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방진 신문팔이 / 요점정리 / 이청준
by 송화은율건방진 신문팔이 / 이청준
작가 : 이청준(1939∼ )
갈래 : 단편 소설
성격 : 회고적, 우회적
구성 : 단순 구성
시점 : 1인칭 관찰자 시점
배경 : 시간 - 1960년대초, 공간 - 현대 서울, 서대문 정류소 근처 버스안
제재 : 어느 신문팔이의 삶
주제 : 언론의 자유에 대한 갈망, 언론 탄압에 대한 은근한 비판
출전 : [한국문학](1974)
줄거리 : 우리가 탄 버스가 서대문 정류소를 지나갈 때면 으레 그 신문팔이를 만날 수 있다. 독특한 어조로 '동아 일보요, 서울 신문이요, 중앙 일보요, 민국 일보요…….'를 읊조리는 그 녀석은 우리가 흔히 보는 신문팔이들과는 달리 신문을 파는 일보다 신문들의 이름을 자기 식으로 읊조리는 일에 집착하고 있는, 그래서 좀 건방진 녀석이다. 우리들은 그에 대해 궁금증과 흥미를 느끼는 것은 물론 가로등과 같은 존재로 인식하고 사랑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갑자기 그 녀석의 모습을 서대문 정류소에서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는 더 이상 신문을 팔지 않게 된 모양이었다. 몇 달 뒤 나와 만난 신문팔이는 '민국 일보'가 폐간되는 바람에 더 이상 자신의 독특한 읊조림을 계속할 수 없게 되었고, 그래서 신문을 팔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내용 연구
우리는 누구나 녀석을 알고 있었다.
녀석은 정말 이상한 신문팔이였다.
── 동아일보요, 서울신문이요, 중앙일보요, 민국일보요, 내일 아침 한국이요, 내일 아침 조선이요, 경향 신문 있습니다. 신아일보 있습니다……
저녁 아홉 시가 지나서 좌석 버스로 서대문을 지나는 사람들은 누구나 녀석을 만날 수 있었다. 버스가 정류소로 들어서면 제일 먼저 출입구를 비집고 올라서는 친구가 그 잠바 소년이었다.
하지만 녀석은 일단 버스를 올라오면 서두르는 법이 없었다. 옆구리가 휘일 만큼 커다란 신문 뭉치를 소중하게 앞으로 돌려 안고는 손님들을 천천히 한 차례 둘러본다. 신문팔이로 잔뼈가 굵은 듯한 인상이면서도, 이제는 버스 안에서 신문 따위를 팔고 다니기엔 다소 몰골이 어색할 만큼 나이가 먹어버린 녀석은, 그러나 그 때마다 얼굴에 웃음기를 가득 담고 있었다.[그러나 그때마다 - 담고 있었다 : 버스에 올라가기만 하면 항상 여유있는 웃음을 지었다. 소년의 모습에 대한 서술자의 묘사가 핵심적으로 제시된 부분으로, '웃음' 이후 서술자가 소년의 행동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는 계기가 된다) 이제 막 여드름이 돋기 시작한 녀석의 가분수형 면상(面像 : 얼굴의 생김새)(그래서 딱 바라진 상체와 함께 조금은 난쟁이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는데) 가운데서도 터무니없이 좁아진 그의 실눈가를 맴돌고 있는 웃음기는 녀석으로서도 거의 속수무책인 듯한 것이었다.
어쨌거나 녀석은 그렇게 웃음을 띤 얼굴로 점검하듯 천천히 차 속을 한 차례 훑어보고는 비로소 그 독특한 목소리로 자기의 상품 목록을 외워 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동아 일보요, 서울 신문이요, 중앙 일보요, 민국 일보요…….
억양이나 단속(斷續 : 끊어졌다 이어졌다함)이 똑같이 유별났다.
억양은──그건 사실 억양이나 말의 단속이라고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마치 나어린(나이 어린) 변론반(웅변반) 학생이 긴장 때문에 잘못 시작한 웅변 원고의 서두처럼, 동아 일보요, 서울 신문이요를 높낮이가 거의 없이 느릿느릿 그리고 일정하게 발성해 나가곤 했다. 억눌린 가성기가 섞인 그의 목소리는 자세히 들어 보면 강약 약강약의 순서로 여덟 가지 신문 이름이 차례로 조음되어 나가고 있었지만 그건 거의 있으나마나한 변화였다. 일테면 그는 자신의 목소리에서 억양의 변화나 발음의 장단 따위를 적당히 조화시켜 나가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그것을 최대한으로 아끼고 억제해 버리고 있는 식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 극단의 억제 속에서 오히려 어떤 기묘한 억양의 변화나 단속을 예감하곤 했다. 신문 하나 하나의 이름을 말할 때마다 목소리를 끊어 내는 그의 단호한 스타카토가 듣는 사람에게 은밀한 가락을 암시적으로 자생시켜 주고 있었다. 일정하게 끊어지고 일정하게 이어져 나가는 그 느릿느릿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의 단속 가운데에 보이지 않는 녀석의 가락이 간직되어 있었다. 그것은 그런 식으로 빈틈없이 완성되어지고 한 호흡 안에 굳게 묶인 길고 정연한 녀석의 대사였다.
동아·중앙·서울·경향이요, 하는 식으로 여느 아이들처럼 약칭(정식 명칭의 일부를 줄여서 간략하게 일컬음. 또는 그 명칭)을 쓰지 않는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신문의 순서가 바뀌거나 생략되는 일도 절대 없었다. 녀석은 여덟 가지 신문을 빠짐없이 마련해 가지고 와선 토씨나 어미 하나 뒤바뀌는 일이 없이, 그의 속수무책인 듯한 눈웃음을 던지면서, 느릿느릿 판에 박힌 대사를 외어 나가곤 하는 것이었다.
──동아 일보요, 서울 신문이요, 중앙 일보요, 민국 일보요…….
그래서 우리는 누구나 맘속으로 은근히 녀석을 아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좀 건방진 신문팔이 녀석이었다.
밤 버스가 서대문 정류소만 들어서면 신문 뭉치를 옆구리에 낀 그 잠바 소년의 가분수형 머리통이 제일 먼저 출입구를 비집고 올라왔다. 시간이 바쁠 때는 가끔 그를 못 보고 서대문을 지날 적도 있었지만, 우리는 이제 서대문을 지날 때는 자기도 모르게 녀석의 모습을 찾게 되곤 했다. 녀석을 못 보고 서대문을 지나게 되는 날은 제물(그 자체가 스스로 하는 김에)에 괜히 마음들이 서운해지곤 했다.
녀석은 우리들에게 가로등 같은 소년이었다.[신문팔이 소년은 이 도심의 생활에 지친 우리들에게 활력을 주고, 무언가 삶의 영향을 제시해 주는 존재였다. 이 소설에서 서술자는 '우리들'로 제시되어 있는데, 이것은 작가가 '나'를 대신한 복수의 관찰자적 시점을 통해 서술자와 관찰 대상 간의 거리감을 줄이고 정서적 동화의 효과를 노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녀석은 우리들에게 서대문의 가로등이었다. 녀석이 보이지 않는 날은 그의 등불이 꺼져 있는 날이었다. 우리들의 가로등 하나가 불이 오지 않는 날이었다. 녀석을 보지 못하는 날은 불이 오지 않은 가로등 사이를 건너갈 때처럼 마음의 균형이 어긋나 있곤 했다.
하지만 그런 날은 좀처럼 드물었다. 녀석은 언제나 서대문에서 우리를 기다렸고 우리는 그 소년의 가로등을 지나갔다.
하지만 녀석에겐 그보다 아직 더 인상 깊은 일이 있었다.
녀석은 늘 신문을 팔기 위해 차를 비집고 올라와서도 신문을 파는 데는 정작 마음을 쓰지 않았다. 녀석은 언제나 느릿느릿 여유가 만만했고, 은밀스런 비밀을 숨기고 있는 소년처럼 그 가는 실눈 속에 괴상한 웃음기를 참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신의 목소리를 즐기고 있는 듯한 가성기의 목소리로 예의(이미 잘 알고 있는 바를 가리킬 때 쓰는 말) 대사를 외어 나갔다.
하지만 딱 한 번이었다. 언제나 그 한 번뿐이었다. 느릿느릿 여덟 개의 신문 이름을 외고 나면, 차가 벌써 움직이기 시작했다. 두 번 되풀이할 시간이 없었다. 신문을 팔 시간도 없었다. 대사만 외고 나서 번번이 차를 쫓겨 내려가야 했다. 하지만 그는 목소리를 서두르거나 중간에서 대사를 중단한 일이 없었다. 대사를 외면서 신문을 파는 일도 없었다. 대사를 외워 주는 것만이 유일한 목적이었던 듯이, 그것만 끝내고 나면 미련 없이 차를 내려가 버릴 때가 많았다. 손님 중에서 신문을 사주고자 해도 미처 기회를 못 잡고 마는 수가 많았다. 신문을 사지도 못하고 차를 내린 소년이 정류소로 들어서는 뒷차를 향해 가는 모습을 내다보고 눈길이 멍해질 때가 많았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소설의 전개 과정에서 시공간의 전환과 새로운 사건의 제시가 필요할 때 그것을 알려 주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문장 표현이다.)
여차장은 이제 녀석의 승차를 방해하지 않았다. 차가 멎기도 전에 기를 쓰고 뛰어 올라오는 소년에겐 차장도 이제 습관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차장은 언제나 손님이 다 오르내리고 나면 그때부턴 녀석을 참을 수가 없어졌다. 차가 떠날 때는 함부로 소년을 밀어냈다. 대사가 아직 끝나지 않은 때라도 팔을 당기고 등을 밀쳐 대면서 녀석을 마구 차에서 몰아냈다.
그러난 어느 날 ---- 이날 밤도 녀석은 미처 대사가 다 끝나지 않은 참이었는데, 차가 불쑥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차장이 녀석을 마구 밀어제쳤다. 녀석은 차장에게 등을 밀리면서 대사를 계속했다. 마지막엔 승강구까지 밀린 소년이 차자의 발길에 채이듯 하면서도 기를 쓰고 매달리며 마지막 대사를 외어대고 있었다.
----- 내일 아침 조선이요, 경향 신문 있습니다. 신아 일보 있습니다!
닫히다 만 출입문 사이로 간신히 얼굴만을 디밀어 놓은 채였다. 마지막 대사를 찻속으로 외어 들여보내고 나서야 소년은 매달려 가던 차를 훌쩍 뛰어내려갔는데, 그때도 물론 녀석의 얼굴에서 언제나와 같이 그 속수무책(束手無策)인 듯한 웃음이 유난스레 짙게 번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차를 뛰어내리고 나서도 어둠 속에서 잠깐 멀어져 가는 버스를 향해 멍청스런 웃음을 흘리고 서 있다가는 터벅터벅 그 서대문 정류소 쪽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그는 필경 신문팔이보다도 그 자신의 대사를 즐기면서 그것 때문에 늘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있는 건방진 신문팔이 녀석이었다.[신문팔이가 항상 웃음을 머금었던 이유를 '즐긴다'는 말로 요약·제시하면서, '건방지다'는 판단을 통해 자기 일에 대한 자부심을 가졌음을 역설적으로 밝히는 표현]
하지만 우리는 어쨌거나 녀석을 아끼고 그를 사랑했다. 이상하고 건방져도 그는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는 녀석이었다. 밤차로 서대문을 지날 때마다 우리는 적어도 차가 섰다 떠나가는 시간만큼은 녀석을 사랑했다. 낯선 거리에서도 우리들이 불켜진 가로등을 사랑하듯 우리는 녀석을 잠깐씩 사랑했다. 그것은 녀석이 늘 불가사의한 웃음기를 눈가에서 잃지 않고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녀석의 웃음은 차라리 우리들을 까닭 없이 부끄럽고 당황하게 할 때가 많았다. 녀석이 신문을 사달라고 귀찮은 애원을 해오지 않은 때문만도 아니었다. 우리는 대개 누구나 녀석의 신문을 사주고 싶었지만, 오히려 기회를 놓칠 때가 많은 형편이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인가.
무엇 때문에 우리가 그 가분수형 머리통의 잠바 소년 녀석을 사랑하게 되고 말았는가. 초조하지 않고 서두르지 않는 그의 여유만만한 대사 때문이었는가. 그 대사의 이상스럽게 억제되고 일정해진 억양과 단속 때문이었는가.
녀석의 대사라면 그건 오히려 우리하곤 더욱더 인연이 안 닿는 소리일 것이다.
소년은 정말로 자신의 대사를 자기 혼자 즐기고 있는 게 틀림이 없는 녀석이었다. 그걸 우연히 본 사람이 있었다.
지난 가을 추석날 저녁이었다.
날마다 밤버스로 서대문을 지나다니던 사내 하나가(이 이야기 중에서 그 사내가 굳이 나, 누구라는 특정 인물로 한정지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사내'는 특정한 실제적 인물이 아니라 우리 모두 일 수 있음을 작자의 말로 밝힌 부분. 이러한 서술을 통해 이 소설의 이야기를 읽는 독자는 작가가 이 이야기를 통해 특정 인물의 삶에 대한 것이 아니라, 어떤 사회적 문제 혹은 그 의미에 대해 말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 ] 그날 저녁은 무슨 일로 광화문에서부터 서대문을 도보로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그 서대문 정류소를 지나면서 무슨 일로 자기가 지금 차를 타지 않고 걸어서 그곳을 지나가고 있는가를 생각하기 시작했을 때 그 소년이 문득 그의 앞에 서 있었다. 그때는 마침 앞차들이 떠나가고 뒷차들은 아직 정류소를 들어서지 않고 있어서 거리가 잠깐 비어 있는 참이었는데, 그래서 사내는 그 짧은 시간 동안에 용케도 그 소년의 괴상한 비밀을 훔쳐볼 수가 있었던 것이다.
소년은 사람들이 몰려 서 있는 정류소에서 광화문 쪽으로 조금 비켜 나와서 녀석 혼자 다음 차가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 언제나와 같이 회갈색 잠바의 옆구리에는 신문 뭉치가 휘일 듯이 무겁게 들려 있었고, 그 헐렁한 잠바와 신문 뭉치 때문에 커다랗게 부풀어 보인 녀석의 상체는 어딘지 좀 난쟁이처럼 보이는 평소의 느낌을 더 역연하게 해 주고 있었다. 잠바 깃에 묻혀 버린 짧은 목덜미 위로는 녀석의 그 커다란 가분수형 머리통이 단단하게 얹혀 있었는데, 이상스럽게도 그 큰 머리통은 녀석을 온통 처량해 보이게 하고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녀석은 그런 모양을 하고 서서 전에 없이 청승맞게 밝은 추석달을 쳐다보고 있었다. 녀석의 볼 위에서 눈물이라도 보고 싶은 것처럼 사내는 조심조심 녀석에게로 다가갔다.
한데 뜻밖이었다. 가까이 다가서 보니 녀석에게선 중얼중얼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자세히 들어 보니 예의 그 대사였다.
―― 동아 일보요, 서울 신문이요, 중앙일보요 …….
추석달을 쳐다보고 서서, 차를 기다리면서, 녀석은 주문처럼 그의 대사를 외어 대고 있었다. 나지막하기는 했지만 차에 올라왔을 때와 똑같이 단호하고 억양을 극도로 아끼고 있는 녀석의 목소리 그대로였다. 게다가 눈물이라도 흘리고 있을 줄 알았던 녀석의 얼굴에는 언젠가 그가 여차장에게 떠밀려 내리면서도 기를 쓰고 찻속을 향해 웃어 보이던 그런 필사적인 웃음기가 달빛 아래 가득 떠올라 있었다.
사내는 좀 어이가 없어지고 말았다.
소년은 분명 자신의 대사를 혼자 은밀히 즐기고 있는 녀석이었다. 그렇다고 오로지 녀석의 그런 대사 때문에 우리가 그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은 물론 아니었다.
이유 같은 건 있어도 좋고 없어도 상관이 없는 일이리라. 어느 것도 이유가 되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어느 것도 또 가장 합당한 이유는 못 되었다. 분명한 이유를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우리는 이미 녀석을 사랑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가 거기 그렇게 가로등처럼 있었기 때문에 가로등을 사랑하듯 그를 사랑하고 있었으며, 비록 그가 추석날 밤 대사를 외면서 달을 보고 웃고 서 있는 모습을 보지 않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누구나 그를 비슷하게 느끼면서 서대문을 지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녀석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안 것은 사실인즉 때가 너무 늦은 다음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가을 추석달을 바라보고 웃고 서 있던 며칠 뒤부터 웬일인지 서대문을 지나는 밤차에는 소년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녀석이 그저 차를 놓친 것이거니 짐작했고, 하루 이틀 같은 일이 계속되면서는 감기라도 앓고 있나 편한 상상들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소년은 닷새가 지나고 열흘이 지나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새삼스럽게 소년의 소식을 궁금해하기 시작했고, 자신도 모르게 문득 녀석을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었다.
보름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도 그 독특한 목소리의 잠바 소년은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소리도 들을 수 없었고, 녀석의 그 속수무책인 듯하면서도 때로는 필사적인 느낌을 주어 오던 눈웃음도 다시는 만날 수가 없었다. 서대문엔 어디에도 녀석이 없었다.
소년의 가로등엔 불이 켜지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그 불이 켜지지 않은 가로등 사이를 건너가듯 어딘지 아쉬움이 남는 기분으로 서대문을 건너 다녔다.
무심한(아무런 생각이나 감정 따위가 없는, 남의 일에 걱정하거나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들도 이따금은 녀석을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늦가을 저녁이었다. 잊혀져 가던 잠바 소년이 문득 다시 서대문 정류소에 나타났다.
──저 녀석 저기 있군.
누군가가 유리창을 내다보며 혼자말처럼 낮게 중얼거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 소리에 오른쪽 창가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무심결(아무런 생각이 없어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에 일제히들 창문 밖을 내다보게 되었다. 그리고 거기 녀석이 다시 나타나 있는 것을 발견했다.
녀석은 잠바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은 채 누군가를 기다리듯 한가하게 이쪽 창문을 올려다보고 서 있었다. 눈가엔 그 웃음기를 잃지 않고 있었지만, 그러나 어디엔가 아쉬움이 깃든 눈초리였다.
녀석의 옆구리엔 신문 뭉치가 들려 있지 않았다. 신문이 없으니까 녀석은 차를 비집고 올라올 일도 없었다. 억양을 한껏 아껴 가면서 그것을 즐기고 있는 듯한 목소리로 대사를 외어 대던 옛날의 녀석은 볼 수가 없었다. 우리는 얼마간 시들해지기 시작한 궁금증이 다시 살아났다.
──녀석에게 이젠 다른 밥벌이가 생긴 건가.
──신문도 팔지 않으면서 웬일로 여긴 다시 서성거리고 있는 건가.
하지만 녀석에게선 물론 아무것도 사정을 들을 수가 없었다. 그 날 저녁 이후로도 녀석은 가끔 서대문에 나타나서 두 손을 잠바 주머니에 찔러 넣고 서서 우두커니 지나가는 버스들을 쳐다보고 있는 적이 있었고, 때로는 담벼락 밑 군밤 장수의 연탄불 곁에 쭈그리고 앉아서 잠바깃을 세운 채 언 손을 싹싹 비벼대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될 때도 있었다.
하지만 녀석은 한 번도 신문 뭉치를 지닌 일이 없었고, 따라서 차에 올라오는 일도 없었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서 있거나, 군밤 장수의 연탄불에 손을 녹이며 쭈그리고 앉아 있거나, 지나가는 차창에서 항상 그 아쉬운 듯한 눈길이 떠나지 않고 있는 녀석을 볼 수 있을 뿐, 무엇 때문에 그가 가끔 신문도 팔지 않는 그 서대문 근처를 할 일 없이 서성거리고 있는지는 아무도 이유를 들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갈수록 궁금증만 더해 갔다.
어느 날 저녁 마침내 다시 한 사내가(다시 말하지만 그 사내가 굳이 나, 누구였다고 말하기 싫은 것은 이 이야기 중의 모든 경험을 나 혼자의 것으로 말하지 않고 '우리'라고 말하고 싶은 것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그것으로 무슨 특별한 뜻을 담으려는 것이 아니라, 나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소년을 알고 있을, 틀림없이 알고 있을 것이기에 말이다.) 광화문에서부터 서대문까지 차를 타지 않고 걸어서 갔다. 그리고 거기서 다시 한번 소년을 만났다. 이번에는 사내 혼자 소년을 몰래 만난 것이 아니라 녀석과 사내가 함께 만난 것이다.[사내와 신문팔이 소년이 일대일로 직접 맞부딪쳐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된 것이다.] 소년은 물론 사내가 좀 이상스러운 눈치였다. 별걸 다 묻는다는 식이었다.
──그런 건 왜 물어요. 아무것도 하지 않아요.
하지만 이번에도 그는 여전히 그 눈가의 웃음기만은 잃지 않고 있었다.
──다시 신문을 팔아야지요. 하지만…….
조금은 어른스런 말투가 찻속에서 신문 이름을 외어 댈 때하곤 판이하게 풀이 죽어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뜻밖인 것은 예기치 않은 녀석의 불평이었다.
──민국 일보가 없어져 버렸기 때문이에요. 민국 일보가 빠지니까 소리가 맞지 않아요. 동아 일보요, 서울 신문이요, 중앙 일보요……. 민국 일보가 없으니까 자꾸만 짝이 어긋나 버리거든요.
하고 보니 녀석이 보이지 않기 시작한 것은 몇 십 년간 발간 실적을 가진 그 민국 일보가 뚜렷한 명분도 없이 어물어물 자진 폐간 형식으로 신문 발간을 중단해 버린 다음부터였던 것 같았다. 이상스런 얘기지만, 녀석은 그 민국 일보가 나오지 않으니까 신문을 팔 수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일테면 녀석에겐 민국 일보가 빠져 버렸기 때문에 그의 대사 전체 질서의 골격이 무너져 나가 버린 셈이 된 것이다. 그리고 녀석은 그 때문에 신문을 팔 수가 없게 되어 버린 것이었다. 그는 다시 연습을 시작하고 있노라 했다. 남은 신문들의 순서를 꿰맞춰서 대사의 억양과 호흡을 다시 연습하고 있는 중이랬다. 소리가 좀처럼 짝이 맞질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연습이 끝나면 반드시 다시 신문을 팔겠노라고 했다.
──말하나 마나지요. 신문을 팔아야지요. 한데도 아직 소리가 그전처럼 신이 나질 않아요. 민국 일보가 다시 나와 준다면 좋겠지만…….
녀석은 정말로 알 수 없는 신문팔이였다.
그래서 우리는 아직도 누구나 녀석을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신문을 팔러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소리 연습이 여태도 다 끝나질 않은 것이었을까. 아니면 아주 연습을 포기하고 만 것이었을까.
가을이 다 지나가도록 그는 여전히 신문을 팔지 않았다. 녀석의 희망처럼 민국 일보가 다시 복간(復刊 : 간행을 중지하였거나 폐지하였다가 다시 간행한 출판물) 호를 내주지도 않았다. 자진해서 폐간(廢刊 : 신문·잡지 따위의 정기 간행물의 간행을 폐지하였을 때 그 간행물을 이르는 말)호를 내고 사라진 신문이 다시 살아나 줄 희망은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기다리고 있었다. 언젠가는 녀석이 다시 새로운 대사를 익혀 가지고 나타나리라, 그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언젠가는 민국일보가 복간되어 팔릴 날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대목에 이르면 '녀석'과 '우리'는 단순한 인물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어떤 상징성을 가진 말임을 알 수 있다.] 녀석의 그 서두르지 않는 유유한(침착하고 여유가 있는) 태도와 새로 익힌 대사와 독특한 눈웃음을 기대를 가지고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녀석은 첫눈이 내린 다음에도 여전히 신문을 팔러 나오지 않았다. 어쩌다가 그 서대문 길가에서 두 손을 찔러 넣고 서서 아쉬운 듯 우두커니 지나가는 버스들만 바라보고 있는 녀석의 모습을 볼 수 있었을 뿐, 그나마도 나중에는 녀석의 그런 모습조차도 찾아볼 수 없게 되고 말았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기다리고 있었다. 녀석이 그의 연습을 끝내고 나서 새로 완성된 대사를 외며 나타나기를 참을성 좋게 기다리고 있었다. 불이 켜지지 않는 가로등 사이를 건너가듯, 녀석이 보이지 않는 서대문을 지나다니면서 끈질기게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낯익은 거릴수록 우리가 우리의 가로등을 사랑하듯, 소년의 등불이 어느 날 그의 자리에서 다시 살아나서 빛나지는 않으나마 우리들의 조그만 사랑을 그에게 전할 수 있기를 오래오래 기다리고 있었다.[신문팔이 소년을 항상 보아왔듯이, 그가 사라졌더라도 그를 사랑한 우리의 마음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소년'이 곧 '등불'이라는 은유적 표현을 사용한 부분에서 작자의 주제 의식이 분명하게 압축된다]
하지만 한번 죽어 버린 민국 일보가 다시 살아나지 않는 것처럼, 녀석은 끝끝내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고,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들에겐 녀석이 없는 서대문이 그런대로 조금씩은 익숙해진 날이 생기기 시작했다. 언제까지나 불이 켜지지 않는 가로등의 존재가 마침내는 우리들에게서 스스로 사라져 가듯이, 또는 이 빠진 자리가 언젠가는 저절로 그 간격이 흐지부지 골라져 버리듯이, 녀석이 없는 서대문 거리 역시 우리들에게선 어느덧 그 허전하던 의식의 간격이 조금씩 조금씩 골라져 가고 있었다.
몇몇 사람들만이 아직도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녀석을 기다리고 있었다. 녀석이 다시 나타날지 모른다고, 이따금이나마 녀석의 그 속수무책(束手無策)인 듯하면서도 때로는 필사적인 느낌마저 들곤 하던 눈웃음을 생각하면서, 한껏 억양을 아낌으로써 오히려 유유하게 자신의 대사를 즐기고 있는 듯한 녀석의 목소리를 생각하면서, 어렴풋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 몇몇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젠 그런 사람들마저도 녀석이 다시 옆구리가 휘이도록 신문을 끼고 나타나서 자기의 목적은 오직 그 상품 목록을 외어 주는 것뿐이라는 듯 신문 한 장 팔지도 않고도 미련 없이 다시 차를 내려가 버리곤 하던 녀석의 모습은 거의 기대하지 않고 있었다.
녀석이 다시 나타날 것인지 어떨지는 누구에게도 그처럼 확실하지 않았다.
확실한 것은 다만 하나, 녀석이 다시 나타나든 안 나타나든 그의 기억을 지닌 밤버스로 서대문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마지막 녀석의 기억이 사라질 때까지도 아직 머리를 깊이 갸웃거리라는 점이었다.
-- 녀석 참 이상하게 건방진 신문팔이었어. 그 뭔가 아무래도 알 수가 없는 녀석이었단 말야.
그리고 아마도 그 때문에 녀석은 더욱더 우리들에게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고 우리의 기억 속에 깊이 남아 있게 될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녀석은 정말 이상스럽게 건방진 신문팔이었다.
1. 작자가 묘사하고 있는 신문팔이 소년의 특징을 몇 가지로 나누어 정리해 보고, 서로 이야기해 보자.
이끌어주기 : 인상적인 특징에만 집착하거나, 지나친 해석으로 작품이 말해 주지 않은 것도 소년의 특징이라고 착각하지 않도록 한다. 주관적인 해석은 접어 두고 작품을 꼼꼼히 따져 보도록 한다. 소년의 특징을 모두 찾아 냈다면, 반복해서 묘사된 특징을 하나로 묶고, 신체적인 특징이나 말투, 행동, 관찰자가 추측한 성격 등으로 세무 항목을 나누어 보도록 한다.
예시 답안 :
신체상의 특징 : 신문팔이 소년으로 보기에는 나이가 많다. 딱 바라진 체격을 가지고 있으며 키가 작다.
표정 : 언제나 웃는 얼굴이다. 실눈가에 웃음기가 담겨 있다.
어투 : 높낮이가 없는 느린 말투. 무엇인가를 절제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2. 이 소설을 읽으며 우리는 신문팔이 소년에 대하여 호기심을 갖게 된다. 신문팔이 소년의 어떤 특징 때문에 그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앞으로 일어날 말들에 대해 기대를 하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자.
이끌어주기 : 1번 활동에서 찾아 낸 특징 중 건방진 신문팔이 소년의 핵심적인 특징. 이야기의 실마리가 되는 특징을 찾아보는 활동이다. 작품 속의 '하지만 녀석에겐 그보다도 아직 더 인상 깊은 일이 있었다.'와 같이 주의를 환기하는 문장이나,'그렇다면 무엇 때문인가.'와 같이 의문형으로 끝나는 문장이 이 활동의 중요한 힌트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예시답안 :
대개의 경우 가난한 소년은 여유 없는 모습이거나 불쌍하고 초라한 모습, 동정심을 자아내는 모습 등으로 그려진다. 따라서 신문팔이 소년의 여유 있고 웃음기있는 모습은 읽은 이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만하다. 소년은 신문을 팔기 위해 차에 올라서도 딱 한 번만 외치고 간다. 정작 신문 파는 것보다 신문의 이름들을 한 번씩 외치는 것을 즐기는 행위도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대목이다.
학습 활동(2)풀이
1. 다음 글을 읽고, 소설의 구성이라는 측면을 중심으로 아래 제시된 활동을 해보자.
(1) 이 소설에서 다음에 무엇이 일어날까 궁금했던 장면을 적어 보자.
이끌어주기 : 학생들의 자유로운 답변을 유도한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 머물지 말고 자신이 궁금증을 느꼈던 부분의 이야기하는 방식이 어떠했는지도 함께 생각해보도록 한다. 작품의 구성방식과 효과를 이해하기 위한 활동이다.
예시답안 :
서대문을 지나던 어떤 사내가 차를 타지 않고 가다가 소년을 만난 장면, 그 후 서대문에서 소년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장면, 어떤 사내가 다시 그 소년을 광화문 부근에서 만나게 된 장면.
(2) 셰헤라자데가 이야기를 이끌어 갔으리라고 추측되는 방식으로 이 소설의 이야기를 간추려 보자.
이끌어주기 : 작자가 셰헤라데자가 이야기를 이끌어 갔을 법한 방식으로 이야기의 강약을 조절했다는 전제 하에 그 강약을 느껴보는 것이 앞의 활동이었다면, 여기에서는 작자의 방식을 이해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야기의 강약을 다시 조절해 보는 활동을 하게 된다. 유명한 소설가의 작품이라고 겁먹지 말고, 시간이나 공간, 인과관계를 뒤섞어 자신만의 이야기를 구성해 보도록 유도한다.
예시답안 :
어느 이상한 신문팔이 소년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그 소년은 어른이 되어가다 성장이 멈춘 소년이었으며, 삶에 뛰어들다 머문 소년이기도 했다. 그는 매일 아침 저녁으로 버스에 올랐지만 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지 않는 소년이기도 했으며, 신문을 팔려고 신문이름들을 외치기는 했지만 정작 한 번도 신문을 팔아 본 일이 없는 소년이기도 했다. 이 기이한 소년의 이야기를 해 보기로 하자.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신문팔이 소년은 버스에 올라타 신문 이름들을 외치는 일을 하지 않았다. 왜 그러한 일이 벌어졌을까 궁금한 한 사내가 그 소년의 행적을 알아보기 위해 서대문 일대를 헤매고 다니다 마침내 그 소년을 만난다. 그 소년은 왜 일을 그만둔 것일까? 소년은 신문의 이름들을 마치 주문처럼 외우는 이상한 존재였다. 일정하게 나열되어 있는 신문의 이름은 그의 곡조로 노래되었고, 그 노래는 추석을 맞이한 둥근 달을 향해 흘러가는 것이었다. 마치 삭막한 사막의 돌처럼 느껴지는 시가지의 건물들 사이로 태초의 달이 뚜렷하게 보이고 있었다. 신문의 이름들은 그 달을 향해 울리는 제의적 노래였던 것이다. 아마도 사람들은 이 비밀스러운 제사 의식이 왜 이처럼 시가지 한복판에서 치러지고 있는지, 왜 하필 소년이 그러한 자기 혼자만의 제사를 치르는지 알 수 없었으리라.
그렇다면 그는 왜 이제 그러한 주문 같은 노래를 부르지 않게 된 것일까? 그에 대해서는 또 하나의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 신문사의 폐간에 대한 이야기를. 오랜 역사가 정지된 이야기를. 그리하여 그 주문 같은 노래의 일부가 훼손된 이야기를.
(3) 이 소설의 결과를 바꾸어 쓸 경우 필요한 것들을 정리해 보고, 그에 따라 이야기를 새롭게 바꾸어 보자.
이끌어주기 : 앞의 활동이 같은 재료를 다르게 구성한 것이라면, 여기에서는 더욱 적극적으로 재료의 내용을 바꾸어 보도록 한다. 소년이 연습을 끝마친다든지, 신문팔이를 계속하지 못해서 더욱 괴상한 짓을 벌인다든지, 관찰자인 우리 가운데 한사람이 신문팔이에게 더욱 가까이 접근해서 신문팔이 소년처럼 소리에 집착한다든지, 학생들의 자유로운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도록 한다. 또한 결론을 바꾸는 것이 이야기 전체의 구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학생들이 직접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예시답안 :
이 소설의 결말이 바뀌기 위해서는 변화의 단서가 필요하다. 변화의 단서는 여러 가지로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 새로운 신문의 창간 : 소년이 운을 맞출 수 있도록 <민국 일보> 대신에 새로운 신문이 창간되도록 한다. 소년은 이 신문으로 운을 맞추어 다시 신문팔이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 소년이 다른 직업을 택함 : 소년이 신문팔이를 그만두고 다른 직업을 택한다. 이러한 설정을 할 경우, 소년의 소리에 대한 집착을 실현시킬 수 있는 다른 직업을 상상해본다.
2. 다음 글을 참조하여 이 소설은 어떠한 관점을 취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고, 관점을 바꾸어 소설의 일부분을 다시 써보자.
이끌어주기 : 이야기의 구성 가운데서도 특히 ‘시점’에 관한 것이다. 우선 이 소설의 시점이 ‘우리’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알도록 하고, 그 외의 다양한 시점을 찾아 내도록 한다. 관찰자인 ‘나’, 신문팔이인 ‘나’, 전지적 작가 시점 등의 변화에 따른 미묘한 차이를 느껴볼 수 있도록 한다.
예시답안 :
이 소설은 신문팔이 소년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으로 그려져 있다. 보통의 관찰자 시점과는 달리 1인칭 복수의 관찰자가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신문팔이 소년에 대한 시선을 더욱 따뜻하게 만들어 줄 뿐만 아니라, 도시의 군중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묶어 주는 역할을 한다.
다음은 이 소설의 교과서 282쪽 18~22행까지의 부분을 1인칭 관찰자시점으로 개작해 본 것이다.
“나는 아직 그를 기억하고 있었고 녀석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 말고도 다른 사람들도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녀석이 다시 나타날지 모른다고, 이따금이나마 녀석의 그 속수무책인 듯하면서도 때로는 필사적인 느낌마저 들곤 하던 눈웃음을 생각하면서, 한껏 억양을 아낌으로써 오히려 유유하게 자신의 대사를 즐기고 있는 듯한 녀석의 목소리를 생각하면서, 어렴풋이 아직도 나는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해와 감상
이청준의 소설은 대체로 다음의 두 가지 경향으로 나눌 수 있다. 그 하나는 오늘날에도 전통적인 예술을 고집하는 장인(匠人)의 비극적인 삶을 다룬 작품들이며, 다른 하나는 정신적인 상처로 인해 눌리고 왜곡된 삶을 사는 사람들을 다룬 작품들이다. '건방진 신문팔이'는 이 두 가지의 경향이 미묘하게 교차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매우 독특한 작품이다. 신문을 팔면서도 전혀 실제 판매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은 매우 특이한 주인공은 이청준 소설에 흔히 나타나는 유형이다. 이청준은 우리 주위의 일들 가운데 당연히 기대되는 일들을 원래의 궤도에서 어긋나게 하면서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며 독자들을 이끌어간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신문팔이도 역시 그러하다. 그는 우리가 흔히 기대하고 알고 있는 일반적인 신문팔이로부터 어긋나 있다. 단지 여러 신문들의 이름을 자기 식으로 읊조리는 일에 강박증처럼 집착하고 있는 이 주인공의 성격은 우리에게 궁금증과 흥미를 유발한다. 서울 사람들에게 그는 그러한 호기심을 넘어 가로등과 같은 존재로 사랑을 받는다. 이것은 결국 시민들 속으로 파고드는 언론의 자유에 대한 작가 나름의 독특한 찬가이기도 하다. 즉, 신문팔이의 읊조림은 그러한 신문들에 대한 시민들이 찬사와 사랑을 독특하게 표현한 것이다. 나중에 '민국 일보'가 폐간된 이후 그는 버스 안, 즉 그러한 것들을 찬양하는 자리에 올라서지 못하게 된다. 그의 읊조리는 말들은 언론 탄압이라는 폭력에 의해 밀려난 것이다. (출처 : 한계전 외 4인 공저 문학교과서)
심화 자료
이청준의 작품 세계
작자가 보편적으로 삶의 가치를 인정하고 있는 세계는 장인의 세계인 것으로 보인다.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가 어떠한 요구를 하더라도 그것에 신경을 쓰지 않고 자신이 추구하고 있는 세계에서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는 이 장인 의식은 줄을 타는 광대에게서도, 매를 기르는 사람에게서도, 소리를 하는 장님에게서도, 항아리를 굽는 노인에게서도, 활을 쏘는 늙은이에게서도, 심지어는 거리에서 신문을 파는 소년에게서도 발견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살고 있는 세계는 그들의 장인적인 삶을 허용하지 않는 데 그들의 비극이 존재한다는 작자는 이들 개인이 그러한 비극적인 운명과 싸워서 패배하는 과정을 처절한 아름다움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말’이 억압되고 있는 현실을 발견하게 하고, 우리가 역사 속에 받은 정신의 상처를 자각하게 하며, 나아가서는 그 상처의 치유를 모색하여 잃어버린 '말'을 되찾고자 하는 데 있다.(……중략……)
작자가 소설 작품 속에 현실을 담으려고 한다면, 소설의 공간 자체가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에는 필연적으로 작자의 선택과 상상력이 개입되어야만 한다. 이 선택과 상상력은 작자가 삶이나 현실에 대하여 행하게 되는 일종의 해석이며 꿈이고, 따라서 작자의 세계관과 관련된 것이다. 다른 어떤 갈래보다도 현실의 모습을 많이 담고 있는 소설은 현실에서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워 보이는 삶과 세계에 구체적인 삶을 통하여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며, 우연과 운명의 장난으로 보이는 것을 필연과 인과 관계로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술의 성취가 곧 죽음과 일치한다면 그 죽음 다음에는 '무(無)'가 있을 뿐 예술이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문학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성취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그러한 점에서 성취란 문학이 목표로 하고 있는 꿈의 상태일 뿐 현실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작자 자신이 화해의 문 앞에 도달한 것 같지만 이 다음 작품에서는 다시 본래의 출발점에서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음을 말하고 있다. 개인의 정신적인 상처에서 출발한 이청준의 소설은 그 상처에 의해 불행해진 개인의 삶을 다루면서도 그 개인의 구원을 언제나 두 가지 방향에서 찾고 있다. 그 하나는 장인과 마찬가지로 개인이 어떠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상황이 그러한 개인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개인의 구원은 그 두 가지가 동시에 이루어졌을 때 가능한 것이지만, 그것은 현실이 아니라 문학의 꿈이다. 바로 그 꿈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바람 때문에 이청준의 소설은 존재하는 것이다.(출처 : 김치수, '자기 완성을 위한 탐구- 이청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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