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시게 아름다운 5월에 / 하이네(Heinrich Heine) / 김광규 옮김
by 송화은율눈부시게 아름다운 5월에 / 하이네(Heinrich Heine) / 김광규 옮김
눈부시게 아름다운 5월에
모든 꽃봉오리 벌어질 때
나의 마음 속에서도
사랑의 꽃이 피었어라.
눈부시게 아름다운 5월에
모든 새들 노래할 때
나의 불타는 마음을
사랑하는 이에게 고백했어라.
요점 정리
작자 : 하이네(Heinrich Heine) / 김광규 옮김
갈래 : 서정시
율격 : 번역시는 내재율(원시에는 각운적인 요소가 드러나 있음)
성격 : 서정적. 낭만적
어조 : 부드럽고 친근하며 맑은 목소리
심상 : 시각적(1연). 청각적(2연)
구성 :
1연 : 시각적 심상
2연 : 청각적 심상
제재 : 5월의 자연
주제 : 아름다운 5월의 자연에서 느끼는 사랑의 세계
출전 : <노래집>(1827)
내용 연구
눈부시게 아름다운 5월에 : 5월은 자연이 가장 생동하는 충만한 계절이기에 사랑의 감정마저도 만개(滿開)할 수 있는 배경이 된다.
모든 꽃봉오리 벌어질 때 : 5월은 신록의 계절이다. 계절의 여왕이라고 할 정도로 아름다운 계절이다. 이 5월에 모든 생명의 약동이 시작됨을 말하고 있다.
나의 마음 속에서도 / 사랑의 꽃이 피었어라. : 나의 마음 속에서도 사랑의 감정이 싹터 올랐다. 신록의 계절 5월에 모든 생명이 움을 틔우듯 화자의 마음 속에서도 사랑의 감정이 피어오르기 시작함을 의미한다. 결국 자연과 혼연일체가 된 시적 자아의 마음을 시각적 이미지로 형상화한 표현이다.
모든 새들 노래할 때 : 1연 2행과 대구, 꽃이 꽃망울을 터뜨려 자신의 생명의 약동을 알리듯 새는 그 울음으로 자신의 생명과 약동을 알린다. 봄과 함께 약동하는 생명을 청각적으로 형상화한 표현이다.
나의 불타는 마음을 : 낭만주의적 정열의 형상화로 '불타는 마음'이라는 표현을 통해 화자는 강렬한 주관적 색채가 드러내며 열정적인 느낌을 형성했다.
사랑하는 이에게 고백했어라. : 마지막 '고백'이라는 말은 잔잔한 전체 분위기와 비교할 때 이질적인 표현으로 이것은, 시상의 단조로움을 깨는 역할을 한다.
이해와 감상
1827년 하이네의 서정 시집 <노래집>에 수록되어 있는 낭만주의의 대표적인 시로, 하이네 초기의 서정시의 세계를 집약적으로 표현해 주는 이 시는 사랑의 세계를 격정적으로 노래한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 귀에 들리는 모든 것이 다 사랑의 세계이다. 말하자면 그의 시선에 포착된 세계에는 오로지 사랑의 세계만이 존재한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5월의 자연에는 그의 사랑을 느끼고 사랑을 노래한다.
꿈과 같은 환상의 세계, 강렬한 주관적 색채, 민요풍의 4행시 형식은 그를 낭만적 시인으로 단정케 한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사회적 관심은 강력하였고, 그는 저널리스트로서 사회 정의 구현과 인간의 자유를 위하여 투쟁한 청년 독일파의 기수로서 혁명가적 삶을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하이네가 이렇게 사랑을 노래하는 것은 실연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는 1816년 그의 부유한 아저씨인 살로몬의 딸 아말리아와 사랑을 했었다. 그러나 이 사랑이 결실을 맺지 못하게 되고 아말리아는 다른 사람과 결혼한다. 청년 하이네는 이 때 심한 상처를 입었고 이러한 실연의 상처는 이 시가 실려 있는 <노래집>의 직접적인 창작 동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결국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시로 실연의 상처를 잊고 마음의 보상도 받으며 위안도 찾으려 했던 것이다. 비록 사랑의 상처를 입었지만 시의 창작을 통해 동경과 꿈의 세계를 그림으로 해서 자신의 상처로부터 벗어나고 마음의 안정도 찾을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이 시는 아름다운 계절인 5월의 자연에서 느끼는 사랑을 노래했다. 피어 있는 아름다운 꽃에서 아름다운 사랑을 느끼고, 맑게 노래하는 새들 사이에서 사랑의 고백을 한다. 그는 결국 이런 낭만적인 시편들을 통해 자신의 시련을 극복하고 새로운 힘을 얻은 것이다.
심화 자료
독일의 낭만주의
낭만주의는 독일에서 시작되었다. 독일은 18세기에 일어난 '스투름 운트 드랑(질풍노도의 시대) 운동'을 바로 낭만주의로 연결시켜 유럽 어느 나라보다도 빨리 고전(古典)의 모방을 거부하고 자유로운 창작을 희구하는 문학의 혁명을 일으켰다. 질풍 노도의 사상을 낭만주의로 연결시킨 이는 괴테이다. 그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통하여 사랑과 연애에서 고전주의 문학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정열과 개성을 보여 주었다. 시에서는 하이네가 타고난 풍부한 시정(詩情)과 민요적인 순박함이 빛나는 아름다운 서정시로 독일 낭만주의 문학의 꽃을 피웠다.
독일 낭만주의는 풍경화, 상징주의, 민족적 중세주의의 세가지 양식으로 표현하였으며 시각적 강렬함에서는 영국과 가깝고, 더 엄숙한 성격을 띠고 뚜렷하게 종교적 주제 다루었다.
독일 낭만주의와 회화 감상
낭만주의는 18세기 말에서 19세기에 걸쳐 전유럽에 탄생한 예술적 경향이다. 개성과 자아 해방을 주장했던 이들은 상상과 무한을 향한 동경의 고삐를 놓지 않았다. 낭만주의의 주요 특징은 형식보다 자유로운 내면 세계의 표출이었다는 점, 현실을 초월한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창조했다는 점, 그리고 이성이 지배하는 공간을 부정하고 공상과 상상력에 의해 창조되는 세계를 존중했다는 점이다. 고전주의의 차가운 형식 존중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프랑스 낭만주의는 아이러니하게도 들라크르와의 경쟁자이자 다비드의 뒤를 이은 고전주의자 앵그로에게서 일찌감치 그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어 제리코를 거쳐 들라크로와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자유분방한 색채, 유동적인 필치, 힘 있는 동세에 찬 구성 등 기법 면에서도 주목을 끌었다. 특히 들라크르와의 이국적 취향이 만들어 낸 작품들은 낭만주의의 전형적인 특성을 여실히 드러낸다. 낭만주의의 표현기법은 선명한 색채와 강한 움직임, 그리고 이성보다는 인간의 감성적인 측면에 호소한다는 특징이 있다. 따라서 낭만주의 회화의 감상법은 눈으로 보고 이해하는 그림이 아니라,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감정의 호소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태도가 필요하다. (출처 : http://ama.pe.kr/doc.htm)
하이네의 초기 서정시
하이네가 초기의 자기 연정을 '마돈나의 시대'라고 지칭하고 있듯이 그는 순결한 사랑을 연모했으며 이러한 사랑에 실패함으로써 그가 받은 충격은 컸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충격이 하이네로 하여금 위대한 시인이 되게 한 원인이었다고 생각되며, 하이네가 시를 창작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하이네는 그의 함부르크 소년 시절의 동창생인 크리스티안 제테에게 보낸 서한문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사랑의 고통과 갈등을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갈등으로 인하여 자기의 시적 세계는 훨씬 부드러워질 수 있다고 술회한다. 그는 자기의 시가 사랑의 고민을 표현해서 시적 내용이 더욱 풍부해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단지 내 시가 마치 꿀 속에 담긴 아픔과도 같이 훨씬 부드러워지고 달콤해진 것만은 사실'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그는 자신의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아름답고 순결한 시의 세계를 추구하고 있었음을 고백했다.
하이네(Heinrich Heine)
정식 이름은 Christian Johann Heinrich Heine. 본명은 Harry Heine(~1825). 1797. 12. 13 프로이센 뒤셀도르프~1856. 2. 17 파리. 독일의 시인.
〈시가집 Buch der Lieder〉(1827)으로 국제적인 명성과 영향력을 확고히 했다. 곡이 붙여진 것은 주로 이 노래들이지만 만년에 쓴 음울한 시들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초기생애 및 작품
부모가 유대인이었는데, 아버지는 잘생기고 친절하지만 다소 무능한 상인이었고, 어머니는 당시 교육을 잘 받은 여성으로 아들에게 거는 기대가 대단했다. 하이네는 초년에 숙부 잘로몬 하이네의 재력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함부르크 은행가로서 백만장자였던 숙부는 관대한 반면 복종을 요구했으며, 하이네는 이 숙부와 오랫동안 불편하고 불안정한 관계였었다. 뒤셀도르프의 학교에서 공부한 다음 그를 상인(처음에는 은행업, 나중에는 소매업)으로 만들려고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결국 숙부가 학비를 대주게 되어 하이네는 본·괴팅겐·베를린 대학교를 다니다가 다시 괴팅겐대학교로 옮겼고 1825년 최하위의 성적으로 법학학위를 땄다. 같은 해 유대인에게는 닫혀 있던 공직에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열기 위해 개신교로 개종했다. 그렇지만 그는 한 번도 변호사로 개업도 하지 않았고 공직을 맡지도 않았다. 그는 대학시절 동안 학업에 전념한 것이 아니라 시·문학·역사 공부에 몰두했다.
하이네의 대학 이전 생활은 상당히 불분명하다. 이 시기에 숙부의 두 딸 또는 그중 한 사람에게 온통 정신을 빼앗기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둘 중 누구도 이 몽상적이고 무능한 사촌에게 미래를 맡기겠다는 의향은 없었다. 이런 경험 뒤 외로운 감정들이 세월이 몇 년 흐른 다음이지만 〈시가집〉으로 묶여 나왔다. 하이네의 낭만주의적 신념, 즉 삶과 세계를 시화(詩化)하여 혁명, 소외, 시대의 불안을 극복하자는 희망은 그의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이와 같이 그는 독일 후기 낭만주의의 위기에서 주요대표자가 되었다. 이 시기는 괴테, 실러, 낭만주의자들의 놀라운 업적에 가리워져 있었으나, 이들의 전통이 뒷세대의 새로운 긴장과 격변에 대응하기에는 부적합하다는 것을 점점 더 의식하게 된 때였다. 문학활동 전체를 통틀어 하이네의 사상과 글에서 일관된 특징은 그가 예술적 감수성이라 부른 '시'와 현실 사이에 드리워진 팽팽하고 불명료한 긴장이다. 그의 연애시들은 낭만주의적 소재를 이용하고 있으나 동시에 그것들을 의심하며 또 그 시들이 드러내고자 한 감정을 의문시한다. 그것들은 씁쓸하고도 달콤하고 자기풍자적이며, 시적 기교를 보여주는 동시에 시적 진실에 대한 회의를 드러낸다. 이 시들이 지닌 운율은 흐르는 듯하다가 불협화음을 이루기도 하는데, 시집 전체를 보면 감상성을 벗어나는 방향으로 움직이며 시인이 자신의 예술적 천재성을 자각하면서 자존의 감정이 새로이 통합되는 쪽으로 나아갔다.
1820년대 끊임없이 올라가던 하이네의 명성은 일련의 실험적 산문들로 가속화되었다. 1824년 가을 괴팅겐에서 공부를 하다가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 하르츠 산악지방을 도보 여행했을 때 작은 책을 쓰게 되었다. 수수한 모험을 소설화하면서 시적 상상력과 예리한 사회 단평들을 짜넣은 〈하르츠 여행 Die Harzreise〉은 나중에 〈여행기 Reisebilder〉(4권, 1826~31)의 첫번째 수록작품이 되었다. 사실과 허구, 자전적 이야기와 사회비판, 문학 논쟁이 종횡무진으로 혼합되어 있는 이 〈여행기〉는 이후 다른 작가들에 의해 널리 모방되었다. 〈여행기〉에 수록된 어떤 단편들은 1827년의 영국 여행과 1828년의 이탈리아 여행에서 나온 것이지만, 그중 가장 뛰어난 〈이념들. 위인의 책 Ideen. Das Buch Le Grand〉(1827)은 자아를 찾아가는 여행을 담은 것으로 어린시절의 기억, 나폴레옹에 대한 열광, 불행한 사랑에 대한 풍자적 슬픔, 정치 풍자들로 재치 있게 구성되어 있다.
후기생애 및 작품
1830년 프랑스에서 7월혁명이 일어났을 때 하이네는 당대의 많은 자유주의자와 급진주의자들처럼 당장 파리로 가지 않고 독일에서 돈벌이가 되는 직장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1831년 봄 마침내 파리로 가서 여생을 보내게 되었다. 그는 원래 새로운 생시몽주의(국가가 모든 부를 소유해야 하며, 노동자는 노동의 질과 양에 따라 분배받을 자격이 주어진다고 주장하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 매료되어 있었다. 그는 생시몽주의에서 과거의 억압적 이데올로기를 극복하고 자신이 영혼주의·감각주의, 또는 나자렛주의(유대-그리스도교 이상의 고수)·헬레니즘(고대 그리스 이상의 고수)이라고 다양하게 이름 붙인 것들에 새로운 균형을 부여하여 더욱 행복한 사회로 나아가게 할 현대적인 원리를 가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보았다. 시민왕 루이 필리프 치하의 프랑스에서 제한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질서가 발전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정치적·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그의 비판적 관심은 커졌다. 그는 프랑스의 새로운 질서에 관해 일련의 예리한 신문 논설을 썼는데, 이 글들을 모아 〈프랑스의 정황 Franzosische Zustande〉(1832)이라는 책자로 펴냈다. 이어서 독일 문화에 관한 연구논문집 〈낭만파 Die Romantische Schule〉(1833~35)·〈독일 종교와 철학의 역사에 대하여 Zur Geschichte der Religion und Philosophie in Deutschland〉(1834~35)를 썼는데, 여기서 그는 독일의 현재와 바로 이전 시대를 비판하기 시작하면서 종교개혁, 계몽주의, 근대 비판철학 등 독일 유산이 지닌 폭넓은 혁명적 잠재력을 논했다. 이 저서들은 프랑스 독자를 염두에 둔 것으로 프랑스어로 첫 출판되었다. 1840~43년에는 프랑스의 생활·문화·정치에 관해 또다른 일련의 신문 논설들을 썼으며, 이 글들을 재편집하여 1854년 파리의 고대 로마 시대 이름인 〈루테치아 Lutezia〉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이 시절 하이네는 '시'에서 당대의 사회문제로 주의를 돌렸다. 2번째 시집 〈신시집 Neue Gedichte〉(1844)에서 그 변화가 분명히 드러난다. 대부분 1830(또는 1831)년에 쓴 〈새 봄 Neuer Fruhling〉에 수록된 첫번째 계열의 시들은 〈시가집〉의 연애시들을 더욱 개성 있게 재현한 것들이며, 또 하이네가 일생 동안 쓴 장르인 발라드 시들도 들어 있다. 그러나 〈여러 가지 것들 Verschiedene〉에 실린 2번째 계열의 시는 파리의 쾌활한 소녀들과의 변덕스러운 관계를 그린 빈약하고 짧은 연작시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시들이 보여주는 환멸의 분위기는 널리 오해를 샀고 그에게 불리한 평판을 받았다. 또다른 계열은 〈시대시 Zeitgedichte〉라는 제목으로 묶인 거친 정치적 풍자시들이다. 이들 중 몇 편은 카를 마르크스의 신문 〈전진 Vorwarts〉을 위해 쓴 것이었다. 하이네는 1843년말 젊은 마르크스와 알게 되었으며, 바로 그무렵에 그는 독일에 있는 가족들을 방문한 후 보수반동적인 독일 상황을 통렬히 공격한 장편 풍자시 〈독일, 겨울동화 Deutschland, Ein Wintermarchen〉(1844)를 썼다. 이후 하이네는 마르크스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지만 공산주의에 결코 경도되지는 않았다. 공산주의는 환희와 관능의 혁명이라는 그의 이상과 맞지 않았던 것이다. 마르크스를 만날 무렵 그는 또다른 장시 〈아타 트롤. 한여름밤의 꿈 Atta Troll. Ein Sommernachtstraum〉(1843~45)을 썼는데, 이것은 급진적인 호언장담과 서투른 당대 정치시들을 익살스럽게 흉내낸 작품이다.
파리에서 보낸 처음 몇 년 간은 그에게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 부유한 숙부의 상류사회에서 따돌림을 받았던 그는 지도적인 문인으로 변신하여 당대의 많은 저명인사들과 사귀게 되었다. 1834년 교육받지 못한 여점원 크레센스 유제니 미라를 알게 되었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는 그녀를 '마틸데'라고 불렀다. 하이네는 까다롭기는 해도 충실한 애인이었던 그녀와 1841년 결혼했다. 그러나 곧 심한 난관에 부딪쳤다. 비판적이고 풍자적인 글들로 인해 그는 독일 검열당국과 험악한 관계에 봉착하게 되었고, 1835년말에는 독일 연방의회가 그의 모든 작품에 대한 전국적 금지령을 시행하고자 했다. 그는 정치 스파이에 에워싸였고, 자발적 망명이 강요된 망명이 되었다. 1840년 하이네는 파리의 독일 급진주의자 지도자였던 고(故) 루트비히 뵈르네(1786~1837)에 관해 재치 있지만 경솔한 책을 썼다. 여기서 하이네는 천박한 정치적 행동주의라고 생각한 것에 대해 자신의 더욱 미묘한 입장을 옹호하려고 했으나, 이 책에서 보인 거만하고 무자비한 태도로 인해 모든 동료들로부터 소외되었다. 하이네는 궁핍하지 않았음에도 늘 돈이 없었다. 하이네의 상속권을 박탈한 채 1844년 숙부가 죽었을 때 유산 상속에서 제외되어버리자 그는 전유럽의 주목하에 격렬한 상속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는데, 이 싸움은 그의 글에 대한 검열권이 숙부의 가족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해결되었다. 이렇게 하여 분명 하이네의 회고록은 태반이 후세의 수중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그가 프랑스 정부로부터 비밀 연금을 받아 왔다는, 1948년 프랑스 혁명 후 폭로된 정보는 그를 더욱 난처하게 했다.
그렇지만 가장 심한 고통은 건강악화에서 비롯되었다. 성병으로 보이는 병이 신경계통을 서서히 침범해 1848년 봄부터 '침대 무덤'에 갇히게 되었고 척추경련으로 말미암아 마비되고 사지가 뒤틀렸으며 부분적으로 눈이 멀게 되었다. 하이네는 다시 '시'로 돌아갔다. 냉소적으로 얼버무리면서 그는 인간의 신성(神性)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고 세상을 불공평하게 지배하는 데 대항하여 싸울 수 있는 인격신을 인정했다. 3번째 시집인 〈로만체로 Romanzero〉(1851)는 인간 조건에 관한 통절한 비탄과 음울한 해석들로 가득하다. 이 가운데 많은 시가 오늘날 가장 훌륭한 시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마지막 시집 〈1853년과 1854년의 시 Gedichte 1853 und 1854〉도 비슷한 종류의 것이다. 하이네는 거의 8년 동안 고통을 겪다가 죽어 몽마르트르 공동묘지에 묻혔다.
평가
사람을 격분하게 하는 하이네의 힘은 사람을 매료시키고 감동시키는 힘만큼 컸으며, 이토록 논란을 불러일으킨 시인은 드물었다. 공격적인 풍자, 급진적 태도, 남을 아랑곳하지 않는 태도 때문에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애국심이 없고 파괴적인 악당으로 보였으며, 점증하는 반유대주의도 그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19세기말과 20세기초에 여러 독일 도시에서 그의 기념비를 세우려던 노력은 폭동을 유발하고 정부를 동요하게 했다. 그의 많은 시가는 인기가 있었기 때문에 나치가 이 시가들을 명시선집에 포함시켰지만, '작자 미상'의 시가로 표기했다. 수십 년 동안 그의 문학적 명성은 국외, 특히 프랑스·영국·미국에서 더 널리 알려졌다. 오늘날 하이네의 정치적 역할과 마르크스주의의 관계에 대한 평가는 동서간 논쟁의 씨앗이 되고 있다. 그의 명성의 역사가 많은 부분에서 이처럼 비참하게 보일지라도 그것은 진실로 유럽적인 시인이자 작가로서의 지속적인 영향이 남긴 증거이기도 하다. J. L. Sammons 글 (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그대는 꽃인 양
그대는 한송이 꽃처럼
귀여이 맑고 아름다워라
내 그대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슬픔은 저절로 가슴속에 스미고
그대의 머리 위에 내 손을 얹어
빌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여라
하느님이 그대를 도와 주기를
맑고 귀엽고 아름다운 그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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