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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肝) / 해설 / 윤동주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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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肝) / 윤동주

 

 

바닷가 햇빛 바른 바위 위에

습한 간(肝)을 펴서 말리우자.

 

코카서스 산중(山中)에서 도망해 온 토끼처럼

들러리를 빙빙 돌며 간을 지키자.

 

내가 오래 기르는 여윈 독수리야!

와서 뜯어 먹어라, 시름없이

 

너는 살찌고

나는 여위어야지, 그러나

 

거북이야

다시는 용궁(龍宮)의 유혹에 안 떨어진다.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沈澱)하는 프로메테우스.


요점 정리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율격 : 내재율

성격 : 상징적. 저항적. 우의적, 참여적

어조 : 현실을 극복하려는 남성적 목소리

심상 : 설화에서 취재한 원형적 심상

구성 : 화자의 이동에 따른 전개

1,2연 : 소중한 생명과 양심인 간을 지키겠다는 다짐 - 양심의 회복

3,4연 : 육체를 희생하더라도 정신을 살찌우겠다는 의지 - 반성적 자아

5연 : 현실적 유혹의 거부 - 현실과의 타협 거부

6연 : 현실적 고난을 인고(忍苦)하는 속죄양 의식 - 현실적 고난을 견딤

제재 : 구토 설화와 프로메테우스 신화

주제 : 자아성찰과 희생적 삶에 대한 결연한 의지 / 현실적 고난 극복 의지 /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와 정신 자세

표현 : 설화와 신화의 결합. 두 자아의 대비적 표현, '토끼전'과 '프로메테우스'의 신화를 차용했고, 의지적이고 결연한 어조로 노래함.

출전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

 

내용 연구

바닷가 햇빛 바른 바위 위에

습한[더렵혀진] 간(肝)[생명과 같은 인간의 양심, 존엄성 / 훼손될 수 없는 소중한 자아 /인간의 양심, 본질, 존엄성으로 구토지설과 프로메테우스 신화를 연결하는 매개체]을 펴서 말리우자.[양심, 존엄성의 회복이자, 시적 화자의 스스로의 다짐]

 

코카서스[카프카스의 영어 이름으로 흑해와 카스피 해에 사이에 있는 지역] 산중(山中)에서 도망해 온 토끼[화자와 동일시된 존재로 간을 지키려는 저항의식 / 궁지에 몰려서도 슬기롭게 자신의 간(양심)을 지킨 존재]처럼

들러리를 빙빙 돌며 간을 지키자.[생명, 양심, 존엄성의 수호]

 

내가 오래 기르는 여윈 독수리[예리한 정신적, 의지적 자아 /정신적 각성]야!

와서 뜯어 먹어라[양심을 지키기 위한 내적 고통], 시름없이

 

너[정신적 자아(독수리) : 나의 본질, 고통 속에서 자아를 반성케 하는, 비극적 자아성찰의 표상. 내면적(정신적) 자아]는 살찌고

나[무기력한 육체적 자아]는 여위어야지[정신을 살찌우기 위해 육체를 희생하겠다는 의지] , 그러나

 

거북이야[유혹하는 존재-일제]

다시는 용궁(龍宮)[자아가 경계해야 할 환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세계 혹은 일제]의 유혹[양심을 저버리게 하는 것 - 일제의 유혹]에 안 떨어진다.[의지의 확인]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화자와 동일시된 존재로 화자가 지향하는 존재이자 속죄양 모티브]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맷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沈澱)하는 프로메테우스.[인간을 도와주고 끝없는 고통과 희생을 감내하는 프로메테우스 - 자기 희생의 각오 / 인간을 위해 죄 아닌 죄를 짓고 속죄양이 된 존재로서 시적 자아의 모습 (= 토끼)]

이해와 감상

 간(肝)이란 시가 갖는 특이성은 동. 서양의 두 고전-'토끼전'과 '프로메테우스 신화'-를 혼합하여 썼다는 데 있다. 두 고전을 차용한 이유는 '토끼전'에서는 지배층에 대한 피지배층의 항거 의식을 나타내기 위함이고, '프로메테우스 신화'에서는 속죄양 의식을 나타내기 위함으로 간주된다.

 

 토끼는 현실에 대해 회의하고, 현실 아닌 다른 세계를 절실히 갈망한다. 그 계기를 마련해 준 것이 자라이다. 자라에 의한 용궁의 제시는 매력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용궁에 가서 비로소 그는 도피처로 택한 용궁이 결코 바람직한 장소가 되지 못하며 자기가 살던 곳이 지상 낙원이라는 중요한 사실을 깨닫는다. 그는 '발전적 인물'이 된 것이다. 그 '발전적 인물'이 된 토끼가 육지로 돌아와 우선적으로 행한 것이 습한 간을 펴서 바닷가 바위 위에 말리는 행위였다. 이 행위는 빼앗길 뻔하였던 간의 소중함에 대한 재인식과 간이 있어야만 힘을 지녀 그가 사는 곳을 지키며 그들과 대처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1연은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이해해야 한다.

 

 2연에 이르러 '프로메테우스 신화'가 끼여든다. '토끼전'과 '프로메테우스 신화'가 교차될 수 있는 것은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간' 때문이다. 두 고전에서 '간'은 곧 힘을 의미한다.

 

 3연에는 '나'라는 시적 자아가 등장한다. 그는 스스로 기른 독수리에게 자기 간을 뜯어먹도록 요구한다. 여기서 독수리는 스스로에게 아픔을 주는 자아의 예리한 의식이다.

 

 4연에는 '너'와 '나'가 등장한다. 여기서 '너'는 정신적 자아이고, '나'는 육체적 자아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자신의 육체를 희생하더라도 자신의 의식은 예리하게 지키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에 대한 전적인 포기는 아니다. 끝머리의 '그러나'가 이를 대변해 준다. '그러나'는 여위어 힘은 없지만 어는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겠다는 의지, 뜯어 먹히더라도 간을 내놓을 수 없다는 결의를 표명한 것이다.

 

 5연에서 시적 화자는 실존의 문제를 제기한다. '다시는 용궁의 유혹에 안 떨어진다'고 한 것은 존재의 본질을 이해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존재의 방법에 대한 깨달음이기도 하다. 이 시인은 자기 희생을 존재의 방법으로 삼았다. 그의 속죄양 의식은 이로부터 나온다.

 

 6연에는 바로 속죄양 의식이 드러난다. 프로메테우스는 인류가 비참해질 뻔한 것을 구해 주고 자신은 그 죄로 바위에 묶여 매일같이 간이 쪼아 먹히는 고통을 당하는 인물이다. 그는 인류의 죄를 대속(代贖)하기 위해 십자가에 고통을 지는 예수와도 같다. '목에 맷돌을 달고/끝없이 침전'한다는 것은 자기 희생 정신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 시인은 자기 동일성으로 이 프로메테우스를 선택한 것이다.

 

 

이해와 감상1

 1941년 11월 29일 연희 전문학교 졸업반 때 쓴 작품으로 알려진 이 시가 갖는 특수성은 각기 다른 동·서양의 두 고전을 형상화한 점에 있다. 즉, 거북이의 꾐에 빠져 간(肝)을 잃을 위기에 처했던 토끼가 특유의 기지(機智)를 발휘하여 목숨을 건지는 내용의 '귀토지설(龜兎之說)'과 인간을 위해 제우스를 속이고 불을 훔친 죄로 코카서스 산에 쇠사슬로 묶여, 낮에는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다가 밤에는 그 간이 되살아나 영원히 고통을 겪는다는 '프로메테우스 신화'를 교묘히 결합하여 현실적 고난을 극복하는 의지를 밝힌 작품이다. 이 두 고전을 차용한 까닭은 '귀토지설'에서는 지배자에 대한 피지배자의 항거 의식을, '프로메테우스 신화'에서는 속죄양 의식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윤동주는 벼랑 끝에 몰린 위기에서도 슬기롭게 자기의 '간'을 지킨 토끼와, 죄 아닌 죄를 짓고 속죄양이 될 수밖에 없었던 프로메테우스를 인간의 존엄성과 양심을 지키며 식민지 시대를 살아야 했던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두 고전의 문면(文面)을 글자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적절히 변용하여 작품 속에 투영시키고 있다.

 

 먼저 1연에서는 거북의 유혹에 빠져 목숨을 잃을 뻔했던 토끼, 즉 화자가 지상 낙원이 용궁이 아니라 제가 살고 있는 산중임을 깨달은 후, 그 곳으로 돌아와 '간'을 꺼내 바위 위에 말리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토끼의 행동은 바로 간의 소중함에 대한 재인식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간이 있어야 살 수 있다는 평범한 사실보다도 간이야말로 거북에게 맞설 수 있는 가장 크고 효율적인 무기가 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간'이 '습한' 것은 한때 유혹에 빠졌기 때문이며, 그것을 햇빛에 말리는 것은 다시는 유혹에 빠져들지 않겠다는, 욕망의 절제를 통한 의지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2연에서는 '프로메테우스 신화'가 '귀토지설' 속에 끼여들고 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두 고전에 공통적으로 '간'이 등장하기 때문이며, 또한 이 '간'은 모두 상대와 맞설 수 있는 '힘'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3연에서는 화자가 자신이 기른 독수리에게 자기의 간을 뜯어먹도록 요구하고 있다. 이 독수리는 4연에서 '너'로 지칭되고 있는데, '나'가 육체적 자아라면 '너'는 정신적 자아라 할 수 있다. 결국 '너'라는 독수리는 화자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자아의 예리한 의식이 된다. 그러므로 '너는 살찌고 / 나는 여위어야지'라는 구절은 자신의 육체는 희생되더라도 정신만은 지키겠다는 의미이다. 한편, 끝머리의 '그러나'는 여위어 대항할 힘은 없어도, 정신만은 빼앗기지 않겠다는 의지의 반영으로, 뜯어 먹히더라도 간은 결코 내놓을 수 없다는 결의를 표명한 것이다.

 

 5연에서 화자는 '다시는 용궁의 유혹에 안 떨어진다.'며 자신의 의지를 확인하고 있다. '용궁의 유혹'에 떨어진다는 것은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양심을 저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6연에서는 불쌍하기는 하나, 프로메테우스처럼 화자도 인간을 위한 속죄양이 되겠다는 의지를 보여 주고 있다. '목에 맷돌을 달고 / 끝없이 침전하'는 것은 그 같은 거룩한 자기 희생 정신의 표현이다.

심화 자료

반역의 신 '프로메테우스'

 프로메테우스는 라페토스와 클리멘의 아들이다. 그의 이름의 뜻은 '진보된 생각'이다. 그는 올림푸스의 초기 시절에 제우스를 위하여 싸웠으나 제우스를 진심으로 존경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제우스나 다른 올림푸스의 신들이 땅위의 인간들에게 관심이나 동정을 보이지 않는 것에 한탄스러워 했다.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를 우습게 보는 듯한 행동을 하곤 했다. 한 번은 좋은 고기를 담은 제물과 지방, 뼈만을 담은 제물 두 개를 가지고서 마치 좋은 고기의 제물 두개를 제우스에게 바치는 척 했다. 제우스는 그 사실을 알고서 프로메테우스를 벌하지는 않고 그에게 조심하라는 경고를 하였다.

 

 하지만 프로메테우스는 이런 경고를 무시하고 지상의 인간들에게 많을 것들을 가져다 주고 또 가르쳐 주었다. 그는 나무를 다루는 법, 소를 키우는 법, 약을 다루는 법, 하늘이 보내는 신호를 보는 법, 배를 만드는 법, 항해법 등을 인간에게 전해주었다.

 

 하지만 그가 인간들에게 제우스에게서 불을 훔쳐서 가져다 주었을 때 제우스는 더 이상 그를 용서하지 않았다. 제우스는 헤파이스토스에게 튼튼한 족쇄를 만들게 했고 높은 코카수스산에 프로메테우스를 묶어 두었다.

 

 그는 먼 훗날 제우스의 아들 헤라클레스가 그를 자유롭게 해주기 전까지 매일같이 제우스가 보낸 독수리에게 심장을 쪼이는 고문을 당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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