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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도둑 / 해설 / 김소진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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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도둑 / 김소진


 

 이해와 감상

 도시적 감수성의 개인주의로 무장한 신세대 문학이 득세하던 90년대에 김소진의 작품은 희소성을 획득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은 김소진은 외국 영화 '자전거도둑'을 자신이 같은 제목의 단편 소설에서 “이 영화를 볼 때마다 난 무엇보다 외로움을 느꼈다. 아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아버지의 권위를 깡그리 무시당한 주인공의 무너진 등이 견딜 수 없어 콧등이 시큰해졌고, 그보다는 무너져 내리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목격해야 하는… 어린 아들 때문에 나는 혀를 깨물어야 했다"고 썼다는 말을 했다는 작품으로 '나'가 자신의 자전거를 몰래 타는 자전거 도둑 '서미혜'를 찾아 내어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영화 '자전거 도둑'을 중심으로 '나'와 '서미혜'의 이야기가 겹쳐지면서 두 사람의 어린 시절의 아픈 기억이 남긴 상처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나'는 서미혜가 '나'의 자전거를 몰래 훔쳐 타는 것을 보면서 이탈리아 영화 '자전거 도둑'을 떠올린다. 영화 속의 상황들이 '나'와 '서미혜'에게 아픈 기억들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혹부리 영감에게 수모를 당하던 무력한 아버지가 떠오르고, '서미혜'에게는 영화 속에서 자전거를 훔친 범행이 발각되자 간질을 일으키는 젊은 청년과 간질환자였던 오빠를 동일시한다. '나'는 아버지의 수모를 보복하고, 그 결과 나로 인해 혹부리 영감은 홧병으로 죽고, '서지혜'는 오빠를 돌보지 않아서 죽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에 빠진다.

 

 이 작품은 유년기 내면의 상처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작품으로 어린 시절의 기억이 남긴 상처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단지 유년시절의 상처를 확인하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이 아버지에 대한 부정적인 기억을 넘어서고, 곧 현재의 자기의 삶을 정립하는 문제와 맞물린다는 점에서 이 소설의 주제 의식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심화 자료

 The Bicycle Thief [자전거 도둑]

감독: 비토리오 데시카(Vittorio De Sica)
캐스트: 람베르토 마조라니(Lamberto Maggiorani)/ 엔조 스타이올라(Enzo Staiola)
제작년도: 1948년(이탈리아)
장르: 드라마
요약: 전후 사회의 빈곤과 모순을 리얼한 영상으로 묘사한 이탈리아 네오 리얼리즘을 대표하는 거장 데시카의 명작

줄거리

2차 대전 직후 이탈리아의 수도 로마의 거리. 오랜동안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거리를 배회하던 안토니오는 우연히 직업 소개소를 통해 벽보를 붙이는 일거리를 얻는다. 그 일을 하기 위해선 자전거가 필요했고 이 사실을 안 아내 마리아는 남편의 직업을 위해 자신이 소중하게 간수했던 침대 시트를 전당포에 잡히고 자전거를 구한다. 직업을 갖게 된 안토니오와 아들 브르노는 기쁨을 참지 못한다.

이튿날 안토니오가 출근하여 벽보를 붙이는 사이에 한 사내가 자전거를 타고 도망친다. 도둑을 쫓다가 놓치고만 안토니오는 절망감을 안고 집으로 돌아온다. 안토니오는 다시 실직하게 된 것이다. 다음 날부터 안토니오 부자는 배고푼 것도 잊은 채 자전거를 찾으려 로마 거리를 배회한다. 로마의 고물 자전거점을 뒤저보나 찾을 수 없었다. 소나기를 피해있던 안토니오 부자는 자전거를 훔친 도둑을 보고 쫓아가나 또 놓치고 만다. 안토니오는 도둑과 잘 아는 노인을 찾아가지만 그도 거부한다. 안토니오 부자는 자전거를 못찾게 되자 서로 다투고 안토니오는 아들에게 손찌검까지 한다. 둘은 곧 화해를 하지만 자전거는 아직도 찾지 못했다. 그렇게 계속 찾아다니던 도중 도둑을 잡게 된다. 그러나 도둑은 간질병 환자이고 증거물인 안토니오의 자전거는 없다. 자전거를 찾을 수 없게 된 안토니오는 허탈한 마음으로 거리에 앉아 싸이클 경기를 보게된다.

자신의 생존 수단인 자전거가 지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그도 자전거를 훔친다. 그러나 안토니오는 그 자리에서 잡혀 온갖 멸시와 모욕을 받다가 풀려난다. 해지는 로마 거리를 안토니오 부자는 좌절감을 가슴에 앉고 터벅 터벅 걸어 간다.

영화 해설

전후 사회의 빈곤과 모순을 리얼한 영상으로 묘사한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신사실주의)을 대표하는 거장 비토리오 데 시카의 명작인 <자전거 도둑>에 대한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그 역작에 대한 평가가 이어지고 있다. 데 시카의 '자전거 도둑'은 네오 리얼리즘의 이론을 가장 훌륭하게 대변하고 있는 영화중의 하나이다. 흑백 영상은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인상을 준다. 네오리얼리즘 영화 가운데 비토리오 데 시카의 <자전거 도둑>만큼 널리 성공한 작품도 드물다. 영화사의 10대 걸작을 꼽을 때면 으레 뽑히곤 한다. 네오리얼리즘의 이론적 기수인 체자레 자바티니가 루이지 바르톨리니의 원작을 시나리오로 각색했다. 데시카 없는 자바티니는 생각할 수 있지만, 자바티니 없는 데 시카는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데시카는 자바티니에게서 많은 것을 얻어 왔다, 이 둘은 네오리얼리즘의 환상적인 명콤비였던 것이다.

<자전거 도둑>은 1948년도 아카데미 수상작이며, 뉴욕영화비평가상과 외국영화 최우수상 등, 각종 상을 휩쓴 영화의 고전이자 교과서이다. 네오리얼리즘 영화의 기본적인 표현양식인 로케이션 촬영 그리고 비직업 배우의 기용, 현실의 사전들을 나열하는 듯한 화면구성과 카메라 이동이 돋보이며, 이후 이태리 네오리얼리즘 영화의 전형적인 양식으로 인식되었다.

<자전거 도둑>은 이렇게 전쟁 후 이탈리아의 참담한 굶주림이라는 현실 속에서 가장 평범하게 살아가려는 보통 사람의 안토니오가 도둑이 되어가는 모습을 추적하는 과정 속에서 그 어느 것도 선악이라 규정할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즉, 선과 악은 그 사회 속에서 규정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자전거 도둑>은 사회 속에서 절망한 가정과 그를 자전거 도둑으로 만든 전후 이탈리아 상황을 잘 그렸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의 무력감은 네오리얼리즘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 영화를 감상하기 전에 네오리얼리즘(신사실주의)에 대해 알아두면 도움이 된다. '영화의 이해'라는 책에 의하면, 네오리얼리즘은 제 2차 세계대전 마지막 몇 달 동안에 시작된 영화제작 방식이면서 특별한 영화운동 경향이기도 하다. 영화운동으로서의 네오리얼리즘은 이탈리아에서 1950년대 중반에 거의 끝났으나 하나의 방식으로서의 네오리얼리즘은 많은 나라에 파급되었다. 네오리얼리즘 특징은 등장인물들을 이상화하거나 영웅화하지 않고 영웅적인 순간의 보통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그래서 사건들의 일상성이 강조되면서 일반 영화 같으면 2분이나 3분 안에 끝날 이야기를 영화전체의 이야기로 끌어 간다. 영화는 현실세계의 재현이 아니라 현실세계에 대한 직접적인 표현이라는 입장이다. 현실세계를 재현하기 위해 동원되었던 그 동안의 관습적인 플롯 구조는 죽은 공식으로 간주되면서, 평범한 사람들이 체험하고 있는 세세한 삶의 구조가 중요시된다. 플롯을 강조하지 않는 이러한 경향 때문에 시작과 중간과 끝을 명백히 하지 않고 대부분 열린 결말(open-ended)의 구조로 끝난다. 그러면서 사건들의 사회적인 의미를 치열하게 파고든다. 이 영화운동은 반파시스트적이면서 마르크시스트적인 사상과 자연히 연결이 된다. 그리고 인간의 구체적인 삶에 대한 진지한 관심과 사랑으로 카톨릭적인 요소와도 일맥상통한다. 네오리얼리즘 운동에서 최고의 시나리오 작가로 꼽히는 세자르 자바티니는 열광적인 마르크시스트였고 최고의 감독으로 꼽히는 비토리오 데 시카 감독은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는데, 이 두 사람이 공동작업을 통하여 변증법적인 종합을 이루면서 그 시대에 빼어난 작품들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 작품들 중에서 가장 유명해진 작품이 바로 <자전거 도둑>이다. '생은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다. 그러나 그 가치는 있다’라는 명제를 잔잔하게 전하는 비토리오 데 시카 감독의 대표작이다. 자전거를 도둑맞은 노동자가 결국 자전거 도둑이 된다는 전후 로마의 이야기는 참으로 역설적인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이 작품은 프롤레타리아 영화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의 피폐한 로마 거리에서 벌어진 작은 사건을 통해, 당시 이탈리아 사회에 만연한 실업 문제를 다루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폐허가 된 이탈리아의 수도 로마. 첫 장면에서 실업자들이 우글거리고 있는 인력시장이 펼쳐진다. 오랫동안 직업 없이 떠돌던 안토니오 리치는 직업소개소장이 직장을 알선해 준다. 그러나 조건이 있다. 자전거를 가지고 가야 취직이 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안토니오는 오래 전에 자전거를 전당포에 맡겼기 때문에 자전거가 없다. 결국 아내인 마리아가 침대보 여섯 장을 거두어 전당포에 맡기고 자전거 찾을 돈을 마련한다. 전당포 장면이 두 번 나오는 셈인데, 전당포 선반에 가득 얹혀 있는 무수한 물품들은 다른 어떤 소품들보다 그 시대상황을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자전거를 다시 찾은 안토니오는 마리아의 부탁을 받고 그녀를 자전거에 태워 어느 건물로 데리고 간다. 나중에 알고 보니 마리아가 찾아간 집은 점쟁이 집이다. 마리아는 남편이 직장을 얻지 못하자 점쟁이를 찾아왔었고, 점쟁이는 직장을 곧 구할 것이라고 하면서 직장을 얻게 되면 복채를 더 가지고 오라고 했던 것이다. 마리아는 약속한 복채를 점쟁이에게 건네주지만 아까운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점을 치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의 표정에서도 그 시대의 불안감을 읽을 수 있다.

안토니오가 자전거를 타고 첫출근하는 기쁨은 말로 다할 수 없다. 출근하는 가장을 배웅하는 아내와 아들의 기쁨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한 대기 속을 안토니오가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신나게 달린다. 감독이 이 장면을 특히 강조하고 있는 것은 오히려 실업의 고통을 부각시키기 위함이다.

그 취직의 기쁨도 한나절이 못 되어 그만 무참한 낭패로 끝나 버린다. 안토니오는 자전거를 타고 거리로 나가 포스터 붙이는 일을 하는 도중에 자전거를 도둑맞고 만다. 자전거는 안토니오와 그 가족들의 생활 기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안토니오로서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자전거를 꼭 찾아야만 한다. 그는 경찰에 신고하기도 하고 친구들의 협조를 구하기도 하면서 백방으로 자전거를 찾아 나선다. 그러나 자전거를 찾을 수 없었고 허탈해진 안토니오는 자전거포를 뒤지다 한 젊은이가 자기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것을 보게 된다. 쫓아가 보지만 또 허사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그 젊은이의 집을 찾는다. 안토니오는 빈민가의 그 집을 보고 절망에 빠진다. 자기처럼 가난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젊은이는 간질을 일으키며 길가에 쓰러진다. 경찰이 오지만 증거도 없다.

그러던 중 아들과 다투고 아들이 없어진다. 안토니오는 어린애가 강에 빠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들을 찾아 나선다. 그러나 아들은 축구장 계단 위에서 나타난다. 리치가 가는 곳에는 어린 아들 브루노가 꼭 따라다니는데, 그 아버지와 아들(엔조 스타이올라)의 연기가 일품이다. 자전거를 찾아다니면서 아버지와 아들이 겪는 갖가지 에피소드들이 영화의 중심을 이룬다.

자전거를 찾을 길이 없어진 안토니오는 점점 짙어가는 좌절감에 생계가 막막하기만 하다. 이러한 안토니오의 처지와는 대조적으로 경기장에는 축구 시합이 한창이다. 축구 경기를 즐기기 위해 사람들이 운동장 앞에 세워놓은 수많은 자전거들, 자전거 선수들의 행렬이 보인다. 안토니오는 골목길에 세워둔 자전거 한대를 발견하고는 갈등하기 시작한다. 마침내 방법이 없어진 아토니오는 아들 브루노에게 차비를 건내주면서 먼저 집에 가 있으라고 한다. 그러나 부르노는 전차를 놓치고 다른 사람의 자전거를 훔쳐타고 추적하는 사람들을 피해 미친듯이 페달을 밟는 아버지를 목격한다. 안토니오는 결국 자전거 한 대를 훔쳐 달아나다 주인에게 붙잡힌다. 결국 자전거도 찾지 못하고, 자기 자전거를 훔쳐 간 도둑처럼 자기도 자전거를 훔치다 사람들에게 들켜 온갖 멸시와 모욕을 받게 된다. 브루노는 성난 군중들에 둘러싸여 비통해 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울면서 '아버지'를 외친다. 그리고 땅에 떨어져 찌그러진 아버지의 모자를 주워 먼지를 털고는 사람들 틈을 비집고 가까스로 아버지에게 다가간다. 브루노의 존재는 아버지를 구한다. 자전거 주인은 아버지와 아들을 번갈아 보고는 안토니오를 경찰서에 데리고 가야 한다는 사람들을 물리치고 그를 그냥 놓아준다. 다행히도 자전거 주인의 선처로 풀려나게 된 것이다.

해지는 로마 거리를 안토니오 부자는 좌절감을 가슴에 안고 터벅터벅 걸어간다. 두 사람은 수치로 인한 충격에 조용히 흐느끼고 있다. 안토니오는 맥이 빠진 채 억지로 울음을 찹으며 묵묵히 걸어갈 뿐이다. 브루노는 그런 아버지를 올려다보고는 천천히 부드럽게 거의 무의식적으로 아버지의 손을 끌어 잡는다. 안토니오도 아들의 손을 꼭 움켜쥔다. 마지막에 안토니오의 손을 잡는 브루노의 손은, 사랑과 이해의 상징으로서 부자 간의 정을 나타내는 전형이다.

<자전거 도둑>의 마지막은 영화사에서 가장 감동적이고 기억에 남는 장면들이다. 특히 안토니오가 자전거를 훔치는 장면은 대사가 거의 없는 가운데, 사운드의 변화와 숏의 편집을 통해서만 갈등하고 있는 안토니오의 모습을 바라보는 아들 부르노를 통해 보여진다. 비극적인 현실은 자전거를 훔쳐야 한다는 것 뿐만아니라 아들 앞에서 더 이상 영웅상이 될 수 없는 아버지로서의 기본적 역할조차 못하게 되는 것까지 포함하고 있다. 데 시카 감독은 이 영화에서 주인공인 아버지와 아들의 미래나 앞으로의 행로에 대한 언급 없이 영화를 끝내지만, 울먹이는 아버지의 손을 꼭 잡아주는 부자의 모습을 화면 가득 클로즈 업 시킴으로써 그들 앞에 어떠한 시련이 있더라도 극복하고 동반자가 될 수 있는 모습을 상징하고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카메라가 점점 그들과 멀어지는 것을 통해 이제 그들의 사생활을 그만 보여 주려는 것처럼 영화는 끝맺고 있다.

데 시카는 1955년 3월 4일 '르몽드'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작품을 영화화하려고 몇 달째 제작자를 찾았으나 구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한 미국 제작자가 나섰다. 단, 주인공으로 케리 그랜트를 써달라는 조건이었다. 나는 거절했다." 바로 여기에 이 작품이 성공하게 된 열쇠가 숨어 있다. 그는 미남인 케리 그랜트 대신 무명의 공장 노동자 람베르토 마지오라니를 대담하게 주인공으로 기용했다. 아들 브루노에는 거리를 쏘다니던 부랑아 엔조 스타이올라, 그리고 아내에는 기자 리아넬라 카렐을 기용하는 등 모두 비직업적인 무명 배우를 썼다. 데시카는 이들 아마추어들을 기용해 리얼리티를 배가시킴으로써 영화의 흐름을 그가 의도한대로 이끌어갈 수 있었다.

<자전거 도둑>은 스튜디오 촬영이 없다. 모두 거리에서 촬영한, 현실에 가까운 가장 사실적인 작품이다. 앙드레 바쟁은 말했다. "이는 순수 영화의 첫 작품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배우도 없고 이야기도 없고 연출도 없다. 이것은 영화가 이제 더 이상 완벽한 미학적 환상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이에 앞서 그는 "확실히 지난 10년 동안 제작된 공산주의적 영화 가운데 유일하게 가치 있는 공산주의적 영화이다. 정확하게 이야기한다면 그 사회적 의미를 추상화시키더라도 그 뜻을 간직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할 수 있다."고 비평했다.

<세계영화 100> 안병섭 저서에서 발췌/ <소설과 조성기 영화에 빠진날> 조성기 저서에서 발췌 [출처 : http://my.dreamwiz.com/longsora/bicyclethief.htm]

 

 新寫實主義(네오레알리스모 / Neorealismo  (영)Neorealism.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이탈리아에서 꽃핀 문학·영화 운동으로 전쟁의 원인이 된 사건과 전쟁 전후에 생겨난 사회문제를 사실적으로 다루고자 했다.

 

문학

1920년대에 뿌리를 둔 신사실주의 문학운동은 20년 가까이 파시스트 지배로 억압당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말 파시스트 정권이 몰락하자 다시 힘차게 등장했다. 신사실주의는 그 바탕이 된 이탈리아 초기 사실주의 운동과 전체적인 목표는 비슷하지만, 파시스트 정권의 탄압·저항·전쟁 등이 재능 있는 작가들에게 심어준 격렬한 감정·경험·확신을 원동력으로 삼아 힘차게 솟구쳐올랐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 1930, 1940년대에 날카로운 사회의식을 가진 미국과 영국의 작가들이 이탈리아 문학작품을 번역한 것도 이 운동을 더욱 촉진하는 추진력이 되었다. 신사실주의의 뛰어난 작가들로는 노벨상 수상자인 시인 살바토레 콰시모도와 소설가인 알베르토 모라비아, 이그나치오 실로네, 카를로 레비, 바스코 프라톨리니, 카를로 베르나리, 체사레 파베세, 엘리오 비토리니, 카를로 카솔라, 이탈로 칼비노, 쿠르치오 말라파르테(전쟁 이후의 작품), 카를로 에밀리오 가다 등이 있다.

 

파시스트 시절에도 신사실주의 작품이 이따금 있었으며, 그러한 경향을 대변하는 최초의 작품은 아마도 모라비아의 〈무관심한 사람들 Gli indifferenti〉(1929)일 것이다. 이그나치오 실로네는 〈폰타마라 Fontamara〉(1930)를 위시하여 스위스 망명 때 쓴 반(反)파시스트 작품들로 구체적인 명성을 얻었다. 엘리오 비토리니는 헤밍웨이풍의 훌륭한 작품 〈시칠리아에서 나눈 대화 Conversazione in Sicilia〉(1941)에서 파시스트 정권에 대해 간접적으로 비판을 가하고 있다. 많은 신사실주의 작가들은 숨거나(모라비아), 감옥에 갇히거나(파베세·비토리니), 추방당하는(실로네·레비) 수밖에 없었다. 많은 사람들(비토리니·칼비노·카솔라)이 저항운동에 가담했으며, 일부는 헤르메티시즘(콰시모도) 같은 내성적(內省的) 운동이나 다른 사람들(파베세·비토리니)의 작품을 번역하는 데서 피난처를 찾았다.

 

전쟁이 끝나자 신사실주의 운동은 힘차게 일어났다. 바스코 프라톨리니는 자전적인 작품을 뒤로 하고 피렌체 빈민들의 삶을 감동적으로 생생히 묘사한 〈거리 Il quartiere〉(1944)와 신사실주의 작품의 정수로 손꼽히는 〈가난한 연인들의 이야기 Cronache di poveri amanti〉(1947)를 발표했다. 쿠르치오 말라파르테는 초기에는 파시스트당에 충성을 바쳤지만, 얼마 후 그들과 관계를 끊고 전쟁에 대한 2편의 힘찬 소설 〈카푸트 Kaputt〉(1944)와 〈피부 La pelle〉(1949)를 썼다. 엘리오 비토리니는 자신의 저항운동 경험을 〈인간과 비인간 Uomini e no〉(1945)에서 솔직히 적고 있다. 카를로 레비는 〈에볼리에서 멈추신 그리스도 Cristo si e fermato a Eboli〉(1945)에서 이탈리아 남부(그가 추방당한 곳) 농민들의 참상을 따뜻한 마음으로 묘사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다른 작가들도 그당시의 생활을 있는 그대로 또는 있던 그대로 전달해야 한다는 충동을 느꼈다. 살바토레 콰시모도는 헤르메티시즘에서 빠져나와, 〈하루 또 하루 Giorno dopo giorno〉(1947)를 시작으로 전쟁과 사회 문제에 대한 시집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모라비아도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하여 뛰어난 신사실주의 소설을 많이 발표했다. 체사레 파베세는 파시스트 감옥에서 겪었던 생활을 2권의 소설로 묶었고, 현대의 절망을 다룬 내향적인 소설을 많이 썼다. 이탈로 칼비노는 〈거미집속의 오솔길 Il sentiero dei nidi di ragno〉(1947)에서, 카를로 카솔라는 〈목재 자르기 Il taglio del bosco〉(1959)·〈부베의 연인 La ragazza di Bube〉(1960)에서 자신들의 저항운동 경험을 감동적으로 표현했다.

 

영화

영화에서의 신사실주의 운동은 이탈리아 문학운동과 병행하여 일어났다. 신사실주의 영화는 다큐멘터리 같은 객관적인 표현 양식을 갖고 있었다. 배우들은 평범한 상황에 처한 보통 사람이거나 또는 그렇게 보였다. 신사실주의 영화는 서둘러서 조잡하게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았지만, 전통적인 영화제작이 갖고 있던 현실도피적인 이상주의에서 과감히 벗어나 현실의 주제를 대담하게 다룸으로써 전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런 류의 영화로 처음 나온 것은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무방비 도시 Open City〉(1945)로, 나치 점령시 이탈리아인들에게 강요된 난폭한 행위를 보여주는 반파시스트 작품이다. 로셀리니의 〈전화(戰禍)의 저편 Paisan〉(1946)도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전쟁을 6개의 짧은 사건으로 구성한 영화로, 〈무방비 도시〉와 비슷한 종류의 비참한 내용이다. 다른 중요 작품으로는 이탈리아 노동자계급의 일상 생활을 다룬 비토리오 데 시카의 〈구두닦이 Shoeshine〉(1946)·〈자전거도둑 The Bicycle Thief〉(1948)과 시칠리아의 가난한 어부 이야기를 다룬 루키노 비스콘티의 〈흔들리는 대지 La terra trema〉(1948)가 있는데, 이 작품에는 직업배우가 한 명도 나오지 않는다. 1950년 이후 이탈리아 영화는 사실주의에서 환상적이고 상징주의적이며 문학적 주제를 다루는 경향으로 넘어갔다. (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김소진

소설가(1963- 1997)로 강원도 철원 출생으로 1991년 단편 '쥐잡기'로 데뷔했고, 민중의 구어를 개성적 문체로 담아 내었고, 도시적 감수성의 개인주의로 무장한 신세대 문학이 득세하던 90년대에 김소진의 작품은 희소성을 획득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도시 서민들의 곤궁한 삶과 거대조직에서 낙오한 존재들에 대한 연민 어린 묘사를 통해 공동체적 삶의 현장을 현실감있게 표현했기 때문이다. 특히 작가 특유의 질박하면서도 다듬어진 한국어는 눈밝은 독자들과 평론가들에게 주목의 대상이었다. 95년부터는 다니던 신문사마저 그만두고 당시 선배와 동료 문인들이 일하던 서교동의 한 출판사 구석에 자리를 얻어 '전업작가'로서의 의욕을 불태웠지만, 생각지도 않았던 암이 그를 덮쳤고, 동료 문인들의 기원에도 불구하고 끝내 97년 4월 한국문학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의 친구이자 시인 안찬수는 김소진을 이렇게 기억하기도 했다.

"그는 글을 쓴 사람, 그것도 소설을 쓴 사람으로 기억되겠지만 그가 누구보다도 성실한 생활인이었다는 것을 먼저 말해야 되겠다.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아들로서 남편으로서, 그리고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또한 친구로서 선배로서 후배로서…… 나에게 그의 그 성실한 태도는 언제나 어떤 어른스러움으로 다가왔는데 그 어른스러움은 나의 유목민적인 속성과 비교한다면 농경민적인 속성이라고 말해야 될 것이었다. 언제였던가. 한겨레신문사 앞의 어느 술자리에서 세 친구가 맥주잔을 앞에 놓고 설전을 벌이던 것이. 그때 세 명의 삼십대 초반 문학도들은 그 가운데 한 친구가 회사를 그만두는 문제를 놓고 분명한 입장 차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김소진이 그 자리에서 말한 것은 바로 한 사람의 가장(家長)으로서의 책임이었다. 나는 김소진과는 정반대로 "그만둘 수 있을 때 그만두는 것이 좋다"라는 의견을 피력했었다. 다른 한 친구는 계속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고. 한 사람의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말하는 그 모습 속에서 나는 뚜렷하게 김소진의 '현실주의'를 느낄 수 있었다. 그 다른 한 친구의 모습을 그린 「아버지의 자리」에서 그는 '어머니'의 말을 빌려 이렇게 말했었다. "애비 노릇을 그렇게 허는 게 아니다. 애비라는 게 돈벌이를 고정적으로 해서 처자식을 벌어먹일 국량이 제대로 서야 온전한 애비지. 그 좋은 직장을 부젓가락 쥔 어린애마냥 화들짝 뛰쳐나와서는 제때 어디 한번 식구들이 맘놓고 의료보험증 갖고 병원엘 가보나, 이거 원 이 지경이 되도록 팽개쳐놓는 게 글쎄 시상에 그 잘난 애비 노릇이란 말이냐? 너도 참 딱도 허긴 쯧쯧."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그 얼마 뒤 이번에는 그가 신문사를 그만두고 이른바 전업작가의 길로 나서야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내가 볼 때 그 길은 그의 '현실주의'에 위배되는 것처럼 보였다. 이번에는 그와 내가 전혀 거꾸로 된 입장을 드러내 보였다. 그는 그만두어야겠다고 하고 나는 그러지 말라고 하고. 마침내 그가 신문사를 그만두고 전업작가의 길에 들어섰을 때 나는 그의 마음속에 내재해 있었을 소설에 '투신'하려는 마음이 얼마나 깊었던 것인지 알게 되었다. 그 즈음의 그의 생활감각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기왕 얘기가 나온 김에 까발리자면 저간의 내 사정이란 이렇다. (……) 근 석 달 동안 내가 집에 벌어다 준 수입은 대략 원천징수액 빼고 칠십사만원쯤이다. 어느 계간 문예지에 오랜만에 실은 단편소설 「그대 늙었을 때」의 원고료 사십팔만여원, 편두통에 잘 듣는 알약 암포르탈로 유명한 삼화제약 사보에 실은 콩트 「이브의 경고」 원고료 십육만여원 그리고 대학 후배가 편집장으로 있는 바둑잡지에 나한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을 소개해주는 글 「수호지로 가던 마음」을 쓰고 받은 구만여원이 고작이다."(「경복여관에서 꿈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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