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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언제 무신하여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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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언제 무신하여

 

내가 언제 신의 없어 임을 언제 속였기에,

달 기운 한밤중에 님이 찾아올 듯한 뜻(기척)이 전혀 없네.

가을 바람에 떨어지는 나뭇잎 소리에 내 마음인들 어찌하리

 

내 언제 믿음 없어 임을 언제 속였기에

달 기우는 삼경에도 오시는 소리 전혀 없네.

추풍에 지는 잎소리야 낸들 어찌하리오

요점 정리

작자 : 황진이(선조 때)

갈래 : 정형시, 평시조, 서정시

연대 : 조선 전기

성격 : 연정가, 애련(愛戀)의 노래, 감상적, 애상적, 여성적

제재 : 연모(戀慕)의 정(情), 추풍에 지는 잎

주제 : 별한(別恨), 임에 대한 그리움, 임을 기다리는 간절한 마음

출전 : 청구영언(靑丘永言)

내용 연구

 

내 언제 믿음이 없어 임을 언제 속였기에[임에 대한 사랑은 변함없음]

달 기우는 삼경에도 오시는 소리[님이 오려는 뜻, 오는 기척] 전혀 없네.[오지 않는 임(달이 진 늦은 시간에도 날 찾아올 뜻이 전혀 없구나 / 찾아오지 않는 임에 대한 아쉬움과 원망)]

추풍[쓸쓸한 이미지를 통해 슬픔과 외로움이라는 화자의 정서를 대변]에 지는 잎소리야[시적 화자의 외로운 심정을 대변하는 사물] 낸들 어찌하리오[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에도 임인가 착각할 정도로 임을 간절히 기다림 / 임을 기다리는 간절한 마음을 지는 낙엽에 의탁함 / 체념의 정서도 드러남]

 

- 해동소악부(海東小樂府)

이해와 감상

 

가을밤에 초조하게 임을 기다리는 여인의 정한(情恨)을 그리고 있는 작품으로 임을 기다린다는 것은 참으로 못할 일이다. 기다린다는 것이 일각이 여삼추(如三秋)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여삼추는 3년과 같이 길게 느껴진다는 뜻으로, 몹시 애타게 기다리는 마음을 이르는 말이다. 기녀 출신의 황진이가 기다리는 이가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그 임을 기다리는 마음이 와 닿지 않은가? 임을 기다려 본 자만이 사랑을 안다. 사랑은 기다림이다.

 

시조의 화자는 임을 배신하는 행위를 한 적도 없고, 그럴 마음도 먹은 적이 없다. 그렇지만 달이 기우는 한밤중에도 임은 찾아올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혹시나 임이 오시는지 귀를 기울이는 화자에게 가을 바람에 지는 무심한 나뭇잎 소리만 들릴 뿐이다. 이 시조의 '임'은 '송도삼절(松都三絶)'로 일컬어지던 화담 서경덕으로 추정된다고 전해진다.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를 임의 인기척으로 착각할 정도로 사랑하는 마음이 간절한 여인의 정서를 섬세하게 그려내었다.

 

임에 대한 변함 없는 사랑을 초장에서 밝히고, 중장에서 임이 찾아 주지 않는 데 대한 안타까움을 노래하고, 그리고 종장에서는 임이 찾아 주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추풍에 지는 잎소리에 의탁하여 여성적 시각으로 훌륭히 형상화했다. 이 시조는 별한(別恨)을 노래한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시조 중의 하나이다.

심화 자료

황진이(黃眞伊)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명기(名妓). 본명은 진(眞), 일명 진랑(眞娘). 기명(妓名)은 명월(明月). 개성(開城) 출신. 확실한 생존연대는 미상이다. 중종 때의 사람이며 비교적 단명하였던 것으로 보고 있다.

 

그의 전기에 대하여 상고할 수 있는 직접사료는 없다. 따라서 간접사료인 야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계통의 자료는 비교적 많은 반면에 각양각색으로 다른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그리고 너무나 신비화시킨 흔적이 많아서 그 허실을 가리기가 매우 어렵다.

 

황진이의 출생에 관하여는 황진사(黃進士)의 서녀(庶女)로 태어났다고도 하고, 맹인의 딸이었다고도 전하는데, 황진사의 서녀로 다룬 기록이 숫자적으로는 우세하지만 기생의 신분이라는 점에서 맹인의 딸로 태어났다는 설이 오히려 유력시되고 있다.

 

황진이가 기생이 된 동기는 15세경에 이웃 총각이 혼자 황진이를 연모하다 병으로 죽자 서둘러서 기계(妓界)에 투신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 여부는 알 수가 없다. 용모가 출중하며 뛰어난 총명과 민감한 예술적 재능을 갖추어 그에 대한 일화가 많이 전하고 있다.

 

또한, 미모와 가창 뿐만 아니라 서사(書史)에도 정통하고 시가에도 능하였다. 당대의 석학 서경덕(徐敬德)을 사숙(직접 가르침을 받지는 않았으나 마음속으로 그 사람을 본받아서 도나 학문을 닦음.)하여 거문고와 주효(酒肴)를 가지고 그의 정사를 자주 방문여 당시(唐詩)를 정공(精工 : 정교하게 공작함)하였다고 한다.

 

황진이는 자존심도 강하여 당시 10년 동안 수도에 정진하여 생불(生佛)이라 불리던 천마산 지족암의 지족선사(知足禪師)를 유혹하여 파계시키기도 하였다. 당대의 대학자 서경덕을 유혹하려 하였으나 실패한 뒤에 사제관계를 맺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박연폭포(朴淵瀑布)·서경덕·황진이를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하였다고 한다.

황진이가 지은 한시에는 〈박연 朴淵〉·〈영반월 詠半月〉·〈등만월대회고 登滿月臺懷古〉·〈여소양곡 與蘇陽谷〉 등이 전하고 있다. 시조 작품으로는 6수가 전한다.

 

이 중에 〈청산리 벽계수야〉·〈동짓달 기나긴 밤을〉·〈내언제 신이없어〉·〈산은 옛산이로되〉·〈어져 내일이여〉의 5수는 진본 (珍本) ≪청구영언≫과 ≪해동가요≫의 각 이본들을 비롯하여 후대의 많은 시조집에 전하고 있다.

 

〈청산은 내뜻이요〉는 황진이의 작품이라 하고 있다. 그러나≪근화악부 槿花樂府≫와 ≪대동풍아 大東風雅≫의 두 가집에만 전하며, 작가도 ≪근화악부≫에는 무명씨로 되어 있고, ≪대동풍아≫에서만 황진이로 되어 있다. 그리고 두 가집에 전하는 내용이 완전 일치하지도 않는다.

 

특히 초장은 ≪근화악부≫에서 “내 정은 청산이요 님의 정은 녹수로다.”라 되어 있다. ≪대동풍아≫에서는 “청산은 내뜻이요 녹수는 님의 정”이라고 바뀌어 그 맛이 훨씬 달라졌다. ≪대동풍아≫는 1908년에 편집된 책이고 작가의 표기도 정확성이 별로 없는 가집이라는 점에서 그 기록이 의문시되고 있다.

 

황진이의 작품은 주로 연석(宴席)이나 풍류장(風流場)에서 지어졌다. 그리고 기생의 작품이라는 제약 때문에 후세에 많이 전해지지 못하고 인멸(湮滅 : 자취도 없이 모두 없어짐)된 것이 많을 것으로 추측된다.

현전하는 작품은 5, 6수에 지나지 않으나 기발한 이미지와 알맞은 형식과 세련된 언어구사를 남김없이 표현하고 있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참고문헌≫ 燃藜室記述, 錦溪筆談, 松都紀異, 於于野譚, 李朝女流文學 및 宮中風俗의 硏究(金用淑, 淑明女子大學校出版部, 1970), 歷代時調全書(沈載完, 世宗文化社, 1972), 黃眞伊와 許蘭雪軒(金東旭, 現代文學 9, 1955), 黃眞伊의 詩와 韓國詩의 本質(趙雲濟, 月刊文學 32, 1971).(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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