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한글의 우수성 / 훈민정음을 만들다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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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의 우수성 / 훈민정음을 만들다

 

(1) 뒤흔들린 우리말

십 삼 세기 초중엽부터 한 세기가 훨씬 넘도록 이어진 몽고(원나라)의 침략은 우리말을 적잖이 뒤흔들었다. 가라(검은 말), 숑골(송골매)처럼 말과 매의 이름들이며, 군사와 관직에 따른 몽고말들이 많이 들어왔다. 이제는 아주 토박이말로 여겨지는 갈비, 고라니, 구리, 나이, ()보라(), 사돈, 얼룩, 오랑캐 같은 낱말들이 모두 몽고말에서 들어온 것이다. 그러나 몽고가 우리를 짓밟았지만, 우리는 저들을 우러러보지 않았고 저들의 글자를 들여와 쓰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말만큼 우리말을 뒤흔들지는 못했다.

 

중국말은 신라가 당나라의 힘을 빌려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린 뒤부터 지배층 사람들이 중국을 우러러보고 끌어들여서 우리말을 크게 뒤흔들었다. 처음에는 물론 천천히 들어와 우리말과 뒤섞였기 때문에 고리(), 다홍(치마), 무명, , 심지, 조리, 투구, 피리 같은 낱말들이 이제는 중국말이었던 줄도 모르게 되었다. 십이 세기 초의 󰡔계림유사󰡕까지만 해도, 한자말이 열에 하나도 실리지 않은 것으로 보아 중국말이 아직은 거세게 밀려들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십사 세기 말의 󰡔조선관역어󰡕에는 한자말이 열에 셋씩이나 실려서 그 사이 훨씬 빠른 흐름으로 밀려들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고려 후기로 넘어오면서 중국말을 끌어들이는 풍조가 거세지다가, 조선에 이르러 중국의 유학을 나라 다스리는 뼈대로 삼으면서 그 흐름은 아주 가파르게 치달으며 우리말을 뒤흔들었다.

 

(2) 훈민정음을 만들어

그처럼 지배층 사람들이 중국의 한자와 한문에 깊숙이 빠져들었는데도 우리 입말을 제대로 적으려는 겨레의 바람은 뿌리뽑히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바람은 십오 세기 중엽에 와서 마침내 훈민정음을 만들어 냈다. 세종대왕은 집현전의 젊은 학자들과 손잡고 아주 조용하게 우리 입말을 제대로 적을 수 있는 글자를 만들었는데, 세종 2512(14441)󰡐훈민정음이라 이름 붙인 스물여덟 글자를 모두 만들었다. 그랬더니 이듬해 초(세종 262)에 집현전의 부제학 최만리가 앞장서서 무섭게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자 세종대왕은 이들을 꾸짖는 한편, 다시 집현전 학자들에게 글자의 원리와 쓰임새를 풀이하는 책을 만들게 했다. 그 책이 곧 󰡔훈민정음󰡕으로, 세종 289(144610)에 펴낸 것이다.

훈민정음은 세종대왕 한 사람의 천재로 만든 것이라기보다 기나긴 세월에 걸쳐 우리 입말에 맞는 글자를 만들려고 몸부림친 겨레의 쌓인 힘으로 만든 것이라 해야 마땅하다. 집현전 대제학 정인지가 󰡔훈민정음󰡕의 머리글로 적은 다음 말에는 그런 몸부림의 깊이가 잘 드러나 있다.

 

나라의 말이 소리는 있어도 글자가 없는지라 중국의 글자를 빌려서 함께 쓰지만 이것은 네모난 손잡이 막대를 둥근 구멍의 도끼에 끼우듯이 서로 어긋나는 것이니 어찌 막힘 없이 다다를 수 있겠는가.

 

우리 사투리와 토박이말은 중국의 말과 같지 않기 때문에 글을 배우는 사람은 뜻을 깨우치기 어려워서 걱정하고, 죄인을 다스리는 사람은 속사정을 들여다보지 못해서 걱정했다.

 

옛날 신라의 설총이 처음으로 이두를 만들어 관청과 민간에서 지금까지 쓰지만, 모두 한자를 빌려 쓰기 때문에 껄끄럽기도 하고 막히기도 할 뿐 아니라 하찮고 닿지 않아 우리 토박이말을 만분의 일도 통하지 못했다.

 

그리고 또 정인지는 훈민정음의 뛰어남을 다음과 같이 말해 놓았다. 스스로 만들어 낸 글자를 얼마나 만족스럽고 자랑스럽게 여겼던 것인지를 알아볼 만하다.

 

스물여덟 글자로 전환이 무궁하다. 간단하고도 요긴하며, 정밀하면서도 통달하기 때문에 슬기로운 사람은 하루아침에 깨우치고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열흘이면 배울 수 있다. 이것으로 한문을 풀이하면 그 뜻을 알 수 있고, 이것으로 송사를 들으면 그 사정을 알 수 있다. 글자와 소리는 맑고 흐림이 가려지고, 노래를 만들면 가락이 고르게 되어, 쓰려고 하는 데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고, 가려고 하는 데 닿지 않은 곳이 없다. 바람 소리나 두루미 울음 소리, 닭 우는 소리나 개 짖는 소리라도 모두 적을 수 있다.

 

훈민정음은 입말의 소리를 참으로 깊이 꿰뚫어보고 만들어 낸 글자이다. 우선 잇달은 말소리를 음절로 덩이 지을 수 있었으니, 그것은 중국 사람들이 오래도록 연구해서 알고 있던 것을 빌려 온 것이다. 나아가 음절을 더 작은 조각인 음소로 쪼갰는데, 중국 사람들은 음절이 두 조각(성모운모)인 줄로 알았으나 우리는 처음가운데마침의 세 조각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뿐만 아니라 세 조각에서 처음과 마침의 두 조각은 같은 소리라는 것까지도 알았다.

 

그런 다음 음소를 닿소리(자음)와 홀소리(모음)로 나누어서 아주 과학적인 방법으로 글자를 만들었다. 닿소리는 먼저 발음 기관의 모습을 본떠서 기본 글자를 만들고, 소리의 자질에 따라 기본 글자에 획을 더하거나 같은 글자를 옆으로 겹치는 방식으로 새로운 글자를 만들었다. 홀소리는 먼저 하늘과 땅과 사람의 모습을 본떠서 기본 글자를 만들고, 이들 기본 글자를 서로 모아서 새로운 글자를 만들어 나갔다.

 

렇게 닿소리 열일곱 글자, 홀소리 열한 글자를 자유롭게 모아서 음절을 만들게 했는데, 이렇게 모아서 만들어 낼 수 있는 음절은 헤아릴 수가 없어서 그야말로 바람 소리나 두루미 울음 소리라도 모두 적을 수 있다. 온 겨레가 남녀와 노소를 가리지 않고 더불어 글말살이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

 

(3) 진서의 길과 언문의 길

그러나 지배층 사람들은 한글을 쓰려고 하지 않았다. 한글을 두루 쓰면 정보가 백성에게 흘러가서 사회를 어지럽힐까 두려워한 것이다. 훈민정음을 만드는 일에 몸소 애쓴 세종과 세조, 두 임금은 값진 한문 자료를 부지런히 한글로 뒤쳐서 백성들을 깨우치고자 했지만 그런 뜻도 지배층의 담 벽에 부딪혀 머지않아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고 나서는 왕조가 무너질 때까지 한문을󰡐참된 글(진서)’이라 하고 한글을󰡐하찮은 글(언문)’또는󰡐암클이라고 하면서 한글이 널리 쓰이는 길을 막았다. 다만 한문으로는 마음 속 느낌을 속 시원히 드러낼 수 없어 답답하게 여기던 몇몇 사대부들만이 한글로 노래(시조와 가사)를 만들어 즐기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지배층에서 아무리 막아도 한글은 저절로 상류층 아낙네와 중류층 백성에게로 퍼져 나갔다. 너무 쉬워서 조금만 여유를 가지면 배우고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흐름은 아무도 막을 수 없었기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십팔 세기에 들어오면 지배층 아낙네와 중류층 백성들 손에 이끌려 한글이 우리 문학의 안방에까지 나타났다. 소설, 일기, 시조 같은 갈래가 그런 문학이.

 

양반 집안의 아낙네들이 처음에는 한글 소설을 붓으로 베껴서 읽었지만, 이제 붓으로 베끼는 것으로는 읽고 싶은 사람들이 불어나는 것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소설을 인쇄하여 그런 사람들에게 가져가서 파는 장사가 생겨났는데, 서울, 안성, 전주 같은 곳에 소설을 찍어 내던 인쇄소가 많았다. 일기는 먼저 왕실 아낙네들 손에서 비롯했다. 일찍이 서궁에 갇혀 있던 인목대비를 모시던 궁녀들이 󰡔계축 일기󰡕(1623년 즈음)를 쓴 것에서 비롯하여, 정조의 어머니 홍씨를 모시던 궁녀들이 쓴 󰡔혜빈궁 일기󰡕(176465)와 홍씨가 손수 쓴 󰡔한중록󰡕(1795)이 전해진다. 시간이 흐르면서 여느 양반집 아낙네들까지 일기를 더러 썼는데, 함흥 판관 신대손의 부인 남 씨가 쓴 󰡔의유당 관북유람 일기󰡕(1829)가 널리 알려진 것이다. 시조는 이 시절 중류층 남정네들이 크게 일으켜 세웠다. 중인으로서 낮은 벼슬살이를 하다가 그만둔 김천택과 김수장은 가장 낮은 신분인 소리꾼들이 부르던 노래를 찾아 모아 한글로 적어서 󰡔청구영언󰡕(1728)󰡔해동가요󰡕(1763)라는 시조집을 만들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노래를 좋아하던 중인들과 소리꾼들은 커다란 자부심을 지니고 자랑스럽게 노래를 부르고 시조를 지었으며, 잇달아 십구 세기는 물론 오늘까지 시조가 겨레 문학의 노른자위로 자리잡게 하는 바탕을 마련했다.

 

(4) 다시 뒤흔들린 우리말

조선이 유학을 나라 다스리는 뼈대로 삼았기 때문에 유교의 생활 규범이 우리말에 마구 들어와 자리잡았다. ‘아비아바아바님이면 그만이던 것을󰡐가친엄친가엄노친선고선친선인춘부장춘당선대인선고장선부군같은한자말을 마구 들여와 쓰면서 우리말을 밀어내고 뒤흔들었다. 이런 한자말은 모두 한자로 적혀서 쓰였기 때문에 한글과 어우러지지도 않고 오히려 우리말을 누르면서 앞자리를 차지했다.

 

게다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두 침략 전란으로 반 세기 동안의 소용돌이를 겪으면서 우리말은 다시 크게 뒤흔들렸다. 전란을 거치면서 지배층의 권위가 크게 흔들리고 백성들의 지위가 높아지면서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여느 백성들이 오랫동안 부러워하면서도 감히 따라 쓸 수 없었던 양반들의 한자말을 이제는 따라 쓸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지배층 사람들이 즐겨 써 온 한자말을 다투어 본뜨면서 스스로 지위와 신분이 높아진다고 여겼다.󰡐어버이를 버리고 부모를 쓰고, ‘논밭을 버리고 전답을 쓰면서 스스로 문화인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지배층 문화를 모방하려는 경향은 갈수록 심해져서, 하층 소리꾼이 불렀던 판소리나 잡가의 사설이 온통 한자어 투성이로 뒤덮인 경우도 있었다.

 

그뿐 아니라 한자말에다 ‘-를 붙여서 움직씨와 그림씨로 만들어 우리말처럼 쓰는 바람이 거세게 일어났다. ‘강하다, 나태하다, 동요하다, 민망하다, 병작하다, 인정하다, 처연하다, 축수하다’, 이런 말들이 걷잡을 수 없을 지경으로 나타난 것이다. ‘-/ -로만 쓰이던 주격 토씨에 ‘-가 새로 나타나서 왕조가 무너지던 십구 세기 말에 오면 ‘-는 사라져 버렸다.

 

(5) 평등 사회가 되어서

조선 왕조가 무너지고 평등 사회로 바뀌면서 우리말은 넓고 새로운 길을 만났다. 한글은 태어난 지 사백 오십 년만에 비로소 나라의 글자로 바른 대우를 받았다. 1895년 고종은 법률 칙령은 모두 국문으로 본을 삼고 한문 번역을 붙이며, 혹 국한문을 혼용함이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다시피, “국문으로 본을삼지만 한문 번역을 붙이며 혹 국한문을 혼용하는 것이기에 국한문 혼용에 기대어 사람들을 가로막는 한자가 온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뿐 아니라 일제가 침략해서 우리말을 더욱 어지럽게 만들었다. 그러나 일제 침략에 맞서 싸우는 동안 겨레 사랑이 크게 자라면서 한글의 보배로움을 거듭 깨쳐 나갔다. 무엇보다도 주시경을 비롯해서, 이봉운, 지석영, 최광옥, 김두봉, 안확 같은 이들이 나타나서 우리말과 한글의 길을 학문 이론으로 넓히며 닦았다. 1920년대 들어서 한글로 쓰는 소설이며 시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한자의 장벽을 허무는 일에 커다란 몫을 했다. 또한 젊은 학생들이 앞장서 펼친 농촌 계몽 운동이 한글 가르치기로 이어져 한글은 시골까지 빠르게 퍼져 나갔다. 우리말을 연구하는 학문도 짜임새 있게 이뤄지면서 조선어학회에서는 겨레의 말살이에 본을 마련하고자 애썼으며, 1933년에는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마련해서 커다란 길을 열었다.

 

이러는 사이에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생각이 자리잡으면서 엄격하던 높임법(대우법) 말씨의 규칙이 허물어져 내렸다. 지난날 왕실, 양반, 중인, 양민, 천민으로 뛰어넘을 수 없는 계층을 만들어 놓고 엄격한 규칙에 따라 높임법을 쓰던 말씨가 무너져 내렸다. 그러나 평등 사회로 넘어온 지가 거의 백 년이 가까웠으나 아직도 무너져 내린 높임법으로 세대간의 갈등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것이 본디 얼마나 무서운 것이었는지 짐작할 만하다.

 

고등학생을 위한 우리 말 우리 글, 전국 국어 교사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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