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傳記)에 대하여
by 송화은율
전기(傳記)에 대하여
개인의 일생을 사적 중심으로 기술한 글. 어원적으로는 전(傳)과 기(記)의 합성어이다. 전은 본래 ‘역사(驛舍)에서 명령을 전달하는 사자(使者)’라는 뜻이었던 것이 차차 그 의미가 변하였다.
〈성경현전 聖經賢傳〉에서 볼 수 있듯이 성인은 경전을 기술할 때 ‘술이부작(述而不作)’의 태도를 취하였는데, 사가(史家)들이 이것을 좀더 부연하면서 인간의 행위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기술하는 전의 양식을 만들어냈다. 이것이 역사서술의 한 형식으로 정립된 것이다. 즉 전은 단순히 사건의 전달이 아닌 서술자의 의도가 개입된 역사서술의 한 양식이다.
기도 문(文)의 기술에서 전과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지만 인물 중심의 역사 기술을 전이라고 할 때, 사적 중심의 역사 기술이 바로 ‘기’이다. 문체상으로는 전이 서술자의 의도가 어떤 형식으로든지 적극적으로 개입되는 의론문적 성격(議論文的 性格)을 가졌다면, 기는 서술자의 개입이 절제되고 사실 기술에 충실한 기사문적 성격(記事文的 性格)을 보여준다.
그러나 사적(史蹟)의 기록이란 결국 인물의 행적을 중심으로 기술하는 것이므로 전과 기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뿐만 아니라 인물의 행적을 집중적으로 기술하는 전의 전개부는 기술자가 객관적 서술 시점을 가지고 기술하는 기사문으로 되어 있는 경우가 흔하다.
즉, 한문 고유의 형식이었던 전에는 의론문적 성격과 기사문적 성격의 양면성이 있어 이러한 성격을 반영하는 용어가 바로 전기(傳記)인 것이다. 따라서, 전기는 전이라는 한문 전통양식을 지칭하는 용어가 구체적이고 일반적인 것으로 바뀐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넓은 의미의 전기는 인물의 행적을 기술한 모든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행장(行狀)을 비롯하여 사략(事略)·실기(實記)·묘비(墓碑)·묘갈(墓碣)·뇌문(柰文) 등이 모두 그 기술하는 의도는 다르지만, 인물의 행적을 기록하였다는 점에서 전기라 할 수 있다.
특히, 행장과 실기는 전기와 그 성격상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에 전기의 범주에서 언급됨이 마땅하다. 그러나 여기서는 전만을 중심으로 전기의 형성과 내용, 그리고 역사적 변천 등을 살펴보도록 한다.
〔형 성〕 초기의 문헌에 '전'이라고 명명된 것은 8세기경에 신라 김대문(金大問)이 썼다는 ≪고승전 高僧傳≫이 ≪삼국사기≫ 열전의 설총조에 전한다. ≪청장관전서 靑莊館全書≫ 권54 〈앙엽기 沒葉記〉에도 김대문 저술의 ≪계림잡전 鷄林雜傳≫이 있었으나 전하지 않는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실전한 것으로 ‘전’의 명칭이 보이는 문헌은 기행문 형식으로 된 혜초(慧超)의 ≪왕오천축국전 往五天竺國傳≫이 최초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혜초가 천축국(天竺國)을 여행하면서 쓴 최초의 기행수필로 명칭만 ‘∼전’이라 하였을 뿐 서술방식도 일지(日誌) 형식으로 되어 있어 전기와는 거리가 멀다.
현존하는 최초의 전기는 고승의 전이기는 하지만, 최치원(崔致遠)의 저술로 알려진 〈당대천복사고사주번경대덕법장화상전 唐大薦福寺故寺主飜經大德法藏和尙傳〉이라고 하는 당나라 고승 현수(賢首)의 전기이다. 최치원은 이것 외에도 〈의상전 義湘傳〉을 비롯한 몇 편의 고승전을 더 쓴 것으로 되어 있으나 제목만 전할 뿐이다.
그런데 최치원의 현수에 대한 전기는 우리나라 전기의 형성과정을 이해하는 데 좋은 자료이다. 그는 이 전기의 도입부에서 전기의 서술방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고래로 전의 체는 같지 아니하여 혹 앞에다 그 이룬 것의 통서(統緖)를 세운 뒤에 원인이 되는 바를 포진(鋪陳)하거나, 혹은 서두에 성명을 표(標)하고 말미에 공렬(功烈)을 얽는다. 그러므로 태사공(太史公)은 매양 이제(夷齊)·맹가(孟軻) 같은 분을 대현(大賢)으로 삼아 전을 세우되, 반드시 들은 바로써 앞을 꾸미고 그런 뒤에 비로소 그 행사를 드러낸다.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덕행은 이미 빼어나고 보록(譜錄)은 마땅히 다를 수도 있어서이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나는 비록 비속한 문재(文才)를 부끄러워하지만, 시험삼아 이를 모방하여본 것은 저 원종(圓宗)을 숭앙하므로 그의 가득찬 운수를 열서하여 이에 펴나간다.”(崔文昌侯全集).
최치원보다 앞서 김대문의 ≪고승전≫이 있었으므로 우리나라에서 전기의 형성은 최치원보다 훨씬 앞서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다만 이 시기에는 전기의 체가 서술자의 개성에 따라 다양하게 출현할 수 있었다는 것을 이 소론을 통하여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 열전의 효시로 간주되는 태사공 사마천(司馬遷)의 ≪사기 史記≫ 열전을 최치원이 모방하여 현수의 전기를 썼다고 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이미 전기의 양식이 안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최치원의 〈현수전〉은 후대에서 볼 수 없는 체로서 먼저 시간에 의한 일생을 포진하되 10과(十科)로 분과(分科)하였다. 제1과에서 제4과까지가 탄생부터 수도기(修道期)로 생애의 기록이고, 제5과에서 제9과까지는 현수의 저술과 이론을 소개한 것이다. 제10과는 현수의 죽음과 서술자의 논평으로 되어 있다.
이 전기는 구성방식이 일반 전기와 비슷하나 이를 분과하였다는 점이 특이하다. 그리고 서술자의 경험적 충동에 의한 보고적 제시로 되어 있어 제시된 삽화들의 필연적 구성이 약화되어 있고, 다만 입전 대상자의 열서된 행적을 통하여 인간상이 발견될 뿐이다.
이상으로 보아 우리나라의 전기는 이미 8세기에 김대문에 의하여 저술되었음이 문헌에 나타나고 있다. 현전하는 최초의 전기는 10세기에 최치원에 의하여 쓰여졌는데 이때는 벌써 전기의 체가 서술자의 개성에 따라 다양할 정도로 발전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작법태도〕
전기는 가법가계(可法可戒)할 만한 행적이 있으면 누구든지 입전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그 목적도 행적을 전하여 그 뜻을 우유(寓喩)하는 데 있다. 전DMS 기사문보다 상세하고 그 사(事)를 기술함에 있어서도 골계(滑稽)를 섞는다 함은 전의 흥미를 고려한 작법태도이다. 뿐만 아니라 전은 입전인물의 행적을 기술하는 데 사실에 충실할 것을 강조한다.
그런데 이것은 역설적으로 전에는 ‘허위와 왜곡’이 항상 내재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구의 전기물에도 서술자가 대상인물을 기술할 때 인물의 전생애에 걸쳐 나타난 ‘사실의 진실’만을 추적하여 실증적 입장에서 연대기적이며 종적인 구성만으로 인물의 어떠함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인물의 생애의 단면을 그리거나 아니면 작가가 인물에 대한 주관적 판단을 드러내는 데 필요한 삽화만을 선택하여 테마적 구성을 시간적 구성과 더불어 대위법적으로 구성하게 된다. 따라서, 서술자는 자연히 소재를 취사선택하게 마련이다.
이러한 전기물에서 우리는 서술자에 의하여 조작된 ‘허구의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여기서 서술자는 객관적으로 실증할 수 없는 것들까지도 입전인물의 일관된 생애와 성격을 그리기 위하여 주저없이 사용한다. 이러한 작법태도는 우리나라의 전기에서도 볼 수 있다. 오히려 서구의 전기보다 더 철저하게 서술자의 주관이 개입되어 있다.
특히, 개인문집에 수록된 사전(私傳)에는 단순한 신분이 아닌 인간 개체를 묘사하여 인간에의 접근과 인간상을 부각하려는 서술자의 의도가 다분히 엿보인다.
그리하여 입전인물의 감정이나 능력이 선명하게 나타난다. 뿐만 아니라, 고귀한 인물뿐만 아니라 서민들까지 폭넓게 입전하여 대상인물의 약동하는 삶과 의식을 방대한 시간과 공간을 통해 서술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전기는 입전 대상인물의 사실적 생애를 중심으로 기술하되 개인의 전설이라고 할 수 있는 사생활까지도 취사선택하여 테마적 구성한다. 그 속에서 서술자는 허구적 진실을 보여주고, 나아가서 인간승리의 숭고미를 드러내는 작법태도를 갖는다.
〔구 성〕
전의 본래 서술방식은 일반적으로 도입부·전개부·종결부 세 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열전처럼 여러 전을 모아 놓은 경우에는 전체를 포괄하는 서문격의 도입부가 있어 각각의 전 앞에는 도입부가 생략되기도 한다.
그 밖의 경우에는 대개 전개부의 기사 앞에 입전의 동기나 자신과 대상인물과의 관계 및 그 내용이 교훈적임을 암시하는 말들을 적는다. 거기에다 그 인물의 주관이나 주장을 들거나 그 덕을 추앙하고, 심지어는 비슷한 이야기를 들어 앞으로 서술할 내용을 암시하기도 한다. 이러한 도입부는 서술상의 독서안내 구실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도입부가 전혀 없는 경우도 있다. 전의 사적 입장에서 볼 때에 조선 후기 개인문집에 수록된 일사(逸士)나 서민 같은 인물들을 입전한 경우에 도입부가 없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전개부는 바로 대상인물의 전기가 시작되는 곳이다. 실제로 도입부의 끝에 ‘……其傳(其傳)’이라 하고 그 인물의 가계(家系)와 성격 등을 기술한다. 그런데 대상인물의 인정기술(人定記述)의 사항을 모르면 출생지 정도만 밝히기도 한다. 출생지마저도 애매하면 ‘○○은 不知何許人也(부지하허인야)’로 시작하기도 한다.
이러한 인정기술이 끝나면 인물의 행적을 구체적으로 서술한다. 만약 구체적 사실이 없을 때에는 그에 대하여 알려진 행위의 결과만을 가지고 의논을 전개한다.
사건의 서술은 시간적 순서에 의하여 구성하지만 심한 경우에는 기사편년의 형식을 취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상인물에 따라서는 서술자가 주관적인 서술 시점을 가지고 삽화들을 테마적으로 구성하기도 한다.
이렇게 되면 삽화들은 인과론적으로 서술되고 장면이 상세하게 묘사된다. 그런데 시간적 구성에만 의존하면 그 서술은 결과된 행적으로 보고하는 형태의 기술로 끝나기 쉽다.
종결부는 서술자가 직접 개입하여 입전된 인물의 행적에 대한 논평이나 논찬을 하는 부분이다.
이것은 전의 구성상 서술자의 주관을 직접 드러내는 부분인데, 관찬(官撰)의 열전에서는 개인 역사에 대하여 사관(史官)의 입장에서 논평을 한 의논문이었다.
그러나, 사전의 경우에는 사관이 아닌 외사씨(外史氏)들의 논찬이므로 입전인물의 인간상에 초점을 맞춘 의논문이다. 그리하여 서술자의 입전 의의를 분명히 밝힌다. 종결부에서 서술자는 자신의 문필력을 발휘하여야 되므로 심혈을 기울이기도 한다.
그러나 전의 전개부 서술형태에 따라서 이 종결부가 생략되는 수도 있다. 이것은 논(論)이라는 것이 의혹을 변명하고 맺힌 것을 푸는 것이지만, 사람들이 사건을 듣고 읽어서 알 일이라면 논평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전개부의 서술내용에 따라 종결부의 유무가 결정된다.
〔갈 래〕
전의 하위 갈래는 관점에 따라 그 양상이 약간 다를 수 있다. 서사증(徐師曾)이 ≪문체명변 文體明辨≫에서 전을 분별하여 사전(史傳:正·變)·가전(家傳)·탁전(托傳)·가전(假傳)의 4품이 있다고 한 이래 대체로 이를 따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개화기 수사론서(修辭論書)인 최재학(崔在學)의 ≪실지응용작문법 實地應用作文法≫(1909)에도 대개 서사증의 입장을 따른다. 다만, 사전·가전·탁전·가전 외에 변전(變傳)을 추가하여 5품으로 분류하고 있을 뿐이다.
여기의 변전은 서사증의 사전, 곧 정·변(正變)을 구분하는 변(變)을 지칭한 것뿐이다. 따라서, 전의 갈래는 이 네 가지로 대별된다. 전기가 역사적 인물의 행적을 기술하였다는 점을 고려할 때, 전기는 인간을 대상으로 한 정형의 전기와 사물을 인격화하여 그 행적을 서술한 변형의 전기로 구분된다.
정형의 전기는 다시 사관의 입장에서 역사찬술의 일환으로 된 열전 형식의 사전(史傳)과 개인이 주관하여 어떤 인물의 행적을 해석하고 평가하여 쓴 것으로 개인문집에 수록되어 있는 사전(私傳)의 사전(史傳)이 있다(서사증은 이것을 家傳이라 하였다.).
그러나 변형의 전기는 ≪사기≫ 열전의 백이열전과 같이 인물의 행적을 총체적으로 평가하는 의논문 형태의 사전(史傳)이다. ≪삼국사기≫나 ≪고려사≫의 열전 같은 사전(史傳)은 대개 사서(史書)의 기전체(紀傳體)에서 볼 수 있는 열전이다.
개인문집에도 이러한 의도로 찬술한 것이 있는데, 김육(金堉)의 〈기묘팔현전 己卯八賢傳〉과 심낙수(沈樂洙)의 〈순충전 純忠傳〉 같은 열전이 그것이다.
그리고 열전도 아니고 개인의 전도 아닌 것으로 한 가족을 대상으로 입전한 이색(李穡)의 〈정씨가전 鄭氏家傳〉 같은 가전이 있다. 이 가전은 열전의 변형이라고 할 수 있다.
열전이 아니고 개인문집에 개별전기로 수록된 사전(私傳)의 사전(史傳)이 있다. 현존하는 개인문집에는 대개 한두 편의 이러한 전이 수록되어 있는데, 현재 조사된 것만도 280여문집에 800여 인물에 달한다.
사관의 입장에서 쓴 열전과 개인이 사적인 입장에서 쓴 사전과는 차이가 있다. 열전은 공적인 태도로 서술되었기 때문에 비현실적인 내용이나 주관적인 견해는 철저히 배제된다. 또한 입전인물의 행위에 대한 평가나 해석도 철저하게 공적인 사관의 입장에서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사전은 그것이 열전의 형태로 편찬되었다고 하더라도 개인의 주관이 개입될 여지가 많다. 즉, 열전의 형태가 아닌 가전(家傳)이나 개인의 사전들은 객관적 사실을 서술하지만, 서술자의 주관이 적극적으로 개입되어 인물에 대하여 서술자 나름대로 평가와 해석을 한다.
인물전의 변형인 성간(成侃)의 〈용부전 弁夫傳〉과 같은 탁전은 서술자가 자신의 전기를 쓰되, 자신의 특징이나 지향하는 삶의 모습을 객관적 상관물에 의탁하여 서술한다. 따라서, 탁전은 자기를 평하거나 찬양할 수 없기 때문에 종결부의 논찬이 생략되게 마련이다. 이것이 탁전의 특징인데, 작법이 특이하기 때문에 현존하는 탁전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다.
임춘(林椿)의 〈공방전 孔方傳〉, 이규보(李奎報)의 〈국선생전 麴先生傳〉 같은 가전(假傳)은 입전대상이 사물이다. 사물을 인격화하여 서술하기 때문에 그 사물 자체가 주체가 된다.
그리하여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그 사물의 역할을 보여준다. 즉 그 사물의 행위를 통하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약점을 골계적으로 폭로하거나 계세징인(戒世懲人)의 교훈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개인문집에 들어 있는 현전 작품의 수가 탁전보다는 많고, 특히 고려 말기와 조선 후기에 많이 보인다.
〔사적 전개〕
최치원의 〈현수전〉 이후 문헌에 나타난 전기만을 중심으로 어떻게 변천되었는가를 살펴보면, 11세기에는 혁련정(赫連挺)의 ≪균여전 均如傳≫이 있고, 열전 형태로는 12세기 관찬의 ≪삼국사기≫ 열전과 13세기초의 ≪해동고승전 海東高僧傳≫이 있다.
이 시기까지는 ≪삼국사기≫의 열전을 제외하면 주로 고승들의 전기가 대부분이다. 이것은 당시 불교를 포교할 목적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불교 포교를 염두에 둔 이들 고승전들은 그 인물의 행적을 중심으로 보고하는 형태로 제시하고 있지만, 그 행적 자체는 사실보다 기이한 것들로 되어 있다. 이러한 신이한 행적들의 서술은 불교 고승의 신비주의적 능력의 표현으로 당시 백성들을 대상으로 포교의 효과를 얻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작위성 때문에 초기 고승들의 전기는 사실에 충실하지 못하고, 전기적 소재(傳奇的 素材)가 노골적으로 보태어져 ‘수이(殊異)한 이야기’와 다를 바가 없었다. 따라서, 〈아도전〉이나 〈원광법사전〉 등이 박인량(朴寅亮)의 ≪수이전 殊異傳≫에 수록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특수성 때문이다.
물론, 초기 고승들의 전기가 모두 비현실적인 신비한 체험을 위주로 한 것만 기술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중에는 기록의 충실을 위하여 여러 문헌기록들을 대비하여 옮겨놓은 것도 없지 않다. 그러나 이들 전기가 대부분 전설적 인물로 형상화되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서술 태도는 포교를 목적으로 한 ≪고승전≫만이 아니었다. 관찬사서였던 ≪삼국사기≫의 열전에서 김부식(金富軾)이 유교주의에 입각하여 공자의 “괴력과 난신을 말하지 않는다(不言怪力亂神).”라는 입장을 고수하였다고 하지만, 〈김유신열전〉 등 몇몇의 전기에서 신비한 체험에 대한 삽화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다. 이것은 12세기 중엽까지도 설화시대의 잔재를 완전히 청산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13세기는 고려 무신란 이후 문인들의 의식에 변화를 가져온 시기이다. 이 시대에 임춘·이규보·혜심(慧諶)·최자(崔滋) 등이 나와 가전(假傳) 및 탁전과 한두 편의 사전(史傳)을 썼다.
그런데 이규보의 〈노극청전 盧克淸傳〉은 그가 문인으로서의 개인적인 입장에서 쓴 것이 아니고, ≪명종실록≫의 수찬과정에서 쓴 것이므로 공적인 열전의 성격을 배제할 수 없다.
이렇게 보면, 문인들이 사사롭게 전기를 쓴 것은 14세기 여말 선초에 이르러 이색·이숭인(李崇仁)·권근(權近)·이곡(李穀)·정도전(鄭道傳)·이첨(李詹)·정이오(鄭以吾) 같은 문인들이 출현한 뒤였다. 이 시기의 전기는 서술자가 관인이 아닌 문인의 신분으로 쓴 사전(私傳)이므로 ≪고승전≫이나 열전과는 다른 새로운 내용의 것이다.
여말 선초의 역사 변동기에 신진사류로 등장한 이 문인들은 자신들의 의식을 그대로 반영시켜 전기를 썼다. 따라서 이들에 의해 저술된 사전(私傳)을 통해 이 시기의 새로운 인간상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이색의 전기에는 입전인물이 비범하였으면서도 불행히도 젊은 나이에 죽은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쓴 것들이 있다. 여기에는 서술자의 현실인식인 유교이념에 입각하여 구제도의 사회적 모순을 극복하고, 새로운 역사창조의 기틀을 마련하려는 의식이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15, 16세기에 출현한 전기 가운데는 ≪고려사≫ 열전과 김시습(金時習)이 쓴 중국인 전기 〈예양전 豫讓傳〉 등 10편의 전기, 성현(成俔)의 〈김취영전 金就盈傳〉 등 3편, 남효온(南孝溫)의 〈육신전 六臣傳〉 등이 있다. 이것들은 대개 역사현실에서 두드러지게 활동하였던 인물들을 입전한 것이며, 서술방식도 사실보고의 전기적 성격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정황(丁料)·성혼(成渾)·이산해(李山海) 등은 입전대상으로 무사·사족녀 및 서민의 효자·효녀·주부(主簿)·순리(循吏) 등에 관심을 보여, 입전대상이 확대되고 있음을 징후를 보여주고 있다.
17, 18세기에 오면, 양란의 역사변동요인을 경험하였던 문인들은 전기를 개인 역사기록의 전기가 아닌 자아의 현실의식을 표현하는 문학양식으로 인식하는 성향을 보여주었다.
그리하여 입전 대상자도 그들의 능력이 세계에 용납되지 못한 불우한 일사(逸士)들이 많이 등장하였다. 대표적인 사례로 허균(許筠)의 전을 들 수 있다.
한편, 이 시기의 역사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충신·열녀·절부·효부·효자의 전들이 다량으로 출현되었다. 특히, 전란으로 인한 유교적 도덕관념이 흐려졌던 이 시기에 도덕적 순교를 하였던 인물들의 전기가 쏟아진 것은 세교(世敎)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송시열(宋時烈)의 〈삼학사전〉을 비롯한 충신·열사의 전기나 열·절·효를 주제로 한 전기 등이 모두 여기에 해당된다. 그리하여 이 시기에 출현한 전기는 16세기까지 나온 것의 5배 이상이 된다.
그러나 전기 가운데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18세기 후반 실학자들과 패사소품을 즐긴 문인들에 의하여 입전된 전기들이다. 이 시기의 입전 대상자들의 신분은 대개 서민들로 도시 상업자본의 발전과 함께 생활의 다양화가 이루어지면서 세태가 하나의 이야깃거리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하여 이 시기의 전기들은 소설이나 야담과 같은 인접양식과 구별하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전기작가로 박지원(朴趾源)을 비롯한 실학자들과 김려(金錤)·이옥(李鈺)과 같은 문인들이 있다. 이들은 입전인물의 행위를 통하여 세태의 부도덕을 고발하고, 이들에 대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인간평등주의의 일면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의식은 19세기에 조희룡(趙熙龍)의 ≪호산외사 壺山外史≫에서 더욱 확대되어 나타난다.
개화기로 접어들면서 개화의지와 애국애족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하여 쓰여진 〈을지문덕〉·〈강감찬〉 같은 장군의 전기와 함께 서양의 영웅이나 애국부인의 전기들이 크게 눈에 띈다.
〈애국부인전〉·〈라란부인전〉·〈피득대제 彼得大帝〉 등이 그것이다. 이들은 개화기 이전의 전기와는 서술방식에 있어서 많은 차이를 보인다. 이것은 서구의 전기를 그대로 번역하여 소개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인물을 쓴 전기도 구성에 있어서 개화기 이전 전기의 구성형식과는 상당한 거리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대상인물의 일대기를 서술하여 거기에서 인간상을 발견하려는 의식은 여전히 계승되고 있다.
〔소설과의 관계〕
전기는 특히 조선 후기에 와서 인접양식인 소설이나 야담과 양식상의 혼미를 초래하게 된다. 따라서, 전기에 대한 문학사적 평가와 함께 한국문학사에서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 하는 것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논자들 가운데는 전기를 소설로 수용하기도 하고, 전 고유의 양식으로 설정하여 큰 갈래인 서사문학 속에서 다루기도 한다.
이러한 관점의 차이는 여러 가지 성격의 전이 존재한다는 데에서 벚어진 것이다. 즉 전에는 소설로 간주될 수 있는 것들이 있는가 하면 역사물로 취급되어야 할 것이 있고, 그 중간형태의 것도 있다.
예를 들면 관찬의 열전은 말할 것도 없고 개인문집에 수록된 전 가운데도 역사의 현장에서 역사창조의 능력을 보여준 인물들의 전기나, 설화적 삽화로 구성된 몇 편의 고승전을 제외한 승전들을 보면 인물의 행적을 시간적 순서에 따라 열거하고 있어 구성의 긴밀성을 통한 긴장감을 보여주지 못한 채 보고하는 형태로 나열하고 있다. 따라서, 이것들을 굳이 문학에 수용한다면 교술적 문학이라고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중간형태의 것도 입전의 인물이 계세징인이나 도덕적으로 귀감이 된다고 생각하여 이를 표창하기 위한 것이므로, 소설처럼 사건의 긴밀성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이것도 교술적 문학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가 하면, 특히 조선 후기에 등장하는 일사전(逸士傳)이나 서민전 등에서는 그것이 비록 실존인물의 행적을 서술한 것이기는 하지만, 도입부와 종결부의 서술자 개입이 유보된다면 야담과 구별이 불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한 편의 완결된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어 실화소설로 손색이 없다.
더구나, 이 시기의 전기작가들은 사대부의 재도적(載道的) 문학관 때문에 그들의 서사적 표현욕구를 국문소설과 같은 소설양식에 담는 것이 쉽게 용납될 수 없었다. 결국 그들은 한문 전통양식 가운데 그래도 가장 개방적이었던 전 양식에다 자신들의 서사적 표현욕구를 실현시켰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국문소설의 〈춘향전〉·〈심청전〉 등의 전기형 소설에서 보여주었던 주인공 일생의 이야기나 그 명칭 등이 초기에는 전의 형식을 빌려서 발전하였을 것이다. 조선 후기에 오면서 소설적 이야기들이 전의 소재 구실을 하여 오히려 전이 소설에서 영향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 후기 소설적 소재로 입전된 전기에서 도입부나 종결부에 서술자의 교훈적 개입이 적극적으로 나타나는 것도 전개부의 내용이 그만큼 소설적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사대부적 문학관을 반영하려는 의도였다. 결국, 조선 후기 소설로 수용될 만한 전기들은 형식과 내용이 일치되지 못한 소설의 변종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文心雕龍(劉塢, 玄岩社, 1975), 傳記文學(李京植, 서울대학교출판부, 1979), 文集所載傳資料集(金均泰, 啓明文化社, 1986), 說文解字(黎明文化事業公司, 1964), 傳의 장르적 考察(金均泰, 雨田古稀紀念論叢,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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