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시(古詩) 8
by 송화은율고시(古詩) 8
제비 한 마리 처음 날아와
지지배배 그 소리 그치지 않네.
말하는 뜻 분명히 알 수 없지만
집 없는 서러움을 호소하는 듯
“느릅나무 홰나무 묵어 구멍 많은데
어찌하여 그 곳에 깃들지 않니?”
제비 다시 지저귀며
사람에게 말하는 듯
“느릅나무 구멍은 황새가 쪼고
홰나무 구멍은 뱀이 와서 뒤진다오.”
요점 정리
지은이 : 정약용
연대 : 조선 후기
갈래 : 한시, 오언 고시
성격 : 풍자적, 우의적, 현실 비판적, 상징적
어조 : 안타까움과 연민(憐愍)의 목소리, 부당한 현실을 비유적으로 고발하며 원망하는 어조
표현 : 우의적 표현, 시대 현실을 바탕으로 한 사실적 표현
제재 : 제비의 울음 소리, 집없는 제비의 탄식
주제 : 지배층의 횡포와 피지배층의 고통, 지배 계급의 착취와 횡포에 의해 집을 잃고 유랑하는 농민들의 고통
구성 : 그치지 않는 제비의 울음 소리 - 가난의 서러움을 호소하는 제비 소리로 추리 - 제비가 느릅나무·홰나무에 구멍에 들지 않은 모습 - 사람에게 말하는 듯한 제비 소리 - 제비의 울음의 원인이 되는 황새와 뱀
출전 : 다산시선
내용 연구
제비 한 마리 처음 날아와 : 여기서 제비는 관리들에게 수탈당하여 어려움을 겪는 백성들을 암시
집 없는 서러움을 호소하는 듯 : 백성들의 삶의 현실
“느릅나무 구멍은 - 뱀이 와서 뒤진다오.”: 지배 세력의 착취와 수탈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황새', '뱀'은 백성을 괴롭히는 권력층이나 힘이 있는 사람들을 암시하는 것으로 고려 시대 이제현의 '사리화'에서는 권력층이 '참새'로 비유되는 것에 비해 여기서는 '제비'라는 새가 약자인 백성을 상징하고 있고, 고사성어로 가렴주구(苛斂誅求)가 연상되는 대목이다.
연자(燕子) : 제비
남남( ) : 재잘거리는 소리, 글 읽는 소리로 여기서는 재잘 거리는 소리
무가수(無家愁) : 집이 없는 근심
유괴(楡槐) : 느릅 나무와 홰나무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정약용이 쓴 고시 27수 중 여덟 번째 수로 조선 후기의 시대상을 우의적인 수법으로 풍자한 시이다. 서정적 화자는 제비의 입을 빌려 약한 백성을 약탈하는 관리들에 대한 비판과 핍박받는 백성들에 대한 연민의 정을 은근히 드러내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황새와 뱀의 공격 때문에 집을 잃고 떠도는 제비의 고통을 나타내고 있지만, 사실은 당시 지배층들이 서민들을 착취하는 모습을 우화적인 수법을 동원하여 풍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시에 나오는 제비는 지배 세력으로부터 착취당하는 서민층을 의미하며, 황새와 뱀은 서민들을 괴롭히는 지배 세력을 의미한다. 다산은 그가 쓴 다른 글에서도 관리들의 약탈로 인해 백성들이 고향을 버리고 떠돌아다니며 살고 있는 당대의 현실을 여러 차례 고발하였다.
심화 자료
문학적 표현의 우의성(寓意性)
문학에서 인간 문제를 말하기 위해 자연 사물이 사용되는 경우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자연 사물이 사용된 이유는 인간과 사회의 문제를 작가가 직접적으로 말하기에는 사회적 분위기가 부담스럽거나 제약이 있기에 간접적 방법인 우의적 표현을 통해서 작가의 생각을 드러내고는 했다. '우의(寓意)'는 다른 사물에 빗대어 비유적인 뜻을 나타내거나 풍자하거나, 또는 그런 의미를 말하는 것으로 직접적인 문제 제시보다는 문학적 함축성을 높이고, 사회적 제약을 넘기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작가들이 즐겨 사용했다.
우리 나라 최초의 우의적 표현 수법을 쓴 작품은 삼국 시대의 설총이 지은 것으로 알려진 '화왕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꽃이나 다른 자연물을 통해서 작가의 정치적 견해나 다른 의사 표현을 쉽게 할 수 있고, 그 작품과 연관성이 있는 이들도 역시 직접적인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문학적 우의적 표현이 빈번하게 사용된 사회는 사회 체제가 봉건적이거나 독재적 체제일 경우가 높지만 무엇보다도 우의적 표현이 주는 간접적이고 함축적인 문학적 매력이 크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정약용(丁若鏞:1762∼1836)
조선 후기의 문인, 실학자. 호는 다산(茶山), 당호는 여유당(與猶堂)이다. 유형원(柳馨遠), 이익(李瀷)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여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했다. 그는 정조의 총애를 받아 수원성을 만들 때 설계를 맡기도 하는 등 여러 벼슬을 두루 지냈다. 그러나 정조가 죽자 서학(西學)과 관련되어 전라남도 강진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유배지에서 그는 학문에 힘써 철학적인 면에서나, 윤리, 정치, 경제, 사회, 과학, 문학, 음악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대표 저서로 『여유당 전서(與猶堂全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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