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트 / 카뮈(Camus)
by 송화은율페스트 / 카뮈(Camus)
<전략>
밤 11시에 리외와 타루는 좁은 술집으로 들어왔다. 30명 가량의 손님들이 턱을 괴고 큰 소리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페스트가 휩쓸고 있는 침묵의 도시에서 나타난 두 사람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발을 멈추었다. 그들은 알콜 음료가 아직껏 있는 것을 보고 그들을 이해했다. 랑베르는 카운터 저쪽 끝에 있다가 그들에게 앉은 채로 손짓을 했다. 두 사람은 그의 양쪽에 자리를 잡았다. 타루는 시치미를 떼고 옆에 있는 사람을 밀어냈다.
"술을 하셔도 될까요?"
"암요, 하다마다요." 하고 타루가 말했다.
리외는 자기에게 건네진 잔의 쌉쌀한 술 냄새를 맡아 보았다. 그러한 소란 속에서는 이야기하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랑베르는 이야기보다도 술 마시는 데 정신이 팔린 성싶었다. 의사는 그가 취했는지를 판단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앉은 좁은 구석 한 끝에 있는 두 개의 테이블 중 하나에는, 어떤 해군 장교가 양쪽 팔에 여자를 하나씩 끼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비대한 자를 상대로 카이로의 장티푸스 유행 당시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수용소가 있었지." 하고 그는 말했다. "원주민들을 위해서 수용소를 짓고 환자를 수용할 천막을 치고 그 주위에 보초를 세우고 말일세. 가족들이 몰래 민간 약품을 가지고 들어오면 쏘았단 말이야. 가혹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그것이 옳았어."
또 한 테이블에는 멋쟁이 청년들이 앉아 있었는데 주고받는 이야기는 알아 들을 수가 없었지만, 높다란 곳에 있는 확성기에서 쏟아져 나오는 '센트 제임스 인퍼메리'라는 노래 속에서 말소리가 휩쓸려들고 있었다.
"잘 됩니까?" 하고 목소리를 돋우어서 리외가 말했다.
"잘 되어 갑니다." 하고 랑베르가 말했다. "아마 이번 주일 안에 될 겁니다."
"유감이군요." 하고 타루가 외쳤다.
"왜요?"
타루는 리외를 보았다.
"오!" 하고 리외는 말했다. "타루의 말은 여기 계시면 우리에게 도움이 될 거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로서는 떠나시려는 심정을 잘 알고 있습니다."
타루는 한 잔씩 더 하자고 했다. 랑베르는 자기가 앉았던 걸상에서 내려와서 처음으로 타루를 정면으로 보았다.
"제가 무엇에 도움이 됩니까?"
"글쎄." 하고 타루는 자기 앞에 놓인 술잔으로 손을 천천히 내밀면서 말했다. "우리 보건대의 일입니다."
랑베르는 다시 그의 습관인 무뚝뚝한 얼굴로 돌아가서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러한 단체가 유익한 것이라고 생각지 않으시나요?" 막 잔을 비운 타루는 이렇게 말하면서 랑베르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대단히 유익합니다."라고 말하며 신문 기자는 술잔을 기울였다.
리외는 그의 손이 떨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제는 정말 완전히 취했다고 그는 생각했다.
이튿날 랑베르가 두 번째로 약속한 스페인 식당에 들어섰을 때 몇 사람이 입구까지 의자를 끌어내 놓고 앉아서 겨우 더위가 고개를 숙이기 시작하는 초록빛과 황금빛으로 물든 저녁 한때를 즐기고 있었다. 그들은 매콤한 냄새가 나는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식당 내부는 거의 비어 있었다.
랑베르는 안쪽 식탁에 가서 앉았다. 그 곳은 그가 처음으로 곤잘레스를 만난 테이블이었다. 그는 주문을 받으러 온 웨이트리스에게 사람을 기다린다고 말했다. 7시 30분이었다.
차츰 남자들이 하나 둘씩 식당 안으로 들어와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음식이 날라지고 둥그런 천정 밑은 식기 소리와 재잘거리는 소리로 넘쳐흘렀다. 8시 30분에 그는 곤잘레스도 그 두 젊은이도 오지 않은 채 식사를 끝냈다. 그는 담배를 여러 대 피웠다. 손님들은 서서히 자리를 비우기 시작했다.
밖은 어느 새 어두워지고 있었다. 후덥지근한 바람이 바다에서 불어와 창가의 커튼을 살며시 흔들고 있었다.
9시가 되었을 때 랑베르는 홀이 텅 비었고 웨이트리스가 이상한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계산을 하고 나왔다. 식당 맞은 편에 카페의 문이 하나 열려 있었다. 랑베르는 그 카페의 카운터에 걸터앉아서 식당 입구를 주시하고 있었다. 9시 30분에 그는 주소도 알지 못하는 곤잘레스를 어디서 어떻게 만날 것인지 궁리를 하면서 호텔로 돌아왔다. 여태껏 밟아 온 절차를 다시 밟을 것을 생각하자 가슴이 답답했다.
바로 그 때 구급차가 어둠 속을 뚫고 지나갔고 그런 가운데 그는 리외에게도 말한 바 있지만, 자기와 아내를 갈라놓은 장벽으로부터 어떤 탈출구를 찾기에 열중한 나머지 그 동안 줄곧 아내를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 때 또한 모든 길이 다시 꽉 막히고 보니 욕망의 한복판에서 다시 아내의 모습이 떠올랐으며, 그것이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고통의 격발을 동원했기 때문에 그는 호텔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혹독한 시련에서 벗어나려는 것이었지만, 그 시련은 언제나 그를 따라다니면서 관자놀이를 쑤셔댔다.
이튿날 일찍이 그는 리외를 찾아가서 타루를 어떻게 하면 만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제게 남은 일이라고는……." 하고 그는 말했다. "다시 그 길을 따라가는 것뿐입니다."
"내일 저녁 다시 한 번 오십시오." 하고 리외가 말했다. "타루가 코타르를 만나고 싶다고 하더군요. 왜 그러시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는 10시에 오기로 되어 있어요. 10시 반쯤 오시죠."
코타르가 이튿날 의사 집을 방문했을 때, 타루와 리외는 리외의 담당 구역내에서 일어난 예기치 않은 완치건(完治件)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열에 하납니다. 운이 좋았죠." 하고 타루는 말했다.
"아! 그것은……" 하고 코타르가 말했다. "그것은 페스트가 아니었어요."
두 사람은 그 병이 분명히 페스트였었다고 단언했다.
"그럴 리가 없어요. 나은 것을 보니 말예요. 저보다 더 잘 아시겠지만 페스트라면 용서가 없죠."
"대개는 그렇죠." 하고 리외가 말했다. "그러나 좀더 꾸준히 노력하면 놀라운 성과를 가져옵니다."
코타르는 웃고 있었다.
"그럴 것 같지 않은데요. 통계 발표를 들으셨어요. 오늘 저녁에?"
호의에 찬 시선으로 그 연금 생활자를 보고 있던 타루가, 숫자는 알고 있으며 사태는 중대하지만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더 한층 특별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아니! 그런 조치는 벌써 취하고 있지 않소?"
코타르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타루를 바라보고 있었다. 타루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으며, 페스트는 각자의 문제이니만큼 각자가 자신의 의무를 찾아서 이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봉사대의 문은 언제나 개방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건 어디까지나 좋은 생각입니다." 하고 코타르는 말했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 소용이 없을 겁니다. 페스트가 너무나 강해서 말씀예요."
"두고 봐야 압니다." 하고 타루는 끈기 있는 어조로 말했다. "우리가 최선을 다하고 나서 말이죠."
그 동안에 리외는 자기 책상에서 카드를 분류하며 베끼고 있었다. 타루는 의자 위에서 계속 몸을 뒤틀고 있는 그 연금 생활자를 여전히 살펴보고 있었다.
"왜 우리 사업에 협조하지 않으세요. 코타르 씨?"
코타르는 불쾌한 듯한 태도로 의자에서 일어나 모자를 접어 들었다.
"그것은 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는 거친 어조로 말했다.
"뿐만 아니라, 나는 페스트 속에 있는 것이 한결 더 좋아요. 그런데 왜 내가 그것을 멈추는 데 뛰어들어야 하는지 알 수 없어요."
타루는 갑자기 깨달은 바가 있다는 듯이 이마를 탁 치면서 말했다.
"아! 그랬군요.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게 아니었더라면 벌써 체포되었을 텐데."
코타르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넘어지려는 듯이 의자를 꽉 붙잡았다. 리외는 일손을 멈추고 신중하고도 흥미 있는 태도로 두 사람은 번갈아 바라보았다.
"누가 그런 말을 해요?" 하고 그 연금 생활자는 외쳤다.
타루는 의외라는 듯 말했다.
"아니 당신이 그러시구. 좌우간 의사 선생하고 나는 그렇게 알고 있는데요."
그러자 코타르는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지껄였다.
"그렇게 흥분하지 마세요." 하고 타루가 덧붙여 말했다. "의사 선생이나 나는 당신을 고발할 사람이 아닙니다. 당신의 사건은 우리와는 무관한 겁니다. 게다가 우리는 경찰을 결코 좋아하지 않으니깐요. 자, 앉으시죠."
연금 생활자는 자기 의자를 훑어보고 한참 머뭇거리다가 다시 앉았다. 그리고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은 오래 전 일입니다." 하고 그는 시인했다. "그것이 다시 튀어나오다니, 나는 다 잊혀진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어떤 놈이 찔렀죠. 그들은 나를 호출하더니 조사가 끝날 때까지 계속 대기하고 있으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결국 나는 체포되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죠."
"큰 죄였나요?" 하고 타루가 물었다.
"말하는 데 달려 있어요. 하여간 살인은 아닙니다."
"금고형쯤인가요? 아니면 징역인가요?"
코타르는 몹시 풀이 죽어 있었다.
"금고형이겠죠. 재수가 좋으면……"
그러나 잠시 후에 그는 다시 기세를 올리며 말했다.
"과실이었어요. 누구나 그런 과오는 범하죠. 생각만 해도 못 견딜 일이에요. 그런 일로 잡혀가서 집이며 생활이며 모든 친지들과 헤어져야 하다니."
"아하!"하고 타루가 말했다. "목을 매어 자살을 생각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군요?"
"네, 어리석은 짓이었죠. 물론."
리외는 처음으로 입을 열고 코타르에게 자기는 그의 불안을 잘 이해하고 있으며, 모든 것이 잘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오! 지금은 두려울 게 없다는 것을 알고 있죠."
"아마……" 하고 타루가 말했다. "우리 보건대에는 가입하지 않으실 작정이시군요."
두 손으로 모자를 빙빙 돌리고 있던 코타르는 어이가 없다는 시선으로 타루를 올려다보았다.
"섭섭하게 생각지 마십시오."
"물론이죠. 그러나 적어도……." 타루는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병균을 전파시키는 일 따위는 하지 말아 주세요."
코타르는 자기가 페스트를 전파시킨 것이 아니고 페스트는 저절로 생겨났고, 당장에는 그 덕분에 자기에게 유리하게 되고 있지만 그것은 자기 탓은 아니라고 항의했다. 그리고 랑베르가 문 앞에까지 왔을 때 그 연금 생활자는 있는 힘을 다해 이렇게 덧붙였다.
"게다가 당신들은 아무 결과도 얻지 못하실 것이라는 것이 내 의견입니다."
랑베르는 코타르가 곤잘레스의 주소를 모른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 자그만 카페로 돌아가 다시 시작할 수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이튿날 거기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리외가 일의 진전을 알고 싶다는 뜻을 표시하자 랑베르는 주말에 언제라도 좋으니 자기 방으로 타루와 함께 와 달라고 했다.
아침이 되자 코타르와 랑베르는 그 작은 카페에 들러 저녁때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내일 기다리고 있도록 가르시아에게 부탁을 해 두었다. 그 날 저녁 그들은 가르시아를 기다렸으나 허사였다. 이튿날 가르시아는 와 있었다. 그는 말없이 랑베르의 이야기를 들었다. 사정은 잘 모르지만 자기가 아는 바로는 호별검사를 실시하기 위해서 구(區)마다 24시간 통행을 차단하고 있으므로 곤잘레스와 그 두 젊은이가 차단선을 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기로서 할 수 있는 일은 고작해야 다시 한번 그들을 라울과 연락시켜 주는 일인데, 그 일도 물론 이틀 이내에는 어렵다는 것이었다.
"아마……." 하고 랑베르가 말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겠군."
이틀 후 어느 길모퉁이에서 라울은 가르시아의 추측을 긍정했다. 거리의 교통이 차단되었던 것이다. 랑베르는 다시 곤잘레스와 접선을 해야만 했다. 이틀 후 랑베르는 다시 그 축구 선수와 점심을 같이했다.
"참 바보 같은 이야기지." 하고 곤잘레스는 말했다. "사전에 연락할 방법을 강구해 놓았어야만 했는데."
랑베르의 의견도 마찬가지였다.
"내일 아침 우리 애녀석들한테나 가보세. 가서 수단을 강구해 보도록 하지."
이튿날 애녀석들은 외출하고 없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다음날 정오에 리세광장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해 놓았다. 그리고 랑베르가 돌아왔을 때의 표정은 오후에 만난 타루가 깜짝 놀랄 정도였다.
"잘 안 되나요?" 하고 타루가 그에게 물었다.
"새 출발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고 랑베르는 말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초대를 변경했다.
"오늘 저녁에 와 주세요."
그 날 저녁 두 사나이가 랑베르의 방에 들어갔을 때 랑베르는 누워 있었다. 그는 일어나서 미리 준비해 두었던 술잔 두 개에 술을 따랐다. 리외는 잔을 들면서 그에게 일은 잘 되어 가느냐고 물었다. 신문 기자는 어제 겨우 제자리로 돌아왔으며, 며칠 이내에 최후의 약속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술을 마시고 덧붙였다.
"물론 그들은 오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단정을 내릴 필요는 없죠." 하고 타루는 말했다.
"아직 그놈들에 대해서 잘 모르실 것입니다." 하고 랑베르는 어깨를 으쓱 올리며 대답했다.
"무엇을요?"
"페스트란 놈 말입니다."
"아하!" 하고 리외가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렇습니다. 아직 잘 모르고 계신 겁니다. 그것은 재발하게 마련입니다."
랑베르는 방 한구석으로 걸어가서 조그만 축음기의 뚜껑을 열었다.
"어떤 곡인가요?" 하고 타루가 물었다. "듣던 곡인데요."
랑베르는 그것이 '센트 제임스 인퍼메리'라고 대답했다.
곡이 반쯤 돌아갔을 때 멀리서 두 발의 총성이 들려 왔다.
"개 아니면 탈주자로군." 하고 타루가 말했다.
잠시 후 곡이 끝나자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점차 뚜렷하게 들리더니 호텔방의 창 밑을 지나 점점 작아지며 마침내 아주 자취를 감추었다.
"이 곡은 별로 재미없어요." 하고 랑베르가 말했다. "게다가 오늘 열 번이나 들었으니 그럴 수밖에."
"그렇게 그 곡이 좋으세요?"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밖에 없으니까요."
그리고 잠시 후에 덧붙였다.
"레코드란 게 원래 반복되도록 만들어진 것이니 말입니다."
그는 리외에게 일은 어떻게 되어 가느냐고 물었다. 다섯 개 반이 현재 활동하고 있으며 몇 개 반이 더 편성될 듯하다고 말했다. 신문 기자는 침대 위에 앉아서 손톱 손질에 몰두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리외는 침대 옆에 웅크리고 있는 그 몽탁하고 힘찬 그의 옆 모습을 살피고 있었다. 문득 그는 랑베르가 자기를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선생님." 하고 랑베르가 말했다. "저는 그 조직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비록 저는 가입하지 않고 있지만 그것은 저 나름대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다른 일 같으면 당장에라도 몸을 바칠 수 있을 것 같에요. 저는 스페인 전투에 종군한 일도 있습니다."
"어느 편으로요?" 하고 타루가 물었다.
"진 편이죠. 그러나 그 후 나는 생각한 바가 있어요."
"무슨 생각이죠?" 하고 타루가 물었다.
"용기라는 것에 대해서 말입니다. 지금 나는 인간이 위대한 행위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 인간이 위대한 감정을 지닐 수 없다면 그 사람은 내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인간은 어떠한 일이라도 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 같습니다." 타루가 말했다.
"천만에요. 인간은 오랫동안 고통을 받거나, 오랫동안 행복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가치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는 두 사람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다가 "저어, 타루씨, 당신은 사랑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모르겠어요. 그러나 아마 그럴 수 없을 것 같군요. 지금으로서는."
"바로 그것이죠. 그런데 당신은 하나의 관념을 위해서는 목숨을 바칠 수 있습니다. 눈에 빤히 보입니다. 그런데 나는 어떤 관념에 목숨을 내맡기는 자들이라면 진절머리가 납니다. 나는 영웅주의를 경멸합니다. 나는 그것이 쉬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것은 파괴적인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내가 존경하는 것은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 살고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 죽는 일입니다."
리외는 신문 기자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 줄곧 그를 바라보면서 그는 부드럽게 말했다.
"관념이 인간의 전부는 아닙니다. 랑베르."
랑베르는 침대에서 펄쩍 뛰어내렸다. 얼굴이 흥분으로 시뻘개졌다.
"관념이죠. 터무니없는 관념이죠. 인간이 사랑을 등한시하는 그 순간부터 그렇죠. 그런데 바로 우리들은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해졌지요. 단념하십시다, 선생님, 사랑할 수 있게 될 때까지 기다립시다. 그리고 정말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영웅인 척하지 말고 해방의 그 날을 기다립시다. 저는 그 이상의 행위는 하지 않겠어요."
리외는 갑자기 피로를 느낀 듯이 몸을 일으켰다.
"옮은 말씀예요. 랑베르. 아주 옳아요. 그러니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지금 하시려는 일에서 마음을 돌려놓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저로서는 정당하고도 좋은 일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역시 이것만은 말해 두고 싶습니다. 즉, 이 모든 일은 영웅심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은 순수성의 문제입니다. 아마 비웃음을 자아낼 일인지는 모르나 페스트에 대처할 유일한 방법은 성실성뿐입니다.
"성실성이란 어떤 것이에요?" 하고 랑베르는 신중한 태도로 물었다.
"일반적으로는 말할 수 없지만 나의 경우에 있어서는 자신의 직책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아!" 하고 랑베르가 화가 난 듯이 말했다. "나는 어떤 것이 내 직책인지를 모르겠어요. 어쩌면 사랑을 택한 것이 잘못일는지도 모르지요."
리외는 그를 쳐다보았다.
"아닙니다." 하고 그는 힘차게 말했다. "조금도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랑베르는 생각에 잠긴 듯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분께서는 아마 그런 일을 해서 손해 보실 것이 없으실 겁니다. 유리한 편에 서는 것은 쉬운 일이니까요."
리외는 또 잔을 비웠다.
"자." 하고 그가 말했다. "우리는 할 일이 있어서요."
그는 밖으로 나갔다.
타루도 그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막 나가려는 순간에 생각이 난 듯이 신문 기자에게 몸을 돌리며 말했다.
"리외 선생의 부인이 여기서 수백 킬로 떨어진 요양소에 가 있는 것을 아시는지요?"
랑베르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타루는 이미 나가 버렸다.
이튿날 아침 일찍이 랑베르는 의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시를 떠날 때까지 저도 함께 일하도록 해 주시겠어요?"
잠시 말이 없더니 이윽고 대답이 들려 왔다.
"좋아요, 랑베르. 감사합니다."
이와 같이 매일 페스트의 포로가 된 사람은 저마다 투쟁을 계속했다. 그리고 랑베르 같은 이들은 아직 자유인처럼 행동하고 있었으며, 아직도 선택할 자유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상 8월 중순에 페스트는 모든 것을 지배했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 때는 이미 개인적인 운명 같은 것은 있을 수 없었고, 다만 페스트라는 전체적인 사실과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느끼는 갖가지 감정만이 존재했다. 가장 막중한 것은 이별과 귀양살이의 감정이었다. 거기에는 공포와 반항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필자는 그 더위와 역병의 절정에서 전반적인 형세와 그리고 그 표본을 내세우는 의미에서 생존한 우리 시민들의 횡포, 사망자의 매장, 생이별한 연인들의 고통 같은 것을 묘사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후략>
요점 정리
지은이 : 카뮈(Camus)/ 이휘영 옮김
갈래 : 장편 소설
성격 : 우화적. 비판적('페스트'는 나치스의 프랑스 침략을 상징하며 '폐쇄된 도시'는 외부로부터 심지어 신으로부터도 구원의 길이 차단된 절망적인 공간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둘의 보편적인 의미는 현대인들이 당면한 극한적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표현 : 상징적. 실존주의적인 주제를 한 도시라는 닫힌 공간 내에서 집요하게 탐구함
제재 : 페스트, 알제리의 오랑 시
주제 : 부조리에 맞서 싸우는 인간의 용기와 의지
의의 : 부조리 문학의 대표작
줄거리 : 알제리의 오랑 시에 페스트가 만연하자 오랑 시는 외부로부터 완전히 차단된다. 모든 것이 봉쇄된 한계 상황 속에서 역병은 더욱 기승을 부리고 시내는 커다란 혼란에 빠진다. 이 혼란을 틈타 돈을 벌려는 무리도 날뛴다. 의사 리외와 지식인 타루는 혼란에도 불구하고 질병과 싸움을 벌이며 묵묵히 자신의 임무를 수행한다. 파리에 아내를 남겨 둔 채 아랍인의 생활상을 취재하러 오랑 시에 들렀던 신문사 특파원 랑베르는 탈출을 시도하다가 포기하고 리외와 함께 페스트 퇴치 작업을 벌인다. 파늘루 신부는 페스트를 신의 형벌로 생각하고 기도에 전념하지만 결국 페스트에 감염되어 사망한다. 그리고 타루도 페스트에 희생되고 만다. 이어서 리외는 그의 아내도 병사했다는 전보를 받는다. 드디어 목숨을 걸고 페스트와 싸운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 페스트는 완전히 퇴치되고 오랑 시는 해방의 기쁨에 휩싸인다. 열차는 다시 들어오고 랑베르의 아내도 오랑 시를 찾아와 그와 플랫폼에서 감격의 재회를 한다.(이곳에 수록된 부분은 랑베르가 오랑 시에서 탈출을 시도하려는 장면이다.)
내용 연구
장티푸스 : 급성 전염병 중의 하나. 이 작품의 '페스트'와 유사한 면을 가지고 있다.
가혹한 ∼ 그것이 옳았어 : 환자와 가족의 격리를 위해서는 쏘아 죽일 수밖에 없었다는 의미. 걷잡을 수 없는 전염병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는 인간으로서는 차마 못할 살인행위도 불가피했다는 고백이다. 한계 상황 속에서 나약한 인간들이 생존해 나가기 위해 불가피하게 저지르는 부조리한 행동은 부조리문학의 주된 주제가 된다.
"잘 됩니까?" : 행정적인 조치로 시외곽의 모든 도로가 차단된 오랑시에서의 탈출을 시도하는 일이 차질 없이 잘 진행되고 있는가를 묻는 것임.
떠나시려는 ∼일입니다 :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 무조건 이 곳을 벗어나고자 하는 심정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우리 보건대의 일입니다." : 여기에서 '보건대'는 페스트를 퇴치하기 위해 타루가 조직한 자원 봉사 단체를 말한다.
대단히 ∼술잔을 기울였다 : 랑베르의 생각도 점차 리외와 타루의 일을 돕겠다는 쪽으로 기울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제게 남은 - 것 뿐입니다 : 랑베르는 타루가 알고 있는 코타르의 주선으로 가르시아, 라울, 곤잘레스 등을 만나 탈출을 시도했다. 그 과정에서 일이 틀어지자 다시 처음부터 그 과정을 시작해야 한다는 뜻임.
뿐만 아니라 - 알 수 없어요 : 한계 상황 속의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자기의 이기심을 채우려는 코타르를 통해, 인간의 비인간성과 비윤리성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음.
천만에요. 인간은 - 할 수 없습니다 :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선택되어지는 삶 속에서 인간은 이를 극복하여 나갈 수 없음을 말함.
내가 존경하는 - 죽는 일입니다 : 사회의 연대감을 중시하는 윤리 의식보다 자기 자신의 이기심에 바탕한 윤리 의식을 강조한 말임.
아마 비웃음을 - 방법은 성실성뿐입니다 : 한 도시에 엄습한 재앙이 인간의 생존마저 말살시키는 이 '부조리'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성실이라는 고귀한 정신뿐임을 말함.
시를 떠날 - 해 주시겠어요? : 이기적인 성격에서 이타적인 성격으로 변해 가는 랑베르의 심리를 통해, 희생과 사랑에 바탕을 둔 연대감의 회복 가능성을 보여 줌.
이해와 감상
"이방인(異邦人)"에 이어 1947년에 "페스트"를 발표한 카뮈는 매우 지적이고 상징적인 문체가 특징이다. 전쟁 체험을 깊이 내면화하여 압축된 문체, 무감정의 서술로 독자의 당면 과제를 인식시켜 주는 뛰어난 리얼리즘을 보여 준다.
이 작품에서 페스트라는 급성 전염병은 인간이 처한 한계 상황을 상징한다. 사람들은 별다른 이유 없이 페스트에 전염되고 허무하게 죽어 간다. 작자 카뮈는 이러한 상황을 '부조리(不條理)'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부조리한 상황 속에서 무의미하게 죽어 가는 일이야말로 허무한 일이며, 용기 있는 인간은 이에 맞서 싸울 줄 알아야 한다고 외치고 있다. 예컨대 카뮈의 다른 작품 "시지프스의 신화"에 나오는 비극적인 주인공 시지프스야말로 부조리의 상징이다. 그는 산꼭대기까지 바위를 밀어 올리는 형벌을 타고 났는데, 그 바위는 정상에 끌어올려지자마자 굴러 떨어진다. 카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행동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위대함을 보이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감성에 호소하기보다는 고도의 지적인 능력이 필요하다. 작품의 주제는 페스트의 상징적 의미에 모아진다. 페스트는 죽음, 병, 고통 등 인간의 본질적인 원리뿐 아니라, 인간 사회의 온갖 종류의 부조리한 제도나 일을 상징한다. 의사인 리외의 객관적인 서술을 통해 이 온갖 악과의 처절한 싸움을 그렸다는 점에서, 작가의 첫 작품 "이방인"에서 발전하여 연대감의 윤리를 확립했다는 의의를 지닌다. 즉, "이방인"에서 전후의 모순된 인간상을 보여 주었다면, '페스트'에서는 이를 극복하기 위한 윤리 의식을 보여 주고 있다.
우리는 이 소설에서 몇 가지 유형의 전형적 인물을 만나게 된다. 카뮈는 인간 사회의 축소인 오랑 시를 배경으로 하여 개인 의식과 집단 의식 사이에서 인간이 어떠한 행동을 보이는가를 실험했던 것이다. (출처 : 박갑수 외 2인 공저 지학사 문학)
이해와 감상1
페스트라는 질병의 극한 상황으로 인해 희생되는 인물들과 맞서 싸우는 여러 유형의 인간을 제시하여 부조리에 맞서는 인간의 실존을 제시하고 있다.
위의 대목에서 신문사 특파원인 랑베르는 아직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다. 이에 반해 의사 리외와 지식인 타루는 영웅적인 행동으로 페스트를 퇴치하려는 보건대의 직무를 수행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페스트라는 급성 전염병은 인간이 처한 한계 상황을 상징한다. 사람들은 별다른 이유 없이 페스트에 전염되고 허무하게 죽어간다. 작자 카뮈는 이러한 한계상황을 '부조리(不條理)'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부조리한 상황 속에서 무의미하게 죽어 가는 일이야말로 허무한 일이며, 용기 있는 인간은 이에 맞서 싸울 줄 알아야 한다고 외치고 있다. 예컨대 뮈의 다른 작품 '시지푸스의 신화'에 나오는 비극적인 주인공 '시지푸스'야말로 부조리의 상징이다. 그는 산꼭대기까지 바위를 밀어 올리는 형벌을 타고났는데, 그 바위는 정상에 끌어올려지자마자 굴러 떨어진다.
카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행동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위대함을 보이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심화 자료
랑베르의 성격 변화
이 작품에서 의사 리외와 지식인 타루는 지극히 윤리적이고 실천력이 강한 인물로 제시되고, 나머지 평범한 시민들은 비윤리적이고 타산적인 인물로 제시되어 있다. 이에 비해 신문사 특파원인 랑베르는 좀더 관념적이고 이중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작자는 랑베르의 성격이 이기적인 단계에서 이타적(利他的)인 단계로, 관념적이고 회의적인 단계에서 실천적이고 주체적인 단계로 변해 가는 모습을 그림으로써, 희생과 사랑에 바탕을 둔 새로운 연대 의식의 출현을 예고하고 있다. 부조리한 상황을 피하려는 자세에서 탈피하여 이에 맞서 적극적으로 대결하는 자세로 변모해 가는 인물인 랑베르야말로 이 작품의 주인공이자 입체적 인물(developing character)이다. 작자 까뮈는 랑베르라는 인물을 통해 무의지적(無意志的)인 한 인간이 진정한 실존(實存)을 획득해 가는 모습을 묘사함으로써, 부조리 문학 속의 한 전형적인 인물을 창조하였다.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부조리 不條理
실존주의 철학에서 배리(背理)와 동의어로 원래는 조리에 맞지 않는 것이라는 논리적 의미만을 표시하는 말이었으나 반(反)합리주의적인 철학이나 문학, 특히 실존주의 철학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용어가 되었다.
J.P.사르트르의 소설 《구토(嘔吐)》(1928)에서는 마로니에 나무의 뿌리와 같은 ‘사물 그 자체’를 직시할 때에 그 우연한 사실성(事實性) 그것이 부조리이며 그런 때에 인간은 불안을 느낀다. 이것은 M.하이데거나 S.A.키에르케고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A.카뮈는 그것을 다시 일보 전진시켜 《시지프의 신화》(1942)에서 “부조리란 본질적인 관념이고 제1의 진리이다”라고 하여 세계에 대한 인간의 근원적인 태도를 부조리라고 규정하였다.
원래 부조리한 세계에 대하여 좌절을 각오하고 인간적인 노력을 거듭하여 가치를 복권하는 것이 카뮈의 부조리에 대한 주장이었다. 따라서 카뮈의 경우 부조리는 당연히 ‘반항적 인간’을 낳는 것이다. 이리하여 부조리의 사상은 F.W.니체 등과도 유연성(類緣性)을 갖게 된다. 어떻든간에 R.데카르트 이래의 근대합리주의적 가치관에 대결하여 그것과는 다른 곳에서 새로운 가치를 찾을 때 부조리는 비로소 그 본래의 문제성을 나타내는 말이 된다. (출처 : 동아대백과사전)
부조리 문학 不條理文學 (literature of the absurd)
제2차 세계대전 후 기존의 전통문화와 문학의 본질적 신념과 가치에 대한 반발로 나타난 극(劇)과 소설로 실존주의에 근거를 둔 문학 유형으로 인간의 조건은 본질적·근원적으로 부조리하며, 이러한 상황은 부조리한 문학작품 속에서만 충분히 표현할 수 있다는 뜻을 공유하고 있는 드라마와 소설을 가리키는 명칭이다.
이 문학은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와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의 소설 《변신 Die Verwandlung》(1916), 《심판 Der Prozess》(1925) 등과 표현주의와 초현실주의 운동에도 근원을 두고 있다. 그러나 근래의 이러한 유형의 문학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전통문화 및 전통문학의 본질적 신념과 가치에 대한 반발로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기존의 전통에서 가장 중심적인 것은, 인간은 이성적 존재로서 최소한 부분적으로나마 인식 가능한 세계 속에 살고 있으며, 비록 패배할 경우에라도 영웅적 행동을 할 수 있고, 또 인간의 존엄성을 지닐 수 있다는 것과 같은 가정이었다. 그러나 과거에도 개개의 인간을 낯선 세상 속에 내던져진 고립된 존재로 보고, 무(無)에서 왔다가 무로 돌아가는 인간의 삶을 부조리한 생존으로 묘사하는 일반적인 경향이 있어 왔다. 특히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와 알베르 카뮈(Albert Camus)와 같은 문인들의 실존주의 문학에 이러한 경향이 두드러졌다.
‘부조리(absurd)’는 ‘조리에 맞지 않음’, ‘이치에 맞지 않음’의 비합리적이라는 뜻과 ‘우스꽝스럽다’라는 뜻의 두 가지 의미를 지닌 말인데, 알베르 카뮈의 ‘부조리에 대한 시론(試論)’이라는 부제가 붙은 《시지프의 신화》(1942)에 의해 본격적으로 대두되었다. 그는 《시지프의 신화》 《이방인》(1942) 등의 작품에서, 인간은 세상에서 삶의 목적과 의의를 찾으려 하나 세상은 언제나 대답을 거부하여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이유없는 것, 엉뚱한 것, 즉 부조리한 것으로 느끼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후 마틴 에슬린(Martin Esslin)에 와서 ‘부조리 연극(Absurd drama)’이라는 용어가 일반화하였다. 그는 《부조리의 연극》(1961)이라는 저서에서 새뮤얼 베케트(Samuel Beckett), 외젠느 이오네스코(Eugene Ionesco), 장 주네(Jean Genet) 등 1940∼1950년대의 전위작가들을 다루면서, 인간존재의 무의미함, 인간과 인간 사이의 의사소통의 불가능함, 인간의지의 무력함, 인간의 근본적인 야수성, 물질성, 비생명성 등으로 규명되는 인간의 부조리를 그들의 작품에서 역설적으로 나타내고 있다고 하였다. 이는 오늘날 ‘부조리’라는 말이 주로 전위적 극문학과 관련해서 많이 쓰이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부조리 연극의 가장 중요한 특색은 주제가 우주의 부조리성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극의 구성 자체도 부조리하다는 점이다. 부조리 연극의 전형으로 볼 수 있는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1952)는 사실주의적인 배경과 논리적 추리, 일관성 있게 전개되는 플롯을 배격하는 극적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조리있는 언어로 부조리철학을 이야기한 알베르 카뮈와 커다란 차이를 보여준다.(출처 : 동아대백과사전)
부조리(不條理) 문학(文學)
'조리에 맞지 않음', '이치에 맞지 않음'이라는 뜻의 이 말을 실존주의의 중요한 개념으로 쓴 사람은 카뮈이다. '부조리에 대한 시론'이라는 부제를 붙인 그의 시시포스의 신화에 의하면, 인생의 부조리란 인생이 무의미하고 희망이 없음을 의미하며, 부조리는 세계의 속성도 인간의 속성도 아니고 세계와 인간과의 관계 그 자체라고 한다. "눈부신 알제리의 한낮의 태양 빛 때문에 아라비아 인을 죽였다."고 한 '이방인'의 주인공은 인생의 부조리의 한 상징이다. 그런 부조리는 그 이해를 거절하는 것(세계)과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서 울리는 광적(狂的)인 명석한 이해에의 소망의 대결이다. 세계와 인간이라는 이 두 항목 중 어느 것도 폐기하지 않고 그 긴장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카뮈의 부조리다.(출처 : 박갑수 외 2인 공저 지학사 문학)
1950년대 한국 문학에 미친 영향
1950년대 한국 현대 작가치고 카뮈의 실존주의 사상에 물들지 않은 작가가 없을 정도로 1950년대 한국 문학에 있어서 그의 영향은 지대한 것이었다. 특히 한말숙, 장용학, 오상원, 송병수 등을 꼽을 수 있는데, 이들은 전쟁의 인간 살상과 인간성 타락의 현실을 목격한 공통된 목소리라고 평가된다. 한 도시에 엄습한 재앙이 인간의 생존을 말살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생이별하게 하는 파괴적인 모습은 전쟁과 다를 게 없다. 이 속에서도 부끄럽지 않은 인간상의 출현은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한 인간 정신의 혼이다. 따라서, '페스트'는 참담한 현실을 겪은 전후 한국 사회에 하나의 등불과도 같은 존재였다.(출처 : 박갑수 외 2인 공저 지학사 문학)
시지포스(Sisyphus) 신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코린토스의 왕으로 아이올로스인의 시조인 아이올로스와 에나레테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에피레(훗날의 코린토스)의 창건자이며, 사대제전경기회의 하나인 이스토미아 경기회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플레이아데스의 하나인 메로페와 결혼하여 글라우코스 등을 낳았다.
그리스신화 속에서 인간 가운데 가장 교활한 인물로 유명한데, 헤르메스로부터 들키지 않는 도둑 기술을 물려받은 아우톨리코스조차도 그를 속이지는 못하였다. 도둑질한 물건의 형태나 색깔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아우톨리코스는 시시포스의 소를 훔친 뒤에 모양과 색깔을 바꾸었지만, 시시포스가 미리 소 발굽에 찍어 놓은 표시 때문에 발각되었다. 시시포스는 이를 계기로 아우톨리코스의 딸 안티클레이아에게 접근하여 어울렸다. 이 때문에 안티클레이아가 라에르테스와 결혼하여 낳은 오디세우스는 사실은 시시포스의 아들이라는 이야기도 전한다.
어느 날 제우스가 아이기나를 유괴하는 것을 목격하고 아이기나의 아버지 아소포스에게 알려 주자 제우스가 이를 노여워하여 시시포스에게 죽음의 신을 보냈다. 그러나 시시포스는 죽음의 신을 속이고 가두어 군신(軍神) 아레스가 구출하러 올 때까지 아무도 죽은 사람이 없었다. 죽음의 신이 풀려나자 시시포스는 저승으로 가야만 했는데, 그는 이를 예측하고 아내 메로페에게 자신이 죽은 뒤에 장례식도 치르지 말고 시신을 묻지도 말라고 당부하였다.
저승의 신 하데스는 시시포스가 죽었는데도 메로페가 장례를 치르지 않자 시시포스 스스로 장례를 치르도록 지상으로 돌려보냈다. 또는 하데스의 아내 페르세포네가 지상으로 돌려보냈다고도 하고, 시시포스가 아내의 소홀함을 벌할 수 있도록 지상으로 되돌아가게 해 달라고 요청하였다고도 한다. 다시 지상의 세계로 돌아온 시시포스는 장수를 누렸다. 죽은 뒤에 신들을 기만한 죄로 커다란 바위를 산꼭대기로 밀어 올리는 벌을 받았는데, 그 바위는 정상 근처에 다다르면 다시 아래로 굴러 떨어져 형벌이 영원히 되풀이된다고 한다.(출처 : 동아대백과사전)
부조리의 철학
신들은 시지프에게 끊임없이 산꼭대기에까지 바위덩어리를 굴려 올리게 하는 형벌을 내렸다. 그러나 돌덩이는 그 자신의 무게로 해서 그 꼭대기에서 다시 굴러 떨어지곤 하였다. 그들이 무익하고도 희망 없는 일보다 더 끔찍한 형벌은 없다고 생각한 것은 일리가 있었다.
호머의 말에 의하면, 시지프는 인간 중에 가장 현명하고 또한 가장 신중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다른 설화에 의하면, 그는 강도의 직업에 종사하였다고 한다. 나는 여기에 모순이 없다고 본다. 그에게 지옥의 무익한 노동자가 되게 한 동기에 관해서는 의견이 구구하다. 첫째로 그는 신들을 경시했다고 비난을 받는다. 그는 신들의 비밀을 누설했다는 것이다. 아조프의 딸 에진은 주피터에게 납치당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이 실종에 놀라서 시지프에게 이를 호소하였다. 이 납치 사건을 알고 있던 그는 코린트 성에 물을 대준다는 조건으로 아조프에게 그 사실을 가르쳐 주겠노라고 제의했다. 하늘의 노여움보다도 그는 물의 은총을 택했던 것이다. 그것으로 인해 그는 지옥에서 벌을 받게 되었다. 호머는 시지프가 사신을 쇠사슬에 얽어맸다는 것도 또한 우리에게 이야기해 준다. 플루톤(지옥왕인 죽음의 신)은 황량하면서도 적요로운 자기 왕국의 모습에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전쟁의 신을 급파하여 사신(死神)을 그의 정복자의 손에서 해방시켰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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