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인 /줄거리 및 작품해설 / 최인훈
by 송화은율회색인 /최인훈
작가소개
1936년 함북 회령 출생. 서울대 법과 대학 중퇴. 1955년 시 [수정]이 <새벽>에 1959년 단편 [그레이 구락부 전말기
], [라울전]이 <자유문학>에 추천 등단. 서울 예전 문예 창작과 교수. 주요 작품으로는 [구운몽], [열하일기], [회색인], [태풍], [달과 소년병],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우상의 집], [가면고]등 발표. 그는 시대 현실의 객관적 발전 과정을 감성적 인식을 통하여 역사적 의미를 재현하려는 작가 의식을 지닌 전통적 사회 주의를 벗어난 새로운 기법을 보여주는 작가로 정평이 있다.
줄거리
비 내리는 가을 저녁에 독고 준의 하숙집으로 그의 친구인 김학이 찾아온다. 그들은 술을 마시며 학술 동인지 <갇힌 세대>에 실린 독고 준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자기들의 동인회인 <갇힌 세대>에 들라는 김학과 한바탕 논란을 벌인 독고 준은 학을 보내고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내고 공상과 상상이 혼합된 여행을 떠난다. 즉 그의 유년 시절로부터 시작되는 이 부분에서 철조망 너머 그의 집과 사과 밭, 부서진 학교, 월남을 한 아버지, 아무런 이유도 모른 체 지도원 선생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자신 등등의 복잡하고 정신이 없는 상상의 여행속에서 그는 소외되었던 아니 지금 현재까지도 소외되어 있는 자신을 돌아보며 현실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억지로 감싸안은 채, 이 여사의 집 문을 열고 들어간다.
주제:현대인의 소외의식과 내면 세계.
작품 해설
최인훈의 [회색인]의 주인공 독고 준은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 질문을 하고 그 상황속에서 살고있는 자아에 대해서 질문을 하기도 하며, 자신의 모습을 자괴의 눈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그의 소설은 사회적 현실에 대한 주인공의 경험을 표면에 내세우지 않고 일종의 배경 음악으로 처리하고 있다. 독고 준의 어린 시절의 경험 가운데 그의 뇌리를 떠나지 않고, 그를 따라 다니는 사건은 <폭격, 더운 공기, 더운 뺨, 더운 살, 폭음>이라는 장면의 묘사는 공포가 아닌 유일한 행복의 순간에 대한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공포를 느끼는 순간에 체험된 것이라는 이유 때문에 주인공에게는 무언가 모순된 느낌으로 받아들여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의 의해 포기될 수 없는 어떤 것이 되고 있다.
이러한 주인공의 특이한 감수성은 얼핏 보기에 혹은 도덕적으로 보면 패덕한 것으로 보인 지 모른다. 그러나 어린 시절을 수많은 이야기 책 속에서 자신을 길러온 주인공의 독백 속에서 그 비밀의 정담함을 발견하게 된다. 이야기라는 것은 기존의 체제에 편입된 사람들의 눈에는 불온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면 이야기는 아직 체제에 흡수되지 않는 어린이에게는 왜 위험하고 불온한 것인가? 가장 뚜렷한 대답을 해 주는 것은 천일야화일 것이다. 술탄에게 세헤라자데는 매일 밤 이야기를 해주며 백성의 생명은 물론 자신의 생명을 구하게 된다. 술탄의 입장에서 보면 백성을 죽이는 체제의 종말을 가져오게 한 것이기 때문에 술탄의 체제에서는 불온한 것이 되고 백성의 입장에서 보면 이야기가 구원의 길이었던 것이다.
문학은 이처럼 불온한 본질적 성격을 갖고 있는 것이다. 체제에 순응할 수 있는 교육의 범주에 들지 않는 소설 따위를 읽는 어린이는 처음부터 죄 의식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독고 준은 <이야기가 더 현살적이고 현실이 더 거짓말 같은 질서>를 보게 되면서 <물구 나무선 정신의 풍토>를 자기 안에서 기르게 된다. 이 때부터 독고 준은 현실의 제도적 허위를 경험하게 된다. 즉 공부를 잘 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체제가 어느 순간에 책에서 얻은 지식을 발표했을 때는 <소부르주아적>이라는 자아 비판을 강요받게 되고 지도원 선생의 말을 좇게 되면 어머니와 형의 말을 듣지 않는 결과가 되고 <고개를 뒤로 돌릴 적마다 거기 어머니와 형의 모습을 기대하는 마음과 그러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의 갈등을 느껴야만 되었다. 이것은 자아의 외부에 존재하고 있는 두 개의 요소가 대립되고 있는 관계로부터 현실과 자아 사이에 대립 그리고는 자아 내부에 있는 두 요소의 대립으로까지 확대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 주고 있다.
이와 같은 대립관계는 주인공이 경험한 역사적 공간속에서도 확인된다. 즉, 북과 남으로 대립된 상황속에서 자라온 독고 준을 통해서 작가는 6.25 전란을 다룬 소설가로서는 드물게 이데올로기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 이데올로기의 문제제기는 적어도 작가 자신이 소속된 집단의 이념에 대해서 논의한다는 점에서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인훈에게 이것의 중요성은 동시대의 다른 작가들이 거의 이 문제를 다루지 않기 때문에 강조될 수 있다. 최인훈이 독고 준의 입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는 두 이데올로기에 대한 태도는 이 두 이데올로기가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라는 이유 때문에 이 땅에 토착화 하는데 무수한 모순을 동반하고 있다는 사실의 주장에서 엿 볼 수 있다. 이러한 주인공의 태도에서 자칫하면 두 이데올로기를 배척하고 새로운 <한국적> 이데올로기의 설정을 염원하는 것처럼 생각하기가 대단히 쉽다. 그것은 그러나 최인훈의 문학이 지향하는 바가 아니다.
최인훈은 <한국적> 이데올로기의 설정자체도 또 다른 집단 이념의 지배 속으로 들어간다는 이념의 속성을 알고 있으며 이 경우 이념이란 개인의 자유와 모순되는 것이며 또 다른 체제화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김학이 독고 준에게 동인으로 가담할 것을 요구했을 때 독고 준은 그 제안을 거절하는 것이다. 개인이 어떤 집단에 소속되었을 경우에는 필연적으로 그 집단의 유지를 위한 집단 내부의 요구에 순응해야 하고 그렇게 되면 집단 내부의 질서 때문에 개인이 자유로운 사고를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관점을 들 수 있다. 하나는 사고의 자유를 어느정도 희생하면서라도 집단의 내부에서 모순을 함께 살며 자신의 이념을 정립하며 실천하는 관점이 좋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런 집단으로부터 벗어나서 자신의 자유로운 사고가 집단에 반영이 되든 안 되든 상관없이 그 자체로서 자신의 삶을 이루게 되어야 한다는 관점이다. 그러나 문학의 속성이 체제에 의해 수렴당하는 것에 대항하는 것이라면 최인훈의 주인공이 두 번째 관점에 서는 것은 바로 문학의 보존이라는 작가의 선택의 결과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최인훈의 주인공의 괴로움은 과연 집단에 소속되지 않는다고해서 자신의 에고를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러한 자아로서의 삶만으로 자신의 지성을 만족 시킬 수 없다는 데 있다.
자신을 자괴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는 독고 준은 개인과 사회의 갈등을 진지하게 반성하고 있는 지성을 소유하고 있다. 이러한 주인공을 내세우고 있는 최인훈은 문학이 현실을 개조하는 혁명의 직접적인 수단이 될 수 없다는 그러면서도 문학이 개인과 사회 사이에 있을 수 밖에 없는 모순과 갈등을 개인의 고통의 측면에서 쓸 수 밖에 없다는 태도를 취하게 된다. 역사 속의 문학이 사람으로 치면 <회색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실에 대한 고통스런 인식으로부터 최인훈 문학의 진정한 의미는 드러났다. 그것은 문학이 언젠가는 개인의 조건을 개선하는데 어느만큼 영향을 미치리라는 기대를 저버릴 수 없다는 데서 비롯된다.
이 대립의 세계는 문학을 선택한 이유가 스스로 넝만적인 혁명가가 될 수 없는데 있다면 바로 문학 자체의 속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로서 이러한 언어에 관한 성찰은 언어가 적어도 눈에 보이고 혹은 정신적으로 경험한 세계를 어떻게 하면 언어와 사실 사이에 있는 깊은 단절의 간극을 메우면서 재구성해 낼 수 있는지 반성하는 단계로 넘어간다. 그렇기 때문에 독고 준이 `이유정`의 그림에 관한 태도를 보며 자신도 그림을 그렸으면 하는 강렬한 충돌을 느끼기도 한다. 이유정의 존위적 그림에서 독고 준이 부러워하는 것은 그림에서는 물감, 구도가 현실에 의해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상태로서 창조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언어에 있어서 순수성은 그 자체로 역사의 때에 의해 오염되어 있는 자이기 때문에 경험한 세계를 그것으로 재구성하는데 있어서 가능한 것은 소설의 양식의 변화를 꾀하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최인훈의 소설에는 띄어쓰기가 무시된 수많은 기록이 나타난다.
그의 소설을 읽는 독자는 아무도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 해서 소설을 읽는 동안만은 자신의 삶을 잊어버리고 마치 자신이 주인공이나 된 것처럼 소설 속의 삶을 사는 것을 방해한다. 이 소설적 조작은 최인훈의 소설이 독자에게 현실의 도피 공간이 되지 않음을 이야기하며 동시에 독자로 하여금 고통스런 자신의 삶에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게 하며 자신의 태도를 반성하게끔 한다. 이와같은 소설 문법의 파괴는 한편으로 소설이 서유기를 방지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언어와 현실 사이에 있는 음모 관계를 어느 정도 드러나게 해 준다.
그렇다고 해서 최인훈의 소설이 <아무렇게나>씌어진 작품이라는 것은 아니다. 회색인의 첫 장에 보면 김학이 소주병을 들고 독고 준을 찾아온 장면이 나오고 마지막 장에도 같은 장면이 나온다. 이것은 작가가 이 소설의 공간을 구조화하고 그 구조 속에서의 정신의 모험을 시도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 따라서 이 소설은 그 자체로는 닫힌 공간임을 알게 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1958년과 1959년이라는 사건의 시간을 통해서 이 소설을 얼마든지 계속될 수 있다는 앙드레 지드적 명제인 열린 공간임을 보여준다. 이 소설의 열린 구조는 그 뒤에 쓰여진 제도화에 의해 뒷받침을 받고 있다. 그렇다면 독고 준이 <당증>을 가지고 매부를 위협한 사건과 그가 김순임과 이유정을 사랑했던 것은 어떻게 설명되어질 수 있는가? 우선 당증은 체제가 사용하는 상징으로 된 것이다.
이 상징이 이데올로기의 대립속에서는 때로는 개인의 긍정적 측면이 되고 때로는 부정적 측면이 된다. 이 부정적 측면이 지배하는 사회에 있어서 그 상징이 갖고 있는 제도적 허위의 힘은 실제로 막강한 것이 된다. 그러니까 개인이 어느 체제에 소속되어 있을 경우에는 그 개인을 결정짓는 요소가 체제에 의해 마련된 무수한 상징의 집합에 지니지 않는 것이며, 따라서 그 개인은 자아를 가질수 없게 된다. 독고준에게는 하나의 휴지에 불과한 당증이 그의 매부에게는 삶을 좌우하는 힘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김순임과 이유정은 독고준에게 자신의 두개의 얼굴을 대변한다. 김순임에게서 강한 성욕을 느낀 것은 본래로 돌아가고 싶은 심정이라 할 수 있다. 반면에 독고준의 지성은 무수한 정신의 모험을 시도하며 현실에서의 패배를 작붐으로 보상하려는 이유정의 방으로 들어간 것은 자신의 두 개의 얼굴 가운데 지성 쪽을 택한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선택은 작가 최인훈이 현실의 투사를 택한 것이 아니라 소설을 택한 것이기 때문에 당연한 귀결인지 모른다. 이것은 최인훈이 정신의 투쟁을 계속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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