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성(高句麗城)을 찾아서-김명순
by 송화은율고구려성(高句麗城)을 찾아서
-김명순
어떤 자는 고구려성 옛 터를 찾아서 거닐며 우네
이것은 옛날 우리들의 할아버지가 사시던 곳
살다가 함락당하여 무너진 성의 자취라고
쓸쓸한 와편(瓦片) 헐리운 성벽 깨어진 솥 토기
이것을 한 낱 두 낱 주으며 우네
아아 쓸쓸타 참말
우리들의 할아버지가 계시던 곳 성이 이렇게 불붙고 무너져
끊기고 패이고 부서져 비에 씻기울 줄
부서져 이렇게 쓸쓸한 풀만 무성한 줄
이 풀 성한 고적을 거닐며 우리가 전설을 외우게 될 줄
외우며 옛 일을 그려 울게 될 줄!
그러나 벗이어 울지는 마세
우리는 힘을 내세
이것은 조상들이 ××를 위하여
이곳까지 왔다가 죽었다는 것을
우리는 비록 조상의 얼굴 그때에 흘린 붉은 피는 못 보았다할지라도
이 성에 널려있는 와편, 파편, 남아있는 비좌(碑座)로써도
넉넉히 우리 조상의 선혈이 묻혔다는 것을 알 수가 있네
자, 벗들아 파편을 줏으며 울기는 너무나 약한 짓이다
풀잎을 뜯으며 새소리를 들으며 흐르는 구름을 바라보며
전설을 되풀이하기는 너무나 힘없는 짓이다
우리는 여기서 느끼세
힘을 믿세
힘을 내서 일하세
―일천 삼백여년 전 우리들의 할아버지의 늠름한 기상을 그려보면서― 6월 4일
<신동아, 1933. 8>
작가 : 김명순(1900- )
호 탄실(彈實). 평양 출생. 1917년 『청춘』에 단편 「의심의 소녀」가 당선되어 등단.
그의 시작품은 연정(戀情), 자연의 아름다움, 추억 등을 노래한 것이 주류를 이루며 소설은 인물에 대한 지적인 분석과 심리묘사에 치중하였다.
시집 『생명의 과실』이 있다.
< 감상의 길잡이 >
나라를 잃고 높은 기상을 떨쳤던 겨레의 옛나라를 생각하는 것은, 또 그 유적을 찾아가는 것은 얼마나 가슴아픈 일일 것인가. 시인은 만주의 고구려 옛성을 찾아갔다. 일행 중 어떤 사람은 옛터를 거닐며 울기도 했다. 그곳에서 살았던, 지금 파편이 되어 흩어진 기와와 질그릇의 주인들은 바로 일행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다. 그곳을 찾은 후손들은 단지 망해 버린 고국을 그리워하는 데서 나아가 이제 나라를 잃어버린 비탄에 더욱 슬펐으리라.
그러나 시인은 `벗이어 울지는 마세'라며 일행을 달랜다. 조상이 흘린 붉은 피를 되새기며 나약하게 눈물을 뿌리기보다는 힘을 믿고 힘을 내서 일하자고 말한다.
이 시가 발표된 것은 1933년. 이 시기에 일제는 탄압의 방식을 교묘히 하여 일체의 민족적 움직임을 억눌렀고 우리 문학은 탄압의 예봉을 피해 이른바 순수의 좁은 영역에 몰려 있을 때이니 이와 같은 김명순 시인의 시는 각별히 기억할 만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격렬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시인은 스스로 흥분하지 않고 냉철하게 자신의 소감과 소망을 시 속에 담아내고 있다. 나라를 잃고 그 회생의 기미를 믿지 못하는 겨레들에게, 강대했던 나라 고구려의 기상을 일깨우고 겨레의 정체성을 환기하며 `힘을 내서 일하세'라고 시인은 말하고 있으니, 그 속뜻과 주제는 너무도 자명하다. [해설: 이희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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