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생기우록(何生奇遇錄)
by 송화은율하생기우록(何生奇遇錄)
고려 시대에 하생(何生)이라는 사람이 평원(平原) 땅에 살았다. 집안이 대대로 가난하고 일찍 부모를 여의어, 장가를 들고자 하였으나 사위로 데려가는 사람이 없었고 곤궁하여 스스로 살아가기도 힘들었다. 그러나 모습이 준수하고 행실이 좋으며 재주가 뛰어나고 생각이 남달라 고을에 그의 훌륭함을 칭송하는 이가 많았다. 고을의 수령이 그 명성을 듣고 태학(太學)에 뽑아 보냈다. 하생이 행장을 차려 서울로 출발하면서 비복(婢僕)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위로 부모도 없고 아래로 처자식도 없다. 그러니 무엇 때문에 너희에게 이것저것 많은 말을 하겠느냐? 옛날에 종군(終軍)은 비단 신표를 버렸고 상여(相如)는 기둥에다 결심을 적었으니, 약관에 모두 큰 뜻을 품은 자들이었다. 내 비록 못났으나 그 둘의 사람됨을 자못 경모하고 있다. 뒷날 출세하여 비단옷을 입고 돌아와서 너희들의 영광이 될 것이니, 가업(家業)을 잘 지켜 실추되지 않게 하길 바란다.”하였다.
국학(國學)에 나아가서 여러 서생(書生)들과 예능을 겨루매 그를 능가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하생은 ‘장원 급제도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고 높은 벼슬도 마음만 먹으면 오를 수 있다.’고 여기며 거만하게 세상을 깔보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이때 조정은 이미 어지러워져 인재 선발도 공정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럭저럭 4, 5년을 학사(學舍)에서 늘 울적하게 뜻을 굽히고 지냈는데, 하루는 같은 학사의 서생에게 말하기를,
“채택(蔡澤)은 자기가 모르던 수명(壽命)에 대하여 당생(唐生)을 찾아가서 해결하였다. 내 들으니, 낙타교(駱駝橋) 가에 점쟁이가 있는데, 사람들에게 오래 살고 일찍 죽고 복을 받고 화를 당하는 등의 일에 대해 말해 주는 것이 날짜까지 정확히 맞춘다고 한다. 나도 그 점쟁이한테 가서 나의 궁금증을 풀어보겠다.”
하였다. 드디어 집으로 돌아가서 궤짝 속을 뒤져 보물처럼 숨겨두었던 금전(金錢) 몇 닢을 찾아내어 그것을 가지고 점쟁이를 찾아갔다. 복사가 말하기를,
“부귀하게 될 운명을 그대는 본디부터 타고났소. 다만, 오늘은 매우 불길하오. 명이(明夷)가 가인(家人)으로 가는 점괘가 나왔소. 명이는 밝음이 땅속으로 들어가는 상이고 가인은 정숙한 유인(幽人)을 만나는 것이 이로운 상이오. 도성 남문(南門)을 나가서 달려 멀리 떠나되 해가 저물기 전에는 집으로 돌아와서는 안 되오. 그렇게 하면 액땜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좋은 배필을 얻게 될 것이오.”
하였다. 하생은 그 말이 그럴 듯하게 느껴졌다. 두려운 마음으로 일어나 작별을 하고 도성 남문을 나섰다. 가을 산 경치가 좋았다. 마음을 따라가다가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는 줄도 몰랐다. 사방을 돌아보니, 고요히 아무도 없는 깊은 산속이었다. 어디 하룻밤 묵어갈 곳도 없었다. 지치고 배고픈 몸으로 길에서 서성거렸다. 때는 중추(仲秋) 열여드레, 달은 아직 솟지 않았고 멀리 나무숲 사이에서 등불이 하나 별처럼 깜빡거리고 있었다. 사람 사는 집이 있겠거니 생각하고 길을 더듬어 앞으로 나아갔다. 길게 자란 들풀에 싸늘한 안개가 어리고 이슬이 흠뻑 내려 촉촉히 젖어 있었다. 그곳에 이르니, 달도 환히 솟아올랐다. 보니, 아담하고 아름다운 집 한 채가 있는데, 그림으로 꾸며진 마루가 높다랗게 담장 위로 보였다. 고운 비단 창 안에는 촛불 그림자가 비쳤다. 바깥문은 반쯤 열려 있고 인적은 조금도 없었다. 하생이 이상히 여기며 몰래 들어가 방 안을 엿보니, 나이 이팔 청춘의 아름다운 여인이 각침(角枕)에 기대어 비단 이불을 반쯤 내리덮고 있었는데, 수심에 젖은 아름다운 모습이 눈으로 바로 보지 못할 정도였다.
중간 줄거리:
날이 저문 후 하생은 산속의 인가에서 죽은 지 얼마 안 된 여인을 만나 사랑을 나눈다. 헤어질 때 여인은 하생에게 금척을 주면서 저잣거리의 노둣돌[말에 오르거나 내릴 때 발돋움에 쓰려고 대문 앞에 놓은 큰 돌. 하마석(下馬石)] 위에 놓아 달라고 부탁한다. 하생이 여인과 작별하고 문을 나와 돌아다보니 새로 만든 무덤만 있었다. 하생은 여인의 부탁을 따르다가 무덤 도둑으로 몰려 여인의 집으로 끌려간다. 하생이 여인의 아버지인 시중에게 자초지종을 말하자 시중은 노비들을 데리고 직접 여인의 무덤으로 간다.하생과 여인의 부모가 곧 무덤으로 가서 무덤을 파헤치자 여인이 소생한다.
(중략)
날이 저문 후 하생은 산속의 인가에서 죽은 지 얼마 안 된 여인을 만나 사랑을 나눈다. 헤어질 때 여인은 하생에게 금척을 주면서 저잣거리의 노둣돌* 위에 놓아 달라고 부탁한다. 하생이 여인과 작별하고 문을 나와 돌아다보니 새로 만든 무덤만 있었다. 하생은 여인의 부탁을 따르다가 무덤 도둑으로 몰려 여인의 집으로 끌려간다. 하생이 여인의 아버지인 시중에게 자초지종을 말하자 시중은 노비들을 데리고 직접 여인의 무덤으로 간다.
무덤에 도착해 보니, 무덤은 전과 다름이 없었다. 이에 이상히 생각하며 파 보았다. 여인은 얼굴빛이 살아 있는 것과 같았고 가슴에는 따스한 기운이 조금 있었다. 유모 할미를 시켜 싸안고 수레를 태워 돌아왔다. 의원을 부를 겨를도 없어서 요동되지 않게 가만히 놓아두었는데, 해가 저물 무렵 바야흐로 깨어났다. 부모를 보고 가늘게 흐느끼더니, 조금씩 안정이 되었다. 부모가 묻기를,
“네가 죽은뒤 무슨 이상한 일이 있었더냐?”
하니, 여인이 대답하기를,
“저는 꿈인 줄 알았었는데 그게 죽음이었습니까? 이상한 일은 없었습니다.”
하며 수줍어하였다. 부모가 굳이 물으니, 여인이 비로소 말을 하는데, 하생이 했던 말과 꼭 들어맞았다. 온 집안사람들이 무릎을 치며 놀라워하였다. 이렇게 되자 하생에 대한 대우가 퍽 좋아졌다.
며칠 지나 여인이 건강을 회복하였다. 시중이 성대한 잔치를 열어 하생을 위로하고, 이어 집안 형편이며 장가를 들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 물었다. 하생은 장가는 아직 들지 않았으며 아버지는 평원 교생(校生)*이었는데 이미 오래 전에 돌아가셨다고 대답하였다. 시중이 고개를 끄덕이고 안으로 들어가 부인과 의논하기를,
“하생은 용모와 기개로 보아 실로 보통 사람이 아니니, 사위로 삼는 데 있어 망설일 게 없지만 다만 집안이 우리와는 맞지 않고 일도 또한 꿈같이 허탄하니, 이번 일로 해서 그와 혼사를 이룬다면 세상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길까 염려되오. 내 생각으로는 많은 답례품을 주어서 보답하는 것이 좋겠소.”
하였다. 부인이 말하기를,
“이 일은 대인(大人)께서 알아서 하실 일이니, 부녀자가 어찌 간여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하루는 다시 잔치를 열고 하생을 위안하였는데, 하생에게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물으면서 혼인 문제에 대해서는 끝내 한 마디도 없었다. 하생은 분한 마음으로 처소로 돌아와서 가슴을 치고 속상해하며 여인이 약속을 저버린 것을 원망하였다. 이어 시를 한 편 지어 여인의 유모 할미에게 부탁하여 여인에게 전하게 하였다.
비록 흙탕물이 묻어도 옥은 더러워지지 않지만
봉황은 자기 둥지를 찾았으니 잡새를 돌아보려 하겠는가.
팔 위의 눈물 자국 아직도 가시지 않았는데,
다만 이제는 도리어 꿈속에서나 그대를 보겠구나.
여인이 하생의 시를 보고 놀라 그동안의 사정을 물어보고 비로소 부모가 하생을 배반할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갑자기 몸이 아프다고 하면서 음식을 먹지 않았다. 이에 여인의 부모는 딸의 마음을 알아챘다.
중략 줄거리 : 그러나 두 집안이 신분상 어울리지 않고 일이 허탄하다는 이유로 여인의 부모는 딸과 하생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에 여인이 식음을 전폐한 채 대죄하며 부모를 설득함으로써 둘은 결혼을 허락받는다.
하생이 여인과 다시 만나 비단 장막을 치고 촛불을 밝히고 마주하니 완연히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안 되었다. 하생이 말하기를,
“새로 결혼하는 것도 매우 즐거운 일인데, 헤어졌던 부부가 다시 만나는 것이야 그 즐거움이 어떠하겠소? 나와 그대는 새 즐거움과 옛 정이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니, 세상의 많고 많은 부부 가운데 우리와 같은 자가 누가 있겠소?”
하니, 여인이 말하기를,
“일찍이 들으니, 불가(佛家)에 삼생설(三生說)이 있는데, 과거, 현재, 미래가 바로 이것이라 합니다. 과거에 이미 낭군과 더불어 부부가 되었고 현재 또 낭군과 더불어 부부가 되었는데, 다만 미래에는 어찌될지 모르겠습니다. 삼생의 인연을 맺은 일이 예전에도 있었습니까?”
하였다.
이로부터 부부가 되어 서로 공경하고 사랑하여, 비록 양홍(梁鴻)과 맹광(孟光), 극결(缺)과 그의 아내라도 견줄 바가 못 되었다. 이듬해 하생은 외과(巍科)에 합격하여 보문각(寶文閣)에서 첫 벼슬살이를 시작해서 뒤에 상서령(尙書令)에 이르렀다. 여인과 부부가 되어 무릇 사십여 년을 함께 살았다. 두 아들을 낳아 맏이를 적선(積善)이라 하고 둘째를 여경(餘慶)이라 하였는데, 모두 세상에 이름이 드러났다. 하생이 혼인을 정한 날에 예전의 그 점쟁이를 찾아갔더니 이미 자리를 옮겨 뜨고 없었다 한다.
요점 정리
작자 : 신광한
갈래 : 한문소설, 명혼(죽은 남녀가 혼인함) 소설
성격 : 염정적, 전기적, 유교적
구성
기 : 하생의 불우한 시절과 점쟁이와의 만남
승 : 죽은 여인과 만나 부부가 될 것을 약속함
전 : 여인이 소생하나, 시중이 하생과 여인의 결혼을 반대함
결 : 여인의 단식과 설득으로 여인과 하생이 결혼하게 됨
혼사장애 모티프
혼사 장애 |
발생 원인 |
극복 방안 |
1차 혼사 장애 |
이승과 저승의 사람임 |
저승 사람인 여인이 이승 사람으로 소생함 |
2차 혼사 장애 |
여인의 부모의 반대 |
여인이 식음을 전폐하고 부모를 설득함 |
주제 : 혼사 장애를 극복한 애정의 성취와 입신양명을 통한 욕망의 실현
특징 : 전기적 성격이 드러나고 능력은 있으나 사회 모순과 비리 때문에 발휘를 못하는 주인공을 등장시켜 당대 사회를 비판하고 있으며, 산 사람과 죽은 사람, 신분 및 빈부의 차이라는 장벽을 극복하고 결혼에 이르는 서사적 설정이 흥미로우며 삶에 대한 작가의 낙관적 태도가 드러남
인물 :
하생 |
주인공으로 신언서판을 갖춘 인물로 공정하지 못한 인재 선발 제도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함. 점쟁이의 도움으로 사랑과 세속적 성취를 이룸 |
여인 |
아버지의 죗값으로 죽지만, 하생의 도움으로 환생하고, 하생과의 신분차이를 이유로 부모가 혼인을 반대하자 부모를 설득하고 사랑을 쟁취함 |
점쟁이 |
초월적이고 예지적 능력을 갖춘 인물로 하생과 죽은 여인의 운명을 예언하는 인물 |
시중 |
여인의 아버지로 포악한 정치로 자식을 모두 잃었지만 다시 선정을 베풀어 딸이 살아나게 되었고, 딸의 설득으로 하생과의 혼인을 허락함 |
줄거리 : 고려 시대 평원 땅의 하생은 집안이 가난하고 조실부모하여 장가도 들지 못했으나 재주가 남달라 고을의 많은 이들로부터 칭송을 받았으며 고을 수령에게 뽑혀 태학에 입학하게 된다. 유능하지만 조정이 어지러운 탓에 등용되지 못하고 울적하게 지내던 하생은 낙타교에 있는 점쟁이를 찾아가 자신의 운명에 대한 점괘를 얻고, 도성 남문 밖에서 죽은 지 얼마 안 된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 인연을 맺는다. 하생은 여인의 부탁대로 금척을 도성의 저잣거리에 가져갔다가 도둑으로 오인되어 여인의 부모와 만나게 되고, 자초지종을 설명해 오해를 푼 다음 여인의 시신을 집으로 운구하게 하였는데, 집으로 돌아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여인은 다시 살아났다. 여인의 부모가 신분상의 차이와 일이 허탄하다는 이유로 하생과 여인의 결혼을 반대하자, 여인은 식음을 폐하고 부모를 설득해 마침내 하생과 여인은 부부가 된다. 그 후 하생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상서령까지 올랐으며, 두 사람은 서로 공경하며 사십여 년을 행복하게 살아간다.
내용 연구
고려 시대에 하생(何生)이라는 사람이 평원(平原) 땅에 살았다[공간적 배경과 인물이 우리나라에 국한됨 /배경은 인물과 사건을 생생한 것이 되도록 해 주며, 소설의 분위기를 형성해 주고, 또한 소설의 주제를 구체화시키는 역할]. 집안이 대대로 가난하고 일찍 부모를 여의어, 장가를 들고자 하였으나 사위로 데려가는 사람이 없었고 곤궁하여 스스로 살아가기도 힘들었다. 그러나 모습이 준수하고 행실이 좋으며 재주가 뛰어나고 생각이 남달라 고을에 그의 훌륭함을 칭송하는 이가 많았다[신언서판(身言書判) : 중국 당나라 때, 관리로 등용되기 위해 갖추어야 했던 네 가지 조건. 곧, 신수·말씨·문필·판단력.]. 고을의 수령이 그 명성을 듣고 태학(太學)에 뽑아 보냈다. 하생이 행장을 차려 서울로 출발하면서 비복(婢僕)[계집종과 사내종]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위로 부모도 없고 아래로 처자식도 없다[사고무친(四顧無親) : 의지할 데가 도무지 없음.]. 그러니 무엇 때문에 너희에게 이것저것 많은 말을 하겠느냐? 옛날에 종군(終軍)은 비단 신표를 버렸고[한나라의 종군이 대장부는 신표가 필요없다 하며 관문에서 나누어 주는 신표를 거부하였는데, 후에 사신이 되어 관문을 지나자 관문을 지키던 관리가 '저 사신이 비단 신표를 버린 사람이다'라고 하였다고 함] 상여(相如)는 기둥에다 결심을 적었으니[한나라의 사마상여가 송선교 기둥에 '벼슬아치가 타는 좋은 수레를 타지 않고는 이 다리를 건너지 않겠다'고 썼다고 함], 약관[남자 나이 20세의 일컬음]에 모두 큰 뜻을 품은 자들이었다. 내 비록 못났으나 그 둘의 사람됨을 자못 경모[존경하고 사모함]하고 있다. 뒷날 출세하여[입신양명(立身揚名): 출세하여 세상에 이름을 들날림.] 비단옷을 입고 돌아와서[금의환향(錦衣還鄕): 출세를 하고 고향에 돌아옴.] 너희들의 영광이 될 것이니, 가업(家業)을 잘 지켜 실추[명예나 위신 따위를 떨어뜨림. 잃음]되지 않게 하길 바란다.”하였다.
국학(國學)에 나아가서 여러 서생(書生)들과 예능을 겨루매 그를 능가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하생은 ‘장원 급제도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고 높은 벼슬도 마음만 먹으면 오를 수 있다.’고 여기며 거만하게 세상을 깔보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이때 조정은 이미 어지러워져 인재 선발도 공정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당시 사회의 비리와 혼란이 엿보이고 정치적 타락으로 과거 시험이 불공정하게 치루어짐. / 점쟁이를 찾아가는 계기가 됨]
그럭저럭 4, 5년을 학사(學舍)에서 늘 울적하게 뜻을 굽히고 지냈는데, 하루는 같은 학사의 서생에게 말하기를,
“채택(蔡澤)은 자기가 모르던 수명(壽命)에 대하여 당생(唐生 : 중국 전국 시대 때의 유명한 점쟁이)을 찾아가서 해결하였다. 내 들으니, 낙타교(駱駝橋) 가에 점쟁이가 있는데, 사람들에게 오래 살고 일찍 죽고 복을 받고 화를 당하는 등의 일[길흉화복]에 대해 말해 주는 것이 날짜까지 정확히 맞춘다고 한다. 나도 그 점쟁이한테 가서 나의 궁금증을 풀어보겠다.”[유교적 질서를 포기하고 초월적 힘에 의존함]
하였다. 드디어 집으로 돌아가서 궤짝 속을 뒤져 보물처럼 숨겨두었던 금전(金錢) 몇 닢을 찾아내어 그것을 가지고 점쟁이를 찾아갔다. 복사[하생과 경여인을 만나게 해주는 인물로 주인공이 처하게 될 상황을 예언함]가 말하기를,
“부귀하게 될 운명을 그대는 본디부터 타고났소[팔자소관 : 타고난 운수로 말미암아 어쩔 수 없이 당하는 일.]. 다만, 오늘은 매우 불길하오. 명이(明夷)가 가인(家人)으로 가는 점괘가 나왔소. 명이는 밝음이 땅속으로 들어가는 상이고 가인은 정숙한 유인(幽人)[속세를 피해 조용한 곳에 숨어 사는 사람으로 여기서는 죽은 여인]을 만나는 것이 이로운 상이오. 도성 남문(南門)을 나가서 달려 멀리 떠나되 해가 저물기 전에는 집으로 돌아와서는 안 되오. 그렇게 하면 액땜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좋은 배필을 얻게 될 것이오.”
하였다. 하생은 그 말이 그럴 듯하게 느껴졌다. 두려운 마음으로 일어나 작별을 하고 도성 남문을 나섰다. 가을 산 경치가 좋았다. 마음을 따라가다가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는 줄도 몰랐다. 사방을 돌아보니, 고요히 아무도 없는 깊은 산속이었다. 어디 하룻밤 묵어갈 곳도 없었다. 지치고 배고픈 몸으로 길에서 서성거렸다. 때는 중추(仲秋)[가을의 한창 때 '음력 팔월'] 열여드레[여덟 날 / ‘열여드렛날’의 준말.], 달은 아직 솟지 않았고 멀리 나무숲 사이에서 등불이 하나 별처럼 깜빡거리고 있었다[인가가 있음을 이르는 말]. 사람 사는 집이 있겠거니 생각하고 길을 더듬어 앞으로 나아갔다. 길게 자란 들풀에 싸늘한 안개가 어리고 이슬이 흠뻑 내려 촉촉히 젖어 있었다. 그곳에 이르니, 달도 환히 솟아올랐다. 보니, 아담하고 아름다운 집 한 채가 있는데, 그림으로 꾸며진 마루가 높다랗게 담장 위로 보였다. 고운 비단 창 안에는 촛불 그림자가 비쳤다. 바깥문은 반쯤 열려 있고 인적은 조금도 없었다. 하생이 이상히 여기며 몰래 들어가 방 안을 엿보니, 나이 이팔 청춘의 아름다운 여인이 각침(角枕 : 침향나무로 만든 베개)에 기대어 비단 이불을 반쯤 내리덮고 있었는데, 수심에 젖은 아름다운 모습이 눈으로 바로 보지 못할 정도였다.[화용월태(花容月態) : 아름다운 여자의 고운 맵시]
(중간 줄거리)
날이 저문 후 하생은 산속의 인가에서 죽은 지 얼마 안 된 여인을 만나 사랑을 나눈다. 헤어질 때 여인은 하생에게 금척[여인이 살아나는 비책의 계기]을 주면서 저잣거리의 노둣돌[말에 오르거나 내릴 때 발돋움에 쓰려고 대문 앞에 놓은 큰 돌. 하마석(下馬石)] 위에 놓아 달라고 부탁한다.하생이 여인과 작별하고 문을 나와 돌아다보니 새로 만든 무덤만 있었다. 하생은 여인의 부탁을 따르다가 무덤 도둑으로 몰려 여인의 집으로 끌려간다[여인의 원려지모(앞으로 올 일을 헤아리는 깊은 생각과 비책]. 하생이 여인의 아버지인 시중에게 자초지종[처음부터 끝까지의 과정.]을 말하자 시중은 노비들을 데리고 직접 여인의 무덤으로 간다.
무덤[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인연을 맺는 비현실적 공간]에 도착해 보니, 무덤은 전과 다름이 없었다. 이에 이상히 생각하며 파 보았다. 여인은 얼굴빛이 살아 있는 것과 같았고 가슴에는 따스한 기운이 조금 있었다. 유모 할미를 시켜 싸안고 수레를 태워 돌아왔다. 의원을 부를 겨를도 없어서 요동되지 않게 가만히 놓아두었는데, 해가 저물 무렵 바야흐로 깨어났다. 부모를 보고 가늘게 흐느끼더니, 조금씩 안정이 되었다. 부모가 묻기를,
“네가 죽은뒤 무슨 이상한 일이 있었더냐?”
하니, 여인이 대답하기를,
“저는 꿈인 줄 알았었는데 그게 죽음이었습니까? 이상한 일은 없었습니다.”
하며 수줍어하였다. 부모가 굳이 물으니, 여인이 비로소 말을 하는데, 하생이 했던 말과 꼭 들어맞았다. 온 집안사람들이 무릎을 치며 놀라워하였다. 이렇게 되자 하생에 대한 대우가 퍽 좋아졌다.
며칠 지나 여인이 건강을 회복하였다. 시중이 성대한 잔치를 열어 하생을 위로하고, 이어 집안 형편이며 장가를 들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 물었다. 하생은 장가는 아직 들지 않았으며 아버지는 평원 교생(校生 : 향교의 유생)이었는데 이미 오래 전에 돌아가셨다고 대답하였다. 시중이 고개를 끄덕이고 안으로 들어가 부인과 의논하기를,
“하생은 용모와 기개로 보아 실로 보통 사람이 아니니, 사위로 삼는 데 있어 망설일 게 없지만 다만 집안이 우리와는 맞지 않고 일도 또한 꿈같이 허탄하니, 이번 일로 해서 그와 혼사를 이룬다면 세상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길까 염려되오. 내 생각으로는 많은 답례품을 주어서 보답하는 것이 좋겠소.”
하였다. 부인이 말하기를,
“이 일은 대인(大人)께서 알아서 하실 일이니, 부녀자가 어찌 간여할 수 있겠습니까?[가부장사상]”
하였다. 하루는 다시 잔치를 열고 하생을 위안하였는데, 하생에게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물으면서 혼인 문제에 대해서는 끝내 한 마디도 없었다. 하생은 분한 마음으로 처소로 돌아와서 가슴을 치고 속상해하며 여인이 약속을 저버린 것을 원망하였다. 이어 시[하생이 여인과 만날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고 있고, 하생이 여인과 자신을 비유적으로 표현하여 가문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음]를 한 편 지어 여인의 유모 할미에게 부탁하여 여인에게 전하게 하였다.
비록 흙탕물이 묻어도 옥은 더러워지지 않지만
봉황은 자기 둥지를 찾았으니 잡새를 돌아보려 하겠는가.
팔 위의 눈물 자국 아직도 가시지 않았는데,
다만 이제는 도리어 꿈속에서나 그대를 보겠구나.
여인이 하생의 시를 보고 놀라 그동안의 사정을 물어보고 비로소 부모가 하생을 배반할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갑자기 몸이 아프다고 하면서 음식을 먹지 않았다. 이에 여인의 부모는 딸의 마음을 알아챘다.
(중략 줄거리)
그러나 두 집안이 신분상 어울리지 않고 일이 허탄하다는 이유로 여인의 부모는 딸과 하생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에 여인이 식음을 전폐한 채 대죄하며 부모를 설득함으로써 둘은 결혼을 허락받는다. [혼사장애 모티프와 전기적 요소]
하생이 여인과 다시 만나 비단 장막을 치고 촛불을 밝히고 마주하니 완연히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안 되었다. 하생이 말하기를,
“새로 결혼하는 것도 매우 즐거운 일인데, 헤어졌던 부부가 다시 만나는 것이야 그 즐거움이 어떠하겠소? 나와 그대는 새 즐거움과 옛 정이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니, 세상의 많고 많은 부부 가운데 우리와 같은 자가 누가 있겠소?”
하니, 여인이 말하기를,
“일찍이 들으니, 불가(佛家)에 삼생설(三生說)이 있는데, 과거, 현재, 미래가 바로 이것이라 합니다. 과거에 이미 낭군과 더불어 부부가 되었고 현재 또 낭군과 더불어 부부가 되었는데, 다만 미래에는 어찌될지 모르겠습니다. 삼생의 인연[삼생지연 : 삼생에 걸쳐 끊을 수 없는 부부의 인연.]을 맺은 일이 예전에도 있었습니까?”
하였다.
이로부터 부부가 되어 서로 공경하고 사랑하여, 비록 양홍(梁鴻)과 맹광(孟光)[거안제미(擧案齊眉) : 밥상을 눈썹과 가지런하도록 공손히 들어 남편 앞에 가지고 간다는 뜻으로, 남편을 깍듯이 공경함을 이름], 극결(缺)과 그의 아내라도 견줄 바가 못 되었[금실지락 : 부부간의 화목한 즐거움]다. 이듬해 하생은 외과(巍科)에 합격하여 보문각(寶文閣)에서 첫 벼슬살이를 시작해서 뒤에 상서령(尙書令)에 이르렀다. 여인과 부부가 되어 무릇 사십여 년을 함께 살았다. 두 아들을 낳아 맏이를 적선(積善)이라 하고 둘째를 여경(餘慶)이라 하였는데, 모두 세상에 이름이 드러났다[행복한 결말 구조]. 하생이 혼인을 정한 날에 예전의 그 점쟁이를 찾아갔더니 이미 자리를 옮겨 뜨고 없었다 한다.[신비적 요소]
이해와 감상
'하생기우전'은 신광한 ( 申光漢 )이 지은 한문소설로 '기재기이(企齋記異)'라는 소설집에 실려 있는 네 편의 작품 중 하나이다. 하생이라는 인물이 죽은 여인의 혼령을 만나 사랑하게 되고, 그녀가 살아남으로써 혼인하게 된다는 내용의 명혼소설이며 전기적 성격이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혼사 장애를 극복한 애정의 성취와 입신양명을 통한 욕망의 실현을 다룬 염정적, 전기적, 유교적 성격의 작품이다. 특이한 것은 '하생기우전'은 주인공이 여인의 혼령과 만나 사랑을 나누고, 또 그 여인이 사람으로 되살아나 혼인하게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도술을 부리거나 초월적 능력을 발휘하는 인물이 등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죽은 자와 산 자가 만난다는 점에서 전기적이며, 신비하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또한, 하생은 유생이면서도 점쟁이를 찾아가 자신의 운명에 대해 묻고, 예언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우연히 여인을 만나게 된다는 점에서 고전 소설의 특징인 우연성이 드러난다. 특기할 점은 대부분의 전기 소설이 비극적 이야기로 귀결되는데 반해, 이 작품은 해피엔딩의 결말을 이루고 있어 전기 소설사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심화 자료
하생기우전(何生奇遇傳)
조선 중기에 신광한 ( 申光漢 )이 지은 한문소설. 작자의 한문단편소설집 ≪ 기재기이 企齋記異 ≫ 에 실려 있다. 목판본은 1553년(명종 8)에 간행된 고려대학교 만송문고(晩松文庫) 소장본 ≪ 기재기이 ≫ 에 실린 것으로 총 21면으로 되어 있다. 필사본은 일본 덴리대학(天理大學) 이마니시문고(今西文庫) 소장본 ≪ 기재기이 ≫ 에 실린 것으로 총 19면으로 되어 있다.
〈 하생기우록 〉 의 주인공 하생은 태학생으로 선발되어 과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루는 낙타교 (駱駝橋) 아래에 있는 복사(卜師 ; 점쟁이)의 집을 찾아가 점을 쳤다. “ 장차 부귀를 누리나 금일은 불길하다. ” 는 점괘를 얻었다. 그 날은 중추절(仲秋節)이었다.
하생은 시름에 겨워 길을 헤매다가 한 소옥(小屋)을 찾아 노숙을 청하게 되었다. 그 집에는 한 절세가인이 시비와 함께 살고 있었다. 그녀도 자신의 꿈 이야기를 말하며 자신과 하생이 천생연분임을 말하였다. 그 날 밤에 두 사람은 운우지락(雲雨之樂)을 이루었다.
새벽이 되자 그녀는 자신이 죽은 혼령임을 말하였다. 상제의 명으로 다시 이승에 살아나게 되었으며, 하생과 연분이 있어 가우(佳偶)를 맺었으니 자신을 잊지 말아 달라고 하면서 신표로 금척 ( 金尺 ) 하나를 주고 이별하였다. 두 사람이 서로 헤어져 돌아서니 무덤 앞이었다.
여인의 친정 노복들이 하생이 금척을 가진 것을 보고 무덤을 도굴한 도둑으로 몰았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여인의 부모를 만나 겪은 일을 말하고 황급히 무덤을 파헤치니 여인이 다시 살아났다. 그들은 삼생지연(三生之緣)을 말하고 부부가 되었다. 그 뒤에 하생은 등과하게 되었다. 이들은 40여 년을 해로하고 행복한 삶을 마쳤다.
〈 하생기우록 〉 은 ≪ 금오신화 ≫ 의 〈 만복사저포기 萬福寺樗蒲記 〉 와 유사하다. 무덤 속에서 여인의 영혼을 만나 인연을 맺는다. 여인의 말에 따라 금척을 매개로 현실 속에 다시 복귀한다. 무덤을 파헤쳐 여인을 되살려 내고 살아난 여인과 다시 부부의 인연을 맺는다. 그리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결구로 되어 있다.
〈 만복사저포기 〉 는 양생(梁生)이 왜구의 난에 죽은 여인의 영혼을 만나 개령동(開寧洞) 무덤 속에서 가약을 맺는다. 이별의 신표인 은잔(銀盞)이 매개되어 보련사(寶蓮寺)에서 여인의 영혼을 다시 만나 환희를 맛본다. 그러나 그들은 유명이 달라 끝내 이별하게 된다.
반면에 〈 하생기우록 〉 은 현실적 부부의 인연을 맺어 행복을 누리는 것으로 끝맺고 있다. “ 정혼한 날에 전의 복사집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였다. ” 는 결말에서처럼 복자(卜者)의 액자(額字)가 매우 환상적으로 처리되고 있다. 그밖에 사랑과 이별의 시도 묘사가 매우 뛰어나다. 훌륭한 염정소설이다.
≪ 참고문헌 ≫ 申光漢의 企齋記異(蘇在英, 崇實語文 3, 崇實大學校國語國文學科, 1986).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하생기우전'과 '만복사저포기'의 차이점
|
주제 |
구성 |
작가 의식 |
하생기우전 |
애정의 성취와 입신양명을 통한 욕망의 실현 |
이승과 저승의 사람임 |
불공정한 과거 시험을 통해 현실을 간접적으로 비판함 |
만복사저포기 |
시공을 초월한 사랑 |
일대기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비극적 결말을 맺음 |
비극적 결말을 통해 세상과 타협하지 않겠다는 의식을 드러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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