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엄경언해(楞嚴經諺解)
by 송화은율능엄경언해(楞嚴經諺解)
만약에 마음과 눈이 있는 델 알지 못할진댄 진로 항복시킴을 얻지 못하리라. 비유하건대, 국왕이 도적의 침임을 받은 바 되어 병마를 일으키어 (도적을) 쳐서 더되 이 병마는 반드시 도적 있는 델 알 것이니, 국왕은 진심을 비유하시고, 도적은 마음과 몸을 비유하시더니, 진심이 망념에 옮김이 나라가 도적의 침입을 입는 것과 같고, 병마를 일으켜 (도적을) 쳐서 더는 것은 지관 닦는 것을 비유하신 것이라. 너를 흘러 구르게 함이 마음과 눈이 허물이 되니, 내 이제 너더러 묻노니 마음과 눈이 이제 어디 있느뇨?
약부식지심목소재 칙불능득강복진무
비여국왕위적소침 발병토제
시병요당지적소재 사여유전심목위구
오금문여 유심여목금하소재
요점 정리
간행처 : 간경도감
언해자 : 세조 때의 승려 신미, 한계희, 윤사로, 황수신, 노사신, 강희맹 등
연대 : 세조 8(1462년)
내용 : 능엄경은 선종의 주요 경전으로 인연과 만유를 설법한 것
체제 ; 10권 10책의 목판본(서울대의 제 2권, 가람 문고본의 제5권, 김형규소장의 제 9권은 활자본), 연산군 원년(1495)에 중간, 1959년 동국대에서 목판본 10권 영인 간행
의의 : 15C 당시의 국어의 모습을 알 수 있는 귀중한 문헌
언해의 특징 : 의역과 직역을 병용하여 번역함
문체 : 번역체
수사법 : 비유법
주제 : 석가불이 그의 제자 아난에게 지관 닦는 방법을 설명하기 위하여, 마음과 눈을 알기 쉬운 비유로 설명함
내용 연구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의 간행 경위는 세종 28년(1446)년 3월에 세종의 정비인 소헌 왕후가 승하하자, 수양대군은 소헌 왕후를 초모하여 석보상절을 내게 되고, 불교와 관련을 맺게 되었다. 이후 세조는 '월인석보'를 간행하고, '간경도감'을 설치하여(1461년) '능엄경 언해'를 비롯한 '묘법연화경언해', '원각경언해', '금강경언해', '불설아미타경언해' 등을 여러 학자와 승려들의 도움으로 간행하게 되었는데 석가불이 그의 제자 아난에게 지관 닦는 방법을 설명하기 위하여, 마음과 눈을 알기 쉬운 비유로 설명한 것이다.
심화 자료
능엄경 (楞嚴經)
능엄경은 밀교부에 수록되어 있으며 인도 바깥으로 유통되지 못하게 하라는 왕의 엄명이 있어 당나라 이전까지는 중국에 전해지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내용으로 보아 중국에서 많이 가필되어 거의 중국에서 성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경의 내용은 ‘마음을 다스림으로써 보리심을 얻게 되고 진정한 경지를 체득한다’고 보아 중국 선가의 실천도와 근접하며, 밀교적인 색채가 짙다.
모두 10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불타의 제자인 아난다(阿難陀)가 마등가 여인의 주술에 의해 마귀도에 떨어지려는 것을 부처(석가)의 신통력으로 구해낸다. 그리고 나서 선정의 힘과 백산개다라니의 공덕력을 찬양하고, 이 다라니에 의해 모든 마귀장을 물리치고 선정에 전념하여 여래의 진실한 경지를 얻어 생사의 고뇌에서 벗어나는 것이 최후의 목적임을 밝혔다. 따라서 이 경은 밀교사상이 가미되기는 하였지만 선정이 역설되고 있기 때문에 밀교 쪽보다는 선가에서 환영을 받아 중국에서의 주석가들은 모두 선문의 비구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 경의 한역은 705년(당나라 중종 원년) 인도 승려 반랄밀제(般剌蜜帝)에 의해 전래되고 번역되었다고 한다. 고려시대 보환(普幻)의 《수능엄경환해산보기(首楞嚴經環解刪補記)》는 송나라 계환(戒環)의 《능엄경요해》의 잘못된 곳을 고쳐 산보한 것이다. (동아대백과사전)
능엄경언해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 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보통 줄여서 ‘대불정수능엄경’ 또는 ‘능엄경’이라 함.) 언해서. 10권 10책.
중국 송나라 온릉계환(溫陵戒環)이 핵심이 되는 부분을 풀이한 책에 세조가 한글로 구결을 달고 번역하였다. 활자본·목판본의 두 종이 있는데 활자본은 1461년(세조 7)에, 목판본은 1462년에 간행되었다. 목판본은 같은 판목으로 1472년(성종 3)과 1495년(연산군 1)에 다시 간행되었다.
〔간행경위〕
세조와 신미(信眉)·김수온(金守溫) 등의 발문에 의하면, 원래 1449년(세종 31) 세종의 명령에 따라 수양대군(首陽大君 : 뒤의 世祖)이 번역에 착수하였으나 끝내지 못하고 미루어졌는데, 1461년 5월 석가모니의 분신사리(分身舍利) 100여 매가 나타나고, 효령대군(孝寧大君)이 이 책과 ≪영가집 永嘉集≫의 번역을 세조에게 청하자, 세조가 번역을 끝내고 그 해 10월 교서관(校書館)에서 을해자(乙亥字)로 400부를 간행하였다고 한다.
번역은 세조가 손수 한 것이란 뜻에서 뒤의 기록에서는 어역(御譯)이라 되어 있으나, 위의 발문에 의하면 실제로는 여러 사람이 분담하여 이루어졌다. 즉, 세조는 구결을 달아 혜각존자(慧覺尊者) 신미에게 옳고 그름을 따져 밝히게 하여 구두(句讀)를 바르게 하고, 그에 따라 한계희(韓繼禧)·김수온이 번역하였는데, 그 번역을 신미 등 명승이 교정하고 세조가 본 뒤 확정되었다는 것이다. 이 밖에 본문을 서로 견주어 고찰하는 것과 예문의 손질, 한자음의 표기 등도 각기 분담했다.
그런데 이 활자본은 급히 서둘러 간행했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 많아 이를 수정하여 이듬해인 1462년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 목판으로 다시 간행하였다. 그 책에는 간경도감 도제조(都提調)인 계양군 증(桂陽君性)의 전문(箋文, 1462년 8월 21일자)과 조조관(雕造官)인 간경도감 도제조 이하 관원의 관직과 이름이 열거되어 있다.
목판본의 간행년에 대하여 문제가 없지 않으나, ‘解脫’의 ‘解’자가 ≪월인석보 月印釋譜≫와 같이 ‘갱’으로 되어 ‘ㅎ항’으로 된 ≪법화경언해≫ 이후의 책들과 다르다는 점에서 전문의 연대대로 간행년을 잡는다.
이때 잘못된 곳이 있는 활자본은 대부분 거두어서 붉은 먹으로 교정하거나 인쇄한 쪽지를 덧붙임으로써 목판본과 통일을 기한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남아 있는 활자본의 대부분이 그러한 수정을 보여준다.
목판본은 목판을 자르거나 구멍을 내어 깁거나, 인쇄한 글자를 오려 붙이는 식의 한자음 표기의 수정, 예컨대 위 ‘解脫’의 ‘解’자와 ‘阿難’의 ‘阿’자가 ‘○’에서 ‘○’, ‘般若’의 ‘般’자가 ‘반’에서 ‘○’로 되고 안 되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 책의 활자본은 활자 연구와 현존본의 희소가치 때문에 귀중한 자료로 다루어진다. 목판본은 간경도감에서 간행된 최초의 언해본으로서 간경도감의 다른 언해본에 대하여 책의 형태는 물론, 번역의 양식과 정서법에 걸쳐 규범이 되고 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특징 및 의의〕
번역양식은 철저한 직역인데, 원문에 한글로 구결이 달린 대문(大文)을 먼저 보이고, 이어서 번역을 쌍행으로 싣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 문자와 정서법은 구결과 번역문에서 그 차이를 보이는데, 구결 표기에는 방점과 ‘牽’, 각자병서(各自橙書)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번역문에서는 반드시 방점이 나타나고, 관형형 어미의 표기에 ‘○디니·홀띠니’, ‘狸棋·浬菱’ 등과 같이 받침 ‘牽’이나 ‘ㄹ’과 각자병서가 쓰인다.
그 밖에는 구결과 번역문의 표기가 같은데, 순경음 ‘○’이 쓰이지 않으나 오직 하나의 예외로 ‘瑯○(礫)’이 있다. 사잇소리가 일반적으로 ‘ㅅ’으로 통일되어 표기된다.
주격형(主格形)의 표기에서는 ‘如來ㅣ·義ㅣ·對ㅣ’와 같이 ‘ㅣ’로 끝난 체언에 주격조사 ‘ㅣ’를 쓰고 있는 것이 특이한데 이는 문법구조를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번역문에서는 한자마다 ≪동국정운 東國正韻≫에 따른 독음이 달려 있다. 발문에 의하면 이 독음은 전문가인 조변안(曺變安)과 조지(趙祉)가 달았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들은 간경도감의 ≪법화경언해≫·≪금강경언해≫ 등에서 완전히 일치되어 나타나고 다른 언해본에서는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요컨대, 이 책은 간경도감의 다른 언해본에 미친 영향의 관점에서도 중요하지만, 풍부한 어휘와 문법자료를 보이고 있으므로, 중세국어 연구에 기본적인 문헌의 하나로 인정되고 있다. 현재 활자본은 권3·4만 없고 모두 남아 있다.
〔소 장〕
권1은 성암문고(誠庵文庫), 권2는 서울대학교, 권5는 서울대학교 가람문고와 일본 덴리대학(天理大學), 권6은 덴리대학, 권7은 연세대학교, 권8은 동국대학교와 세종대왕기념사업회, 권9는 김형규(金亨奎)와 세종대왕기념사업회, 권10은 세종대왕기념사업회 등에 소장되어 있다.
목판본은 1462년에 인쇄된 책과, 1462년의 판목으로 1472년과 1495년에 인쇄된 책이 서울대학교와 동국대학교에 소장되어 있다. 특히, 동국대학교 소장본은 책의 겉제목 표기까지도 15세기의 것인데, 이것을 저본으로 한 영인본이 1959년 동국대학교에서, 다시 1977년 대제각(大提閣)에서 간행되어 널리 보급되었다.
≪참고문헌≫ 고친 한글갈(최현배, 정음사, 1961), 李朝刊經都監과 其刊行佛典(江田俊雄, 朝鮮之圖書館 25, 1936), 增訂朝鮮語學史(小倉進平, 刀江書院, 東京, 1940), 中世語의 한글資料에 대한 綜合的인 考察(安秉禧, 奎章閣 3, 1979).(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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