주재하고 베이징대학 교수 몇 명이 동인으로 편집에 참여했던 종합적 계몽잡지로서 '문학혁명'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중국에서는 정식 문장에는 문어체가 사용되었고 정통 문학용어 또한 문어였다. 그러나 문어는 고어(古語)로서 현대인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할 수 없었다. 1917년 1월 미국 유학중에 있던 후스[胡適]는 〈신청년〉에 기고한 〈문학개량추의 文學改良芻議〉라는 글에서 구어(口語)가 아니면 오늘날의 문학은 성립할 수 없다는 주장을 폈다. 다음해 같은 잡지에 천두슈는 후스의 주장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이는 동시에, 용어는 물론 내용의 측면에서도 옛 문학의 무사상성(無思想性)을 통렬하게 공격하고 앞으로의 문학은 평이한 표현을 사용하여 사회성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을 담은 〈문학혁명론 文學革命論〉을 발표했다. 그후로 〈신청년〉은 '문학혁명'의 본산이 되어 다른 동인들도 구어문학의 역사적 정통성을 강조하는 논문을 이 잡지에 속속 발표했다. 일반적으로 〈신청년〉의 주요주제는 봉건적 국민의식의 변혁을 지향하는 것으로, 중국에서 막 성립된 민주공화제를 다시 군주제로 되돌리자는 낙오된 의식의 비근대성을 비판·시정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천두슈는 문학혁명을 이끄는 것은 '민주'와 '과학'의 양대 지주였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이같은 목표와 관련하여 중국 봉건사회를 2,000년 이상이나 윤리·사상적으로 구속해오던 '유교'의 권위는 새로운 민주 중국의 앞길을 방해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따라서 〈신청년〉은 국민의식 속에서 민주와 과학을 추진하기 위해 유교주의를 격렬하게 비판·공격했다. 예로부터 확고부동한 권위를 누리고 있던 문어를 부정하고 구어문학을 정통으로 하는 '문학혁명론' 역시 봉건사회에 뿌리깊이 자리잡은 기성의 권위를 부정하는 주장이었기 때문에 〈신청년〉은 후스의 구어문학 주장을 곧바로 받아들였고, 나아가 그것을 '문학혁명'이라는 한층 정치적인 표어로 바꾸어 제기한 것이었다.

루쉰의 〈광인일기〉는 후스와 천두슈의 구어문학이나 '문학혁명' 주장을 최초로 실천한 작품이다. 구어적 표현을 채택한 이 작품은 유교의 억압적인 도덕이 '사람이 사람을 먹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암시하고 이것을 미친 사람의 입을 통해 대담하게 말한 내용으로, 결말은 "어린이를 구하라"는 말로 맺고 있다. 중국의 장래를 위해 이제부터 새로운 사람은 유교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 것이다.

루쉰은 〈광인일기〉에 이어 〈공을기 孔乙己〉·〈약 藥〉·〈풍파 風波〉·〈고향 故鄕〉 등의 단편소설을 〈신청년〉에 계속 발표하여 '문학혁명'이 제창하는 작품의 가능성을 실천했다. 특히 1921년 베이징의 신문 〈천바오 晨報〉 부록판에 연재된 〈아Q정전 阿Q正傳〉은 신문학의 승리를 확인하고 또한 작가 루쉰의 지위를 확립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 소설은 '아Q'라는 날품팔이 노동자를 주인공으로 하여 봉건적인 중국사회가 만들어낸 민족적 비극을 풍자하여 전형화(典型化)한 것인데, 독자들은 자기 자신 속에 숨어 있는 아Q 기질에 충격을 받았고 이 작품은 곧바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루쉰은 수필 〈나는 왜 소설을 쓰게 되었는가〉(1933) 속에서 "나는 병든 사회의 수많은 불행한 사람들로부터 소재를 찾았다. 그 의도는 질병과 고통을 거론하여 치료의 필요성을 환기하는 데 있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루쉰 소설의 일반적 특징을 스스로 서술한 것이라 하겠다.

루쉰은 소설과 병행하여 평론성을 지닌 짧은 수필을 계속 집필했다. 그중에는 날카로운 풍자와 격렬한 공격을 통해 전근대적인 병든 사회의 여러 가지 측면을 파헤친 것이 많았다. "지상에는 본래 길이 없고 그곳을 걷는 사람이 많으면 길이 된다"는 사고방식에 입각하여 새로운 길을 찾아 현실의 보수적 습속을 통렬하게 비판·공격한 것이다. 이러한 평론성을 띤 수필을 그는 '비수' 혹은 '투창'에 비유하고 있다.

1926년 3월 18일 외교문제에 관해 정부에 청원하려는 학생들의 시위행진이 있었는데 호위병이 이 행렬에 발포하고 다수의 사상자를 내는 사건이 발생했다. 루쉰은 그 날을 '민국 이래의 가장 어두운 날'이라 하여 사망자에 대한 애도와 학살자에 대한 분노를 글로 표현했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군벌정부는 사상탄압을 강화하고 많은 진보적 예술인을 체포하려고 했다. 루쉰은 베이징을 탈출하여 남쪽으로 피신하여 샤먼대학[廈門大學]에서 교편을 잡았는데 그곳에 4개월 간 머물다가 다음해 1월에는 광저우[廣州]의 중산[中山]대학으로 옮겼다. 중산대학에 부임하여 얼마 되지 않아 국민당의 숙청이 시작되었다. 그때까지 국민당과 합작하고 있던 공산당원을 체포하고 그 동조자에 탄압을 가했는데 그가 가르치던 학생도 다수 체포되었을 뿐 아니라 진보파라고 간주되던 그 자신도 감시를 받아 연금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그는 그해 10월 비밀리에 상하이로 탈출하여 그곳에 죽 머물면서 신문과 잡지 등에 발표했던 자신의 수필집을 교정·편집하기도 하고 신문과 잡지에 익명으로 반정부적인 단평(短評)을 써나갔다.

루쉰이 상하이에 막 도착했을 때 문학계에서는 '혁명문학'이 널리 제기되는 중이었고 이것이 프롤레타리아문학'의 주장으로 발전하여, 일부 청년문학가들은 소련의 좌익문학론을 받아들여 활발한 논의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또한 국민당 정부의 파쇼정치 강화와 함께 문학계는 대부분 좌익화의 경향으로 치달아 1930년에 ' 중국좌익작가연맹'[左聯]이 출범했는데 루쉰은 그 발기인이 되었다. 그러나 1931년 1월에 좌련에 속한 청년작가 6명이 체포되어 비밀리에 살해되었고 루쉰 또한 그들과 교류했다 하여 위험에 처하자 그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아파트에 일시적으로 피신했다. 그리고 1932년말 국민당 정치의 민중탄압 격화에 항의하여 '민권보장동맹'(民權保障同盟)이 성립하자 루쉰은 집행위원의 한 사람으로 참가했다. 1933년 6월 동맹의 간사장(幹事長)이 대낮에 저격당하여 죽고 루쉰도 또한 암살명단에 올라 있다는 소문이 도는 가운데 그는 아파트 방에 틀어박혀 예전과 마찬가지로 집필활동을 계속하다가 결국에는 폐병에 걸렸다. 그는 1936년 10월 19일 56세의 나이로 병사했으며 이때 학생과 시민 조문객은 1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당시 그의 관을 덮은 것은 '민족혼'이라는 검정 글씨가 쓰여진 흰 천으로서 상하이 시민대표가 증정한 것이었다. 그는 '만국공묘'(萬國公墓)의 한 구석에 안치되었다.

작품

루쉰은 본래 단편작가로서 그의 단편은 제1소설집 〈눌함〉(15편, 1923 초판)과 제2소설집 〈방황 彷徨〉(11편, 1926)에 담겨 있다. 그러나 그는 소설활동을 개시함과 동시에 평론적인 수필을 썼으며 소설활동을 그만둔 뒤에도 죽기 직전까지 단평·수필을 계속 집필했다. 그러므로 양적으로는 소설보다 수필이 훨씬 많다. 수필집으로는 〈열풍 熱風〉(1925)·〈화개집 華蓋集〉(1926)·〈화개집 속편〉(1927)·〈이이집 而已集〉(1928)·〈삼한집 三閒集〉(1932)·〈이심집 二心集〉(1932)·〈남강북조집 南腔北調集〉(1934)·〈위자유서 僞自由書〉(일명 〈불삼불사집 不三不四集〉, 1933)·〈준풍월담 准風月談〉(1934)·〈화변문학 花邊文學〉(1936)·〈차개정잡문 且介停雜文〉(1937)·〈차개정잡문 2집〉(1937)·〈차개정잡문말편(末編)〉(1937) 등이 있다. 뒤에 열거된 3권은 사후에 출판된 것으로 부인 쉬광핑[許廣平]이 편집한 것이다.

이외에 초기 일본 유학중에 쓴 것을 포함하면 논문집 〈분 憤〉(1927), 산문시집 〈야초 野草〉(1927), 회고문집 〈조화석습 朝花夕拾〉(1928), 역사소설집 〈고사신편 故事新編〉(1936)이 있고 베이징대학에서의 강의를 정리한 〈중국소설사략 中國小說史略〉(처음에는 상·하권으로 나누어 출판되었음. 1925 합정조판, 1930 개정판)과 소설사 관계자료집 〈소설구문초 小說舊聞〉(1926) 등이 있다.

또 이상에 열거한 수필집에서 빠진 단문과 시(구체시와 신체시)를 묶은 〈집외집 集外集〉(1935)과 역서의 서문이나 부기(附記), 서간 등을 모은 〈집외집습유 集外集拾遺〉(죽은 후 1938년 〈루쉰전집 魯迅全集〉에 수록)가 있다. 루쉰의 서간집으로는 부인 쉬광핑과 결혼 전에 주고받은 서간집 〈양지서 兩地書〉(1933)가 있고 루쉰 자신이 친지에게 보낸 것은 쉬광핑 편 〈루쉰 서간 魯迅書簡〉(1946)에 수록되어 있다. 또한 루쉰은 1912년 5월 5일 최초로 베이징에 온 날부터 죽기 전 날인 1936년 10월 18일까지 25년에 걸쳐서 메모 형식의 일기를 썼는데, 자신이 직접 쓴 원고의 사진판(1951)과 그것에 의거한 활자본(1958)이 있다. 단 1922년분이 분실되어 완전하지는 않다.

루쉰에게는 외국문학의 번역서도 많다. 일본 유학중에 일본어와 독일어를 공부했는데 이 두 외국어 역서는 〈루쉰역문집 魯迅譯文集〉(10권, 1958)에 수록되어 있다. (출처 : 增田涉 글 / 廉丁三 참조집필 브리태니커백과사전)

 

아침꽃을 저녁에 줍다

(朝花夕拾), 창(1991) /노신 산문집/ 이욱연 옮김,

 

짧은 글 속에 고통받는 중국 민중에 대한 끝없는 사랑과 그 사랑을 실천하는 지식인의 면모가 잘 드러나 있다.

 

그대들에게는

넘치는 활력이 있다.

밀림을 만나면 밀림을 개척하고

광야를 만나면 광야를 개간하고,

사막을 만나면 사막에 우물을 파라.

이미 가시덤불로 막혀 있는 낡은 길을 찾아 무엇할 것이며

너절한 스승을 찾아 무엇할 것인가!

 

희망이란 무엇이더냐? 탕녀로다. 그녀는 아무에게나 웃음을 팔고 모든 것을 바친다.

그대가 고귀한 보물 - 그대의 청춘을 바쳤을 때 그녀는 그대를 버린다.

- 폐퇴피 샹돌(Petofi Sandor 1823-1849. 헝가리 시인)

 

 절망은 허망하다. 희망이 그러하듯.

 

 우승자를 존경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뒤떨어졌으되 기어이 결승점까지 달려가는 주자와 그런 주자를 진지하게 보는 관객, 그들이야말로 중국 미래의 대들보이다.  p44

 

 어린 아이가 어느 일에서든 자신을 남만 못하다면서 주눅이 들어 굽신거리거나 얼굴에는 언제나 알랑거리는 웃음을 지으면서도 속으로는 음모를 꾸미는 그런 아이들보다야 차라리 대놓고 <이게 무슨 아빠야>라며 대드는 아이가 나는 더 좋다.

 '내<반동>자식을 보며'에서 p48

 

 꼴찌를 부끄러워 않는 사람이 많은 민족은 어떤 일에서건 흙이 무너지고 기와가 깨지듯 그렇게 일시에 무너지지는 않는다.                 '선등과 꼴찌'에서 p53

 

 <힘으로 사람들을 복종시키는 자는 결코 마음을 복종시키지는 못한다> p56

 

 <일을 한 차례 겪고 나면 그만큼 지혜로워진다.>  p58

 

 사람들은 사교의 필요 때문에 한 곳에 모여 살고, 또한 각기 싫어하는 많은 성격과 흉한 결함 때문에 떨어져 산다.  p59

 

 우리는 많은 죄인들을 <누군가에게 밉게 보인 사람들>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p62

 

 <지상의 천당은 성인의 경전과 말잔등, 그리고 여인의 가슴에 있다.>  p68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꿈에서 깨어났을 때 갈 길이 없는 것입니다.  p73

 

 독이 없으면 대장부가 아니다. 그러나 글로 나타내는 독은 단지 小毒일 뿐, 최고의 경멸은 無言이다. 그것은 눈 하나 까딱하지 않는 채로의 무언  '독이 없으면 대장부가 아니다.' p84

 

 울분은 어쨌든 변혁의 방아쇠다. 그러나 먼저 자신부터 변혁한 다음 사회를 변혁하고 세계를 변혁해야 한다. 그저 울분만 품고 있어서는 안된다.

  '분에 못이겨 죽다.' p91

 

한밤중에 문득 부끄러움을 느끼고 새벽녘에 뉘우쳐 본 적은 있는가?  p90

 

 이전에 잘 살았던 사람들은 복고를 주장하고 현재 잘 사는 사람들은 현상유지를 주장하며, 아직 잘 살아보지 못한 사람들은 혁신을 주장한다.  p96

 

 인류의 슬픔과 기쁨은 상대방에게 통하지 않는 법이다. 내게는 단지 그들이 법석을 떨고 있다고 느껴질 뿐이다.  p97

 

 사람이 적막을 느낄 때 창작은 탄생한다. 마음속이 깨끗할 때 창작은 탄생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창작의 뿌리는 사랑이다.  pp88~99

 

 중국인들이 사서 고생하는 근본원인은, 받들어 올리기만 좋아하는데 있다. 복이 저절로 굴러들게 하는 길은 내려 파는 방법이다. 사실 어느 쪽이나 드는 힘은 비슷하다. 그런데도 타성에 젖은 사람은 역시 받들어 올리는 쪽이 힘이 덜 든다고 생각하고 있다.

   - '받들어 올리기와 내려 파기' p106

 

 용감한 자는 분노하면 칼을 빼어들고서 자기보다 강한 자에게 달려든다. 비겁한 자는 분노하면 칼을 들고서 자기보다 약한 자에게 달려든다. 구원의 가망이 없는 민족에게는 아이들한테만 눈을 부라리는 영웅들이 수두룩하다.   p125

 

 빛이 어둠과 단호히 투쟁하지 않으며 순진한 사람들이 악에 대한 방임을 관용이라 잘못 생각하며 계속 고지식한 태도를 유지한다면, 오늘날과 같은 혼돈 상태는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 '페어플레이는 아직 이르다.' p147

 

 먹으로 쓴 거짓이 피로 쓴 사실을 가릴 수는 없다. 피의 빚은 반드시 같은 것으로 갚아야 한다. 그 빚은 갚음이 늦으면 늦을수록 이자가 늘어나기 마련이다.

  - '꽃 없는 장미' p153

 

 총에 맞아 청년의 피가 쏟아졌다. 피는 먹으로 쓴 거짓으로는 가릴 수 없으며, 먹으로 쓴 만가(輓歌)로도 취하게 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그 어떠한 위력으로도 짓누를 수 없다. 그것은 더 이상 속지도, 죽지도 않기 때문에!  p154

 

 만일 인민 대중 속으로 깊이 들어가지 않고, 그들의 풍속과 습관을 연구, 해부하지 않으며, 그 좋고 나쁨을 분별하여 존폐의 기준을 세우지 않는다면, 어떤 개혁이든 습관의 바위돌에 눌려 으깨질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단지 표면에서 부유하는데 머물 뿐이든지. 서재에서 책을 떠받들면서 종교를 논하고, 법률을 논하고, 문학과 예술을 이야기하던 시대는 이미 지났다.  논한다 해도 민중의 습관과 풍속을 알아야하며, 아들의 어두운 측면을 직시할 용기와 강인함이 있어야 한다.

 개혁의 길은 대상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서부터 시작된다. 그저 미래의 광명만을 외치는 것은 , 게으른 자신과 게으른 청중을 기만하는 일일 뿐이다.  '민중속으로' p181

 

 천재가 나오기를 요구하기 전에 천재를 기를 수 있는 민중이 있기를 요구해야 한다. 튼튼한 나무를 얻거나 고운 꽃을 보려면 반드시 좋은 흙이 있어야 한다. 흙이 없으면 꽃도 나무도 있을 수 없다. 그러기에 꽃이나 나무보다 흙이 더 중요하다.  p194

 

 배부른 사람들은 배고픈 사람을 사랑할지 몰라도 배고픈 사람은 배부른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는다   p207

 

 노동자. 농민이 해방되지 않는 한 노동자. 농민의 사상은 여전히 지식인의 사상 그대로입니다. 노동자. 농민이 진정한 해방을 획득한 후에야 진정한 민중문학이 있을 수 있습니다.

 - '진정한 민중문학을 위하여' p217

 

 추억이란, 사람을 즐겁게 만들기도 하지만, 때로는 쓸쓸하게 만들기도 한다. 지나가버린 쓸쓸한 시간을 마음속의 실 한 올로 매어둔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나는 오히려 그것들을 완전히 잊어버리지 못한데서 고통을 느낀다.  p223

 

 정신을 개혁하는데 가장 좋은 것은 문예다.  p225

 

 한 사람의 주장이 남의 찬성을 얻으면 전진이 촉진되고, 반대를 얻으면 분발이 촉진된다.  p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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