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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쵸볼 붉근 골에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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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쵸볼 붉근 골에

 

대추가 발갛게 익은 골짜기에 밤이 어찌 (익어) 뚝뚝 떨어지며

벼를 벤 그루에 게까지 어찌 나와 다니는가?

(마침 햅쌀로 빚어 넣은) 술이 익었는데 체 장수가 (체를 팔고) 돌아가니 (새 체로 술을 걸러서) 먹지 않고 어찌하리.

요점 정리

지은이 : 황희(黃喜)

갈래 : 평시조, 정형시, 서정시

성격 : 풍류적, 낭만적, 목가적, 한정가(閑情歌)

표현 : 점층법

제재 : 늦가을 농촌 생활

주제 : 농촌 생활의 풍요로움과 흥겨움

특징 : 화자와 자연의 멋이 함께 어우러지는 조화로운 경지를 노래하고, 시상 전개가 자연스러움

출전 : 청구영언(靑丘永言)

내용 연구

 

대추가 발갛게 익은 골짜기에 밤이 어찌 (익어) 뚝뚝 떨어지며 - 붉은 색, 갈색으로 붉은 색 계열의 이미지로 결실이 주는 풍요로운 이미지를 부각하고, '밤'은 '대쵸 볼'을 보고 느낀 감흥을 '밤'이 어느 정도 심화시키는 역할을 함.

벼를 벤 그루에 게까지 어찌 나와 다니는가?[초장과 중장에 통사 구조가 유사한 구절이 반복되어 운율을 형성 / ~ (어이)어찌] - 초장과 중장에서 유사한 상황을 대구적으로 표현을 사용했고, '게'는 화자가 바라보며 여유를 느끼는 대상임

(마침 햅쌀로 빚어 넣은) 술이 익었는데 체 장수가 (체를 팔고) 돌아가니 (새 체로 술을 걸러서) 먹지 않고 어찌하리.[설의적 표현]

 

대쵸 볼 : 대추의 볼. 붉게 익은 통통한 대추를 의인화하여 비유적으로 나타낸 것

: 떨어지며

뷘 : 벤

그르헤 : 그루에

술 닉쟈 쳬쟝사  도라가니 아니 먹고 어이리. : 햅쌀로 빚은 술이 익었는데, 마침 체 장수가 체를 팔고 돌아가니, 그 체로 새 술을 걸러서 마시지 않고 어쩌랴? '술 닉쟈 체 장사 도라가니'는 금상첨화(錦上添花)의 뜻으로, 속담 '장수 나자 용마(龍馬) 난다.'와 같은 의미라 할 수 있다.

이해와 감상

 

가을 농촌의 풍요로움과 흥겨움을 노래하고 있다. 대추와 밤이 익어 저절로 떨어지고, 벼 벤 그루에 게가 기어 오르고, 담근 술마저 익었는데, 때마침 체 장수까지 지나가니 어찌 술을 마시지 않겠느냐는 시상 전개의 자연스러움이 돋보인다.

우리의 민족적 정서인 '멋'이 잘 표현된 노래로서 정겨운 농촌의 풍경이 한 폭의 풍경화처럼 펼쳐진다. 한호(韓濩)의 '짚 방석(方席) 내지 마라 낙엽(落葉)엔들 못 안즈랴'와 그 풍취가 유사한 시조다.

심화 자료

황희(黃喜)

 

1363(공민왕 12)∼1452(문종 2).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장수(長水). 초명은 수로(壽老). 자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旽村). 석부(石富)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균비(均庇)이고, 아버지는 자헌대부 판강릉대도호부사(資憲大夫判江陵大都護府使) 군서(君瑞)이며, 어머니는 김우(金祐)의 딸이다. 개성 가조리(可助里)에서 출생하였다.

 

1376년(우왕 2) 음보로 복안궁녹사(福安宮錄事)가 되었다. 1383년 사마시, 1385년 진사시에 각각 합격하였다. 그리고 1389년에는 문과에 급제한 뒤, 1390년(공양왕 2) 성균관학록에 제수되었다.

 

1392년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하였다. 그러다가 1394년(태조 3) 조정의 요청과 두문동 동료들의 천거로 성균관학관으로 제수되면서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를 겸임하였다. 이후 직예문춘추관·감찰 등을 역임하였다.

 

1398년 문하부우습유(門下府右拾遺) 재직 중 언관으로서 사사로이 국사를 논의했다고 문책되어 경원교수(慶源敎授)로 편출되었다가, 1398년(정종 즉위년) 우습유로 소환되었다. 이듬 해 언사로 파직되었다가 그 해 2월경 문하부우보궐에 복직되었다.

 

그러나 또다시 언사로 파직되었으며, 곧 경기도도사(京畿道都事)를 거쳐 형조·예조·이조·병조의 정랑을 역임하였다. 1401년(태종 1)경 지신사(知申事) 박석명(朴錫命)이 태종에게 천거해 도평의사사경력(都評議使司經歷)에 발탁되었다.

 

그 뒤 병조의랑에 체직되었다가 1402년 아버지의 상으로 사직하였다. 그러나 그 해 겨울 군기(軍機)를 관장하는 승추부의 인물난으로 기복되어 대호군 겸 승추부경력에 제수되었다. 1404년 우사간대부를 거쳐 승정원좌부대인에 오르고, 이듬 해 박석명의 후임으로 승정원지신사에 발탁되었다.

 

1409년 참지의정부사가 되고, 형조판서를 거쳐 이듬해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대사헌 등을 지냈다. 1411년 병조판서, 1413년 예조판서를 역임하고, 이듬 해 질병으로 사직했다가 다시 예조판서가 되었다.

1415년 이조판서 재직중 송사(訟事) 처리와 관련해 육조에 문책이 내려지면서 파직되었다. 그러나 그 해 행랑도감제조(行廊都監提調)에 복위된 데 이어, 참찬·호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416년에는 세자인 양녕대군(讓寧大君)의 실행(失行)을 옹호하다가 다시금 파직되었다.

 

그 뒤 조정으로 복귀해 공조판서가 되었다. 그리고 평안도도순문사 겸 평양윤, 판한성부사를 역임하였다. 1418년 세자 폐출의 불가함을 극간하다가 태종의 진노를 사서 교하(交河)로 유배되고, 곧 남원부에 이치(移置)되었다.

 

세종의 치세가 시작되고 아울러 상왕(上王 : 태종)의 노여움이 풀리면서, 1422년(세종 4) 남원으로 소환, 직첩과 과전을 환급받고 참찬으로 복직되었다. 1423년 예조판서에 이어 기근이 만연된 강원도에 관찰사로 파견되어 구휼하였다.

 

그리고 판우군도총제(判右軍都摠制)에 제수되면서 강원도관찰사를 계속 겸대하였다. 1424년 찬성, 이듬해에는 대사헌을 겸대하였다. 또한 1426년에는 이조판서와 찬성을 거쳐 우의정에 발탁되면서 판병조사를 겸대하였다.

 

1427년 좌의정 겸 판이조사가 되었고, 그 해 어머니의 상으로 사직하였다. 그 뒤 기복되어 다시 좌의정이 되었다. 이어 평안도도체찰사로 파견되어 약산성기(藥山城基)를 답사하였다. 이 때 약산이 요충지라 해서 영변대도호부를 설치한 뒤 평안도도절제사의 본영으로 삼게 하였다.

 

1430년 좌의정으로서, 감목(監牧)을 잘못해 국마(國馬) 1,000여 필을 죽인 일로 해서 사헌부에 구금된 태석균(太石鈞)의 일에 개입해 선처를 건의하였다. 그러나 일국의 대신이 치죄에 개입함은 부당할 뿐더러, 사헌부에 개입하는 관례를 남기게 되므로 엄히 다스려야 한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그래서 한때 파주 반구정(伴鷗亭)에 은거하였다. 1431년 다시 복직되어 영의정부사에 오른 뒤 1449년 치사(致仕 :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나는 것)하기까지 18년 동안 국정을 통리(統理)하였다. 그리고 치사한 뒤에도 중대사의 경우 세종의 자문에 응하는 등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침착하였다. 그리고 사리가 깊고 청렴하며, 충효가 지극하였다. 학문에 힘써 높은 학덕을 쌓았으므로 태종으로부터 “공신은 아니지만 나는 공신으로서 대우했고, 하루라도 접견하지 못하면 반드시 불러서 접견했으며, 하루라도 좌우를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할 정도로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그는 농사개량에 유의해 곡식 종자를 배급하고, 각 도에 명령해 뽕나무를 많이 심어 의생활을 풍족하게 하였다. 또한 ≪경제육전 經濟六典≫을 펴내면서, 종래 원집(元集)과 속집(續集)으로 나뉘어 내용이 중복되고 누락되거나 내용과 현실이 괴리되는 것을 수정, 보완하였다.

 

한편, 국방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여 북방 야인과 남방 왜에 대한 방비책을 강구하였다. 그리고 예법을 널리 바르게 잡는 데에 노력해, 원나라의 영향이 지대한 고려의 예법을 명나라의 예법과 조선의 현실을 참작해 개정, 보완하였다.

 

또한, 인권에 유의해 천첩(賤妾) 소생의 천역(賤役)을 면제하는 등 태종대의 국가기반을 확립하는 데 공헌하였다. 세종대에는 의정부의 최고관직인 영의정부사로서 영집현전경연예문관춘추관서운관사 세자사 상정소도제조(領集賢殿經筵藝文館春秋館書雲觀事世子師詳定所都提調) 등을 겸대하였다.

 

그리고 중앙과 지방의 백성들의 마음을 진정(鎭定)시키면서, 4군6진의 개척, 외교와 문물제도의 정비, 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문물의 진흥 등을 지휘, 감독하였다. 특히, 세종 말기에 세종의 숭불과 연관해 궁중 안에 설치된 내불당(內佛堂)을 두고 일어난 세종과 유학자 중신 간의 마찰을 중화시키는 데 힘썼다.

 

이처럼 그는 왕을 보좌해 세종성세를 이룩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로써 조선왕조를 통해 가장 명망 있는 재상으로 칭송되었다. 1452년(문종 2) 세종묘에 배향되었다. 그리고 1455년(세조 1) 아들 수신(守身)이 좌익공신(佐翼功臣)에 책록되면서 순충보조공신 남원부원군(純忠補祚功臣南原府院君)으로 추증되었다.

 

상주의 옥동서원(玉洞書院)과 장수의 창계서원(滄溪書院)에 제향되고, 파주의 반구정에 영정이 봉안되었다. 저서로는 ≪방촌집≫이 있으며, 시호는 익성(翼成)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太祖實錄, 定宗實錄, 太宗實錄, 世宗實錄, 文宗實錄, 世祖實錄, 燃藜室記述, 大東奇聞, 海東雜錄, 國朝人物考, 旽村文集, 償畢齋集, 萬人의 宰相(李江魯, 韓國의 人間像, 新丘文化社, 1965), 淸白吏의 龜鑑 黃喜(申學均, 人物韓國史, 博友社, 1965), 世宗朝의 時代的背景(李崇寧, 世宗大王의 學問과 思想, 亞細亞文化社, 1981).(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황희정승설화(黃喜政丞說話)

 

조선 초기의 재상 황희에 관한 설화. 인물전설에 속한다. 그는 내외 관직을 두루 거치면서 조선 개국 초기의 문물과 제도의 정비에 힘썼다. 이렇다할 정적(政敵)도 없이 비교적 순탄하게 정치활동을 한 것이 하나의 특징이며, 특히 청백리(淸白吏)의 표상으로 알려져 있다.

 

황희정승설화는 〈황희정승 이야기〉·〈계란유골〉·〈개가법 고치고 원망 산 황희〉·〈이인 황희정승〉·〈황희정승 탄생일화〉·〈황희정승과 딸〉·〈명판결을 내린 황희〉·〈청백리 황희정승과 박광대〉·〈황희정승의 판결〉 등 아주 다양한 내용이 있다.

대체로 그의 우유부단한 성격이 결국은 탈없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근원적인 힘이 되고 있다는 노장적(老莊的) 사고방식의 일단을 보여주는 삽화가 많다. 또한, 그의 장례에는 딸들이 상복을 입어야 하는데 하나밖에 없어서 찢어 나누어 입었다는 이야기 등 그의 청빈한 생활태도가 벼슬아치로서의 한 규범을 보여준다는 점을 강조한 삽화가 많이 있다.

황희의 청백리로서의 삶을 이야기하는 설화로는 〈청백리 황희정승과 박광대〉가 흥미롭다. 황희가 정승으로 살았으면서도 가난하게 살다 죽게 되자 여러 딸들이 자신들이 살아갈 방책을 마련해달라고 한다. 이에 “공작이 날거미줄 먹고 사나, 남산 밑에 박광대가 하리라.”고 유언한다.

 

그 뒤 중국에서 공작이 날아오자 황희의 지략이 생각나서 그 딸들에게 물으니, 그 유언을 말하므로 공작에게 날거미줄을 먹여 살찌워 중국으로 돌려보냈다. 이 일로 황희의 가난한 처지가 밝혀져 어느 대감이 황희의 집에 달걀을 여러 수레 보냈다. 그런데 그 달걀에는 뼈가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참고문헌≫ 文宗實錄, 弁齋叢話, 海東名臣錄, 韓國口碑文學大系(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0∼1988).(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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