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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 소설고(韓國近代小說考)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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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 소설고(韓國近代小說考)

 

 본문

 조선의 소설가 가운데서 그 지식의 풍부함과 그 경험의 광범함과 교양의 많음과 정력(精力)의 절륜(絶倫)함과 필재(筆才)의 원만함이 춘원(春園)을 따를 자 없다.

 

 그가 처음에 사회에 던진 문학은 반역적(反逆的) 선언(宣言)이었었다. 실로 용감한 돈키호테였다. 그는 유교(儒敎)와 예수교에 선전을 포고하였다. 그는 부로(父老)들에게 선전을 포고하였다. 그는 결혼에 선전 포고하였다. 온갖 도덕, 온갖 제도, 온갖 법칙, 온갖 예의―이 용감한 돈키호테는 재래의 '옳다'고 생각한 온갖 것에게 반역하였다. 그리고 이 모든 반역적 사조는 당시 전 조선 청년의 일치되는 감정으로서, 다만 중인(衆人)은 차마 이를 발설(發說)치를 못하여 침묵을 지키던 것이었다. 중인 청년 계급은 아직껏 남아 있는 도덕성의 뿌리 때문에, 혹은 예의 때문에 이를 발설치 못하고 있을 때에 춘원의 반역적 기치는 높이 들렸다. 청년들은 모두 그 기치 아래 모여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런 일도 가능하다. 이런 반역적 행사(行事)도 가능하다고 깨달을 때에, 조선의 온 청년은 장위(將位)를 다투려는 한 마디의 불평도 없이 춘원의 막하에 모여들었다.

 

 아아! 우리는 그 때 얼마나 존경하는 마음으로 그를 보았는가? 춘원이 이 모든 반역적 사조를 완전한 의식하에 그의 작품에 집어 넣은 것은 사실이다. 그 '의식(意識)'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는 우리는 좀 연구하여 볼 필요가 있다.

 

 1. 이 사조를 선포키 위하여? 혹은 2. 당시 청년계에 환영받을 사조가 포함된 소설을 발표하여 그들로 하여금 소설에 대한 취미를 느끼게 하기 위하여?

 

 제1문(問)은 뒤로 미루고 제2문을 볼 때 우리는 춘원의 밀모(密謀)의 완전한 성공을 볼 수 있다. 당시의 청년들은 일 년에 한두 번씩 발행하는 '청춘(靑春)'을 얼마나 기다렸으며 거기에 실은 춘원의 소설을 얼마나 애독(愛讀)하였을까? 조선의 사면(四面)에서 이혼 문제가 일어났다. 자유 연애에 희생된 소녀로 신문 삼면을 흥성스럽게 하였다. 동시에 해방된(?) 여성들의 거혼 동맹(拒婚同盟)이 각처에 있었다. 불경(不敬), 부로(父老)와 종교 맹신(盲信), 배척(背斥)이 없는 곳이 없었다. '청춘'에 춘원의 소설이 실리지 않은 호(號)는 그 팔리는 부수가 적었다. 그들은 소설 그것을 읽기보다 자기네들의 사상이 역력히 나타나 있는 춘원의 소설에 공명의 눈물을 흘리면서 읽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청년 간에 소설은 '읽어야만 될 것'으로 되었다.

 

 불우(不遇)의 거장(巨匠) 이인직(李人稙)이 끝끝내 일부 부호(富豪) 노파(老婆)들밖에는 지기(知己)가 없이 몰락된 데 반하여 춘원은 청년과 학생 계급의 일대 세력이 되었다. 동시에 소설과 청년 계급의 이 밀접한 관계도 이에 맺어졌다. 춘원이 만약 필자가 지적한 바 그 제2의 의미로서 그런 소설을 썼다 하면, 이는 과연 세계 문예 사상(世界文藝史上)에 특필할 일대 예언(一大豫言)의 공전의 성공이었다.

 

 그러나 제1의 의미로서 썼다 할 때에는 우리는 몇 가지의 불안(不安)을 말 아니 하지 못할지니, 기 일(其一)은 종래의 권선징악(勸善懲惡)과 춘원의 권선징악(당시의 도덕안(道德眼)에 비추어)의 사이에는 오십 보 백 보의 차밖에는 없다는 점이다. 종래의 습관이며 풍속의 불비된 점을 독자에게 보여 주는 것은 옳은 일이로되, 개선 방책(改善方策)을 지시하는 것은 소설의 타락을 뜻함이다. 소설가는 인생의 회화(繪畵)는 될지언정 그 범위를 넘어서서 사회 교화 기관(社會敎化機關)(직접적 의미의)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며 될 수도 없는 것이다. 그 범위를 넘어설 때에는 한 실화(實話)는 될지언정 소설로서의 가치는 없어진다. '소설은 인생의 회화(繪畵)라'―이는 만년 불변(萬年不變)의 진리이다. 소설은 인생의 펀치이어도 안 될 것이요, 스케치이어도 안 될 것이요, 표본화(標本畵)이어도 안 될 것이요, 엄정한 의미의 인생의 회화라야 소설로서의 가치가 이에 있다.

 

 고성(孤城)을 홀로 지킨 이인직의 뒤를 이어 역시 홀로 지키고 있던 춘원은 여기 몇 사람의 동지를 만났다. 그 때에 유명한 3·1 운동은 일어났다. 동경 유학생 선언서를 초한 그는 상해로 망명을 하였다. 그리하여 몇 해를 지나서 귀국하였을 때에는, 조선에는 빈약하나마 문단이라는 것이 형성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소설의 형식이며 표현 방법이며 취급 내용이 춘원의 독무대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조선에는 '돈키호테'보다 '햄릿'이 필요한 것을 깨달았다. '돈키호테'가 물러갈 시기가 왔음을 깨달았다. 그런데 왜 춘원은 '햄릿'이 되지 않았느냐? 필자는 이를 검구(儉究)키 전에 춘원이 그 때에 취한 방법을 술(述)하려 한다.

 

 춘원은 '재생'을 썼다. '춘향전'을 썼다. '허생전'을 썼다. '단종 애사'를 썼다. 그는 자기의 나아갈 새 길로서 강담(講談)을 발견하였다. 초기에 청년들에게 소설과 접근할 길을 지도한 춘원은 여기서 중년급(中年及) 노년들을 소설과 접근시키려는 운동에 온 힘을 썼다. 아직껏 그 운동이 도중에 있으므로 결과는 미리 말할 수가 없으되 상당한 효과를 예측할 수는 있다. 이 일대(一代)의 재자(才子)요 일대의 욕심꾸러기인 현명한 춘원은, 조선 전 민중과 문예와의 접근의 영예를 독점하려 한다. 그리고 거기 대한 경쟁자는 하나도 없다.

 

 그러나 춘원은 왜 이 길로 나섰나? 순전한 문예의 길을 버리고 왜 이 길로 나섰나? 이 길의 필요함을 잊을 수는 없다. 그 자신이 왜 이 길로 나섰나?

 

 필자는 아직껏 소설도(小說道)와 춘원에 대하여만 논하였지 춘원과 그의 작품에는 한 마디도 언급치 않았다.

 춘언에는 상반되는 두 가지 욕구가 서로 다투고 있는 것은 감출 수 없는 사실이다. '미(美)'를 동경하는 마음과 '선(善)'을 좇으려는 바람이다. 이 두 가지의 상반된 욕구의 갈등! 악귀(惡鬼)와 신(神)의 경쟁, 춘원에게 재(在)하여 있는 악마적(惡魔的) 미에의 욕구와 의식적으로 (오히려 억지로) 흥기(興起)시키는 선에 대한 동경, 이 두 가지의 갈등을 우리는 그의 온갖 작품에서 볼 수 있다. 그는 악마의 부하다. 그는 미의 동경자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기의 본질인 미에 대한 동경(憧憬)을 감추고 거기다가 선의 도금(鍍金)을 하려 한다.

 

 이원적(二元的) 번민(煩悶)! 그의 작품에서 미에 대한 동경만을 발견할 때에는, 우리는 언제든 동시에 예술의 진수(眞粹)를 발견한다. 그러나 그가 정신을 차리고 그 위에 선에 도금을 할 때에는, 거기 남는 것은 모순과 자가당착(自家撞着)밖에는 없다. '무정'에서 '형식'으로 하여금 영채를 버리고 선형에게 가게 한 것도 춘원의 그 위선적 성격의 산물이다. 그만큼 형식을 그리워하던 영채가 마지막에 형식을 무시하여 버린 것은 이 때문이다. '개척자'에 나타난 그 모든 피상적 갈등도 그 때문이다. 그의 모든 작품이 하나도 심각한 인상을 독자에게 남기지 못하는 것은 모두 작가의 이원적 성격의 탓이다.

 문체(文體)? 필치(筆致)? 묘사(描寫)? 그 어느 것이든 다른 작가들보다 동떨어지게 우월한 그의 작품이 하나도 박진력(迫眞力)이 없는 '한낱 재미있는 이야기에 지나지 못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둘째로는 당시 청년 신흥 계급에 생긴 사회 개조(社會改造)라는 명목하의 괴테카스 풍조(風潮)를 들지 않을 수가 없으며,

 셋째로는 문학 청년들 및 사회 소설에 대한 오해를 일으키게 한 것이니, 도덕적 표준이 엄한 노인들은 소설을 가리켜 청소년을 타락케 하는 연애 희문(戀愛 文)이라 하였고, 문학 청년들은 '소설이란 사회 개조, 특히 연애 해방을 표준 삼은 연애 물어(戀愛物語)'라는 개념을 가지게 되었으니, 이도 또한 춘원의 초기의 모든 작품의 영향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그 후에 우후죽순(雨後竹筍)같이 무수히 생겨난 일시적 소설 장난의 그 많은 소설의 9할 9푼이 자유 연애를 주장한 것이 아니면 신(新) 자유 도덕(自由道德) 갈등을 주지(主旨)로 한 것으로 보더라도 그 영향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춘원에게도 전환기(轉換期)―아니, 오히려 자성기(自省期)가 이르렀다. 1919년에 필자와 늘봄과 요한의 몇 사람으로 시작된 '창조(創造)'의 문예 운동이 일어났으니, 신흥 소년(新興少年)들의 실력은 부족하나마 열(熱)로 충만된 운동이었다. 그리고 우리들이 보여 주려 한 것은 결코 신구(新舊) 도덕이나 연애 자유를 주장하는 이러한 소국부(小局部)의 것이 아니고 인생의 문제와 번민이었다.

 요점 정리

 

 작자 : 김동인(金東仁)

 갈래 : 수필, 비평문

 성격 : 비평적, 예술 지상주의적

 문체 : 낭만적

 특징 :

① 다소 낭만적인 필치로 춘원의 계몽적 태도를 비판하고 있다.

② 김동인의 지상주의적 입장이 잘 드러나 있다.

③ 미와 선을 이원적이고 대립적인 것으로 상정하는 이분법적 태도를 보여 주고 있다.

 제재 : 춘원의 소설

 주제 : 춘원의 소설에 나타난 '미'와 '선'의 이중성에 대한 비판 

 내용 연구

 

 강담 : 강연이나 강의처럼 하는 말투의 이야기. 여기에선 이야기의 뜻으로 쓰임.

 흥기 : 떨치고 일어남. 세력이 왕성하여짐.

 진수 : 사물의 가장 중요한 본질적인 골자

 자가 당착 : 같은 사람의 말이나 행동이 앞뒤가 맞지 아니함.

 필치 : 글에 나타나는 맛이나 운치

 박진력 : 표현 등이 실지에 가까움.

 우후죽순 : 비가 온 뒤에 돋아나는 죽순이라는 뜻으로, 어떤 일이 한 때에 많이 생겨남을 가리킴.

 소국부 : 전체 가운데 작은 일부분.

 그가 처음에 - 선언이었었다 : 춘원 이광수의 문학이 당시 우리 사회에 던진 사상은 봉건 의식을 타파하자는 것이 주를 이루었으므로 일종의 기성 의식에 반영하는 선언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런 반역적 - 막하에 모여들었다 : 낡은 봉건 사회의 구습에 대해서 반역을 추구하는 일이 춘원에게서 가능해짐에 따라, 조선의 온 청년은 모두 그를 추종하여 춘원의 밑으로 모여들었다.

 동시에 해방된 - 각처에 있었다 : 자유 연애에 풍조가 나돌면서 여성 억압에서 해방을 구하는 여성들의 결혼 거부 동맹이 여러 곳에 있었다. 춘원 소설의 영향을 말하고 있다.

 춘원이 만약 - 공전의 성공이었다 : 춘원이 청년들에게 환영받을 사조를 소설화함으로써 청년들에게 소설에 대한 취미를 느끼게 할 생각으로 소설을 썼다면, 이는 세계 문예사상 그 예가 없을 정도로 그 예언이 맞아떨어진 경우라 하겠다.

 풍속의 불비된 점을 - 소설의 타락을 뜻함이다 : 낡은 사회의 풍속이 뒤떨어진 것을 소설이 보여 줄 수는 있으나 그 개선 방책까지를 소설이 담당하게 된다면 그것은 소설의 본문에서 벗어난 타락이 된다.

 소설의 형식이며 - 완전히 달랐다 : 춘원이 독무대를 이루던 시절의 소설관, 즉 사상이나 교화로서의 소설보다는 형식, 표현 방법 등 소설의 예술적 요소가 강조되는 문단이 형성되어 있었다.

 춘원에게  ∼ 볼 수 있다. : 춘원의 작품에는 심미적인 예술성을 달성하려는 욕구와 사상이나 교화로서의 계몽적 의도를 달성하려는 교훈적인 욕구 사이에서의 갈등이 나타난다. 여기에서 '악마적'이란 수식어는 도덕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는 자기의 본질인 - 도금을 하려 한다 : 춘원은 예술의 본질인 미에 대한 동경을 감추고 예술에다 도덕이나 선의 문제를 입히려 한다.

 그의 작품에서 ∼ 발견한다. : 춘원의 작품에서 선을 좇으려는 욕구가 나타나지 않을 때, 춘원의 작품은 예술적으로 뛰어나다는 말로서, 이러한 평가엔 김동인의 '예술 지상주의적' 입장이 단적으로 드러나 있다.

 그가 정신을 ∼ 밖에는 없다. : 춘원이 미의 바탕에다 억지로 도덕적인 선의 사상을 입히려 하면 앞뒤가 맞지 않는 스스로의 모순을 보일 수밖에 없다.

 문체? ∼ 이 때문이다. : 춘원의 작품이 문체, 필치, 묘사면에서는 그 어느 작가보다 우월하지만 그의 작품이 한낱 재미에 그치는 것은 미에 대한 동경을 감추고 선으로 위장하려는 이중적 성격 때문이다.

 우리들이 보여 주려 한 - 인생의 문제와 번민이었다 : 우리들이 문학에서 보여 주려고 한 것은 춘원처럼 구도덕의 비판 및 개화라든가 자유 연애 같은 부분적인 문제가 아니라 인생 전체의 문제와 번민을 보여 주려는 것이다.

 이해와 감상

 신문학 초기 우리 문단을 석권하던 이광수의 계몽주의 문학에 대해 평자 김동인이 시도한 본격 문학 비평이라 할 수 있다. 개성적이고 예술적 바탕을 중시하는 김동인의 소설관이 이 비평의 중심 논거로 자리잡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오늘날처럼 정교한 비평의 원리를 동원한 것은 아니지만, 문학 비평이라는 장르 의식하에서 특정 작가의 작품을 비평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 문학 비평사에 한 기원을 차지하는 글이라 할 수 있다.

 심화 자료

 김동인(金東仁/1900.10.2~1951.1.5)

 소설가. 본관 전주. 호 금동(琴童)·금동인(琴童人)·춘사(春士). 창씨명(創氏名) 곤토 후미히토[金東文仁]. 평남 평양 출생. 일본 도쿄[東京] 메이지학원[明治學院] 중학부 졸업, 가와바타 미술학교[川端畵學校]를 중퇴하였다. 1919년 최초의 문학동인지 《창조(創造)》를 발간하는 한편 처녀작 《약한 자의 슬픔》을 발표하고 귀국하였으나, 출판법 위반 혐의로 일제에 체포·구금되어 4개월 간 투옥되었다. 출옥 후 《목숨》(21) 《배따라기》(21) 《감자》(25) 《광염(狂炎) 소나타》(29) 등의 단편소설을 통하여 간결하고 현대적인 문체로 문장혁신에 공헌하였다. 이광수(李光洙)의 계몽주의적 경향에 맞서 사실주의적(寫實主義的) 수법을 사용하였으며, 25년대 유행하던 신경향파(新傾向派) 및 프로문학에 맞서 예술지상주의(藝術至上主義)를 표방하고 순수문학 운동을 벌였다.

 

 24년 첫 창작집 《목숨》을 출판하였고, 30년 장편소설 《젊은 그들》을 《동아일보》에 연재, 31년 서울 행촌동(杏村洞)으로 이사하여 《결혼식》(31) 《발가락이 닮았다》(32) 《광화사(狂畵師)》(35) 등을 썼다. 33년에는 《조선일보》에 《운현궁(雲峴宮)의 봄》을 연재하는 한편 학예부장(學藝部長)으로 입사하였으나 얼마 후 사임하였다. 35년부터 《왕부(王府)의 낙조(落照)》 등을 발표하고 야담사(野談社)를 설립하여 월간지 《야담(野談)》을 발간하였다. 극심한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소설 쓰기에 전심하다가 몸이 쇠약해진 후에 마침내 마약 중독에 걸렸다. 병마에 시달리던 39년 ‘성전종군작가’로 황군 위문을 떠났으나, 42년에는 불경죄로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43년 조선문인보국회 간사를 지내고, 44년 친일소설 《성암(聖岩)의 길》을 발표하였다.

 

 48년에는 장편 역사소설 《을지문덕(乙支文德)》과 단편 《망국인기(亡國人記)》의 집필에 착수하였으나 생활고로 중단하고 6·25전쟁 중에 숙환으로 서울에서 작고하였다. 소설 외에 평론에도 일가견을 가졌는데 특히 《춘원연구(春園硏究)》는 역작이다. 김동인은 작중인물의 호칭에 있어서 ‘he, she’를 ‘그’로 통칭하고, 또 용언에서 과거시제를 도입하여 문장에서 시간관념을 의식적으로 명백히 했으며, 간결하고 짧은 문장으로 이른바 간결체를 형성하였다. 55년 사상계사(思想界社)에서 그를 기념하기 위하여 ‘동인문학상(東仁文學賞)’을 제정, 시상하였으나, 79년부터 조선일보사에서 시상하고 있다.(출처 : 동아대백과사전)

 김동인의 작품세계

 그의 작품 세계는 크게 단편과 장편, 평론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는 다양하게 펼쳐진 모든 작품에서 이광수의 계몽적 교훈주의를 배척하고자 하였으며, 문학을 문학 자체의 아름다움에 귀속시키려는 경향을 지속적으로 보여 주었다. <춘원 연구>에서 보여 준 지나친 이광수 비판에의 집착, 유아독존적인 성격과 예술적 독자성에 대한 인식과, 기법이라는 형식적 차원에 집중된 예술 지상주의적 문학관이 빚어 낸 극단적 미의식, 작가우위적 창작 태도 등은 비판의 소지가 있으나 문학에서의 교훈주의의 청산과 한국 근대 단편 소설의 전형을 이룩한 그의 문학적 업적은 높이 평가된다.

 

 그가 문예 잡지 <창조>를 통해 보여 주었던 계몽주의 거부는 사조상으로는 사실주의를 조성시키는 방향이 되었으며 그의 소설에서 유감 없이 발휘된 심리 묘사나 성격 창조에의 관심과 추구는 문학의 기교적인 가치를 중시하는 동기가 되었다.

 창조(創造)

 한국 최초의 종합 문예동인지. 1919년 2월 1일에 창간되어 21년 5월 30일까지 통권 제9호를 발행하였다. 편집 겸 발행인은 제1·2호 주요한(朱耀翰), 제3∼7호 김환(金煥), 제8호는 고경상(高敬相)이고, 제9호는 김동인(金東仁)·김찬영(金瓚永)·김환·전영택(田榮澤) 등이 공동편집하였다. 발행은 창간호부터 제7호까지 일본 도쿄[東京]에서, 제8·9호는 서울에서 하였고, 체재는 국판 120면 안팎이었다. 당초 일본 유학생들에 의해 간행된 이 잡지를 통하여 시 70여 편, 소설 21편, 희곡 4편, 평론 16편, 번역시 49편이 발표되었다. 신문학사에서 그 때까지의 계몽주의적 성격을 청산하고, 구어체 문장의 확립과 새로운 문학사조였던 자연주의 및 사실주의 문학의 개척, 본격적인 자유시의 발전 등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한국 근대문학에서 최초의 리얼리즘 소설로 꼽히는 김동인의 《약한 자의 슬픔》과 《배따라기》 등이 이 때 발표되었고, 주요한의 상징시(象徵詩) 《불놀이》와 김소월(金素月)의 서정시(抒情詩) 《그리워》가 발표되어 현대 시단이 출범하였다. 동인(同人)은 김동인·이광수(李光洙)·김관호(金觀鎬)·김억(金億)·김찬영·김환·전영택·오천석(吳天錫)·주요한·최승만(崔承萬)·임장화(林長和) 등이었고, 특히 이 중에서 김동인·주요한·전영택 등이 주동적인 구실을 하였다.(출처 : 동아대백과사전)

 '창조'의 문학사적 의의

 <창조>의 계몽주의 거부는 근대 소설의 확립에도 기여한다. 계몽주의의 거부는 사조상으로는 사실주의를 조성시키는 방향이 되었으며, 심리 묘사나 성격 창조에의 관심과 추구는 근대 소설의 확립과 함께 문학의 기교적인 가치를 중시하는 동기를 이루었으니 이것이 일종의 순문학 운동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문학에는 문학 그 자체의 이상과 임무가 있다.'는 가장 단적인 표시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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