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 반대 상소문
by 송화은율
훈민정음 반대 상소문
이 글은 조선 세종이 여러 학자들의 도움으로 1443년에 창제 ․ 반포한 ‘훈민정음’에 대한 반대 상소문으로,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이 쓴 것이다. 글의 후반부는 이에 대한 세종의 답변을 담고 있다.
우리 나라는 삼국 시대부터 이두와 구결을 써 왔는데, 구결은 본래 한문에 구두를 떼는 데 쓰기 위한 일종의 보조적 편법에 지나지 않았고, 이두는 비록 우리말을 표시함에 틀림이 없었지만 우리말을 자유자재로 적을 수 없었으며, 그 표기법의 일원성이 없어서, 설사 이두로써 족한다 해도 한자 교육이 선행되어야 했다. 이러한 문자 생활의 불편은 1443년 12월에 문자 혁명으로 해고할 수 있었다.
그러나 훈민정음이 창제 ․ 반포된 지 2개월 후에 최만리 등이 “이제 여럿의 의논도 듣지 아니하시고, 가볍게 옛사람이 이미 이룬 운서를 터무니없는 언문으로 억지로 들여맞추고, 공장바치 수십 명을 모아 인각하여서 급히 세상에 펴고자 하니, 후세의 공론이 어떻겠습니까?”라 하여 6가지 이유를 들고 반대 상소문을 올렸다. 이에 대해 임금은 그 소 안에서 신하들이 주장하는 몇 가지 사항을 불러 물으나, 그들은 앞뒤의 말을 변하여 계달하므로 크게 꾸짖음을 당하고, 훈민정음 창제 취지를 널리 전하여 그 사용을 권한다.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이 상소하기를, “신 등이 엎디어 보옵건대, 언문을 제작하신 것이 지극히 신묘하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지혜를 운전하심리 천고에 뛰어나시오나, 신 등의 구구한 좁은 소견으로는 오히려 의심 되는 것이 있사와 감히 간곡한 정성을 펴서 삼가 뒤에 열거하오니 엎디어 성재하시옵기를 바랍니다.
1. 우리 조선은 조종 때부터 내려오면서 지성스럽게 대국을 섬기어 한결같이 중화의 제도를 준행하였는데, 이제 글을 같이하고 법도를 같이하는 때를 당하여 언문을 창작하신 것은 보고 듣기에 놀라움이 있습니다. 설혹 말하기를, ‘언문은 모두 옛 글자를 본뜬 것이고 새로 된 글자가 아니라.’ 하지만, 글자의 형상은 비록 옛날의 전문을 모방하였을지라도 음을 쓰고 글자를 합하는 것은 모두 옛것에 반대되니 실로 의거할 데가 없사옵니다. 만일 중국에라도 흘러들어가서 혹시라도 비난하여 말하는 자가 있사오면, 어찌 대국을 섬기고 중화를 사모하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사오리까?
1. 예부터 구주의 안에 풍토는 비록 다르오나 지방의 말에 따라 따로 문자를 만든 것이 없사옵고, 오직 몽고 ․ 서하 ․ 여진 ․ 일본과 서번의 종류가 각기 그 글자가 있으되, 이는 모두 이적의 일이므로 족히 말할 것이 없사옵니다. 옛글에 말하기를, ‘화하를 써서 이적을 변화시킨다.’ 하였고, 화하가 이적으로 변한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역대로 중국에서 모두 우리 나라는 기자의 남긴 풍속이 있다 하고, 문물과 예악을 중화에 견주어 말하기도 하는데, 이제 따로 언문을 만드는 것은 중국을 버리고 스스로 이적과 같아지려는 것으로서, 이른바 소합향을 버리고 당랑환을 취함이오니, 어찌 문명의 큰 흠절이 아니오리까.
1. 신라 설총의 이두는 비록 야비한 이언이오나. 모두 중국에서 통행하는 글자를 빌려서 어조에 사용하였기에, 문자가 원래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므로, 비록 서리나 복예의 무리에 이르기까지라도 반드시 익히려 하면, 먼저 몇 가지 글을 읽어서 대강 문자를 알게 된 연후라야 이두를 쓰게 되옵는데, 이두를 쓰는 자는 모름지기 문자에 의거하여야 능히 의사를 통하게 되는 때문에, 이두로 인하여 문자를 알게 되는 자가 자못 많사오니, 또한 학문을 흥기시키는 데에 한 도움이 되었습니다. 만약 우리 나라가 원래부터 문자를 알지 못하여 결승하는 세대라면 우리선 언문을 빌려서 한때의 사용에 이바지하는 것은 오히려 가할 것입니다. 그래도 바른 의논을 고집하는 자는 반드시 말하기를, ‘언문을 시행하여 임시 방편을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더디고 느릴지라도 중국에서 통용하는 문자를 습득하여 길고 오랜 계책을 삼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할 것입니다. 하물며 이두는 시행한 지 수천 년이나 되어 부서나 디회등의 일에 방애됨이 없사온데, 어찌 예로부터 시행하던 폐단 없는 글을 고쳐서 따로 야비하고 상스러운 무익한 글자를 창조하시나이까? 만약에 언문을 시행하오면 관리된 자가 오로지 언문만을 습득하고 학문하는 문자를 돌보지 않아서 이원이 둘로 나뉘어질 것이옵니다. 진실로 관리된 자가 언문을 배워 통달한다면, 후진이 모두 이러한 것을 보고 생각하기를, 27자의 언문으로도 족히 세상에 입신할 수 있다고 할 것이오니, 무엇 때문에 고심 노사 하여 성리의 학문을 궁리하려 하겠습니까?
이렇게 되오면 수십 년후에는 문자를 아는 자가 반드시 적어져서, 비록 언문으로써 능히 이사를 집행한다 할지라도, 성현의 문자를 알지 못하고 배우지 않아서 담을 대하는 것처럼 사리의 옳고 그름에 어두울 것이오니, 언문에만 능숙한들 장차 무엇에 쓸 것이옵니까? 우리 나라에서 오래 쌓아 내려온 우문의 교화가 점차로 땅을 쓸어버린 듯이 없어질까 두렵습니다. 전에는 이두가 비록 문자 밖의 것이 아닐지라도 유식한 사람은 오히려 야비하게 여겨 이문으로써 바꾸려고 생각하였는데, 하물며 언문은 문자와 조금도 관련됨이 없고 오로지 시골의 상말을 쓴 것이겠습니까. 가령, 언문이 전조 때부터 있었다 하여도 문명한 정치에 변노지도하려는 뜻으로서 오히려 그대로 물려받을 수 있겠습니까? 반드시 고쳐 새롭게 하자고 의논하는 자가 있을 것으로서 이는 환하게 알 수 있는 이치이옵니다. 옛것을 싫어하고 새것을 좋아하는 것은 고금에 통한 우환이온데, 이번의 언문은 새롭고 기이한 한 가지 기예에 지나지 못한 것으로서, 학문에 방해됨이 있고 정치에 유익함이 없으므로, 아무리 되풀이 하여 생각하여도 그 옳은 것을 볼 수 없사옵니다.
1. 만일에 말하기를, ‘형살에 대한 옥사 같은 것을 이두 문자로 쓴다면, 문리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백성이 한 글자의 착오로 흑 원통함을 당할 수도 있겠으나, 이제 언문으로 그 말을 직접 써서 읽어 듣게 하면, 비록 지극히 어리석은 백성이 한 글자의 착오로 혹 원통함을 당할 수도 있겠으나, 이제 언문으로 그 말을 직접 써서 읽어 듣게 하면, 비록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일지라도 모두 다 쉽게 알아들어서 억울함을 품을 자가 없을 것이라.’ 하오나, 예로부터 중국은 말과 글이 같아도 옥송 사이에 원통하고 억울한 것이 많습니다. 가령, 우리 나라로 말하더라도 옥에 갇혀 있는 죄수로서 이두를 해득하는 자가 친히 초사를 읽고서 허위인 줄을 알면서도 매를 견디지 못하여 그릇 항ㅂ고하는 자가 많사오니, 이는 초사의 글 뜻을 알지 못하여 원통함을 당하는 것이 아님이 명백합니다. 만일 그러하오면 비록 언문을 쓴다 할지라도 무엇이 이보다 다르오리까? 이것은 형옥의 공평하고 공평하지 못함이 옥리의 어떠하냐에 있고, 말과 문자의 같고 같지 않음에 있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으니, 언문으로써 옥사를 공평하게 한다는 것은 신 등은 그 옳은 줄을 알 수 없사옵니다.
1. 무릇 사공을 세움에는 가깝고 빠른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사온데, 국가가 근래에 조치하는 것이 모두 빨리 이루는 것을 힘쓰니, 두렵건대, 정치하는 체제가 아닌가 하옵니다. 만일에 언문은 할 수 없어서 만드는 것이라 한다면, 이것은 풍속을 변하여 바꾸는 큰 일이므로, 마땅히 재상으로부터 아래로는 백료에 이르기 까지 함께 의논하되, 나라 사람이 모두 옳다 하여도 오히려 선갑 후경하여 다시 세 번을 더 생각하고, 제왕에 질정하여 어그러지지 않고 중국에 상고하여 부끄러움이 없으며, 백세라도 성인을 기다려 의혹됨이 없은 연후라야 이에 시행할 수 있는 것이옵니다. 이제 넓게 여러 사람의 의논을 채택하지도 않고 갑자기 이배 10여 인으로 하여금 가르쳐 익히게 하며, 또 가볍게 옛사람이 이미 이룩한 운서를 고치고 근거 없는 언문을 부회하여 공장 수십 인을 모아 각본하여서 널리 반포하려 하시니, 천하 후세의 공의에 어떠하겠습니까. 또한 이번 청주 초수리에 거동하시는 데도 특히 연사가 흉년인 것을 염려하시어 호종하는 모든 일을 힘써 간략하게 하셨으므로, 전일에 비교하오면 10에 8, 9는 줄어들었고, 계달하는 공무에 이르러도 또한 의정부에 맡기시어, 언문 같은 것은 국가의 급하고 부득이하게 기한에 미쳐야 할 일도 아니온데, 어지 이것만은 행재에서 급급하게 하시어 성궁을 조섭하시는 때에 번거롭게 하시나이까, 신 등은 더욱 그 옳음을 알지 못하겠나이다.
1. 선유가 이르기를, ‘여러 가지 완호는 대개 지기를 빼앗는다.’ 하였고, ‘서찰에 이르러서는 선비의 하는 일에 가장 가까운 것이나, 외곬으로 그것만 좋아하면 또한 자연히 지기가 상실된다.’ 하였습니다. 이제 동궁이 비록 덕성이 성취되셨다 할지라도 아직은 성학에 잠심하시어 더욱 그 이르지 못한 것을 궁구해야 할 것입니다. 언문이 비록 유익하다 이를지라도, 특히 문사의 육예의 한 가지일 뿐이옵니다. 하물며 만에 하나도 정치하는 도리에 유익됨이 없사온데, 정신을 연마하고 사려를 허비하며 날을 마치고 때를 옮기시오니, 실로 시민의 학업에 손실되옵니다. 신 등이 모두 문묵의 보잘 것 없는 재주로 시종에 대죄하고 있으므로, 마음에 품은 바가 있으면 감히 함묵할 수 없어서 삼가 폐부를 다하여 우러러 성총을 번독하나이다.”
하니, 임금이 소를 보고, 만리 등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이 이르기를, ‘음을 사용하고 글자를 합한 것이 모두 옛글에 위반된다.’ 하였는데, 설총의 이두도 역시 음이 다르지 않으냐. 또, 이두를 제작한 본뜻이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함이 아니하겠느냐. 만일, 그것이 백성을 편리하게 한 것이라면 이제의 언문은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한 것이다. 너희들이 설총은 옳다 하면서 군상의 하는 일은 그르다 하는 것은 무엇이냐. 또, 네가 운서를 아느냐. 사성 칠음에 자모가 몇이나 있느냐. 만일, 내가 운서를 바로잡지 아니하면 누가 이를 바로잡을 것이냐. 또, 소에 이르기를, ‘새롭고 기이한 하나의 이예라.’ 하였으니, 내 늘그막에 날을 보내기 어려워서 서적으로 벗을 삼을 뿐인데, 어찌 옛것을 싫어하고 새것을 좋아하여 하는 것이겠느냐. 도는, 전렵으로 매사냥을 하는 예도 아닌데 너희들의 말은 너무 지나침이 있다. 그리고 내가 나이 늙어서 국가의 서무를 세자에게 오로지 맡겼으니, 비록 세미한 일일지라도 참예하여 결정함이 마땅하거든, 하물며 언문이겠느냐. 만약 세자로 하여금 항상 동궁에만 있게 한다면 환관에게 일을 맡길 것이냐. 너희들이 시종하는 신하로서 내 뜻을 밝게 알면서도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니, 만리 등이 대답하기를,
“설총의 이두는 비록 음이 다르다 하나, 음에 따르고 해석에 따라 어조와 문자가 원래 서로 떨어지지 않사온데, 이제 언문은 여러 글자를 합하여 함께 서서 그 음과 해석을 변한 것이고 글자의 형상이 아닙니다. 도 새롭고 기이한 한 가지의 기예라 하온 것은, 특히 문세에 인하여 이 말을 한 것이옵고 의미가 있어서 그러한 것은 아니옵니다. 동궁은 공사라면 비록 세미한 일일지라도 참결하시지 않을 수 없사오나, 급하지 않은 일을 무엇 때문에 시간을 허비하며 심려하시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전번에 김문이 야뢰기를, ‘언문을 제작함에 불가할 것은 없습니다.’ 하였는데, 지금은 도리어 불가하다 하고, 또 정창손은 말하기를, ‘<삼강 행실>을 반포한 후에 충신 ․ 효자 ․ 열녀의 무리가 나옴을 볼수 없는 것은, 사람이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이 사람의 자질 여하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 꼭 언문으로 번역한 후에야 사람이 모두 본받을 것입니까.’ 하였으니, 이따위 말이 어찌 선비의 이치를 아는 말이겠느냐.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용속한 선비다.”
하였다. 먼젓번에 임금이 정창손에게 하교하기를,
“내가 만일 언문으로 삼강 행실을 번역하여 민간에 반포하면 어리석은 남녀가 모두 쉽게 깨달아서 충신 ․ 효자 ․ 열녀가 반드시 무리로 나올 것이다.”
하였는데, 창손이 이 말로 계달한 때문에 이제 이러한 하교가 있은 것이 었다. 임금이 또 하교하기를, “내가 너희들을 부른 것은 처음부터 죄주려 한 것이 아니고, 다만 소 안에 한 두 가지 말을 물으려 하였던 것인데, 너희들이 사리를 돌아보지 않고 말을 변하여 대답하니, 너희들의 죄는 벗기 어렵다.” 하고, 드디어 부제학 최만리 ․ 직제학 신석조 ․ 직전 김문, 응교 정창손 ․ 부교리 하위지 ․ 부수찬 송처검, 저작랑 조근을 의금부에 내렸다가 이튿날 석방하라 명하였는데, 오직 정창손만은 파직 시키고, 인하여 의금부에 전지하기를, “김문이 앞뒤에 말을 변하여 계달한 사유를 국문하여 와뢰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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