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황진이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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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

가정(嘉靖)초년.

 

송도에 진이라는 이름난 기생이 있었다. 여자치고는 뜻이 크고 기개가 높아 사내 대장부에 못지 않았다.

 

진이는 일찍이 화담처사 서경덕이 고답적인 인사로서 벼슬에 뜻이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학문의 깊이와 정통함이 뛰어났다는 말을 듣고 한 번 시험해 볼 생각이 일어났다. 그래서 선비처럼 끈으로 허리를 졸라매고 《대학(大學)》을 옆에 끼고 서경덕을 찾아갔다.

 

『첩이 듣자오니, 《예기(禮記)》에 말하기를 남자는 가죽띠를 두르고 여자는 실끈으로 띠를 한다고 합니다. 첩도 배우에 뜻이 있어 실로 띠를 두르고 찾아왔습니다.』선생은 웃고 받아들여 가르쳤다.

진이는 밤만 되면 몸을 가까이 기대는 등 교태를 부리면서, 마치 옛날 마등가의 음탕한 여인이 아란을 유혹하듯 며칠을 두고 수작을 걸어 보았다. 그러나 서화담은 끝내 동요하지 않았다.

 

진이는 천성이 놀기 좋아하는 성미이다. 금강산이 천하 제일의 명산이라는 말을 듣고, 또 한 번 놀아 보고 싶은 생각이 일어났다.

 

어울려 짝될 사람을 구하던 중에 마침 장안에 이생이란 사람이 있는 것을 알았다.

 

그는 재상의 아들로서 사람이 칠칠하지 못해서 명예나 재물 따위에는 관심이 없고, 그래서 함께 멀리 놀이를 가도 탈이 없을 것 같았다.

진이는 조용히 이생을 구슬렸다.

『제가 들으니, 중국인은 고려국에 태어나서 금강산을 친히 구경하는 것이 소원이라는데, 황차 우리 나라 사람으로 이 나라에 태어나서, 그것도 신선이 산다는 금강산을 지척에 두고 있으면서 구경하지 못한대서야 말이 되겠습니까? 이제 이 몸이 우연히 선랑(仙郞)을 따르게 되었으니 같이 신선처럼 놀기에 마침 잘 되었습니다. 산과 들을 거닐 간편한 옷차림으로 그 그윽하고 뛰어난 경치를 구경하고 돌아온다면 또한 기쁜 일이 아닙니까?』

 

이생이 하락하자, 사내로 하여금 일체의 시동이나 종도 따르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무명옷에 초립을 쓰고 양식 주머니까지도 몸소 젊어지게 하였다.

 

진이는 여승처럼 댕댕이 덩굴로 고깔을 만들어 쓰고, 몸에는 갈포로 지은 장삼, 무명 치마에 짚신, 거기에 죽장까지 들었다.

 

두 사람은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여기저기 깊은 골짜기와 절벽을 오르내리는 동안 양식도 다 떨어졌다.

이 때부터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서 절간마다 찾아다니며 비렁뱅이질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진이는 절간의 땡땡이 중에게 몸까지 팔았다. 그래도 이생은 못 본 척해 두었다. 이렇게 하여 산 속을 헤매다 보니 못은 다 떨어지고, 주린 배를 참아 가면 굶기를 밥먹듯, 두 사람의 몰골은 전날의 호사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어느 날은 한 송림 속의 시냇가에 이르렀다. 마침 시골 선비 여남은 사람이 둘러 앉아서 주연을 베풀면서 술이 거나해 있었다. 진이가 지나치면서 그 앞에 가서 절을 하자, 선비 하나가 말을 걸어 왔다.

『여사장도 술을 마실 줄 아오? 한 잔 드시오.』

 

진이는 사양하지 않고 받아 마셨다.

허기진 배에 술이 들어가니 곧 취했다. 진이는 술잔을 들고 옛날의 가락을 한 곡조 읊었다. 고운 목소리 맑은 노래가 숲 속의 구석구석에 퍼져 울렸다.

 

모든 선비들은 이상하게 여기면서 다투어 술을 권하고 안주를 먹여 주었다.

『첩에게 하인 녀석이 하나 있는데 몹시 주린 모양이니, 청컨대 남은 음식이 있으면 먹여 주십시오.』

진이는 이렇게 해서, 다시 이생을 불러 배불리 먹였다.

 

두 집안에서는 이들이 간 곳을 알 까닭이 없었다. 팔도에 수소문을 해 보아도 그림자조차 찾지 못했다.

이렇게 한 해가 거의 다할 무렵, 다 떨어진 옷에 얼굴은 시꺼멓게 말라 가지고, 파리한 거지꼴로 두 사람이 나타났다. 두 집안은 물론, 이웃에서도 크게 놀라 마지않았다.

 

선전관 이사종은 노래를 잘 불렀다. 일찍이 사신으로 가는 길에 송도를 지나다가 천수원 냇가에서 말을 쉬게 되었다. 갓을 벗어서 배 위에 덮고 드러누워 하늘을 바라보다가 저절로 흥이 솟구쳐 두어 가락 큰 소리를 읊었다.

때마침 진이도 그곳을 지나치면서 천수원 밖에서 말을 쉬게 하다가, 청아한 노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한참 동안 듣고 나더니 혼자 중얼거렸다.

 

『이 노래 곡조가 참으로 이상하다. 보통 시골 구석에서 부르는 노래가 아니다. 듣자 하니 서울에 이 사종이라는 유명한 풍류객이 있다. 하던데, 당대의 절창이라, 아마 그 사람일게다.』

 

사람을 시켜 알아 보았더니 과연 이 사종이 틀림없었다.

 

진이는 자리를 옮겨 가서 이 사종에게 접근하였다. 그리고 서로 자기의 심정을 이야기한 끝에 사종을 집으로 모셔 왔다.

며칠 동안 사종은 진이의 집에서 유숙했다. 하루는 진이가 말했다.

 

『당신과는 마땅히 6년을 같이 살아야 하겠습니다. 』

 

그리고는 다음 날 자기 집 재산 가운데에서 3년 동안 먹고 지낼 재산들을 사종의 집으로 옮겼다. 이렇게 그 부모와 처사 등 집안 살림 일체를 돌볼 경비를 마련한 뒤, 진이는 손수 혼수를 지어 입고 첩며느리의 예식을 다하였다. 사종의 집에서는 조금도 돕지 못하게 하였다.

 

이렇게 하여 3년이 흘렀다. 사종이 진이 일가를 먹여 살릴 차례가 된 것이다. 사종은 진이가 한 것처럼 정성을 다하여 갚았다.

다시 3년이 흘렀다.

『이제 마침내 약속의 만기가 되었나 봅니다. 』

 

진이는 이렇게 말하는 미련도 없이 떠나갔다.

 

뒤에 진이는 병이 들어 죽게 되었다. 집안 사람들을 불러 놓고 유언처럼 한 마디 했다.

『내 평생 성품이 분방한 것을 좋아했으니, 죽거든 산속에다 장사지내지 말고 큰 길가에 묻어 다오. 』

 

송도의 큰 길가에는 진이의 무덤이 있다.

임제가 평안도사가 되어 송도를 지나는 길에 제문을 지어 진이의 묘에 바쳤다. 이 일에 해서 그는 조정의 말썽거리가 된 바 있었다.

(자료 출처 : 이민수역주 한국한문소설선, 서문문고)

요점 정리

연대 : 조선 중기

작자 : 유몽인

형식 : 한문소설

성격 : 일화적, 진취적

주제 : 황진이 일화기

이해와 감상

그의 전기에 대하여 상고할 수 있는 직접사료는 없다. 따라서 간접사료인 야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계통의 자료는 비교적 많은 반면에 각양각색으로 다른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그리고 너무나 신비화시킨 흔적이 많아서 그 허실을 가리기가 매우 어렵다.

 

황진이의 출생에 관하여는 황진사(黃進士)의 서녀(庶女)로 태어났다고도 하고, 맹인의 딸이었다고도 전하는데, 황진사의 서녀로 다룬 기록이 숫자적으로는 우세하지만 기생의 신분이라는 점에서 맹인의 딸로 태어났다는 설이 오히려 유력시되고 있다.

황진이가 기생이 된 동기는 15세경에 이웃 총각이 혼자 황진이를 연모하다 병으로 죽자 서둘러서 기계(妓界)에 투신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 여부는 알 수가 없다. 용모가 출중하며 뛰어난 총명과 민감한 예술적 재능을 갖추어 그에 대한 일화가 많이 전하고 있다.

또한, 미모와 가창 뿐만 아니라 서사 ( 書史 )에도 정통하고 시가에도 능하였다. 당대의 석학 서경덕 ( 徐敬德 )을 사숙(직접 가르침을 받지는 않았으나 마음속으로 그 사람을 본받아서 도나 학문을 닦음.)하여 거문고와 주효(酒肴)를 가지고 그의 정사를 자주 방문여 당시(唐詩)를 정공(精工 : 정교하게 공작함)하였다고 한다.

황진이는 자존심도 강하여 당시 10년 동안 수도에 정진하여 생불(生佛)이라 불리던 천마산 지족암의 지족선사(知足禪師)를 유혹하여 파계시키기도 하였다. 당대의 대학자 서경덕을 유혹하려 하였으나 실패한 뒤에 사제관계를 맺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박연폭포 ( 朴淵瀑布 ) · 서경덕 · 황진이를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하였다고 한다.

여기서는 황진이의 진취적이고 자유분방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자료

유몽인(柳夢寅)

1559(명종 14) ∼ 1623(인조 1). 조선 중기의 문신 · 설화 문학가. 본관은 고흥 ( 高興 ). 자는 응문(應文), 호는 어우당(於于堂) · 간재(艮齋) · 묵호자(默好子). 의(依)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사간 충관(忠寬)이고, 아버지는 주부 ( 主簿 )이며, 어머니는 참봉 민의(閔 普 )의 딸이다.

 

성혼 ( 成渾 )과 신호(申濩)에게서 수학했으나 경박하다는 책망을 받고 쫓겨나 성혼과는 사이가 좋지 못하였다. 1582년(선조 15) 진사가 되고, 1589년 증광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다. 1592년 수찬으로 명나라에 질정관 ( 質正官 )으로 다녀오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를 평양까지 호종하였다.

 

왜란 중 문안사 ( 問安使 ) 등 대명 외교를 맡았으며 세자의 분조(分朝 : 임란 당시 세자를 중심으로 한 임시 조정)에도 따라가 활약하였다. 그 뒤 병조참의 · 황해감사 · 도승지 등을 지내고 1609년(광해군 1) 성절사 겸 사은사로 세 번 째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벼슬에 뜻을 버리고 고향에 은거하다가 왕이 불러 남원부사로 나갔다.

그 뒤 한성부좌윤 · 대사간 등을 지냈으나 폐모론이 일어났을 때 여기에 가담하지 않고 도봉산 등에 은거하며 성안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이리하여 1623년 인조반정 때 화를 면했으나 관직에서 물러나 방랑 생활을 하였다.

그 해 7월 현령 유응경(柳應 崗 )이 “ 유몽인이 광해군의 복위 음모를 꾸민다. ” 고 무고해 국문을 받았다. 마침내 역률(逆律)로 다스려져 아들 약( 盲 )과 함께 사형되었다. 서인들이 중북파(中北派)라 부르며 끝내 반대 세력으로 몰아 죽인 것이었다. 이 때 관작의 추탈은 물론 임진왜란의 공으로 봉해진 영양군(瀛陽君)의 봉호도 삭탈되었다. 정조 때 신원되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그는 조선 중기의 문장가 또는 외교가로 이름을 떨쳤으며 전서(篆書) · 예서 · 해서 · 초서에 모두 뛰어났다. 그의 청명(淸名)을 기려 전라도 유생들이 문청 ( 文淸 )이라는 사시(私諡 : 개인의 시호를 국가에서가 아닌 사적인 방법으로 내림.)를 올리고 운곡사(雲谷祠)에 봉향하였다.

 

신원된 뒤에 나라에서도 다시 의정(義貞)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운곡사를 공인하였다. 고산 ( 高山 )의 삼현영당(三賢影堂)에도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야담을 집대성한 ≪ 어우야담 ≫ 과 시문집 ≪ 어우집 ≫ 이 있다.

≪ 참고문헌 ≫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國朝榜目, 司馬榜目, 於于堂集, 燃藜室記述, 朝野輯要, 槿域書 怜 徵.

황진이(黃眞伊)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명기(名妓). 본명은 진(眞), 일명 진랑(眞娘). 기명(妓名)은 명월(明月). 개성(開城) 출신. 확실한 생존연대는 미상이다. 중종 때의 사람이며 비교적 단명하였던 것으로 보고 있다.

 

그의 전기에 대하여 상고할 수 있는 직접사료는 없다. 따라서 간접사료인 야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계통의 자료는 비교적 많은 반면에 각양각색으로 다른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그리고 너무나 신비화시킨 흔적이 많아서 그 허실을 가리기가 매우 어렵다.

황진이의 출생에 관하여는 황진사(黃進士)의 서녀(庶女)로 태어났다고도 하고, 맹인의 딸이었다고도 전하는데, 황진사의 서녀로 다룬 기록이 숫자적으로는 우세하지만 기생의 신분이라는 점에서 맹인의 딸로 태어났다는 설이 오히려 유력시되고 있다.

 

황진이가 기생이 된 동기는 15세경에 이웃 총각이 혼자 황진이를 연모하다 병으로 죽자 서둘러서 기계(妓界)에 투신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 여부는 알 수가 없다. 용모가 출중하며 뛰어난 총명과 민감한 예술적 재능을 갖추어 그에 대한 일화가 많이 전하고 있다.

 

또한, 미모와 가창 뿐만 아니라 서사 ( 書史 )에도 정통하고 시가에도 능하였다. 당대의 석학 서경덕 ( 徐敬德 )을 사숙(직접 가르침을 받지는 않았으나 마음속으로 그 사람을 본받아서 도나 학문을 닦음.)하여 거문고와 주효(酒肴)를 가지고 그의 정사를 자주 방문여 당시(唐詩)를 정공(精工 : 정교하게 공작함)하였다고 한다.

황진이는 자존심도 강하여 당시 10년 동안 수도에 정진하여 생불(生佛)이라 불리던 천마산 지족암의 지족선사(知足禪師)를 유혹하여 파계시키기도 하였다. 당대의 대학자 서경덕을 유혹하려 하였으나 실패한 뒤에 사제관계를 맺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박연폭포 ( 朴淵瀑布 ) · 서경덕 · 황진이를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하였다고 한다.

 

황진이가 지은 한시에는 〈 박연 朴淵 〉 · 〈 영반월 詠半月 〉 · 〈 등만월대회고 登滿月臺懷古 〉 · 〈 여소양곡 與蘇陽谷 〉 등이 전하고 있다. 시조 작품으로는 6수가 전한다.

이 중에 〈 청산리 벽계수야 〉 · 〈 동짓달 기나긴 밤을 〉 · 〈 내언제 신이없어 〉 · 〈 산은 옛산이로되 〉 · 〈 어져 내일이여 〉 의 5수는 진본 (珍本) ≪ 청구영언 ≫ 과 ≪ 해동가요 ≫ 의 각 이본들을 비롯하여 후대의 많은 시조집에 전하고 있다.

〈 청산은 내뜻이요 〉 는 황진이의 작품이라 하고 있다. 그러나 ≪ 근화악부 槿花樂府 ≫ 와 ≪ 대동풍아 大東風雅 ≫ 의 두 가집에만 전하며, 작가도 ≪ 근화악부 ≫ 에는 무명씨로 되어 있고, ≪ 대동풍아 ≫ 에서만 황진이로 되어 있다. 그리고 두 가집에 전하는 내용이 완전 일치하지도 않는다.

 

특히 초장은 ≪ 근화악부 ≫ 에서 “ 내 정은 청산이요 님의 정은 녹수로다. ” 라 되어 있다. ≪ 대동풍아 ≫ 에서는 “ 청산은 내뜻이요 녹수는 님의 정 ” 이라고 바뀌어 그 맛이 훨씬 달라졌다. ≪ 대동풍아 ≫ 는 1908년에 편집된 책이고 작가의 표기도 정확성이 별로 없는 가집이라는 점에서 그 기록이 의문시되고 있다.

황진이의 작품은 주로 연석(宴席)이나 풍류장(風流場)에서 지어졌다. 그리고 기생의 작품이라는 제약 때문에 후세에 많이 전해지지 못하고 인멸(湮滅 : 자취도 없이 모두 없어짐)된 것이 많을 것으로 추측된다.

현전하는 작품은 5, 6수에 지나지 않으나 기발한 이미지와 알맞은 형식과 세련된 언어구사를 남김없이 표현하고 있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 참고문헌 ≫ 燃藜室記述, 錦溪筆談, 松都紀異, 於于野譚, 李朝女流文學 및 宮中風俗의 硏究(金用淑, 淑明女子大學校出版部, 1970), 歷代時調全書(沈載完, 世宗文化社, 1972), 黃眞伊와 許蘭雪軒(金東旭, 現代文學 9, 1955), 黃眞伊의 詩와 韓國詩의 本質(趙雲濟, 月刊文學 32, 1971).

(자료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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