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연보(年譜) - 이육사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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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육사

 

 

너는 돌다릿목에서 줘 왔다

할머니의 핀잔이 참이라고 하자.

 

나는 진정 강언덕 그 마을에

버려진 문받이였는지 몰라.

 

그러기에 열여덟 새 봄은

버들피리 곡조에 불어 보내고

 

첫사랑이 흘러간 항구의 밤

눈물 섞어 마신 술, 피보다 달더라.

 

공명이 마다곤들 언제 말이나 했나

바람에 붙여 돌아온 고장도 비고

 

서리 밟고 걸어간 새벽 길 위에

() 잎만이 새하얗게 단풍이 들어

 

거미줄만 발목에 걸린다 해도

쇠사슬을 잡아맨 듯 무거워졌다.

 

눈 위에 걸어가면 자욱이 지리라.

때로는 설레이며 바람도 불지.

 

(시학 창간호, 1939.4)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육사시에서 쉽게 떠올리게 되는 강인한 남성적 어조 대신 화자가 일상 생활에서 느끼는 고통과 질곡, 불안 의식 등을 잔잔한 어조로 솔직 담백하게 펼쳐 보여 주는 작품이다. 주지하다시피 육사는 40평생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온몸을 던진 시인이자 독립 운동가였다. 국내는 물론 만주와 중국 대륙을 전전하며 항일 독립 운동에 일생을 바친 그는 자그마치 열일곱 번이나 일경에 체포되어 구금, 투옥 생활을 했으며, 결국은 낯선 중국 땅에서 옥사당하고 말았다. 이같이 화려한 항일 무장 투쟁 속에서도 그는 한 인간으로서 겪던 고뇌와 좌절을 솔직히 표출한 시를 발표하기도 하였는데, 그런 특징을 드러내는 작품으로는 <연보><노정기(路程記)> 등을 들 수 있다.

 

각 연이 2행으로 된 전 8연의 구성으로, 육사시 특유의 정형성을 보여 주는 이 시는 내용상 크게 두 단락으로 나누어진다. 14연의 앞 단락은 어린 시절에 대한 회상과 흘러간 세월의 덧없음을 표출하고 있다. ‘너는 돌다릿목에서 줘 왔다던 / 할머니의 핀잔이 참이라고생각하는 화자에게서 어린 시절 할머니께서 말씀하셨던 이야기를 진실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화자는 나아가 강언덕 그 마을에 / 버려진 문받이였는지 모른다고 인식할 뿐 아니라, ‘열여덟 새 봄은 / 버들피리 곡조에 불어 보냈다고 하면서, 고통과 슬픔 속에 흘러가 버린 자신의 삶을 슬픈 눈으로 되돌아 보기도 한다. 그러던 화자는 마침내 첫사랑이 흘러간 항구의 밤 / 눈물 섞어 마신 술, 피보다 달더라라며 극한적인 고통과 슬픔을 토로하게 된다.

 

58연의 뒷 단락은 현재의 삶 속에서 겪는 고통과 질곡이 나타나 있다. 힘겨운 독립 투쟁의 유랑 생활을 하는 그이기에 바람에 붙여 돌아온 고장도 비어있을 뿐이다. 또한 서리 밟고 걸어간 새벽 길 위에 / 간 잎만이 새하얗게 단풍이 들어라는 구절에서 서리는 그의 생활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게 해 주며, ‘단풍은 그가 자신의 삶을 이미 퇴색해 버린 것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게 해 준다. ‘거미줄만 발목에 걸린다 해도 / 쇠사슬을 잡아맨 듯 무거워지는 고통의 극한에 자신이 처해 있음을 감추지 않으면서도, 끝내는 자신의 삶에 대해 슬픈 긍정과 자기 위안을 보내는 비장한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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