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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라 그리거니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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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라 그리거니

 

나도 너가 그리운데, 너라고 내가 그립지 않겠는가?

천 리나 먼 오랑캐 땅에서 얼마나 그립겠는가?

창 밖에서 슬피 울고 있는 저 접동새야

돌아감만 못하다고 하지 말아라. 나의 그리운 심정을 둘 곳이 없어라!

요점 정리

작자 : 인조(仁祖)

성격 : 애상적,

제재 : 접동새, 자식에 대한 그리움

주제 : 볼모로 잡혀간 자식을 그리워하는 부정(父情)

내용 연구

접동새 : 인조의 자식의 그리움을 배가시키는 객관적 상관물

이해와 감상

 

병자호란으로 인해 소현세자(昭顯世子)는 청(淸)으로 끌려간 지 3년 뒤에, 아버지 인조에게 방석과 함께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보냈다.

身留異域未歸人 신류이역미귀인

家留長安漢水濱 가류장안한수빈

月白夜心花落泣 월백야심화락읍

靑風地面柳絲新 청풍지면류사신

黃鶴嗅起遼西夢 황학후기요서몽

玄鳥來傳慶會春 현조래전경회춘

盡日樓臺歌舞地 진일루대가무지

不堪回首淚沾巾 불감회수루첨건

 

몸은 낯선 땅에 있어 못 가는 신세

내 집은 서울 장안, 한강 기슭

달 밟고 깊은 밤중 꽃잎에 눈물짓고

바람 맑은 연못 위엔 버들잎이 푸른데

꾀꼬리 울음 소리 고향 꿈을 깨우며

제비 찾아와 경회루의 봄을 알리네

온종일 누대(樓臺)에서 노래하고 춤추던 곳

고향을 돌아보니 눈물이 쏟아지네

인조가 이 시조를 보고 애통해 하며 잠 못 이루고 있는데, 어디서 들려오는 소쩍새의 애절한 피맺힌 울음은 더욱 마음을 산란하게 하여 벽 위에 이 시조를 썼다고 한다. 전쟁으로 패(敗)해 인질(人質)로 잡혀간 왕족의 조국에 대한 그리움이 나타나 있는 작품으로 개인과 역사 그리고 약소국의 설움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또한 나라의 임금이건만 자식 사랑에는 상하가 없는 아버지의 애절한 자식 사랑이 담겨 있는 작품이다.

심화 자료

인조(仁祖)

 

1595(선조 28)~1649(인조 27). 조선 제16대 왕(1623~49 재위).

서인이 주도한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올라 친명배금정책(親明排金政策)을 실시하는 가운데 정묘호란·병자호란을 겪었다. 재위기간 동안 5군영(五軍營)의 기초가 마련되고 양전(量田)·대동법 등이 시행되었으며, 각 학파·정파 간의 국가 질서 재건을 위한 이념적 모색이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이름은 종(倧). 자는 화백(和伯), 호는 송창(松窓).

반정과 즉위

 

할아버지는 선조, 아버지는 정원군(定遠君), 어머니는 구사맹(具思孟)의 딸인 인헌왕후(仁獻王后)이다. 비(妃)는 영돈녕부사 한준겸(韓浚謙)의 딸인 인열왕후(仁烈王后)이며, 계비(繼妃)는 영돈녕부사 조창원(趙昌遠)의 딸인 장렬왕후(莊烈王后)이다. 1607년(선조 40) 능양도정(綾陽都正)에 봉해지고 이어 능양군(綾陽君)에 봉해졌다. 1623년 서인 김유(金)·이귀(李貴)·이괄(李适)·최명길(崔鳴吉) 등이 일으킨 정변에 힙입어 왕위에 올랐다. 즉위 직후 반정의 명분을 확립하여 정통성을 다지는 동시에 서인계를 중심으로 정부를 재구성하고 왕권을 안정시키는 작업을 폈다. 반정의 명분은 광해군 정권의 부도덕성과 실정에서 구했다. 가장 문제가 된 것은 인목대비(仁穆大妃)를 박해하고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살해한 반인륜적인 행위와 후금(後金)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은 일로, 반정은 이러한 광해군의 폭정을 중단시키기 위한 불가피한 행위인 것으로 합리화되었다. 따라서 광해군을 서인(庶人)으로 강등시켜 강화도로 귀양 보내고, 광해군대의 정국을 주도했던 대북파의 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 등 수십 명을 처형했다. 반면 반정에 공을 세운 33명은 3등급으로 나누어 정사공신(靖社功臣)에 봉하고 관직을 내렸다. 이와 함께 광해군대의 정치를 비판, 자진해서 물러났거나 대북계로부터 축출당했던 서인·남인의 사림(士林)들을 중앙 정계로 불러들였다. 서인계의 정엽(鄭曄)·오윤겸(吳允謙)·이정구(李廷龜)·김상헌(金尙憲) 등과 남인계의 이원익(李元翼)·정경세(鄭經世)·이수광(李光) 등이 그들이었다. 즉위 초기인 1623년 7월 기자헌(奇自獻)·유몽인(柳夢寅) 등의 역모가 있었으며, 동년 10월에는 흥안군(興安君)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하는 황현(黃玹)·이유림(李有林) 등의 역모가 있었다. 특히 1624년에는 반정공신이던 이괄이 반란을 일으켜 공주까지 피난할 정도의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이괄은 반정에 대한 논공행상에서 도감대장(都監大將) 이수일(李守一)이 내응(內應)의 공이 있다 하여 공조판서로 중용된 데 비해, 자신은 2등으로 평가받고 도원수 장만(張晩) 휘하의 부원수 겸 평안병사로 임명된 것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인조는 이러한 반왕권 움직임을 효과적으로 제어함으로써 비정통적인 방법에 의해 승계한 왕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강력한 왕권을 세워 신료를 장악하거나 독자적으로 정국을 운영하는 데는 많은 한계가 있었다. 특히 서인세력은 반정 이후 정국을 주도하고, 남인의 정계 진출을 견제하여 인조의 왕권행사를 제약했다.

친명배금정책과 호란

 

인조정권은 광해군 때의 후금의 존재를 인정하는 현실주의적 외교정책을 반인륜적인 것으로 비판하고 친명배금정책을 실시했다. 이무렵 선양[瀋陽]으로 수도를 옮기고 태종이 왕위를 계승하는 등 국세가 날로 강대해지고 있었던 후금은 조선이 형제의 관계를 맺자는 요구에 응하지 않자, 1627년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침략했다 (→ 색인 : 정묘호란). 의주를 거쳐 평산까지 함락되자 조정은 강화도로 천도했으며, 최명길의 강화 주장을 받아들여 양국의 대표가 회맹(會盟), 형제의 의를 약속하는 정묘화약(丁卯和約)을 맺었다. 1636년 12월 후금은 국호를 청(淸)으로 바꾸고 형제의 관계를 군신(君臣)의 관계로 바꾸자고 요구했으나 거부당하자 10만여 군을 이끌고 다시 침입해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인조정권은 이를 막지 못하고 봉림대군(鳳林大君)·인평대군(麟坪大君)과 비빈(妃嬪)을 강도(江都)로 보낸 뒤, 남한산성으로 후퇴하여 항거했다. 조정에서는 전쟁 수행 여부를 놓고 김상헌(金尙憲)·정온(鄭蘊)을 중심으로 한 척화파(斥和派)와 최명길 등의 주화파(主和派) 간의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었으나, 주화파의 뜻에 따라 항복을 결정하고 삼전도(三田渡)에서 군신의 예를 맺었다. 이와 함께 소현세자(昭顯世子)·봉림대군과 척화론자인 삼학사(三學士), 즉 홍익한(洪翼漢)·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를 청나라에 인질로 보냈다. 2차례의 전란을 거치면서, 임진왜란 이후 다소 수습된 국가 기강과 경제는 파탄 상태로 빠지는 한편, 정국은 친청파와 배청파로 분화·대립해 혼란스러워졌다. 특히 서인의 분화는 가속화하여 김자점(金自點)을 영수로 하는 낙당(洛黨)과 원두표(元斗杓)를 중심으로 한 원당(原黨), 김집(金集)·김장생(金長生)·송시열(宋時烈) 등의 산당(山黨), 김육(金堉) 등의 한당(漢黨)이 형성되었다. 인조 말년 김자점은 외척으로서 친청세력을 규합하여 정권을 장악했고, 이에 반해 산당을 중심으로 반청친명사상과 북벌론이 강화되어 광범위한 여론이 형성되었다. 소현세자의 죽음과 강빈(姜嬪)의 옥사, 봉림대군의 세자책봉과 왕위승계는 이러한 대립 속에서 이루어졌다.

국방정책과 경제정책

 

허약한 왕권을 강화함과 동시에, 친명정책을 추진하면서 생겨난 전란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군사력 강화책을 활발히 추진했다. 먼저 1623년 호위청(扈衛廳)을 신설하여 반정을 주도한 세력의 사병을 정규병력으로 변화시켰다. 1624년에는 어영군(御營軍)을 창설했으며 이해 6월에는 기존의 경기군(京畿軍)을 정비·강화하여 총융군(摠戎軍)으로 재편했다. 이와 함께 방어의 거점으로 남한산성을 수축하고 강화도의 군사력을 정비했다. 한편 군역 자원과 재정의 확보를 목적으로 직후부터 호패청(號牌廳)을 설치하고 호패법을 시행하여 거의 완성했으나 정묘호란 때 소실되어 이를 통한 군사력 증강은 실패로 돌아갔다. 1627년 정묘호란이 끝난 후, 군사력 강화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즉 남한산성의 수비강화를 위해 수어청(守禦廳)을 신설하고 어영청과 훈련도감의 인원을 증강함으로써 조선 후기 5군영 체제의 기초를 마련했다. 이같은 군제의 재편과 함께 경제질서의 재건을 위한 정책도 각 방면에서 실시되었다. 이는 왜란과 호란으로 말미암아 파탄 직전에 놓였던 국가재정·농민경제·농업생산력을 되살리기 위한 일련의 조치였다. 광해군 때 경기도에 시험적으로 실시했던 요역과 공물(供物)의 전세화(田稅化) 조치인 대동법을 이원익의 건의로 1623년 실시했다. 애초 강원도·전라도·충청도 등 3도에 시행하기로 했으나 1626년에 강원도에만 실시했다. 1634년에는 삼남(三南)에 양전을 실시하여 전결(田結) 수를 증가시킴으로써 세원(稅源)을 확대했다. 이와 함께 세종 때 제정되었던 연등구분의 전세법(田稅法)을 폐지하고 전세의 법적인 감하(減下)를 주된 내용으로 하는 영정법(永定法)과 군역의 세납화(稅納化)를 실시했다. 1633년 김육의 주장에 따라 상평청(常平廳)을 설치하여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주조하고 그 유통을 시험했다. 이는 실패로 끝나기는 했으나 효종대 이후 화폐 유통의 기초를 이루었다. 또한 청인과의 민간무역을 공인하여 1637년 북관(北關)의 회령(會寧) 및 경원개시(慶源開市), 1647년 압록강의 중강개시(中江開市)가 행해졌다. 개시에는 상고(商賈)의 수, 개시기간, 유왕일수(留往日數), 매매총수(買賣總數) 등을 미리 결정하도록 했다. 또한 1641년에는 군량조달을 위해 납속사목(納粟事目)을 발표하고, 납속자에 대한 서얼허통(庶許通) 및 속죄(贖罪)를 실시했다. 능은 경기도 파주군 탄현면 갈현리에 있는 장릉(長陵)이다. (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광해군 4)~1645(인조 23)

 

인조의 맏아들로 이름은 왕(). 어머니는 영돈녕부사 한준겸(韓浚謙)의 딸 인열왕후(仁烈王后)이다. 빈(嬪)은 우의정 강석기(姜碩期)의 딸 민회빈(愍懷嬪)이다. 1625년(인조 3) 세자로 책봉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전주에 내려가 남도(南道)의 민심을 수습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삼전도(三田渡)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한 뒤 자진하여 봉림대군(鳳林大君:뒤에 효종) 및 주전파 재신(宰臣)들과 함께 인질로 청나라 선양[瀋陽]에 갔다. 그는 9년간 선양에 머무르는 동안 현실적으로 청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양국간에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는 조정자로서 상당한 재량권을 행사했다. 1644년 9월에는 명나라를 정벌하는 청나라 군사를 따라 베이징[北京]에 가 70여 일을 머물면서 독일인 신부 J. 아담 샬(일명 湯若望)에게 천주교와 서구 과학문명에 대한 여러 지식을 배워, 천문·수학·천주교 서적과 여지구(輿地球)·천주상(天主像) 등을 가지고 왔다. 1645년 2월 18일 서울로 돌아왔으나, 조정은 서인들이 반청친명정책(反淸親明政策)을 고수하여 세자의 태도에 부정적이었고, 인조도 세자의 선양에서의 행동을 못마땅해 하고 있었다. 또한 세자빈과 관계가 좋지 않던 인조의 총비 조소용(趙昭容)이 여러 가지로 세자를 모함했다. 세자가 귀국한 지 2개월 만에 원인 모를 병으로 급사(急死)하자 세자빈과 여러 대신들이 사인을 규명하고자 했으나, 인조는 이를 무시하고 서둘러 입관을 마쳤다. 〈인조실록〉에 따르면 시신은 9혈에서 출혈하고 있었으며 진흑(盡黑)으로 변해 있었다고 한다. 그뒤 세자빈은 역모를 꾸몄다 하여 그의 가족들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 장지는 경기도 고양시 원당읍에 있다. 처음에는 소현묘라 했으나, 고종 때 소경원(昭慶園)으로 격상되었다.(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년(인조 14) 12월부터 1637년 1월까지 청(淸)나라가 조선을 침략하여 일어난 전쟁.

발생배경

 

1627년에 일어난 정묘호란(丁卯胡亂) 뒤 후금(後金)과 조선은 형제지국(兄弟之國)으로서 평화유지를 약속했다. 그러나 조선은 해마다 많은 액수의 세폐(歲弊)와 수시의 요구에 응하기 힘들었으며, 당시 집권층의 강한 숭명배금(崇明排金) 사상으로 북쪽 오랑캐와의 형제관계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런데 후금은 조선침략의 다음해에 내몽골의 챠하르[察哈爾] 지방을 공격하고, 1632년에는 만주와 내몽골의 대부분을 차지한 뒤 베이징[北京] 부근을 공략하기 시작하면서 조선에 더욱 강압적인 태도를 취했다. 태종은 사신을 보내 '형제지맹'을 '군신지의'(君臣之義)로 고치려 했고 세폐도 늘려 금 100냥, 은 1,000냥, 각종 직물 1만 2,000필, 말 3,000필 등과 정병(正兵) 3만 명까지 요구했다. 이에 조선측은 세폐를 대폭으로 감액하는 교섭을 벌였으나 실패했고, 그 다음달에는 후금으로부터 명나라 공격에 필요한 군량을 공급하라고 요구받았다. 이처럼 후금이 무리한 요구를 하자, 조선 조정에서는 절화(絶和)하는 한편 군비(軍備)를 갖추어야 한다는 논의가 격해졌다. 그러던 중 1636년 용골대(龍骨大)·마부대(馬夫大) 등이 인조비 한씨(韓氏)의 조문(弔問)을 왔을 때 후금 태종의 존호(尊號)을 알리면서 군신의 의(義)를 강요했다. 그러자 조정 신하들은 부당함을 상소하며 후금의 사신을 죽이고 척화할 것을 주장했고, 인조도 후금의 국서를 받지 않고 그들을 감시하게 했다. 후금의 사신들은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도망갔다. 정부에서는 의병을 모집하는 한편, 의주를 비롯한 서도(西道)에 병기를 보내고 절화방비(絶和防備)의 유서(諭書)를 평안감사에게 내렸는데, 도망하던 후금의 사신이 그 유서를 빼앗아 보고 조선의 굳은 결의를 알게 되었다. 또한 1636년 4월에 후금은 국호를 청(淸)으로 고치는 한편 연호를 숭덕(崇德)으로 개원하고 태종은 관온인성황제(寬溫仁聖皇帝)라는 존호를 받았는데, 이때 즉위식에 참가한 조선 사신인 나덕헌(羅德憲)과 이곽(李廓)이 신하국으로서 갖추어야 할 배신(陪臣)의 예를 거부했다. 이에 청태종은 귀국하는 조선 사신들을 통해 조선에 국서를 보냈는데, 자신을 '대청황제'(大淸皇帝)라고 하고 조선을 '이국'(爾國)이라고 하면서 조선이 왕자를 보내어 사죄하지 않으면 대군(大軍)으로 침략하겠다고 협박했다. 이 국서에 접한 조정은 격분하여 나덕헌 등을 유배시키고, 척화론자(斥和論者)들은 주화론자(主和論者)인 최명길(崔鳴吉)·이민구(李敏求) 등을 탄핵했다. 이러한 정세를 살펴보던 청태종은 그해 11월 조선의 사신에게 왕자와 척화론자들을 압송하지 않으면 침략하겠다고 거듭 위협했다

청의 침입

병자호란 때 청의 침입도

청태종은 1636년 12월에 직접 조선 침략을 감행했다. 청태종은 명나라가 해로(海路)로 조선을 지원을 못하게 하기 위해 별군(別軍)으로 랴오허[遼河] 방면을 지키게 하고, 12월 2일에 만주족·몽골족·한인(漢人)으로 이루어진 2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9일에는 압록강을 건너왔다. 이때 청은 맹약을 위반한 조선을 문죄(問罪)하는 것이 침략의 명분이었으나, 사실은 조선을 군사적으로 복종시켜서 후일 청나라가 중국을 지배하게 될 때 후환을 없애기 위한 대비였다. 청군이 압록강을 건넜을 때 의주부윤 임경업(林慶業)이 백마산성(白馬山城)을 굳게 방비하고 있었으므로, 청나라의 선봉인 마부태(馬夫太)는 이 길을 피하고 서울로 직행하여 선양[瀋陽]을 떠난 지 10여 일 만에 개성을 지나서 서울 근교에 육박했다. 조선 조정은 12월 13일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의 계문에 의하여 청군이 침입해서 이미 안주(安州)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알고 대책을 서둘렀다. 14일 승지 한흥일(韓興一)에게 묘사(廟社)의 신주를 가지고 강화로 향하게 하고, 판윤 김경징(金慶徵)을 안찰사, 부제학 이민구를 부사(副使)로 정하여 세자빈 강씨(姜氏), 원손(元孫), 봉림대군(뒤의 효종), 인평대군을 배호하여 강화로 향하게 했다. 또한 강화유수 장신(張紳)이 주사대장(舟師大將)을 겸하여 강화를 방비하게 하고 심기원(沈器遠)을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정했다. 그날 밤 인조도 세자와 함께 강화로 가려고 남대문까지 나왔으나 이미 청군이 양철평(良鐵坪:마포대안으로 추정)에 이르렀다는 보고를 듣고 최명길을 보내어 적정을 살피게 하는 한편, 다시 수구문(水口門)으로 나와 밤늦게 남한산성에 이르렀다. 다음날 새벽 인조는 산성을 떠나서 강화로 향했으나 산길이 얼어 미끄러웠으므로 산성으로 돌아갔다. 인조는 훈련대장 신경진(申景), 어영대장 이서(李曙), 수어사 이시백(李時白), 어영부사 원두표(元斗杓) 등에게 성 안의 군병 1만 3,000여 명으로 성을 지키도록 하고, 8도에 교서를 내려 도원수·부원수 및 각 도의 감사·병사로 하여금 근왕병을 모집하게 하는 한편 명나라에 원병을 청했다. 이때 성 안에는 군량이 도합 2만 3,800여 석이 있었는데, 이 분량은 군병과 백관을 합하여 1만 4,000여 명이 있었으므로 약 50일분에 해당하는 양식이었다. 청군의 선봉은 16일에 남한산성에 이르렀고, 뒤이어 많은 군사들이 남한산성으로 몰려왔다. 성 안에서는 비록 큰 전투는 없었으나, 적의 포위 속에서 혹한과 싸워야 했으며 점차 식량마저 떨어져 성 안의 상태가 비참해져감에 따라, 각지에서 오고 있는 원병이 산성의 포위망을 배후로부터 끊어주길 기대했다. 그러나 도원수·부원수, 감사(監使)·병사(兵使)의 군사는 대개 도중에서 적과 접전하다가 흩어졌다. 그중에서 전라병사 김준룡의 군사가 용인에서 적장을 죽이고 기세를 올리기도 했으나, 역습을 당하여 후퇴했다. 민간에서도 의병이 일어났으나, 거의 무력하거나 진군 도중이었다. 조선이 기대했던 명나라의 원병은 국내의 어려운 사정으로 적은 수를 보냈는데, 그나마 풍랑 때문에 되돌아갔다. 10여 만 명의 청군에 포위당한 채 고립되자, 성 안의 조선 조정에서는 차차 강화론이 일어났으며, 주전파도 난국을 타개할 별다른 방도를 내놓지 못했다. 청태종은 이듬해 정월 1일에 남한산성 아래의 탄천(炭川)에서 12만 명의 청군을 결집하고 있었다. 2일에 인조는 청군에 보내는 문서를 작성하게 하여 청의 진영에 보냈는데, 청은 조선이 청과 개전할 준비를 하는 등 맹약을 깨뜨렸으므로 출정한 것이라는 등의 매우 강압적인 답서를 보냈다. 그뒤 20일에 청나라는 인조가 성에서 나와 항복하되 먼저 주전의 주모자 2~3명을 가두어 보내라는 국서를 보냈다. 이틀 후에는 청군에 의해 강화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강화에는 세자빈궁과 두 대군을 비롯한 여러 신하들이 피난해 있었고 안찰사 김경징과 유수 장신 등이 방비를 맡고 있었는데, 결국 패전하여 빈궁과 대군 이하 200여 명이 포로가 되어 남한산성으로 호송되었다.

항복과 강화

 

모든 정세가 불리해지자 인조는 항복할 결심을 하고 1월 30일 성을 나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태종에게 항복하는 의식을 행했다. 이때 항복의 조건은 다음과 같다. 청나라와 조선은 군신의 의를 맺고, 명의 연호를 버리며 명나라와의 국교를 끊고 명나라에서 받은 고명책인(誥命冊印)을 청나라에 바칠 것, 인조의 장자와 다른 아들 및 대신들의 자제를 인질로 할 것, 청나라의 정삭(正朔)을 받고, 만수·천추·동지·원단과 그밖의 경조사에 조헌의 예를 행하며 사신을 보내어 봉포하되 이들 의절은 명나라에 하던 것과 같이 할 것, 청나라가 명나라를 정벌할 때 원군을 보낼 것이며 청군이 돌아가면서 가도(島)를 정벌할 때 조선은 원병과 병선을 보낼 것, 조선인 포로가 만주에서 도망하면 다시 잡아가며 대신 속환(贖還)할 수 있다는 것, 통혼(通婚)으로 화호(和好)를 굳힐 것, 조선은 성을 보수하거나 쌓지 말 것, 조선 안에 있는 올량합인(兀良哈人)을 쇄환할 것, 조선의 일본과의 무역을 종전대로 하고 일본의 사신을 인도하여 청나라에 내조하게 할 것, 매년 1번씩 청나라에서 정하는 일정한 양의 세폐를 바칠 것 등이다.

 

이는 정묘호란 때의 조건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굴욕적이고 가혹한 것이었다. 화의가 이루어지자 청태종은 돌아갔으며, 소현세자와 빈궁, 봉림대군과 부인 그리고 척화론자인 오달제(吳達濟)·윤집(尹集)·홍익한(洪翼漢) 등의 대신들이 인질로 잡혀 선양으로 갔다. 청군은 돌아가던 중 가도의 동강진(東江鎭)을 공격했고, 조선은 평안병사 유림과 의주부윤 임경업으로 하여금 병선을 거느리고 청군을 돕게 하여 동강진의 명나라 군대는 괴멸되었다.

전후의 대청관계

 

병자호란 후 조선은 청에 대해서 사대(事大)의 예를 지킴에 따라 조공(朝貢) 관계가 유지되었다. 중국에 가는 사신의 주요임무는 세폐와 방물(方物:황제나 황후에게 따로 보내는 조선의 공물)을 바치는 일이었는데, 이로 인해 조선은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보았다. 사행(使行)의 내왕시 일정한 한도 내에서의 교역이 공인되어 개시(開市)와 후시(後市)가 행해졌는데, 이 또한 조선 정부에 경제적 손실을 끼쳤다. 이외에 전쟁 때 청으로 잡혀간 백성들을 데려오는 데 드는 속환가가 비싸서 속환문제가 심각했다. 이와 같이 조선은 표면적으로 사대의 예를 갖추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숭명배청의 사상이 전쟁 전보다도 굳어져갔다. 그리하여 강화조건에 포함되어 있는 청나라의 출병요구에 대해서는 1639년에 거절한 바 있으며, 이듬해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할 때 임경업에게 전선 120척과 병사 6,000명을 주어 출전하게 하고 군량미 1만 포를 조운하게 했는데, 임경업이 중도에서 일부러 30여 척을 파괴하고 풍운을 만나 표류한 틈을 타서 명나라에게 청나라의 사정을 알렸다. 1643년에는 조선이 명나라와 통교한 사실이 드러나 최명길과 임경업이 선양에 붙잡혀갔다. 이듬해 청은 베이징[北京]으로 천도하고 1645년에 선양에 잡혀갔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최명길, 척화론자인 김상헌을 돌려보냈다. 그러자 인조는 인평대군을 보내어 사의를 표함으로써 병자호란의 전후처리는 일단락되었고, 종전 직후 무리하게 책정되었던 조공품목들은 조정되었으나 조선에게 불리한 조공관계와 무역은 계속 진행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은 1649년에 즉위한 효종의 주도 아래 강한 배청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북벌론(北伐論)이 대두되었다. (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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