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자 상자 / 전문 / 이근영
by 송화은율과자 상자 / 이근영
박일문(朴一文)으로서 우선 당장에 급한 것은 두 달 동안이나 밀린 집세 십육 원이었다. 거의 하루 걸러 오정때만 되면 대문 앞에 와서 왜장을 치고 있는 늙은 집금인의 꼬락서니가 하도 아니꼽고 동리 사람 보기에도 창피한 일이라 집세만은 태꺽 물어 주어야만 할 형편이었다.
여느 때 같으면 일문이의 아내 혼자서라도 바느질품도 팔고 금붙이 나부랭이라도 간간이 팔아넘겨서 그달 그달 집세만은 떡치듯이 물어 왔을 것이다. 그러나 일문이가 중병으로 입원했다가 나오게 되매 잔뜩 파리해진 몸을 가꾸기도 해야겠고, 일문이 없을 때 모양으로 콩나물죽과 된장찌개만으로는 지낼 수 없었다. 그러자니 돈이라고 손에 닿기만 하면 그 당장에서 녹아 버리고 집세는 생각에도 떠오르지 못했다.
그러다가 전날에도 집금인이 와서 으레 하던 버르장이로 왜장을 치고,
"정 뻔뻔하게 뱃심만 부릴 테면 명도 신청이라도 할 테니 그리 알우."
하고 땅땅 울리자 일문이는 빚진 죄인이라 쥐구멍이라도 찾을 듯이 하며,
"내일 오정쯤 해서 오시구려."
하고서야 겨우 집금임을 돌려보냈다.
막상 장담은 이렇게 해놓았으나 밤새도록 궁리를 해보아도 이렇다할 방책이 서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 일문이는 생각다 못해 재봉침질을 하고 있는 아내에게,
"할 수 없으니 재봉틀이라도 전당에 넙시다."
하고 옆에 있는 어머니의 눈치도 살피었다.
그러나,
"아이고 야야 이거라도 없으면 입에 풀칠은 어떻게 한단 말이냐?"
하고 어머니가 불에 덴 사람같이 질겁을 하자, 아내까지가,
"설마 사람 사는 집을 허물기야 하리라고요?"
하며 뱃심을 부리는 데는 어이할 수도 없었다.
그래 결국은 전날 밤에도 생각은 해놓고 차마 실행에까지 옮기지 못하고 있던 것을 할 수 없이 택하게 되었다. 그것은 한고향 친구요 보통학교 중학교에까지 같이 다니었던 친구를 찾아가 볼까 하는 것이었지만, 남에게 아쉰 소리 하기를 죽기보다도 싫어하는 일문이로서는 퍽으나 주저하였던 것이다. 이 친구란 바로 일년 전에 부친상을 당한 관계로 일천 석 가량의 재산 상속을 받아 가지고는, 경성에 와서 외입으로 돈을 물쓰듯이 하는 사람이었다.
일문이는 오정을 한 시간 남겨 놓고서야 집을 나섰다. 그전에 지내던 우정을 생각하면 금방 두 달 집세가 손에 잡히는 것 같았지만, 친구의 집이 가까워질수록 발이 무거워지고 뒤만 자꾸 돌아다보였다. 모처럼 아쉰 소리를 내었다가 헛물만 켜면 어쩌나 하고 미리부터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하였다.
친구는 일문이를 예상 이상으로 반겼다.
"이거 참 오랜만일세. 그란어도 내 먼저 찾어가 볼 것인데…… 원 이렇게 찾어 주니 미안하이."
하며 친구가 큰 소리로 반가워하자 일문이는 무엇보다도 자기의 바라고 온 것이 이루어질 것 같아서 마음이 한꺼풀 놓이었다.
일문이는 친구에게 손을 잡힌 채 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마작판과 바둑판이 어우러져서 마치 어느 집회의 오락장만치나 떠들썩하였다. 그리고 최(崔)라고 하는 친구도 있었다. 마작에 홀딱 빠져 가지고 있다가 일문이가 알은체해서야 그는,
"응 자넨가? 참 잘 왔네. 자네 오랜만에 바가지 한번 써볼라는가?"
하며 수다스럽게 웃는다.
이 최는 일문이가 M중학교에 있을 때, 책상을 나란히 놓고 있던만큼 말동무로서 친해 가지고 나중에는 자별한 사이가 되었다.
친구는 두서없이 이말 저말을 일문이에게 묻기도 하고 자기가 벌여 놓고서는,
"일문이, 지금 북삼(北三)이니까 잠깐만 기다리게."
최는 혼자말하듯 하고,
"펑―"
하며 소리를 지르더니 다시 이어서,
"오―라잇 만관."
하며 신이 나는 듯이 마작 상을 한번 친다.
일문이는 친구와 이야기하면서도 돈 말을 어떻게 낼까 걱정스러워서 벽에 걸린 시계만을 이따금씩 쳐다보곤 하는데 마작이 한짱〔一莊〕끝났다.
"일문이 자 한짱 하드라구."
하며 최는 일문이를 향해서 돌아앉았다. 같이 마작하던 다른 사람들도 일문이 보고 들어 끼라는 듯이 자리를 비워 놓는다.
"난 싫네. 담뱃값이나 잔뜩 벌어 두게."
일문이는 더욱 뒤로 물러앉으며 시계를 보니 벌써 한시 반이었다.
"나도 할 테니 함께 하드라구."
하며 이번에는 친구가 손목을 잡고 끄는 데는 뿌리칠 수도 없었다.
일문이는 동경에 있을 때부터 오락이라고 아는 것은 마작뿐인지라 마작 상머리에 앉기만 하면 그렇게 나던 흥도 어디로 사라지고, 여전히 돈 말을 할 궁리만이 머릿속에서 오락가락하였다.
어떤 때는 넋잃은 사람 모양으로 있노라면,
"이 사람이 빨리 하잖고……?"
하고 최가 소리를 크게 지르는 것이었다.
그러면 일문이는 엉겁결에 패를 함부로 버리다가 물기는 혼자 하였다. 그래 결국은 반절쯤 하고 일문이의 초우마가 모두 떨어져서 중판을 미었다.
"자네 역사 지식도 마작만치나 잊어버렸다면 십 년 공부가 나무아미타불이겠네그려."
하며 최는 피곤한 듯이 기지개를 피면서 웃었다.
일문이는 말대꾸할 정신도 없이 속으로 몇 번이나 주저하다가,
"잠깐 조용히 할 말이 있는데."
하고 주인 친구의 어깨를 짚었다.
"그럼 딴 방으로 가지."
친구는 따라오라는 듯이 방문을 열고 나갔다.
대청 건너의 두 간 방은 몸뚱이가 금방 오그라지는 것같이 썰렁하고 방바닥은 얼음장 같았다.
"무슨 말인데?"
친구는 갑자기 엄숙해진다.
"급히 쓸 데가 있어 그러니 이십 원 가량 좀 못 되겠는가?"
"뭣 요새 돈이 여간 귀해야지."
친구는 대답을 미리 준비해 둔 듯이 재빠르게 내놓았다.
"자네가 돈 귀하다면 우리야 벌써 죽었겠네."
일문이는 약간 웃어 보였으나 맘자리는 몹시도 불안하였다.
친구는 없는 돈을 만들어서라도 주려는 듯이 눈을 깜박거리며 무엇을 생각하더니,
"현재 내게는 한푼 없네만 어디 안에나 들어가 보세."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 속이 춥기도 하려니와 기다리는 동안, 일문이는 조급한 마음으로 몸이 떨리었다. 얼마 후에 친구는 먼저보다는 좀 보드라워진 얼굴로 들어오더니 돈 십 원 한 장을 내어 들었다.
"이것밖에는 지금 없네. 금년사 말고 흉년이 들고 보니 돈이 여간 귀해야지."
하고 친구는 입맛을 다시었다.
"이거라도 생광 있게 쓰겠네."
하고 십 원 지폐를 안주머니에 넣기는 하였으나 모자라는 육 원을 어떻게 채우나가 걱정이었다. 또 다른 데에서 꾸어 볼까 했으나 마땅한 자리도 없었다. 다만 일문이는,
'이왕이면 한 사십 원이나 말해 볼걸.'
하고 이번에야 돈 있는 사람의 버릇이란, 으레 반절 이상은 에누리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문이가 최와 함께 친구의 집을 나온 때는 밤 아홉시나 지나서였다. 친구한테서 돈을 얻었을 때는 늙은이가 벌써 다녀갔을 것이고 또 친구가 한사코 말리는 것을 거절할 수도 없어 흥청거리는 분위기 속에서 저녁밥까지 때려먹고 궁둥이를 떼었다.
하늘은 눈으로 만삭이 되었는지 무겁게 보이고 얼굴로 치닿는 바람은 코 속을 맵게 쏘았다.
일문이는 책점 앞을 지날 때 신간 서적의 광고가 울긋불긋 붙어 있는 것을 보자마자 갑자기 비위가 당기었다. 이왕 집세 두 달 분이 못 되는 바에야 한 달 분을 제한 나머지로 신간 한 권이라도 사고 싶었던 것이다.
《중앙공론》을 사들고 책점을 나오니,
"일문이 꼭 할 말이 좀 있네."
하고 최가 일문이 옆으로 바싹 붙어서 걸었다.
"자네 교장한테는 자주 댕기나?"
최가 밑도끝도없이 이렇게 묻는 데는 필연코 무슨 곡절이 있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자 일문이는 갑자기 맘자리가 죄어들었다.
"왜 그래?"
"아니 글쎄 병원에서 나온 후로 교장 댁에 더러 갔었드냐 말이야."
"집으로는 한 번 갔었고 학교에서는 두서너 번 보았지."
"허허― 사람도…… 그래 교장 댁으로는 한 번밖에 안 갔단 말이지?"
일문이는 더욱 궁금하였다.
"글쎄 왜 그래? 좀 말을 하게."
"참 사람도 딱하지. 아 자네 형편으로는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찾아댕겨야 할 게 아닌가?"
최의 말에 일문이는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너털웃음을 쳤다.
"아니 웃긴 왜 웃어?"
"글쎄 뭣 하러 자꾸 찾어댕긴단 말야? 학교에나 가끔 놀러 가고 기다리고만 있으면 될 것을, 빚쟁이 모양으로 찾어댕길 게 뭐 있단 말인가? 만일 우리 교장이 요즘 돈푼이나 있고 지위깨나 있는 사람처럼 앞에 와서 굽실거리고 아첨하는 걸 좋아한다면 모르지."
그러니 최는 속짐작으로 생각할 때 일문이의 태도가 너무도 철없이 보이고 가엾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
"허기야 교장이 그런 걸 좋아한다더라도 내게 그러한 농간이 생길는지도 의문이지."
"흥 자네도."
최는 이렇게 혼자말을 하듯 하고 다시,
"아직 배가 덜 고프니깐 하는 말이야. 배만 고파 보소. 어디 무슨 일인들 못 하겠나? 옛날의 백이숙제도 결국은 굶어 죽었거든."
하는 것은 빈정대는 태도였다.
그러나 일문이는 최의 이렇게 하는 말이, 그의 아첨한 근성을 차차로 드러내는 것 같아서,
"자네도 제발 청렴한 사람이 좀 되게."
하고 퉁명스럽게 쏘아 댔다.
"뭐 청렴한 사람이 되라구?"
최는 일문이의 말에는 전혀 무감각인 듯이 도리어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날보고 청렴한 사람이 되라구 하면, 그 대신 나는 자네보고 너무 외골시고 고지식한 성벽을 떼버리라고 강제하고 싶네. 글쎄 자네가 딱한 사람이지…… 이놈의 세상이란 노예 근성이 있어야 하다못해 똥통이라도 끈단 말일세."
사람의 입에서 어떻게 이런 말이 나올 수 있는가 하는 듯이, 일문이는 최의 입을 멍하니 쳐다보며 걸었다.
일문이가 M학교 교장을 자주 찾아다닐 것도 없이 취직이 확실하다고 믿는 데는 상당한 근거가 있다.
일문이가 와세다 대학의 지력과를 졸업했을 때이다. 재학시대의 성적이 남보다 훨씬 뛰어났고 또 그를 특별히 귀여워하는 교수의 반연(攀緣)으로 경성 어느 공립중등학교로 하등의 난관도 없이 내정되었었다. 그러나 일문이는 자기의 성격을 돌아볼 때 공립학교에서 틀에 박아 논 것 같은 관리생활을 하기는 너무도 엄청난 거리가 있었다. 그는 보통학교부터 대학까지 사립학교의 분위기 속에서 닦달여진 까닭인지 밥값만 되더라도 사립학교에 있었으면 하고 공립학교를 주저하여 왔다. 그러던 중 하루는 M학교 교장이 몸소 일문이의 하숙을 찾아왔었다. 두 사람은 그전부터 잘 알고 지냈던 터인만큼 교장은 일문이의 학식과 사상이 가장 자기의 마음에 흡족하니 같이 손을 잡고 나가자는 것을 간청하였다. 여기에 일문이는 오히려 감격의 눈물을 머금고 쾌락하였던 것이다. 말하자면 고용관계라는 것보다도 동지적 결합이었다.
그런데 일문이가 교편을 잡은 지 채 일년도 못 되는 작년 일월에 폐가 약해서 장기간을 작정하고 입원하였다.
교장은 일문이를 놓기가 아까워 퇴원할 때까지 임시 교원을 채용하였다. 일문이는 열 달 만에 퇴원하였으나 완전한 건강 회복도 기다리기 겸 또 임시 교원이 삼학기까지 계속하여야 할 필요로 신학기만을 기다리게 되었다. 일문이가 석방되어 나와서 교장을 찾아가 보았을 때 교장 자신도 이렇게 언명했으니 복직 문제는 신학기가 돌아오느냐 안 돌아오느냐 하는 문제뿐이었다.
일문이와 최는 언약이나 한 듯이 무언중에 안국동 네거리에서 종로를 향하고 내려 걸었다.
일문이는 걸어가면서 생각하였다. 내년 사월만 되면 지금부터 벼르고 있는 어머니의 기쁨―---네가 직업을 붙들면 내 춤 한바탕 출 테다 하는 것이 실현된다는 것과 또 순진한 학생들이 자기의 사랑과 사상에 아버지같이 형님같이 따를 것을 새삼스럽게 생각하자 지금까지의 불쾌한 감정도 스르르 사라지고 경쾌한 기분으로 돌아섰다. 그래 그는 친구의 어깨를 넓적한 손으로 덥석 누르면서 보드랍게 말을 내었다.
"여보게 자네가 내 일 때문에 꽤 걱정하는 모양이네. 뭐 그럴 것 있나? 괜히 이남박 되리. 교장이 내 믿는 사람이고 또 학교가 나 있었던 곳인데……."
일문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최는,
"또 그 담엔 뭣이겠나?"
악센트를 멋있게 붙여서 말하고 고개를 일문의 편으로 홱 돌리면서 빙긋 웃는다.
"또 나 있던 자리가 명춘엔 빌 것이고."
"참 좋다. 또 그 담에는?"
"또 있지. 날 환영회 열 것이고."
"흥 얼시구…… 또?"
하며 최는 흥이 난 고수(鼓手) 모양으로 고개를 끄떡하였다.
"또? 환영회 때는 난쟁이 댄스가 있을 것이고."
"에끼……."
최는 일문이의 등을 찰팍 쳤다. 학교 직원간에서 부르는 자기의 별명이 난쟁이었던 것이다.
최는 일문이가 신학기만 되면 복직될 것을 퍼논 밥과 같이 믿고 이렇게까지 즐거워하는 꼴을 볼 때 차마 그의 맘자리를 건드릴 수가 없었다. 그래 입을 열까말까 하고 걸어오다가 전등시장 앞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입을 열었다.
"일문이."
"응?"
대답하는 일문이의 말소리에는 아직도 유쾌한 맛이 흐르고 있었다.
"아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고 교장을 너무 믿다간 중도 속도 못 되리. 지금 자네는 경쟁자가 생긴 줄을 모를걸."
진정한 태도로 이렇게 말하니 일문이는 가슴이 뭉클하여졌다. 그는 발을 멈추고,
"무엇 경쟁자?"
"이 사람 너무 놀랐다간 졸도하네. 자 걸으면서 말하지."
하고 최는 일문이의 외투 소매를 끌었다.
"아마 유월 하순이나 칠월 중순쯤 될 것이네. 이때부터 와세다 지력과를 마쳤다는 자가 교장 댁을 상당히 들랑거리는데 관청의 배경도 상당한 모양이데. 학교에도 가끔 비치는데 교장도 무던히 친절하게 대하더군. 그런데 말야 그 작자 쥐뿔이나 뭣 하나 알겠던가? 꼭 노가다 놈같이 생겨먹었는데 왜 요전에는 구주전쟁(歐洲戰爭)을 오주전쟁이라고 하데그려."
하며 최는 두 어깨를 들먹거리며 웃었다.
일문이는 '와세다'라는 데에 귀가 더욱 뜨였다.
"대관절 그자의 성명이 뭣이던가?"
일문이는 풀기 없는 다리를 고무다리 끌듯이 하면서 물었다.
"이름은 모르되 성은 아마 정가라지? 하여튼 놈 체격이 유도쟁이 같고 이마가 유난히 넓은데다가 입은 꼭 하마 아가리만치나 크데그려."
일문이는 최의 말을 종합해 볼 때 그 사람이 정춘만(鄭春萬)인 것이 틀림없었다. 그래 일문이는 정춘만이가 자기보다 이 년 후배라는 것과, 재학시대 여러 가지 의견이 대립되어 상당한 알력이 있었다는 내력을 대강 이야기해 주었다.
"이러니 자네도 생각해 보소. 그까짓 인물을 우리 교장이 교원으로 채용할 것인가를…… 아마 다른 친분으로 다니는지 누가 아나."
"흥 그러니까 아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고 허잖던가."
"만일 그렇다면 결국 교장 자신에 큰 변동이 생겼단 말인가?"
"맞었네 맞었어. 인제 교장도 그전과는 전적으로 달러졌다네. 참 사람 속이란 게 믿을 수 없는 것이지. 요전 추석 때 일이네. 교장 댁에서 교원들 저녁 대접을 한다고 하기에 가잖었겠나? 거의 얼큰하게 취했을 땐데 마침 그자가 꼭 자기 방이나 되는 듯이 성큼 들앉더니 함께 주거니 잣거니 술을 먹게 되었지. 얼마 후에 방에는 교장과 교무주임과 그자 세 사람만이 남어 있고, 우리는 그만 나와서 나허고 김선생 채선생은 제이차로 오뎅집 마와리(순례)를 하게 되었네."
하고 최는 기침을 커다랗게 내놓고서 다시 말을 계속한다.
"아마 그때가 열두시는 됐을 거네. 우리 세 사람이 명월관 앞을 지나려고 할 때, 자동차 한 대가 우리 앞을 딱 가로막고서 명월관으로 들어가데. 그 속에는 바로 교장과 교무주임과 그자가 아주 곤드레만드레가 되어 있었단 말야."
일문이는 이보다 더 중대한 사설을 들을 줄 알았던만큼 그는,
"그래 어쨌단 말인가?"
하고 싱겁다는 듯이 입맛을 다시었다.
"아 글쎄 교무주임은 모주 병정이니까 공술이라면 배를 두드려 가면서라도 쫓아다니겠지만 교장이야 너무도 변했단 말일세. 자기 아들보다도 젊은 놈, 더구나 자네 말마따나 그런 놈과 취해 가지고 요릿집 출입을 한다는 것은 딴 관계가 있을 게 아닌가?"
"음 그렇기도 하지."
하고 일문이는 고개를 끄떡이었다. 그리고 흥분이 되어 갈수록 전신이 굳어지는 것 같고 얼굴이 화끈거리었다.
"그리고 오카다(岡田) 선생이 이야기하는데 정춘만이라는 자가 자기한테 와서 앞으로 함께 있게 될는지도 모르니 잘 지도해 달라는 둥, 자네 평판이 어떠냐는 둥 그리고 몇 학년 맡는 것이 편하느냐는 것 등을 잔뜩 떠벌려 놓더라네."
일문이는 이 이상 더 물을 필요가 없이 모든 것이 머릿속에 번개같이 떠올랐다. 철석같이 믿었던 교장이 하고많은 사람들 중에 하필 정춘만이와 야합하게까지 되었나 하고 생각하면, 정신이 아득할 뿐, 옳고 그른 판단조차 내리기가 싫었다. 천 길 만 길의 수심(水深)은 알아도 단 한 길 되는 사람의 심사는 모른다더니 과연 진리구나 하고 새삼스럽게 느끼었다.
일문이는 우선 당장 정춘만이한테 자기의 자리를 뺏기게 되어 생활상의 곤란을 받게 된다는 것보다도, 교장의 표변한 태도가 더 가증스러웠다. 생각할수록 눈앞이 씸벅거리고 두 주먹이 쥐어졌다.
"에잇 더러운 자식!"
하고 그는 전차 선로가 교장이나 되는 듯이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이 사람 그렇게 흥분만 할 것이 아니라 대책을 강구해야지. 교장도 도척이 아닌 담에야 자네의 딱한 사정도 알고, 또 자네의 자격이야 충분히 알고 있지 않은가? 정춘만에게 사령장이 나온 것도 아니니 어서 시급히 서둘러 보소. 그저 별수없느니 지금 세상에 주는 것 싫다는 놈은 아예 없을 게니 과자 상자라도 사가지고 다니면서 매달리란 말이네."
최는 이 말이 끝나자 동대문행 전차가 종로 네거리 정류장에 다 오니,
"자 그럼 내일 만나세. 별생각 말고 내 말대로만 해요."
하고 전차로 뛰어 달아났다.
일문이는 최의 가는 것을 쳐다보지도 않고 그저 무거운 걸음을 종로 일정목으로 옮길 따름이었다.
이따금 인왕산을 스치고 불어오는 바람은 종로 거리를 비질하듯 휩쓸었다.
이 통에 마스크도 걸지 않은 일문이는 숨이 칵칵 막힐 지경이었다.
"이걸 어떻게 할까?"
이번에는 의분에서 느껴지던 흥분이 자기의 개인 사정으로 변하여 졌다. 만일 학교가 틀리는 날이면 자기 자신의 곤란은 물론 신학기만을 까막까막 기다리고 있는 어머니와 아내의 정상(情狀)이 가긍스러웠다. 자기 한몸의 뒤치다꺼리를 위해서 살점이라도 바치겠다고 정성을 드리는 어머니와 아내에게 대해서, 너무도 몰인정한 인간, 죄인이 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M학교의 어린 학생들. 일문이가 퇴원한 후 거의 전반 학생이 오다시피 해가지고 이구동성으로,
"선생님 우리 학교는 언제 오세요?"
"선생님 얘기 듣고 싶어 꼭 죽겠어요."
하고 어리광을 부리고 응석을 떨던 어린 동무들을 저버리는 것만 같았다.
최가 구십 원짜리 월급쟁이로 천여 원의 저금이 있고 또 학교 외교를 맡아보아서 별로 실패가 없는 것이, 오직 최의 아첨한 수단으로 된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매 일문이는,
"최의 말대로나 해볼까?"
하는 맘도 났다. 그러나 과자 사러 화신상회나 갈까 하면 웬일인지 다리가 되돌아서지를 않았다.
일문이는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터벅거리며 걸었다. 그가 C경찰서 앞을 지날 때 앞서서 두 다리를 쭉쭉 펴서 달아나는 사람이 있다.
그가 장(張)이라는 친구인 것을 알아채자 일문이는,
"여보게."
하고 불렀다.
장은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서서 일문이가 부르는 것을 알고서야,
"난 누구라구."
하며 역시 급한 걸음으로 온다.
"자네 어딜 그렇게 급히 가나?"
"말 말게. 오늘 아침부터 장안을 다 더듬어도 허탕일세 허탕."
"무슨 일인데?"
"내가 민준식에게 자리 하나 부탁허잖었는가? 그런데 내일이 그자의 생일이라 적어도 이 원짜리 과자 상자라도 선사를 해야겠는데―---"
하며 장은 추운 듯이 손등을 싹싹 비볐다.
"에잇 미친 사람, 자네의 궁한 형편을 빤히 알 텐데 안 하면 어쩌겠나?"
"아냐, 네가 모르는 소리야. 세상 물정이란 공으로는 안 되는 모양이데그려. 그래 지금 마지막으로 아는 여자를 찾어가는 길이네. 안 되면 빌어먹을 것 입은 속옷이라도 벗겨 버릴 테야."
"놈 배짱도 유허다."
"허허허 별수 있나."
장은 속시원하게 웃어 젖히더니 할 말 다 했다는 듯이 발을 떼어 놓았다. 장은 민준식의 집에서 가정교사로 있다가 나온 후로는 먹을 것이 궁하면 친구의 밥도 뺏어 먹고 잠자리가 없으면 친구의 이불 속으로도 기어들고 또 어떤 때는 친구의 책도 간간이 잡혀먹곤 하였다. 그렇다고 그를 욕하는 사람은 없었다. 어쨌든 장과 같은 낙천가가 이 원짜리 과자 상자를 선사 못 해서 쩔쩔매고 다니는 것을 보자, 일문이는 최의 줄기찬 권고보다도 더한층 강한 충동을 받았다.
"별수없다. 우선 자리만은 붙들어 놓고 볼 일이다."
일문이는 혼자서 발을 구르며 굳은 결심을 보였다. 그는 화신상회의 문 닫힐 시간이 되었다는 것을 짐작하자 정류장 하나 사이에서 전차를 잡아탔다. 예측한 바와 같이 손님들은 연달아 몰려 나오고 진열품에는 종이를 덮고 있는 중이었다.
"시간이 지나서 안 돼요. 계산대에도 암두 없으니 내일 오세요."
여점원은 일문이를 보자 기다랗게 그린 눈썹을 꿈틀거려 찌푸리면서 몰아낼 듯이 서둘렀다.
그러나 일문이는 이때가 아니면 영영 못 살 것같이 악다구니까지 쳐가면서 기어이 칠 원짜리 한 상자를 샀다. 과자 상자를 노시가미(선물 포장용 종이)로 싸고 하도롱 종이로 또 한 겹 싸고 있는 점원에게 일문이는 과자의 이름을 물었다. 진열한 지 다섯 달 동안 한 번도 안 팔려서 이름은 모르나 하여간 불란서 명산이라고 하였다.
일문이는 과자 상자를 옆에 끼고 상점을 나서니 혼란했던 머릿속도 잔잔하여지고 몸도 거뜬하여졌다.
그러나 그는 자기 집 대문 앞에 이르자,
"쳇."
하고 대문 판자를 뚫을 것같이 노려보았다. 그것은 언제든지 대문에 붙어 있는 '내재봉(內裁縫) 하오'라는 표딱지를 보기만 하면, 으레 하는 버릇인데, 이것이 이날 밤도 옆집 양옥의 외등으로 환하니 비치었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못마땅하게 여기면서도 '이것 밥통인데' 하는 생각으로 표딱지를 떼어 버리지는 못하였다.
일문이가 대문을 삐걱 열고 들어서자,
"인제 오세요?"
하며 아내는 지켜 섰던 것같이 달려나와서 상자를 받아 들고 방으로 들어간다.
"아이고 오늘 밤도 꽤 춥고나, 어디서 지금 오니."
하며 어머니도 건넌방에서 나온다.
"방이 차지는 않을까 모르겠다."
그 어머니는 아랫목에 깐 요 밑에 손을 넣어 보기도 하고 아들의 손등을 만져 보기도 한다.
일문이가 직업을 쉬게 된 뒤로, 모진 고생을 하여 오지만 어머니와 아내는 한 번인들 일문에게 불쾌한 꼴을 보이지 않으려고, 그 앞에서 맘에 없는 웃음이라도 짓는 것이었다. 이날도 오정 후에 늙은 집금인이 와서 갖은 포악을 다아 부리고 갔지만 일문에게는 털끝만한 눈치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어머니와 아내의 얼굴과 딱 마주치고 보니 이날 하루의 경과가 몹시 궁금하여지면서 큰 죄나 범한 것같이 기가 죽어졌다.
"늙은이 왔습디까?"
"어쩐 일인지 오지 않었단다."
보드라운 어머니의 말 대답. 일문이는 다만 '이상한 일이다' 하고 생각하는 판인데,
"이리 오너라."
하는 혀꼬부라진 소리가 대문 밖에서 험상스럽게 났다.
일문이는 도적질하다가 들킨 사람 모양으로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이고 저 늙은이가 야밤중 웬일일까."
하며 어머니는 빨리 나가더니,
"오셨습니까?"
하고 공손히 인사를 한다. 그러나,
"네 왔소. 왜 밤중에 와서 못 쓰겠소?"
하는 소리는 거칠고 아니꼬웠다.
일문이는 분을 못 참아 전신이 사시나무같이 떨리었다. 참다못해 그는,
"거 어떤 놈이냐?"
하고 소리를 지르며 방문을 차고 나갔다. 일문이는 몸을 돌부처같이 꼿꼿이 버티고 집금인 앞에 섰다. 집급인한테서는 술 냄새가 훅훅 풍기었다.
"어―라, 젊은 자의 기세가 당당한데."
늙은이는 상체를 비틀거리면서 벌끈대었다.
"어째서 한밤중 남의 집에 와서 떠드는 거야?"
"뭣이 어째 남의 집이라구? 하하하, 집세를 척척 내고서야 헐 말이야. 이건 버젓한 ××은행 집인 줄 모르는군? 참 세상에…… 아니 그런데 오늘 오정때 오라던 사람이 그래 하루 종일 어디 가서 숨었더냐 말야? 아주 남의 집세 떼먹기로는 이골났는걸."
늙은이는 이렇게 말하는 데에 어떤 흥미를 느끼는 듯이 단장을 휘두르며 발을 놀리며 하였다.
"영감님 약주 깨시면 내일 오시구려."
어머니는 금방 큰일이나 터질까 보아서 허둥지둥 말하였다. 일문이 아내는 무서워서 오돌오돌 떨고만 있었다.
"돈 받을 것이 있으면 대낮엔 못 오? 늙은 자라도 심보가 고와야해."
하고 일문이는 이를 앙당그레 물고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어째 늙은 자? 에끼 후레자식놈 같으니, 넌 네 애비도 없이 생겼단 말이냐? 원 발칙스런 놈도 다 있다."
하며 늙은이는 단장으로 삿대궁질을 한다.
일문이는 단장을 화닥닥 뺏어 가지고는 무릎에다 대고 와지끈 분질러서 팽개질을 쳤다.
"누게다 삿대궁질을 하는 거야?"
"아―니 이런 놈이 다 대학을 졸업하고 중학교 교사란 말야? 차라리 똥버러지를 모아 놓고 교사질을 해먹으련."
하는 늙은이의 말소리는 확실히 먼저보다 기세가 죽어지고 한풀 꺾이었다.
부근의 이집 저집에서는 들창문을 열고 내어다보며, 구경꾼도 차차로 모여들었다. 일문이는 분김대로만 하면 늙은이를 둘러메치어 개구리 죽음이라도 시키고 싶었으나 동리 사람들이 부끄러워서,
"어디 내일 좀 두고 보자."
하고 엄포를 하며 대문을 걸어잠갔다.
"옳지 내일 보자. 네놈이 이 집을 안 내어놓고 견디는가?"
늙은이 역시 별로 성구지를 않고 이렇게 혼자 중얼거리고는 돌아섰다.
어머니는 방 안에 들어오자,
"없이 살으니까 별놈이 다아 깐을 보고……."
겨우 말을 맺더니 옷고름으로 두 눈을 작근작근 누르면서 속으로 느껴 운다.
아내는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느라고 얼굴을 찌푸리고 눈을 어지럽게 깜작이고 있다. 방 안은 무덤 속같이 고요하고도 서글펐다.
일문이는 가난의 고통을 이때만큼 느껴 본 적은 없었다. 살인 강도가 어려울 게 뭐 있단 말인가 하고 무서운 생각도 언뜻 났다. 그는 분함과 비애를 억제하느라고 아랫입술을 윗니로 깨물면서,
"울긴 왜들 울우?"
하였으나 가슴속은 전기를 통한 듯이 찌르르 울리었다.
일문이는 새벽까지 잠 한잠도 못 자고 고민하다가 잠깐 눈을 붙이고 깨어난 것이 전등불이 나간 훨씬 후였다. 눈을 어렴풋이 뜰 때 정면으로 보이는 것은 책상 위의 과자 상자였다. 그는 못 볼 것이나 본 것같이 눈을 다시 감았으나 과자 상자는 더욱 분명한 환상으로 머릿속에 떠올랐다.
'내가 미친놈이다.'
그는 혼자말을 하며 베개 위에서 머리를 쌀쌀 흔들었다. 가격이야 많건 적건 과자 상자를 사기까지의 자기 행동이 퍽으나 불가사의하고 추잡하였다.
'차라리 과자 상자나 안 샀더라면 어젯밤 망신은 안 당했지.'
간밤에 늙은이와 다툰 일까지가 피어오르면서 머릿속은 다시 난마(亂麻)로 되었다. 그는 주먹으로 방바닥도 쳐보고 이불을 차서 발밑에 뭉크려 보기도 하였다.
과자 상자의 힘을 빌려서 M학교 교장과 가까워지려고 한 자기의 행동을 일문이는 따져 보았다. 신의와 의리를 헌신짝같이 집어던지고 오직 재물과 명예만을 위해서 생명을 바치려는 무리들―---일문이는 이런 무리를 생각만 하여도 자기 몸뚱이 한 부분이 깎여 들어가는 것만치나 아프고 불쾌하였다. 그렇던 자기 자신이 그런 구덩이에 빠지다니? 더구나 M학교 교장은 자기 개인을 배반하고 보다 큰 세계를 배반한 자가 아니냐? 과자 상자는 확실히 자기 파멸이고 자기 모욕을 의미한다고 일문이는 생각하였다. 그는 기계적으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자기와 꼭 같은 사람이 그 자리에 있으면 같이 부둥켜안고 울고도 싶었다. 선물 선사란 건 무엇이냐? 오직 정을 나누는 표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니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즉 선물이란 깨끗한 정을 표하는 것이라는 데서 그것은 무도 아니다. 그러나 깨끗한 정을 표시하는 선물이 있다 해도 일정한 양정(量情)에는 변화가 없으니까 그것은 유도 아니다. 반면에 남의 호감을 사기 위한 선물은 그 속에 독사의 혀가 백청(白淸)에 잠겨 있을 뿐이다.
이렇게 생각한 그는 어떤 위대한 원리나 발견한 듯이 기뻤다. 그러나 이것은 불과 이삼 분 동안의 일이었다. 일문이는 한참 동안 넋없이 과자 상자를 바라보더니 상자의 하도롱 종이를 벗기고 노시가미를 찢어 버리고 뚜껑을 열어 젖혔다. 그 속에는 금색의 종이실의 얼키설키한 속에 우유 빛깔의 과자가 있었다. 일문이는 전날 밤 만난 장이라는 친구에게 과자 상자를 주어 생광 있게 쓰게 할까 하고 생각도 해보았다. 그러나 역시 자기가 M교장에 주는 것과 꼭 같이 사용될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매 차라리 그 친구한테 도적을 맞을지언정 자기 손으로 갖다 줄 수는 없었다. 그는 자기의 생활 형편에 너무 과분한 일이지만 식구끼리 나누어 먹을까 하고 연 것이다.
일문이는 아침밥의 숟갈을 놓던 길로 집을 나섰다. 언제까지나 미적끈하게 있을 것이 아니라 교장을 찾아가서 좌우간의 판단을 맺자는 것이었다. 일문이는 복직에 대한 애착을 청산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나 무엇보다도 교장의 현재한 인간을 최후로 뜯어보고 싶었다.
의전병원 입구에서 전차를 내려 총독부의 담을 끼고 삼청동으로 올라갔다.
그는 걸음을 한발 두발 걸어 놓을 때마다 기운나는 것이 신기스러웠다. 팔판동을 지나 왼편 골목으로 한참 올라가다가 바른편의 샛골목으로 굽었다. 골목의 막바지가 교장의 집이었다.
일문이는 땅만 보고 걷다가 무심코 고개를 들으니 앞에서 어떤 청년 하나가 단장을 휘두르면서 걸어오고 있다. 키는 휘먼정하고 딱벌어진 가슴은 그 앞에 무엇이든지 부딪칠 것 같았다. 차차로 가까워지는 데 따라서 그 청년이 부는 휘파람 소리는 분명히 들렸다.
'별 싱거운 놈도 다 있다.'
하며 일문이는 걸었다. 그러나 그 청년과 가까워지자 그는 아니 놀랄 수 없었다. 그는 정춘만이었다. 그러나 일문이는 태연한 표정으로 그와 마주친 시선을 거둘 것도 없이 그대로 걸어서 지났다. 정춘만이도 일문인지를 알았는지 시선이 마주치자 무춤하더니 그대로 걸었다. 일문이가 고개를 돌려보니 그는 대문짝만한 어깨를 좌우로 흔들고 단장으로 공중에 원형을 그리면서 걷는다. 휘파람 소리는 여전히 흥이 뚝뚝 흐르는 모양이었다.
'흥 교장을 만나고 오는 게구나. 취직도 확정된 모양이지.'
이렇게 일문이는 속으로 중얼댔으나 자기가 취직운동을 주로 하고 가는 길이 아닌 이상 주저할 것 없이 걸음은 더욱 빨랐다. 여느 때와 같이 하인을 찾아서 명함을 전하는 수속을 밟을 것도 없이 자기 집에 들어가듯이 솟을대문을 지나 중문 안으로 쑥 들어섰다.
교장은 방금 정춘만이와 작별을 하고 난 뒤인지 또는 아침밥을 내리려는 운동인지 복도 마루에서 뒷짐을 끼고 왔다갔다하고 있다.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일문이가 시멘트의 뜰 위에 올라서서 인사를 할 때에야 교장은 뒷짐을 낀 채로,
"참 오랜만이오."
하고 고개를 까딱한다.
"자 올라오시오."
라고 말만 하고서 교장은 일문이가 마루에 올라서기를 기다릴 것도 없이,
"오남아―---"
하고 점잖게 목소리를 빼었다.
심부름하는 아이가 대답할 사이 없이 뛰어오자 교장은 동쪽 마루편 끝을 손으로 가리키었다.
"저런 걸 봤으면 대뜸 들여가야지."
하고 교장은 호령하듯 한다.
이때에야 일문이도 그쪽을 돌려보니 높직한 과자 상자 같은 것이 두 개나 포개어 있었다. 심부름꾼 아이가 대답 대신으로 허리를 굽실하더니 그것을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들고 일문이 앞을 지나간다. 이 때 일문이는 상자 위에 꽂혀 있는 세탁 주문 다니는 사람의 명함과 같이 큼직한 정춘만의 명함을 보았다.
"어서 올라오시오."
하고 교장은 먼저 방으로 들어간다.
일문이는 구두끈을 천천히 풀면서,
"더러운 인간들!"
하고 고소(苦笑)함을 마지 못하였다.
출전:신가정39(19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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