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한국전통문화시론 / 요약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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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통문화시론 / 홍일식  

 

홍일식(洪一植)은 고려대 국문과 교수로 동 대학의 민족문화연구소 소장을 역임한 후, 현재 는 고려대학교 총장으로 재직중인 문학박사이다. 아래의 글은 그가 민족문화연구기관지 <민족문화연구> 제6호(1972)에 (한국전통문화의 본질)이라는 제목으로 게재하였던 논문을 손질 하여 발행한 저서 (한국전통문화시론)(韓國傳統文化試論 고려대출판부)의 일부를 요약한 것이다.  

 

[읽어보기]

 

어떤 종교에 대하여 대체적으로 알아보려고 할 때 가장 흥미가 있는 것은 그 종교에서 받드 는 신의 성격이다. 왜냐하면 신의 성격은 곧 그 종교의 신자 집단이나 개인의 인생관 내지 는 가치관을 반영하고, 그들이 이상형으로 생각하는 성격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신자 하나님 을, 불교신자가 부처님을 떠받들어 모시는 것은 그 하나님과 부처님이 바로 자기 자신들의 이상적 성격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 작가가 작품을 통해 창조해낸 (인간상)이 갖는 의미도 이와 유사하다. 작품 속에 창조 된 인간상 역시 그 작가 또는 그 작가가 처한 시대와 집단의 인간관을 구체화한 것이기 때 문이다. 어째서 그렇게 볼 수 있는가. 인간은 인간성 자체가 지닌 숙명적 결점 때문에 스스 로 이상적 인간상으로 실현되는 것은 불가능함을 진작 깨우쳤다.

 

그러나 인간은 이상적 인 간상의 실현을 위한 노력을 아가사 이래 잠시도 포기하지 않았다. 특히 동양사회에서는 일 차적으로 자기 생명을 분신인 자식에게서 그 실현을 바라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실현 불가능한 기대라는 것을 이미 인간들은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인간은 예술을 창조하게 된다. 헤밍웨이가 <노인과 바다>에서 창조해낸 (산디아고) 같은 인간형도 바로 그 러한 의지의 발로인 것이다.

 

인간이 신을 창조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신을 어떻게 창조하고, 또 어떻게 신봉하 느냐 하는 것은 곧 그 인간 자신의 자기표현이다. 그런 까닭에, 한국인이 창조한 제신(gods) 을 통하여 한국인의 인생관, 가치관, 윤리관 등 제사고(諸思考)의 본질을 투시해 보는 것은 자못 의의있는 일일 것이다.

 

삼라만상이 모두 신이다

 

한국의 고유신(固有神)으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 대부분이 이미 고등종교라는 외래종교에 흡 수되어 버렸지만, 아직 속신(俗神)으로 남아있는 것 중 이름있는 신들을 대략 손꼽아 보자.

 

터줏대감(집터의 신), 성주대감(가옥), 삼신(잉태), 제석님(생명), 조왕님(부엌), 산신령, 용왕, 십왕님(내세), 역신마마(천연두), 서낭님(부락), 장승(길, 성)-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 도로 많은 속신이 존재한다. 말하자면 한국에서는 천지자연의 삼라만상이 모두 신인 것이다.

 

게다가 죽은 사람마다 다들 귀신이 되지 속신이 얼마나 많겠는가.

 

그러므로 한국의 원시종교 행사인 산제(山祭), 당제(堂祭), 굿, 점복(占卜), 푸닥거리 등은 대부분 이러한 제신을 위로하고 그 신의 노여움을 풀어주는 의례(儀禮)이다. 인간의 모든 흉 사는 이들 신에게 대접을 소홀히 했거나 신을 무시한데서 (동티)가 났기 때문으로 간주한다.

 

떡 하나 주면 안 잡아 먹지

 

-옛날 깊은 산 속 외딴집에 홀어머니와 어린 오누이가 살았다. 집이 가난하여 어머니는 산 너머 부잣집 잔치에 일을 해주러 갔다. 아이들에게는 어머니가 올 때 맛있는 음식을 얻어올 테니 문을 꼭 잠그고 누가 오더라도 문을 열어 주지 말라고 일러두었다. 해가 저물고 어두 워져서야 일을 마친 어머니는 잔치 음식을 얻어들고 집으로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 (떡 하 나 주면 안 잡아 먹지)- 어머니를 잡아먹은 호랑이는 어머니의 옷으로 갈아입고 집으로 왔 다- (하느님! 하느님! 우리를 죽이시려거든 썩은 밧줄을 내려주시고 우리를 살리시려거든 성한 동아밧줄을 내려 주소서.)-하늘에 오른 오누이는 (햇님)과 (달님)이 되었다. 지금도 수 숫대 속이 빨간것은 호랑이의 피가 묻어서 그렇게 된 것이다.

 

한국인이면 누구나 어린시절에 할머니의 무릎에 안겨 흔히 들었던 이야기이다. 한국의 어 린이들은 아직도 이 이야기를 들으면 곧 감상의 세계로 끌려 들어가고, 그러다가 마지막 장 면, 즉 어린 오누이가 무사히 구원을 받아 하늘로 올라가게 되어서야 비로소 안도의 숨을 몰아쉬게 된다. 결국 이 이야기도 우리의 고대소설과 마찬가지로 해피엔드(Happy end)이다.

 

그 구성에 있어서도 고대소설의 일반형식과 별 다름이 없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더 중요 한 것은 이 이야기가 아득한 옛날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한국인에게 사랑을 받으면서 전 승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물리적 힘에 의존하는 신앙

 

이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국적 사고의 한 단면을 생각해 보기로 하자.

 

첫째, 호랑이는 우리 국토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산악의 수호신, 즉 산신령으로 받들 어지는 신격(神格)인데도 사람과는 아무런 친근감이나 유대의식을 갖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두려운 대상일 뿐이다. 인간을 괴롭히기만 하는 존재로 부각되어 있다. 이처럼 한국의 신은 관념적으로든 실제적으로든 대부분 험상궂고 그로테스크한 모습으로 표현되는 것이 하나의 특징이다. 무신도(巫神圖)에 나타나는 제신의 모습은 대체로 징그럽고 무서운 형상들이다. 만인이 지나다니는 길가에 세워진 장승조차도 결코 고운상은 아니다. 이렇게 볼 때, 한국의 속신은 자비와 고매한 인격으로 그 권위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힘과 물리적인 힘에 의하여 유지되는 듯하다. 우리나라 사람의 신앙은 그러므로 어떤 인격적 감화에 의해 마음속 심층부에서 우러난 숭고한 신앙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어서 받들게 된 피 동적, 숙명적 신앙인 것이다.

 

둘째, 우리의 속신에게는 선(善)과 신의(信義)가 없다. 약속(떡하나 주면 안잡아먹지)을 어 기는 것쯤은 예사다. 인간의 생활을 돕고 인간을 선도하는 것이 신이라는 의식이 본질적으 로 희박하다. 선신과 악신의가 구별도 애매하다. 기원하는 목적이 선이든 악이든 간에 진수 성찬을 차려놓고 빌면 신은 언제나 비는 자의 편에 선다. 한국의 사람이 곧 그렇다는 뜻일 까, 그것은?

 

끈질긴 집요함, 안일한 의타심

 

셋째, 끈질기게 집요하다. (한국적 어머니상)을 대표하는 이야기속 어머니를 보라. 사랑하는 자식들에게 줄 음식을 빼앗기고 사지를 차례로 잡아먹히면서도 최후까지 몸뚱이 로나마 굴러서 집으로 향하는 모습은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집요성을 보여준다. 적과의 과감한 투쟁에서 오는 장렬한 전사나 희생이 아니다. 일방적으로 당하면서도 한발한발 목표 를 향해 쉬지않고 나아간다.

 

만약 어머니가 죽지않고 자식들 곁으로 돌아왔다 하더라도 객관적 가치나 개인적 명예는 하나도 없다. 다만 최대의 가치는 목적을 위해서 중단하지 않는 것, 여기에 가냘픈 자기위안 (自己慰安)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집요성은 모성애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한국인의 강인한 집요성은 한편으로는 격 렬한 투재을 가급적 피하게 하며, 발랄한 자기표현에도 소극적이게 만든다. 억울해도 참고 분해도 참는다. 그러면서도 내일을 기약한다. (두고보자)라고 한다. 그렇다고 일체의 객관적 가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의(義)가 좋고 신(信)이 고귀한 줄은 안다.

 

그러나 그것이 인 간의 생명보다는 앞설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이란 자기자신의 생명뿐이 아 니라 대(代)를 이어가는 영원한 생명을 일컫는다. 그러므로 이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떠 한 희생도 감수한다. 원수를 대대로 물려가며 갚는 것도 이 때문이다. 출세하여 관권을 휘둘 러 사원(私怨)을 갚는다 해도 누구하나 그를 비겁하다 하지 않는다.

 

넷째, 의타적 안일성이다. 어머니가 처음으로 호랑이를 만났을 때도, 어린 아이들이 호랑 이로부터 위협을 받을 때에도. 적과 대결해보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다. 그때그때 기지로 달 래고 재빨리 피신할 뿐이다. 감나무 위로 올라가서도 다만 (하느님)을 찾을 따름이다. 평소 하느님을 신봉해 왔다거나, 남다른 선행을 해왔기에 하느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만한 위치 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급하니까 하느님을 불러댈 뿐이다. 하느님 또한 아무런 이유도 조건도 없이 약한 자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친다. 기적에 의존하는 안일한 사고의 일단이다.

 

죽은 부모는 살아있다.

 

일반적으로 기독교에서는 죽음을 현세와 영원한 단절로 인식한다.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 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천당으로 가며, 시기도 질투도 없는 오직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 원한 행복을 누린다.

 

그러나 한국인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 부모가 죽으면 그것으로 자식들과의 관계가 단절되 는 것이 아니라 이때부터 새로운 차원의 그것이 시작된다고 믿는다. 그것은 제사의식이 구 체적으로 보여준다. 부모 사후 3년상이라 하여 아침저녁으로 생시와 똑같이 상식(上食)을 올 린다. 부모의 영혼은 살았을 적과 다름없이 자식들의 정성어린 대접을 받는 것이다. 올리는 음식도 죽은이의 생전 취향을 따른다. 그렇게 3년상이 끝나면 기제사(忌祭祀)라 하여 기이렝 제사를 지낸다. 물론 이것은 유교에서 들어온 것이지만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수용의 태도이 다.

 

유교에서는 제(祭)를 미진지효(未盡之孝)라하여 철저히 효의 연장으로 보지만, 한국에서는 고유의 민간신앙 속 조상숭배사상과 융합되어 독특한 제사관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사실 오 늘날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상(喪), 제(祭), 예(禮) 가운데는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없는 한국 적인 것이 얼마든지 있다.

 

하여간 한국인의 관념 속에는 (죽음)이 사실상은 살아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부모는 돌아가셨으나 지금도 어디선가 자식들을 굽어살피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업이 잘 안되는 것 도, 가운이 쇠퇴하는 것도, 어린 자녀에게 병이 잦은 것도 다 부모의 영혼을 잘못 접대해서 그런게 아닌가, 산소 자리를 잘못 써서 아닌가 끊임없이 반성한다.

 

한국인에게는 생(生)과 사(死)가 간격없이 생활속에 공존(共存)하는 것이다.

 

유일신이 존재하지 않는 한국

 

한국에는 유일신이 없다. 설사 유일신(외래종교)을 신봉하는 신자라도 상당수는 자기 종교 의 유일신 외에 또다른 신을 섬기지 않고서는 허전해서 견디지를 못한다. 부처님께 철따라 불공도 드리고 복도 빌지만, 가정적으로는 조상신을 극진히 모시고 그 조상신에게 가운의 번창을 빈다. 기독교 신자중에도 점을 치거나 사주관상을 보거나 각종 고사를 지내기도 한 다. 사회지도층 인사들중에도 새로 건물을 짓거나 신규 사업을 벌일 때 터줏대감이며 성주 대감께 큰절을 올린다. 기우제도 지낸다.

 

이처럼 한국인은 무수한 신을 잡다하게 섬긴다. 신이 많다는 것은 없다는 것과도 통한다. 절대신, 유일신이 없음으로 해서 한국인의 경우 신과 평소에 유대를 갖는게 아니라, 필요할 때만 찾는다. 한국인의 현세주의적 사고(現世主義的 思考)와 양면적 가치관은 이러한 점에서 더욱 뚜렷이 드러난다.

 

한국인의 신관(神觀)이 현세적임은 내세(來世)가 잘 말해준다. 한국의 원시종교에서 구상 화 해놓은 내세는 별로 미화되어 있지 않다. (죽음)은 곧 (생)의 연장이다. 신주(神主)의 성 격이나 감정도 산사람의 그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 욕심 많고 화 잘내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 그러니까 누구든 때 맞추어 음식 잘 차려놓고 빌면 신은 항상 그의 편을 들어주는 것이 다. 인생의 승리자란 다름아닌 요령껏 그때그때 신(권력자)의 비위를 잘 맞추는 자이다.

 

유명무실한 상징에 불과한 외래신

 

대개의 경우 외래종교가 들어올 때 한국인은 그것이 직접 나를 적대시하지 않는 한에는 즉각적으로 거부하거나 부정하지 않는다. 외래종교가 한국에 들어오면서 탄압을 받은 역사 적 사례는 그 대부분이 위정자의 정치적 목적에 의한 것이지 민중 스스로의 거부나 반발에 의한 예는 별로 없다.

 

신라에 불교가 수입되는 과정에서 이차돈의 순교가 있었다고는 하지 만 이 역시 일반백성들의 감정과는 무관하게 위정자가 행한 일일 뿐이며, 그러한 설화가 발 생한 근원적 배경을 고찰하면 백성들은 불교 유입을 환영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는 것이 다. 이 사실은 최근세 기독교의 유입과정에서도 잘 나타나 오히려 외래종교, 외래신에게 사 대적일 만큼 관대하게 저자세를 취한다. 이런 점 때문에 간혹은 한국의 신을 무력하고 비굴 하다는 말을 듣지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피상적인 관찰의 결과일 뿐이다.

 

사실 한국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 대다수의 토속신이 부처님 슬하로 자진해 들어가 그 밑에 서 '아루' 신 혹은 '시종'신으로 만족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피상적인 관찰일뿐 실제적 양상은 결코 그렇지가 않다. 즉, 외래 종교의 유일신을 토속신보다 높은자리에 앉히고 최고지존의 존재로 받드는 것은 사실이지 만, 오래신의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실속없는 영광에 지나지 않아 고독하기가 이를 데 없 다. 민중들은 지존한 외래신을 찾는 것이 아니라, 호흡을 통하고 어딘지 인정이 오가는 토속 신을 즐겨 찾고 또 그 신에게 불공을 드리기 때문이다. 상좌에 앉아 있는 외래신은 어느샌 가 하나의 외적 상징으로 전락하여 유명무실한 존재로 떨어져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신에 대해서만이 아니다.

 

'되놈'이라든가'왜놈'.'양놈'같은 어휘들은 우리나라 민중의 의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말들 이다. 주한미군 군사고문단의 고급장교를 일컫는 '고문관'이라는 말이 한국군대에서 '어리석 고 바보같아 제구실을 못하는 얼간이'를 지칭하는 말로 쓰이는 예도 바로 그러한 것이다.

 

이처럼 한국의 원시종교적 교유사상은 일견 그 생리가 표면적으로 약하고 저자세인 것 같 으면서도 그 집요성은 두드러져 언젠가 기회가 오면 웅비하려는 기상을 심장부에 감추고 있 는 양상이다. 한국인이 가졌다는 사대성, 즉 일시적 굴욕과 저자세는 보다 실리와 보다 높은 차원에서 영원한 생명을 이어가려는 일시적 방편이요, 수단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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