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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 왕유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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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 왕유

 

獨坐幽篁裏(독좌유황리)

彈琴復長嘯(탄금부장소)

深林人不知(심림인부지)

明月來相照(명월래상조)

 

그윽한 죽림(竹林) 속에 홀로 앉아

거문고 뜯고 다시 휘파람 분다.

아무도 모른다.

이윽고, 달이 빛을 안고 찾아온다.

 

그윽한 대나무숲 속 홀로 앉아,

거문고를 타다가 다시 길게 휘파람을 불어본다.

갚은 숲속이라 사람들은 몰라도,

밝은 달이 찾아와 서로 비추어본다.


요점 정리

작자 : 왕유(王維)

갈래 : 오언절구의 근체시

성격 : 서정적

어조 : 고독하면서도 차분하고 평범한 목소리

심상 : 서술적. 감각적

구성 :

1행 자연 숲의 한적함

2행 자연과 인간의 소리와의 조화

3행 고독 속의 여유

4행 자연과의 동화

제재 : 竹林(죽림) 속의 고요함과 달

주제 : 인간과 자연이 조화되는 삶. 자연과 인간의 합일(合一)

의의 : 참신한 시각적 이미지에 의한 동양적 정경을 묘사하였다.

내용 연구

幽篁(유황) : 그윽한 대숲

彈琴(탄금) : 거문고를 타다

長嘯(장소) : 길게 휘파람을 불다

相照(상조) : 비추어 준다. '相(상)'은 '서로'의 뜻 외에 동작이 미치는 대상만 있으면 일방적인 경우에도 쓰인다.

그윽한 죽림(竹林) 속에 홀로 앉아 / 거문고 뜯고 휘파람 분다. : 홀로 대숲 속에 묻혀, 인간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연을 즐기며 여유 있고 한적한 동양의 선경(仙境)을 표현하고 있다. 세속적인 인간 세계와 거리를 두고, 자연의 곁으로 좀더 다가서려는 작자의 세계관이 드러난 대목이다. 자아의 움직임을 '獨坐(독좌)', '彈琴(탄금)', '長嘯(장소)'라고만 묘사하고, 거문고를 타거나 피리를 불 때의 단정한 자세라든지 거문고 소리와 휘파람 소리 그리고 희로애락의 정서 등에 대해서는 어떠한 묘사도 하지 않은 것이 특색이다.

달이/빛을 안고 찾아온다. : 자연과 서로 친구가 될 만큼 하나가 되었다.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에 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도 모른다 : 깊은 숲속이어서 사람들이 찾지 않는다.

아무도 모른다. / 이윽고, 달이 빛을 안고 찾아온다. : 자연 속에 몰입된 참된 즐거움을 인간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오직 자연만이 작자의 평온하고 깨끗한 마음을 이해하고, 자연으로의 동참을 허용하여 은은한 달빛으로 맞아 준다. 자연에 동화된 서정적 자아의 모습이 드러난 대목이다. 이 시에서 경치나 사물을 묘사한 시어는 '幽篁(유황)', '深林(심림)', '明月(명월)'뿐이다. 일반적으로 달의 맑고 깨끗한 모습을 표현할 때 '明(명)'이라는 한 글자를 사용하듯이 왕유는 특이한 기교를 사용하지 않고 대나무 숲의 모습을 담백하고 은은한 분위기로 그려 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작자가 대나무 숲, 밝은 달 자체가 갖고 있는 깨끗한 속성과 자연스럽게 융화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이해와 감상

원제목은 '竹里館(죽리관으로 대숲의 정자를 의미함)'으로, 시각적 이미지와 청각적 이미지를 활용하여 인간과 자연이 조화되는 상태를 잘 표현하고 있다. 대나무숲에서 일어나는 소리와 거문고 소리, 휘파람 소리는 모두 청각적 이미지로, 각기 자연, 사물, 인간의 소리라는 차이를 지니면서도 서로 어울릴 수 있는 것들이다. 달과 시적 자아가 서로를 비추는 것도 자연과 일체가 된 상태를 나타내 주고 있다. 이 시는 산수 화가와 풍류 시인으로 일가를 이루었던 당 (唐) 나라 왕유의 작품으로, 자연 속에 동화되어 유유자적하게 생활하는 동양적인 삶이 은은한 필체로 묘사되어 있다.

이 시에서 작자는 평범한 시어를 이용하여 속세를 떠나 또 다른 세계에서 홀로 유유자적하게 생활하고 있는 모습을 감동적으로 그려 내고 있다. 왕유는 세속적 쾌락과 명예와 영달에 의한 행복보다는 그것을 거부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내면적 행복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은둔 생활에 대한 동경을 표현하려 했다.

이 시는 표면상으로는 평범한 단어로 이루어진 네 구절의 시에 불과하지만, 그 단어들이 긴밀하게 결합하는 순간 왕유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예술적 정취를 드러낸다. 이 시의 매력은 바로 글자상의 아름다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조화미에 있다. 달빛이 은빛 가루를 뿌리고 있는 듯한 숲 속의 경치로부터 더없이 맑은 느낌을 받을 수 있으며, 신선이 사는 듯한 아름다운 숲 속에서 거문고를 타다가 긴 휘파람을 부는 사람은 분명 정신적인 편안함을 얻어 속세의 번뇌를 모두 떨쳐 버린 상태임을 말해 준다.

왕유의 시가 가지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시적 자아가 아름다운 자연을 관조하고 나아가 자연과 합일(合一)한다는 데 있다. 이 시에서도 청각적 이미지와 시각적 이미지를 훌륭히 활용하여 인간과 자연의 조화라는 주제를 잘 표현하고 있다.

아름다운 자연을 고요한 마음으로 음미하고, 동시에 자연과 인간의 동화를 추구하였던 왕유의 시적 기질이 드러난 시로,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인 완적의 고사를 원용한 이 시의 전반부에서는 각각 자연, 악기, 인간을 상징하는 죽림(竹林)의 소리, 거문고 소리, 휘파람 소리는 모두 청각적 이미지로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그 소리들이 별개로 존재하지 않는다. 함께 어우러져 화음을 이루고 인간은 자연에 동화되어 그것의 일부가 된다. 그리고 후반부에서는 마찬가지로 시각적 이미지인 홀로 앉은 시적 자아의 그림자, 달, 달빛이 어우러져서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하게 한다.

시인 왕유는 시인으로서뿐만 아니라, 서화가(書畵家)로서도 이름이 높다. 소식(蘇軾)은 왕유의 시와 그림을 평하여, '그의 시를 읽으면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의 그림을 보면 그림 속에 시가 있다.'하였다. 곧 시와 그림이 혼연일체가 되어 있음을 말한 것이다. 이 시에도 역시 시와 그림이 잘 어우러져 있다. 청각적 이미지와 시각적 이미지의 적절한 활용을 통해서 인간과 자연의 완벽한 조화가 산수화처럼 산뜻한 정경으로 시 속에 담겨졌다. 이러한 정서는 자연과의 동화(同和)를 삶의 이상으로 설정한 동양적 자연관을 잘 보여준다.

죽림에서 일어나는 거문고 소리! 그것은 자연과 대립하는 것이 아닌, 바람 소리 물소리와도 같은 자연계의 음향 자체라고 해도 좋다. 거문고나 휘파람 소리는 비록 인간이 내는 소리지만, 결코 저속하거나 시끄러운 소리가 아니라 오히려 자연의 소리인 죽림(竹林)의 소리와 어우러져 멋진 화음을 이루며, 자연의 일부로 동화된 인간의 표상을 보여준다. 또한 시각적 이미지로 그려진, 홀로 앉은 시적 자아의 그림자와 은은한 달빛이 한데 어우러져서 한 폭의 동양화를 그려 내고 있다.

이 시에서 작자는 평범한 시어를 이용하여 속세를 떠나 또 다른 세계에서 홀로 유유자적하게 생활하고 있는 모습을 감동적으로 그려 내고 있다. 왕유는 세속적 쾌락과 명예와 영달에 의한 행복보다는 그것을 거부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내면적 행복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은둔 생활에 대한 동경을 표현하려 했다.

이 시는 표면상으로는 평범한 단어로 이루어진 네 구절의 시에 불과하지만, 그 단어들이 긴밀하게 결합하는 순간 왕유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예술적 정취를 드러낸다. 이 시의 매력은 바로 글자상의 아름다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조화미에 있다. 달빛이 은빛 가루를 뿌리고 있는 듯한 숲 속에서 거문고를 타다가 긴 휘파람 부는 사람은 분명 정신적인 편안함을 얻어 속세의 번뇌를 모두 떨쳐 버린 상태임을 말해 준다. (출전 : 하이라이트문학자습서)

심화 자료

왕유 王維 [699?~761?]

 

자 마힐(摩詰). 산시성[山西省] 출생. 9세에 이미 시를 썼으며, 서(書)와 음곡(音曲)에도 재주가 뛰어났다. 아우인 진(縉)과 함께 일찍부터 문명(文名)이 높았으며, 특히 기왕(岐王)의 사랑을 받아 731년 진사에 합격, 태악승(太樂丞)이 되었다. 후에 제주(濟州:山東省 荏平縣)의 사창참군(司倉參軍)으로 좌천되었으나, 734년 우습유(右拾遺)로 발탁되어 감찰어사 ·좌보궐(左補闕) ·고부낭중(庫部郞中)을 역임, 이부낭중에서 급사중(給事中)이 되었다. 안녹산의 난을 당하여 반란군의 포로가 되어 협박을 받고 할 수 없이 출사하였다. 반란 평정 후 그 죄가 문책되었으나 아우 진의 조력과 반란군 진중에서 지은 천자를 그리는 시가 인정받아 가벼운 벌로 치죄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후 다시 등용되어 상서우승(尙書右丞)의 자리까지 벼슬이 올라갔다. 그 때문에 왕우승이라고도 불렸다. 또한 왕유는 육조시대(六朝時代)의 궁정시인의 전통을 계승한 시인이라 하여 장안(長安) 귀족사회에서는 칭찬이 자자하였고 존경도 받았다.

 

그의 시는 산수 ·자연의 청아한 정취를 노래한 것으로 수작(秀作)이 많은데, 특히 남전(藍田:陝西省 長安 동남의 縣)의 별장 망천장(輞川莊)에서의 일련의 작품이 유명하다. 맹호연(孟浩然) ·위응물(韋應物) ·유종원(柳宗元)과 함께 왕맹위유(王孟韋柳)로 병칭되어 당대 자연시인의 대표로 일컬어진다. 또 그는 경건한 불교도이기도 해서, 그의 시 속에는 불교사상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는 것도 하나의 특색이다. 《왕우승집》(28권) 등이 현존한다. 그림은 산수화에 뛰어나, 수묵(水墨)을 주체로 하였는데, 금벽휘영화(金碧輝映畵)에도 손을 대고 있어 화풍 또한 다양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순정 ·고결한 성격의 소유자로, 탁세(濁世)를 멀리하고 자연을 즐기는 태도 등은 남송문인화의 시조로 받들어지는 원인이 되었다. 송나라의 소동파(蘇東坡)는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고 평하였다. 당시는 장안(長安)에 있는 건축의 장벽산수화(牆壁山水畵)나 《창주도(滄州圖)》 《망천도(輞川圖)》 등이 알려져 있었으나 확실한 유품은 전하여진 것이 없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왕유의 자연관과 작품 세계

 

왕유 시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그 아름다운 자연 관조(自然觀照)에서 구해야 할 것이다. 자연의 미묘한 움직임 속에서 그처럼 미(美)를 포착한 시인도 드물다. 도연명(陶淵明)의 관조가 다소 침울한 것이었음에 비해, 그의 것은 훨씬 명랑하다. 자연을 신뢰하고 그것에 순응(順應)하는 태도를 풍류(風流)라고 한다면, 그야말로 풍류시인이라 불려야 할 것이다. 반항적인 이단자적 기질이 조금도 없는 그는, 육조(六朝) 이래의 화려하고 섬약(纖弱)한 시의 전통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도리어 이것을 그대로 계승함으로써 자기를 건설해 간 것으로 보인다. (출처 : 이원섭, 당시(唐詩))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

 

만일 이 시를 그림으로 그린다면 서로 앞을 다투어 자라나 있는 울창한 죽림과 그 속에서 거문고를 안고 앉은 작은 사나이가 교교한 달빛을 받고 있는 모습이 될 것이다. 사람들이 모르는 정도가 아니라, 인간의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아 존재하는 것은 자연뿐으로, 사람도 자연의 일부로서 거기에 참가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렇게 자연에 귀의(歸依), 동화(同化)하는 생활을 풍류(風流)라 하여, 이는 동양 예술에서 중요한 하나의 경향을 이루어 왔다. 자연과 인간을 대립시켜서 생각하는 서양에서는 주로 인간에게만 관심을 쏟으며, 그들이 자연에 주목할 경우에는,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라는 전제(前提)가 따른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왕유의 시에서처럼 자연을 훨씬 친근한 것으로 여긴다.

 

동양에서의 자연관

 

서양의 자연관이 데카르트 식의 대립적 자연관에 머물러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에 견주어 동양의 자연관은 자연과 인간의 유기적 관계를 잘 반영하고 있다. 곧 동양에서는 자연과 인간을 상호 분리할 수 없는 관계로 인식하는 것이다. 자연 속에서 인간을 보고, 인간 속에서 자연을 보고, 언제든지 상호 조화 관계에서 바라볼 뿐, 결코 대립적 관점에서 바라보지 않는다.

불교에서는 우주의 모든 것이 고립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 삼라만상이 인연 관계에 따라 서로 맺음 속에서 존재한다고 보았다. 물질의 근원은 단단함을 뜻하는 땅(地)과 축축함을 뜻하는 물(水), 따뜻함을 뜻하는 불(火), 움직임을 나타내는 바람(風)으로 이루어진 네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고 하는데, 바로 이 네 가지 요소가 서로 얽히고 곪히면서 조화를 이루는 것을 자연계라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물질들의 집합인 색(色)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을 띠지만 모습을 띤 형체만으로는 너무 허망하기 때문에 그 진리를 찾아 애쓰고, 그러다 보면 반야심경이 이르는 대로 색을 보되 색을 이루는 4대로 구성된 공(空)까지 알게 되니 바로 색즉시공(色卽是空)이다. 반대로 공의 성질이 물질인 색의 본바탕이므로 또한 공즉시색(空卽是色)이다.

"천지는 나와 뿌리가 같고 만물은 나와 몸이 같다(天地與我同根 萬物與我一體)"고 한 중국의 승조(僧肇)의 말처럼 물질과 마음이 또한 다른 것이 아니다.

불교에서는 모든 물질의 순환 및 생명의 사멸과 탄생은 모두 연기(緣起) 법칙에 따른다. 모든 우주의 현상은 개체의 움직임 뿐만 아니라 마음 표현까지도 모두 업(業)으로 나타나는 인과의 고리로 설명할 수 있다. 따라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도 모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고, 더 나아가 삶과 죽음의 끝없는 윤회(輪廻)를 거친다.

따라서 한 개체의 태어남과 죽음은 언제나 이 연속적인 윤회 안에서 가능하며, 이것은 우주 안의 모든 것이 결국 떨어져 생각할 수 없으며 또한 일련의 원인에 의존하는 존재로 자연을 보는 것이다. 이는 자연과 인간이 따로 떨어져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서로 의존적으로 바라보고 살아야 한다는 무언의 가르침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불교의 가르침을 자연관으로 해석한다면 자연과 인간의 공존적 관계로 볼 때 비로소 자신이 부처가 될 수 있고, 인간의 내부에 부처의 성질이 있고, 인성 속에 천명(天命)이 들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또한 인도의 오래 된 종교의 하나인 힌두교도 그들이 믿고 따르는 범아일여(梵我一如) 사상에서 나타나듯이, 범(梵)을 만물의 근원으로 이해하고 그 범에서 인간을 비롯한 자연이 나왔다고 보고 자연과 인간을 하나로 보려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노자가 '도덕경 제25장'에서 말하기를 "도는 천지를 낳고, 천지는 만물을 낳는다. 큰 도는 모습이 없지만 만물을 기르는 것이다. 사람은 하늘을 법받았고, 땅은 하늘을 법받아 생겨났으며, 하늘은 도를 법받았고, 도는 자연을 법받느니라(道生天地 天地生萬物 大道無形 慈養萬物 人法天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고 하였다. 이는 자연을 우주 가운데 최고로 치는 경우로, 자연이 생명성의 자연, 주관 속에서도 자연이 있고 객관 속에도 자연성이 있다고 하는 말이다.

노장 사상, 도가 사상과 같은 자연주의 사상은 인간 속에 자연성이 들었고, 자연이라는 큰 틀 안에 인간이 있을 수 있으며, 산수 간에 내가 있다는 의미를 갖는다. 이는 또한 대상으로써 보는 자연이 아니고, 주체와 객체 속에 다 들어 있는 자연성, 인간 내적으로 본 자연성을 말한다. 또한 도가에서는 우주의 수많은 사건을 헤아릴 수 없는 많은 표현들로 이루어진 역동적 유기체로 인식한다. 곧 천지가 나와 함께 살고 만물이 나와 더불어 하나라고 보는 것이다.

본디 낱말 자연의 自는 코를 그려 놓은 상형문자이다. 코는 숨쉬는 기관으로 우주의 기와 바람이 들어가는 통로이다. 따라서 숨쉬고 사는 인간은 우주 또는 자연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말이다. 또 然은 개고기가 탄다는 뜻이다. 이는 우리가 저 옛날부터 개고기를 많이 먹었다는 말이고, 이는 입을 통해 먹은 개고기라는 영양소가 코를 통해 들여마신 산소와 결합하여 몸 안에 필요한 영양소를 얻는 것을 말함이다.

이 과정을 화학적으로 풀이하면 생명을 유지시키는 일종의 불사름이기도 하고 생명사름이라고 할 수도 있다. 따라서 자연이 우리 생명이고 나라는 주체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자연과 인간이 서로 하나가 되는 무위(無爲)의 세계가 펼쳐지는 셈이다. 여기서 말하는 무위란 억지로 행함이 없다는 말인데, 바로 이 무위 사상이 노장 사상의 핵심이다.

동양의 오랜 전통이자 우리 나라에서도 조선 시대 이래로 우리 삶 속에 깊이 뿌리 내린 유교에서도 인간의 문제가 자연 현상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인간과 자연의 문제가 모두 일종의함수 관계에 놓여 있다는 인식의 틀을 찾아 볼 수 있다. 이런 발상은 중국의 천인합일(天人合一)·물아일체(物我一體) 사상과 맞닿아 있다. 곧 종적으로 보면 하늘과 인간이 하나로 되어 있으며, 횡적으로 보면 주체와 객체를 이루는 대상 세계와 주체가 하나라는 이들의 기본 사고 방식을 말하는 것이다. '주역'의 복괘인 '象傳'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복에서 그 천지의 마음을 볼진저"라고 하여 천지에 마음을 적용시켜 자연을 단순한 기계적 물체가 아니라 생명체로 보았다는 사실과 심지어 목적 지향적 존재로 규정해 자연이 가진 심적 요소까지도 인정한 것을 알 수 있다. 역학에서도 인간과 자연을 일체로 보고, 개체와 전체를 일체로 보려 한 것을 잘 알 수 있다. 또한 자연을 커다란 생명체로 보고 있는 주역의 자연 세계는 살아 움직이는 생물로 자연을 바라보려는 노력을 기울인 것도 확인할 수 있다.

동학의 지기론에 따르면, 우주 만유는 하나의 생명체이고 이 생명의 존엄성을 무엇보다 강조해야 마땅하다. 곧 만물은 모두 다 따로 떨어져 있지만 그 근본 생명은 오로지 하나라는 것이다. 동학에서는 이러한 우주의 본체를 지기(至氣)라 한다. 지기는 지극한 기운, 곧 그들이 말하는 한울님의 기운을 말하며 모든 것이 지기에서 나와 지기로 돌아간다고 하는 철학으로, 이는 유물론, 유심론, 진화론, 창조론 및 무위자연설로 대별되는 선천적 우주관을 모두 포함하는 포괄적 자연관이다. 또한 천지가 곧 부모이고 부모가 곧 천지라고 하는 이른바 천지부모 일체설(天地父母一體說)에 이르러서는 자연과 생명에 대한 경외심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포괄적 자연관의 구체적 실천을 살펴볼 수 있다.

우리 조상들이 받아들인 또 다른 자연관은 '자연'을 세상과 우주의 모든 존재를 총괄적으로 가리키는 가장 포괄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이고, 인간은 단지 이들 자연 질서의 한 구석을 차지하는 조그만 구성원이나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측면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런 관점에서 본 총체적 자연은 인간이 형이상학적 차원에서 감히 구별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자연과 인간이 대립은 물론이고 공존이라는 개념도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들에 따르면 하늘과 땅, 산과 바다, 동식물과 인간 이 모든 것들은 서로 뗄 수 없고 구별할 수도 없이 밀접하게 얽혀 있는 하나의 전체를 구성한다. 따라서 자연은 우주 전체, 존재 전체를 단 하나로 묶는 총체적 개념인 것이다.

 

(출처 : http://megalam.co.kr/www_megalam/bank/002_protect/main002_1_02.htm)

 

 

 

왕유의 다른 시

 

 

과향적사(過香積寺)

 

不知香積寺(부지향적사)

향적사를 알지 못해

數里入雲峯(수리입운봉)

구름 낀 봉우리로 몇 리를 들어갔네

古木無人徑(고목무인경)

고목은 우거져 사람 다닐 길도 없는데

深山何處鍾(심산하처종)

깊은 산 어디선가 종소리 들리는구나.

泉聲咽危石(천성열위석)

샘물 소리는 높은 바위틈에서 울리고

日色冷靑松(일색냉청송)

햇빛은 푸른 솔에 비쳐 차갑기만 하구나.

薄暮空潭曲(박모공담곡)

땅거미 지는 빈 못 가에서

安禪制毒龍(안선제독룡)

좌선으로 독룡을 억누르네

 

내용 연구

 

過香積寺(과향적사) : 일설에는 왕창령(王昌齡)의 作이라 하기도 하는데, 향적사를 지나며의 뜻이고, 향적사는 섬서성 장안현 동남쪽 종남산 기슭에 있는 절이다. 이 시는 향적사의 선경을 구경하고 못에 앉아서 좌선을 하니 세속의 망상과 욕심이 씻겨졌다는 내용을 적은 것이다.

不知香積寺(부지향적사) : 향적사가 어디 있는지를 알지 못함.

雲峯(운봉) : 산이 높아 구름이 깔린 산봉우리, 구름이 걸려 있는 깊은 산봉우리.

古木無人徑(고목무인경) : 고목이 울창하여 향적사로 가는 길조차 없어짐. 태고적 분위기를 느끼게 함.

咽危石(열위석) : '咽(열)'은 목메다, 흐느끼다, '危石(위석)'은 우뚝 솟은 바위.

日色冷靑松(일색냉청송) 햇빛은 푸른 솔에 차갑기만 하다.

薄暮(박모) : 해가 질 무렵, 땅거미.

空潭曲(공담곡) : '공담(空潭)'은 인기척 없는 못, 곡(曲)은 가장자리. 구석. 이 연에 대해서 시인 자신이 앞으로 좌선할 것을 상상한다는 설과 시인 자신이 이미 절에 들어가서 좌선하고 있다는 설이 있다.

安禪(안선) : 선(禪)에 들어 몸과 마음이 고요하고 편안하여짐.

毒龍(독룡) : 헛된 망상, 마음속에 일어나는 망령(妄靈 : 늙거나 정신이 흐려서 말이나 행동이 정상을 벗어남. 또는 그런 상태)된 마음

 

鹿柴(녹채 : 사슴 울타리)

 

空山不見人, 但聞人語響.

공산불견인, 단문인어향.

 

返景入深林, 復照靑苔上.

반경입심림, 복조청태상.

 

텅 빈 산 사람은 보이지 않고, 단지 말소리만 울려 들릴 뿐이라

반사된 햇빛(혹은 저녁 햇빛)이 숲 속 깊이 들어와, 다시 푸른 이끼를 비추고 있네

 

 

내용 연구

 

鹿柴(녹채) : 輞川(망천)에 있는 왕유 별장 중의 하나, 柴(채)는 나무로 된 울타리, 즉 목책(木柵)을 뜻한다.

空山(공산) : 빈산. 아무도 없는 고요한 산.

返景(반경) : 저녁 햇빛, 반영(反影), 반조(返照)의 의미이다.

靑苔(청태) : 푸른 이끼

 

送別(송별)

 

山中相送罷, 日暮掩柴扉.

산중상송파, 일모엄시비.

 

春草明年綠, 王孫歸不歸

춘초명년록, 왕손귀불귀

 

내가 산중에서 너를 보낸 후에, 날은 이미 저물어 돌아와 다시 사립문을 닫는다.

내년에 이르러 봄풀이 녹색으로 변할 때, 나는 왕손이 돌아올지 안 돌아올지를 모르겠다?

 

달을 노래한 한시(漢詩)

 

- 이백(李白) 작품

 

정야사(靜夜思)

 

牀前明月光(상전명월광)

침대 앞의 밝은 달빛

疑是地上霜(의시지상상)

이슬이 내렸는가

擧頭望山月(거두망산월)

머리를 들어 산의 달을 바라보다가

低頭思故鄕(저두사고향)

다시 머리 숙여 고향을 생각하네.

 

내용 연구

 

靜夜思(정야사) : 고요한 달밤에 고향 생각을 하며 읊은 시.

牀前(상전) : 침상(침대) 앞, 침상 머리.

明月光(명월광) : 달빛이 빛나다.

疑是(의시) : ∼이 아닌가 의심하다.

地上霜(지상상) : (침상머리에 비친 흰 달빛이) 땅에 내린 서리가 아닌가 의심함.

擧頭望山月(거두망월산) : 머리를 들어 산 위에 뜬 가을달을 바라보다.

低頭思故鄕(저두사고향) : 머리를 숙여 고향을 생각한다.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니 고개가 저절로 숙여지는 것이다.

 

關山月(관산월)

 

明月出天山 명월출천산

밝은 달이 천산에 솟아 올라

蒼茫云海間 창망운해간

아득한 구름 낀 바다 비춘다

長風機萬里 장풍기만리

멀리서 오는 바람 몇 만 리인고,

吹度玉門關 취도옥문관

이것은 또 옥문관을 지내리

漢下白登道 한하백등도

한나라 군사는 백등도로 내려오고,

胡窺靑海灣 호규청해만

오랑캐들은 청해만을 엿보는데,

由來征戰地 유래정전지

옛부터 전쟁터에 나간 사람들

不見有人還 불견유인환

돌아오는 것 보지 못했다.

戍客望邊色 수객망변색

수자리의 나그네 변방 풍경 바라보고

思歸多苦顔 사귀다고안

돌아갈 생각에 괴로워하는 얼굴

高樓當此夜 고루당차야

높은 다락에서는 이런 밤에는

嘆息未應閑 탄식미응한

그 한숨 아마 그치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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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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