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어둠의 혼(魂) / 해설 / 김원일

by 송화은율
반응형

어둠의 혼(魂) / 김원일

 

아버지가 잡혔다는 소문이 온 장터 마을에 좍 깔렸다. 아버지는 어제 수산 장터에서 붙잡혔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젯밤 진영(進永) 지서로 묶여 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오늘밤에 아버지가 총살당할 거라고들 말했다. 지서 뒷마당 웅덩이 옆에 서 있는 느릅나무에 칭칭 묶여 총살당할 게 틀림없다는 것이다. 아니면 선바위산 묘지골로 끌려가서 총살당할 거라고들 떠들었다.

 

병쾌 아버지를 포함해서 아버지와 같은 짓을 했던 마을 청년들이 이미 일곱 명이나 총살을 당했기 때문에 아버지도 죽게 될 것이 분명하다. 이제 아버지는 한줌의 연기처럼 자취도 없이 사라질 게다. 그 사라진 연기를 다시 모을 수 없는 것같이 이제 우리 오누이들은 아버지라고 불러 볼 사람이 없게 된다. 그것이 슬플 뿐, 다른 생각은 안 난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이태 넘어 늘 집에 없었으니깐. 산도둑같이 텁석부리로, 또는 선생처럼 국방복을 입고 문득 나타났다 잽싸게 사라져 버리는 요술장이 아버지. 이제 아버지의 그 요술도 끝이 나고 말았다. 무엇을 위한 요술인지 알 수 없는 요술, 그 요술의 뜻을 내가 미처 깨치기도 전에 아버지가 죽는다는 게 슬플뿐, 사실 나는 지금 그보다 더 큰 괴로움에 떨고 있다. 굶주림이다. 배가 고프다. 지독히 고프다. 그러나 아직 어머니는 안 온다. 보리쌀을 빌리러 나간 지가 벌써 언젠데. 두 시간? 그쯤은 되었을 거다. 그렇다, 내가 영어 숙제를 하고 있을 때 나갔으니 이 집 저 집 너무 많이 빌려다만 먹었는데 누가 또 빌려줄려구. 어머니는 하는 수 없이 이모네 집으로 터덜터덜 갔을 거야. 그럼 이모는 틀림없이 어머니한테 욕설을 퍼부을 거야. 그러나 이모는 마음이 착하니 금세 아이구 불쌍타 새끼들이 불쌍타 하며 쌀 한 되쯤, 아니면 보리쌀 두 되쯤은 빌려줄 테지. 그럼 내일까지는 염려없다. 죽을 쒀 먹는다면 모레까지는 걱정없다. 이모네 집에서는 많이도 빌려다 먹었다. 그걸 언제 다 갚을까. 지금은 아무 쓸데도 없는 아버지긴 하지만, 아버지마저 총살을 당하고 만다면 누가 다 갚게 될까. 아, 나도 이젠 아버지가 없는 아이가 되는구나. 그러데 아버지는 왜 그 짓을 하게 되었는지 몰라. 세상 사람들이 모두 싫어하고 무서워들 하는 그 짓을 왜 하고 다녔는지 몰라.

 

몇 해 전, 해방이 되던 날만 해도 아버지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장터에서 만세를 불렀다. 쨍쨍 내리쪼이는 햇빛 아래서 목이 터져라고 대한독립 만세를 불렀다. 그런데 언제쯤부터인가? 그렇다, 재작년 겨울부터 아버지는 사람의 눈을 피해 숨어서 다니기 시작했었지. 밤을 낮삼아 다니기 시작했었지. 어디론가 감쪽같이 사라졌다간 나타나고, 나타났다간 사라져 버리곤 했었지. 아무도 모른다. 아버지가 무슨 일을 맡아서 그러고 다녔는지는. 마을 사람들이 아버지를 두고 쑤군쑤군했고, 순사들이 자주 우리집을 들랑거렸지만 재작년 겨울부터 그들은 아버지를 본 적이 없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인지, 누구를 시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쌀 한 톨 생기지 않는 일에 목숨을 걸고 산길을 타고 다닌 아버지의 요술을 어쩜 다른 사람은 알 필요가 없다. 아버지가 하는 짓은 스스로의 문제라는 듯 나에게는 물론 어머니나 이모부에게조차 알리지를 않았으니깐. 꽃이 왜 피는지, 꽃은 향기를 어떻게 만드는지 모르듯 이 세상에는 남이 모를 일이 너무 많으니깐.

 

국민학교 이학년 때던가. 나는 아버지와 산책을 나갔던 적이 있었다. 안개도 자욱한 초여름의 이른 새벽이었다. 이슬에 바짓가랑이를 쫄닥 적신 채 아버지와 나는 들길을 거닐었다. 아버지는 나의 손을 잡았고, 잠으로부터 트이기 시작하는 나의 귀는 종달새의 자랑스러운 재잘거림을 듣고 있었다. 아버지는 물기 맑은 풀잎에서 폴짝 뛰어오르는 한 마리의 청개구리를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아버지의 손톱 만한 그 놈의 빛 고운 연초록 등판은 윤기가 쪼르르 흘렀고, 얇고 흰 뱃가죽은 놀람 탓인지 연신 팔닥거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말했다. 요 꼬마 놈은 매일 아침 하루도 쉬지 않고 높이뛰기 연습을 한단 말이야. 첫날은 반 뼘을 뛰지만, 이튿날은 한 뼘을 뛰거든. 다음날은 한 뼘 반을 뛰고 그 다음날은 두 뼘을 뛰고 그 다음날은……. 아버지, 그럼 나중에 하늘에 닿겠네요? 아니지, 하늘에 닿아 보려고 뛰지만 결국 하늘에는 닿지 못하지. 왜냐하면 하늘은 끝이 없으니까. 그럼 죽을 때까지 뛰겠네요? 그렇지, 죽는 날까지 매일 뛰지. 참 불쌍한 놈이네요? 아냐, 자기가 뛰고 싶어 뛰니깐. 왜 뛸까요? 그건 아버지도 몰라.

 

아, 무섭다. 땅거미가 깔린다. 곧 어두워질 것이다. 어둠은 무섭다. 밤이 싫다. 벌써부터 내일 새벽이 기다려진다. 선바위산 뒤에서 해가 솟아오르고 날이 훤해질 때까지 나는 잠을 설칠 것이다. 그래서 날이 밝으면 왜 내가 어릴 적 그런 거짓말을 했냐고 묻기도 전에 아버지는 죽고 없을 것이다. 청개구리 말이다.그런데 어머니는 왜 안 올까. 지서에 갔을까.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만나서 울고 있을까. 아니야. 지서에는 가지 않았을 거야. 어머니는 늘 아버지 험담만 퍼부었으니 지서에 가지는 않았을 거야. 조금 전만 해도 처자식 요렇게 고생만 시키니 죽어도 싸다고 오히려 악담만 퍼붓고는 휭하니 나갔으니 지서에 갔을 리가 없다.

 

<하략>

 

 

 요점 정리

 

 지은이 : 김원일

 갈래 : 단편 소설. 순수 소설

 배경 : 광복 직후 이데올로기의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된 시대의 어느 시골 마을

 시점 : 1인칭 주인공 시점('어둠의 혼'은 어린아이의 눈으로 본 일인칭 시점을 취하고 있다. 이를 통해서 바로 '나' 자신이 겪은 실제의 이야기라는 진실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어린아이의 순진한 관점을 통해 아버지와 어른들의 세계를 암시적으로 서술하여 독자들의 상상력을 촉발시키고 있다.)

 문체 : 현재형의 호흡이 급한 문체를 사용함

 성격 : 회상적, 사회 비판적(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인한 아버지의 죽음과 가족 공동체의 몰락을 보여줌으로써 이데올로기에 집착하던 당대 지식인들의 행동에 비판을 가하고 있다)

 제재 : 남북 분단 이후 이념 대립으로 인한 아버지의 죽음

 주제 :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서 본 민족 분단의 비극, 삶의 외경을 통한 고통스러운 현실 극복 의지. 이념의 허구성에 대한 고발과 비참한 삶의 극복 의지

 특징 : 이데올로기 갈등과 그로 인해 벌어지는 비극적 사건을 어린아이의 시선을 통해 포착하고 있고, 저간의 사정이 저녁 한나절의 시간으로 압축되어 현재형으로 서술됨으로써, 아버지의 죽음과 이를 지켜보는 어린 갑해의 내면이 더욱 생생한 비극으로 그려지고 있다.

 줄거리 : 소년 갑해의 아버지는 고학으로 일본 유학을 한 뒤 광복 후 좌익이 된 지식인이다. 그는 한때 야학을 벌여 계몽 사업에 헌신하기도 했으며, 광복 이후 좌우익이 극렬하게 대립함에 따라 경찰의 추적을 받고 쫓기는 생활을 한다. 아버지가 가족의 생활을 돌보지 못하므로, 어머니가 홀로 자식들을 거느리고 생계를 도맡아야 했지만 가족들은 매일같이 굶주림에 허덕인다. 경찰의 추적이 집요해지면서, 아버지는 언제나 깊은 밤중에만 잠시 왔다가 사라지곤 하며, 그 때마다 어머니는 경찰서에 끌려간다.

 

 식량을 구하러 나갔던 어머니가 돌아오지 않자 갑해는 기다리다 못해 어머니를 찾으러 나갔다가 아버지가 체포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러나 어린 나이인 갑해에게는 아버지가 죽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 다만 갑해에게 고통을 느끼게 하는 것은 굶주림뿐이다. 그래서 쌀 한 톨 생기지 않는 일에 목숨을 건 아버지의 행위는 가족을 굶주리게 했으므로 미워할 수밖에 없다. 결국, 아버지는 좌익 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사형을 당하게 되고, 갑해의 이모부는 갑해에게 아버지의 시체를 보여 준다. 비로소 '아버지가 죽었다는 것'을 안 갑해는 울면서 강변으로 뛰어가 생각한다. 이모부가 자신에게 아버지의 죽음을 보게 한 것은 아마도 앞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용기를 가지고 어떤 괴로움이나 슬픔도 이겨 나가야만 한다는 뜻이라고 느낀다. 그렇지만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이모부는 그 이유를 말도 않고 전쟁이 끝나기 전에 죽었기 때문이다.

 출전 : <월간 문학>(1773)


 

 이해와 감상

  "어둠의 혼"은 1973년 <월간 문학(月刊文學)>에 발표된 단편으로서, 분단 문제에 대한 관심을 구체적으로 드러낸 작품이다. 이 작품은 좌익 운동을 하는 아버지를 둔 소년을 화자로 설정하여, 광복 직후 이데올로기의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던 상황을 치밀하게 드러내고 있다. 작가는 이념적 혼란의 와중에 처한 아버지의 삶을 바라보는 소년의 눈을 통해, 이데올로기에 집착하던 당대 지식인들의 행동에 비판을 가하고 있다.

 

 어린 소년의 시선으로 이데올로기의 갈등을 서술한 것은, 곧 이념의 문제를 가족적인 상황 안에만 국한시켜 다룬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소설적 장치를 통하여, 작가는 이데올로기 자체가 가지고 있는 문제를 직접 거론하지 않을 수 있게 되며, 이데올로기 자체에 대한 가치 판단을 유보할 수 있게 된다. 작가는 이 소설의 이야기를 저녁 한나절의 시간으로 압축하여 현재형의 문장으로 서술함으로써, 이데올로기의 갈등과 그 비극성의 핵심에 놓여 있는 아버지의 죽음과, 이를 지켜보는 어린 소년의 내면을 더욱 생생하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궁극적으로, 가족 관계의 단절과 가난을 초래한 것이 개인의 책임이냐 시대 상황의 책임이냐 하는 물음을 던진다. 작가는 이 물음에 대한 확실한 대답을 서술하지 않고, 소년으로 하여금 그것을 모색하게 한다. 아버지의 과거를 회상하며 새삼 두려움에 떠는 소년의 모습은, 삶의 외경을 통하여 고통스러운 현실을 극복해 나가야 한다는 점을 보여 주고 있다.

 

이해와 감상1

 이 작품은 1973년 <월간문학>에 발표된 단편 소설이다. 어두웠던 민족사(민족 분단)의 한 토막을 열기조차 호흡이 급한 문체로 조명해 주고 있는 작품이다.

 

 비극적인 동족 상잔의 비참성을 천진한 소년의 시각을 통하여 제시되면서 삶의 과정에 수반되는 고통과 좌절을 어떻게 극복해 나가야 하는가를 진지하게 묻고 있다. 또한, 전쟁이 남겨 준 상흔(傷痕)과 그 상처를 극복해 나가는 자세를 어린이의 시각을 통하여 그려냄으로써 분단 문학을 다루는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점에서 문학사적 의의를 지닌다.

 

 어린 소년의 시선으로 이데올로기의 갈등을 서술한다는 것은 곧 이념의 문제를 가족적인 상황 안에만 국한시켜 다룬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소설적 장치를 통하여 작가는 이데올로기 자체가 가지고 있는 문제를 직접 거론하지 않을 수 있게 되며 이데올로기 자체에 대한 가치 판단을 유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니까, 분단의 비극이 한 순진한 소년 화자의 눈을 통해 묘사되어 있다는 이야기인데, 아무것도 모르는 소년의 시선이기에 사건의 전모가 제한되어 서술될 수도 있으나 역설적으로 전쟁, 좌·우익의 대립이 어린 소년에게 얼마나 큰 비극을 몰고 왔는가를 보여 줌으로써 이데올로기 대립의 참상을 극대화시킬 수 있다는 이점도 있다고 하겠다.

 

물론, 전쟁의 비극을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이데올로기 문제에 대해 정공법적(正攻法的)으로 취급하기 위해서는 '어른의 시각'에서 다루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작자 자신이 이데올로기에 대한 사회 과학적인 지식이 있어야 하며, 사상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가 확보되어야 한다. 그러나 당시 사회적인 분위기라든가 여러 여건 상 이런 문제가 해결되지 못했기 때문에 '소년의 시점'을 이용했는지도 모른다. 하기는 이런 문제는 굳이 여기서 짚고 넘어갈 문제는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작가의 선택일 뿐이다.

 

어쨌든, 이 작품은 어린 소년이 아버지의 삶과 죽음을 이해하지 못한 채 받아들여야 하는 비극적 상황을 전개함으로써 한국 전쟁이 지닌 비극성을 보여 준다. 한국 전쟁의 비극은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인해 한 민족끼리 벌여야 했던 전쟁이라는 점에 놓여 있으며, 이것은 분단 상황이 계속 유지되고 있는 현실에서 민감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에 지은이는 어린아이의 시점을 택함으로써 사상적 문제에 대한 언급은 회피한 채, 이데올로기 대립이 야기한 한 가정의 파괴와 한 소년의 정신적 성장 과정을 그림으로써 그 비극성을 고조시키고 있다. 특히, 의식의 흐름 수법으로 서술된 소년의 내면 세계는 지나치게 솔직할 정도로 '배고픔'이라는 절대적인 빈곤의 상태에 대한 서술과 '수수께끼'로 압축된 아버지에 대한 의문이 겹쳐지면서 당대 사회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짚어 내고 있다.

 

궁극적으로, 이 작품은 가족 관계의 단절과 가난을 초래한 것이 개인의 책임이냐 시대 상황의 책임이냐 하는 물음을 던진다. 작가는 이 물음에 대한 확실한 대답을 하지 않고, 소년으로 하여금 그것을 스스로 모색하게 한다. 결말부에 가서 이모부가 소년에게 아버지의 시신을 굳이 보여준 이유도, 전쟁이라는 역사적 혼란의 이유를 묻고 그것으로 인한 고통과 상처를 치유하는 일이 소년에게 남겨진 과제임을 암시하는 것이며, 전쟁 전후의 상황에 대한 단정적 판단을 내리지 않으려는 작가 의식의 소산인 것이다. 아버지의 과거를 회상하며 새삼 두려움에 떠는 소년의 모습은, 삶의 외경을 통하여 고통스러운 현실을 극복해 나가야 한다는 점을 보여 주고 있다.

 

 

 

이해와 감상2

 이 작품은 민족 분단의 비극을 한 어린 소년의 시각을 통하여 제시하면서 이념 대립의 문제와 삶의 과정에서 수반되는 고통과 좌절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 것인가를 진지하게 성찰하고 있는 소설이다. 또한 전쟁이 남겨 준 상흔과 그 상처를 극복해야 하는 과제를 그려 냄으로써 분단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연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소설은 특히 이념의 대립과 분단이라는 묵직한 역사적 과제를 미성숙한 존재인 어린아이의 눈을 통해 제시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소년의 시각이기에 사건의 전모가 제한되어 서술될 수도 있으나 이념의 대립이 어린 소년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었는가를 보여 줌으로써 비극적 상황을 보다 효과적으로 부각시킬 수 있다. 나아가 어른의 시각이 아닌 아이의 시각으로 이념의 문제를 다룸으로써 이데올로기에 대한 가치 판단을 유보할 수 있게 한다.

 

이해와 감상3

김원일(金源一)이 지은 단편소설. 1973년 ≪월간문학 月刊文學≫ 1월호(통권 50호)에 발표되었으며, 같은 해에 국민서관(國民書館)에서 같은 제목의 단행본으로 간행하였다. 이념상의 문제로 야기된 민족사의 어두운 현실을 천진한 소년의 시각을 통하여 묘사함으로써 민족사의 아픔을 일깨워주고 있는 작품이다.

 

아버지가 잡혔다는 소식이 마을에 퍼진다. 같은 짓을 하였던 청년들이 모두 총살당한 것으로 미루어보아 아버지도 총살될 것이 뻔하다고 한다. 그러나 어린 나이인 ‘갑해’에게는 아버지가 죽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 빨갱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알 수 없다. 다만 갑해에게 고통을 느끼게 하는 것은 굶주림뿐이다.

 

추상적이고 애매모호한 이야기보다는 현실적·육체적 고통이 앞서는 것이다. 그래서 ‘쌀 한 톨도 생기지 않는 일에 목숨을 걸고 산길을 탄 아버지의 행위’가 무엇보다 자신의 가족을 굶주리게 한 미움의 대상 이외로는 생각할 수 없다.

그러한 감정은 어느 겨울날 밤, 집에 들렀다가 순사들이 밀어닥치자 담을 넘어 도망치는 아버지를 보고 나서부터 생긴 연민과 미움이다.

 

아버지가 죽는다는 사실보다도 우선 배고픔을 참지 못한 갑해는 자기와 같이 굶주리고 있던 ‘천치 누나’와 누이동생 ‘분선’의 밥투정을 달래다 못하여 어머니를 찾아나선다. 술집을 꾸려나가면서 가끔 먹을 것을 대주기도 하는 이모의 집에서 갑해는 어머니를 만난다.

 

이모가 주는 국밥을 먹고 난 갑해는 지서에 가서 붙잡혀 있는 아버지를 만나보라는 이야기를 듣고 지서로 간다. 때마침 지서에 있다가 밖으로 나오던 이모부는 갑해를 보자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지서 뒤뜰로 데려가 아버지의 시체를 보여준다. 갑해는 왜 이모부가 아버지의 시체를 자기에게 보여주었는지 모른다.

 

비로소 아버지가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 갑해는 강변으로 가서 울다가 지쳐 쓰러진다. 그리고 이모부가 자신에게 아버지의 죽음을 보게 한 것은 아마 앞으로 살아가기 위하여서는 용기를 가지고 어떤 괴로움이나 슬픔도 이겨나가야 한다는 뜻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정확한 이유는 지금도 모른다. 이모부는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죽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비극적인 동족상잔의 비참함을 천진한 소년의 시각을 통하여 제시하면서 삶의 과정에 수반되는 고통과 좌절을 어떻게 극복해나가야 하는가를 진지하게 묻고 있다.

 

또한, 전쟁이 남겨준 상흔과 그 상처를 극복해나가는 자세를 어린이의 시각을 통하여 그려냄으로써 전쟁문학을 다루는 새로운 시각을 열었다는 점에서 문학사적 의의를 지닌다.≪참고문헌≫ 실천시대의 문학(金炳傑, 실천문학사, 1984), 해방 40년의 문학(권영민 編, 민음사, 1985).(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심화 자료

 "어둠의 혼"의 작품에 나타난 시각

분단의 비극이 한 순진한 소년 화자의 눈을 통해 묘사되어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소년의 시선이기에 사건의 전모가 제한되어 서술될 수도 있으나 역설적으로 전쟁, 좌·우익의 대립이 어린 소년에게 얼마나 큰 비극을 몰고 왔는가를 보여 줌으로써 이데올로기 대립의 참상을 극대화시킬 수 있다. 전쟁의 비극을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이데올로기 문제에 대해 정공법적으로 이를 취급하기 위해서는 '어른의 시각'에서 다루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작자 자신이 이데올로기에 대한 사회 과학적인 지식이 있어야 하며, 사상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가 확보되어야 한다. 이것이 불가능할 때, '소년의 시점'이 채택된다.

 이 작품의 시점의 특징과 효과

 어린 시절과 6·25를 관련시켜 전쟁과 분단의 문제를 표면화하고 있는 이 작품은 1인칭 소설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시점을 취한 것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직접적인 체험의 신뢰감을 높이기 위한 의도에서이다. 이를 통해서, 이 글에서의 사건이 남의 이야기도 아니고, 꾸며낸 이야기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 겪은 실제의 이야기라는 진실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이 작품은 1인칭 시점과 어린 시절의 체험을 유연하게 접목시키고 있다. 어린아이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전쟁의 체험과 어른들의 세계에 대한 이면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겠지만, 어린아이의 순진한 관점을 통해 아버지와 어른들의 세계를 암시적으로 서술하여 독자들의 상상력을 촉발시키고 있는 것이다.

 

 

 

 '어둠의 혼'에서의 소년의 시선과 그 의미

  '어둠의 혼'은 분단 상황을 본격적으로 다룬 작품이 아니라, 그러한 문제로의 개성적 접근을 알려 준 작품이다. 작가의 어린 시절에 겪은 체험이 비교적 진솔하게 표명된 이 작품에서는, 일본에서 대학을 중퇴하고 해방 후 빨치산이 된 아버지가 48년의 남로당 폭동에 가담하여 처형당하게 된 과정과 그 과정에서 가족들이 겪게 된 수난과 고통이 중심적 뼈대를 이루고 있다. 여기서 1인칭 화자로 나타나고 있는 소년은 아버지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삶과 세계의 존재에 대해서도 많은 의문을 품는다. 그에게 세상은 온통 수수께끼나 요술처럼 풀 수 없는 문제들로 가득한 것이다.

 

  소년인 화자는 그 문제들을 구태여 해결하려 들지도 않고, 심각한 사색에 잠기지도 않는다. 내면적인 감정도 섬세하거나 서정적으로 표현되어 있지도 않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서도 '이제 우리 오누이들은 아버지라고 불러 볼 사람이 없게 된'이 '슬플 뿐, 다른 생각은 안 난다.'고, 상당히 비정적으로 이해될 만큼, 화자인 소년은 감정 표현을 억제한다. 이처럼 서정성이나 내면의 미묘한 굴곡, 삶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철저히 배제한 작가의 의도는 고통스럽고 불행한 삶과 세계에 대한, 소년다운 시각의 반항과 부정성을 직설적으로 전달하려는 데 있다.(오생근, '분단 문학의 확장과 현실 인식의 심화')

 김원일(金源一 1942- )

  소설가. 경남 김해 출생. 서라벌예술대를 거쳐 영남대 졸. 단국대학원 수료. 1966년 "1960 알제리아"로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하여 등단. 영남대 졸업 후 상경. 장편 "어둠의 축제"가 <현대문학> 장편 소설 공모에 당선됨. 단편 소설 "어둠의 혼"을 계기로 해방 직후의 이데올로기 대립과 6 25로 인한 비극과 화해의 문제를 지속적으로 천착함. 장편 "노을"을 <현대문학>에 연재하여 제4회 한국소설문학상과 제4회 대한민국 문학상 수상. 대표작으로 "어둠의 혼", "오늘 부는 바람", "도요새를 찾아서", "환멸을 찾아서", "바람과 강", "겨울 골짜기", "마당 깊은 집", "어둠의 축제", "노을" 등이 있다.

 광복 후 공산주의운동

광복이 되자 제일 먼저 정치활동을 편 것은 공산주의자들이었는데, 일제하에서 공산주의운동에 참여하였던 이영·정백·이승엽(李承燁)·조동우·최익한·이정윤 등은 8·15광복이 되던 바로 그날 밤 서울 종로 장안빌딩에 모여 16일 이른 아침에 조선공산당을 결성하였다. 이 당을 세칭 장안당 또는 장안파공산당이라고 하였다.

 

이와는 달리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일파에서는 8월 20일 조선공산당재건준비위원회라는 것을 만들고 ‘8월테제’를 발표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두 조직(장안파·재건파)간에는 당권을 둘러싼 시비가 벌어지게 되었고, 결국 8월 24일 장안파 측에서 열성자대회를 개최하고, 박헌영 중심의 재건파에 합류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9월 11일 재건준비위원회는 발전적으로 해체되면서 조선공산당 재건을 정식으로 선포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날 발표된 조선공산당(약칭은 조공)의 중앙간부명단은 박헌영 자파일색으로 짜여졌음을 볼 수 있고, 장안당의 이영·정백·최익한·이정윤 등은 제외되어 있어, 형식상으로는 재건되었다. 그러나 파쟁의 불씨를 안은 채 출발하였다고 볼 수 있다.

 

명단을 살펴보면, 총비서에 박헌영, 정치국에 박헌영·김일성(金日成)·이주하(李舟河)·무정·강진(姜進)·최창익·이승엽·권오직, 조직국에 박헌영·이현상·김삼룡(金三龍)·김형선(金炯善), 서기국에 이주하·허성택(許成擇)·김대준(金台俊)·이구훈(李龜壎)·이순금·강문석(姜文錫) 등이다.

 

당을 재건한 박헌영은 합법당의 역할을 하기 위하여 9월 19일 당발족에 따른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 성명서는 첫째, 1928년 공산당이 해체된 뒤 당재건투쟁이 계속되었는데, 1937년 이후부터는 콤그룹 중심의 지하운동형태로 활발히 전개되었다. 둘째, 8·15광복 이후 조직된 장안당은 공산주의운동의 통일을 위하여 재건위로 통합하기로 결정하였다.

 

셋째,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9월 11일 조선공산당이 재건되었다는 것을 공식화시킨 것이었다. 이때 제시된 당면투쟁목표는 ① 공산당은 대중의 이익을 옹호하며 투쟁한다. ② 완전한 민족해방과 봉건적 잔재를 일소한다. ③ 인민정부를 수립한다. ④ 프롤레타리아독재를 통한 공산주의사회를 건설한다는 등 네 가지였다.

 

이렇게 출발한 조선공산당은 대중단체로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1945.11.5.)·전국농민조합총연맹(1945.11.8.)·전국청년단체총연맹(1945.12.11.)·전국부녀동맹(1945.12.22.) 등을 조직하였다.

 

1946년 2월 15일 모스크바삼상회의의 결정을 지지하는 좌익계 정당과 사회단체를 총망라하여 민주주의민족전선이라는 통일전선체를 조직하고, 의장으로 여운형·허헌(許憲)·박헌영·김원봉을 선출하였다.

 

그 뒤 조선공산당은 좌익노선을 표방하였던 조선인민당·남조선신민당과 합당하여 단일한 대중정당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합당의 방법론 때문에 일어난 내분으로 남조선노동당(약칭, 남로당)과 사회노동당으로 분열되었다. 사회노동당은 얼마 안 가서 해체되고, 그 뒤 근로인민당이 새로 조직되었다.

 

남로당의 위원장은 허헌, 부위원장은 박헌영과 이기석이었고, 강령으로는 ① 민주주의 자주독립국가 건설, ② 정권을 인민위원회에 넘기도록 투쟁, ③ 무상몰수·무상분배의 토지개혁 실시, ④ 8시간노동제와 사회보장제의 실시, ⑤ 중요산업국유화.

 

⑥ 20세 이상의 국민에게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부여, ⑦ 언론·출판·결사·신앙의 자유, ⑧ 남녀 평등권, ⑨ 초등 의무교육 실시, ⑩ 진보적 세금제 실시, ⑪ 민족군대 조직과 의무병제 실시, ⑫ 평화애호국가와의 친선 강화 등을 채택하였다.

이렇게 대중정당으로 재출발한 남로당은 모스크바삼상회의의 결정 지지와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한 임시정부수립을 투쟁 목표로 설정하고 적극 협력하였다.

 

그러나 2차에 걸쳐서 개최된 미소공동위원회는 쌍방의 의견대립으로 결렬되고 한반도문제가 미국 측에 의해서 모스크바삼상회의의 결정에서 국제연합(UN)으로 이관되었다. 그리하여 국제연합에서는 실질적으로는 단독정부 수립안이 채택되었고, 1948년 5월 10일 단독선거 실시가 확정되었다.

 

이처럼 단독선거가 명백해지자 남로당은 앞으로 있을 선거를 못하도록 하기 위한 투쟁으로 1948년 2월 7일을 기하여 ‘2·7구국투쟁’이라는 폭동사건을 일으켰다.

 

주로 파업과 파괴, 경찰관서 습격, 우익에 대한 테러, 그리고 단독선거 반대를 위한 선전과 선동으로 일관된 2·7투쟁은 남로당과 민전(民戰)이 주동이 되었는데, 이는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되었다.

 

2·7투쟁에서 남로당이 주장한 구호는, ① 조선의 분할침략계획을 실시하는 UN한국위원단을 반대한다. ②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한다. ③ 양군 동시철수로 조선통일민주주의 정부수립을 우리 조선인민에게 맡겨야 한다.

 

④ 정권은 인민위원회로 넘겨야 한다. ⑤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에게 무상으로 나누어 주어야 한다. 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 등 9개 항이었다.

 

단독정부 수립 반대투쟁은 1948년 4월의 남북협상을 계기로 절정에 달하였고, 동 협상회의에서는 남조선단독선거반대투쟁전국위원회를 구성하고 5·10선거를 파탄시킬 것을 결정하였다.

 

〔표 1〕은 2·7투쟁으로부터 5·10선거를 반대하는 투쟁까지의 피해상황이다. 이러한 2·7투쟁과 5·10선거 반대투쟁은 그들의 전술상으로 볼 때는 폭력과 비폭력의 배합투쟁이었다. 때문에 이때부터 서울에서는 행동대를 조직하고 지방당에서는 무장부대로서 야산대(野山隊)까지 만들게 되었다.

 

이 야산대는 당의 무장부대이기 때문에 당 조직체계에 준해서 조직되었다. 이때만 하더라도 남로당은 인민공화국(약칭, 인공) 창건이라는 정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비폭력적 정치활동이 주가 되었으며, 무장부대인 야산대는 당활동을 원만히 보장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이용되었다.

 

그러나 제주도의 4·3폭동을 계기로 제주도에서는 폭력일변도로 전환하게 되었고, 뒤이어 10월의 여순반란사건은 남로당조직에게 완전히 비합법투쟁으로 돌입케 하였으며, 지리산에 입산한 폭동군은 야산대와 합류되어 무장투쟁을 전개하게 되었다. 이러한 무장투쟁은 점차적으로 확대되어 남한지역에는 몇 개의 유격전구(遊擊戰區)가 형성되었다.

 

즉, 호남유격전구·지리산유격전구·태백산유격전구·영남유격전구·제주도유격전구 등이 그것이다. 무장투쟁은 1949년 6월 조국통일민족주의전선의 결성을 계기로 보다 극렬화되었다.

 

7월부터는 인민유격대를 각 지구별로 3개 병단으로 편성하여, 오대산지구를 1병단, 지리산지구를 2병단, 태백산지구를 3병단으로 하고, 이들에 대한 통일적 지도를 북한에 있는 박헌영일파가 직접 관장하였다.

 

한편, 남한에서 자행되고 있는 유격투쟁에 대한 북으로부터의 지원은 1948년 하반기부터 시작되었으나, 본격화된 것은 1949년의 소위 9월공세 때였다. 1948년 10월 여순반란사건이 발생하자, 남한의 군경병력이 호남지구에 집중되었다.

모든 관심이 이에 쏠리게 된 틈을 타서 북에서는 강동정치학원(江東政治學院) 출신 유격대를 오대산지구로 침투시키는 한편, 유격대 양성에만 주력해오다가, 조국전선의 결성과 함께 선언문이 발표된 뒤 9월 공세에 대비하여 수백 명씩을 집단적으로 남파시켰다.

 

〔표 2〕는 9월 공세를 전후해 박헌영일파에 의하여 발표된 무장투쟁의 결과이다. 군경토벌대는 유격대와 주민과의 연계를 단절시키기 위하여 산간지대 농가를 이주시켰다.

 

이주 호수는 남원 859호, 무주 501호, 장수 534호, 광양 1,694호, 구례 2,570호, 곡성 3,478호, 하동 1,240호, 함양 3,772호, 산청 2,363호, 거창 477호 등이다. 이러한 숫자는 당시의 남로당 무장투쟁이 얼마나 치열하였는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1949년 말을 거쳐 1950년 초에 이르는 동기토벌작전으로 인하여 유격대의 세력은 거의 전멸된 상태에 이르게 되었고, 1950년 3월 남로당을 총지휘하여온 김삼룡과 이주하(李舟河)가 체포되면서 남로당조직은 사실상 붕괴되고 말았다. ≪참고문헌≫ 韓國共産主義運動史 1∼5(金俊燁·金昌順 編, 高麗大學校 出版部, 1967∼1976), 朝鮮勞動黨의 形成과 發展(方仁厚, 高麗大學校 出版部, 1974), 韓國共産主義運動史資料 Ⅰ·Ⅱ(金俊燁·金昌順 編, 高麗大學校 出版部), 南勞黨硏究(金南植, 돌베개, 1985), 韓國共産主義運動史硏究(徐大肅, 화다출판사, 1985), 항전별곡(이정식·한홍구 편, 거름, 1986), 韓國共産主義運動史 1-3(스칼라피노·이정식 편, 일월서각, 1986).(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남조선노동당(南朝鮮勞動黨)

1946년 11월 서울에서 조직된 공산주의 정당. 약칭 남로당(南勞黨). 조선공산당이 1928년 12월 코민테른의 결정에 따라 해체된 뒤 지하활동을 벌이다가 45년 광복 직후 박헌영(朴憲永)을 중심으로 서울에서 재건되었다. 남·북한 전역에 걸쳐 지부(支部)를 재조직하던 조선공산당은 북조선분국을 설치하기로 하고 김용범(金鎔範)을 그 책임비서로 선임하였다. 그 해 12월 김용범에 이어 김일성(金日成)이 책임비서가 되었는데, 김일성은 곧 북조선분국을 서울의 조선공산당으로부터 분리시켜 46년 4월 명칭을 북조선공산당으로 바꾸고 서울의 조선공산당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어 8월에는 북조선공산당과 조선신민당이 합당하여 조선노동당을 결성했는데, 당시는 북조선노동당(일명 北勞黨)으로 알려졌다. 이로써 조선공산당의 1국 1당적 전일성(全一性)은 깨지게 되었다. 북한에서 북조선노동당이 결성되자 남한에서도 좌익세력을 총집결하기 위해 그 해 11월 조선공산당·남조선신민당·조선인민당이 합당하여 남조선노동당을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남로당에는 고참 공산주의자들이 많이 참여하지 않아 남한의 공산주의세력은 분열·약화되었으며, 더구나 미군정당국의 끊임없는 압력과 탄압을 받아 결과적으로 북한에서 김일성이 권력을 강화하는 데 기여하였다. 남로당은 조선공산당 시절의 활동에 이어 2·7총선방해사건, 4·3사건, 여수·순천반란사건, 국회프락치사건 등 정치·사회의 불안을 조성하기 위한 파괴활동을 하였다. 남로당 간부는 대부분 검거를 피해 월북하였는데, 이들 중 많은 수가 48년 9월 소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직전의 총선거에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고, 제 1차 김일성내각에서 박헌영·박문규(朴文圭)·이승엽(李承燁)·허성택(許成澤) 등이 각료직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월북 남로당원이 북로당에 입당할 수 있게 되자 남로당 세력은 감소되었고 마침내 49년 6월 남로당과 북로당이 합당하여 조선노동당이 결성되었다. 이는 실제적으로 북로당에 의한 남로당의 흡수였다. 그 뒤 이들 남로당 세력은 최강의 숙적을 제거하려는 김일성의 의도에 의하여 53년 8월 최고재판소 특별군사재판 때 이승엽·임화(林和)·이강국(李康國) 등 12명이 사형과 징역형을 선고받고, 55년에는 최고군사재판에서 박헌영이 사형되는 등 대부분 숙청당하였다. 글 : 고태우(출처 : 파스칼세계대백과사전)

반응형

블로그의 정보

국어문학창고

송화은율

활동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