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호민론 / 허균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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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글은 유명한 (홍길동전)을 쓴 조선 선조 때의 문인 교산 허균(許均.1569-1618)의 논설이다.

그의 문집인 성소복부고 (惺所覆部藁)에 실려 있는데, (백성을 세가지로 구분)하여 그 특성 을 명확히 인식하고 다스림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읽어보기]

이 세상에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오직 백성뿐이다. 홍수나 화재, 호랑이나 표범보다도 더 백성을 두려워 해야 하는데도, 바야흐로 윗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백성들을 업신여기면서 가 혹하게 부려먹는 것은 도대체 무슨 까닭인가?
백성에는 세 부류가 있는데 그 첫째는 기존질서에 만족하며, 늘 보아오던 것에 속박되어 순순히 법을 받들면서, 윗사람이 시키는 대로 따른 사람들이 항민(恒民)이다. 이러한 항민들 은 두려울 게 없다.

둘째, 살가죽이 벗겨지고 뼛골이 부서지도록 모질게 착취당하면서도, 집안의 수입과 땅에 서 생산되는 것을 다바쳐 윗사람의 무한한 요구에 이바지하느라 혀를 내두르며 탄식하고, 윗사람을 증오하는 자들이 원민(怨民)이다. 하지만 이러한 원민도 굳이 두려워할 필요가 없 다.

셋째, 호민(豪民)이다. 푸줏간 속에 자신의 자취를 숨겨 몰래 딴 마음을 품고 세상 형편을 기웃거리다가, 혹시 시대적 변고라도 있게 되면 자신의 소원을 이루어보려는 사람을 말한다. 이 호민은 몹시 두려워 해야 할 존재이다.

이러한 호민이 나라가 허술해지는 틈을 엿보고, 일이 벌어지는 낌새를 보고 기회를 노리 다가, 팔을 쳐들고 한번 소리를 외치기라도 하면, 저 원민들은 소리만 듣고도 모여들고 함께 모의하지 않아도 외쳐댄다. 이와 더불어 항민들도 또한 제 살 길을 찾기 위해 호미, 고무래, 창, 창자루를 가지고 쫓아가서, 무도한 놈들을 죽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저 하늘이 임금을 세운 것은 백성을 기르게 하기 위해서였지, 한 사람으로 하여금 윗자리 에서 방자하게 눈을 부라리며 구렁이 같은 욕심을 부리도록 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의 우리나라에는 이런 일이 없다. 땅이 좁고 험하여 사람이 적다. 백성 또한 나약하고 게으르며 소심해서, 뛰어난 절제나 호협한 기상이 없다. 따라서 평소 뛰어난 재주를 가진 위 대한 인물이 나와서 세상에 쓰여지는 일도 없었지만, 난리를 당해도 호민은 없었다. 그러니 사나운 군대가 반란을 일으켜 나라를 소란스럽게 한 적도 없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그러하더라도 지금은 고려시대와는 다르다. 고려때에는 백성들에게서 세금을 거두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산이나 강에서 나는 이익도 백성과 함께 나누었던 것이다. 상업을 장려했으 며, 공인(엔지니어)에게도 혜택이 돌아가게 했다. 국가의 수입에 맞게 지출을 하고 저축도 해 두었기 때문에, 갑자기 나라에 불상사가 생기더라도 세금을 추가로 걷지 않아도 되었다. 고려말기에도 백성들의 가난과 흉년을 걱정해 주었다.

그러나 우리 조정은 그렇지 않다. 보잘것 없는 백성이면서도 신을 섬기고 윗사람을 모시 는 예절은 중국과 다름없다. 백성들이 내는 세금이 다섯 푼이면 조정에 돌아오는 이익은 겨 우 한푼 뿐이고, 나머지는 간사한 무리들에게 흩어져 버린다. 관청에는 저축된 돈이 없어 일 만 있으면 한해에도 두번씩이나 세금을 부과하는데, 지방의 수령들은 그것을 빙자하여 가혹 하게 거두어 들인다. 이런 까닭에 백성들의 원망과 근심은 고려말기보다 심하다.

그런데도 윗사람들이 두려워할 줄 모르고 태평스러워하는 까닭은 우리나라에 호민이 없었 기 때문이다. 견훤이나 궁예 같은 자가 나와서 불행히도 몽둥이를 휘두른다면, 원망하여 고 통스러워하던 백성들이 그들을 추종하지 않으리라 보증할 수 있겠는가? 기주. 양주(이 두 곳은 황소가 반란을 일으켰던 거점임)에서 일어났던 것과 같은 천지를 뒤엎는 변고가 금방 닥칠 수 있다.

따라서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은 두려워해야할 형세를 명확히 깨닫고 잘못을 바로 잡는다 면 바른 다스림에 다다를 수가 있을 것이다.

윗글에서 허균은 백성을 세갈래로 나누고 있다. 즉 보수적이며 현실안주적 백성인 항민 (恒民), 현실에 불만을 품고는 있으나 한탄만 할 뿐 저항적 행동은 하지 않는 백성인 원민 (怨民), 그리고 현실에 불만을 품고 적극적으로 개조하려는 호민(豪民)이 그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구분과 분류)에 대해 알아보고, 윗글이 보여주고 있는 세 갈래의 구분이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는지 생각해 보자.

인간은 잡다하게 존재하는 사물세계를 질서있고 체계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이해하는 놀라 운 지적 기술을 가지고 있다. 수십 억 되는 사람들은 남자와 여자로 나누어 간단히 파악하 고, 사태를 명료하게 인식한다. 만약, 지구상의 모든 사람을 한 명씩 알려고 한다고 상상해 보라. 어려운 일이기도 하지만 거의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이런 문장을 생각해 보자.
(A는 B에 속한다)
이 문장은 A가 B의 집합임을 나타낸다. B 속에는 A를 비롯한 여러 원소가 있음을 뜻한 다. (사람)에는 (남자)와 (여자)가 속해 있다. 따라서 사람은 상위 개념이고, 남자와 여자는 그 하위 개념이다.

우리는 이러한 개념을 지닌 집합을 질서있게 앎으로써, 대상이나 사물 세계를 체계적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럴 때 사용하는 것이 구분(區分, division)이다. 구분이란, 상위 개념을 하위 개념들로 쪼 개는 것이다. 또 구분을 해 내려가다 보면, 여러 단계로 종적 체계를 세울 수 있다. 이와 같 이 구분에 구분을 거듭하여 종적 체계를 이루는 것을 분류(classification)라 한다.

이러한 구분과 분류를 함에 있어서 꼭 지켜야 할 규칙이 있는데, 이를 어기면 오류를 범 하게 된다.

첫째, 구분 및 분류의 기준이나 원리는 단 한 개라야 한다. 이것은 구분에 있어서 가장 중 요한 사항이라 할 수 있는데, 이 규칙을 어기면 소위 교차구분(Cross division)의 오류를 범 한다. 사람을 흑인종과 식인종으로 구분한다든지, 어른과 남자로 구분해서는 안된다는 원리 다. 피부색 혹은 성의 한 기준으로 구분하여야 한다.

둘째, 하위 개념의 모든 항목이 망라되어야 한다. 즉, 하위 개념들을 모두 합치면 바로 위 의 상위 개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을 2분법으로 나누어 흑인종과 백인종으로만 나 누었을 때 이 규칙을 어기게 된다.

셋째, 분류는 점진적(Progressive)이어야 한다. 단계를 뛰어 넘으면 곤란하다는 것인데, 이 를 구분의 비약이라 한다.

가령,
존재 --- 무생물
ㅏ생물---식물
ㅏ동물---인간
ㅏ 비인간
과 같이 분류했을 때, 존재를 바로 식물과 동물로 구분하면 이 규칙을 어기게 된다.

이런 규칙들을 염두에 두고 위의 구분이 올바른지 토론해 보자. 즉 구분의 기준은 무엇이 고, 그렇게 구분했을 때, 교차구분은 되지 않았는지, 또 모든 항목들이 망라되었는지 따져보 자.

윗글에서 허균이 제시한 것은 국가의 탄압이나 가렴주구에 대한 백성들의 반응을 기준으 로 삼아, 순응적인 백성, 저항적인 백성, 불만을 가지면서도 저항치 않는 백성으로 나누었다. 그러나 불만을 가지고도 저항치 않는 백성이 있다면, 저항을 하면서도 불만이 없는 사람이 나, 아무 생각이 없는 사람은 없겠는지 생각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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