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를 위한 사유의 문제’에 관한 토론
by 송화은율
‘글쓰기를 위한 사유의 문제’에 관한 토론
--- 국민의 글쓰기 능력 향상을 위해 국립국어연구원이 할 일과 관련하여 ---
김 창 원
(경인교육대학교 교수)
Ⅰ
오늘의 세미나 주제는 ‘국민의 글쓰기 능력 향상 방안’에 관한 것입니다. 소흥렬 선생님께서는 국민의 글쓰기 능력 향상을 위해 국립국어연구원이 할 일과 관련하여 글쓰기를 위한 사유의 문제를 제기해 주셨습니다. 제가 공부하는 국어 교육 쪽에서는 ‘사유’ 대신 ‘사고’라는 말을 주로 씁니다만, 언어와 사유(사고)와 문화가 하나로 묶여 있다는 관점은 저희 쪽에서도 널리 퍼져 있고 두루 강조하는 관점입니다. 또한 사유의 층위를 서술적-설명적-해설적-비판적-대안적-독자적 사유로 나누고 그 관계를 점진적 심화 관계로 보는 것 역시 저희 쪽의 논의와 유사합니다. 국어 교육 쪽에서는 그것을 사실적-추론적-비판적-창의적 사고로 나누어 이야기합니다만, 두 구분법은 서로 어긋나지 않게 겹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소 선생님의 발표에서 글쓰기에 ‘사유 공간’ 개념을 도입하여 지성적 사유 공간과 감성적 사유 공간, 그리고 영성적 사유 공간을 구분한 것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다만 그 과정에서 머리의 기능과 마음의 기능, 의식적 사유 기능과 정보 기능, 의식 기능과 두뇌 기능, 물리적 정보 기능과 생물적 정보 기능 등의 대립항들을 상당히 길게 거론하셨는데, 그것들의 개념과 관계망에 대해서는 좀 더 설명을 해 주십사 하는 부탁을 드립니다. 그리고 글쓰기를 위한 사유의 논리로서 연역적․법칙적 논리의 울타리를 넘어설 수 있게 해 주는 귀납, 유비, 변증, 귀추, 실천 논리 등의 비연역적 논리를 제안하셨는데, 그 또한 저의 좁은 안목을 틔워 주는 탁견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여기서도 역시 대립적 이원론의 관점이 강한데, 그보다는 좀 더 유연하게 글쓰기와 사유의 문제에 접근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떠올려 봅니다.
Ⅱ
사실, 소 선생님의 원고는 제가 예상했던 원고와 전혀 다른 글이었습니다. 처음 이 기획에 대하여 들었을 때, 저는 “국어연구원이 드디어 글쓰기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구나.” 하고 반가운 마음이 들면서 한편으로는 걱정스럽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반갑다고 한 이유는 개념과 논리를 먹고 사는 교수들조차 글쓰기에 대해 별 관심을 가지지 않는 현실에서 국어연구원이 본격적으로 글쓰기 문제를 다루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굳이 ‘국립’을 등에 업지 않더라도, 권위와 역량을 함께 갖춘 어느 대학이나 연구소가 그런 일을 해 주었으면 하고 기다리던 차에 국어연구원이 그 일을 맡고 나섰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 걱정스럽다고 한 이유는, 국어연구원이 태생적으로 국어학의 관점에서 글쓰기를 바라볼 가능성이 컸기 때문입니다. 더 적확하게 말하면 어휘와 어법, 통사, 텍스트 등의 잣대로 글쓰기를 재단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던 것이죠. 이러한 걱정은 제 공부 바탕이 문학인 데서 온 기우일 수도 있고, 그동안 국어연구원이 수행해 온 연구 이력에서 온 어느 정도 타당한 우려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저는 제가 토론할 원고가 ‘국민’의 글쓰기 실태를 점검하고, 그들의 글쓰기 실력이 얼마나 형편없는지를 들춰내며, 그러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국어연구원이 어떤 규범과 원리를 제공해야 하는지에 관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 혹은 걱정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저한테 온 것은 철학자이신 소 선생님의 글이었고, 그것은 역시 철학자의 글답게 그러한 ‘언어적인(혹은 외면적인)’ 문제보다는 더욱 본질적인 사유의 문제를 다룬 글이었습니다. 저의 예상은 멋지게 어긋나 버렸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저는 안도와 당혹스러움을 동시에 느낍니다. 제가 안도한 이유는 물론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소 선생님의 글이 문법의 오류니 의미의 모호성이니 하는 개탄으로 가득 찬 글이 아니어서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글은 국어연구원의 지향과 과제에 관해 아무 구체적인 의견도 담고 있지 않습니다. 심지어 ‘국어연구원’이라는 말조차도 나오지 않습니다. 타자는 잔뜩 긴장한 채 투수를 노려보는데 투수가 갑자기 타임을 부르면 이런 느낌이 들까요?
이런 당혹스러움의 원인(遠因)은 아마 각 학문 영역 간의 담론의 차이일 것입니다. 저는 국어연구원의 ‘국어학’ 마인드(국어학적 사고)는 예상하고 걱정했지만 소 선생님의 철학 마인드(철학적 사고)는 미처 예상도 대처도 못한 것입니다. ‘아하, 글쓰기 능력과 국어연구원을 연결하면서 이런 식으로 글을 쓸 수도 있구나.’ 하는 것이 오늘 제가 얻은 소득입니다.
Ⅲ
제가 얻은 ‘소득’이란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요? 저는 이 역설적인 상황이 국민의 글쓰기 능력과 밀접하게 연관되는 문제를 보여 준다고 생각합니다. ‘국민’은, 참 개념이 모호하기도 합니다만, 그 특성이나 밀도 면에서 매우 다양한 담론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일간지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저는 경제면을 못 읽고 제 아내는 스포츠면을 못 읽습니다.(사실은 경제면도 못 읽습니다만.)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다니는 제 아들놈들은 두말할 것도 없지요. 이러한 차이는 읽기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쓰기에도 그대로 나타나지요. 저의 글쓰기와 아내(국문과 출신의, 데뷔만 한 작가입니다.)의 글쓰기, 그리고 제 아이들의 글쓰기는 모두 다릅니다. 한 집안에서 그러할진대 소 선생님의 글쓰기를 제가 예상하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요.
이렇게 보면, 보편적인 ‘국민의 글쓰기 능력’이란 매우 모호한 개념이 되어 버립니다. 그것은 개개인의 능력의 총체일 수도 있고, 국민 구성원의 평균적인 능력치일 수도 있으며, 특정 개인의 능력을 한정해서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또한, 그 능력을 ‘향상시킨다’고 하면 글쓰기에 미숙한 상태와 능숙한 상태, 혹은 쓴 글의 질의 차이, 글을 잘 쓰는 사람과 못 쓰는 사람의 구별을 인정한다는 뜻인데, 저처럼 복잡다단한 담론계에서 그런 판단은 사실상 어려운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른바 ‘먹물’들의 글은 도대체 알아먹을 수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 앞에서 먹물인 저는 과연 글을 잘 쓰는 사람일까요? --- 상대주의보다는 다원주의가 필요합니다.
Ⅳ
‘국민의 글쓰기 능력’이라는 표현을 굳이 쓴다면, 저는 그것을 전반적인 표현 문화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소 선생님께서도 문화 요소를 언급하셨지만,(하기는, 요즘 ‘문화’라는 말을 너무 많이 써서 말 자체가 너덜너덜해지기는 했습니다.) 통시적, 공시적, 계층적 맥락 위에 형성된 담론의 표현 문화야말로 담론 구성원의 글쓰기 능력 그 자체라는 것이죠. 예를 들어 조선 시대의 상소나 비답을 둘러싼 글쓰기 양상을 보면, 왕과 관료를 둘러싼 독특한 토론 문화가 상소라는 표현 형식으로 드러났다고 여겨집니다. 설령 왕일지라도 그 문화를 지켰고, 간관들은 그 문화에 참여함으로써 글쓰기 능력을 마음껏 발휘했지요. 요즈음의 법조 언어, 통신 언어, 문학 언어도 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이를 뒤집어 말하면, 어휘력, 문장력, 표현력, 글 구성력 등의 개념은 글쓰기 능력의 본체를 대표하지 못한다는 뜻이 됩니다.(소 선생님께서 언어와 사유, 문화의 트리니티(삼위일체)를 강조하신 맥락도 이와 비슷하지 않은지요.) 이러한 개념들은 글쓰기 능력의 기초 역할을 할 것입니다. 물론, 기초가 튼튼하지 못하면 건물이 흔들립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설계사가 기초까지 다지러 뛰어다닐 필요는 없습니다. 글쓰기의 기초 능력 배양은 학교에 위임해도 충분합니다.
그러면 국어연구원이 국민의 글쓰기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해야 할 일도 자명해집니다. 통시적, 공시적, 계층적 맥락 위에 형성된 담론의 표현 문화를 분석하고 설명하며 맛깔스럽게 다듬어서 내놓는 일입니다. 그리고 ‘국민’이 그 문화에 참여하도록 자극을 주고, 안내하며, 잘못될 경우에는 바로잡는 일입니다. 이것은 사유의 문제를 다루는 것보다 훨씬 쉬운 일이기도 하지요.
예를 들어 보면, 요즈음 자주 거론되는 문제가 대학생의 글쓰기 능력 부족입니다. 어휘량이 부족하고, 비문 투성이이며, 문체나 글의 짜임에 대한 의식이 전혀 없다는 것이죠. 제가 봐도 글들 참 못 씁니다. 소 선생님의 견해에 의하면 생각이 없으니 쓸 내용이 없고, 쓸 내용이 없으니 제대로 못 쓴다고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고학년이나 대학원생이 되면 그런대로 곧잘 써 내는 것이 또 현실입니다.(개인차는 여기서 문제가 되지 않겠죠?) 문체는 여전히 덜컹거리고 되지도 않는 겉멋이 잔뜩 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글꼴을 갖추어 내는 걸 보면 기특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합니다. 아무도 그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지 않았는데 고학년이 되면 글쓰기 능력이 신장되는 이유는, 제가 보기에 그들이 해당 전공의 표현 문화에 익숙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겸사겸사 일반적인(기초적인) 글쓰기 능력도 신장된 것이죠. 그 학생들에게 다른 전공 내용에 대해서 쓰라고 하면 다시 신입생 수준으로 돌아갈 겁니다. 영어 논문을 쓰는 자연계나 사회과학 쪽 교수들에게 제가 기죽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영어 논문을 쓰는 문화에서 공부하고 밥 벌어먹어 왔으니까!’
Ⅴ
이제 국어연구원에 부탁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글쓰기는 언어와 사고와 문화의 상호 작용을 통해 성립하는 목표 지향적인 행위이고, 글쓰기 능력은 언어 능력과 사고력, 문화 능력에 영향을 받습니다. 글쓰기 능력을 신장하려면 당연히 언어 능력과 사고력, 문화 능력을 신장해야겠지요.
표현과 관련해서 언어 능력은 텍스트를 만들어 내는 능력과 맥락을 만들어 내는 능력으로 이루어집니다. 텍스트를 만들어 내는 능력은 좁은 의미의 글쓰기 능력에 해당하겠지만, 그것만으로 글쓰기 능력을 신장할 수는 없습니다. 맥락을 만들어 내는 능력, 사고력, 문화 능력이 뒷받침되어야만 텍스트도 의미를 얻고 살아납니다. 국어연구원이 할 일은, 텍스트 수집과 분석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 인간의 사유와, 그 너머에 있는 표현 문화를 분석하는 일입니다. 굳이 교육적 의도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더라도 그러한 바탕이 튼실해지면 국민의 글쓰기 능력도 당연히 신장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최근에 유행한 ‘귀여니’의 소설들을 봅시다. 국어학의 마인드(국어학적 사고)로 보면 그 텍스트는 문자 그대로 목불인견입니다.
그때가...4월달이였나..........?.....
벌써 그렇게 됐구나...4개월전..
쓸때도 없으면서..
한참 돈번다고 이리저리 방방 뛰어다녔던 시기였지...
기어코 놀이동산에서 아르바이트를 찾아내..
초록색 용대가리를 머리에 뒤집어쓰고..-_-
가게에 온 손님들에게 풍선을 나누어주던 시기가 있었다_-_-
지금도 윤아는 먹을것이 먹고싶어질때
용머리를 뒤짚어쓴 나의 사진을 펄럭이며 나를 협박하곤 한다_
패스트푸드를 팔던 통나무 형태로 된 가게에_.
왠 교복입은 남녀들이 짝을지어 찾아왔고...
난 아무 거리낌없이..
커다란 용머리를 이리저리 흔들어대며..
그들에게 다가갔다_-_-
- 귀여니(이윤세), <도레미파솔라시도(http://www.guiyeoni.com/)>
이 글을 두고 빨갛게 첨삭해 주면 글쓰기 능력이 신장될까요? 여기에서 ‘작가’가 몰라서 틀린 건 사실 별로 많지 않습니다. 그냥 귀찮아서, 혹은 별 의식 없이 ‘맞게 쓰지 않은 것’뿐이지요. 플롯이나 주제 의식, 서술 등을 문제삼아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귀찮고 골치아프답니다. 이런 글을 청소년들은 열광적으로 읽지요.
국어연구원이 할 일은 이런 글과 전통적인 모범 글의 발상과 글을 써 가는 과정, 글쓰기에서 고려하는 요소 등을 비교하며 분석하는 일일 겁니다. 다분히 인상적인 선정성이니 표피성, 평이성 같은 개념을 또 들고 나오지 말고, 글이 엉망이라고 분개하지도 말고, 언어 표현의 뒤에 숨어 있는 사유와 문화의 요소를 찾아내어, 그것이 글쓰기에 어떻게 구현되는지를 분석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청소년들이 귀찮아하는 요소가 무엇인지 찾아내어 적절한 처리법을 보여 주면 국민의 글쓰기 능력은 자연스럽게 향상될 것입니다. 반대로, 손으로 쓰면 귀찮고 키보드로 치면 귀찮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면 글쓰기 능력의 신장도 설명하지 못하게 됩니다.
Ⅵ
지금까지 제가 쓴 글은 원래 저의 글쓰기 스타일이 아닙니다. 토론자로서 발표 원고를 읽다가 엉뚱한 길로 빠져든 모양입니다. 사실 표현 문화의 힘은 매우 커서, 개인의 스타일은 매우 쉽게 흔들립니다. 저희 학과에 텍스트언어학을 전공한 교수님을 새로 모셨더니 우리 동네(문학 교육)의 글쓰기가 매우 낯설다고 하시더군요. 그렇지만 교육대학교 교수로 살아가면서 금방 이쪽 문화에 익숙해지리라고 믿습니다. 만일 그 분이 우리 동네의 글쓰기에 익숙해지고 그 방식으로 글을 쓴다면 글쓰기 능력이 신장된 것일까요? 제가 원래 저의 글쓰기 스타일을 버리고 이처럼 이상한 방식으로 쓰는 것이 좋은 일일까요, 나쁜 일일까요? 초등학생의 글쓰기는 성인의 글쓰기에 비해 저급한 걸까요?
외국에는 Writing Center(문장 상담소)라는 것이 많이 있고 우리나라에도 최근에 그 비슷한 기관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만, 그 기관에서 하는 일이 교정과 윤문이라면 저는 크게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말하기에서 웅변 학원---(미안합니다.) 언어의 이면은 접어 둔 채 표현 기술만을 가르치는---과 같은 것이 아닐까 의심하는 것이지요. 정작 웅변 학원은 그런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려고 애쓰고 있는데, 글쓰기에서 그런 전철을 밟아 갈 필요는 없겠지요. 그렇다고 해서 퀴즈를 풀거나 딜레마에 대해 토론하면서 사고력을 기른다는 사교육의 뒤를 따라갈 필요도 없습니다. 국민의 글쓰기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국어연구원만이 할 수 있는, 광대하고 중후한 연구를 하여야 할 것입니다. 소 선생님은 그 초점을 사유로 잡았고 저는 표현 문화로 잡았습니다만, 그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아 보입니다. 텍스트와 관련된, 그리고 맥락과 관련된 표현 문화 안에 그들이 모두 포함되지 않을까요.
소중한 시간에 두서없는 말씀을 들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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