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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오 바디스(Quo Vadis)(부제 : 네로 시대의 이야기) / 솅키에비치(Sienkiewicz)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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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오 바디스(Quo Vadis)(부제 : 네로 시대의 이야기) / 솅키에비치(Sienkiewicz)



 

<전략>

며칠 전부터 비니키우스는 집 밖에서 밤을 새우고 있었다. 아마 비니키우스는 또다시 뭔가 새로운 계획을 세워, 리기아를 에스퀼리누스 감옥에서 구출해 내기 위해 분주히 쏘다니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페트로니우스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이 잘못되지나 않을까 하여 아무것도 묻지 않기로 했다. 이 세련된 회의주의자도 이제는 어느 정도 미신을 믿게 되었다. 그렇다느니보다는, 마메르티누스 감옥에서 리기아를 탈옥시키는 데 실패한 후로는 자기의 행운을 믿지 않게 되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그는 이번에도 비니키우스의 노력이 좋은 성과를 거두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에스퀼리누스 감옥은, 지난번 화재 때 불길이 더 이상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파괴한 집들의 지하실을 서로 연결하여 황급히 만든 것으로 카피톨리움 언덕 근처에 있는 옛 툴리아눔 감옥만큼 무서운 곳은 아니었으나, 경비는 백 배나 더 엄중했다. 리기아가 이 곳으로 옮겨진 이유는, 그녀가 열병으로 죽으면 경기장에 내보낼 수 없어서임을 페트로니우스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매우 엄중하게 리기아를 감시하는 의도도 쉽게 알아챌 수가 있었다.

'그건 확실해. 황제와 티겔리누스는 뭔가 다른 것보다도 더 끔찍스러운 구경 거리를 위해 리기아를 붙잡아 둘 셈이군. 그렇다면 비니키우스는 그녀를 구출해 내기도 전에, 스스로 죽음을 택해야 하리라.' 하고 그는 생각했다.

비니키우스는 이미 리기아를 구출해 낼 수 있다는 희망을 잃고 있었다. 이제 그녀를 구해 낼 수 있는 것은 다만 그리스도밖엔 없었다. 젊은 호민관이 바라고 있는 오직 한 가지 일은, 감옥에서 그녀와 만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는 나자루스가 시체를 운반하는 인부가 되어 마메르티누스 감옥에 가 있다는 것을 얼마 전에 알고 난 후부터 마음이 조마조마해서 견딜 수 없었으나, 결국 자기도 그 방법을 시도해 보기로 했다.

막대한 뇌물을 주고 매수해 둔 '푸티쿨리'의 감독은, 마침내 시체 운반을 위해 매일 밤 감옥으로 보내는 인부들 틈에 비니키우스를 끼워 주었다. 사실 비니키우스가 들킬 염려는 거의 없었다. 어두운 밤과 노예의 복장과 감옥의 희미한 등불은 그의 정체를 숨기는 데 도움이 되었다. 게다가 아버지와 할아버지도 집정관이었던 명문 귀족인 그가, 감옥이나 '푸리쿨리'의 오염된 공기에 몸을 맡기고, 무덤을 파는 인부들 틈에 끼여 노예와 가난뱅이만이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노동을 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할 것인가?

기다리던 저녁때가 되자, 그는 기꺼이 힘을 내어 기름이 칠해진 후드가 달린 옷을 입고 가슴을 설레면서 인부들 틈에 끼여 에스퀼리누스로 향했다.   

 <중략>

비니키우스는 다시 리기아 곁에 무릎을 꿇었다. 창살문을 통해 스며들어 온 달빛은, 입구 가까이에 아직도 깜박거리고 있는 등불보다도 더 환하게 감방 안을 비우고 있었다.

리기아는 퍼뜩 눈을 뜨더니, 불같이 뜨거운 손바닥을 비니키우스의 손에 얹으며 이렇게 말했다.

"아아, 당신이군요! 저는 당신이 오시리라고 믿고 있었어요."

비니키우스는 재빨리 그녀의 두 손을 잡아 자기의 이마와 가슴에 갖다 댄 후에 그녀를 제 가슴에 껴안았다.

"내가 왔소, 리기아. 당신 위해 그리스도의 가호와 구원이 내리기를 빌겠소. 사랑하는 리기아."

하고 그는 말했다.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마음 속으로 고통과 사랑 때문에 흐느끼고 있었지만, 그 고통을 그녀에겐 보이고 싶지 않았던 거이다.

"마르쿠스, 저는 몸이 아파요. 경기장이나 이 감옥에서 죽을 거예요. 하지만, 그 전에 당신을 만날 수 있도록 기도를 드렸어요. 그래서 와 주셨군요. 그리스도께서는 제 기도를 들어 주신 거예요."

하고 리기아는 말했다.

비니키우스는 아직도 말을 하지 못하고, 다만 그녀를 껴안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말을 이었다.

"툴리아눔의 창문을 통해서 자주 당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어요. 그래서 당신이 저에게 오고 싶어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주님께서는 두 사람이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눌 수 있도록 저를 잠깐 동안 정신을 차리게 해 주셨어요. 저는 곧 주님의 품 안으로 돌아갈 거예요. 하지만 마르쿠스, 저는 당신을 사랑해요. 언제까지나 사랑하겠어요."

비니키우스는 가까스로 마음의 슬픔을 억제하여 목소리를 낮추려고 애를 쓰면서 말했다.

"아니오. 당신은 죽지 않소. 사도님께선 날더러 믿으라고 말씀하시면서, 자기도 당신을 위해 기도하겠다고 약속하셨소. 사도님은 그리스도를 직접 보았고, 그리스도도 그분을 사랑하고 있었으니, 그분의 기도는 어떤 일이라도 들어 주시지 않을 리가 없어요. 당신이 죽을 운명이라면, 베드로님은 제게 희망을 가지라고 말씀하셨을 리가 없어요. 그분은, '희망을 가지십시오.'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래요, 리기아. 그리스도는 저를 불쌍히 여기실 겁니다. 그러니 당신이 죽기를 바라고 있지 않소. 구세주의 이름을 두고 맹세하겠소. 베드로님은 당신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침묵이 흘렀다. 입구에 하나밖에 없는 등잔불은 꺼졌으나, 달빛이 창살문을 통해서 가득히 비쳐 들고 있었다. 감방의 맞은편 구석에서 어린아이 하나가 훌쩍훌쩍 울고 있었는데, 한참만에야 울음을 그쳤다. 감방 밖에서는 불침번을 끝내고, 벽 아래에서 놀이에 열중하고 있는 친위병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을 뿐이었다.

"마르쿠스, 그리스도 자신은 아버지이신 하느님에게, '이 쓴 잔을 제게서 거두워 주옵소서.'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런데도 마시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셨지만, 지금 몇 천 명의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위해 죽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께서는 저 혼자만을 살려 주실 수 있겠어요? 베드로님은, 자기 자신도 고통을 받으며 죽어 갈 것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분에 비하면, 저는 아무것도 아니예요. 우리들에게 친위병들이 찾아왔을 때는 죽음이나 고문을 두려워했지만, 이젠 조금도 무섭지가 않아요. 보시다시피 이 곳은 무서운 감옥이에요. 하지만 저는 천국으로 가고자 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 지상에는 황제가 있지만, 하늘에는 친절하시고 자비로우신 구세주님이 계십니다. 게다가 죽음이란 존재하지도 않아요. 당신은 저를 사랑하고 있어요. 그러니 생각해 보세요. 이제부턴 제가 얼마나 행복하겠는가를. 사랑하는 마르쿠스, 생각해 보세요. 당신도 언젠가는 그 곳으로, 제가 있는 곳으로 오실 거예요."

하고 리기아는 말했다.

그녀는 숨을 돌리기 위해 말을 더듬거리더니, 그의 손을 잡아서 자기 입술에 갖다 댔다.

"마르쿠스!"

"왜 그러오, 리기아?"

"저 때문에 울지는 마세요. 당신도 그 곳으로, 제가 있는 곳으로 오시리라는 걸 잊지 마세요. 제 일생은 아주 짧았지만, 하느님은 저에게 당신의 영혼을 주셨어요. 그러니 제가 그리스도를 만나면 이렇게 말씀드릴 거예요. 저는 죽지만, 당신은 제가 죽는 것을 보시면서 슬픔 속에 홀로 남게 되더라도, 당신은 하느님의 뜻을 모독하는 말은 한 번도 하시지 않았고, 지금도 주님을 사랑하고 있다고요. 그런데 당신은 언제나 주님을 사랑하시고, 제 죽음에 대해서 인내로써 견디어 내시겠지요? …… 때가 되면 주님은 우리 두 사람을 결합시켜 주실 거예요. 저는 언제까지나 당신을 사랑해요. 그리고 당신과 함께 영원의 나라에서 살고 싶어요."

여기서 또다시 숨이 찼으므로, 그녀는 거의 들리지 않는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끝냈다.

"마르쿠스, 약속해 줘요."

비니키우스는 떨리는 두 손으로 그녀를 껴안고 말했다.

"당신의 신성한 주님의 이름으로……약속하겠소."

"저는 당신의 아내예요."

벽 너머에서는 주사위 놀이를 하고 있는 친위군의 병사들이 큰 소리로 입씨름을 벌이고 있었으나, 두 사람은 자기들이 감옥에 있다는 것도, 병사들이 있다는 것도, 이 세상마저도 잊고 서로가 상대방 마음 속에 천사의 영혼이 깃들여 있다는 것을 느끼며 기도하기 시작했다.

 <중략>

페트로니우스는 비니키우스의 얼굴에서 이제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안정감과, 어떤 불가사의한 빛을 발견하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때로는 비니키우스가 뭔가 새로운 구출 방법을 찾아 내지나 않았나 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가 그 계획을 자기에게 털어놓지 않는 것을 불쾌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는 마침내 참지 못하고 이렇게 말했다.

"너는 요즈음 많이 달라졌구나. 내게 숨길 건 없다. 나는 너를 도와 주려 하고 있고, 또 그런 능력도 있으니까 말이다. 무슨 계획이라도 있느냐?"

"있습니다. 그러나 이젠 도와 주실 수가 없습니다. 그녀가 죽은 뒤, 저는 제가 그리스도 교도란 것을 고백하고, 그 사람 뒤를 따를 테니까요."

하고, 비니키우스는 대답했다.

"그럼, 모든 희망을 포기했단 말이냐?"

"아닙니다.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그녀를 제게 돌려 줄 겁니다. 그러면 그녀와 영원히 이별하지 않아도 됩니다."

페트로니우스는 자못 실망한 것 같기도 하고, 답답한 것 같기도 한 표정으로 아트리움 안을 왔다갔다 했다.

"그렇다면 너희들에게는 그리스도가 필요 없지 않느냐? 우리들의 타나토스도 너를 위해 그 정도의 일은 해 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비니키우스는 서글프게 웃으며 말했다.

"그건 다릅니다. 하지만 외숙께선 그걸 알고 싶어하시지도 않습니다."

"난 알려고도 하지 않고, 알 수 있는 능력도 없다. 지금은 토론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그러나 너는 우리가 리기아를 툴리아눔에서 구출해 내지 못했을 때 뭐라고 했는지 기억하고 있겠지? 난 모든 희망을 잃었다. 그러나 너는 나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을 때, '저는 그리스도가 리기아를 제게 돌려 주실 힘이 있다고 믿습니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게 돌려 달라고 부탁하면 되지 않느냐? 만일 내가 값비싼 잔을 바닷속에 던졌다고 하면, 그것을 내게 돌려 줄 힘이 있는 신은 우리의 신들 중에는 하나도 없다. 그러나 만일 너희들 신에게도 그런 힘이 없다고 하면, 어째서 그 신을 오래된 신들 이상으로 숭배할 필요가 있는 건지 나로선 모르겠다."

하고, 페트로니우스는 말했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돌려 주십니다."

하고, 비니키우스는 대답했다.

"너는 알고 있니? 내일은 그리스도 교도들을 황제의 정원에서 화형(火刑)시킨다는 것을."

하고, 그는 물었다.

"내일이라고요?"

하고, 비니키우스는 놀라며 물었다.

눈앞에 다가온 무서운 현실에 직면하자, 그의 마음은 고통과 공포로 떨렸다. 리기아와 함께 지낼 수 있는 밤은 오늘이 마지막일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한 그는 페트로니우스에게 작별을 고하고는, 허가증을 받기 위해 서둘러 '푸티쿨리'의 감독에게 갔다.   

<후략>



요점 정리

지은이 : 솅키에비치(Sienkiewicz)/김상일 옮김

갈래 : 장편 소설. 역사 소설

 배경 : 시간(로마 시대 네로 황제 때). 공간(로마), 광기와 음란으로 세월을 보내는 네로, 그리스도의 신앙을 전파하는 사도 베드로와 바울로…. 이러한 사회적 배경

특징 : 실제 인물과 가상의 인물의 조화로 허구와 실제 인물들이 연관을 가지면서 소설을 구성해 간다.

제재 : 그리스도교 탄압

주제 : 박해 받는 민족의 어둡고 고달픈 운명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줄거리 : 로마의 귀족 청년 비니키우스는 인질로 잡혀 온 그리스도 교도 리기아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한눈에 반한다. 그는 네로 황제의 총신(寵臣)이자 숙부인 페트로니우스에게 부탁해 리기아를 집에 데려오려 하는데, 도중에 그리스도 교도들이 그녀를 데리고 가자 되찾으러 간다. 하지만 그 곳에서 그리스도 교도들로부터 간호를 받으며 대화재가 발생하자. 한동안 헤어졌던 두 사람은 다시 만나 약혼을 하고, 비니키우스는 그리스도 교도가 된다. 네로는 로마의 화재에 대한 책임을 그리스도 교도에게 뒤집어씌워 대학살을 시작한다. 리기아도 위험에 처하지만, 우르수스의 도움으로 살아 남는다. 이어 병사들의 반란으로 네로는 자살하고, 비니키우스와 리기아는 시칠리아의 한 섬에서 행복한 생활을 시작한다.

의의 : 정의와 진리는 승리한다는 것을 호소하여 박해받는 폴란드 민족의 운명에 희망의 불길을 밝혀준 애국적 역사소설이다.

 

내용 연구

호민관(護民官/tribunus) : 고대 로마에서 군사적인 문제를 처리하거나 시민들을 위해 일했던 관리

집정관(執政官) : 고대 아테네, 로마 공화정 시대의 최고 행정관.

후드 : 머리에 쓰는 두건 모양의 물건

타나토스(Thanatos) : 죽음의 신

 

이해와 감상

 이 소설은 정의와 진리는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 줌으로써 박해받는 폴란드 민족에게 희망을 준 작품이다. 페트로니우스, 네로, 바울, 베드로 등 실제 인물이 비니키우스와 리기아 등의 허구의 인물들과 연관을 가지면서 이 소설을 구성해 나간다. 이들 실제 인물의 행동은 문헌에 나와 있는 것을 참조하였지만, 행동의 동기를 이루는 심리 묘사는 작자의 자유 분방한 상상력의 산물이다.(출처 : 김봉군 최혜실 공저 지학사 문학)

이해와 감상1

 "쿠오 바디스"란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의 뜻으로 솅키에비치의 대표적 작품으로 1896년 발표된 장편 소설이다. 작가 솅키에비치의 모국인 폴란드의 암울한 시기에 폴란드 민족에게 희망을 준 작품이다. 1세기 로마에 있어서의 고대 세계관과 그리스도 신앙 사이의 투쟁의 역사를 배경으로 사건이 전개된다. 로마 시대의 실제 인물(페트로니우스, 타키투스)과 가상의 인물(비니키우스와 리기아) 등이 등장하여 허구의 인물과 연관을 가지면서 소설을 구성해 나간다. 실제 인물의 행동은 문헌에 나와 있는 것을 참조했지만 행동의 동기를 이루는 심리 묘사는 작자의 자유 분방한 상상력의 산물이다. 1905년 작자는 이 작품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정의와 진리는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 줌으로써 박해받는 폴란드 민족에게 희망을 준 작품이다.

이해와 감상2

 Quo Vadis는 라틴어로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는 뜻으로 폴란드의 작가 헨리크 솅키에비치의 장편소설(1896)로 제목은 소설의 에필로그에서 사도 베드로가 로마 교외에서 그리스도의 환영(幻影)을 보고 한 말을 인용한 것이다. '네로 시대의 이야기'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1세기의 로마를 배경으로 고대의 헬레니즘과 그리스도교의 투쟁을 묘사했다. 로마의 귀족 청년 비니키우스는 인질로 잡혀온 그리스도교도 리기아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한눈에 반한다. 그는 네로 황제의 총신(寵臣)이자 숙부인 페트로니우스에게 부탁해 리기아를 집에 데려오려 하는데 도중에 그리스도교도들이 그녀를 데리고가자 되찾으러 간다. 하지만 리기아의 충복인 우르수스에게 부상을 당하고 그곳에서 그리스도교도들로부터 간호를 받으며 리기아와 사랑하게 된다. 한편 네로의 방화로 로마에 대화재가 발생하여 한동안 헤어졌던 두 사람은 다시 만나 약혼을 하고 비니키우스는 그리스도교도가 된다. 네로는 로마의 화재에 대한 책임을 그리스도교도에게 뒤집어씌워 대학살을 시작한다. 리기아도 원형광장에 끌려나와 물소의 먹이가 될 위험에 처하지만, 우르수스의 도움으로 살아남는다. 이어 병사들의 반란으로 네로는 자살하고 비니키우스와 리기아는 시칠리아의 한 섬에서 행복한 생활을 시작한다.

 이 소설은 정의와 진리는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박해받는 폴란드 민족에게 희망을 주었으며, 솅키에비치는 이 작품으로 1905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이 소설은 1912년 이탈리아의 엔리코 구아초니 감독에 의해 9권(reel)의 초대형 무성영화로 제작되었고, 1951년 다시 미국의 멜빈 르로이 감독에 의해 로버트 테일러, 데보라 카, 피터 유스티노프 주연의 영화로 제작되었다. (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이해와 감상3

 1896년에 발표. 제명은 라틴어로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의 뜻으로서 사도 베드로가 십자가로 끌려가는 그리스도에게 한 말이다. ‘네로 시대의 이야기’란 부제가 말해주듯이 1세기의 로마에서의 고대적 세계관과 그리스도교 신앙의 투쟁이라는 흥미있는 역사적 대사건이 배경이다.

 광기와 음란으로 세월을 보내는 네로, 그리스도의 신앙을 전파하는 사도 베드로와 바울로…. 이러한 사회적 배경 속에서 청년 귀족 비니키우스는 열렬한 그리스도 신자인 소녀 리기아를 사랑한다. 로마 귀족의 이상형이라고 할 총신(寵臣) 페트로니우스는 조카 비니키우스를 위하여 네로에게 더욱 밀착하려 한다. 네로는 몰래 로마에 불을 지르고 그 죄를 그리스도교도에게 씌우려 한다. 신자의 대학살이 시작되고 리기아도 붙잡혀 결박되어 물소에게 죽게 되나 충복 우르수스가 괴력으로 물소를 죽이자 감동한 신하들의 간청으로 리기아는 목숨을 구한다. 베드로와 바울로도 모두 순교하고 페트로니우스도 죽음으로 몰리게 되지만, 군대의 반란이 일어나 모든 신하에게 버림을 받은 네로는 스스로 목을 찌르고 죽는다.

 정의와 진리는 승리한다는 것을 호소하여 박해받는 폴란드 민족의 운명에 희망의 불길을 밝혀준 애국적 역사소설이다. 이 작품으로 1905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다. 한국에서도 여러 출판사가 번역 ·출간하였으며 영화도 수입 ·상영되었다. (출처 : 동아대백과사전)

 

심화 자료

솅키에비치(Sienkiewicz)Henryk (Adam Alexander Pius) Sienkiewicz

 필명은 Litwos. 1846. 5. 5 폴란드 볼라오크제이스카~1916. 11. 15 스위스 브베. 폴란드 소설가로 높은 인기를 누렸고 1905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바르샤바대학교에서 문학·역사·철학을 공부했으나 1871년 중퇴했다. 이미 1869년부터 실증주의의 영향이 보이는 비평을 출판하기 시작했는데, 실증주의는 당시 폴란드 등지에서 유행한 철학사조로 특히 과학이 이룬 성과를 강조했다. 1872년 첫 장편소설인 〈헛되이 Na marne〉를, 1875년 첫 단편소설인 〈늙은 하인 Stary suga〉을 발표했다. 〈가제타 폴스카 Gazeta polska〉의 특파원 자격으로 미국을 여행했고(1876~78),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거쳐 폴란드에 돌아온 뒤 많은 단편소설을 출판해 성공을 거두었다. 이중에는 〈음악가 얀코 Janko Muzykant〉(1879)·〈등대지기 Latarnik〉(1882)·〈정복자 바르테크 Bartek Zwyciezca〉 (1882) 등이 있다. 1882~87년 일간지 〈수오보 Sowo〉의 공동편집자로 일했다. 1900년에는 작가생활 30주년 기념으로 폴란드 국민들로부터 키엘체 근처 오블레고레크의 조그만 땅을 받아 1914년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제1차 세계대전중 폴란드 독립운동을 지원했고 폴란드의 전쟁희생자들을 위해 구제활동을 폈다.

 1883년에는 위대한 3부작 역사소설을 〈수오보 Sowo〉지에 싣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불과 칼로써 Ogniem i mieczem〉(1884)· 〈대홍수 Potop〉(1886)· 〈판 보우오디요프스키 Pan Woodyjowski〉(1887~88)로 구성되어 있다. 17세기 후반을 배경으로 쓴 이 3부작은 서사시적인 간결명료함을 갖춘 생동감 있는 문체를 통해 폴란드인의 영웅적 자질을 강조하면서 코사크·타타르·스웨덴·투르크인에 대한 폴란드인의 투쟁을 그렸다. 이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은 제1부인 〈불과 칼로써〉이며, 보그단 흐멜니츠키가 이끄는 자포로지예 카자크의 반란을 저지하려는 폴란드인의 노력을 그렸다. 그밖의 장편소설로는 네로 황제 치하의 로마를 배경으로 쓴 역사소설 〈쿠오바디스? Quo Vadis?〉(1896)가 있다. 이 책은 널리 번역되어 국제적인 명성을 안겨주었다. 그의 주요작품들은 과장이 많고 역사적 정확성이 부족하다는 비평을 받았지만, 서술 능력이 뛰어나며 인물들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문학과 종교(宗敎)

(전략)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종교적 교리의 주장들과 감각적 표현의 주장들 사이에는 관심의 충돌이 생기게 된다. 다시 말하면 신앙과 예술 사이에는 투쟁이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특히 종교는 그 종말론적 비약에 있어서 추상화(抽象化), 교리(敎理)화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는 반면, 문학은 그의 힘을 주로 표현의 박진(迫眞)감과 경험, 내용에 대한 추상적(抽象的) 충실성으로부터 끄집어 내는 것이다. 종종 문학 작품의 내면적 긴장의 원천을 제공하는 것은 이 양극을 조화시키려는 노력이다.

(중략)

 한편 문학에서 종교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인가 할 때, 첫째 종교적 교리나 교훈을 직설적으로 그리는 경우와, 둘째는 반종교적 위치에서 다루는 경우와, 셋째는 변죽만 울려서 간접적으로 그리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종교문학이라 할 때에는 첫 번째의 태도를 취하겠지만, 본격문학의 경우에는 작품(作品)속에 종교가 융해되고 형상화되도록 해야 함은 물론이다. 도스토예프스키나 릴케 문학(文學)이 심히 종교적이면서도 순수문학으로 성공한 이유는 그들이 교리(敎理)의 옹호나 종교적 교훈을 목적하지 않고 인생의 진실을 그려서 독자를 감동시켰기 때문이다. (출처 : 구인환 구창환 공저 신고 문학개론)

 

회의주의(懷疑主義/skepticism)

여러 영역에서 주장하는 지식에 대해 의심을 품는 철학적 태도로 회의주의자들은 이런 주장이 어떤 기초에 입각해 있으며 실제로 무엇을 확립하는지 물음으로써 그 주장의 적합성 또는 신뢰성에 도전해왔다. 고대부터 회의주의자들은 독단적인 철학자·과학자·신학자의 주장을 비판하는 논증을 전개해 왔다. 온갖 독단주의에 반대하는 회의주의자들의 논증은 서양철학사에 등장하는 여러 철학 문제와 그 해결책이 형성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다양한 의미와 용법

회의주의는 지식을 형성하는 온갖 분야에 걸쳐 전개되었다. 예를 들어 형이상학이나 과학 분야에서는 확실한 지식의 획득 여부가 문제시되었다. 의학에서는 질병의 원인과 치료법에 관한 확실한 지식의 획득이, 윤리학에서는 규범·관습의 수용과 가치 판단의 객관적 기준이, 종교에서는 전통을 달리 하는 교리들이 회의주의의 의심을 받았다. 또 흄이나 칸트와 같은 철학자들은 경험 세계의 배후, 즉 현상의 원인에 대해서는 어떠한 지식도 얻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회의주의의 대표적 형태는 지식 일반에 관한 것으로 인식론적 회의주의라고 불리며 어떤 것이 과연 완전하고 충분한 확실성을 갖고 우리에게 알려지는가를 문제삼는다. 인식론적 회의주의는 의심이 일어나는 영역, 즉 의심이 이성을 향하느냐, 감각을 향하느냐, 사물 자체의 인식을 향하느냐에 따라 그 종류가 구분될 수 있고, 의심하는 사람의 동기, 이를테면 이데올로기적 이유인가, 실용적이거나 실천적인 이유인가에 따라서도 구분될 수 있다. 또 회의주의는 얼마나 엄격하고 철저한가에 따라, 즉 특정 영역 및 지식을 대상으로 하느냐 아니면 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것이냐에 따라 그 종류가 구분될 수도 있다.

고대의 회의주의

소크라테스 이전 시대에 엘레아 학파는 변화하는 다자(多者)의 세계, 곧 감각 세계의 실재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실재를 일상 경험의 범주로 기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반면 헤라클레이토스와 그의 제자 크라틸로스는 세계가 끊임없는 유동 상태에 있기 때문에 세계에 대한 영구불변의 진리는 결코 발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또 크세노파네스는 참된 지식과 거짓된 지식을 구별할 수 있다는 생각에 의심을 품었다.

소크라테스와 2명의 소피스트에 이르러 회의주의는 더욱 발전된 모습으로 나타났다. 다른 사람들이 주장하는 지식에 늘 의문을 제기한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의 초기 대화록 〈변명 Apologia〉에서 자신이 정말로 아는 것이라고는 자기 자신이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와 경쟁관계에 있던 소피스트 프로타고라스는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고 주장하면서 궁극적으로 참된 견해란 절대로 있을 수 없고 모든 견해는 인간 각자의 의견일 뿐이라는 회의주의적 상대주의를 피력했다. 나아가 또다른 소피스트 고르기아스는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혹 그런 것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나아가 알 수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남에게 전달할 수가 없다고 함으로써 회의주의에 바탕한 허무주의적 회의주의 철학을 표방한 최초의 학파는 BC 3세기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에서 발전한 '아카데메이아' 회의주의 학파였다. 이 학파를 이끈 아르케실라우스와 카르네아데스는 주로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에 맞서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기준이 있다는 생각을 거부하고, 대신에 어떤 지식이 이성에 입각한 것이냐 아니면 추정에 입각한 것이냐를 알 수 있는 표준만이 있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같은 제한된 개연적 회의주의는 키케로가 아카데메이아의 학생이던 BC 1세기까지 이 학원의 견해였다. 고대 회의주의의 또다른 주요형태는 피론주의였다. 아이네시데무스에 의해 시작된 이 운동은 아카데메이아 회의주의자들을 비판했는데, 그 까닭은 아카데메이아 회의주의자들이 아무 것도 알 수 없다고 하면서도 어떤 것은 다른 것보다 더 개연성이 많다고 하는 등 사실상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피론주의자들은 나아가 다양한 종류의 지식에 반대하는 일련의 방법으로 판단중지(epoch)를 제시했다. 피론주의적 태도는 피론주의의 마지막 지도자 섹스토스 엠피리코스의 저작 〈피론주의 개관 Outlines of Pyrrhonism〉·〈수학에 반대하여 Adversus mathematicos〉 등에 담겨 있다. 섹스토스 엠피리코스는 자신의 주장이 사람들을 평정(ataraxia) 상태로 이끄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고 말했다. 실재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늘 불안하고 좌절했으며, 판단중지에 이를 수 있다면 마음의 평화를 찾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중세의 회의주의

그리스도교의 권위가 절정에 달한 중세에는 회의주의가 주로 아카데메이아 회의주의의 형태로 연명했다. 〈아카데메이아 학파에 반대하여 Contra academicos〉에서 아카데메이아 회의주의를 묘사한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키케로의 견해에 매력을 느꼈으나 계시를 통해 그 견해를 극복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앙으로써 인식을 얻으려 했다. 서유럽보다 고대의 학문을 더많이 접한 이슬람 치하의 스페인에서는 반(反)합리주의적 형태를 띤 회의주의가 알 가잘리 등 이슬람 신학자들과 유다 하 레비 등 유대 신학자들 사이에서 발전했다. 특히 유다 하 레비는 사람들이 신비적 신앙 속에서 종교적 진리를 받아들이도록 회의주의에 입각하여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을 공격했다.

근대 회의주의

근대 회의주의는 16세기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 불러일으킨 지적 위기와 회의주의적 고전들의 재발견에서 비롯했다.

종교개혁

종교개혁에 의해 제기된 회의주의적 쟁점은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와 루터 사이의 논쟁에서 나타났다. 에라스무스는 아카데메이아 회의주의의 자료를 이용, 논쟁중인 쟁점들은 결코 해결될 수 없으므로 우리는 그것을 판단중지하고 교회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루터는 참되고 확실한 종교적 지식은 양심을 통해 얻을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에라스무스의 견해는 종교적 지식에는 적절한 증거가 없으므로 신앙에 의존해야 한다는 전통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면서 그리스도교 회의주의를 발전시켰고, 루터의 견해는 훗날 칼뱅의 견해와 더불어 내적 체험이라는 새로운 기준을 마련했다. 에라스무스의 뒤를 이어 인문주의자 조반니 피코 델라 미란돌라 2세와 주술적 신비주의 철학자이자 의사인 H. C. 아그리파는 스콜라주의와 르네상스 자연주의, 그리고 인간을 '참된 종교'로 인도한다는 다른 많은 견해에 대항하여 회의주의의 주장을 피력했다. 가톨릭 학자 장티앙 에르베는 1569년 자신이 편집한 섹스토스 엠피리코스에 관한 책의 서문에서 회의주의의 주장이 칼뱅주의에 대한 결정적인 답변이자 진정한 그리스도교에 이르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17세기

회의주의에 대한 새로운 관심은 미셸 드 몽테뉴와 그의 사촌 프란시스코 산체스 몽테뉴에 의해 철학적으로 일반화된 모습을 띠고 나타났는데, 두 사람은 모든 영역에서 인간이 주장하는 지식은 극히 의심스럽다고 주장했다. 미셸 드 몽테뉴는 자연과 관습에 따라 살면서 신이 계시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받아들일 것을 권했고, 프란시스코 산체스 몽테뉴는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점을 인정하는 선에서 극히 제한된 경험과학적 정보를 획득하는 데 노력할 것을 옹호했다. 미셸 드 몽테뉴의 회의주의는 17세기초에 깊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피에르 샤롱, J.P. 카뮈, 라 모트 르 바이예 등이 미셸 드 몽테뉴의 견해를 널리 퍼뜨렸으며, 많은 반종교개혁가들이 칼뱅주의를 공격하기 위해 미셸 드 몽테뉴와 섹스토스 엠피리코스의 주장을 이용했다. 미셸 드 몽테뉴의 회의주의는 새로운 과학을 포함한 온갖 종류의 학문 분야를 반대하고 경건주의와 결합했다.

1620년대에는 이러한 새로운 회의주의를 반박하거나 완화하려는 노력이 나타났다. 원래 회의주의자였던 에피쿠로스주의자 피에르 가생디와 당시 지적 혁명에 매우 큰 영향을 끼친 마랭 메르센은 실재에 관한 지식을 인식론적으로 의심하면서도 과학이 세계에 관한 쓸모 있고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고 인정했다. 가생디와 메르센의 건설적 회의주의는 산체스 몽테뉴의 태도를 새로운 과학에 대한 가설적·경험적 해석으로 발전시켰다. 르네 데카르트는 새로운 회의주의를 근본적으로 반박했다. 데카르트는 거짓일지도 모르는 모든 믿음을 의심하는 회의적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우리는 정말로 의심할 수 없는 하나의 진리, 곧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를 발견할 수 있으며 또 이러한 진리로부터 참된 지식의 기준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우리는 이러한 기준을 사용함으로써 신 존재, 즉 신이 우리를 기만하지 않고 우리의 명석·판명한 관념을 보증하는 존재임을 확신할 수 있으며, 외부 세계의 존재와 아울러 수학적 자연학을 통해 세계를 알 수 있다고 했다. 데카르트는 회의주의에서 출발하여 실재의 지식에 대한 새로운 토대를 찾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7세기 전체를 통해 메르센, 가생디, 시몽 푸세, 피에르 다니엘 위예 등 회의주의적 비판가들은 데카르트의 회의적 방법을 철저히 밀고 나가면 그의 새로운 체계가 완전한 회의주의에 이를 수밖에 없음을 보여줌으로써 그의 시도가 성공적이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로크를 비롯한 영국의 철학자들은 인간이 '합리적' 존재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의심하기란 블가능하다는 상식에 호소하여 회의주의를 약화하려 애썼다. 직접적인 경험을 넘어선 지식을 지지하는 충분한 증거가 없다고 해서 모든 것이 의심스러운 것은 아니며, 상식이라는 기준을 사용할 경우 우리의 많은 믿음은 적절한 기초를 가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팡세 Pensees〉에서 회의주의를 아주 강하게 드러낸 블레즈 파스칼도 완전한 회의주의란 있을 수 없다고 했다. 파스칼에 따르면 완전한 회의주의에 대해 결코 이성적인 대답을 할 수 없는 인간은 신의 도움만을 받아 의심을 극복해야 한다. 17세기 회의주의는 피에르 벨의 저술, 특히 〈역사적·비판적 사전 Dictionnaire historique et critique〉(1697~1702)에서 최고조에 이르렀다. 탁월한 변증론가인 벨은 고대·근대의 철학·과학·신학 이론들이 혼란·역설·모순 등에 귀착한다면서 그 이론들에 도전했다. 또 회의주의에 입각해 분석할 경우 데카르트·라이프니츠·스피노자·말브랑슈 등의 이론은 세계에 관한 모든 정보, 심지어 세계의 존재까지도 의문시한다고 주장했다. 벨은 모든 영역에서 인간의 지적 활동의 신뢰성을 약화하기 위해 감각적 정보, 인간의 판단, 논리적 설명 등에 대한 회의주의의 주장을 능숙하게 이용했다. 벨은 인간이 이성적 활동을 포기하고 신앙과 계시에 맹목적으로 의지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래야만 인간은 참된 신앙을 결정하는 아무런 기준 없이 자신의 양심만 따를 수 있다는 것이다.

18세기

18세기 사상가들은 대개 베일의 주장을 받아들이면서 형이상학적 지식에 대한 요구를 포기했다. 경험론자이자 관념론자인 조지 버클리는 현상과 실재를 동일시하고 유심론적 형이상학을 제시함으로써 회의주의에 대항했다. 그러나 경험을 초월한 세계를 부정했기 때문에 또다른 회의주의자로 여겨졌다. 벨을 계승한 18세기의 주요인물은 데이비드 흄이었다. 경험론과 회의주의를 결합한 흄은 귀납적 증거와 연역적 증거 둘다 사실의 진리를 확립할 수 없다고 비난했다. 지식은 경험을 초월해서는 성립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경험 안에서 어떤 필연적 관련이나 경험의 근원을 찾을 수 없다. 세계에 대한 믿음은 이성이나 증거에 기초하지도 않고 자연의 제일성(齊一性)에도 호소하지 않으며 단지 습관과 관습에 의존할 따름이다. 즉 믿음은 정당화될 수 없다. 외부세계·자아·신 등이 존재한다는 믿음은 일상적이지만 이러한 믿음을 뒷받침하는 적절한 증거는 하나도 없다. 인간은 믿음을 토대로 세계를 과학적으로 기술할 수 있지만 만일 그 믿음을 정당화하려 한다면 완전한 회의주의에 이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자연은 인간이 이렇게 완전한 회의에 빠지는 사태가 발생하기 전에 인간에게 정당화될 수 없는 믿음, 즉 상식을 회복하도록 해준다. 흄의 이러한 신앙주의는 종교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자연적인 것이었다.

귀납과 인과성의 기초, 외부세계와 자아에 관한 지식, 신 존재 증명 등 흄의 회의주의적 분석의 중심 주제는 그뒤 철학의 핵심 쟁점이 되었다. 토머스 리드는 흄의 회의주의가 데카르트에게서 시작하는 근대 철학의 근본 가정이 낳은 논리적 결과라고 논박했다. 그리고 이 불행한 재앙을 초래하는 근본 가정은 상식적 원리를 위해서 포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흄과 칸트가 지적한 것처럼 리드는 흄의 회의주의에 직접 대답하지 않고 상식적인 삶에 호소함으로써 핵심을 비켜나갔을 뿐이었다. 즉 그는 믿음에 대한 이론적 기초를 제공한 것도 아니었고 믿음을 의심하는 주장에 대해 반박한 것도 아니었다. 칸트는 흄이 인간의 모든 지식에 근본적으로 도전했다고 보았다. 흄의 회의주의에 대답하기 위해 밝혀야 할 점은 지식이 가능하다는 사실보다는 지식이 '어떻게' 가능하냐는 문제였다. 칸트는 형이상학적 지식에 대해서는 회의주의를 표명한 반면 경험적 지식은 어떤 보편적·필연적 조건들을 갖는다고 주장했다. 즉 이 조건들에 의해 모든 가능한 경험의 형식인 시간·공간과 범주에 대한 참된 인식이 성립할 수 있으며, 이 형식을 모든 가능한 경험을 초월한 세계에 적용하면 모순과 회의주의에 이르게 된다. 칸트에 따르면 물자체, 즉 경험의 원인에 대한 인식은 불가능하다.

칸트는 자신이 회의주의의 문제를 해결했다고 생각했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의 철학이 회의주의의 신기원을 열었다고 평가했다. 칸트주의에 대한 저명한 비판가 G.E. 슐체는 칸트의 이론에 따를 경우 사물에 대한 객관적 진리를 인식할 수 없다고 주장했고, 유대인 비판가 잘로몬 마이몬은 설사 선천적 개념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경험에 적용하면 항상 문제가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칸트에 대한 또다른 회의주의적 비판가 J.G. 하만은 흄과 칸트의 철학이 신앙주의에 새로운 기초를 제공한다고 보았다. 즉 실재에 대한 인식을 이성적 수단으로 얻을 수 없다면 우리는 신앙에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다. 하만은 흄의 노력에 기초하여, 칸트에게 신앙주의적 그리스도교도가 되라고 설득하는 가운데 반(反)합리적 회의주의를 제시했다.

현대철학

비합리적 회의주의는 19세기 쇠렌 키에르케고르에 의해 실존주의로 발전했다. 키에르케고르는 전통 회의주의를 이용하여 헤겔주의와 자유주의적 그리스도교를 공격하면서 신앙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키에르케고르에 따르면 정당화되지도 않고 정당화될 수도 없는 '신앙에의 도약'만이 확실성을 보장해준다. 근대 신정통 신학자와 실존주의 신학자는 회의주의가 인간이 신앙과 신에의 헌신을 통하지 않고서는 궁극적 진리를 결코 발견할 수 없다는 점을 극명하게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실존주의 작가 알베르 카뮈는 이러한 견해를 비종교적 형태로 전개한 사람이었다.

그밖의 회의주의의 여러 종류는 다양한 형태의 현대철학 속에 나타나 있다. 영국의 관념론자 F. H. 브래들리는 자신의 저서 〈현상과 실재:형이상학 소론 Appearance and Reality:A Metaphysical Essay〉에서 고전적 회의주의를 이용, 세계는 경험론이나 유물론으로는 이해할 수 없으며 참된 지식은 현상 세계를 초월함으로써만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비판적 실재론자 조지 산타야나는 〈회의주의와 동물적 신념 Scepticism and Animal Faith〉에서 자연주의적 회의주의를 제시했다. 직접적이거나 직관적인 경험에 의거한 해석은 모두 의문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 인간은 생물학적·사회적 요소에 따라 '동물적 신앙'으로써 세계를 해석한다. 그결과로 얻어지는 믿음은 비록 정당화되지 않고 터무니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인간이 세계의 풍부함을 유지·발견하도록 해준다. 회의주의의 유형은 논리실증주의와 다양한 형태의 언어철학에서도 나타난다. 물리학자이자 초기 실증주의자 에른스트 마흐, 버트런드 러셀, 논리실증주의의 산실인 빈 학파의 거두 루돌프 카르나프 등은 사변적 형이상학을 공격했는데, 이러한 공격은 경험이나 논리적 동어반복을 초월한 지식의 획득가능성에 대해 회의주의적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나아가 러셀과 저명한 과학철학자카를 포퍼는 귀납원리가 정당화될 수 없음을 강조했으며, 특히 포퍼는 경험적 검증에 기초한 인식론을 비판했다. 언어분석의 창시자 프리츠 마우트너는 모든 언어가 언어 사용자에 상대적이며 결국 주관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내용의 회의주의를 제시했다. 진리를 이야기하는 모든 시도는 객관적 사태가 아니라 언어적 형식으로 귀결되므로 결국 실재에 대한 완전한 회의주의에 이를 수밖에 없다는 마우트너의 언어 회의주의는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에 표현된 견해와 어느 정도 비슷하다. R. H. Popkin 글 (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네로 (Nero Claudius Caesar Augustus Germanicus) [37.12.15~68.6.9]

본명은 Lucius Domitius Ahenobarbus이다. 황제 클라우디우스 1세의 둘째 아내인 소(小) 아그리피나비(妃)의 전 남편(가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클라우디우스의 양자가 되었다. 54년 어머니가 클라우디우스를 독살하고 근위병의 추대를 받아 제위에 올랐을 때 불과 16세였다. 치세의 초기 약 5년 동안은 근위장관 브루투스, 철학자이며 그의 스승인 세네카의 후원으로 해방노예의 중용, 감세, 원로원 존중, 매관매직의 폐단을 시정하는 등의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점차 잔인·포악한 성격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의붓동생 브리타니쿠스, 어머니, 비(妃) 옥타비아를 차례로 살해하였다. 특히 브루투스의 병사(病死)와 세네카의 은퇴는 그의 난행의 도를 심화시켜 치정(治政)은 파국으로 치닫게 되었다. 64년에는 로마시 대화재의 책임을 그리스도교도에게 전가시켜 대학살을 감행하였으며, 그 폐허 위에 화려한 황금궁전을 세웠다. 또 원로원의원 피소 일파의 음모가 발각되었을 때는 세네카 ·루카누스를 포함한 고위 측근을 처형하였다.

한편, 그는 그리스 문화에 심취한 예술의 애호자로도 알려져 있다. 그리스의 체육 ·예술콩쿠르를 로마에 도입하고 스스로 극장무대에 서기도 하였으며, 그리스를 여행하며 사대제전(四大祭典)을 개최하고 경기에도 출전하였다. 68년 갈리아에서 반란이 일어나 이것이 각지로 퍼지자, 히스파니아(에스파냐)의 총독 갈바가 로마시로 진군하였을 때 그를 미워한 원로원, 일반 민중뿐만 아니라 그의 근위군까지 이들에게 합세함으로써 네로는 로마시를 탈출, 자살하였다. 이로써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왕조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폭군의 전형으로서 네로의 전설이 형성되었는데, 재위시에는 오히려 그의 활달한 성격 때문에 인기 있는 황제로 알려져 죽은 뒤에도 제2 ·제3의 네로라고 일컫는 자가 나타났을 정도라고 한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작품의 아우트 라인

  1세기 중엽의 로마 제국(帝國). 퇴폐적이고 호사스러운 궁정 생활과 환락에 지친 폭군 네로는, 시적 흥취를 얻기 위하여 로마에 불을 지르고, 그 책임을 신흥종교인 그리스도교에 뒤집어 씌우고, 신자들의 대학살을 자행한다. 그러나 사랑의 가르침에 사는 그리스도 교도의 정신적인 우월(優越)까지는 정복하지 못하고, 곧 생명선 이라고도 할 수 있는 군부(軍部)로부터도 배신되어 끝내는 자결을 한다. 이러한 사이에, 강직한 무인(武人)인 부유한 청년 귀족 위니키우스는, 헬레니즘의 세계로부터 헤브라이즘, 즉 그리스도교로 귀의를 한다. 그 계기가 되는 것은, 인질로 잡혀온 이민족의 왕의 공주 리기아를 만난 데에서 비롯한다.


 처음에는 이기적인 육욕(肉慾)만의 사랑으로, 상대의 아름다운 몸을 폭력에 의하여서까지 자기의 독점물로 삼으려고 하였지만, 그리스도교 신자인 리기아에 인도되어 그리스도 교도들과 접촉을 깊이 함에 따라, 그 사랑은 차츰 정신적인 것으로 심화한다. 이리하여 두 사람의 사랑은 굳게 맺어지지만, 곧 리기아는 체포되어, 들소의 뿔에 묶이어 투기장으로 끌려간다. 그러나 충복(忠僕) 우르스스의 괴력(怪力)으로 구출되어, 기적 적으로 재생할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황폐한 로마를 떠나, 사랑과 평화의 새 생활을 영위하게 된다.

 

하이라이트

 봄의 꽃처럼, 오로라처럼 아름답고, 속으로는 뜨거운 정열을 간직하면서도 착하고 정숙한 여성 리기아는, 작자에 의하여 이상화된 히로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그녀가 현재의 폴란드 영(領)에 해당하는 북방의 민족 <슬라브족(族)> 출신이라는 설정을 보아도 이해가 갈 것 같다.


 리기아는 겉으로 보기에는 가냘프지만, 굳은 신앙을 통하여, 자기나 자기와 관련되는 타인을 옳은 길로 인도하지 않고서는 배기지 못하는 강인성을 지니고 있다. 군인답게 용맹하고, 근골이 완강한 미남 위니키우스는 리기아를 알게 됨으로서, 방탕한 생활에서 진실한 사랑의 세계로 눈을 뜨게 된다. 이 그리스도교적인 세계와 대조적인 헬레니즘의 세계를 대표하는 주인공으로는, 네로의 궁신(宮臣)이자 '사찌리콘'의 작자로 알려지고 있는 뻬트로니우스가 있다.

작자의 생애

 헨리크 셴켸비치(Henryk Sienkiewicz)폴랜드의 작가. 1846년, 러시아 점령하의 지방 소귀족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일찍 작가 생활에 들어가 사실적인 장단편을 많이 발표하였다. 사상적으로는 계속되는 반란(反亂)의 실패 후, 경제 기술의 진보와, 초계급적인 봉사를 통하여 내일의 희망을 찾고자 한 폴랜드 실증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의 본령(本領)은 역사 소설에 있으며, 17세기의 국난시대(國難時代)의 민족적 저항을 그린 '대홍수'를 정점으로 하는 3부작(1884~88년) 등은, 국민 문학으로서 널리 읽히고 있다. 1905년에 '쿠오 바디스'(1896년)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이작품도, 박해받는 정의(正義)의 궁극의 승리를 강조함으로써, 당시 독립을 상실하고 있었던 폴랜드의 동포를 격려하는 목적으로 쓰여진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제1차 대전 중, 난민의 구제 활동에 종사하다가 목전에 다가온 대망의 조국 도립의 날을 보지 못하고, 1916년 스위스에서 객사하였다.

명문구 낙수

 '쿠오 바디스 도미네 Quo Vadis Domine?(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사도 베드로가 그리스도교도 사냥으로 광폭하게 날뛰는 수라장의 로마를 피하여 길을 떠나가다가, 문득 예수의 모습을 보고, 놀라서 던진 말. '네가 백성을 버린다면 내가 가서 다시 십자가에 못박히겠다'라는 주의 대답에, 베드로는 즉시 로마로 되돌아가서 순교한다. 소설의 제목도 이 말에서 딴 것이다.


심화 자료

  네로를 다룬 문학 작품은, '쿠오 바디스'가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유명무명을 포함하여 100편 이상이나 쓰여져 있었다. 그 때문에, 이 소설의 발표당시는, 표절 문제로 한 때 떠들썩했지만, 어쨌든 경이적인 베스트 셀러가 된 것은 이 작품뿐이다. [출처 : 세계문학의 명작과 주인공 총해설에서 - 소봉파편- (일신사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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