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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 버혀 내여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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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 버혀 내여

 

내 마음을 베어서 별 달을 만들고 싶구나.

아득히 넓고 먼 하늘에 번듯이 떠 있으면서

임금님이 계신 곳을 훤하게 비추어 보고 싶구나.

요점 정리

작자 : 정철(1536∼1593)

형식 : 평시조

성격 : 연군가(戀君歌)

제재 : 달

주제 : 선조 임금에 대한 변함 없는 충정(忠情)

내용 연구

달 : 임에 대한 자신의 충성심을 직접 보여 드리고 싶은 작자의 안타까운 심정을 형상화한 표현이다. 이와 유사한 표현들이 사미인곡이나 속미인곡에 자주 보인다.

님 : '임금', 여기서는 '선조 임금'을 지칭함.

이해와 감상

 

송강 정철의 대부분의 작품은 연군지정을 노래한 작품이다. 문학적으로는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살렸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하지만 그가 그리는 님은 너무도 치우친 임금에 대한 사랑이다. 당시 사대부의 대부분의 작품에 등장하는 님은 작자가 생존할 때 왕권을 잡고 있는 임금이다. 그러나 다시금 생각하면 그들이 그토록 그리워하는 임은 권력자이기에 그들의 그리움에는 임금에 대한 충성이고, 비판적으로 말하면 맹목적인 권력지향적인 사고 방식이 들어 있다. 특히 송강의 작품 또한 그러한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럼에도 송강의 작품이 의미가 있는 것은 한문과 고사성어와 명문을 인용하던 당대의 다른 문인들과는 달리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살리고 있다는 데 있다. 송강의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이 다 여인이 님을 그리는 심정을 통하여 연군(戀君)의 정을 노래하고 있는 작품인데, 이 시조 또한 같은 수법이라고 할 수 있다.

무릇 인간의 감정에는 희(喜), 노(怒), 애(哀), 락(榮), 애(愛), 오(惡), 욕(欲) 등 칠정(七情)이 있다고 하나 애(愛)는 칠정의 중추이니만큼 사랑 없이 인간은 살아갈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은 그리움의 정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리움 속에 살아가게 된다. 그래서 너무도 못 견디게 그리울 때에는 그 그리움을 시가의 형식을 빌어 표현하게 된다. 그리하여 조선 시대에는 모든 형태의 애정, 즉 친자(親子)간의 은애(恩愛), 남녀간의 연애, 형제간의 우애, 친구간의 신애(信愛), 군신(君臣)간의 충애(忠愛) 등을 시조의 형식을 빌어 표현하였던 것이다.

심화 자료

정철(鄭澈)

 

1536년(중종 31)∼1593년(선조 26). 조선 중기의 문인·정치가.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 서울 장의동(藏義洞 : 지금의 종로구 청운동) 출생. 아버지는 돈녕부판관 유침(惟沈)이다.

어려서 인종의 숙의(淑儀)인 누이와 계림군 유(桂林君瑠)의 부인이 된 막내누이로 인연하여 궁중에 출입, 같은 나이의 경원대군(慶源大君 : 명종)과 친숙해졌다.

10세 되던 해인 1545년(인종 1·명종 즉위)의 을사사화에 계림군이 관련되자 그 일족으로서 화를 입어 아버지는 함경도 정평(定平)으로, 맏형 자(滋)는 광양(光壤)으로 유배당하였다. 곧이어 아버지만 유배가 풀렸다.

12세 되던 1547년(명종 2) 양재역 벽서사건이 터지면서 다시 을사사화의 여파로 아버지는 경상도 영일(迎日)로 유배되었고, 맏형은 이 때 장류(杖流) 도중에 32살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이 시기 정철은 아버지를 따라 유배지 생활을 하였다.

1551년 원자(元子) 탄생의 은사(恩赦)로 아버지가 귀양살이에서 풀려나자 할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전라도 담양 창평 당지산(唐旨山) 아래로 이주하게 되고, 이곳에서 과거에 급제할 때까지 10년간을 보내게 되었다.

여기에서 임억령(林億齡)에게 시를 배우고 양응정(梁應鼎)·김인후(金麟厚)·송순(宋純)·기대승(奇大升)에게 학문을 배웠다. 또, 이이(李珥)·성혼(成渾)·송익필(宋翼弼) 같은 큰 선비들과도 사귀었다.

17세에 문화유씨(文化柳氏) 강항(强項)의 딸과 혼인하여 4남 2녀의 자녀를 두었다. 25세 때 〈성산별곡〉을 지었다고 하는데, 이 노래는 성산(별뫼) 기슭에 김성원이 구축한 서하당(棲霞堂)과 식영정(息影亭)을 배경으로 한 사시(四時)의 경물과 서하당 주인의 삶을 그리고 있다.

1561년(명종 16) 26세에 진사시 1등을 하고, 이듬해 문과 별시에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갔다. 성균관 전적 겸 지제교를 거쳐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었다. 이어 좌랑·현감·도사를 지내다가 31세에 정랑·직강·헌납을 거쳐 지평이 되었다.

함경도암행어사를 지낸 뒤, 32세 때 이이(李珥)와 함께 호당(湖堂)에 선출되었다. 이어 수찬·좌랑·종사관·교리·전라도암행어사를 지내다가 35세 때 부친상을, 38세 때 모친상을 당하여 경기도 고양군 신원(新院)에서 각각 2년여에 걸쳐 시묘살이를 하였다.

40세인 1575년(선조 8) 시묘살이 복을 벗고 벼슬길에 나아가 직제학 성균관 사성, 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이 무렵 본격화된 동서분당에 따른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 벼슬을 버리고 담양 창평으로 돌아갔다. 창평 우거시에 선조로부터 몇 차례 벼슬을 제수받았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43세 때 통정대부 승정원 동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관으로 승진하여 조정에 나아갔다. 그 해 11월 사간원 대사간에 제수되나 진도군수 이수(李銖)의 뇌물사건으로 반대파인 동인의 탄핵을 받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1580년 45세 때 강원도관찰사가 되었다. 이 때 〈관동별곡〉과 〈훈민가 訓民歌〉 16수를 지어 시조와 가사문학의 대가로서의 재질을 발휘하였다.

그 뒤 전라도관찰사·도승지·예조참판·함경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48세 때 예조판서로 승진하고 이듬 해 대사헌이 되었으나 동인의 탄핵을 받아 다음해(1585)에 사직, 고향인 창평으로 돌아가 4년간 은거생활을 하였다. 이 때 〈사미인곡〉·〈속미인곡〉 등의 가사와 시조·한시 등 많은 작품을 지었다.

 

54세 때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우의정으로 발탁되어 서인의 영수로서 최영경(崔永慶) 등을 다스리고 철저히 동인들을 추방하였다. 다음해 좌의정에 올랐고 인성부원군(寅城府院君)에 봉해졌다.

56세 때 왕세자 책립문제인 건저문제(建儲問題)가 일어나 동인파의 거두인 영의정 이산해(李山海)와 함께 광해군의 책봉을 건의하기로 했다가 이산해의 계략에 빠져 혼자 광해군의 책봉을 건의하였다.

이에 신성군(信城君)을 책봉하려던 왕의 노여움을 사서 “대신으로서 주색에 빠졌으니 나랏일을 그르칠 수밖에 없다.”는 논척을 받고 파직되었다. 명천(明川)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진주(晋州)로 옮기라는 명이 내린 지 사흘 만에 또다시 강계(江界)로 이배되어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1592년(선조 25) 57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귀양에서 풀려나 평양에서 왕을 맞이하고 의주까지 호종, 왜군이 아직 평양 이남을 점령하고 있을 때 경기도·충청도·전라도의 체찰사를 지내고 다음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러나 동인의 모함으로 사직하고 강화의 송정촌(松亭村)에 우거(寓居)하다가 58세로 별세하였다.

작품으로는 〈성산별곡〉·〈관동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 등 4편의 가사와 시조 107수가 전한다. 시조는 ≪송강별집추록유사 松江別集追錄遺詞≫ 권2에 〈주문답 酒問答〉 3수, 〈훈민가〉 16수, 〈단가잡편 短歌雜篇〉 32수, 〈성은가 聖恩歌〉 2수, 〈속전지연가 俗傳紙鳶歌〉 1수, 〈서하당벽오가 棲霞堂碧梧歌〉 1수, 〈장진주사 將進酒辭〉 등이 실려 있다.

상당히 중복되기는 하나 성주본(星州本)과 이선본(李選本) ≪송강가사 松江歌辭≫에도 많은 창작시조가 실려 있다. 그의 작품세계는 대체적으로 애군(愛君)·애민(愛民) 사상을 저변에 깔고 있다.

이 외에도 훈훈한 인정을 느끼게 하는 인간미 넘치는 작품, 강호 산수의 자연미를 노래한 작품이 있다. 그리고 선취(仙趣)적 기풍과 풍류적 호방함을 담아낸 작품 등 폭넓은 사대부의 정신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송강집≫과 시가 작품집인 ≪송강가사≫가 있다. 전자는 1894년(고종 31)에 간행한 것이 전한다. 후자는 목판본으로 황주본(黃州本)·의성본(義城本)·관북본(關北本)·성주본(星州本)·관서본(關西本)의 다섯 종류가 알려져 있다. 그 중 관북본은 전하지 않고 나머지도 책의 일부만 전한다.

필사본으로는 ≪송강별집추록유사≫와 ≪문청공유사 文淸公遺詞≫가 있다. 한시를 주로 실은 ≪서하당유고 棲霞堂遺稿≫ 2권 1책도 판각본으로 전한다. 창평의 송강서원, 영일의 오천서원(烏川書院) 별사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참고문헌≫ 李朝時代의 歌謠硏究(金思燁, 大洋出版社, 1956), 松江·盧溪·孤山의 詩歌文學(朴晟義, 玄岩社, 1966), 松江鄭澈硏究(金甲起, 二友出版社, 1985), 國譯 松江集(松江遺蹟保存會, 第一文化社, 1988), 松江文學硏究(申庚林·李殷鳳·曺圭益 編著, 國學資料院, 1993), 松江歌辭의 硏究 1∼3(李秉岐, 震檀學報 4·6·7, 1936∼37), 松江의 前後美人曲의 硏究(徐首生, 慶北大學校論文集 6, 1962), 訓民時調硏究(尹星根, 한뫼金永驥先生古稀紀念論叢, 1971), 장르論的 關心과 歌辭의 文學性(金炳國, 현상과 인식, 1977 겨울호).(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훈민가(訓民歌)

 

조선 중기의 문신 정철(鄭澈 : 1536 ~93)이 지은 연시로 〈경민가 警民歌〉·〈권민가 勸民歌〉라고도 한다. 강원도 관찰사로 일했던 1580년(선조 13) 정월부터 다음해 3월 사이에 백성을 교화할 목적으로 지었다. 훈민은 조선왕조가 들어선 이래 계속 강조되어온 것으로, 송순·주세붕에 의해 지어진 바 있는 훈민시조가 정철에게로 이어진 것이다. 정철의 〈훈민가〉는 내세우는 덕목은 전과 같았으나 정감 있고 순탄한 말로 인정과 세태를 생동감 있게 그려낸 점에서 눈여겨 볼 만하다. 이 노래는 유교적인 윤리관에 따라 생활할 것을 권했으나, 민요의 사설과 같은 표현방법을 써서 지나치게 의도에 매여 있지 않는 느낌이다. 원래 18수를 지었는데 지금은 16수가 〈송강가사 松江歌辭〉에 실려 전한다. 1656년(효종 7) 이후원(李厚源)이 〈경민편언해 警民編言解〉를 간행할 때 이 작품을 부록으로 실음으로써 널리 유포되었다. (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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