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정기(路程記) - 이육사
by 송화은율노정기(路程記) - 이육사
목숨이란 마치 깨어진 뱃조각
여기저기 흩어져 마음이 구죽죽한 어촌(漁村)보담 어설프고
삶의 티끌만 오래 묵은 포범(布帆)처럼 달아매었다
남들은 기뻤다는 젊은 날이었건만
밤마다 내 꿈은 서해(西海)를 밀항(密航)하는 쩡크와 같아
소금에 절고 조수(潮水)에 부풀어 올랐다
항상 흐릿한 밤 암초(暗礁)를 벗어나면 태풍(颱風)과 싸워가고
전설(傳說)에 읽어 본 산호도(珊瑚島)는 구경도 못하는
그곳은 남십자성(南十字星)이 비쳐주도 않았다
쫓기는 마음 지친 몸이길래
그리운 지평선(地平線)을 한숨에 기오르면
시궁치는 열대식물(熱帶植物)처럼 발목을 오여 쌌다
새벽 밀물에 밀려온 거미이냐
다 삭아빠진 소라 껍질에 나는 붙어 왔다
머―ㄴ 항구(港口)의 노정(路程)에 흘러간 생활(生活)을 들여다보며
(자오선, 1937.12)
<감상의 길잡이>
육사시는 조국의 상실이라는 극한적 상황에 의한 비극적인 자기 인식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초기시에 주로 나타나는 심상은 ‘어둠’의 이미지이다. 조국을 잃고 세계와 단절되어 빛을 잃은 그가 어둠 속을 걸어온 자신의 삶의 역정을 노래한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이 <노정기>이다.
이 시의 기저를 이루고 있는 시적 화자의 노정은 ‘물’의 흐름을 통하여 제시되고 있다. 그것은 어둠 속에서 ‘마치 깨어진 뱃조각’처럼 여기저기 유랑하고 있기에, ‘흩어져 어설퍼진’ 마음으로 살아가는 그의 삶이야말로 다 부서진 티끌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화자는 행여 젊은 날은 어떠했을까 하고 뒤돌아 보지만, ‘꿈은 서해를 밀항하는 쩡크’와 같은 고통이었으므로 그는 ‘소금에 절고 조수에 부풀어’오른 상처만을 확 인하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즐거운 추억이 되고, 현재의 삶에 활력소가 될 수 있는 젊은 시절이지만, 화자에게는 그것이 항시 고통스러운 항일 무장 독립 투쟁의 나날이었기 때문에, ‘남십자성이 비쳐주도 않’는 ‘흐릿한 밤’이요, ‘산호도는 구경도 못하는’ 고달픔일 수밖에 없었다. ‘산호도’는 그가 추구하는 이상적 세계임에는 틀림없지만 그의 시계(視界) 내에는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막막한 곳을 찾아 ‘쫓기는 마음 지친 몸’을 이끌고 가려고 하지만, ‘새벽 밀물에 밀려온 거미’같이 ‘다 삭아 빠진 소라 껍질’에 붙어 살아온 그로서는 그저 물처럼 흘러가 버린 지난 삶의 역정을 반추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고뇌 어린 삶의 역정기로서의 이 시는 그 전 노정을 ‘물’의 이미지로 형상화시키고 있다. ‘물’과 관련된 심상은 ‘배’․‘어촌’․‘포범’․‘서해’․‘밀항’․‘짱크’․‘조수’․‘암초’․‘산호도’․‘밀물’․‘소라’․‘항구’ 등으로, 특히, 마지막 시행의 ‘흘러간 생활’에서 ‘흘러간’이라는 ‘물’의 이미지를 그의 생활에 투사하여 귀결시킴으로써 화자는 이러한 노정을 통하여 비극적인 자기 인식을 하게 된다. 치열한 현실 인식에서 배태된 이 비극적 자기 인식은 마침내 적극적인 저항 의지로 표출, <광야>, <절정> 등으로 가시화됨으로써 육사는 항일 저항 문학의 거대한 정점으로 우뚝 서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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