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한용운 시집108 / 고대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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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당신은 나로 하여금 날마다 당신을 기다리게 합니다. 

해가 저물어 산 그림자가 촌집을 덮을 때에, 

나는 기약없는 기대를 가지고 마을 숲 밖으로 가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소를 몰고 오는 아이들의 풀피리는 제소리에 목메입니다. 

먼, 나무로 돌아가는 새들은 저녁 연기에 헤엄칩니다. 

숲들은 바람과의 유희를 그치고 잠잠히 섰습니다. 

그것은 나에게 동정하는 표상입니다. 

시내를 따라 굽이친 모랫길이 어둠의 품에 안겨서 잠들 때에, 

나는 고요하고 아득한 하늘의 긴 한숨의 사라진 

자취를 남기고, 게으른 걸음으로 돌아옵니다. 

당신은 나로 하여금 날마다 날마다 당신을 기다리게 합니다. 

어둠의 입이 황혼의 엷은 빛을 삼킬 때에, 

나는 시름없이 문 밖에 서서 당신을 기다리게 합니다. 

다시 오는 별들은 고운 눈으로 반가운 표정을 빛내면서 

머리를 조아 다투어 인사합니다. 

풀 사이의 벌레들은 이상한 노래로, 백주(白晝)의 

모든 생명의 전쟁을 쉬게 하는 평화의 밤을 공양(供養)합니다. 

네모진 작은 못의 연잎 위에 발자취 소리를 내는 실없는 바람이 

나를 조롱할 때에 나는 아득한 생각이 날카로운 원망으로 화합 니다. 

당신은 나로 하여금 날마다 날마다 당신을 기다리게 합니다. 

일정한 보조로 걸어가는 사정없는 시간이 모든 희망을 채찍질하여 

밤과 함께 돌아갈 때에, 나는 쓸쓸한 잠자리에 누워서 당신을 기다립니다. 

가슴 가운데의 저기압은 인생의 해안에 폭풍우를 지어서, 

삼천 세계(三千世界)는 유실되었습니다. 

벗을 잃고 견디지 못하는 가엾은 잔나비는 

정(情)의 삼림에서 저의 숨에 질식되었습니다. 

우주와 인생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는 대철학은 

눈물의 삼매(三昧)에 입정(入廷)되었습니다. 

나의 '기다림'은 나를 쁹다가 못 쁹고 저의 자신까지 잃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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