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글쓰기를 위한 사유의 문제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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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쓰기를 위한 사유의 문제 / 소 흥 렬(포항공과대학교 교수)

 

 

1. 언어와 사유와 문화

 

대학생들의 글쓰기 교육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맞춤법이 아니다. 문장의 의미를 명확하게 쓰는 것도 아니다. 그런 기초 능력은 초등 교육과 중등 교육의 과정에서 충분히 길러질 수 있다. 대학생들의 글쓰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생각이 없는 글을 쓴다는 것이다. 예컨대 자신의 인생관에 대한 글을 쓰라고 하는데도 쓸 이야기가 없다고 한다. 생각나는 것이 없다고 한다. 스스로 생각해서 글을 쓰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고 한다. 그 대신 인생관이란 무엇인가라는 일반 주제에 대하여 개념적이고 관념적인 이야기를 모아서 엮어 오는 학생들이 있다. 남의 글에서 자신의 생각이 아닌 남의 생각들을 인용하는 것에 익숙해 있다.

 

생각 없이 글을 쓰는 버릇을 대학에 와서 고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불가능한 일은 아니므로 한 학기의 과정에서 여러 편의 글을 써 보면서, 특히 혹독한 비판과 지적을 당하면서 생각 없이 글을 쓰는 버릇을 고치게 된다. 그런데 예외적인 학생들이 있다. 자신의 생각을 훌륭하게 써 오는 학생들이 있는 것이다. 그런 학생들은 어릴 때부터 책을 많이 읽고, 일기를 계속 쓰고, 좋은 선생님께 글쓰기를 제대로 배웠다고 한다. 그러니까 생각이 있는 글쓰기, 자신의 생각을 자신의 글로써 표현하는 글쓰기는 초등학교 교육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고, 또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그런 글쓰기 교육을 초등 교육과 중등 교육에서 실천하지 못할까? 무엇이 문제일까?

 

어쩌면 이것은 선생님들의 문제일 수 있다. 글쓰기 선생님들만이 아니라, 모든 초등중등 선생님들이 스스로 생각이 있는 글을 쓰는 분들이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교육 실정은 그렇지 못하다. 글쓰기를 담당하고 있는 선생님들조차도 스스로 생각이 있는 글을 쓰는 것에 자신감이 없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자신이 훌륭한 예술가는 아니더라도 예술 작품을 평가할 수는 있지 않느냐고 반론을 제시할 수는 있겠지만, 글쓰기의 경우는 그렇지가 않다. 글쓰기와 사유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글로써 생각하고 글에서 생각을 읽어야 하기 때문에 남의 글을 읽고 그 글에 담긴 생각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생각이 있는 글을 쓸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도 생각이 없는 글이 너무 쉽게, 너무 많이 통용되고 있다. 글에 담긴 생각, 즉 글의 내용을 제대로 평가해 보지 않은 글들이 신문이나 잡지에 그대로 실리고 있다. 글의 내용에 관계없이 신문이나 잡지에 자주 글을 쓰는 사람이면 글쓰는 사람으로 그 능력을 인정받는 세상이다. 대중적 인기가 곧 우수성을 말한다는 광고 효과가 글쓰기의 영역에서도 그대로 통하는 세상이다.

 

문제의 심각성은 그런 대중 매체의 글쓰기에만 그치지 않는다. 학술 논문에서도 내용보다 논문의 편수가 업적 평가에 더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의 논문에 여러 명의 공동 연구자들의 이름을 넣어 주는 관행이 그런 평가 기준에서 생긴 것이다. 연구 내용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이지만 서로 서로 이름 넣어 주기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그 연구 논문에 표절 시비 같은 문제가 제기되면, 논문을 직접 쓴 사람에게만 책임을 지게 하고 다른 공동 연구자들은 발뺌을 해 버리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발생한다. 책임질 수 없는 연구 논문에 자신의 이름이 공동 연구자로 표시되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학문의 세계가 우리에게는 아직 문제로 남아 있다. 이러한 언어 문화의 풍토에서 글쓰기 교육이 제대로 될 리 없다. 자기 이름으로 된 글이지만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니까 글의 내용에는 관심을 갖지 않아도 된다. 글의 내용이 중요하지 않다면 생각이 없는 글이라도 좋다는 것이다.

 

언어와 사유가 분리될 수 있다는 것, 또는 글의 내용을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언어 사용에 관한 또 한 가지 심각한 문제를 가져온다. 언어 폭력의 문제가 그것이다. 이는 요즈음 대학의 사이버 공간에서 흔히 있는 일이다. 다음과 같은 일례가 있다. 한 학생이 특정 교수를 터무니없이 비방하는 글을 대학의 인터넷에 올렸다. 교수와 직원과 학생이 다 볼 수 있는 인터넷이었으므로 대학의 학생 지도 위원회가 진상 조사를 하기로 했다. 근거 없는 내용의 글을 인터넷에 올려서 그 교수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었다는 이유로 그 학생을 중징계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퇴학을 주장하는 위원들도 있었다. 그런데 상담 교수의 보고가 그들의 논의 방향을 바꾸게 했다. 그 학생이 인터넷에 올린 비방의 내용은 그의 지도교수에게 들은 이야기였다는 것이다. 요즈음 대학생들은 자신이 인터넷에 올리는 글에 대해서도 그 내용을 확인해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들은 대로, 읽은 대로 옮겨 쓰면서도 책임감을 느끼지 않는 언어 질서, 언어 문화가 문제의 원인이었다. 문제는 그 지도교수의 이야기로 넘어가게 되었는데, 확인 결과 그 교수의 이야기도 근거 없는 추측에서 나온 것임이 밝혀졌다. 자신의 승진이 부결되었다는 사실에 분개한 그는 논문 평가의 과정에서 그 특정 교수가 부정적인 평가를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그 교수에 대한 비방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술 좌석에서 한 생각 없는 이야기가 그렇게 큰 언어 폭력으로 피해를 주게 될지는 상상도 못했다는 말로써 정중하게 사과를 했다는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언어폭력의 사건은 그렇게 마무리가 되었지만 언어 폭력의 피해를 거두어들일 길은 없었다. 더 우수한 도구일수록 더 잔인한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은 군사 무기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인터넷은 언어라는 도구가 얼마나 파괴적일 수 있는가를 잘 보여 준다. 생각 없이 쓰는 글, 책임지지 않는 글이 인터넷을 통하여 가져올 수 있는 파괴력을 보여 준다.

 

글쓰기의 문제는 언어의 문제이지만 언어만의 문제가 아니다. 글쓰기 능력의 문제는 도구로서의 언어만 더 좋게 만들면 되는 문제가 아니다. 글쓰기 능력은 곧 사유 능력의 문제이며, 사유 능력은 우리 문화의 영향을 받게 되어 있다. 사유 능력이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우리 문화를 창조해 가기도 하지만, 또한 우리의 사유는 우리 문화의 영향을 받으면서 성장해 간다. 그런데 우리의 사유는 우리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유이다. 언어가 없이도 사유를 할 수 있을까? 글쓰기에서 말하는 일상 언어가 아니라도 사유는 할 수 있다. 수학 언어로 사유할 수도 있고, 음악 언어로 사유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어떤 종류의 언어도 쓰지 않는 사유가 가능할까? 이것은 자기만의 사유, 즉 아무와도 나눌 수 없는 자기만의 사유를 할 수 있느냐는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그런 사유의 세계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유는 우리의 언어나 문화를 통해 표현할 수 없으므로 다른 누구의 관심사도 될 수 없다. 사유의 문제는 언어적 사유, 즉 서로 나눌 수 있는 언어로 표현된 사유에 관한 문제이므로 그것은 곧 언어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글쓰기의 문제, 또는 글쓰기 능력의 문제는 우리의 언어, 우리의 사유, 그리고 우리의 문화가 상호 작용 하는 복합적 관계의 문제이다. 문제를 단순화하기 위해 언어와 사유의 문제나, 언어와 문화의 문제, 또는 사유와 문화의 문제로 제한하고 집중하여 문제를 다룰 수는 있겠지만 어느 면의 문제를 다루든지 다른 면들과의 관계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인터넷이 정보 교환의 수단이 된 지금은 인터넷 언어, 인터넷 글쓰기가 우리의 사유 세계와 우리의 문화에 지배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홍수로 범람하는 강물처럼 인터넷 정보의 홍수가 우리의 사유 세계와 우리의 문화 세계를 휩쓸어 가고 있다.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도 범람하는 정보의 급류에 휩쓸려 갈 수가 있다. 또한 모든 것을 휩쓸어 가는 홍수의 물결은 문화적인 가치를 식별할 수 없게 한다. 무엇이 귀한 것이고 무엇이 범상한 것인지를 분간할 수 없게 한다. 우리 것과 남의 것을 구별하는 것도 점점 더 어려워진다.

 

정보화 시대라고 하는 정보 홍수에 표류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의 사유 세계를 지켜야 한다. 자기 생각이 살아 있어야 하고, 살아 있는 자기 생각이 담긴 글을 쓸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글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는 자신의 사유 세계가 살아 있어야 한다. 그런 언어 문화, 그런 문화 풍토가 살아 있어야 한다. 따라서 글쓰기를 통하여 표현되고, 강화되고, 향상되어야 하는 사유의 문제가 중요하다.

 

 

2. 글쓰기와 사유의 기능

 

대학 입학을 위한 수험 공부가 중심이 된 우리나라의 중등 교육 과정은 독자적이고 창조적인 생각을 할 수 없게 한다. 어떤 문제에서든 정답을 찾아서 외우게 하는 교육이 되어 버렸다. 대학생들의 글쓰기에서도 이러한 교육의 병폐가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정답식 글쓰기를 하도록 하는 것이다. 자신의 인생관을 이야기하라는 글쓰기 과제에서도 인생관에 대한 정답을 찾고자 하는 웃지 못할 우스운 일이 일어난다.

 

생각한다는 것을 머리를 쓰는 것과 마음을 쓰는 것으로 나누어 보면, 우리 학생들은 머리를 쓰는 생각에만 훈련이 되어 있고 마음을 쓰는 생각에는 익숙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러니까 자기 마음을 표현하는 글을 쓸 수 없다는 것이다. 머리를 쓰지 않고서 마음을 쓸 수는 없다. 마음을 쓰는데 몸이 아프게 되는 것은 머리를 쓰는 것이 바탕이 되어 마음을 쓸 수 있음을 말해 준다. 그러나 마음을 쓰지 않고 머리만을 쓸 수는 있다. 불필요하게 마음을 쓰는 것을 피하고 머리만 써야 할 때가 있다. 그런데 글쓰기에서조차 머리만 쓰게 되면 마음이 없는 글, 즉 자신의 생각이 없는 글이 된다.

 

기억하기, 반복하기, 따라 하기, 흉내 내기, 변형하기, 계산하기, 선택하기, 자제하기, 상상하기 등으로 사유의 기능을 나누어 보면 처음 몇 가지 단계는 머리 쓰기만으로 가능한 기능인 것 같다. 그러면서 점차로 마음을 쓰는 기능으로 옮겨가는 단계가 된다. 컴퓨터의 기능은 머리를 쓰는 기능을 모의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철학자들은 독자적이고 창조적인 사유 기능, 즉 마음을 쓰는 사유 기능만을 사유로 간주하기 때문에 컴퓨터의 계산 기능은 사유 기능이 아니라고 한다. 정답을 찾고 모범 답안을 찾는 수험생의 사유 기능은 점점 컴퓨터의 계산 기능을 닮아 간다. 머리 쓰기만을 필요로 하는 사유 기능으로 퇴화해 간다.

 

글쓰기 교육의 목적은 글쓰기 능력의 향상이지만, 먼저 해결되어야 할 문제는 학생들에게 표절이나 짜깁기로 된 글이 아닌 자신의 글을 쓰게 하는 것이다. 요즈음 학생들은 표절이나 짜깁기를 너무 쉽게 생각한다. 인터넷을 통하여 쉽게 얻을 수 있는 표절 자료나 짜깁기 자료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글쓰기 과목의 강의 계획서 아래에 표절은 자살과 같으며 짜깁기는 마약과 같다. 독자적이고 창조적인 자신의 능력을 과소평가하지 말자!”라고 적어 두지만 여전히 학생들은 표절하거나 짜깁기한 글을 제출하고 있다. 어떤 고등학생이 글짓기 대회에서 수상한 글이 표절이었으며, 그 수상 경력으로 대학에 특차로 입학을 하게 된 것이 뒤늦게 발견되어 언론에 보도된 사실은 표절 문제의 심각성을 말해 준다. 표절은 범죄 행위로 처벌이 되어야 하지만, 처벌만으로 표절을 없앨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의 언어 문화 속에 그런 것을 허용하지 않는 문화적 자제력을 길러야 하며, 그런 문화 풍토를 위한 글쓰기 교육을 일찍부터 효과적으로 실현해야 할 것이다.

 

문제는 독자적이고 창조적인 자신의 글을 쓸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적어도 독자적인 생각을 표현하는 글을 쓸 수 있게 해야 하며, 그런 독자적 생각이 담겨 있지 않은 글은 자기 글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학생들은 독자적인 사유를 하지 않아도 되도록 길들여져 있다. 입시 준비에 매달려 있는 우리의 교육 풍토가 그렇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이미 그렇게 교육받은 기성 세대들이 만들어 가는 우리의 문화 풍토도 독자적 사유를 하지 않아도 되게 하거나 독자적 사유를 저해하는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어떻게 생각하면 사람은 누구나 독자적으로 생각하게 되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일상생활 속에서는 독자적 사유가 크게 문제시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글쓰기에서는 문제가 되고 있다. 글쓰기를 통한 우리의 언어 문화에는 독자적 사유가 문제점으로 남아 있다. 아마 여기에는 우리의 언어 문화계를 차지하는 출판물의 상당 부분을 번역물이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독자적 사유는 다른 몇 가지 사유 기능과 비교할 때, 더 어렵고 더 높은 단계에 해당한다는 것도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서술적 사유는 기본적인 것이어서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다. 우리의 일상 언어는 거의 무제한적인 서술을 허용할 만큼 풍부하다. 우리의 사유 기능과 사유 세계에서 기본이 되는 것은 표상 기능이기 때문이다. 표상 중에서도 일상 언어적 표상이 기본적이기 때문에 세계를 일상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언어적 사유의 기본이다. 그러나 일상 언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서술한다는 것은 그렇게 용이하지가 않다. 예컨대, 음악 언어로 서술하는 능력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림을 그려서 표현하는 도식적 서술도 특별한 능력을 필요로 한다. 수학 언어적 서술은 전문가만 할 수 있다. 그러나 일상 언어로 서술된 내용을 다른 언어로 고쳐서 서술해 보는 능력을 개발하면 우리의 서술적 사유를 더 풍부하고 더 강하게 해 줄 것이다. 특히 지금은 사이버 공간을 통한 영상화가 일상화되어 있으므로 일상 언어 서술의 내용을 사이버 공간에서 영상적 표현으로 옮겨 보는 방법은 우리의 서술적 사유를 한층 더 유효하게 해 줄 것이다.

 

설명적 사유는 무엇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에 대한 이해와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서술적 사유보다는 어렵다. 어떤 목적지를 찾아가는 길의 설명, 도구 사용의 방법 설명, 놀이의 규칙 설명, 기계의 기능 설명, 건축 공간의 구조 설명, 사건의 원인 설명, 집단 행위의 이유 설명, 변화 과정의 역사적 설명 및 지향적 설명은 그 대상의 이해만이 아니라 그것의 설명에 필요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 정확한 설명이 되어야 하고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설명이 되어야 한다.

설명적 사유에 비해 해설적 사유는 주관적이다. 설명에는 주관이 개입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해설에는 해설자의 주관이 개입되므로, 해설자의 주관이 해설의 방향이나 내용을 다르게 할 수 있다. 설명은 객관적이면서 보편적일 수 있지만, 해설은 주관적이면서 해설자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해설적인 사유보다 더 주관적인 것이 비판적 사유이다. 비판의 관점이 제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판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하고, 반론에 대한 답변을 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책임을 질 수 없는 비판은 비방이 되고 만다. 인터넷을 통하여 익명으로 남을 비방하는 것이 그런 무책임한 비판이다. 비판도 정확해야 하며 설득력이 있어야 한다. 반론을 가능하게 할 정도로 비판의 관점이 뚜렷하게 표현되어야 한다. 비판적 사유를 파괴적인 것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비판의 중요성과 의미는 비판받는 사람과 함께 생각하면서 발전적으로 비판의 대상을 개선해 가자는 데에 있다.

 

비판적 사유보다 더 주관적인 것은 대안적 사유이다. 문학이나 예술에서 평론가 기능은 비판적 사유로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글쓰기 교육에서는, 예컨대, 학생의 글을 비판해 주는 것으로 그칠 수 없다. 대안적 사유를 적용하여 학생의 생각을 이끌어 주어야 할 때도 있다. 독자적 사유로 나아가게 하는 도움을 주어야 할 경우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대안적 사유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는 것이 독자적 사유이다.

 

그러나 독자적 사유가 꼭 이처럼 다양한 사유 기능의 단계들을 거쳐서 이를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이를테면, 서술적 사유나 설명적 사유에서 바로 독자적 사유로 나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독자적 사유의 차원과 깊이를 말하자면 그런 단계적 사유 기능들을 통한 차별성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글쓰기 능력에 필요한 독자적 사유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서술적 사유, 설명적 사유, 해설적 사유, 비판적 사유 및 대안적 사유를 단계적으로 거치면서 점진적으로 더 깊은 주관의 세계로 접근해 가는 훈련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3. 글쓰기와 사유의 공간

 

사유 기능은 정보 기능이다. 정보 처리, 정보 교환, 정보 소통 등의 기능을 한다. 정보 기능은 정보 공간에서 일어난다. 물론 여기서 공간이라고 하는 것은 시공간을 의미한다. 공간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나 기능은 시간적 변화를 필요로 하므로, ‘시공간이 될 수밖에 없다. 정보 기능의 하나인 사유 기능이 펼쳐지는 시공간을 사유의 공간이라고 하자. 그러면 어떤 정보 기능의 사유가 사유의 공간에서 일어나느냐에 따라서 사유의 공간을 특성화하여 생각할 수 있다.

 

우리는 사유 기능을 마음의 기능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머리를 쓰지 않고서는 마음의 기능이 일어날 수 없으며, 앞서 지적한 것처럼 머리를 쓰는 기능 중에 상당한 영역은 생각하는 기능에 포함될 수 있는 것이다. 사유 기능을 의식 기능으로 생각하더라도 머리를 쓰는 의식 기능과 마음을 쓰는 의식 기능을 함께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무의식은 사유 기능에 포함될 수 있는가? 꿈의 현상을 무의식의 작용이라고 볼 때 꿈속에서도 계산을 하고 추리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은 무의식을 사유 기능의 연장으로 보게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꿈은 의식적 사유 기능이라고는 할 수 없는, 특이한 정보 기능의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의식과 무의식의 구별 대신 의식적 사유 기능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두뇌의 정보 기능을 구별해 볼 수도 있다. 이것은 컴퓨터의 계산 기능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하드웨어(hardware) 차원의 물리적 기능을 구별할 수 있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소프트웨어(software) 차원의 계산 기능이나 하드웨어 차원의 물리적 기능은 다같이 정보 처리 기능을 하는 것이다. 계산 언어의 정보와 물리 언어의 정보가 다를 뿐이다. 게다가 두 차원의 정보언어는 서로 기계적인 전환을 할 수 있도록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정보 기능으로 볼 때는 동일한 기능을 서로 다른 차원에서 수행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인간의 의식적 정보 기능과 두뇌의 정보 기능 사이에도 그런 전환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머리를 쓰는 마음의 사유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두뇌 기능과 의식 기능의 관계는 기계적으로 고정된 관계가 아니라는 점이 컴퓨터와 다른 점이다.

 

무의식이나 꿈의 현상은 두뇌의 정보 기능에서 일어나는 정보 처리가 부분적으로 의식적 정보 기능을 수반하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의식적 정보 기능의 경우 두뇌의 정보 기능이 충실하게 지원하고 수반하게 되어 있지만 가끔 두뇌 기능이 의식 기능을 따르지 못하는 현상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마음은 원하지만 머리가 따르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런가 하면, 마음이 처리해 내지 못하는 정보를 두뇌가 처리해 주는 경우도 있다. 마음을 쓰지 않음으로써 더 좋은 생각이 떠오를 때가 있다. 마음을 비움으로써 세상이 다르게 보일 수 있다. 이처럼 우리의 사유 기능, 사유 공간 또는 사유 세계는 의식 기능에 제한되어 있지 않고 두뇌 기능에까지 연결되어 있다. 두뇌 기능과 의식 기능의 상호 작용을 통하여 끊임없이 서로 영향을 주고 있다. 이렇게 볼 때 꿈의 세계도 일종의 사유 공간으로 볼 수 있으며, 무의식의 세계도 사유 공간의 차원으로 이해될 수 있다.

 

다시 컴퓨터 비유로 돌아가 보면, 우리의 두뇌 기능이 하드웨어의 기능과 다른 점을 알 수 있다. 인간의 두뇌는 물리적 정보 기능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생물적 정보 기능도 한다. 물리적 정보 기능에서도 분자적 정보 기능, 원자적 정보 기능 그리고 입자적 정보 기능이라는 차원의 구별을 할 수 있다. 두뇌의 정보 기능은 이러한 물리적 차원의 정보 기능을 모두 그 바탕으로 하면서 세포 차원의 정보 기능을 한다. 따라서 우리의 사유 공간은 의식 공간에서의 언어적 사유를 기본으로 하지만, 그것을 지원하고 때때로 그것을 지배하기도 하는 하위차원의 다양하고 중층적인 정보 기능 및 정보 공간을 필수 조건으로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유 공간의 조건이 글쓰기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창조적인 생각이 무의식에서 나온다든지, 직관에서 나온다든지 하는 것은 역시 의식의 기능보다 두뇌의 기능이 그러한 사유의 능력에 더 크게 작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창조적인 글쓰기를 위해서 명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여행을 해야 하는 사람들도 있다. 글쓰기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노동을 해야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일들은 아마 사유 공간에 영향을 주는 하위 차원의 정보 기능에 작용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의식적인 사유 공간에서의 기능을 물리적 차원과 생물적 차원에서의 두뇌 기능을 통하여 강화하고 자유롭게 해 주는 방법일 수 있다는 것이다.

 

두뇌의 정보 기능으로 우리 인간은 물리적 정보 세계와 생물적 정보 세계에 참여하며 살아가고 있다. 입자적 정보 기능, 원자적 정보 기능, 그리고 분자적 정보 기능의 세계에 영향을 받고 있으며, 세포적 정보 기능이라고 할 생명 세계의 정보 기능에서도 영향을 받고 있다. 그렇다면 마땅히 우리의 두뇌 기능이 그런 물리 세계와 생명 세계의 정보 공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어야 한다. 초능력을 말하는 사람들은 두뇌 기능이 물리 세계나 생명 세계에 직접적이면서 유효한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적인 체험으로 말하자면, 마음의 정보 기능이 두뇌의 정보 기능을 통하여 물리계나 생명계의 정보 기능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 영향력이 너무 약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기도의 힘이라든지 주술의 힘 같은 것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으므로 그런 정보 기능의 영향력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이와 같은 두뇌 기능의 하향적 정보 능력과는 다르게 의식의 정보 기능은 우리 인간에게 전혀 다른 정보의 세계를 제공한다. 그것은 일상 언어가 지배하는 언어적 사유의 세계를 말한다. 물리적 정보 세계와 생물적 정보 세계가 자연의 세계를 말한다면 언어적 정보 세계는 우리 인간이 만들어 가는 문화의 세계를 말한다. 우리 인간이 창조해 가는 문화의 세계이다. 글쓰기는 바로 이러한 문화 창조에 참여하는 사유 공간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일상 언어로 창조되는 사유 공간, 즉 글쓰기의 사유 공간을 우리는 사유의 특성에 따라서 지성적 사유 공간’(intelligent space), ‘감성적 사유 공간’(mood space), 그리고 영성적 사유 공간’(soul space)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지성적 사유 공간이성적(理性的) 사유 공간이라고 할 수도 있다. ‘감성적 사유 공간정서적 사유 공간이라고 할 수도 있다. ‘영성적 사유 공간정신적 사유 공간이라고 할 수도 있다.

 

지성적 사유 공간은 글쓰기의 기본 조건이다. 글쓰기 능력을 길러 줄 때 우선 지성적 능력의 글을 쓸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글에서 드러나는 지성의 힘, 지성적 관심, 지성적 성숙을 중요시한다는 뜻이다. 지성적 사유의 공간은 개인의 생각이 표현되는 공간일 수도 있고, 두 사람의 상대적 생각, 또는 여러 사람들의 집단적 생각이 표현되는 사유 공간일 수도 있다.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 표현되는 사유는 정확하고 예리한 비판 능력과 판단 능력을 보여 주어야 한다. 논거를 제시할 때는 설득력이 있어야 하며, 논지의 전개는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논리적 문제 제기를 할 수 있는 단계까지 철저하게 해 가는 사유가 되어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생각이 발전하고, 성장하고, 새로워지는 변화의 과정을 보여 줄 수 있으면서 심오한 문제 의식과 폭넓은 통찰력을 지향하는 그런 사유 공간을 만들어내는 글이어야 하는 것이다.

 

대학생들의 글쓰기에서 의외의 문제로 떠오르는 것은 감정 표현이 어렵다는 점이다. 솔직하고 정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일이 어렵다고 한다. 그저 감상적인 글을 쓰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감상문을 쓰라고 하면 상투적인 용어로 마음에도 없는 형식적인 표현의 글을 써 온다.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일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며, 감상문에는 누구나 느낄 수 있는 보편적 감정이 표현되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지성적 사유 공간과 감성적 사유 공간은 서로 배치되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물론 감정이 지배하는 글을 쓸 수는 없다. 감정이 표현되는 글이라는 것은 정리되고 수용된 감정으로 표현되는 글을 말한다. 역사적으로 해석된 감정을 뜻하기도 하고, 새로운 차원으로 승화된 감정을 뜻하기도 한다. 이처럼 정서화된 감정은 지성화된 정서또는 지성적 정서라고 할 수 있다. 지성적 사유 공간 속에 정서적 사유 공간이 수용될 수 있는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지성적 사유 공간에 정서적 사유 공간이 더해지고 공유되는 글을 쓸 수 있을 때 그 글은 자기 생각, 자기 정서가 담긴 자기 글이 될 수 있는 독자성을 확보하게 된다. 창조적인 글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준다.

 

글쓰기의 영성적 사유 공간은 영혼이 표현된 글에서 발견할 수 있다. 영혼이 표현된 글은 감동이 있는 글을 말하며, 영감을 주는 글을 말한다. 이것은 예술 작품으로서 갖추어야 할 조건을 말하는 것이다. 작가의 영감이 작품에 표현되어 독자와 감상자에게 감동을 전달하는 그런 작품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영성적 사유 공간이 표현된 작품은 지성적 사유 공간의 조건과 정서적 사유 공간의 조건을 만족시키는 글이면서 영감이 있는 글, 예술 작품으로 평가 받는 글이 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종교적 영감을 표현하는 영성적 사유의 공간도 마찬가지이다. 지성적이면서 정서적인 종교적 체험이 계시나 깨달음으로 오는 영감으로 승화할 때, 영성적 사유의 공간을 창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종교적, 예술적 영감이 어떻게 생길 수 있는가? 영감도 특수한 정보 기능이므로 정보 매체를 통해서만 영감의 정보 내용이 전달될 수 있다. 자연 속에 있는 정보 매체를 통해서 올 수밖에 없다. 자연에서 얻는 영감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영감의 정보 내용도 자연으로부터 오는 것인지는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비록 그것이 초자연적인 어떤 것으로부터 오는 정보 내용이라고 할지라도 정보 기능적인 조건 때문에 자연적인 정보 매체를 통해서 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주적 정보 기능의 매체를 통한 우주적 정보 내용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뜻한다. 이와 같은 영감은 앞서 지적한 두뇌 기능에서 얻을 수 있는 직관적이고 초능력적인 정보 능력과 상통하는 것일 수 있다. 자연 속에서, 자연과 함께 몸으로 하는 정보 기능이 곧 영감의 체험일 수 있다는 것이다.

 

영성적 사유 공간을 창조하는 글쓰기는 영감을 체험하고 영혼을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필요로 한다. 우리의 일상 언어는 이러한 영성적 사유 공간의 언어가 될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가장 창조적인 표현 수단이다. 글쓰기의 도구가 문제 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글쓰기의 능력을 영성적 사유 공간을 지향하는 수준까지 추구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며, 그러한 사유 공간을 위하여 창조적 사유를 개발하고 개선하는 것이 중요하다.

 

4. 글쓰기와 사유의 논리

 

공과 대학의 과학도들에게 철학 강의를 하면서 얻는 특이한 체험이 있다. 그들은 합리적인 사유를 한다는 철학이 이런저런 논리를 적용하면서도 최종적인 해답이 없는 문제들이라고 내버려 두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인다. 수학적인 연역 논리 또는 계산적인 논리에 익숙해 있는 과학도들은 정답이 없는 논리적 사유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과학도들은 연역 논리적 필연성으로 결론에 이르게 하지 못하는 그런 약한 논리가 무슨 소용이냐고 질문한다. 현대 물리학이 기계적인 물리 세계가 아닌 상대적이고, 불확정적이고, 불확실하고, 확률적인 물리 세계를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 그대로 수긍하면서도 수학적 연역 논리를 이용한 모형화의 가능성을 좀처럼 포기하지 않으려고 한다.

 

우리 인간에게는 기계적 질서를 선호하는 성향이 있는지도 모른다. 자연의 질서는 법칙적 질서이어야 한다고 믿고 싶어 하는 속성이 있는지도 모른다. 이는 우리의 인식이 그러한 법칙적 질서를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릴 때는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법칙적 질서를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성장해야 하기 때문일 수 있다. 그러다가 성장해 가면서 그러한 권위적 질서가 그대로 통하지 않는 세상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자연 현상에 대한 과학적 인식이 기계적 질서에서 확률적 질서로 바뀌는 것과 같다. 그리고 더 크게는 우주의 역사가 대폭발 이후 점점 더 복잡해지고 무질서해지는 방향으로 팽창해 가는 것과도 같다. 물질 세계에서 생명 세계로, 생명 세계에서 의식 세계로 진화해 가는 과정에서 볼 수 있는 변화와도 같다. 그러한 질서의 변화가 엄연히 있는데도 연역적 기계적 질서를 그대로 믿고 있다는 것은 자연의 역사나 의식의 역사와 더불어 성장하는 것을 거부하는 유아적 반응이 아닐 수 없다.

 

자연 현상에든 인간 사회의 역사적 현상에든 법칙적 변화도 있고, 역사적비법칙적 변화도 있다. 연역적법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현상도 있고, 연역적법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도 있다. 그런데 연역적법칙적 현상은 반복되는 현상을 말한다.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현상을 말하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자연에는 그런 기계적 현상이 있을 수 없지만 연역 논리가 적용될 수 있을 만큼의 기계적인 현상, 반복적인 현상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법칙적현상을 역사적현상과 구별해서 말할 수 있다. 역사적 현상은 반복이 없는 변화의 현상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역사의 논리는 비연역 논리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역사적 현상을 여전히 연역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이해하려는 성향이 있다.

 

역사적 현상을 연역적법칙적 설명 모형에 적용하고자 하는 것은 역사를 지배하는 법칙 같은 것이 있다는 가정을 한다는 뜻이다. 기존의 역사적 질서가 변하지 않고 그대로 지속될 수 있게 하는 어떤 힘이 작용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다시 말하자면 정치 체제에 대한 보수주의와 윤리적 가치에 대한 현실주의를 의미하는 것이다. 권력이 곧 정의라고 믿는 현실주의를 말하며, 예컨대 미국의 평화라고 하는 권력 체제가 그대로 지속될 것을 믿는 보수주의를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보수주의자와 현실주의자가 최근의 이라크 전쟁을 보는 관점의 논리는 그야말로 연역 논리적이라는 것이 놀라울 정도이다. 이라크 전쟁의 처음과 끝이 모두 미국이 계획한 대로 되었으며, 앞으로도 미국의 중동 정책이 계획대로 진행될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는 관점이다. 미국의 힘, 미국의 질서를 거역할 수 있는 어떤 힘이 대두할 가능성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마치 보편 법칙이 지배하는 자연 현상처럼 미국의 평화가 지배하는 역사를 설명하고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보수주의와 현실주의의 관점이 더욱 놀라운 것은 그와 같은 연역 논리적 설명과 예측을 부정하는 역사적 사건들이 일어나더라도 그런 사실을 무시하면서까지 연역적-권력적 질서를 고집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작전과 계획대로 모든 일이 진행되고 있으며, 학살과 파괴는 정당한 것이었다는 미국의 입장을 온 세계에 알리기 위해 미국의 언론들은 서부 영화를 만들듯이 전쟁의 장면을 편집하고 조작하고 연출하여 보도했다. 연역 논리적 질서를 전제로 하면 그런 연출극들은 당연히 실제 상황을 보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무엇이 보도되지 않고 있느냐를 조금만 생각해 보면 그 엄청난 학살과 파괴를 당한 이라크 사람들의 반응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이라크 대학생들이 느껴야 했던 굴욕감과 분노를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러한 굴욕감과 분노가 이라크의 미래 역사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으면서 미국의 계획대로 미국의 평화가 지켜지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역사를 보지 않겠다는 것이다. 비연역적인 역사의 논리를 부정하는 것이다.

 

권력이 곧 정의라고 믿는 현실주의자는 발밑의 모래가 역사의 파도에 조금씩 쓸려 나가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역사적 질서는 결코 연역적-법칙적 질서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 역사적 질서는 변화하는 질서이다. 발전하는 질서이다. 귀납적-역사적 설명, 유비적-역사적 설명, 변증적-역사적 설명, 귀추적-역사적 설명, 그리고 실천적-역사적 설명이 가능하고 필요한 변화의 질서이다.

 

귀납 논리는 역사의 징조를 읽을 수 있게 한다. 통계적 현상에 좌우되지 않고, 오히려 분포적으로 드문드문 일어나는 사건에서 어떤 역사적 변화의 방향을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통계적으로는 예상할 수 없는 일을 몇 가지 징조를 통하여 예측하게 하는 것이 귀납 논리적 지혜이다.

 

유비 논리는 역사적 교훈을 가능하게 한다. 비슷한 역사적 상황을 인식함으로써 역사의 미래를 볼 수 있게 한다. 예컨대, ‘로마의 평화미국의 평화를 비교하여 제국의 미래를 예측하게 한다. 패권주의적 역사의 변천 과정을 설명하고 예견하게 한다.

 

변증 논리는 갈등과 대립의 역사가 발전적으로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 준다. 평면적 절충이 아닌 변증법적 종합의 방향을 보여 주는 것이다. 변증 논리는 또한 지양적 발전을 위해 모순과 갈등의 상황을 만들어 내는 적극적 참여와 실천의 논리가 되기도 한다.

 

귀추 논리는 한 시대의 역사를 전체적으로 조망하여 볼 수 있게 한다. 부분 부분의 역사적 사건들을 전체 역사라는 한 시대 속에서 새롭게 인식할 수 있도록 하는 논리이다. 역사적 관점에서 설명하고 해석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포괄화, 일반화, 추상화 및 상징화의 논리이다.

 

실천 논리는 역사적 과정을 목적과 수단의 관계로 볼 수 있게 한다. 주어진 역사의 목적을 위한 다양한 방법을 생각할 수 있게 한다. 그러한 목적의 달성이 또 다른 역사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인식될 수 있게 하는 실천적 사유의 논리이다. 역사를 문제 해결의 과정으로 볼 수 있게 하는 논리이다.

 

역사의 논리가 이상과 같은 몇 가지 비연역 논리의 유형으로 제한된다는 뜻은 아니다. 적어도 이러한 비연역 논리적 사유를 필요로 하는 것이 역사적 변화, 역사적 발전이라는 뜻이다.

 

그러면 왜 이와 같은 비연역 논리가 글쓰기의 논리로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가? 법칙적-연역적 설명이 가능한 현상은 일상 언어가 아닌 수학 언어로 공식화하여 서술할 수 있다. 일상 언어로 서술할 수도 있지만, 그렇더라도 수학적 공식을 일상 언어로 풀어서 설명하는 과학적 언어가 되기 때문에 글쓰기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글쓰기의 문제가 되는 현상은 그러한 법칙적 현상이 아닌 역사적 현상이다. “모든 소설은 역사 소설이라고 하는 말이 함축하는 의미처럼 글쓰기의 주제는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것이나 역사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이다. 글쓰기는 역사적 글쓰기라고 일반화할 수도 있다. 이 말은 역사적 문제 의식이 있는 글, 역사적 변화에 정직한 글, 역사적 과거나 미래를 상상력으로, 가능 세계로 그려 주는 글을 쓴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글쓰기의 사유 논리는 비연역적 논리의 다양한 유형을 적용하는 역사의 논리가 될 수밖에 없다. 역사적 설명과 예측, 역사적 조망과 관점, 그리고 역사적 실천과 선택을 가능하게 하는 비연역 논리가 글쓰기를 위한 사유의 논리로 적용되고 개발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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