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설(春雪)- 정지용
by 송화은율춘설(春雪) - 정지용
문 열자 선뜻!
먼 산이 이마에 차라
雨水節 들어
바로 초하로 아츰,
새삼스레 눈이 덮힌 뫼뿌리와
서늘옵고* 빛난
이마받이* 하다.
어름 글가고 바람
새로 따르거니
흰 옷고롬 절로
향긔롭어라.
웅숭거리고* 살어난 양이
아아 끔 같기에 설어라.
미나리 파릇한 새 순 돋고
옴짓 아니긔던*
고기입이 오믈거리는,
꽃 피기전 철아닌 눈에
핫옷* 벗고 도로 칩고 싶어라.
시집 「백록담(白鹿潭)」(1941編) 중에서 (발표지-문장 3호, 1939.4)
* 서늘옵고 : 서느렇고.
* 이마받이 : 이마를 부딪치는 짓.
* 웅숭그리고 : 궁상스럽게 몸을 옹그리고.
* 아니긔던 : 아니하던.
* 핫옷 : 솜을 두어서 지은 옷.
<감상의 길잡이>(1)
이 시는 정지용의 후기시 세계의 특징을 잘 보여 주는 작품으로 초기의 모더니즘 계열에서 벗어나서, 가톨릭에 몸담은 종교시의 통과 의례를 거친 뒤, 동양적 세계에서 노니는 관조적 서정을 절제된 이미지로 잘 표현하고 있다.
여전히 정지용다운 시어의 세련된 구사가 두드러지는데, 첫 연에서부터 ‘먼 산이 이마에 차라’와 같은 감각적 표현은 그의 장기(長技)를 유감없이 보여 주고 있는 부분이다. ‘서늘옵고 빛난 이마받이하다’, ‘흰 옷고름 절로 향기로워라’, ‘아아 꿈 같기에 설어라’와 같은 부분들도 그 세련된 언어의 맛을 잘 살리고 있는 표현이다.
밤새 춘설이 내려 서정적 자아는 문을 연다. 선뜻 느껴지는 싸늘한 기운, 절기는 이미 우수를 지났건만 추위가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봄기운이 자연 속에 피어나서 ‘얼음 금가고 바람 새로 따르거니’ 이러한 봄향기가 옷 속에까지 스며온다. 겨우내 웅크렸던 생명들이 ‘옹송그리고 살어난 양이’ 서러울 정도로 아름답다. 이러한 봄기운을 느끼기 위해서는 비록 추위가 남아 있더라도 핫옷을 벗어 던져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을 시인은 역설적으로 ‘핫옷 벗고 도로 춥고 싶어라’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직설법이 아닌 시적 표현의 아름다움을 유감없이 맛보게 된다.
신비로움과 설렘의 감정이 교차된 시선에서 일상적 삶에서조차 경이로움을 발견해 내는 시인의 따스함을 엿볼 수 있는 이 작품은 중견 시인의 작품이라 하기엔 믿기지 않을 만큼 풋풋함과 신선함이 배어 있지만, 작품의 의미가 자연에 대한 경탄에서 그치고 만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감상의 길잡이>(2)
봄추위를 한자말로는「춘한」(春寒)이라 하고 순수한 우리 토박이말로는「꽃샘」이라고 한다. 손이 안으로 굽어서가 아니다. 詩的인 감각으로 볼 때「춘한」과「꽃샘」은 분명 한 자리에 놓일 수 없는 차이가 있다.
「꽃샘」은 어감도 예쁘지만 꽃피는 봄을 샘내는 겨울의 표정까지 읽을 수가 있어 미소를 자아내게 한다. 계절까지도 이웃 친구처럼 의인화하며 살아왔던 한국인의 유별난 자연감각이 이 한 마디 말 속에 축약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한 꽃샘추위의 한국적 정서를 보다 시적인 세계로 끌어올린 것이 정지용의「春雪」이다. 그리고 지용은 그 시에서「문열자 선뜻! 먼 산이 이마에 차라」라는 불후의 명구를 남겼다.「시는 놀라움이다」라는 고전적인 그 정의가 이처럼 잘 들어맞는 시구도 드물 것이다. 우리는 반복되는 시간과 공간의 관습 속에서 살아간다. 그래서 굳은살이 박힌 일상적 삶의 벽이 무너질 때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 그「놀라움」이며「詩」이다.
「春雪」의 경우에는 그것이 아침에 문을 여는 순간 속에서 출현된다. 밤사이에 생각지도 않은 봄눈이 내린 것이다. 겨울에는 눈, 봄에는 꽃이라는 정해진 틀을 깨뜨리고 봄 속으로 겨울이 역류(逆流)하는 그 놀라움이「春雪」의 시적 출발점이다. 그것이 만약 겨울에 내린 눈이었다면「선뜻」이라는 말에 느낌표가 붙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그냥 차가움이 아니다. 당연히 아지랑이나 꽃이 피어날 줄 알았던 그런 철(시간), 그런 자리(공간)에 내린 눈이었기 때문에 그「선뜻」이란 감각어에는「놀라움」의 부호가 요구된다.
그리고 그러한「놀라움」은 손발의 시러움같은 일상의 추위와는 전혀 다른「이마」위의 차가움이 된다.「철 아닌 눈」에 덮인 그 山은 눈으로 바라보는 시각(視覺)의 산이 아니라 이마에 와 닿는 촉 각적(觸覺的)인 山이며, 이미 멀리 떨어져 있는 산이 아니라「이마받이」를 하는「서늘옵고 빛난」 거리가 소멸된 산이다. 그렇게 해서「면 산이 이마에 차라」의 그 절묘한 시구가 태어나게 된다.
「이마의 추위」는 단순한 눈 내린 山頂의 감각적 묘사에서 그치지 않고「춘설」과「꽃샘추위」 에 새로운 詩的 부가가치(附加價値)를 부여한다.「춘설이 분분하니 필동말동하여라」의 옛시조나 「春來不似春」같은 漢詩의 상투어들은 봄눈이나 꽃샘추위를 한결같이 봄의 방해자로서만 그려낸다. 그러한 외적인「손발의 추위」를 내면적인「이마의 추위」로 만들어 낸 이가 시인 지용인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꽃 피기전 철도 아닌 눈」은 어느 꽃보다도 더욱 봄을 봄답게 하고 그 감각과 의미를 새롭게, 그리고 진하게 하는 작용을 한다. 그래서 봄눈이 내린 산과「이마받이」를 한 지용은「흰 옷고름 절로 향긔롭어라」라고 노래한다.
꽃에서 봄향기를 맡는 사람은 시인이 아니다. 일상적 관습 속에서 기계적으로 봄을 맞이하는 사람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지용과 같은 詩人은 오히려 봄눈과 같은 겨울의 흔적을 통해 겨울옷의 옷고름에서 봄향기를 감지한다.「새삼스레……」라는 말에 잘 나타나 있듯이 지용에게는 시간을 되감아 그것을 새롭게 할 줄 아는 상상력이 있기 때문이다. 얼음이 금가고 파릇한 미나리의 새순이 돋고 물밑에서 꼼짝도 않던 고기입이 오물거리는 그 섬세한 봄의 생동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그리고 겨울과 봄의 그 미세한 차이를 알아내기 위해서는「이마의 추위」(꽃샘추위)가 필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활짝 열린 봄의 생명감은「웅숭거리고 살아온 겨울의 서러운 삶」을 통해서만 서로 감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봄눈이야말로 겨울과 봄을 동시에 바라볼 수 있게 하고, 체험할 수 있게 하고, 끝내는 새로운 시간과 공간의 그 차이화를 보여주는「놀라움」이 되는 것이다. 봄의 시는 꽃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지용의 상상력에 의하면 그것은 봄눈에 덮인 서늘한 뫼뿌리에 혹은 얼음이 녹아 금이 간 그 좁은 틈사이에 있다.
그래서 지용의 시「춘설」은「핫옷 벗고 도로 칩고 싶어라」로 끝나 있다. 달리는 자동차 속에 있을 때에는 우리가 달리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는 순간 우리의 몸은 앞으로 쏠리게 되고 그 충격을 통해 비로소 달리는 속도를 느낀다. 봄눈이 바로 봄의 브레이크와도 같은 작용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봄눈은 밤낮 내리는 것이 아니잖는가. 그러므로 꽃샘이나 붐눈을 통하지 않고서도 스스로 겨울의 흔적을 만들기 위해서는 두꺼운 솜옷을 벗고 도로 추위를 불러들여야 한다.「새삼스레」「철아닌」「도로」와 같은 일련의 詩語들이 환기시켜주는 것은 시간의「되감기」이다. 그래서「핫옷 벗고 다시 칩고 싶다」라고 말하는 지용의 逆說 속에서 우리는 스위스의 산 골짜구니 깊숙이 묻혀살던 ‘드퀸시’의 오두막집을 상상하면서 쓴 ‘보들레르’의 글 한 줄을 생각하게 한다.
시인의 방과 그 나날들을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문열기」이전의 닫혀져 있던 방, 핫옷을 입고 있는 좁은 공간이다. 그리고 그 시간은「雨水節 들어 바로 초하루 아침」이전, 지용 자신의 표현대로 하면「웅숭거리며」사는 겨울 시간이다. 바깥이 추울수록 그 내부의 공간은 한층더 아늑하고 따뜻하며 눈보라가 치는 긴 밤일수록 그 시간은 더욱 고요하고 천천히 흐른다.
이렇게 외부와 단절된 닫쳐진 공간과 그 시간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만이 문을 열고 바깥 세상과 「이마받이」를 하는 행복한 충격을 얻을 수가 있다. 그리고「핫옷 벗고 도로 칩고 싶다」는 지금껏 어느 누구도 느끼지도 말하지도 못하던 소원을 품게 된다. 그러한 소망의 원형이 바로「봄눈」이며「꽃샘추위」라는 것은 두 말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지용에 의해서 한국 시의 역사상 처음으로「봄의 훼방꾼」이었던「봄눈」과「꽃샘」이 봄을 발견하고 창조하는 詩學의 주인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이어령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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